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자유의 삶 : 장자 이야기
김 교 빈
성천아카데미 고전강좌 교수
호서대 철학과 교수
제멋대로 노는 이야기
'북쪽 바다에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있는데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그 물고기가 변해서 붕鵬이란 새가 된다. 붕의 등도 넓이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날개를 펴면 웅장하기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고 날갯짓을 할 때면 물살이 3천리나 튄다. 9만리를 곧장 올라가서 남쪽 바다를 향해 날아가는데 여섯 달을 날아간 뒤에야 한 번 쉰다.'
이 이야기는 {장자} 첫째 편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우화이다. 이 우화에서 장자는 본래 눈에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물고기 알을 가리키는 글자인 '곤'을 엄청나게 큰 물고기의 이름으로 삼았다. 작은 것을 가리키는 글자가 어떻게 갑자기 큰 것을 가리키는 글자가 될 수 있을까? 그뿐인가. 물고기가 어떻게 새가 되며 그 날갯짓에 무슨 물살이 3천리나 튄단 말인가? 더구나 곧장 위로 9만리를 올라간 다음 6개월을 쉬지않고 날아간 뒤에야 한 번 쉰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이 편의 이름인 '소'·'요'·'유' 모두 논다는 뜻이다. 어떻게 노는 것이 가장 잘 노는 것일까? 제멋대로 노는 것, 마음대로 노는 것이 가장 잘 노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자유롭게 노는 것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것이다. 작은 것과 큰 것의 구분, 이미 어떤 것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규정된 사물의 이름, 물고기와 새라는 구분, 넓이, 거리, 시간, 공간에 얽매여서는 참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장자는 이러한 세속의 모든 구속을 벗어난 참 자유를 추구한 사람이었으며, 붕새 우화는 장자가 추구한 그같은 참 자유의 상징이다.
장자의 이름은 주周이며, 2300년전 전국시대의 혼란 속에 약소국 송나라에서 태어났다. 사마천은 초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 장자를 모셔가려 했을 때 "당신 나라에 신주로 모셔둔 신령스런 거북이 있지요? 그 거북은 죽어서 영원히 신주처럼 모셔지는 것을 바랐겠소, 아니면 제가 살던 물에서 자유롭게 삶을 즐기고 싶었겠소? 나는 진흙탕에서 꼬리를 흔들며 자유로이 살겠소"라며 거절했다고 썼다.
장자가 남긴 10만자로 된 {장자}의 풍부한 우화 속에 장자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사상이 담겨 있다. 장자는 평생토록 성공을 바라며 애쓰는 인간, 지친 몸을 끌면서 가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인간, 얕은 지혜를 부리며 살아가는 어리석은 인간, 죽으면 없어질 신체에 얽매인 인간, 물욕의 노예가 되어 명예나 감각적인 것을 탐닉하는 인간들에 대해 그러한 삶과 다른 자유로운 삶의 모습을 제시했던 것이다.
만물은 같다
장자의 철학은 선악을 분명하게 구분짓는 유가의 입장과 다르다. 이런 것은 구속일 뿐이며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드는 착고이다. 따라서 장자는 가치판단을 버리고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서 풀어 헤치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것이 만물제등萬物齊等의 철학이다. 만물제등이란 절대평등을 뜻하며 {장자} 둘째 편 [제물론]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물고기를 잡으러 갈 때는 물고기 잡는 도구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 일이 끝나면 투망이나 통발은 창고에 넣어둘 뿐이다. 이처럼 만물은 환경이나 조건이 달라지면 그에 대한 평가도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는 하나의 획일화된 기준을 두지 않았다. 엄청난 미인이 물고기나 새들에게 가까이 가면 물고기나 새들이 놀라서 달아난다. 그렇다면 누가 참다운 아름다움을 아는 것인가? 사람은 나무에 매달려 자거나 진흙탕 속에서 잘 수 없지만 원숭이는 나무에 매달려 자고 미꾸라지는 진흙탕 속에서 잔다. 그렇다면 누가 편안한 잠자리를 아는 것인가? 결국 이런 판단은 인간이 만든 것에 불과하다.
장자는 부인이 죽었을 때 시체를 깔고앉아 항아리를 두들기며 노래했다. 마침 조문하러 온 친구 혜시가 그 꼴을 보고 놀라자, 장자는 "나도 처음엔 슬펐다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슬퍼할 일이 아니더구만. 집사람이 태어나기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간 것 뿐인데 슬퍼할 까닭이 없지 않겠는가?"라고 답하였다. 장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장자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죽거든 들에 버리라고 하였다. 깜짝 놀란 제자들이 "아닙니다. 좋은 땅에 잘 묻어드리렵니다"라고 하자, "땅에 묻으면 굼뱅이나 벌레가 파먹고, 들에 버리면 날짐승과 길짐승이 뜯어 먹을테지. 들에 버리면 하늘과 땅이 내 관이고, 해와 달과 별이 내 관 속에 들어 있는 장식품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같은 우화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장자}에는 턱이 배꼽 아래까지 오고 어깨가 이마보다 높아서 온 몸이 뒤틀린 '지리소'라는 사람이 나온다. 누구든 그를 '쓸모 없다'고 하지만 지리소는 '쓸모 있는' 사람들이 바삐 쓰이다가 제명에 못죽는 것과 달리 전쟁이나 성 쌓는 일에도 끌려나가지 않으며, 나라에서 구호품을 줄 때면 빼놓지 않고 받아먹으면서 제 명대로 살다가 죽었다. 이와 비슷한 우화로 가죽나무 이야기도 있다. 이 나무는 옹이가 하도 많아서 목재로 쓸 수가 없으며, 지독한 냄새 때문에 땔감으로도 쓰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지만 바로 그 때문에 아이들도 나무에 기어오르지 않고 노인들도 그 그늘에 앉지 않아서 제 명대로 살았다.
우리는 사실 '쓸모 있는 것'만을 찾는다. 그러나 쓸모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한 쓸모인지를 생각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란 없다. 거름은 더럽지만 그 거름을 먹고 자란 곡식을 우리가 먹는다. 또 죽은 사람을 들에 버리면 길짐승이나 날짐승이 먹고 땅에 묻으면 굼벵이나 벌레가 파먹지만, 그 벌레를 더 큰 놈이 먹고 머지않아 다시 사람이 먹는다는 점에서는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만물은 똑같다.
장자는 모든 것이 같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만물을 상대화시켰다. 어느 날 호랑나비가 되어 훨훨 나는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깬 장자는 고민에 빠졌다. '내가 본래 호랑나비인데 지금 장자가 된 꿈을 꾸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본래 장자인데 호랑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가.' 이 우화는 꿈꿀 때와 깨어있을 때가 상대적이라고 한다. 도둑이 무서워 튼튼한 금고에 큰 자물쇠를 채워도 더 큰 도둑은 금고째 훔쳐 가면서 혹시 자물쇠가 약해서 물건이 쏟아지면 어쩌나 걱정하는 법이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 서면 절대적인 것이란 없다.
어느날 제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선생님, 도가 어디 있나요?" "도란 어디든 없는 곳이 없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쇠파리 속에 있네." "어찌 그렇게 지저분한 데 있습니까?" "잡초 속에 있네." "농담이시겠지요?" "깨진 기왓장 속에 있네." "말씀이 너무 지나치신데요?" "똥오줌 속에 있네." 이것은 결국 도가 만물 속에 있다는 말이다. 쇠파리든, 잡초든, 깨진 기왓장이든, 똥오줌이든 다 변한다. 도란 바로 그런 변화일 뿐이며, 따라서 만물에는 모두 도가 들어있는 셈이다.
도를 따르는 자연스러운 삶
장자는 도를 따르는 일은 자연을 따르는 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어느 소잡는 사람이 문혜군 앞에서 시범을 보였다. 그가 칼을 쓱쓱 썩썩 놀릴 때마다 살점과 뼈, 힘줄이 툭툭 갈라져 나갔다. 그의 솜씨는 하나의 예술이었다. 한참 넋을 잃고 보던 문혜군이 탄성을 질렀다. "어허, 어떻게 기술이 저럴 수 있을까!" 그러자 그 백정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기술이라니요. 이건 도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온통 소만 보였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나자 소가 통째로 보이는 경지를 넘어섰고, 이제는 마음으로 볼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직 결대로 칼을 움직이면서 살과 뼈, 뼈와 뼈 사이의 빈 곳에 칼을 넣을 뿐입니다. 솜씨 좋은 소잡이도 가끔씩 엉겨 붙은 살을 가르기 때문에 1년에 한 번 칼을 바꿉니다. 그보다 못한 소잡이는 자꾸 뼈를 건드리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칼을 바꿉니다. 그러나 제 칼은 19년 동안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어도 금방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문혜군은 "훌륭하도다. 이제야 비로소 양생의 비결을 알았다"고 말했다.
도를 따르면 자연과 하나 된 자유를 누리지만 그렇지 못하면 무뎌진 칼날처럼 질곡 속에서 자신을 소모시킬 뿐이다. 도를 따르는 삶은 가치판단에 얽매이지 않고 나와 남을 구분짓지 않으며 만물과 하나가 된다. 장자의 사상은 그 뒤 문학과 예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중국에서 선불교가 발전하는데 큰 바탕이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사회비판적인 측면이 농민봉기를 통해 혁명정신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불로장생과 신선세계를 꿈꾸는 신비주의적 사상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장자}에는 그림자가 싫어서 도망가는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빨리 도망가면 그림자도 빨리 따라오기 때문에 그는 더 빨리 달아나려고만 한다. 그러나 장자는 그 사람에게 '당신이 나무 그늘에서 쉬면 그림자도 따라오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현대를 사는 우리도 장자가 보면 그림자가 싫어 도망가는 모습은 아닐까? 인류가 더 편한 삶을 위해 한없는 개발과 발전을 추구해 왔지만 그 결과는 환경오염과 엄청난 쓰레기일 뿐이다. 더 많은 발전이 더 많은 문제를 만드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무 아래서 쉬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
金敎斌 - 성균관대 철학박사, 호서대 인문과학연구소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 등 역임
김 교 빈
성천아카데미 고전강좌 교수
호서대 철학과 교수
제멋대로 노는 이야기
'북쪽 바다에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있는데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그 물고기가 변해서 붕鵬이란 새가 된다. 붕의 등도 넓이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날개를 펴면 웅장하기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고 날갯짓을 할 때면 물살이 3천리나 튄다. 9만리를 곧장 올라가서 남쪽 바다를 향해 날아가는데 여섯 달을 날아간 뒤에야 한 번 쉰다.'
이 이야기는 {장자} 첫째 편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우화이다. 이 우화에서 장자는 본래 눈에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물고기 알을 가리키는 글자인 '곤'을 엄청나게 큰 물고기의 이름으로 삼았다. 작은 것을 가리키는 글자가 어떻게 갑자기 큰 것을 가리키는 글자가 될 수 있을까? 그뿐인가. 물고기가 어떻게 새가 되며 그 날갯짓에 무슨 물살이 3천리나 튄단 말인가? 더구나 곧장 위로 9만리를 올라간 다음 6개월을 쉬지않고 날아간 뒤에야 한 번 쉰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이 편의 이름인 '소'·'요'·'유' 모두 논다는 뜻이다. 어떻게 노는 것이 가장 잘 노는 것일까? 제멋대로 노는 것, 마음대로 노는 것이 가장 잘 노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자유롭게 노는 것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것이다. 작은 것과 큰 것의 구분, 이미 어떤 것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규정된 사물의 이름, 물고기와 새라는 구분, 넓이, 거리, 시간, 공간에 얽매여서는 참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장자는 이러한 세속의 모든 구속을 벗어난 참 자유를 추구한 사람이었으며, 붕새 우화는 장자가 추구한 그같은 참 자유의 상징이다.
장자의 이름은 주周이며, 2300년전 전국시대의 혼란 속에 약소국 송나라에서 태어났다. 사마천은 초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 장자를 모셔가려 했을 때 "당신 나라에 신주로 모셔둔 신령스런 거북이 있지요? 그 거북은 죽어서 영원히 신주처럼 모셔지는 것을 바랐겠소, 아니면 제가 살던 물에서 자유롭게 삶을 즐기고 싶었겠소? 나는 진흙탕에서 꼬리를 흔들며 자유로이 살겠소"라며 거절했다고 썼다.
장자가 남긴 10만자로 된 {장자}의 풍부한 우화 속에 장자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사상이 담겨 있다. 장자는 평생토록 성공을 바라며 애쓰는 인간, 지친 몸을 끌면서 가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인간, 얕은 지혜를 부리며 살아가는 어리석은 인간, 죽으면 없어질 신체에 얽매인 인간, 물욕의 노예가 되어 명예나 감각적인 것을 탐닉하는 인간들에 대해 그러한 삶과 다른 자유로운 삶의 모습을 제시했던 것이다.
만물은 같다
장자의 철학은 선악을 분명하게 구분짓는 유가의 입장과 다르다. 이런 것은 구속일 뿐이며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드는 착고이다. 따라서 장자는 가치판단을 버리고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서 풀어 헤치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것이 만물제등萬物齊等의 철학이다. 만물제등이란 절대평등을 뜻하며 {장자} 둘째 편 [제물론]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물고기를 잡으러 갈 때는 물고기 잡는 도구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 일이 끝나면 투망이나 통발은 창고에 넣어둘 뿐이다. 이처럼 만물은 환경이나 조건이 달라지면 그에 대한 평가도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는 하나의 획일화된 기준을 두지 않았다. 엄청난 미인이 물고기나 새들에게 가까이 가면 물고기나 새들이 놀라서 달아난다. 그렇다면 누가 참다운 아름다움을 아는 것인가? 사람은 나무에 매달려 자거나 진흙탕 속에서 잘 수 없지만 원숭이는 나무에 매달려 자고 미꾸라지는 진흙탕 속에서 잔다. 그렇다면 누가 편안한 잠자리를 아는 것인가? 결국 이런 판단은 인간이 만든 것에 불과하다.
장자는 부인이 죽었을 때 시체를 깔고앉아 항아리를 두들기며 노래했다. 마침 조문하러 온 친구 혜시가 그 꼴을 보고 놀라자, 장자는 "나도 처음엔 슬펐다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슬퍼할 일이 아니더구만. 집사람이 태어나기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간 것 뿐인데 슬퍼할 까닭이 없지 않겠는가?"라고 답하였다. 장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장자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죽거든 들에 버리라고 하였다. 깜짝 놀란 제자들이 "아닙니다. 좋은 땅에 잘 묻어드리렵니다"라고 하자, "땅에 묻으면 굼뱅이나 벌레가 파먹고, 들에 버리면 날짐승과 길짐승이 뜯어 먹을테지. 들에 버리면 하늘과 땅이 내 관이고, 해와 달과 별이 내 관 속에 들어 있는 장식품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같은 우화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장자}에는 턱이 배꼽 아래까지 오고 어깨가 이마보다 높아서 온 몸이 뒤틀린 '지리소'라는 사람이 나온다. 누구든 그를 '쓸모 없다'고 하지만 지리소는 '쓸모 있는' 사람들이 바삐 쓰이다가 제명에 못죽는 것과 달리 전쟁이나 성 쌓는 일에도 끌려나가지 않으며, 나라에서 구호품을 줄 때면 빼놓지 않고 받아먹으면서 제 명대로 살다가 죽었다. 이와 비슷한 우화로 가죽나무 이야기도 있다. 이 나무는 옹이가 하도 많아서 목재로 쓸 수가 없으며, 지독한 냄새 때문에 땔감으로도 쓰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지만 바로 그 때문에 아이들도 나무에 기어오르지 않고 노인들도 그 그늘에 앉지 않아서 제 명대로 살았다.
우리는 사실 '쓸모 있는 것'만을 찾는다. 그러나 쓸모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한 쓸모인지를 생각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란 없다. 거름은 더럽지만 그 거름을 먹고 자란 곡식을 우리가 먹는다. 또 죽은 사람을 들에 버리면 길짐승이나 날짐승이 먹고 땅에 묻으면 굼벵이나 벌레가 파먹지만, 그 벌레를 더 큰 놈이 먹고 머지않아 다시 사람이 먹는다는 점에서는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만물은 똑같다.
장자는 모든 것이 같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만물을 상대화시켰다. 어느 날 호랑나비가 되어 훨훨 나는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깬 장자는 고민에 빠졌다. '내가 본래 호랑나비인데 지금 장자가 된 꿈을 꾸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본래 장자인데 호랑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가.' 이 우화는 꿈꿀 때와 깨어있을 때가 상대적이라고 한다. 도둑이 무서워 튼튼한 금고에 큰 자물쇠를 채워도 더 큰 도둑은 금고째 훔쳐 가면서 혹시 자물쇠가 약해서 물건이 쏟아지면 어쩌나 걱정하는 법이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 서면 절대적인 것이란 없다.
어느날 제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선생님, 도가 어디 있나요?" "도란 어디든 없는 곳이 없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쇠파리 속에 있네." "어찌 그렇게 지저분한 데 있습니까?" "잡초 속에 있네." "농담이시겠지요?" "깨진 기왓장 속에 있네." "말씀이 너무 지나치신데요?" "똥오줌 속에 있네." 이것은 결국 도가 만물 속에 있다는 말이다. 쇠파리든, 잡초든, 깨진 기왓장이든, 똥오줌이든 다 변한다. 도란 바로 그런 변화일 뿐이며, 따라서 만물에는 모두 도가 들어있는 셈이다.
도를 따르는 자연스러운 삶
장자는 도를 따르는 일은 자연을 따르는 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어느 소잡는 사람이 문혜군 앞에서 시범을 보였다. 그가 칼을 쓱쓱 썩썩 놀릴 때마다 살점과 뼈, 힘줄이 툭툭 갈라져 나갔다. 그의 솜씨는 하나의 예술이었다. 한참 넋을 잃고 보던 문혜군이 탄성을 질렀다. "어허, 어떻게 기술이 저럴 수 있을까!" 그러자 그 백정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기술이라니요. 이건 도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온통 소만 보였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나자 소가 통째로 보이는 경지를 넘어섰고, 이제는 마음으로 볼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직 결대로 칼을 움직이면서 살과 뼈, 뼈와 뼈 사이의 빈 곳에 칼을 넣을 뿐입니다. 솜씨 좋은 소잡이도 가끔씩 엉겨 붙은 살을 가르기 때문에 1년에 한 번 칼을 바꿉니다. 그보다 못한 소잡이는 자꾸 뼈를 건드리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칼을 바꿉니다. 그러나 제 칼은 19년 동안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어도 금방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문혜군은 "훌륭하도다. 이제야 비로소 양생의 비결을 알았다"고 말했다.
도를 따르면 자연과 하나 된 자유를 누리지만 그렇지 못하면 무뎌진 칼날처럼 질곡 속에서 자신을 소모시킬 뿐이다. 도를 따르는 삶은 가치판단에 얽매이지 않고 나와 남을 구분짓지 않으며 만물과 하나가 된다. 장자의 사상은 그 뒤 문학과 예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중국에서 선불교가 발전하는데 큰 바탕이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사회비판적인 측면이 농민봉기를 통해 혁명정신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불로장생과 신선세계를 꿈꾸는 신비주의적 사상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장자}에는 그림자가 싫어서 도망가는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빨리 도망가면 그림자도 빨리 따라오기 때문에 그는 더 빨리 달아나려고만 한다. 그러나 장자는 그 사람에게 '당신이 나무 그늘에서 쉬면 그림자도 따라오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현대를 사는 우리도 장자가 보면 그림자가 싫어 도망가는 모습은 아닐까? 인류가 더 편한 삶을 위해 한없는 개발과 발전을 추구해 왔지만 그 결과는 환경오염과 엄청난 쓰레기일 뿐이다. 더 많은 발전이 더 많은 문제를 만드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무 아래서 쉬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
金敎斌 - 성균관대 철학박사, 호서대 인문과학연구소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 등 역임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