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 친구 김정환님이 노자 5천언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담은 글입니다. 노자 5천언 중에 초반 3개 장의 중요성은 새삼 입에 담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이 글은 바로 그 3개 장에 대한 친구의 뜻이 담긴 글입니다. 제 친구가 다소 과격한 점이 있으나 한번 읽어보신다면 제 친구의 본뜻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나라 학문의 얕음이여
촌구석 백면서생으로 하여금 구린 입에 도를 담게 하는구나
일곱번 붓을 놓고 아홉번 탄식하며 이글을 쓰노라.
天下皆知 美之爲美 斯惡已
天下皆知 善之爲善 斯不善已
故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 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 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夫唯不居 是以不居
천하가 다 안다/ 美중에 爲美는/ 이것이 추한 것이라는 것을
천하가 다 안다/ 善중에 爲善은/ 이것이 善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성인은 爲하지 않고 言하지 않는다. 괜히 속보이므로.
또한 萬物(자연)은
무엇을 만들어내어도 자랑하지 않고 소유하려 하지 않으며,
무엇을 바라고 일을 하지 않고, 공이 있어도 내세우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일용할 양식을 만들어 내고 그 양식으로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큰 공이 있음을 天下가 모르지 않는다.
그럼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는 뭐냐고요?
天下皆知 有之爲有 斯無已
天下皆知 難之爲難 斯易已
天下皆知 前之爲前 斯後已
를 줄여 놓은 겁니다.
이 쉬운 말을 두고 자칭 천재라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싸움이 붙었습니다.
그리고....! 도가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천한 촌 것이 감히 도를 논하려 합니다.
주제넘은 글이지만 한 글자라도 도를 더럽힌 붓질이 있다면
이 목을 내 놓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천하의 천재 도올선생이 아줌마선생 경숙님('노자를 웃긴 남자'의 저자)에게 얼마나 억울하게 당했는지 낱낱이 밝혀보겠습니다.
제1장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邀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내가 한 천한 해석
도를 도라고 할 수는 있지만 꼭 도라고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붙이자면 이름을 붙일 수는 있지만 꼭 그 이름을 붙여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도는 태초부터 존재하는 것이지만 말로 표현되지 않으면 사람은 알아먹지를 못하므로 항상 인간은 말로 표현된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렇지만 표현되지 않은 것이던 표현된 것이던 그 모두 다 오묘한 진리를 가리키는 것인데 그 오묘한 진리 중에서도 오묘한 진리 즉 도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하므로 말주변 없는 내가 혹시 개떡같이 말하더라도 너희는 제발 찰떡같이 알아들을지니라.
경숙이 아줌마가 한 자칭 바른 해석
도를 도라고 할 수는 있지만 항상 도라고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붙이자면 이름을 붙일 수는 있지만 항상 그 이름을 붙여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천지의 시작이니 따질 수 없고
이름을 붙이면 만물의 모태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천지지시의 묘함을 보아야 하지만
이름을 붙인 후에야 그것의 요(실상계의 모습)를 파악할 수 있느니라
이 두 가지는 똑같은 것인데
다르게 보이는 것은 그 이름뿐이니
검기는 마찬가지여서
이것도 검고 저것도 검은 것이니
도는 모든 묘함이 나오는 문이니라
경숙이 아줌마에 의하면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라는 도올의 해석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지으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머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를 본다.
그런데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 이름만 달리 했을 뿐이다.
그 같은 것을 일컬어 가물타라고 한다.
가물코 또 가물토다.
모든 묘함이 이 문에서 나오지 않는가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여기서 可자에 대한 아줌마의 해석만큼은 탁월하다 못해 위대하기까지 하다.
이런걸 도올의 말대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나 할까?
도대체 왜 可자가 曰자로 해석되어 왔을까?
현대 중국어에서도 可자는 <가능하다, 적합하다>는 뜻으로 쓰이지 말하다라는 뜻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도를 도라고 할 수는 있지만 항상 도라고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붙이자면 이름을 붙일 수는 있지만 항상 그 이름을 붙여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얼마나 명쾌한 해석인가!
여기까지는 경숙이 아줌마에게 전적으로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아뿔사 이 다음부터 우리 경숙이 아줌마가 헷갈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이놈도 검고 저놈도 검다'는 황망스러운 말까지 내뱉는다.
적어도 이 可자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제외하고는 우리 위대한 경숙이 아줌마도 도올을 나무랄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나는 도올의 한문실력이 형편없음에 놀라고,
경숙이 아줌마의 용감함에 놀라서 딱 두 번 놀랐다.
경숙이 아줌마는 도올더러 환장기가 있다는데 경숙이 아줌마의 환장기도 도올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모든 사물은 우리가 알건 모르건 이미 존재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인식대상이 되어야만 비로소 인간에게 의미있는 무엇(Something)이 되며 인식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이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표현하기 위한 도구가 名(Name) 즉 그것을 부르는 이름인 것이다.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한송이 꽃에 불과했다.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자
그는 웃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김춘수 꽃)
그런데 앞에서 非常名이라고 노자가 분명히 밝혔듯이 이 名이라는 것은 꼭 名 즉 <이름>만이 아니다. 노자는 인간이 어떤 대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모든 수단을 이 名이라는 글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有名이라는 글자를 <이름이 있는 것: named thing>이라고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말로 표현된 것: naming>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이라는 것도 꼭 입으로 나오는 것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수화도 훌륭한 말의 구실을 하지 않는가)
(그리고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은 이름을 붙이고 말고를 선택할 만한 처지가 못 된다. 이름이 없는 것은 그 이름이 없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기 때문에 이름이 없는 것이고, 확실히든 어렴풋이든 인간이 알게 된 모든 것은 알게 되는 그 순간 최소한 <거시기: It>라는 지시대명사라도 붙는다.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어떠한 형식으로라도 이름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고 인간이 모르는 것은 절대로 이름이 붙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경숙이 아줌마처럼 <이름을 붙이고자 욕심을 낸다면 요를 볼것이고 욕심을 내지 않으면 묘를 볼 것이다> 하는 식의 말을 입에 담는다면 노자가 대성통곡을 할 것이다.)
어쨌건 이 名이라는 것은 어떤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有名萬物之母 - 有名은 萬物의 어머니다.
<萬物의 어머니>라 이 보다 더한 찬사가 있을까?
노자는 도구에 불과한 有名이라는 것에 극존칭을 썼다.
왜일까?
그것은 인간은 이 名이라는 도구를 통해서만 사물을 알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名이라는 인식도구가 없으면 사물을 인식할 수 없고 도구로써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같은 대상이라도 다른 모습으로 알 수도 있다는 말이다.
"道를 道라고 해 놓으면"으로 알아듣는 답답한 사람이 꼭 있는 것이다. 천하의 도올처럼!
그러니 이 名이라는 것이 중요할 수밖에!
노자는 표현의 중요성을 무서우리만큼 갈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도 사람인 이상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자면 말로써 표현해야 할 것이고 듣는 사람도 노자의 말을 통해서 노자의 사상을 이해할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던 노자로서는 그 인간의 언어라는 것이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 못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제일 첫마디로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내가 지금부터 도라는 것을 설명할 터인데 말주변이 부족하니
개떡같이 이야기 해도 너희는 찰떡같이 알아들어라.
제발!!!@@##?????
하고 신신당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보겠지만 노자는 도덕경에서 사용한 5천언 한 글자 한 글자에 대해서 비장하리 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사용하고 있다.
단 한 글자도 의미없이 쓴 글자가 없다.
그러면 이만큼이나 중요한 이름만 잘 파고들면 도를 이해할 수 있겠네?
이런 어린백성이 있을까봐 노자는 無名天地之始라는 단서를 붙여놓았다.
아무리 萬物之母라도 天地가 시작되기 전부터 있었을까?
즉 아무리 有名萬物之母라도 天地의 시작인 <無名의 다음 서열>인 것이다.
그러면 無名은 도대체 무었인가?
문자 그대로 <이름이 없는 것>이다.
앞에서 有名을 <표현된 것> 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면 無名은 < 표현되지 않은 것>쯤 되겠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것>이 무엇일까?
天地之始 즉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 전부터 존재하던 名의 실체다.
우리가 名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보려고 하는 바로 그 대상인 것이다.
노자가 道에 대해 道라는 名을 사용하든 돌이라는 名을 사용하든 그것은 길이나 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그 무엇을 설명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이 無名이다.
결국 아무리 有名이 중요하다고 해도 도저히 天地之始인 無名보다 중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호통재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인간인 이상 有名萬物之母의 굴레를 벗어날 용빼는 재주는 없다. 인간은 名 즉 <표현된 것>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는 숙명을 지닌 존재인 것이다.
(요즘은 노자가 생각지도 못했던 tv라는 도구가 명의 역할을 하려하고 있다)
그래서 이 다음에
常有欲以觀其邀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는 말이 나온다.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邀
(마지막 글자 요자를 邀로 쓰는 것을 정말 죄송하게 생각한다. 우리집 컴퓨터에 한글프로그램이 안 깔려 있어서 워드패드로 이글을 쓰는데 도무지 여기에 써야할 요자가 없어서 음만 같은 이 글자를 빌어 쓴다. 본래 여기 써야 할 글자는 구할 요자다)
여기서부터 우리 경숙이 아줌마는 그렇게 흉보던 도올의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에 버금가는 소리를 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문장은
인간은 名을 통해 표현된 것만 볼 수 있으므로 항상 그 名에만 집착한다
는 말이다.
이 문장을 경숙이 아줌마는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천지지시의 묘함을 보아야 하지만
이름을 붙인 후에야 그것의 요(실상계의 모습)를 파악할
수 있느니라>로 번역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는 사람?
이따위 요망스런 말을 해놓고도 입에 담지 못할
육두문자까지 동원해서 도올을 욕하고있다.
도대체 도올은 왜 입을 다물고 도망갔는가?
같잖아서였을까?
차라리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를 본다.>
라고 번역한 도올의 해석이 더 알아듣기는 쉽다.
경숙이 아줌마 말마따나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라서 탈이지....
故자는 <그러므로>라는 뜻으로 쓰이는 접속사다.
뭐가 그러므로인가?
앞문장을 그대로 받아서
<인간은 名을 통해 표현된 것만 볼 수 있으므로>이다
常자는 <항상>이라는 뜻.
無欲은 두 가지로 해석이 된다.
1.욕심이 없다.
2.욕심을 내지 않는다.
그 다음 以 - 이 以자가 모든 문제의 불씨이다.
이 以자는 <써 이> 자로 <~로써> 로 번역하는 어조사이다.
그런데 도대체, 도대체 왜, why, 爲甚碼(역시나 꼭 써야 될 마자가 없어서 碼를 쓴다. 본토 발음으로는 '웨이썬머'다)
이 以자를 無欲에 붙여서 읽는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以자는 앞에서부터 읽기도 하지만 뒤에서부터 읽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以夷制夷처럼.
여기에서 以를 뒤의 觀其妙에 붙여서 읽으면 以觀其妙
즉 <그 묘를 봄으로써>가 된다.
無欲과 붙여 읽으면
<그 묘를 봄으로써 욕심이 없고>가 된다.
<그 묘를 봄으로써 욕심이 없고>?
말이 좀 이상하지?
여기서 고등학교때 얼마나 국어교육이랑 한문교육을 똑바로 받았는 지가 판가름 난다.
<~써> 에는 두 가지 용법이 있다.
1.<~써>로 읽어서 <~를 가지고>
以夷制夷 -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한다.
(오랑캐를 가지고 오랑캐를 제압한다)
2.<~서>로 읽어서 <~한 처지에>
학생으로서 어떻게 그런 짓을?
나는 틀림없이 그렇게 배웠다.
의심스러우면 국어교육과나 한문교육과 교수님에게 확인해 봐라.
여기서 1번 용법을 채택해 보면
<그 묘를 보는 것을 가지고는 욕심이 없고>
즉 <그 묘를 보는데는 욕심이 없고>가 된다.
그러면 당연히 常有欲以觀其邀는 對句니까
<그 요를 보는데만 욕심이 있다>가 된다.
전체를 보면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邀
<인간은 名을 통해 표현된 것만 볼 수 있으므로
항상 그 묘를 보는데는 욕심이 없고 그 요를 보는 것에만 욕심이 있다>
어떤가 뭔가가 보이지 않는가?
그러면 妙와 邀만 남았는데 이게 과연 무엇인가?
솔직히 나는 그 뜻을 정확히 모르겠다.
다만 欲자는 욕심이라는 부정적 의미가 담긴 글자다.
그렇다면 無欲뒤의 觀其妙는 긍정적인 의미로 有欲뒤의 觀其邀는 부정적인 의미로 서로 비교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 전제하에 전체 문맥에 비추어 유추해보면 妙는 無名한 무엇을 말하는 것이고 邀는 有名한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경숙이 아줌마는 도올이 이 邀자를 <가장자리>로 읽은 것을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라고 했는 데 도올이 이거는 정확히 <그 妙>를 본 것 같다.
<인간은 名을 통해 표현된 것만 볼 수 있으므로
항상 그 妙를 보는데는 욕심이 없고 그 邀를 보는 것에만 욕심이 있다>
- 인간은 표현된 것만 볼 수 있으므로
항상 그 표현되지 않은 것은 보려하지 않고
그 표현된 껍데기만 보는 경향이 있다
도올같은 <천재>도 노자가 무엇 때문에 道라는 말을 꺼냈는지를 망각하고 道가 way를 뜻한다고 우겨대지 않는가!
이것이 지나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개를 '犬公', 강아지를 '犬公 자제분'이라 부른다고만 가르쳐 놓고 강아지 잡아오너라 하면 눈앞에 강아지 열 마리가 지나가도 그것이 강아지인지는 꿈에도 모르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래서 此兩者同 즉 <그게 그거다> 하는 말이 나온다.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妙 즉 無名과 邀 즉 有名은 하나는 이름이 붙어 있고 하나는 이름이 안 붙어 있어서 서로 다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것으로 똑같이 玄(오묘하고도 심오한 어떤 것)을 가르키는데 그 오묘하고도 심오한 것 중에서도 오묘하고 심오한 것이 중묘지문 즉 도이다.>
여기까지 오면 우리 경숙이 아줌마는 개 풀 뜯어먹다 못해 배앓이하는 소리까지 한다.
경숙이 아줌마
<이놈도 검고 저 놈도 검다>고요?
참 하늘이 새까맣게 보이고 도올선생 표현대로 가물가물해진다.
왜 이렇게 시커매졌는가?
끊어읽기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이게 잘못된 줄도 모르고 <아버지 가방에 들어간다>로 읽고는 지 멋대로 해석을 하고 넘어진거다.
(<자빠졌다>고 표현하고 싶지만 엄한 가풍을 생각해 차마 그러지 못함을 원통하게 생각함)
그러다 지가 봐도 말이 안 되겠으니 가물가물하다느니, 이놈도 검고 저 놈도 검다는 따위 요설을 내뱉고 넘어진거다.
노자께서 어머니같이 여기는 名에게 놈자를 붙였으니 노자의 어머니를 욕한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다.
빌어서 될런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노자 큰 선생님께 大罪를 빕니다.
두 사람 다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이렇게 끊어 읽었다.
나는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이렇게 끊어 읽는 것이 맞다고 본다.
도덕경은 전체가 對句로 이루어져 있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單句로 쓰인 문장은 없는 걸로
알고 있다.(혹시 있을까봐 걱정되네)
그런데 衆妙之門만 짝도 없이 외롭게 떨어져 있어야만 할
까닭이 없다. 독립문도 아닌데!
此兩者同
<이 둘은 같다>는 뜻이다.
<이 둘>이 무엇인가?
바로 앞 문장에 나왔던 妙와 邀를 가리키는 것이다.
出而異名
나는 여기서 또한번 경숙이 아줌마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出而異/名으로 끊어 읽은 것은 참으로 감탄할 만한 식견이다.
出자는 <날 출>이다. <나오다, 드러내다> 등으로 새긴다.
而자는 접속사로 <그래서, 그러나>등으로 새긴다.
<드러나서 다른 것은 이름이다>
즉 <다르게 보이는 것은 이름뿐이다>
더 쉽게 말해서 <이 둘이 다른 것은 하나는 이름이 붙어 있고 하나는 이름이 안 붙어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래서
此兩者同 出而異名
<妙와 邀는 하나는 이름이 붙어 있고 하나는 이름이 안 붙어 있어서 서로 다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것이다>
아니 妙나 邀나 같은 것이면 눈에 보이는 邀만 잘 봐도 충분히 道를 알 수 있다는 소린데 그러면 노자는 왜 사람들이 妙는 안보고 邀만 보려한다고 걱정하는 소리를 했을까?
자 여기 미국사람이 한 사람 있다.
이 사람은 중국에도 자주 드나들어서 한자도 웬만한 건 다 읽을 줄 안다.
이 사람이 남대문시장 쇼핑을 마치고 남대문 구경을 나섰는데
온종일 서울 시내를 다 돌아다니고도 결국 남대문 구경을 못했다고 푸념이 대단하다.
도대체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사람은 남대문을 남대문으로만 알았지 그 현판이 숭례문이라고 쓰여져 있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정작 남대문 처마 밑에 가서도 숭례문을 숭례문으로만 알았지 숭례문이 남대문인 지는 꿈에도 생각 못하고 돌아섰던 것이다.
노자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것이다.
죽은 노자가 다시 살아 돌아와서 아무리 알아듣도록 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어도 道를 道나 way라는 名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道를 道나 way라고만 알고 있는 도올같은 사람이 그것은 도가 아니다라고 말할까봐 '그것이 그것이다'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同謂之玄 즉 <그것이 그것이다 이놈아> 하며 절규하고 계신다. 노자께서.
同謂之玄
同 <같다>
謂 <이르다>
之 1. <갈 지>
2. <~의>
3. <~중,~가운데>
4. 대명사 <그, 이, 저>
玄 <가물 현>
謂는 동사다. 동사 뒤에 또 동사가 따라올 수는 없고,
동사 뒤에 조사가 올 리도 만무하다.
그러니 之는 타동사 謂의 목적어로서 대명사일 가능성이 제일 크다.
그러면 玄은 목적격보어.
그래서
<이것을 일러 玄이라고 하는 것은 같다>
여기서 시골서당 곰팡내를 걷어내면
<똑같이 玄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가 된다.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妙 즉 無名과 邀 즉 有名은 하나는 이름이 붙어 있고 하나는 이름이 안 붙어 있어서 서로 다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것으로 똑같이 玄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면 또 玄은 또 뭐냐?
뭐? 시커멓다고?
그러면 유비의 호인(자인가?) 玄德이 시커먼 덕
이라는 뜻인가?
최치원 선생의 난랑비 서문에 나오는 玄妙之道가
시커멓고 묘한 길이란 뜻인가?
정 모르겠으면 차라리 도올처럼 가물고 또 가물다고
했으면 중간이나 가지.
결론부터 말하면 玄은 도라는 이름을 빌어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그 무엇의 실체다.
玄 <가물 현>
가뭄이 들었다는 말이 아니고 <검을 현>을 옛날에는
그렇게 읽었다.
이 玄의 <검은 것>은 黑의 <검은 것>과는 다르다.
黑은 연탄처럼 새까만 것 바로 그 색깔이다.
그런데 玄米는 그렇게 새까맣지 않다.
玄은 절대로 시커멓다는 말이 아니다.
천자문에 天地玄黃이라는 말이 있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
땅이 누른 것은 중국에 황토가 많으니 이해가 간다.
그런데 땅이 누르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늘은 분명히 파란데.
밤하늘을 보라! 하늘이 검다.
중국사람들은 이것을 하늘의 본래 색으로 본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정확하게 본 것이다.
우주선을 타고 나가본 우주는 컴컴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밤하늘은 어둡기는 하지만 별도 보이고
달도 보이고 웬만한 건 다 보인다.
그리고 그 안에는 우리가 이름도 모르는 수천 수만 개의
은하가 분명히 존재한다.
잘 안보여서 탈이지만.
바로 이것이다. 가물가물한 것,
잘 안보이지만 그 안에 우주가 있는 그것,
이게 바로 玄이다.
그리고 妙이며, 노자가 그렇게 말하고 싶어하는
道의 無名한 벌거벗은 모습이다.
그런데 시커멓다니
그리고 이런 황망한 소리를 하는 데 누구하나 나무라는 사람이 없다니
아 슬프고도 슬프도다.
이 나라 학문의 천박함이여!!
玄之又玄 衆妙之門
玄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이 玄의 <가물다>는 것은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
1. 오묘하고 심오하다.
2. (오묘하고 심오해서)설명하기 곤란하다.
之는 앞에서 말한 바 있는 네 가지 용법 중에 3번
<~중>의 뜻으로 쓰였다.
又는 <또>
衆妙之門은 말 그대로 <중묘의 문> 우리가 妙를 찾아가는
입장이므로 <중묘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하면 맞겠다.
그래서
<가물한중에 또 가물한 것이 중묘지문이다.>
풀면
<오묘하고도 심오하여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중묘지문 즉 도이다.>
이것이 그렇게 표현의 중요성에 대해 신성시한
노자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道의 정의다.
노자께서도 딱 한 마디로 이것이 道이다 라고
말씀하실 수 없음을 솔직히 밝히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노자께서는 道를 설명하기 위해 5천이라는
그 많은 글자를 동원하여 장황하게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다.
혹자는 이 도덕경 제1장의 주인을 道라고 말한다.
천만의 말씀!
이 1장의 주인은 名이다.
homo name쿠스인(名을 귀히 여기시는 노자 선생님 앞에서 이런 표현을 써먹어도 될런지 모르겠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염려 또 염려하여 가르침을 베풀고 계신 것이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내가 지금부터 도라는 것을 설명할 터인데 말주변이 부족하니
개떡같이 이야기해도 너희는 찰떡같이 알아들어라.
제발!!!@@##?????
道에 대해서는 2장부터 나온다.
즉 2장부터 81장까지 한글자 한글자가 모두 道를 가리키는
즉 同謂之玄하는 有名이며 無名인 것이다.
마치려고 했더니 한가지가 더 남았다.
노자께서는 한글자도 그냥 쓰신 분이 아닌데 나는 네글자나 빼먹을 뻔했다.
衆妙之門
妙가 道라는 것은 이제 말 안해도 알 것이다.
그런데 妙앞에 衆자가 붙어 있다.
노자께서 그냥 붙여 놓으실 분이 아니다.
衆 <무리 중>
衆妙 <무리지은 妙>? <떼거지 道>?
2장부터 81장까지 한글자 한글자가 모두 妙 즉 道라는 뜻인가?
그건 아니다.
도덕경 5천여 글자는 名 즉 도구일 뿐 道 즉 진리는 하나이니까.
그럼 하나인 진리 앞에 衆자를 왜 쓰셨을까?
나는 여기서 노자의 위대함 앞에 숨이 막히고 모골이 송연해짐을 감출 길이 없다.
妙자 앞에 衆자가 붙은 것은 妙 즉 진리가 그 실체는 비록 하나이더라도
모습이 한가지 모습으로 보여지지 않음을 표현한 것이다.
마치 관세음 보살이 수천가지 모습으로 현신하시는 것처럼.
진리라는 것이 인간세상에 베풀어 질때 융통성 없이 하나로 딱 고정되어 있다면
진리할아버지라도 아무 써먹을 데가 없다.
천하의 명약이라도 사람에 따라 먹는 방법과 용량을 달리해야 하고
그 약효도 천차만별이듯이.
즉 常道則非道를 말씀하시고 있다.
이 깊은 뜻을 衆자 한 글자에 담아낸 것이다.
견공자제분을 무슨 벼슬이름이라고 우기지는 않았는지
두려워하며 이만 참람한 글을 마칩니다.
잠시 쉬었다가 2장에서 또 천한 입을 놀리겠습니다.
도덕경 제2장
마음을 비우고 모범을 보이소서
"이미 九鼎의 무게를 논하였으니
어찌 승패로만 영웅을 논하리
세상은 知足의 가르침을 거역한 자를 일러
영웅이라 하느니..."
天下皆知 美之爲美 斯惡已
天下皆知 善之爲善 斯不善已
故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 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 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夫唯不居 是以不居
<내가 한 천한 해석>
아름다움중에 꾸며진 아름다움은
이것이 추한것이라는 것을 천하가 다 안다.
선함중에 꾸며진 선함은
것이 선이 아니라는 것을 천하가 다 안다.
그래서 성인은 일을 함에 꾸미지 않고 말없이 모범을 보인다.
또한 萬物(자연)은
무엇을 만들어내어도 드러내 자랑하지 않으며
무엇을 낳아도 품안에 두려하지 않고,
무엇을 바라고 일을 하지 않으며
공이 있어도 내세우지 않는다.
대저 자연은 오로지 차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잃어버리지 않느니.
(하지만 대자연의 위대함을 天下가 모르지 않는다.)
<경숙이 아줌마가 한 자칭 바른 해석>
세상사람들이 다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이
꾸며진 아름다움이면 이것은 악한 짓이며,
세상사람들이 모두 선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
선함을 가장한 것이면 이것은 불선이니라.
없음에서 있음이 생기고
어려움이 있어야 쉬움을 알게 되고
긴 것을 두고 짧은 것을 재는 법이며
높은 것과 견주어 낮은 정도를 보고
소리와 비교해서 음악을 알아듣고
앞이 정해져야 뒤가 따를 수 있음이니라.
(만약 이러한 것을 꾸미게 되면 그 구별이 헷갈리니)
그러한 이유때문에
성인은 꾸밈이 없이 일을 처리하며
말없이 가르침이 되게 실천하며,
천하만물을 자기손으로 만든다 해도
떠들어 자랑삼지 않는도다.
살면서도 없는듯이하고
꾸며서 지어내는 것에 의존하지않으며
공을 이루어도 차지하지 않음이니,
대저, 오로지 차지하지않기 때문에 그공이없어지지 않느니라.
<경숙이 아줌마에 의하면 개 풀 뜯어먹는 소리라는 도올의 해석>
하늘 아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추한 것이다.
하늘 아래 사람들이 모두
선한 것이 선하다고만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김과 짧음은 서로 겨루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노래와 소리는 서로 어울리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그러하므로
성인은 함이 없음의 일에 처하고
말이 없음의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데
성인은 내가 그를 자라게 한다고 간섭함이 없고
잘 생성시키면서도 그 생성의 열매를 소유함이 없고
잘 되어가도록 하면서도 그것에 기대지 않는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 속에 살지 않는다.
대저, 오로지 그 속에 살지 아니하니 영원히 살리로다.
도덕경 2장에서 노자는
<왕이시여 백성이 비록 무지몽매하나
무엇이 그르고 무엇이 옳은지를 구별할 줄 아니
번지르르한 말로만 다스리려하지 말고
모범을 보이소서.
또한 자연이 그러하듯이
백성 위에 군림하려 하지 마시고
백성의 살림을 윤택하게 하고 태평성대를 이루었더라도
그 공덕을 내세우려하지 마소서
백성들이 그 큰 공덕을 모르지 않나이다.>
하는 가르침을 펴고 있다.
天下皆知 美之爲美 斯惡已
이 문장을 도올은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로 끊어 읽어
<하늘아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다.
/ 그런데 그것은 추한 것이다.>
경숙이 아줌마는
天下皆知美/ 之爲美/ 斯惡已 로 끊어 읽어
<하늘아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이
/ 꾸며진 아름다움이면/ 이것은 악한 짓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
도무지 나는 이 말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누구든지 이 말뜻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있으면 제발 좀
가르쳐 주기 바란다.
자신들도 무슨 말인지 헷갈리니까 장황한 해설을 늘어놓고 있다.
1장에서 보았듯이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까봐 크게 걱정했던 노자께서 이렇게 헷갈리는 표현을 했을 턱이 없다.
이 문장의 주인을 爲美라고 하는데
이 문장의 주인은 天下皆知다.
이 문장을 상식적인 한문문장 읽는 방식대로 끊어 읽으면
天下皆知 / 美之爲美 / 斯惡已
이렇게 끊어 읽어진다.
끊어서 읽어지는 데로 번역해 보면
천하가 모두 안다/ 미중의 위미는/이것이 추하다는 것을
이렇게 된다.
여기서 爲자는 꾸밀 위(僞)의 의미로 쓰였다.
그러면
<아름다움 중에 꾸며진 아름다움은 이것이 추한 것이라는 것을
천하가 다 안다>
라는 말이 된다.
마찬가지로
天下皆知 善之爲善 斯不善已 도
<선함 중에 꾸며진 선함은 이것이 선이 아니라는 것을
천하가 다 안다>
이렇게 번역된다.
이 얼마나 쉬운 말인가?
이렇게 번역해 놓고 보면 뒤에 나오는
是以 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
더 이상 장황하게 설명을 붙일 필요도 없다.
그런데 경숙이 아줌마는 그렇다 치고
천하의 도올은 왜, 어째서 이 쉬운 문장을 가지고
그렇게 어렵게 생각을 하고 있을까?
도대체 천하의 도올이 이 쉬운 문장을 하나 제대로 못 읽는 실력이란 말인가?
是以 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그래서 성인은 꾸며서 일을 하지 않고 빈말로만 가르치지
않는다>
여기서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그런데
故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이 문제다.
이 글자들이 도대체 여기 왜 끼어 있어야 하는가?
有無相生 難易相成하는 것하고 성인이 處無爲之事하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 답은 是以 두글자에 있다.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는
天下皆知 美之爲美 斯惡已
天下皆知 善之爲善 斯不善已
와 똑같이 성인이 處無爲之事하는 이유다.
이 글자들을 자세히 보면 모두
有無, 難易, 長短, 高下, 音聲, 前後 모두
서로 반대되는 단어의 쌍으로 되어있다.
마치 美와惡, 善과不善처럼
그럼 뭔가가 보이지 않는가?
故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는
天下皆知 有之爲有 斯無已
天下皆知 難之爲難 斯易已
天下皆知 前之爲前 斯後已
라는 긴 문장을 한줄로 줄여 놓은것이다.
그럼故자와 相生 相成 相較 相傾 相和 相隨는 뭐냐고요?
그건 3장에 가면 자연적으로 알게 되어 있으니 일단 3장으로 미루어 놓자.
여기서 일단 한 단락은 끝난다.
이 이후의 문장은 만물을 주어로 하는 별도의 단락이다.
萬物 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夫唯不居 是以不居
자연은 무엇을 키워내도 자랑하지 않고
만물을 낳으나 품속에 끼고 있지 않는다.
무엇을 바라지도 않으며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는다.
대저 자연은 오로지 차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잃어버리지 않느니.
너희도 이와 같이 자연을 본받아
무엇을 쌓아두려고 하지 말지니라
그러면 잃어버릴 일이 없으리라.
이런 말이다.
그런데도 도올이나 경숙이 아줌마는 문법까지 무시해가며
끝까지 성인을 주어로 놓고 한 단락으로 해석을 했다.
그래놓고 보니 자신들이 보기에도 말이 앞뒤가 안 맞자
별 희한한 소리를 다 갖다붙여 놓았다.
여기서 내 목을 내걸어야 되겠다.
이 목을 걸고 말하건대
萬物 作焉而不辭 生而不有
이하의 주인은 도올이 번역한 것처럼 성인이 아니라
만물 즉 자연이다.
이다음 내용을 聖人을 주어로 놓고 읽으면
夫唯不居 是以不居가 天下皆知 美之爲美 斯惡已의
결론이 되는 이유가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된다.
그리고 문법적으로도
한문은 목적어가 동사 뒤에 온다. 영어처럼.
여기서 萬物은 作이라는 동사 앞에 쓰였다.
만약에 만물이 목적어라면
이 문장은 作萬物而不辭가 되어야한다.
그럼 일단 萬物이 作자의 목적어는 아니다.
경숙이 아줌마도 언급했듯이 어찌언(焉)자는
앞의 글자를 강조하는 기능을 갖는 글자다.
여기서도 作자를 강조하기 위해서 일부러 언자를 넣은 것이다.
왜 作자를 강조해야 했을까?
이 焉자가 없으면 萬物作/ 而不辭로 끊어 읽어진다.
여기에 焉자가 들어가면 구강구조에 문제가 없는 이상
萬物/ 作焉/ 而不辭로 끊어 읽어진다.
만약 萬物作/ 而不辭로 끊어 읽으면
<萬物을 만들되>로 해석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을 방지하고자 萬物이 주어임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사실상 아무 필요도 없어 보이는 이 글자를
끼워놓은 것이다.
1장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노자는 언어표현의 천재다.
한글자도 허술하게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이 문장의 주어를 萬物로 놓고 보면
<萬物은 무엇을 만들어도 말하지 않고> 가 된다.
萬物을 요즘식으로 표현하자면 자연이다.
辭<말씀 사>자는 <자랑하여 말하다>라는 뜻을 내포한 글자다.
生而不有
뭐 살아도 없는 듯이 살라고?
참 기막힌 해석이다. 말은 참좋다.
청산은 날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무슨 시의 한 구 같다.
그럴 것 같으면 왜 사냐? 밥만 축내고!
노자 선생은 있는 듯 없는 듯 살다 가지 뭐하러 거창하게
도네 뭐네 해서 우리의 골치를 아프게 했나?
이 문장은 도올이 제대로 해석했다.
<무엇을 생산해도 가지지 않는다. 자연은!>
生而不有는 作焉而不辭와 짝을 이루는 댓구다.
댓구는 어떤식으로던지 의미상 연결되어 있다. 꼭!
여기서도 앞구절의 동사 作자와 뒷구절의
동사 生자는 의미상 상통하는 글자다.
作은 생명이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을 말하고
生은 생명이 있는 것을 낳는 것을 말한다.
결국 作이나 生이나 같은 말인 것이다.
그러면 有자는 동사 辭자의 댓구이니 동사로 쓰였을 것이고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 가장 자연스럽다.
나는 이 말을 <품속에 둔다>로 해석하려고 한다
萬物 作焉而不辭 生而不有
자연은 무엇을 만들어내어도 자랑하지 않고
무엇을 낳아도 품속에 끼고 있지 않는다.
(그러면 경숙이 아줌마가 10장에서 生之畜之 生而不有를
짐승같이 있는 듯 없는 듯 살라는 말이라고 우기는
것도 당연히 틀린 것이겠지?
도올은 한술 더뜬다.
뭐? 도는 창조하고, 덕은 축적한다고?
이문장은
<무엇을 기르건 길러서 품안에 두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다.
生은 낳는다는 뜻이고 畜은 기른다는 뜻이며
之는 대명사로 <이것 ,그것>으로 쓰이지 않는가?)
그 다음 爲而不恃
뭐? 도올이 육갑을 떤다고?
그럼 경숙이 아줌마는 칠갑을 떨고 있나?
이 문장에서 爲자는 爲美, 爲善의 爲자가 꾸밀 위(僞)의 뜻으로 쓰인 것과는 달리
<할 위>자로 쓰였다.
글자 그대로 <~을 한다>는 뜻이다.
恃는 <의지할 시>
<~을 하되 의지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
무슨 일을 하는데 있어서 자신이 덕보려고 그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연이 무슨 덕보자고 나무를 키우고 말을 살찌우나?
功成而不居
이 문장은 쉽다.
<공이 이루어져도 차지하지 않는다.>
夫唯不居 是以不去
<대저 자연은 오로지 차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잃어버리지 않느니.
너희도 이와 같이 자연을 본받아
무엇을 차지하려고 하지 말지니라
그러면 잃어버릴 일이 없으리라.>
여기까지가 2장의 요 즉 겉뜻이다.
2장의 묘 즉 속뜻이 3장에서 화려하게 펼쳐진다.
爲無爲
즉 왕이시여 백성을 속이소서 그러나 들키지 마소서
하는 말로...!
2장을 마치기 전에 분명히 해두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경숙이 아줌마가 이야기한 바 있듯이 도덕경은 종교철학서가 아니라 정치교과서다.
누구를 위한 정치교과서인가?
왕과 그리고, 공경대부이다.
<그리고>를 붙인 이유는 이 둘은 입장이 약간 다르기 때문이다.
왕에게 필요한 도는 牧民之道이다.
그러나 공경대부는 牧民之道외에 한가지가 더 필요하다.
保身之道, 벼슬자리를 보존하는 방책이다.
도덕경은 牧民之道, 保身之道 이 두가지를 가르치는 정치교과서이다.
2500년전 노자의 시대에 백성 즉 민은 정치라는 걸 입에 담을 만한 존재가 못 되었다.
정치를 배워보려는 발칙한 것이 혹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에는 책이라는 것이 대작대기에 글씨를 써서
가죽끈으로 묶어놓은 것이어서 요즘 책 분량으로 한 권을 옮기자면
수레하나로도 모자랄 지경이었으니
온 나라안에 책이라야 요즘 분량으로 몇 권되지도 않는
難得之貨 중에 난득지화였다.
도덕경은 절대로 백성을 교화시켜서 성인을 만들자는 책이 아니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성인은 삼대의 성인 즉 요순임금과 우임금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인은 ~"라는 말이 나오면
"주상전하 요순임금은 이리하셨습니다"로 알아들으면 거의 틀림이 없다.
그러면 왕이 아닌 우리에게는 필요없는 책인가?
민주주의가 화려하게 꽃핀 21세기에는
온 국민 한 사람 한사람이 모두가 왕이다.
그러니 온 국민이 제대로 된 정치교육을 받아서 실천해야
나라가 제대로 선다.
도덕경의 가르침을 한 마디도 놓치지 말고 새겨들을 지어다.
도덕경 제3장
거짓없이 모범을 보이소서, 뉘 있어 아니 따르겠습니까
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是以 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知者不監爲也
爲無爲 則無不治
< 내가 한 천한 해석 >
어진 이를 숭상하여 백성들이 다투게 하지 말라.
(권력다툼을 하지 말라 백성들이 본받는다)
보화를 숭상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도적질하게 하지 말라.
(사치풍조를 조장하지 말라 백성들이 본받는다)
욕심 낼만한 것을 보여서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라.
(상류층이 문란하지 않으면 온 나라가 건전해질 것이다)
그래서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우게 하고 그 배를 부르게 하고 그 뜻을 약하게 하고 그 뼈를 강하게 한다.
(그래서 현군은
백성의 살림살이를 풍족하게 하여
남의 밥그릇을 탐내지 않게 하고,
백성들의 윤리교육을 똑바로 시켜
부귀공명에 눈멀지 않게 한다.)
항상 백성으로 하여금 아는 것이 없게 하고 욕심이 없게 하며
무릇 知者들로 하여금 감히 거짓을 못하게 하라.
(항상 백성들이 부귀공명에 욕심을 내는 일이 없도록 하는 한편,
지도자라 하는 자들이 백성을 속이는 짓
<겉으로는 모범을 보이는 척 하면서 뒤로는 사리사욕을 채우는>을 못하게 하라)
일을 함에 거짓이 없다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나라를 다스림에 거짓없이 모범을 보이면 국태민안 하리라.)
도올의 해석이나 경숙이 아줌마의 해석은 입에 담을 가치도 없기에 이 3장에서는 두 사람의 해석은 생략하겠습니다.
이 두 사람뿐 아니라 노자를 공부했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도덕경 제3장의 내용을 <백성을 우민화하라>.
즉 <백성을 바보로 만들어 놓으면 사고치는 자가 없어서 나라가 편안해지리라>
라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국민경제 안정과 지도층의 솔선수범을 전제로 한 도덕성 회복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시무책을 백성의 우민화를 꾀한 현실도피책이라고 치부하였으니..!
도덕경 제3장의 핵심은 爲無爲 則無不治로 요약된다.
일을 함에 거짓이 없다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임금이시여 거짓없이 모범을 보이면 아니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無爲는 노자사상의 핵심으로 지목된다.
그런데 이 無爲가 지난 2500년간 억울한 누명을 쓰고 한스러운 세월을 보냈다.
흔히 노자 사상은 "無爲自然"
<꾸밈없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렇게 정의된다.
이 말은 곧 자유방임을 의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간섭 없이 그대로 놓아두면 모든 것이 순리에 따라 저절로 해결되리라.>
그래서 노자의 無爲사상을 현실도피 내지는 이상주의라고 말한다.
이것은 누명이다.
내가 도덕경을 통해 만난 노자는 지극히 속물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전형적인 중국사람이다.
그는 이상주의자가 아닌 냉철한 현실주의자였으며
현실도피자가 아닌 투사적 현실참여자였다.
2장에서 노자는
"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라고 말했다.
여기서 無爲는 꾸밈이 없는 것이다.
꾸밈이 없는 것은 곧 거짓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는 거짓을 행하지 않고 말없이 모범을 보인다는 말이다.
여기서 보여지듯이 무위는 절대로 부작위 또는 방임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이 무위의 2500년 한을 풀기 위해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尙賢은 똑똑한 사람을 숭상하지 말라는 말이고
不貴難得之貨는 難得之貨 즉 보화(사치품)을 귀하게 여기지 말라는 말이다.
그런데 不貴難得之貨는 몰라도 不尙賢하면 나라가 절단이 난다.
똑똑한 인재를 푸대접하고 제대로 굴러갈 나라가 있을까?
그래서 노자를 백성의 우민화를 꾀하는 공상주의자라 한다.
그러나 이 문장의 핵심은 不尙賢, 不貴難得之貨 이 아니라 使民不爭, 使民不爲盜이다.
백성이 싸우거나 도둑질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 이문장의 요점이다.
尙賢, 貴難得之貨 하는 것은 그러한 사단의 원인을 제공하는
여러 요인의 예를 들어놓은 것뿐이다.
不尙賢은 무엇을 말하는가?
2500년전 노자의 시대에 현자를 숭상한다는 것은 벼슬을 주어 등용하는 것을 뜻했다.
당시에는 달리 취직이라는 게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누가 총애를 받으면 시기하는 자들이 생기고
그것이 권력다툼으로 번지는 것은 동서고금이 똑 같다.
그래서 이 말은 드러내 놓고 편애를 하여 권력다툼을 조장하지 말라는 뜻이다.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보화를 귀히 여기면 백성이 도적질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보화는 사치품이다.
상류층이 사치풍조가 심하면 하층민들도 그 물이 들기 마련이다.
멀리 예를 들것도 없이 지금 우리나라가 딱 이 꼴이 아닌가.
이렇게 살펴보았듯이
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는
권세 있는 자들, 부자들이 권력을 탐하고 사치하면 서민들도 따라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강남 아파트 값이 몇 십억씩 나가고 백화점에서는 몇 천만원 짜리 수입팬티가 없어서 못 파는 모습을 보면 속이 확 뒤집어진다.
<나도 한번 그렇게 삐까뻔쩍하게 살아보고 죽고싶다. 은행이라도 한번 털어볼까? 까짓거.>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말이다.
그래서 성인 즉 현군은
是以 聖人之治 虛其心 弱其志
백성들에게 부귀공명의 덧없음을 가르쳐 마음을 비우게 하고,
천하를 손에 쥐고 그 이름을 떨치겠다는 야심을 버리게 한다.
그런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아무리 거룩한 성인의 가르침이라도
배고픈 백성들에겐 도리어 배부른 놈들이
염장지르는 소리로 밖에 안 들린다.
그래서 노자는 사회기강 확립의 전제조건으로 국민생활안정을 먼저 꼽고 있다.
是以 聖人之治 實其腹 强其骨
백성의 배를 채우고 뼈를 튼튼하게 만들어라
그래서 결론은 이렇다.
常使民無知無欲 使夫知者不監爲也
爲無爲 則無不治
항상 백성으로 하여금 아는 것이 없게 하고 욕심이 없게 하며
무릇 知者들로 하여금 감히 거짓을 못하게 하라.
(항상 백성들이 부귀공명에 욕심을 내는 일이 없도록 하는 한편,
지도자라 하는 자들이 백성을 속이는 짓
<겉으로는 모범을 보이 는 척 하면서 뒤로는 사리사욕을 채우는>을 못하게 하라)
다스림에 거짓이 없으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으리라.
爲無爲 則無不治
爲無爲는 일을 함에 꾸밈이 없는 것을 말한다.
꾸밈이 없다는 말은 곧 거짓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爲無爲는 일을 함에 거짓이 없다는 말이다.
治는 다스림이다.
이것은 <군림>이나 <지배>를 뜻하지 않는다.
治療나 治水가 병을 지배하고 물위에 군림하는 것을 뜻하지 않듯이.
治는 탈이 난 것을 고치고 막힌 것을 뚫고 넘친 것을 수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제대로 하는 것이 政治다.
爲無爲 則無不治
일을 함에 거짓이 없으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으리라.
이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 정치철학인가?
이러한 국민경제 안정과 지도층의 솔선수범을 전제로 한 도덕성 회복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시무책을 백성의 우민화를 꾀한 공상이라고 치부하였으니..!
참 2장에서
故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의 해석을
3장으로 미루어 놓았었다.
이 문장의 뜻은 천하가 유와 무가 다름을
난과 이가 다름을
장과 단이 다름을 알기 때문에
그 두 가지 것들에 대하여 차이를 두고 대한다는 말이다.
차별되는 두 가지가 있으면 더 좋은 것을 가지려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이문장의 속뜻은 인간은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추구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너도 나도 이익만 쫓으면 세상은 권력만능, 물질만능의 아수라장이 되어버린다.
노자는 이 인간의 권력욕, 물질욕을 교육으로써 교화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 교화의 과정을 거쳐 인간이 태어날 때 지녔던 본연의 순수한 심성이 바로
無爲自然
꾸밈도 없고 거짓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마음이다.
단 그 전제조건으로 기본적인 경제조건 충족, 지도층의 솔선수범을 내걸었다.
이보다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시국수습책이 또 있을까?
그런데도 세상사람들은 노자의 본뜻은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백성의 우민화나 꿈꾼 공상주의자라고 손가락질하였다.
그럼 왜 2장에서 위무위를
<왕이여 백성을 속이소서, 그러나 들키지 마소서> 라고 표현했느냐고요?
이런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어느 마을에 조상 대대로 전해오는 예언이 있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거든 헛간에 숨어있거라.
절대로 헛간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
정 참기 어렵거든 눈이라도 가리거라
어느 해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피난을 떠났습니다.
단 두 집만이 마을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 두 집의 노인들이 마을의 예언을 거론하며 피난을 만류하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자 한 집의 노인은 집안 사람들을 모두 헛간에 넣어놓고
문에 못질을 해버렸습니다.
새벽 무렵 마을에 적병이들어와 집집마다 분탕질을 하고 야단이 났습니다.
집안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다가 급기야 문을 부수고 뛰어나와 도망을 가다가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다른 한 집은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노인이 가족을 모두 모아놓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무래도 예언만 믿고 있기는 불안하니 우리도 피난을 가자,
그러나 아주 안 믿기도 그러니 너희는 모두 눈을 가리고
내가 앞장서서 인도하는 데로만 따라오너라.
그리고는 가족들의 눈을 가리고, 끈으로 한 줄로 묶은 채 자신이 앞장을 섰습니다.
그리고는 밤새도록 마을을 뱅뱅 돌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에게는 이제 어디쯤 왔으니 조금만 더가면 어느 마을이다. 끊임없이 얘기하면서.
그렇게 밤새 마을을 뱅뱅 돌던 노인은 새벽이 다가오자
가족들에게 저 앞에 빈집이 있으니 쉬어가자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는 가족들을 자기 집 헛간에 넣었습니다.
밤새도록 눈을 가리고 걸었던 가족들을 피곤하여 모두 곯아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사이 마을에는 적병이 들어와서 분탕질을 해댔지만
가족들은 너무도 피곤하여 그것도 모른 채 잠만 잤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고 가족들이 잠을 깨었을 때
이미 욕심을 다 채운 적병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고 없었습니다.
다소 억지스런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 나라의 정치인이나 언론들이 이 이야기를 꼭 되새겨 봤으면 합니다.
국가에 각종 어려움이 발생했을 때 이 나라의 정치인과 언론들이 취한 태도는 과연 어떠했습니까?
정치인들은 서로 상대방의 실책을 폭로하는 천재일우의 기회로만 여기고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용어들을 동원하여 국민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문제의 핵심을 놓치지는 않았습니까?
언론들은 그러한 작태를 더욱 부추기고 갈팡질팡 온 나라를 들뜨게 하지는 않았습니까? 이 나라의 지도자 정치인과 언론은 과연 이 나라에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 어떻게 국민들을 이끌 것인지에 대한 기본철학이 있습니까?
**[올린이 주] 뒷부분에서 이 친구 많이 흥분하고 있군요! 앞으로는 이런 일 없어야겠죠?
이나라 학문의 얕음이여
촌구석 백면서생으로 하여금 구린 입에 도를 담게 하는구나
일곱번 붓을 놓고 아홉번 탄식하며 이글을 쓰노라.
天下皆知 美之爲美 斯惡已
天下皆知 善之爲善 斯不善已
故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 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 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夫唯不居 是以不居
천하가 다 안다/ 美중에 爲美는/ 이것이 추한 것이라는 것을
천하가 다 안다/ 善중에 爲善은/ 이것이 善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성인은 爲하지 않고 言하지 않는다. 괜히 속보이므로.
또한 萬物(자연)은
무엇을 만들어내어도 자랑하지 않고 소유하려 하지 않으며,
무엇을 바라고 일을 하지 않고, 공이 있어도 내세우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일용할 양식을 만들어 내고 그 양식으로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큰 공이 있음을 天下가 모르지 않는다.
그럼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는 뭐냐고요?
天下皆知 有之爲有 斯無已
天下皆知 難之爲難 斯易已
天下皆知 前之爲前 斯後已
를 줄여 놓은 겁니다.
이 쉬운 말을 두고 자칭 천재라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싸움이 붙었습니다.
그리고....! 도가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천한 촌 것이 감히 도를 논하려 합니다.
주제넘은 글이지만 한 글자라도 도를 더럽힌 붓질이 있다면
이 목을 내 놓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천하의 천재 도올선생이 아줌마선생 경숙님('노자를 웃긴 남자'의 저자)에게 얼마나 억울하게 당했는지 낱낱이 밝혀보겠습니다.
제1장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邀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내가 한 천한 해석
도를 도라고 할 수는 있지만 꼭 도라고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붙이자면 이름을 붙일 수는 있지만 꼭 그 이름을 붙여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도는 태초부터 존재하는 것이지만 말로 표현되지 않으면 사람은 알아먹지를 못하므로 항상 인간은 말로 표현된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렇지만 표현되지 않은 것이던 표현된 것이던 그 모두 다 오묘한 진리를 가리키는 것인데 그 오묘한 진리 중에서도 오묘한 진리 즉 도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하므로 말주변 없는 내가 혹시 개떡같이 말하더라도 너희는 제발 찰떡같이 알아들을지니라.
경숙이 아줌마가 한 자칭 바른 해석
도를 도라고 할 수는 있지만 항상 도라고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붙이자면 이름을 붙일 수는 있지만 항상 그 이름을 붙여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천지의 시작이니 따질 수 없고
이름을 붙이면 만물의 모태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천지지시의 묘함을 보아야 하지만
이름을 붙인 후에야 그것의 요(실상계의 모습)를 파악할 수 있느니라
이 두 가지는 똑같은 것인데
다르게 보이는 것은 그 이름뿐이니
검기는 마찬가지여서
이것도 검고 저것도 검은 것이니
도는 모든 묘함이 나오는 문이니라
경숙이 아줌마에 의하면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라는 도올의 해석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지으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머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를 본다.
그런데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 이름만 달리 했을 뿐이다.
그 같은 것을 일컬어 가물타라고 한다.
가물코 또 가물토다.
모든 묘함이 이 문에서 나오지 않는가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여기서 可자에 대한 아줌마의 해석만큼은 탁월하다 못해 위대하기까지 하다.
이런걸 도올의 말대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나 할까?
도대체 왜 可자가 曰자로 해석되어 왔을까?
현대 중국어에서도 可자는 <가능하다, 적합하다>는 뜻으로 쓰이지 말하다라는 뜻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도를 도라고 할 수는 있지만 항상 도라고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붙이자면 이름을 붙일 수는 있지만 항상 그 이름을 붙여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얼마나 명쾌한 해석인가!
여기까지는 경숙이 아줌마에게 전적으로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아뿔사 이 다음부터 우리 경숙이 아줌마가 헷갈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이놈도 검고 저놈도 검다'는 황망스러운 말까지 내뱉는다.
적어도 이 可자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제외하고는 우리 위대한 경숙이 아줌마도 도올을 나무랄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나는 도올의 한문실력이 형편없음에 놀라고,
경숙이 아줌마의 용감함에 놀라서 딱 두 번 놀랐다.
경숙이 아줌마는 도올더러 환장기가 있다는데 경숙이 아줌마의 환장기도 도올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모든 사물은 우리가 알건 모르건 이미 존재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인식대상이 되어야만 비로소 인간에게 의미있는 무엇(Something)이 되며 인식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이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표현하기 위한 도구가 名(Name) 즉 그것을 부르는 이름인 것이다.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한송이 꽃에 불과했다.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자
그는 웃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김춘수 꽃)
그런데 앞에서 非常名이라고 노자가 분명히 밝혔듯이 이 名이라는 것은 꼭 名 즉 <이름>만이 아니다. 노자는 인간이 어떤 대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모든 수단을 이 名이라는 글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有名이라는 글자를 <이름이 있는 것: named thing>이라고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말로 표현된 것: naming>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이라는 것도 꼭 입으로 나오는 것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수화도 훌륭한 말의 구실을 하지 않는가)
(그리고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은 이름을 붙이고 말고를 선택할 만한 처지가 못 된다. 이름이 없는 것은 그 이름이 없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기 때문에 이름이 없는 것이고, 확실히든 어렴풋이든 인간이 알게 된 모든 것은 알게 되는 그 순간 최소한 <거시기: It>라는 지시대명사라도 붙는다.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어떠한 형식으로라도 이름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고 인간이 모르는 것은 절대로 이름이 붙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경숙이 아줌마처럼 <이름을 붙이고자 욕심을 낸다면 요를 볼것이고 욕심을 내지 않으면 묘를 볼 것이다> 하는 식의 말을 입에 담는다면 노자가 대성통곡을 할 것이다.)
어쨌건 이 名이라는 것은 어떤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有名萬物之母 - 有名은 萬物의 어머니다.
<萬物의 어머니>라 이 보다 더한 찬사가 있을까?
노자는 도구에 불과한 有名이라는 것에 극존칭을 썼다.
왜일까?
그것은 인간은 이 名이라는 도구를 통해서만 사물을 알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名이라는 인식도구가 없으면 사물을 인식할 수 없고 도구로써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같은 대상이라도 다른 모습으로 알 수도 있다는 말이다.
"道를 道라고 해 놓으면"으로 알아듣는 답답한 사람이 꼭 있는 것이다. 천하의 도올처럼!
그러니 이 名이라는 것이 중요할 수밖에!
노자는 표현의 중요성을 무서우리만큼 갈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도 사람인 이상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자면 말로써 표현해야 할 것이고 듣는 사람도 노자의 말을 통해서 노자의 사상을 이해할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던 노자로서는 그 인간의 언어라는 것이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 못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제일 첫마디로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내가 지금부터 도라는 것을 설명할 터인데 말주변이 부족하니
개떡같이 이야기 해도 너희는 찰떡같이 알아들어라.
제발!!!@@##?????
하고 신신당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보겠지만 노자는 도덕경에서 사용한 5천언 한 글자 한 글자에 대해서 비장하리 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사용하고 있다.
단 한 글자도 의미없이 쓴 글자가 없다.
그러면 이만큼이나 중요한 이름만 잘 파고들면 도를 이해할 수 있겠네?
이런 어린백성이 있을까봐 노자는 無名天地之始라는 단서를 붙여놓았다.
아무리 萬物之母라도 天地가 시작되기 전부터 있었을까?
즉 아무리 有名萬物之母라도 天地의 시작인 <無名의 다음 서열>인 것이다.
그러면 無名은 도대체 무었인가?
문자 그대로 <이름이 없는 것>이다.
앞에서 有名을 <표현된 것> 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면 無名은 < 표현되지 않은 것>쯤 되겠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것>이 무엇일까?
天地之始 즉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 전부터 존재하던 名의 실체다.
우리가 名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보려고 하는 바로 그 대상인 것이다.
노자가 道에 대해 道라는 名을 사용하든 돌이라는 名을 사용하든 그것은 길이나 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그 무엇을 설명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이 無名이다.
결국 아무리 有名이 중요하다고 해도 도저히 天地之始인 無名보다 중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호통재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인간인 이상 有名萬物之母의 굴레를 벗어날 용빼는 재주는 없다. 인간은 名 즉 <표현된 것>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는 숙명을 지닌 존재인 것이다.
(요즘은 노자가 생각지도 못했던 tv라는 도구가 명의 역할을 하려하고 있다)
그래서 이 다음에
常有欲以觀其邀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는 말이 나온다.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邀
(마지막 글자 요자를 邀로 쓰는 것을 정말 죄송하게 생각한다. 우리집 컴퓨터에 한글프로그램이 안 깔려 있어서 워드패드로 이글을 쓰는데 도무지 여기에 써야할 요자가 없어서 음만 같은 이 글자를 빌어 쓴다. 본래 여기 써야 할 글자는 구할 요자다)
여기서부터 우리 경숙이 아줌마는 그렇게 흉보던 도올의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에 버금가는 소리를 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문장은
인간은 名을 통해 표현된 것만 볼 수 있으므로 항상 그 名에만 집착한다
는 말이다.
이 문장을 경숙이 아줌마는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천지지시의 묘함을 보아야 하지만
이름을 붙인 후에야 그것의 요(실상계의 모습)를 파악할
수 있느니라>로 번역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는 사람?
이따위 요망스런 말을 해놓고도 입에 담지 못할
육두문자까지 동원해서 도올을 욕하고있다.
도대체 도올은 왜 입을 다물고 도망갔는가?
같잖아서였을까?
차라리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를 본다.>
라고 번역한 도올의 해석이 더 알아듣기는 쉽다.
경숙이 아줌마 말마따나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라서 탈이지....
故자는 <그러므로>라는 뜻으로 쓰이는 접속사다.
뭐가 그러므로인가?
앞문장을 그대로 받아서
<인간은 名을 통해 표현된 것만 볼 수 있으므로>이다
常자는 <항상>이라는 뜻.
無欲은 두 가지로 해석이 된다.
1.욕심이 없다.
2.욕심을 내지 않는다.
그 다음 以 - 이 以자가 모든 문제의 불씨이다.
이 以자는 <써 이> 자로 <~로써> 로 번역하는 어조사이다.
그런데 도대체, 도대체 왜, why, 爲甚碼(역시나 꼭 써야 될 마자가 없어서 碼를 쓴다. 본토 발음으로는 '웨이썬머'다)
이 以자를 無欲에 붙여서 읽는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以자는 앞에서부터 읽기도 하지만 뒤에서부터 읽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以夷制夷처럼.
여기에서 以를 뒤의 觀其妙에 붙여서 읽으면 以觀其妙
즉 <그 묘를 봄으로써>가 된다.
無欲과 붙여 읽으면
<그 묘를 봄으로써 욕심이 없고>가 된다.
<그 묘를 봄으로써 욕심이 없고>?
말이 좀 이상하지?
여기서 고등학교때 얼마나 국어교육이랑 한문교육을 똑바로 받았는 지가 판가름 난다.
<~써> 에는 두 가지 용법이 있다.
1.<~써>로 읽어서 <~를 가지고>
以夷制夷 -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한다.
(오랑캐를 가지고 오랑캐를 제압한다)
2.<~서>로 읽어서 <~한 처지에>
학생으로서 어떻게 그런 짓을?
나는 틀림없이 그렇게 배웠다.
의심스러우면 국어교육과나 한문교육과 교수님에게 확인해 봐라.
여기서 1번 용법을 채택해 보면
<그 묘를 보는 것을 가지고는 욕심이 없고>
즉 <그 묘를 보는데는 욕심이 없고>가 된다.
그러면 당연히 常有欲以觀其邀는 對句니까
<그 요를 보는데만 욕심이 있다>가 된다.
전체를 보면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邀
<인간은 名을 통해 표현된 것만 볼 수 있으므로
항상 그 묘를 보는데는 욕심이 없고 그 요를 보는 것에만 욕심이 있다>
어떤가 뭔가가 보이지 않는가?
그러면 妙와 邀만 남았는데 이게 과연 무엇인가?
솔직히 나는 그 뜻을 정확히 모르겠다.
다만 欲자는 욕심이라는 부정적 의미가 담긴 글자다.
그렇다면 無欲뒤의 觀其妙는 긍정적인 의미로 有欲뒤의 觀其邀는 부정적인 의미로 서로 비교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 전제하에 전체 문맥에 비추어 유추해보면 妙는 無名한 무엇을 말하는 것이고 邀는 有名한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경숙이 아줌마는 도올이 이 邀자를 <가장자리>로 읽은 것을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라고 했는 데 도올이 이거는 정확히 <그 妙>를 본 것 같다.
<인간은 名을 통해 표현된 것만 볼 수 있으므로
항상 그 妙를 보는데는 욕심이 없고 그 邀를 보는 것에만 욕심이 있다>
- 인간은 표현된 것만 볼 수 있으므로
항상 그 표현되지 않은 것은 보려하지 않고
그 표현된 껍데기만 보는 경향이 있다
도올같은 <천재>도 노자가 무엇 때문에 道라는 말을 꺼냈는지를 망각하고 道가 way를 뜻한다고 우겨대지 않는가!
이것이 지나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개를 '犬公', 강아지를 '犬公 자제분'이라 부른다고만 가르쳐 놓고 강아지 잡아오너라 하면 눈앞에 강아지 열 마리가 지나가도 그것이 강아지인지는 꿈에도 모르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래서 此兩者同 즉 <그게 그거다> 하는 말이 나온다.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妙 즉 無名과 邀 즉 有名은 하나는 이름이 붙어 있고 하나는 이름이 안 붙어 있어서 서로 다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것으로 똑같이 玄(오묘하고도 심오한 어떤 것)을 가르키는데 그 오묘하고도 심오한 것 중에서도 오묘하고 심오한 것이 중묘지문 즉 도이다.>
여기까지 오면 우리 경숙이 아줌마는 개 풀 뜯어먹다 못해 배앓이하는 소리까지 한다.
경숙이 아줌마
<이놈도 검고 저 놈도 검다>고요?
참 하늘이 새까맣게 보이고 도올선생 표현대로 가물가물해진다.
왜 이렇게 시커매졌는가?
끊어읽기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이게 잘못된 줄도 모르고 <아버지 가방에 들어간다>로 읽고는 지 멋대로 해석을 하고 넘어진거다.
(<자빠졌다>고 표현하고 싶지만 엄한 가풍을 생각해 차마 그러지 못함을 원통하게 생각함)
그러다 지가 봐도 말이 안 되겠으니 가물가물하다느니, 이놈도 검고 저 놈도 검다는 따위 요설을 내뱉고 넘어진거다.
노자께서 어머니같이 여기는 名에게 놈자를 붙였으니 노자의 어머니를 욕한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다.
빌어서 될런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노자 큰 선생님께 大罪를 빕니다.
두 사람 다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이렇게 끊어 읽었다.
나는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이렇게 끊어 읽는 것이 맞다고 본다.
도덕경은 전체가 對句로 이루어져 있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單句로 쓰인 문장은 없는 걸로
알고 있다.(혹시 있을까봐 걱정되네)
그런데 衆妙之門만 짝도 없이 외롭게 떨어져 있어야만 할
까닭이 없다. 독립문도 아닌데!
此兩者同
<이 둘은 같다>는 뜻이다.
<이 둘>이 무엇인가?
바로 앞 문장에 나왔던 妙와 邀를 가리키는 것이다.
出而異名
나는 여기서 또한번 경숙이 아줌마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出而異/名으로 끊어 읽은 것은 참으로 감탄할 만한 식견이다.
出자는 <날 출>이다. <나오다, 드러내다> 등으로 새긴다.
而자는 접속사로 <그래서, 그러나>등으로 새긴다.
<드러나서 다른 것은 이름이다>
즉 <다르게 보이는 것은 이름뿐이다>
더 쉽게 말해서 <이 둘이 다른 것은 하나는 이름이 붙어 있고 하나는 이름이 안 붙어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래서
此兩者同 出而異名
<妙와 邀는 하나는 이름이 붙어 있고 하나는 이름이 안 붙어 있어서 서로 다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것이다>
아니 妙나 邀나 같은 것이면 눈에 보이는 邀만 잘 봐도 충분히 道를 알 수 있다는 소린데 그러면 노자는 왜 사람들이 妙는 안보고 邀만 보려한다고 걱정하는 소리를 했을까?
자 여기 미국사람이 한 사람 있다.
이 사람은 중국에도 자주 드나들어서 한자도 웬만한 건 다 읽을 줄 안다.
이 사람이 남대문시장 쇼핑을 마치고 남대문 구경을 나섰는데
온종일 서울 시내를 다 돌아다니고도 결국 남대문 구경을 못했다고 푸념이 대단하다.
도대체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사람은 남대문을 남대문으로만 알았지 그 현판이 숭례문이라고 쓰여져 있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정작 남대문 처마 밑에 가서도 숭례문을 숭례문으로만 알았지 숭례문이 남대문인 지는 꿈에도 생각 못하고 돌아섰던 것이다.
노자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것이다.
죽은 노자가 다시 살아 돌아와서 아무리 알아듣도록 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어도 道를 道나 way라는 名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道를 道나 way라고만 알고 있는 도올같은 사람이 그것은 도가 아니다라고 말할까봐 '그것이 그것이다'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同謂之玄 즉 <그것이 그것이다 이놈아> 하며 절규하고 계신다. 노자께서.
同謂之玄
同 <같다>
謂 <이르다>
之 1. <갈 지>
2. <~의>
3. <~중,~가운데>
4. 대명사 <그, 이, 저>
玄 <가물 현>
謂는 동사다. 동사 뒤에 또 동사가 따라올 수는 없고,
동사 뒤에 조사가 올 리도 만무하다.
그러니 之는 타동사 謂의 목적어로서 대명사일 가능성이 제일 크다.
그러면 玄은 목적격보어.
그래서
<이것을 일러 玄이라고 하는 것은 같다>
여기서 시골서당 곰팡내를 걷어내면
<똑같이 玄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가 된다.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妙 즉 無名과 邀 즉 有名은 하나는 이름이 붙어 있고 하나는 이름이 안 붙어 있어서 서로 다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것으로 똑같이 玄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면 또 玄은 또 뭐냐?
뭐? 시커멓다고?
그러면 유비의 호인(자인가?) 玄德이 시커먼 덕
이라는 뜻인가?
최치원 선생의 난랑비 서문에 나오는 玄妙之道가
시커멓고 묘한 길이란 뜻인가?
정 모르겠으면 차라리 도올처럼 가물고 또 가물다고
했으면 중간이나 가지.
결론부터 말하면 玄은 도라는 이름을 빌어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그 무엇의 실체다.
玄 <가물 현>
가뭄이 들었다는 말이 아니고 <검을 현>을 옛날에는
그렇게 읽었다.
이 玄의 <검은 것>은 黑의 <검은 것>과는 다르다.
黑은 연탄처럼 새까만 것 바로 그 색깔이다.
그런데 玄米는 그렇게 새까맣지 않다.
玄은 절대로 시커멓다는 말이 아니다.
천자문에 天地玄黃이라는 말이 있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
땅이 누른 것은 중국에 황토가 많으니 이해가 간다.
그런데 땅이 누르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늘은 분명히 파란데.
밤하늘을 보라! 하늘이 검다.
중국사람들은 이것을 하늘의 본래 색으로 본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정확하게 본 것이다.
우주선을 타고 나가본 우주는 컴컴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밤하늘은 어둡기는 하지만 별도 보이고
달도 보이고 웬만한 건 다 보인다.
그리고 그 안에는 우리가 이름도 모르는 수천 수만 개의
은하가 분명히 존재한다.
잘 안보여서 탈이지만.
바로 이것이다. 가물가물한 것,
잘 안보이지만 그 안에 우주가 있는 그것,
이게 바로 玄이다.
그리고 妙이며, 노자가 그렇게 말하고 싶어하는
道의 無名한 벌거벗은 모습이다.
그런데 시커멓다니
그리고 이런 황망한 소리를 하는 데 누구하나 나무라는 사람이 없다니
아 슬프고도 슬프도다.
이 나라 학문의 천박함이여!!
玄之又玄 衆妙之門
玄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이 玄의 <가물다>는 것은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
1. 오묘하고 심오하다.
2. (오묘하고 심오해서)설명하기 곤란하다.
之는 앞에서 말한 바 있는 네 가지 용법 중에 3번
<~중>의 뜻으로 쓰였다.
又는 <또>
衆妙之門은 말 그대로 <중묘의 문> 우리가 妙를 찾아가는
입장이므로 <중묘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하면 맞겠다.
그래서
<가물한중에 또 가물한 것이 중묘지문이다.>
풀면
<오묘하고도 심오하여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중묘지문 즉 도이다.>
이것이 그렇게 표현의 중요성에 대해 신성시한
노자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道의 정의다.
노자께서도 딱 한 마디로 이것이 道이다 라고
말씀하실 수 없음을 솔직히 밝히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노자께서는 道를 설명하기 위해 5천이라는
그 많은 글자를 동원하여 장황하게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다.
혹자는 이 도덕경 제1장의 주인을 道라고 말한다.
천만의 말씀!
이 1장의 주인은 名이다.
homo name쿠스인(名을 귀히 여기시는 노자 선생님 앞에서 이런 표현을 써먹어도 될런지 모르겠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염려 또 염려하여 가르침을 베풀고 계신 것이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내가 지금부터 도라는 것을 설명할 터인데 말주변이 부족하니
개떡같이 이야기해도 너희는 찰떡같이 알아들어라.
제발!!!@@##?????
道에 대해서는 2장부터 나온다.
즉 2장부터 81장까지 한글자 한글자가 모두 道를 가리키는
즉 同謂之玄하는 有名이며 無名인 것이다.
마치려고 했더니 한가지가 더 남았다.
노자께서는 한글자도 그냥 쓰신 분이 아닌데 나는 네글자나 빼먹을 뻔했다.
衆妙之門
妙가 道라는 것은 이제 말 안해도 알 것이다.
그런데 妙앞에 衆자가 붙어 있다.
노자께서 그냥 붙여 놓으실 분이 아니다.
衆 <무리 중>
衆妙 <무리지은 妙>? <떼거지 道>?
2장부터 81장까지 한글자 한글자가 모두 妙 즉 道라는 뜻인가?
그건 아니다.
도덕경 5천여 글자는 名 즉 도구일 뿐 道 즉 진리는 하나이니까.
그럼 하나인 진리 앞에 衆자를 왜 쓰셨을까?
나는 여기서 노자의 위대함 앞에 숨이 막히고 모골이 송연해짐을 감출 길이 없다.
妙자 앞에 衆자가 붙은 것은 妙 즉 진리가 그 실체는 비록 하나이더라도
모습이 한가지 모습으로 보여지지 않음을 표현한 것이다.
마치 관세음 보살이 수천가지 모습으로 현신하시는 것처럼.
진리라는 것이 인간세상에 베풀어 질때 융통성 없이 하나로 딱 고정되어 있다면
진리할아버지라도 아무 써먹을 데가 없다.
천하의 명약이라도 사람에 따라 먹는 방법과 용량을 달리해야 하고
그 약효도 천차만별이듯이.
즉 常道則非道를 말씀하시고 있다.
이 깊은 뜻을 衆자 한 글자에 담아낸 것이다.
견공자제분을 무슨 벼슬이름이라고 우기지는 않았는지
두려워하며 이만 참람한 글을 마칩니다.
잠시 쉬었다가 2장에서 또 천한 입을 놀리겠습니다.
도덕경 제2장
마음을 비우고 모범을 보이소서
"이미 九鼎의 무게를 논하였으니
어찌 승패로만 영웅을 논하리
세상은 知足의 가르침을 거역한 자를 일러
영웅이라 하느니..."
天下皆知 美之爲美 斯惡已
天下皆知 善之爲善 斯不善已
故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 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 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夫唯不居 是以不居
<내가 한 천한 해석>
아름다움중에 꾸며진 아름다움은
이것이 추한것이라는 것을 천하가 다 안다.
선함중에 꾸며진 선함은
것이 선이 아니라는 것을 천하가 다 안다.
그래서 성인은 일을 함에 꾸미지 않고 말없이 모범을 보인다.
또한 萬物(자연)은
무엇을 만들어내어도 드러내 자랑하지 않으며
무엇을 낳아도 품안에 두려하지 않고,
무엇을 바라고 일을 하지 않으며
공이 있어도 내세우지 않는다.
대저 자연은 오로지 차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잃어버리지 않느니.
(하지만 대자연의 위대함을 天下가 모르지 않는다.)
<경숙이 아줌마가 한 자칭 바른 해석>
세상사람들이 다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이
꾸며진 아름다움이면 이것은 악한 짓이며,
세상사람들이 모두 선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
선함을 가장한 것이면 이것은 불선이니라.
없음에서 있음이 생기고
어려움이 있어야 쉬움을 알게 되고
긴 것을 두고 짧은 것을 재는 법이며
높은 것과 견주어 낮은 정도를 보고
소리와 비교해서 음악을 알아듣고
앞이 정해져야 뒤가 따를 수 있음이니라.
(만약 이러한 것을 꾸미게 되면 그 구별이 헷갈리니)
그러한 이유때문에
성인은 꾸밈이 없이 일을 처리하며
말없이 가르침이 되게 실천하며,
천하만물을 자기손으로 만든다 해도
떠들어 자랑삼지 않는도다.
살면서도 없는듯이하고
꾸며서 지어내는 것에 의존하지않으며
공을 이루어도 차지하지 않음이니,
대저, 오로지 차지하지않기 때문에 그공이없어지지 않느니라.
<경숙이 아줌마에 의하면 개 풀 뜯어먹는 소리라는 도올의 해석>
하늘 아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추한 것이다.
하늘 아래 사람들이 모두
선한 것이 선하다고만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김과 짧음은 서로 겨루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노래와 소리는 서로 어울리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그러하므로
성인은 함이 없음의 일에 처하고
말이 없음의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데
성인은 내가 그를 자라게 한다고 간섭함이 없고
잘 생성시키면서도 그 생성의 열매를 소유함이 없고
잘 되어가도록 하면서도 그것에 기대지 않는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 속에 살지 않는다.
대저, 오로지 그 속에 살지 아니하니 영원히 살리로다.
도덕경 2장에서 노자는
<왕이시여 백성이 비록 무지몽매하나
무엇이 그르고 무엇이 옳은지를 구별할 줄 아니
번지르르한 말로만 다스리려하지 말고
모범을 보이소서.
또한 자연이 그러하듯이
백성 위에 군림하려 하지 마시고
백성의 살림을 윤택하게 하고 태평성대를 이루었더라도
그 공덕을 내세우려하지 마소서
백성들이 그 큰 공덕을 모르지 않나이다.>
하는 가르침을 펴고 있다.
天下皆知 美之爲美 斯惡已
이 문장을 도올은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로 끊어 읽어
<하늘아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다.
/ 그런데 그것은 추한 것이다.>
경숙이 아줌마는
天下皆知美/ 之爲美/ 斯惡已 로 끊어 읽어
<하늘아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이
/ 꾸며진 아름다움이면/ 이것은 악한 짓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
도무지 나는 이 말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누구든지 이 말뜻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있으면 제발 좀
가르쳐 주기 바란다.
자신들도 무슨 말인지 헷갈리니까 장황한 해설을 늘어놓고 있다.
1장에서 보았듯이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까봐 크게 걱정했던 노자께서 이렇게 헷갈리는 표현을 했을 턱이 없다.
이 문장의 주인을 爲美라고 하는데
이 문장의 주인은 天下皆知다.
이 문장을 상식적인 한문문장 읽는 방식대로 끊어 읽으면
天下皆知 / 美之爲美 / 斯惡已
이렇게 끊어 읽어진다.
끊어서 읽어지는 데로 번역해 보면
천하가 모두 안다/ 미중의 위미는/이것이 추하다는 것을
이렇게 된다.
여기서 爲자는 꾸밀 위(僞)의 의미로 쓰였다.
그러면
<아름다움 중에 꾸며진 아름다움은 이것이 추한 것이라는 것을
천하가 다 안다>
라는 말이 된다.
마찬가지로
天下皆知 善之爲善 斯不善已 도
<선함 중에 꾸며진 선함은 이것이 선이 아니라는 것을
천하가 다 안다>
이렇게 번역된다.
이 얼마나 쉬운 말인가?
이렇게 번역해 놓고 보면 뒤에 나오는
是以 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
더 이상 장황하게 설명을 붙일 필요도 없다.
그런데 경숙이 아줌마는 그렇다 치고
천하의 도올은 왜, 어째서 이 쉬운 문장을 가지고
그렇게 어렵게 생각을 하고 있을까?
도대체 천하의 도올이 이 쉬운 문장을 하나 제대로 못 읽는 실력이란 말인가?
是以 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그래서 성인은 꾸며서 일을 하지 않고 빈말로만 가르치지
않는다>
여기서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그런데
故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이 문제다.
이 글자들이 도대체 여기 왜 끼어 있어야 하는가?
有無相生 難易相成하는 것하고 성인이 處無爲之事하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 답은 是以 두글자에 있다.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는
天下皆知 美之爲美 斯惡已
天下皆知 善之爲善 斯不善已
와 똑같이 성인이 處無爲之事하는 이유다.
이 글자들을 자세히 보면 모두
有無, 難易, 長短, 高下, 音聲, 前後 모두
서로 반대되는 단어의 쌍으로 되어있다.
마치 美와惡, 善과不善처럼
그럼 뭔가가 보이지 않는가?
故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는
天下皆知 有之爲有 斯無已
天下皆知 難之爲難 斯易已
天下皆知 前之爲前 斯後已
라는 긴 문장을 한줄로 줄여 놓은것이다.
그럼故자와 相生 相成 相較 相傾 相和 相隨는 뭐냐고요?
그건 3장에 가면 자연적으로 알게 되어 있으니 일단 3장으로 미루어 놓자.
여기서 일단 한 단락은 끝난다.
이 이후의 문장은 만물을 주어로 하는 별도의 단락이다.
萬物 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夫唯不居 是以不居
자연은 무엇을 키워내도 자랑하지 않고
만물을 낳으나 품속에 끼고 있지 않는다.
무엇을 바라지도 않으며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는다.
대저 자연은 오로지 차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잃어버리지 않느니.
너희도 이와 같이 자연을 본받아
무엇을 쌓아두려고 하지 말지니라
그러면 잃어버릴 일이 없으리라.
이런 말이다.
그런데도 도올이나 경숙이 아줌마는 문법까지 무시해가며
끝까지 성인을 주어로 놓고 한 단락으로 해석을 했다.
그래놓고 보니 자신들이 보기에도 말이 앞뒤가 안 맞자
별 희한한 소리를 다 갖다붙여 놓았다.
여기서 내 목을 내걸어야 되겠다.
이 목을 걸고 말하건대
萬物 作焉而不辭 生而不有
이하의 주인은 도올이 번역한 것처럼 성인이 아니라
만물 즉 자연이다.
이다음 내용을 聖人을 주어로 놓고 읽으면
夫唯不居 是以不居가 天下皆知 美之爲美 斯惡已의
결론이 되는 이유가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된다.
그리고 문법적으로도
한문은 목적어가 동사 뒤에 온다. 영어처럼.
여기서 萬物은 作이라는 동사 앞에 쓰였다.
만약에 만물이 목적어라면
이 문장은 作萬物而不辭가 되어야한다.
그럼 일단 萬物이 作자의 목적어는 아니다.
경숙이 아줌마도 언급했듯이 어찌언(焉)자는
앞의 글자를 강조하는 기능을 갖는 글자다.
여기서도 作자를 강조하기 위해서 일부러 언자를 넣은 것이다.
왜 作자를 강조해야 했을까?
이 焉자가 없으면 萬物作/ 而不辭로 끊어 읽어진다.
여기에 焉자가 들어가면 구강구조에 문제가 없는 이상
萬物/ 作焉/ 而不辭로 끊어 읽어진다.
만약 萬物作/ 而不辭로 끊어 읽으면
<萬物을 만들되>로 해석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을 방지하고자 萬物이 주어임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사실상 아무 필요도 없어 보이는 이 글자를
끼워놓은 것이다.
1장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노자는 언어표현의 천재다.
한글자도 허술하게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이 문장의 주어를 萬物로 놓고 보면
<萬物은 무엇을 만들어도 말하지 않고> 가 된다.
萬物을 요즘식으로 표현하자면 자연이다.
辭<말씀 사>자는 <자랑하여 말하다>라는 뜻을 내포한 글자다.
生而不有
뭐 살아도 없는 듯이 살라고?
참 기막힌 해석이다. 말은 참좋다.
청산은 날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무슨 시의 한 구 같다.
그럴 것 같으면 왜 사냐? 밥만 축내고!
노자 선생은 있는 듯 없는 듯 살다 가지 뭐하러 거창하게
도네 뭐네 해서 우리의 골치를 아프게 했나?
이 문장은 도올이 제대로 해석했다.
<무엇을 생산해도 가지지 않는다. 자연은!>
生而不有는 作焉而不辭와 짝을 이루는 댓구다.
댓구는 어떤식으로던지 의미상 연결되어 있다. 꼭!
여기서도 앞구절의 동사 作자와 뒷구절의
동사 生자는 의미상 상통하는 글자다.
作은 생명이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을 말하고
生은 생명이 있는 것을 낳는 것을 말한다.
결국 作이나 生이나 같은 말인 것이다.
그러면 有자는 동사 辭자의 댓구이니 동사로 쓰였을 것이고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 가장 자연스럽다.
나는 이 말을 <품속에 둔다>로 해석하려고 한다
萬物 作焉而不辭 生而不有
자연은 무엇을 만들어내어도 자랑하지 않고
무엇을 낳아도 품속에 끼고 있지 않는다.
(그러면 경숙이 아줌마가 10장에서 生之畜之 生而不有를
짐승같이 있는 듯 없는 듯 살라는 말이라고 우기는
것도 당연히 틀린 것이겠지?
도올은 한술 더뜬다.
뭐? 도는 창조하고, 덕은 축적한다고?
이문장은
<무엇을 기르건 길러서 품안에 두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다.
生은 낳는다는 뜻이고 畜은 기른다는 뜻이며
之는 대명사로 <이것 ,그것>으로 쓰이지 않는가?)
그 다음 爲而不恃
뭐? 도올이 육갑을 떤다고?
그럼 경숙이 아줌마는 칠갑을 떨고 있나?
이 문장에서 爲자는 爲美, 爲善의 爲자가 꾸밀 위(僞)의 뜻으로 쓰인 것과는 달리
<할 위>자로 쓰였다.
글자 그대로 <~을 한다>는 뜻이다.
恃는 <의지할 시>
<~을 하되 의지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
무슨 일을 하는데 있어서 자신이 덕보려고 그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연이 무슨 덕보자고 나무를 키우고 말을 살찌우나?
功成而不居
이 문장은 쉽다.
<공이 이루어져도 차지하지 않는다.>
夫唯不居 是以不去
<대저 자연은 오로지 차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잃어버리지 않느니.
너희도 이와 같이 자연을 본받아
무엇을 차지하려고 하지 말지니라
그러면 잃어버릴 일이 없으리라.>
여기까지가 2장의 요 즉 겉뜻이다.
2장의 묘 즉 속뜻이 3장에서 화려하게 펼쳐진다.
爲無爲
즉 왕이시여 백성을 속이소서 그러나 들키지 마소서
하는 말로...!
2장을 마치기 전에 분명히 해두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경숙이 아줌마가 이야기한 바 있듯이 도덕경은 종교철학서가 아니라 정치교과서다.
누구를 위한 정치교과서인가?
왕과 그리고, 공경대부이다.
<그리고>를 붙인 이유는 이 둘은 입장이 약간 다르기 때문이다.
왕에게 필요한 도는 牧民之道이다.
그러나 공경대부는 牧民之道외에 한가지가 더 필요하다.
保身之道, 벼슬자리를 보존하는 방책이다.
도덕경은 牧民之道, 保身之道 이 두가지를 가르치는 정치교과서이다.
2500년전 노자의 시대에 백성 즉 민은 정치라는 걸 입에 담을 만한 존재가 못 되었다.
정치를 배워보려는 발칙한 것이 혹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에는 책이라는 것이 대작대기에 글씨를 써서
가죽끈으로 묶어놓은 것이어서 요즘 책 분량으로 한 권을 옮기자면
수레하나로도 모자랄 지경이었으니
온 나라안에 책이라야 요즘 분량으로 몇 권되지도 않는
難得之貨 중에 난득지화였다.
도덕경은 절대로 백성을 교화시켜서 성인을 만들자는 책이 아니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성인은 삼대의 성인 즉 요순임금과 우임금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인은 ~"라는 말이 나오면
"주상전하 요순임금은 이리하셨습니다"로 알아들으면 거의 틀림이 없다.
그러면 왕이 아닌 우리에게는 필요없는 책인가?
민주주의가 화려하게 꽃핀 21세기에는
온 국민 한 사람 한사람이 모두가 왕이다.
그러니 온 국민이 제대로 된 정치교육을 받아서 실천해야
나라가 제대로 선다.
도덕경의 가르침을 한 마디도 놓치지 말고 새겨들을 지어다.
도덕경 제3장
거짓없이 모범을 보이소서, 뉘 있어 아니 따르겠습니까
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是以 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知者不監爲也
爲無爲 則無不治
< 내가 한 천한 해석 >
어진 이를 숭상하여 백성들이 다투게 하지 말라.
(권력다툼을 하지 말라 백성들이 본받는다)
보화를 숭상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도적질하게 하지 말라.
(사치풍조를 조장하지 말라 백성들이 본받는다)
욕심 낼만한 것을 보여서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라.
(상류층이 문란하지 않으면 온 나라가 건전해질 것이다)
그래서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우게 하고 그 배를 부르게 하고 그 뜻을 약하게 하고 그 뼈를 강하게 한다.
(그래서 현군은
백성의 살림살이를 풍족하게 하여
남의 밥그릇을 탐내지 않게 하고,
백성들의 윤리교육을 똑바로 시켜
부귀공명에 눈멀지 않게 한다.)
항상 백성으로 하여금 아는 것이 없게 하고 욕심이 없게 하며
무릇 知者들로 하여금 감히 거짓을 못하게 하라.
(항상 백성들이 부귀공명에 욕심을 내는 일이 없도록 하는 한편,
지도자라 하는 자들이 백성을 속이는 짓
<겉으로는 모범을 보이는 척 하면서 뒤로는 사리사욕을 채우는>을 못하게 하라)
일을 함에 거짓이 없다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나라를 다스림에 거짓없이 모범을 보이면 국태민안 하리라.)
도올의 해석이나 경숙이 아줌마의 해석은 입에 담을 가치도 없기에 이 3장에서는 두 사람의 해석은 생략하겠습니다.
이 두 사람뿐 아니라 노자를 공부했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도덕경 제3장의 내용을 <백성을 우민화하라>.
즉 <백성을 바보로 만들어 놓으면 사고치는 자가 없어서 나라가 편안해지리라>
라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국민경제 안정과 지도층의 솔선수범을 전제로 한 도덕성 회복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시무책을 백성의 우민화를 꾀한 현실도피책이라고 치부하였으니..!
도덕경 제3장의 핵심은 爲無爲 則無不治로 요약된다.
일을 함에 거짓이 없다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임금이시여 거짓없이 모범을 보이면 아니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無爲는 노자사상의 핵심으로 지목된다.
그런데 이 無爲가 지난 2500년간 억울한 누명을 쓰고 한스러운 세월을 보냈다.
흔히 노자 사상은 "無爲自然"
<꾸밈없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렇게 정의된다.
이 말은 곧 자유방임을 의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간섭 없이 그대로 놓아두면 모든 것이 순리에 따라 저절로 해결되리라.>
그래서 노자의 無爲사상을 현실도피 내지는 이상주의라고 말한다.
이것은 누명이다.
내가 도덕경을 통해 만난 노자는 지극히 속물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전형적인 중국사람이다.
그는 이상주의자가 아닌 냉철한 현실주의자였으며
현실도피자가 아닌 투사적 현실참여자였다.
2장에서 노자는
"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라고 말했다.
여기서 無爲는 꾸밈이 없는 것이다.
꾸밈이 없는 것은 곧 거짓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는 거짓을 행하지 않고 말없이 모범을 보인다는 말이다.
여기서 보여지듯이 무위는 절대로 부작위 또는 방임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이 무위의 2500년 한을 풀기 위해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尙賢은 똑똑한 사람을 숭상하지 말라는 말이고
不貴難得之貨는 難得之貨 즉 보화(사치품)을 귀하게 여기지 말라는 말이다.
그런데 不貴難得之貨는 몰라도 不尙賢하면 나라가 절단이 난다.
똑똑한 인재를 푸대접하고 제대로 굴러갈 나라가 있을까?
그래서 노자를 백성의 우민화를 꾀하는 공상주의자라 한다.
그러나 이 문장의 핵심은 不尙賢, 不貴難得之貨 이 아니라 使民不爭, 使民不爲盜이다.
백성이 싸우거나 도둑질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 이문장의 요점이다.
尙賢, 貴難得之貨 하는 것은 그러한 사단의 원인을 제공하는
여러 요인의 예를 들어놓은 것뿐이다.
不尙賢은 무엇을 말하는가?
2500년전 노자의 시대에 현자를 숭상한다는 것은 벼슬을 주어 등용하는 것을 뜻했다.
당시에는 달리 취직이라는 게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누가 총애를 받으면 시기하는 자들이 생기고
그것이 권력다툼으로 번지는 것은 동서고금이 똑 같다.
그래서 이 말은 드러내 놓고 편애를 하여 권력다툼을 조장하지 말라는 뜻이다.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보화를 귀히 여기면 백성이 도적질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보화는 사치품이다.
상류층이 사치풍조가 심하면 하층민들도 그 물이 들기 마련이다.
멀리 예를 들것도 없이 지금 우리나라가 딱 이 꼴이 아닌가.
이렇게 살펴보았듯이
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는
권세 있는 자들, 부자들이 권력을 탐하고 사치하면 서민들도 따라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강남 아파트 값이 몇 십억씩 나가고 백화점에서는 몇 천만원 짜리 수입팬티가 없어서 못 파는 모습을 보면 속이 확 뒤집어진다.
<나도 한번 그렇게 삐까뻔쩍하게 살아보고 죽고싶다. 은행이라도 한번 털어볼까? 까짓거.>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말이다.
그래서 성인 즉 현군은
是以 聖人之治 虛其心 弱其志
백성들에게 부귀공명의 덧없음을 가르쳐 마음을 비우게 하고,
천하를 손에 쥐고 그 이름을 떨치겠다는 야심을 버리게 한다.
그런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아무리 거룩한 성인의 가르침이라도
배고픈 백성들에겐 도리어 배부른 놈들이
염장지르는 소리로 밖에 안 들린다.
그래서 노자는 사회기강 확립의 전제조건으로 국민생활안정을 먼저 꼽고 있다.
是以 聖人之治 實其腹 强其骨
백성의 배를 채우고 뼈를 튼튼하게 만들어라
그래서 결론은 이렇다.
常使民無知無欲 使夫知者不監爲也
爲無爲 則無不治
항상 백성으로 하여금 아는 것이 없게 하고 욕심이 없게 하며
무릇 知者들로 하여금 감히 거짓을 못하게 하라.
(항상 백성들이 부귀공명에 욕심을 내는 일이 없도록 하는 한편,
지도자라 하는 자들이 백성을 속이는 짓
<겉으로는 모범을 보이 는 척 하면서 뒤로는 사리사욕을 채우는>을 못하게 하라)
다스림에 거짓이 없으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으리라.
爲無爲 則無不治
爲無爲는 일을 함에 꾸밈이 없는 것을 말한다.
꾸밈이 없다는 말은 곧 거짓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爲無爲는 일을 함에 거짓이 없다는 말이다.
治는 다스림이다.
이것은 <군림>이나 <지배>를 뜻하지 않는다.
治療나 治水가 병을 지배하고 물위에 군림하는 것을 뜻하지 않듯이.
治는 탈이 난 것을 고치고 막힌 것을 뚫고 넘친 것을 수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제대로 하는 것이 政治다.
爲無爲 則無不治
일을 함에 거짓이 없으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으리라.
이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 정치철학인가?
이러한 국민경제 안정과 지도층의 솔선수범을 전제로 한 도덕성 회복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시무책을 백성의 우민화를 꾀한 공상이라고 치부하였으니..!
참 2장에서
故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의 해석을
3장으로 미루어 놓았었다.
이 문장의 뜻은 천하가 유와 무가 다름을
난과 이가 다름을
장과 단이 다름을 알기 때문에
그 두 가지 것들에 대하여 차이를 두고 대한다는 말이다.
차별되는 두 가지가 있으면 더 좋은 것을 가지려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이문장의 속뜻은 인간은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추구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너도 나도 이익만 쫓으면 세상은 권력만능, 물질만능의 아수라장이 되어버린다.
노자는 이 인간의 권력욕, 물질욕을 교육으로써 교화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 교화의 과정을 거쳐 인간이 태어날 때 지녔던 본연의 순수한 심성이 바로
無爲自然
꾸밈도 없고 거짓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마음이다.
단 그 전제조건으로 기본적인 경제조건 충족, 지도층의 솔선수범을 내걸었다.
이보다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시국수습책이 또 있을까?
그런데도 세상사람들은 노자의 본뜻은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백성의 우민화나 꿈꾼 공상주의자라고 손가락질하였다.
그럼 왜 2장에서 위무위를
<왕이여 백성을 속이소서, 그러나 들키지 마소서> 라고 표현했느냐고요?
이런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어느 마을에 조상 대대로 전해오는 예언이 있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거든 헛간에 숨어있거라.
절대로 헛간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
정 참기 어렵거든 눈이라도 가리거라
어느 해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피난을 떠났습니다.
단 두 집만이 마을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 두 집의 노인들이 마을의 예언을 거론하며 피난을 만류하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자 한 집의 노인은 집안 사람들을 모두 헛간에 넣어놓고
문에 못질을 해버렸습니다.
새벽 무렵 마을에 적병이들어와 집집마다 분탕질을 하고 야단이 났습니다.
집안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다가 급기야 문을 부수고 뛰어나와 도망을 가다가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다른 한 집은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노인이 가족을 모두 모아놓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무래도 예언만 믿고 있기는 불안하니 우리도 피난을 가자,
그러나 아주 안 믿기도 그러니 너희는 모두 눈을 가리고
내가 앞장서서 인도하는 데로만 따라오너라.
그리고는 가족들의 눈을 가리고, 끈으로 한 줄로 묶은 채 자신이 앞장을 섰습니다.
그리고는 밤새도록 마을을 뱅뱅 돌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에게는 이제 어디쯤 왔으니 조금만 더가면 어느 마을이다. 끊임없이 얘기하면서.
그렇게 밤새 마을을 뱅뱅 돌던 노인은 새벽이 다가오자
가족들에게 저 앞에 빈집이 있으니 쉬어가자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는 가족들을 자기 집 헛간에 넣었습니다.
밤새도록 눈을 가리고 걸었던 가족들을 피곤하여 모두 곯아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사이 마을에는 적병이 들어와서 분탕질을 해댔지만
가족들은 너무도 피곤하여 그것도 모른 채 잠만 잤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고 가족들이 잠을 깨었을 때
이미 욕심을 다 채운 적병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고 없었습니다.
다소 억지스런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 나라의 정치인이나 언론들이 이 이야기를 꼭 되새겨 봤으면 합니다.
국가에 각종 어려움이 발생했을 때 이 나라의 정치인과 언론들이 취한 태도는 과연 어떠했습니까?
정치인들은 서로 상대방의 실책을 폭로하는 천재일우의 기회로만 여기고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용어들을 동원하여 국민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문제의 핵심을 놓치지는 않았습니까?
언론들은 그러한 작태를 더욱 부추기고 갈팡질팡 온 나라를 들뜨게 하지는 않았습니까? 이 나라의 지도자 정치인과 언론은 과연 이 나라에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 어떻게 국민들을 이끌 것인지에 대한 기본철학이 있습니까?
**[올린이 주] 뒷부분에서 이 친구 많이 흥분하고 있군요! 앞으로는 이런 일 없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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