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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해변지대] 평설문 - 남진원

작성자動友齎|작성시간25.12.12|조회수44 목록 댓글 0

 

 

 

 [해변지대] 평설문 

 

            인식의 용광로와 언어의 쇳물이 그려놓은 差延(différance)의 흔적들

                                                                                                                  남진원(문학평론가)        

 

   Ⅰ.

 

   소리보다 문자의 유효성을 갈파한 쟈크 데리다(Jacques Derrida)처럼 음악보다 문자를 중심으로 하는 해체주의 철학은 문학에서도 매우 현실접근적이고 감동의 매개물이다.

   신중심주의(神中心主義)사회에서 이성적 판단을 중심으로 한 사회 변화는 데카르트의 코기토 이래 새로운 인간중심주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였다. 그것은 오늘날 현대철학의 주요 이슈가 되고 있는 해체주의 전 단계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오늘날, 이성(理性)의 연속선상에서 지식과 기술은 제4차 산업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감성, 감정의 미세한 요동을 통찰하는 현대 문명은 현대문학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지나 구조주의내지 해체로의 접근을 이미 통과하고 있다. 인간인 를 존재의 중심으로 인식한 현대철학에서 인간의 삶을 긍정으로 노래한 철학자가 있다. 프랑스 현대 철학자, ‘질 들뢰즈이다. 그는 인간의 주어진 존재에 대한 긍정과 기쁨의 힘을 말한다. 반복과 차이성을 통한 긍정의 삶의 미학이다. 그것은 이미 2500년 전 석가가 제시한 유기적이고 물질적인 자아인 나의 부정에서 출발한 진정한 깨달음을 통해 인간회복내지 인간 영원정신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신 현대철학의 참신한 변화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주가 이렇게 존재하는 것은 그 우주가 계속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움직임의 주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에너지, 힘인 것이다. 그 힘은 사물의 존재로부터 있어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있어온 이래 사람들 사이에는 중력과 같은, 힘이 살아남아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이 힘이 어느 한 편으로 크게 기울어지면 그것은 그로인해 사태가 승전(承展)이나 변전(變轉) 내지는 반전(反轉)된다. 그것도 에너지에 의해서이다. 이렇듯 인간의 역사 또한 우주적 에너지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상호작용으로 긍정과 부정, 갈등과 협력 등의 부류가 생겨나지만 실상 그 본질은 같은 것이고 그 표현의 양상이 다를 뿐이다.

 

   이 세계가 좀 더 많은 인간의 이익을 위해 변화되어 가면 사람들은 그것을 역사의 발전이라고 말들을 한다. 그러나 역사는 반드시 그렇게 가는 것만은 아니다. 어느 때는 후퇴하기도 하고 부분적 또는 전체적으로 멸망하기도 하는 것이다.

 

   Ⅱ.

 

   이광식의 소설을 읽고 있으려니 현대 철학에 등장하는 역사와 시간, 반복과 차별, 혁신과 지체 등의 단어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등장한다.

 

   에너지가 힘의 원천이라고 한다면 그 주체는 사람이나 사물들이다. 사람이나 사물의 움직임에서 에너지가 분출되고 있다. 에너지의 분출은 변화를 동반한다.

 

   사람, 그렇다. 사람 이외의 생물과 무생물들의 움직임, 그것은 우주에서 꾸준히 주목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 결과, 생물과 무생물들이 이 우주 속에서 유영하듯 반복하는 가운데 변화해 가는 것을 보고 있다.

 

   현대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는 통시적 인식의 측면에서 그것들을 통찰하였고 <질 들뢰즈>는 반복을 통한 변화의 차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차이를 통한 반복을 긍정하기에 이른다.

 

   이광식의 소설 중 역사물을 대하면 문득 그 또한 하나의 우주라는 것을 보게 된다. 무엇으로 진행하는 것이 우주인가? 라는 물음은 인간은 무엇으로, 어떻게 사는가?’ 라는 문제와 근접해 있다. 그것은 삶의 다양한 방법으로 분해되기도 하고 예술의 여러 모양들로 쪼개지고 나누어졌다. 쪼개지고 나누어진 것들은 다시 근접성에 따라 꾸러미를 형성한다.

 

   근접성에 따라 존재와 비존재, 생성과 소멸의 꾸러미들이 확인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작가나 예술가는 매우 낯설고, 더러는 하찮은 것 같은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도 머리를 썩이느라 고심하기도 한다.

 

   작가 이광식은 이번에 상재한 소설집에 다섯 뭉치 역사의 시간 꾸러미들과 그 안에 사람 꾸러미를 건져 올려놓았다. 다섯 편의 역사소설이 그것들이다. 이 책에는 현대소설도 6편 묶여져 있다. 그 작품들은 작가가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이미 20여 년 전에 쓴 작품들이라고 하였다.

 

   요 근래에 쓴 작품들은 다섯 편의 역사물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역사물을 쓴 이유를 밝혔다. ‘작품내용이 현실에서 역사로 옮겨 간 것은 문학론의 새로움 때문이라기보다 나이 혹은 세월 때문이라고 .’

   미래에 벌어질 비판이나 칭찬과 같은, 불순물들에 대해 적어도 몇 발자국은 점잖게 물러나 미리 그물망을 쳐놓고 앉아있는 셈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일단, 그렇다 치고

 

   나는 이 역사물에 대해 상당한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

 

   소설적 인식은 다분히 상상적 범주의 인식을 깔고 들어간다. 이광식은 5편의 역사소설을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인간 내면의 가치에 대한 고민을 서슴지 않는다. , 자아와 타아적 입장에서 본 이익적인 것들과 반 이익적인 것들과의 충돌 내지 화해 또는 변전의 모습들이 스며있기도 한 모습들이다.

 

   전통과 확장이라는 개념이 여기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들이라면 나는 이 소설들의 고전성이 현대의 확장성을 그 요소에 숨겨놓은 것임도 지적할 수 있었다. 다섯 편의 역사물은 어느 정도 이런 징후를 이곳저곳에 드러내 보이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다섯 편의 역사물 강밀(强密) - 허봉(許篈)’ 등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 보고자 한다.

 

   각설하고 작가는 어째 현실에 틈을 두고 역사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는가. 도대체 역사적 사실을 축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오늘의 현실 내지는 이야기를 역사적 이미지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붕당이라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흘러온 조선의 역사가 아니던가. 이광식은 조선 역사의 한 허리를 뚝 잘라내어 살과 뼈 사이로 흐르는 피와 물을 떨구어내고 있다.

 

   사실, 다섯 편의 역사물은 한 편의 긴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시대의 흐름이 선조에서부터 광해군에 이르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허균의 생각이 매우 기이하게 음악의 울림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그 후속의 이야기가 또 언젠가는 나올 것이라는 기대도 깔려 있음을 알았다.

 

   강밀(强密)한 치의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빽빽함을 뜻하니 허봉의 강직한 면을 우회적으로 그려놓은 말인 같다. 이름 또한 대나무를 가리키는 ()’이니 그 정신이 굳세고 강건할 수밖에 없을 듯 싶다. 그의 이름에서부터 그의 귀양과 죽음을 예견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겉으로 보기에는 허봉 보다는 이율곡에 대한 내용이 더 중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율곡을 부상시킨 저변에는 허봉의 강직한 면과 혁신이 숨겨져 있다. 혁신은 새로움에 대한 열망을 간직한 변화이다.

   그렇다. ‘혁신이다. 가죽으로 만든 제품을 말할 때는 피혁(皮革)이라고 한다. <주례(周禮)>에는 秋斂皮, 冬斂革라는 말이 있다. 가을에는 피()를 거두고 겨울에는 혁()을 거둔다는 말이다. ‘은 모두 가죽을 뜻하지만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짐승의 가죽을 벗긴 것을 ()’라 하면 혁()은 짐승의 벗긴 가죽에서 털을 모두 없앤 것을 말한다. 즉 혁()은 무두질하여 다시 만든 가죽이므로 그 모습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 있는 것이다. 주역에서는 ()’괘가 있는데 택화혁(澤火革)괘이다. 못의 밑에 불이 앉은 형상이므로 서로 상극의 형상이고 뒤집어지는 변화를 함유한다.

서양에서는 19세기와 20세기 죠셉 슘페터(Schumpeter Joseph)가 부르짖었던 창조적 파괴의 혁신과도 연결성을 갖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역사물을 읽으려면 먼저 조선시대 정치상황이 그려진다. 당시의 동인은 개혁적인 생각으로 정치 참여를 하려던 부류이고 이에 비해 서인은 개혁보다는 점진적 발전 내지는 온건주의를 표방하고 나선다. 허봉 역시 강직한 인물로 율곡의 사퇴를 주장하였다. 그런 허봉의 성격은 강밀하였다. 이광식은 그를 간접화법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허봉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본디 방정 강직하고 상쾌 통달하며 자신을 지킴이 매우 확고하여 어떤 일에 있어 옳다고 판단되면 흔들리지 않고 견지하여 비록 천만 사람이 휘둘러도 바꿀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평했다.]

   이런 성격과 동인의 개혁적 성향은 나중에는 선조의 미움을 받아 몰락의 과정을 밟는데 허봉도 이 중에 한 사람이다.

소설 속에서 뿐 아니라 역사 속에서도 허봉은 동인의 구성원으로 유배를 갔다가 유배에서 풀려난 후 죽음을 맞는다. 혁신 또는 개혁의 실패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 다른 개혁의 반복을 내포하고 있다.

 

   프랑스 현대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반복의 중요성을 시사하였다. 반복에서 오는 차이를 발견한 그는 차별적 결과를 보고 새로운 인식에 접근하였다. 그것은 반복을 긍정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반복은 긍정 뿐만 아니라 부정까지도 긍정하게 된다. 반복의 긍정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예를 들면 인간들이 가장 흔하게 반복하는 것이 숨쉬기이다. 즉 호흡을 하는 것이다. 이런 반복이 자연스럽지 못하면 우리는 그것을 호흡곤란이라고 부른다. 또 어느 한쪽에만 호흡이 치우치면 생명 현상은 끊어진다.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호흡, 이것은 모든 동물들이 하는 생명의 방법이다. 이 호흡을 날마다 반복하지만 오염된 공기 속에서 하면 죽음으로 가게 되고 청정한 공기 속에서 하면 병든 몸도 치유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차이에 해당하는 작은 하나의 예이다.

   정치적 활동 역시 끊임없는 반복적으로 하는 호흡 행동과 같은 것이다. 혁신 또는 반복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변화의 흐름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도 어찌 보면 거대한 하나의 문학적 세계를 닮았다. 그것은 시대의 흐름을 새롭게 이끌어가고 싶은 창조의 즐거움을 찾는 창조적 파괴의 일군인 변혁의 주도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광식은 소설,강밀 허봉에서 변혁의 표징을 들추어내며 시대의 반복, 상황의 반복을 확인하는 속에 동인과 서인의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하고 싶은 말을 인물을 통해 대신하고 있다.

 

   소설, 접속(接續)-난설헌(蘭雪軒)에 오면 권필과 허균의 대화에서 정여립의 인물을 그리고 있다.

 

   권필은 동인의 좌장인 정철의 문인으로 형식에 매이는 것을 싫어하고 자유분방한 삶을 살다간 인물이다. ‘궁류시를 지어 필화사건으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허균과 같은 해에 태어난 권필이 허균에게 말한다.

   [정여립은 개인적 불만을 민중을 이용해 풀어버리려는 매우 수준 낮은 작태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라고 하였다. 이에 허균이 대답한다.

   [ 관권이 부패하고 계급적 차별적인 세상에 대한 공분의 입장으로서 시작된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면에서는 그러하다고 동조한다. 그러나 탁월한 지도자라면 누구나 천하를 맡을 수 있다는 독특한 주장에 으르러 정여립의 활동을 저 맹자의 역성혁명 사상의 실천의 한 국면으로 봐야 한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천민이 아니라도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대부 정여립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숭모하고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고 말한다.

 

   허균의 생각으로 말하고 있는 작가는 그 의식의 저변에 매우 중요한 관념이 자리하고 있다.

 

   사회 변화는 헤겔의 말처럼 일부에서는 정, , 합이라는 변증법적으로 이어가기도 하겠지만, 항상 반복되는 일상의 삶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틈 사이에서 차별화된 것의 발견으로 새로움을 꿈꾸게 된다. 이를 문학적으로 보면 그것은 창조적 파괴를 동반하는 문학적 이노베이션(innovation)인 것이다.

 

   소설, 점유(占有)-중시(重試)를 보면 사물이나 생각이 정신에 흡입되어 문학적 이노베이션(innovation)이 좀 더 명료화된 것을 읽을 수 있다.

   중시(重試)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당하관 이하의 문무관들에게 10년에 한번 씩 승진할 수 있는 시험이다. 여기에서 합격하면 성적에 따라 품계를 당상관까지 올려주었다. 허균은 이 중시를 보고 정9품 검열에서 정6품 예조좌랑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다음은 이 소설 속에 드러나는 허균의 생각이다.

   [그랬으므로 심액은 물론, 그해225일에 별전(別殿)에 들어가 임금을 같이 뵈옵는 영광을 입은 이유홍까지 허균을 따돌리며 무시하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허균은 언젠가 또 다시 그들을 혼내 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허균은 생각했다.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 나는 이런 일에 만족할 수 없다. 나는 오늘의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려 한다.]

 

   [ 그러면서 허균은 석가의 믿음과는 달리 아마도 세계는 끊임없는 변화와 그 반대인 고착화 사이의 투쟁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것의 무한 반복이 우주요 세계요 인생이란 생각이 옳다고 스스로에게 주장해 보기도 했다. 변화와 고착화 중 하나를 택일 하라면 허균은 서슴지 않고 변화를 택할 것이었다. 변화를 위해 고착화에 반란을 하기 위해 허균은 인생을 가차 없이 써야 한다고 믿었다. ]

 

   이런 면에서 허균의 입을 빌려 본다면 개혁의 의지가 강하게 나타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설, 주체화(主體化)-대화(對話)에서는 광해와 허균의 대화가 주요 모습으로 나온다.

 

   [ 희정당을 물러나 상곡으로 돌아오는 허균은 마음이 오히려 공허해짐을 느꼈다. 이게 무엇인가? 그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세상사는 내게 무슨 뜻을 갖는가? 언제까지나 이렇게 위로 눈을 돌리고 좌우를 살피며 근근이 생애를 이어가야 하나. 교산 허균은 이재영을 만나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

 

   허균은 광해군과의 대면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위와 같은 생각을 한다. 여기서도 허균의 삶에 대한 반문과 새로움을 향한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허균의 이런 생각은 왕이 아닌 한 인간 개체에 대한 존재를 향한 의심이고 물음이다. 의심을 품고 생각하는 그 자체는 실체가 없는 것이고 혼란스럽기까지 하지만 생각하고 의심하는 그 실체는 란 분명한 존재가 있다. 그러기에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프랑스 철학가 데카르트의 실존 철학에 닿아 있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가치는 의식의 궤적을 따라 진행하고 자의식에 대한 출구를 마련하였다.

 

   소설 범일국사에서도 이런 면모를 찾을 수 있다.

   이광식은 범일국사란 인물을 통해 변화또는 혁신이란 아포리즘을 선언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소설 속에서 보면 중앙의 강력한 지원을 받던 교종이었던 대가람 낙산사가 불탄다. 그 자리엔 선종의 낙산사가 세워졌다. 또한 범일은 사굴산파를 개창하고 구산선문의 한 종지인 선종의 도량 굴산사를 세웠다.

 

   쟈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프랑스 현대철학자로 해체의 의미를 심도 있게 파헤쳤다.

   서동욱이 쓴생활속의 철학(2011)에 쟈크 데리다(Jacques Derrida)해체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쟈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문자론에 대해 깊은 탐구를 하였다. 그가 연구한 그라마톨로지(문자론:Grammatologie)는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이다.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에서 오히려 소리보다 뒤늦게 출현한 문자언어가 더 근본적이라는 것이 데리다의 사고이다. 음성언어를 중시하는 서구적 사유 안에 은밀하게 내장된 문자의 논리를 꺼내놓았던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가장 감동적인 것은 야생의 순수함인 소리를 통해 느낀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감동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이 문자라고 하였다. 데리다는 이런 점을 비판하였다.

 

   역사물이 아닌 이광식의 현대소설 해변지대는 바다의 기원성이 파도소리나 울음보다는 여성의 그라마톨로지에 의해 해체되는 모습을 그려내었다.

   바다는 물의 원형을 갖고 있다. 바다는 그래서 생명의 원천이며 여성이고 또한 어머니다. 그런 바닷가에서 한 젊은 여인이 어느 봄날 한 공군 조종사와의 만남으로 사랑에 빠진다. 공군조종사는 이후 바다에 비행기가 곤두박질침으로써 바다에서 생을 마감한다. 여인은 소설속 주요인물인 재욱의 어머니이고 공군 조종사는 아버지 고 대위이다. 고 대위는 형님이 바닷속에 자신을 매몰했듯이, 고 대위의 비행기도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은가루를 뿌린 듯 수천 알갱이로 반짝이는 바다를 내려다 볼 때마다 어찔한 현기증을 느끼던 고 대위는 그날 따라 돌연 형님의 따뜻한 손길 같은 것이 그리워졌는지 몰랐다. 어딘가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 착각 속에 고 대위는 어찔한 기운에 감싸여 가고 말았다.]

   재욱의 어머니는 남편인 고 대위이 죽음으로, 바닷가를 헤매이며 진한 사랑의 체취를 온 몸으로 맡는다.

 

   또 다른 인물로 김영기와 성기연이 있다. 김영기는 하슬라민속동호인 회장이다. 재욱도 회원으로 속해있다. 그들은 민속 탐구를 위해 삼척 바닷가의 해신당을 찾는다. 해신당에는 해랑신의 전설이 전해온다. 미역을 따던 처녀가 파도에 휩쌓여 죽은 후로 변고가 생기자, 원혼을 달래주는 방법으로 남근을 새끼줄 사이에 끼워 신당에 달아놓았다.

 

   이 글에 등장하는 성기연의 행동은 자못 의미가 있다.

   ‘성기연이 재욱의 감색 점퍼를 다정히 바라본다.’라는 대목이다. 또 성기연은 민속답사를 끝내면서 헤어질 재욱에게 다음번에 만날 때에도 그 옷을 입고 오시면 좋겠다고 한다.

성기연이 처음 사랑을 나눈 사람은 공군 장교였다. 그와 헤어진 후에 늘 성기연은 공군장교의 담청색 점퍼에서 성욕과 사랑을 느꼈던 것이다. 성기연을 호감있게 본 것도 담청색 옷이었고 그와의 사랑을 나눈 곳도 담청색을 닮은 바닷가의 호텔에서였다.

 

   쟈크 데리다가 말한 그라마톨로지를 떠올리는 대목이다. 루소에게는 바랑부인이라는 애인이 있었다. 그러나 강렬한 애욕은 그녀가 없을 때다. 직접 그녀의 달콤한 목소리를 듣는 대신 목소리의 흔적이나 그녀와 잠을 자던 침대에서 더 큰 성적 충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쟈크 데리다는 이것을 가리켜서 성욕이나 사랑도 기원적인 현장의 소리보다는 후발적 행동인 흔적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다시 해변지대의 일부를 보자. 장소는 강릉의 카페 <다랑> 안이고 벽에는 게르니카 그림이 걸려있는 벽면 아랫니다. 성기연이 자신을 버리려는 공군 군인에게 물컵을 던진 후이다.

 

    [ “당신은 도대체 어떤 여자요?” 혼자 앉아 있는 성기연에 다가가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을 나는 모르겠어요. 절 어쩌지 마시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주세요. 당신은 지금 감 점퍼를 입고 있지 않잖아요.” 재욱은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영기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여자가 이상해.” “그 여자는 공군만 보면 미쳐.” “정말 그렇군.”]

 

   쟈크 데리다는 현전의 행동인 목소리 보다는 후발적 행동인 소리의 흔적 내지 문자에 의존하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남자인 루소가 바랑부인의 흔적에 더 성욕을 재촉했던 것에 비해 이광식의 해변지대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남자에 대한 애욕을 사람보다는 제복 내지는 색깔에서 더 강렬한 욕구를 드러내고 있다.

성기연의 사고와 행동은 데리다의 해체적 철학에 상당히 근접해 있는 후발적 행동들이며 데리다가 말하는 대리행동내지 차연의 논리들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광식은 성(sex)의 해체를 소설 속에서 형상화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에서 또 하나 특기할 수 있는 점은 조화로운 원형의식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대 잉카 제국이나 부족국가들이 태양신이나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인신(人身)을 제물로 바치는 게 허다하였다. 그러나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해신당 설화에서는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 성기(性器)라는 목각의 구형물을 깎아 사용했다는 점이다.

또한 해신당의 여신과 남근, 그리고 바다와 여인은 모두 천신 중심이 아니라 인간이 중심인 인신(人神)사상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인신(人神)사상은 소설 해변지대의 한 상징이라 할 수 있고 데카르트 이후 근대철학 형성에서 인간의 존재와 인식론에 접근하고 있는 정신의 곧은 원형을 추출해 낸 성과라 보여진다.

 

   소설 해변지대에서 또 하나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인권의 존중 내지 사랑에 대한 미의식이다. 카페 <다랑>에서의 이야기 진행은 일정한 공간 속에서 전개되는데 그곳이 바로 피카소가 그린 그림 게르니카가 걸려있는 곳이다.

카페의 주인 허광달의 입을 통해 게르니카와 피카소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뱉어져 나온다. 나치군인들의 무차별 폭격으로 게르니카에서 죄없는 민간이 살상이 대량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피카소는 이에 격분하여 대형 화면에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그림의 내용에는 불에 타는 집, 시체를 안고 울부짖는 여인, 부러진 칼을 쥔채 쓰러진 병사, 몸뚱아리가 떨어져 뒹구는 시신들 등의 모습이 담겨 있다. 드라마 속에서 등장하는 간접광고처럼 게르니카는 은연중에 말없는 말을 전하는 것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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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식 작가의 소설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니 문득 이광식 소설가를 뵌 때가 떠오른다.

   학교로는 같은 강릉고등학교 동문이고 내겐 까마득히 높은 4년 선배님이다. 학교 동문으로 시인들은 많이 있어도 소설가가 매우 희소하다. 학교의 동문 후배로 보면 이분의 소설은 더욱 금과옥조 같은 작품이다.

 

   소설가 이광식, 내가 처음으로 이광식이란 이름 석자를 들은 건 구영주 시인으로부터였다. 정선군 관내 학교에 근무할 당시, 나는 1981년 이후 강릉에 문학 관계로 내려올 일이 있었다.

강릉의 문학 모임에서 구영주 시인을 만났다. 구영주 시인은 1979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요정이 옵니다로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 이듬해 나는 월간문학 신인상에 시조가 당선되었다. 그 후 구영주 시인을 만났는데 그때는 김찬윤 시인이 구영주 시인과 자주 만났다. 나도 구영주 시인을 만나다보니 자연스레 김찬윤 시인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구영주 시인의 입에서 이광식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전해 들었다. 당시 이광식 소설가는 태백 어느 곳에서 학교 교사로 있다고 하였다. 매우 열정적이고 활발하게 문학 활동을 한다고 하여 나는 매우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그때 한 번 뵈었으면 하는 생각을 속으로 하였다.

   그 후 이광식 소설가는 강릉으로 내려오시게 되었고 강릉에서 오죽문학 동인회를 결성하여 독서토론회를 자주 연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중앙의 원로 중진 작가들을 초청하여 문학 이야기를 듣고 책을 읽으며 읽은 책에 대한 토론이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 후에 나는 교직을 그만 두고 커피 전문점을 운영하며 글을 썼고 이광식 소설가는 지역 신문의 논설을 쓰고 계셨다. 당시 지역신문에 게재한 글을 스크랩하여 내게 보여주시며 매우 보람에 차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원도민일보 논설위원으로 가신다는 말을 듣고 참으로 잘 됐다고 축하하였다. 이광식 소설가는 내가 대학가 골목에서 경영하는 커피전문점에 찾아와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 후 한 동안 만남의 기회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광식 소설가는 논설위원이기에 춘천으로 거처를 옮겼고 나는 대학 강의와 문학 창작 활동에 전념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광식 소설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도민일보사에서 두어 번, 그리고 강릉에서는 단오독후감 심사하느라 두어 번 도민일보 영동 본부에서 만났다. 그리고나서 거의 20여년이 지난 후 관동문학회 자리에서 만났다. 그는 회장으로 관동문학 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이광식 소설가는 관동문학을 맡으면서 획기적인 일을 하였다. 그것은 작고문인에 대한 문학적 조명이었다. 작고 문인 세미나를 지속적으로 열었고 그 내용을 책으로 묶어 강릉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작고 문인들의 작품과 업적을 정리해놓았던 것이다. 그 벅차고 힘든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보고 이 일에 많은 문인들이 찬사와 박수를 보냈다. 나 또한 그의 새로움을 여는 문학적 행로에 큰 박수와 희망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6년 강릉문인협회 회장을 1년 동안 맡으면서도 10년의 일을 해야 할 일을 해놓았다. 주요한 일을 보면, 김동명문학관 인문학 아카데미 개최, ‘문학 인류를 구하다라는 제목으로 문학사상 선양 문학 캠프를 하면서 신달자, 고형렬, 윤후명 작가를 초청하여 문학의 새 지평을 여는데 골몰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초당 난설헌 생가 뜰에서는 신봉승 시문학제 토크 콘서트를 개최하는 등 새로운 일들을 기획하여 문학의 영역을 확장하는데 진력하였다. 또 거대한 역사적인 사업, 강릉문학관 건립을 기획 추진하여 그야말로 강릉에서 문학의 새로운 면모로 쇄신과 변혁을 주도한 장본인이었다.

 

   이광식의 이런 문학에 대한 변혁과 개혁의 꿈꾸기는 자기 확장력이며 동시에 문학의 확장력이다. 이 확장력은 문학의 현장에서 실천적 치열함으로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그런 실천의지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작가의 숙명 같은 것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정리해 보건대, 앞에서도 기술하였듯이 이광식의 문학은 소설 작품 속에서도, 작품 밖에서도 해체라는 시대의 철학적 기반위에서 문자로, 더러는 행동으로 일구어가는 혁신의 순수함 그것이었다. 지금까지를 다 묶어 이를 한 문장으로 이어본다면 인식의 용광로와 언어적 쇳물이 그려놓은, 데리다가 말한 차연(差延différance)의 흔적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광식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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