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믿음과 사명
본문 : 눅 14장
참 믿음과 사명은 어떤 것인가? 이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약속되어 있다.
예수님은 율법사와 바리새인에게 말씀하시기를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냐?”고 물었다. 그들이 잠잠하므로 고창병자(蠱脹病者)를 고쳐 보내고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이라 하여 끌어내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셨다(눅 14:1-6).
또 요한복음 5장에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일을 했다 하여 핍박을 받을 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시고, “아들이 아버지가 하시는 것을 보고 아들도 그와 같이 한다.”고 하셨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더욱 화가 나서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 이는 안식일을 범하는 것뿐 아니라 자기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자기(예수)의 친아버지라고 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 또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심판권을 예수(자기)에게 맡기셨다고 하였으니, 이는 심판하는 권세가 예수님께 있음을 알린 것이었다. 또 말씀하시기를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하나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다.
위의 사실을 바탕으로 유대인들·바리새인들과 예수님과의 다른 점에 대해 살펴본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기 안에 계셨으므로 아담 때로부터 그 당시까지의 역사적 사건을 알고 있었고,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은 과거(죄)와 현재의 자기들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그것이다. 이들은 지구촌에서 자기들만이 정통이고 의인이고 선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으로 알고 있었고, 이들의 조상 때로부터 죄의 종이며 죄인 곧 마귀 안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과거 역사와 그리고 4천 년 간의 역사가 기록된 성경에 대해 너무나 무식했고, 오직 모세 율법적 안식일만 알고 있었으며, 안식일에 예배드리는 것을 신앙의 전부로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솔로몬 때부터 이방 신을 섬김으로 이방이 되었고, 하나님이 자기들에게서 떠나신 것을 알지 못하며, 오직 모세 율법만 믿고 구약의 선지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으므로, 예언도 예수님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알 것이다. 이들은 오직 율법만 고집하였으니, 구약 성경의 지식은 없다 할 것이다(호 4:6).
선민 범죄로 인해 하나님은 안식하지 못하시고 다시 회복의 역사와 재창조의 일을 하셨기에,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므로 나도 일한다.”고 하셨으나, 그들은 자기들이 믿고 있는 모세 율법의 안식밖에는 아는 것이 없어 다툼이 있게 된 것이다.
만일 아담의 범죄가 없었다면, 가나안의 아비 함의 범죄가 없었다면, 솔로몬의 범죄가 없었다면, 예수님이 오실 이유도 없고, 재창조를 할 필요도, 안식일을 또다시 다른 날로 정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또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구약 선지자들에게 약속하신 예언을 다 이루셨다(요 19:30). 그리고 신약을 예언하셨다. 지금은 예언하신 지 약 2천 년이 되었다. 오늘날 그 복음이 땅 끝 우리 나라에까지 전파되었으므로 약속대로 신약이 이루어진다. 초림 때 구약이 이루어져도 깨닫지 못했던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같이, 오늘날 신약을 이룬다 할지라도 신약 성경의 뜻을 알지 못하므로 한기총이 깨닫겠는가?
돈과 교만과 높아지는 권세와 정통만을 주장하고, 일제 시대에 이방 신(일본 신)에게 절하고 찬양한 것이 솔로몬이 이방 신에게 절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 똑같지 않은가? 이래도 정통인가? 이는 예수님 초림 때 자기들의 어두운 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예수님의 빛 곧 진리로 나아오지 않고 권위만 내세워 예수님을 이단이라 배척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 자기 속에 있는 악의 신이 자기 마음을 요동시켜 마음에 분쟁을 일으켜서 자기 마음이 악의 뜻 안으로 쫓겨 들어감으로 문제를 야기시키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주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일을 망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일이 예수님을 십자가 지게 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일을 아시고, 예수님을 만민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로 내어주신 것이었다.
참 믿음은 듣고 보고 깨달음에서 나며, 사명은 받은 바 일을 다하는 것이다. 은혜에 대한 보답보다 사명을 저버리고 자기를 높이는 것은 교만이고, 주께 대적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청함을 받으면 상석(上席)에 앉지 말고 말석(末席)에 앉으라고 하셨다(눅 14:7-14). 낮아지라는 말씀이었다. 또 잔치를 베풀면 부(富)한 사람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청하라 하시고, 부한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청함을 받아도 사양하며 “나는 밭을 샀기 때문에 못 간다.”,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사서 못 간다.”, 또 “나는 장가들었으니 못 간다.” 한다고 했다. 그래서 가난한 자, 병신, 소경, 저는 자들을 길가, 산울가에서 데려다가 자리를 채우라고 하셨다(눅 14:15-24).
가난한 자들은 어떤 자들이며, 부한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말 안 해도 알 줄 믿고 해석은 하지 않겠다.
다음은 예수님의 제자 될 자격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 때 예수께서 돌이키어 이르시기를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는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다(눅 14:25-27). 이것이 참으로 믿는 자이며, 자기 사명을 다한 자이다.
또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기를 “망대(望臺)를 세우기 위해 기초를 놓았으나 완성하지 못하면 비난을 받게 된다.”고 하셨다. 이를 다시 빙자하여 말씀하시기를 “소금이 좋은 것일지라도 그 맛을 잃으면 버려져 밟힌다.”고 하셨다(눅 14:28-35). 기초(기초석)는 12지파이다. 12개의 기초를 세웠으나 이 위에 집을 완성시키지 못하면 비난거리가 되고, 맛을 잃은 소금같이 버림이 되어 사람들에게 밟히게 된다. 이런 사실로 볼 때, 신약에 약속한 하나님의 새 나라 12지파의 기초석이 이미 섰으니, 남은 것은 건물(성전)이다. 완성해야 하지 않겠는가? 보고만 있어야 하겠는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목숨을 다해 망대(새 예루살렘 성전)를 세워야 할 것이다. 비웃음거리와 버림받은 소금이 되어야 하겠는가?
자신의 신앙의 가치관을 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이를 위해 뛰지도 않고 다른 문제를 내세워 말썽거리를 만드는 것은, 주의 뜻과는 상관없는 행위가 된다. 일심(一心) 단결해서 목적을 이루는 데 총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믿는 자와 껍데기 믿음과, 사명을 위해 일하는 자와 사명을 무시하고 자의적 행위를 하는 자를 주께서 왜 모르시겠는가? 그러므로 참으로 믿음의 사명자가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항시 순교자들을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은 순교 후에도 영으로 죽은 영들에게 가서 구원의 일을 하셨다(벧전 3, 4장 참고).
우리도 함께 일하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