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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노자의 道는 결코 허무주의가 될 수 없습니다

작성자노자선|작성시간02.04.28|조회수248 목록 댓글 0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독일어 원본으로 직접 읽겠다고 독일어 독본을 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이 지났구만요
니체의 생각을 잠깐 읽죠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극단적으로 부정하면서도
「교회를 조직한 예수의 제자들을 좋아하지 않지만
여전히 예수는 좋아한다」고 얘기합니다
또한 간디는 「예수는 좋아하지만 기독교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기독교의 배타성을 지적하였고
나 역시 가식이 없고 꾸밈이 없는
순수한 사람 예수만 좋아 합니다

이진우 교수가 적은 글은 개인적인 생각의 견해일 뿐
노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노자는 도서관 관장으로서 엄청난 공부와 명상을 하던
어느 날 하늘로 부터 황홀한 세계가 다가 왔으니

‘항상 없는 것으로 있는 도(1)’는
없다고 말하자니 바람과 공기같이 있고
있다고 하려니 ‘눈에 보이지도 귀로들을 수도
손으로 만져지지 않는 것(14)’이다
보이는 세계의 관점에서는
개미가 사람을 사람으로 볼 수 없고
겨우 발바닥 정도로 인식(認識)될 뿐이듯이
사람 또한 도(道)를 볼 수 없으므로
우선 눈을 들어 볼 수 있는 인식의 범위 내에서
깊고 먼 하늘을 주재하는 신(神)인
상제(上帝)나 하느님 등으로 표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인(聖人) 노자께서 감지한 이러한 세계가
어느 날 하늘에서 비밀스럽게 내려왔을 때
생전(生前)에 보지도 듣지도 못하던 것으로
‘나는 그것의 이름을 모르겠고(25)’
조상으로부터 전해들은 상제도 아니며
그러한 ‘상제보다 먼저 있은 것(4)’으로서
‘그것은 모양 없는 모양이고
사물이 없는 형상이라 하며
이것을 일러 황홀하여(14)’어리둥절하다고 하셨다

노자 14장「시위무상지상(是謂無狀之狀) 무물지상(無物之象)
시위황홀(是謂恍忽)」
1장「항무(恒無)」
4장「상제지선(象帝之先)」
25장「오미지기명(吾未知其名)」

이런 세게를 알고 사람이 자신을 수양하여(54장)
오직 도를 따르므로써 얻은 덕(德)을 지녀
세상에 덕을 베풀라는 것이
어찌 허무주의가 돨 수 있다는 말인가요

도는 항상 이름이 없는 것이라(32장 도항무명 道恒無名)
그 이름을 알지 못하니(25장 오미지기명 吾未知其名)
부득이 글자로 표현하자니 도라(25장 자지왈도 字之曰道)
억지로 이름지으면 크다고나 할까(25장 강위지명왈대 强爲之명曰大)

도는 이렇게 어떤 이름으로 매여지지않는 근원이며
천지만물을 운용하게 하는 원천인 것입니다


현 즉 시 도 (노자선)

세상에 나타난 현상(現象)은
곧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고(視之弗見)
귀에 들리지 않으며(聽之弗聞)
손으로 얻어지지 않는(博之弗得)
道에서비롯

道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니
그것이 곧
눈에 보이고(視之見)
귀에 들리며(聽之聞)
손으로 얻어지는(博之得)
나타남이라

나타난 모든 것은
근원인 道로 돌아가니
그것이 現則是道

道가 하늘과 땅을 낳아
투영(投影)한 세상이 나타나니
그것이 道則是現

道와 現은
둘이 한 몸이던 것이
세상에 같이 나타나서
이름을 달리한 것일 따름

道와 現이 세상에 함께 있어
눈에 보이는 작용이 現
눈에 보이지 않는 원리가 道요


우리 인생 또한 道로부터 태어나서
道와 더불어 生을 한껏 누리다가
道로 돌아가는 하늘의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
노자가 道를 보는 태도이니
노자의 뜻은 인생도 순환하는 것인데
훗날 도교를 만든 작자들이
삶을 잏회적으로 본 것은 그들의 착오이지
어찌 노자의 뜻으로 보겠는가
진리는 특정종교를 믿고 믿지 않고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사람은 누구나 영혼을 하늘로부터 부여받았으므로
이 세상에서의 인연이 다하면 하늘로 도로 돌아가는 것인데
하늘로 가는 길은 좁은 문으로서 자신들만이 믿음으로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사람을 미혹(迷惑)되게 하여
짧은 인생을 어리석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도로 돌아감 (노자선)

옛날 동방에 있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우리나라는
원시 그대로의 다듬지 않은 박(樸)을 닮아
깨끗하고 맑은 물의 성품을 지니고
자연(自然)에 순응(順應)하며
순박(淳朴)한 마음을 가진
백성이 살고 있었다

나무가 흙을 뚫고 나와
무성한 잎과 가지를 벌리다가
뿌리가 있는 흙으로 다시 돌아가듯
그들 또한 道로부터 태어나서
道와 더불어 生을 한껏 누리다가
道로 돌아가는 하늘의 이치를 터득하여
하늘이 道를 따르니 하느님이라
道가 하나를 낳았으니 하나님이라 부르며
결국 道가 낳은 하느님과 하나님을 알아
스스로 하늘의 백성임을 믿더라

하늘 우러러 부끄럽지 않는
양심(良心)을 닦아 기르고
무슨 일을 열심히 하여 성취하더라도
그 공을 자신이 잘한 일로 여기지 않고
하늘의 도움을 입어 이루었다고
겸손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

항상 道를 생각하며 살기에
그것이 생활 속에 스며들어와
그 말조차 잊고 지내는데
도로 돌아감이란 뜻을 자세히 보니
道로 돌아감을 일컫더라

※노자 16장『복귀기근(復歸其根)』
25장『천법도(天法道)』
42장『도생일(道生一)』


이런한 도의 원리를 그가 어찌 알겠습니까
지식은 있으나 밝은 지혜가 부족한
이진우 교수의 안타까움이 느껴집니다






--------------------- [원본 메세지] ---------------------
참을 수 '있는' 존재의 가벼움-니체와 노자

이진우(계명대 철학과)


1.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21기의 철학적 문제
"무거운 짐은 동시에 가장 격렬한 생명의 완성에 대한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의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날아가버려, 지상적 존재로부터 기껏해야 반쯤만 생생하고 그의 움직임은 자유롭다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조금 길게 인용한 이 말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주제이다.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에 관한 니체 사상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시종일관 무거움과 가벼움의 도착관계를 물고 늘어진다. 만약 무거움과 가벼움의 선택이 이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실존적 과제라고 한다면, 이 소설의 제목과 주제는 바로 우리의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 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그 제목은 다 알고 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그렇다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명제에 녹아 있는 우리의 시대정신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감성문화의 출현을 의미할 수도 있다. 걸음걸이와 옷매무새에서, 마스카라와 표정연출에서, 인터넷을 통한 관계맺음과 일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감성이 온통 세상을 뒤덮고 있다. 거피의 내용보다는 달콤한 거품과 은은한 향기 때문에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이탈리안 카푸치노처럼, 오늘날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데 이성보다는 감성이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감성문화는 결코 심각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보편적 중심을 인정하지 않는 까닭에 오히려 주변적이고, 우연적이고, 순간적인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사상가들이 종종 "전체성으로부터 다원성으로의 이행"으로 규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단지 철학의 무대에서만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미덕은 바로 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일상성을 예리하고 섬세하게 그려낸 데 있다. 일상은 반복을 의미하고, 반복은 가벼움을 산출한다. 역사적 사건이 아무리 위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반복은 그것을 참을 수 없는 희극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쿤데라가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에 관한 니체의 사상을 끌어들이는 지점은 바로 이곳이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것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쿤데라가 확인하고 있듯이 우리 인생의 매순간이 무한한 횟수로 반복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영원성에 못박힌 꼴이 될 것이다. 영원회귀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역설을 발견한다. 일상을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 반복이라고 하였는데, 영원한 회귀는 동시에 순간 순간에 과다한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다. 일상의 반복과 영원한 회귀는 다른 것인가? 밀란 쿤데라는 이 물음에 대한 직접적 답은 피한 채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관찰과 성찰을 계속한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것을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의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고 전제하면서, 쿤데라는 이렇게 묻는다. "그러나 묵직함은 진정 끔찍한 것이고, 가벼움은 아름다운 것일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실로 우연적 순간이 빚어내는 드라마이다. 프라하의 유명한 외과의사인 토마스가 테레사를 만난 것도 우연이고, 그가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피해 스위스로 갔다가 다시 프라하로 돌아간 것도 우연이고, 뛰어난 의사를 하루아침에 유리창 닦는 노동자로 만들어 놓은 글을 쓰게 된 것도 우연이고, 아무런 임무도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교통사고로 죽게되는 것도 우연이다. 우연의 삶을 살고 떠난 토마스에게 무엇이 남았을까? 쿤데라는 담담하게 대답한다. "비문하나... 그리고 그 다음도 또 계속될 것이다. 잊혀지기 전에 우리는 키치로 변할 것이다. 키치란 존재와 망각 사이에 있는 환승역이다."
쿤데라가 허무주의적 색채로 그려내고 있는 삶이 꼭 주인공 토마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연으로 점철된 삶은 우리 모두에 의해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바로 중심을 잃고 살아가는 우리의 문제인 것이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자율적 선택을 강요한다. 주인공 토마스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직면한다. "테레사와 함께 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혼자 사는 것이 나을까?" 이러한 결정의 순간마다 우연은 필연적으로 작용한다. 그럴 때마다 토마스는 자신의 계산과 합리적 판단보다는 자신의 욕구에 의지하면서 "그래야만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삶을 가볍게 만드는 것은 이처럼 어떤 필연도 용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적 우연이다.
우리는 삶을 계획하거나 반복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필연적으로 분출된다. 우리는 매순간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의 의미를 부여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희구해야만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우리의 삶은 일회적이고 순간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지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만 있는 것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쿤데라는 우리의 삶이 "초벌그림"은커녕 ― 초벌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밑그림인데 반해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 "완성작 없는 밑그림, 무용한 초벌그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리허설과 같은 우리의 인생이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이 물음이 상당히 허무주의적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의미의 부재를 확인할 뿐만 아니라 의미에 대한 동경마저 상실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수반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쿤데라는 니체가 20세기와 21세기의 시대정신으로 예견한 허무주의를 반복과 순간, 필연과 우연의 실마리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2. 허무주의의 평범화
니체는 한 세기 전에 이미 허무주의를 "모든 손님들 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손님"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렇다면 허무주의는 이제 현대인들에게 위협은커녕 아무런 문제도 되고 있지 않은 것인가? 허무주의는 대체로 절대적 가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을 의미한다. 지식의 무능력, 행위의 무익, 삶의 무의미는 결코 세속화된 현대사회에서만 인간의 실존조건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체로 현세적 삶을 초월하고자 하는 인간의 전제조건이기도 하였다. 예컨대 인간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으며, 인간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없으며, 인간의 삶은 유한하기 때문에 무상하다는 인식은 종교적 신앙의 출발점을 이룬다. 절대적 가치를 설정함으로써 일상적 삶에서 느끼는 공허함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종교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은 죽었다"는 극단적 명제로 대변되는 현대사회에서는 삶의 무의미는 어떻게 충족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우리가 더 이상 진리와 절대적 가치를 신뢰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삶의 무의미성"을 적극 수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이 신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삶과 사회를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할 수 있는 관점과 가능성을 부여한다. 그렇기 때문에 니체는 허무주의가 "가장 심각한 위기 중의 하나라고 믿으며, 인간의 가장 심오한 자기통찰의 순간이라고 믿는다." 만약 허무주의가 역사의 ― 니체의 관점에서 보면 서양의 ― 필연적 산물이라면, 우리가 허무주의를 얼마나 또 어떻게 견뎌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과제인 것이다.
현대인들은 더 이상 허무주의를 위험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허무주의에 대한 심각한 논의 자체가 희극적이 될 정도로 허무주의의 위험은 진부해졌다. 그것은 "절대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과 주장이 아무런 문화적 충격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치의 다양성으로 표출되고 있는 절대적 가치의 부재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절대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만이 유일한 문제로 남는다. 우연으로 점철된 일상의 반복은 어쩌면 허무주의의 도전에 대한 답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허무주의는 우리에게 정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인가? 그러나 절대적 가치의 탈가치화, 즉 세속화는 결과적으로 일상의 절대화를 가져온다. 만약 우리가 추구할 궁극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복되는 현재의 일상과 일상의 가치에 묶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일상의 가벼움이 정녕 아름다운 것일까?

3. 니체: 서양 형이상학의 파괴와 수동적 허무주의
니체는 허무주의를 단순한 문화적 현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 역사의 논리로 파악한다. 물론 허무주의는 문화적 현상으로서는 퇴락과 허약함의 징표이다. 그렇기 때문에 허무주의는 대체로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수동적 허무주의는 "절대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인식에 그친다. 물론 수동적 허무주의는 이제까지 타당한 것으로 여겨졌던 모든 가치에 대한 부정의 입장을 취한다. 신의 죽음, 주체의 죽음, 역사의 종언은 모두 수동적 허무주의를 규정하는 명제들이다.
그러나 니체는 이러한 수동적 허무주의가 바로 서양 역사의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명제를 "우리가 신을 죽였다"라는 명제로 대체한다. 우리가 인식할 수 없고 또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절대자인 신을 인식의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신은 결국 절대자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의 죽음의 주된 원인은 신에 관한 특정한 해석이 절대화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니체의 허무주의가 문화적 현상에 관한 단순한 서술을 넘어선다는 점을 간파할 수 있다.
니체는 무엇 때문에 허무주의에 관심을 기울이는가? 첫째, 허무주의는 삶과 세계에 대한 인간의 해석과 관련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허무주의는 (1) 기독교처럼 삶을 부정하는 세계해석, (2) 지배적인 해석의 붕괴로 말미암은 의미 있는 해석의 부재, (3) 모든 것이 거짓일 수 있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둘째, 허무주의는 약함, 퇴폐, 병듦과 관련이 있다. 니체는 건강과 병약함을 해석의 힘과 관련시킨다. 건강하다는 것은 삶과 권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해석의 힘을 의미한다면, 약함은 어떤 해석이 더 이상 삶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허무주의는 삶을 포괄하는 해석 과정에서 나타난 기능장애라고 할 수 있다. 셋째, 허무주의는 해석의 마비에서 기인하는 의미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서양 허무주의는 플라톤적-기독교적 세계해석이 더 이상 현대인의 삶을 증대시킬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진리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서양의 형이상학적 전제조건은 이제 타당하지 않은 것이다.
능동적 허무주의는 서양 형이상학의 붕괴를 새로운 삶의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해석의 전제조건으로 포용한다. 절대적 가치는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중심, 즉 무거움의 토대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중심이 상실된 시대에 살면서 여전히 중심을 동경한다면, 우리의 삶을 수반하는 수많은 우연적, 순간적, 주변적 사건들은 정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여겨질 것이다. 이에 반해 삶의 의미는 우리의 해석에 달려 있으며 또 해석은 우리의 관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은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포용한다면, 필연성이 전혀 결여된 것처럼 보이는 일상의 삶은 오히려 새로운 창조와 의미의 원천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능동적 허무주의는 이처럼 "참을 수 있는 존재의 가벼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니체는 "참된 세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믿음, 어떤 것을 진리로 간주하는 모든 행위가 필연적으로 거짓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허무주의의 극단적 형식이다" 라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연적이고, 주변적이고, 순간적인, 즉 깃털처럼 가벼운 우리의 삶에 의미의 무거움을 부여하는 것은 무엇인가?

4. 니체와 능동적 허무주의: 참을 수 '있는' 존재의 가벼움
니체에 의하면 인간의 창조 의지가 무력해질 때 비로소 고정된 것, 변하지 않는 것,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진리에의 의지가 발생한다. 간단히 말해 진리에의 의지는 무력한 권력의지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세계를 특정한 관점에서 보려는 것은 '아마'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서양 허무주의는 항상 수동적 허무주의와 능동적 허무주의가 겹쳐서 나타난다. 능동적 허무주의는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라고 주장할지라도, 서양철학의 맥락에서는 부정 없는 긍정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까지 부정된 모든 것에 대해 '예'라고 말하려는 시도"가 능동적 허무주의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노자의 허무주의는 부정과 긍정의 이원론은 해체한 이후에 가능한 초월적 허무주의가 아닐까? 노자의 허무주의는 인간의 눈에는 모순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 주변적인 것, 순간적인 것, 우연적인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중심, 영원, 필연을 전제할 때에만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있다"는 것(有)은 "없다"는 것(無)을 전제할 때에만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노자의 허무주의는 도를 유와 무를 포괄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이름 없는 것이 하늘과 땅의 처음(無名天地之始)라고 말한다. 노자의 허무주의는 결코 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무를 존재의 부정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유와 무가 갈라지기 이전의 자연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노자에게 자연은 바로 모순 자체이다. "무한히 크기 때문에 안가는 곳이 없고, 어디에나 가기 때문에 멀다". 서양 형이상학은 가능한 한 모순을 제거하는데 몰두하였다면, 동양 허무주의는 오히려 모순을 모순으로 인정하려고 하였다.
우리의 삶은 비교도 반복도 되지 않아 깃털처럼 가볍다. 그러나 아무런 중심도 없이 너무 가벼워지면 우리의 삶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반면, 모든 것이 하나의 원리를 향해 이루어진다면, 우리의 삶은 너무나 과다한 무게에 짓눌려 점차 붕괴될 것이다. 쿤데라는 영원회귀의 사상은 매수간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규정하면서, 우리의 삶이 가벼운 것은 일회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바로 반복될 수 없는 일회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거워질 수는 없는 것일까? 주변적인 것, 순간적인 것, 우연적인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우리의 삶을 긍정할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무(無)에서 출발하여 유(有)로 나아가는 동양 허무주의가 삶의 일회성으로부터 '윤리적' 원리를 도출하는 긍정적 허무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윤리는 항상 참과 거짓, 정당함과 부당함, 정의와 불의를 판단할 수 있는 중심과 가치를 전제한다. 중심과 가치를 전제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윤리적 기준을 설정할 수 있단 말인가. 영원회귀의 부정은 오히려 도덕적 도착을 야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처음부터 냉소적으로 허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밖에 없는 나의 삶에 윤리적 중심을 부여하는 것은 여전히 반복과 영원회귀의 가능성이다. 반복할 수 없는 너의 삶을 다시 한번 살기를 영원히 바랄 수 있도록 그렇게 산다면, 그것은 윤리적 삶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니체와 노자는 이 지점에서 만난다. 그것은 순간적인 삶이 영원히 반복될 수 있는 삶으로 고양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중심으로부터의 탈선", 즉 가벼움이 문화적 기호가 되어버린 현대사회에서 깃털처럼 가볍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하면서도 양보할 수 없는 자신만의 가치를 가지며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가치를 상대화하면서 동시에 우연을 견뎌낼 수 있는 가치를 가진다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극복을 요구한다. 그것은 노자가 말하는 것처럼 지지(知止)의 덕성일 수도 있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줄 알면 위태하지 않다. 그렇게 하면 장구할 것이다." 이것이 "무엇이 긍정적인가? 묵직한 것인가 혹은 가벼운 것인가?"라고 묻는 쿤데라의 물음에 대한 답이 될지는 모르겠다. "오직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한 모순이다."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출발하는 니체와 노자는 우리에게 참을 수 '있는' 존재의 가벼움을 요구하는 허무주의의 철학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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