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도 춘추 시대의 동이족 국가 초(楚)국 고현(苦縣) 인이다.는 글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 글

작성자노자 선|작성시간02.11.25|조회수219 목록 댓글 0
- 출처 : 안원전의 담론(http://www.cheramia.net)



< 담론 193.당황실의 미스테리-황제헌원, 진시황, 주문왕, 요,순,우,백이와 같은 동이족 혈통1 >







▒ 노자는

원명이 이이(李耳)로 자(字)는 백양(伯陽), 시호는 담(聃)으로,
그는 광대(光大)한 이(李)씨 성(姓)의 제 1인이다.
그는 춘추 전기의 동이족 국가 초(楚)국 고현(苦縣) 인이다.

초나라 사람 굴원은 그의 불후의 명작 초사에서
초나라와 자신이 동이족 전욱의 후예로 단군성조인 동황태일을 받들고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초나라가 있었던 양자강 중류의 호남성은 동이족의 안마당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서량지의 책과
사마천의 「사기」
그리고 「환단고기」와 「규원사화」, 「단기고사」 등을

중국에 있는 그 외의 다양한 보조사료들과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식민사학과 모화사대사관의 온상으로 전락한 강단사학자들이
두 무릎 조아리는 「사기」가 오히려 조작되었으며

정작 「환단고기」가 진실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이 오늘날의 중국으로 터를 잡아가게 되는 터닝포인트가 바로
우리국의 14대 자오지(치우) 천왕과 황제와의 판천 전투이다.

단재 신채호는
「죽서기년(竹書紀年)」이 마치 사서삼경, 일본서기, 사기와 같이 위서라 했다.

그러나

동이겨레의 조상에 관한 한, 사마천의 「사기」보다는 덜 위서인 이 책이
개필될 적에 중국사가들의 역사관점이 드러나 있어
중요한 쟁점에 대해 우리의 사서와 일치하는 부분은 소화해서 보면 된다.

편년체로 엮어진 「죽서기년(竹書紀年)」는
하, 은, 주로부터 춘추전국시대의 진(晋), 전국시대 위(魏)나라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서진(西晋)시대(AD 265-316) 무제 태강 원년(AD 280) 전후시기에
하남성 급(汲) 현에 있는 위(魏) 양왕(襄王:BC 334-319)의 묘에서 발굴된 고문서로
그나마 후대의 사가에 의해 수정, 보완, 첨삭되었다.

수(隋)나라 때까지도 13권이 전해지고 있었는데,
점차 흩어져 남송시대에 와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하며,

현재 양(梁)의 심약(沈約)의 주(註)가 있는 「주서기년(註書紀年)」 2권은
원(元)·명(明) 때에 위작 된 것이다.

1917년 왕국유(王國維)는
고서 안에 인용된 본래의 기년(紀年)을 집성(集成), 교정하여
「고본죽서기년輯校」를 저술하고
다시 「今本죽서기년」과 「古本죽서기년」의 차이점을 밝힌 일이 있다.


이 「古本죽서기년」은
발굴지명으로 「급총기년(汲塚紀年)」이라고도 부른다.

엄밀히 말하면
필자는 본서에서 이 「古本죽서기년」을 풀어놓은
통주(通州) 뇌학기(雷學淇)의 <죽서기년의증(竹書紀年義證)>을 자료로 삼았음을 참고로 밝힌다.


먼저
「환단고기」<삼성기 하편>을 간략히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10세 갈고(葛古) 환웅때에 염농(炎農)의 나라와 땅의 경계를 획정했다.

14세 자오지(치우) 환웅은 신령한 용맹이 뛰어나 동두철액(철투구)으로
짙은 안개를 일으켰으며, 구치(九治)라는 채광기를 만들어 채광해
철을 주조해 병장기를 만들어 내니 온 천하가 두려워했다.

치우천왕은 염농이 쇠퇴하는 것을 보고
드디어 웅대한 뜻을 세워 서쪽에서 천병(天兵)을 여러 번 일으키고
또 삭도(索度)로부터 진군하여
회대 (淮垈:양자강 유역의 동이 9족 및 묘요, 월, 초 등 우리겨레 거주지역) 사이를 차지했다.

헌원후(軒侯:황제)가 일어나자
곧장 탁록의 벌판으로 나아가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후에 오(吳) 장군을 서쪽으로 보내어 고신(高辛)을 쳐서 공을 세우게 했다.


이때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탁( )의 북쪽에는 대요(뇨)(大撓),
동쪽에는 *창힐(倉 ),
서쪽에는 헌원이 있어

서로 군사를 내어 승리를 오로지 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처음에 헌원은 치우 천왕보다 조금 뒤에 일어났다.
그래서 싸울 때마다 불리하여 대요에게 의지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창힐에게도 의지하고자 했으나 허사였는데
이는 두 나라 모두가 치우 천왕을 따르는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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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창힐 :

지나족은 지나족화 한 창힐이 문자를 만들었다고 했으나
「환단고기(桓檀古記)」에서는
주곡(主穀:농림부 장관)을 맡은 고시례(高矢禮)가 표범이 달려드는 바람에
돌을 던진 것이 바위에 맞아 불꽃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불을 만들었듯이

사관(史官)으로 서계(書契)를 만들던 신지혁덕(神誌赫德)이
암사슴을 사냥하다가 그 발자국을 보고 녹도문을 만들었음을 밝히고 있다.

창힐은 여기에서 밝혔듯이
치우천왕에게 부도의 글을 받은 적은 있다.

그러나
창힐은 고신과 더불어 치우천왕의 후예로
대극성(大棘城:昌黎)에서 태어나 산동 회북(淮北)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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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요는
일찍이 치우천왕으로부터 간지(干支)의 이치를 배웠고

창힐은
치우천왕으로부터 부도(符圖)의 글을 받았으니

당시의 제후들이 모두 신하로서 천왕을 섬긴 것은 이 때문이었다.

사마천이 「사기」에 이르기를
'제후들이 모두 헌원에게 복종하였으나
다만 치우만은 가장 사나워서 그를 토벌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럼 잠시 황제는 사람인가 신인가라는 제하에 황제의 미스테리를 밝히고 있는
중국역사의 미스테리에 등장하는 기사를 잠시 보기로 한다.

이 기사내용은
당연히 왜곡, 과장되고 신성시되는 기사로 가득하지만
중국정부가 받아들이고 있는 사관이라 생각하는 차원에서 일단 보면 된다.

섬서성 중간부분에 해당되는 곳으로
서안(西安)과 연안(延安) 중간 북부고원에 보면 황릉현(黃陵縣)이 있다.

이 곳에 1500년 이상 되는 울울창창한 측백나무들이 가득찬
교산(橋山)이란 곳이 있는데

이 교산 중턱에 황제 사당이 조성되어있고
황제 사당 앞에는 한무제가 옷을 벗어 걸어놓았다는 잣나무가 어마어마하게 자라
이를 기념하는 표지를 앞에 두르고 있다.

또, 교산 정상에는 바로 황제헌원의 능묘가 조성되어있는데,
능묘 앞에는 한무제가 올라갔다 내려왔다는 누각이 조성되어
층계로 올라갔다 내려오게 조성되어있다.

▒ 사진 : 한무제가 올랐다는 누대와 황릉 및 갑옷을 걸어놓았다는 사당 앞 나무 및 표지판 확대.


















(사진인물) 필자 안원전 선생님 이시다


▒ 황제는 사람인가 신인가.

지금까지도 학술계에 정론은 없다.

중국의 저명한 신화연구가 원가(袁珂)는
황제가 신화전설가운데의 인물이라고 인정한다.

그는 뇌전(雷電)에서 기(起)하였으므로
최초의 신직(神職)은 뇌신(雷神)이 된다.

후에 뇌신으로 우뚝 일어나 중앙 천제가 되었다.
전해오길 그는 얼굴길이가 4장(張)으로 동시에 사방을 돌아볼 수 있어
어느 지방에 무슨 일이 있는지 그의 눈길을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황제는
기타 4 천제와 싸워 승리한 후 자신의 신국을 건설했다.

황제신화 전설의 주요부분에 관해 황제와 염제, 황제와 치우의 전쟁을 빼놓을 수 없다.

황제와 염제의 판천(阪泉) 전쟁 중에
황제는 "수웅(帥熊), 랑(狼),표(豹), 추( ),호(虎)를 앞세우고
조(雕:독수리), 할( :靑鳥로 죽을때까지 물러서지 않아 무인의 상징깃털로 쓰임),
송골매(鷹), 소리개(鳶)를 기치로 삼았으니 이로써 전쟁규모를 쉽게 헤아릴 수 있다.

황제와 치우의 탁록전은 특히 참혹하고 치열해서
"혈류에 절구공이가 떠내려갔다(血流漂杵)"고 전한다.
이 전쟁 중에는 쌍방이 모두 신공마법(神功魔法)을 베풀었다.

처음에 치우(蚩尤)가 법술을 베풀어
즉각 큰 연무가 미만해 인마와 사람 그림자를 구분할 수 없었다.

황제는
다시 풍후(風后)에게 명을 내려 지남거(指南車)를 만들게 하여 방향을 식별케 하고
치우를 쳐 이겼다.
(이게 거짓말이란 걸 이젠 알 것이다)

그러자 치우는
풍백, 우사를 청해와서 풍우를 크게 일으켜 폭풍우로 황제의 인마를
뒤죽박죽으로 만들 정도로 교란시켰다.

황제는
또 발(魃:한발귀신)이라는 천녀(天女)를 청해와서 폭우를 멈추게 하고
대군을 지휘하여 벼락, 천둥, 섬전(閃電)의 기세로
치우 부하의 진형(陣形)의 중앙을 어지럽히고
승기를 잡아
치우를 죽여 그 머리를 탁록에 매장했으니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張家口市) 동남의 탁록현으로 이곳에 치우분(蚩尤墳) 한 기가 있다.

중국의 사가들은
황제부락과 염제부락이 합병한 이후 통칭 화하족(華夏族)이라 했다고 한다.

이 말은
화하족의 출발이 염제부락의 마지막 왕 유망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유망은 동이족 강(姜)씨 시조 염제 신농의 마지막 왕으로
흔히 부족국가 시대인 고로 추장 유망으로도 기록되어 전해지는 인물이다.

그는 동족인 치우 천왕의 배달 환웅국에도 전쟁을 벌인 바 있으나
치우 천왕에게 격퇴 당하자
이번에는 황제에게 대들다 멸망해

치우 천왕과 황제가 72회의 판천 전투를 벌이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기에 앞서
우선 말이 나온 김에

중국인들이 흔히 화샤라 발음하는 화하족(華夏族)에 대해
중국학자들이 연구한 결과를 잠시 짚고 넘어가자.


앞서 필자는
지나 한(漢) 족이 동이족으로부터 서이족으로 민족 개량을 한 다음
다시 수많은 혼혈 잡종과정(하이브리드화)을 통해 서하족으로 건너뛰고
다시 화하족으로 변했다가 진

한시절에 비로소 지금의 한(漢) 족이 되었노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이야기를 말하다 보면
혈통 얘기가 나오고 왕실의 뿌리가 나오고 하여
이야기가 약간 길겠지만

현재 말하고 있는 부분은
황제와 치우의 전쟁 스토리를 말하고 있던 중이니까
약간 혼돈스러울 정도로 복잡하게 전개되어도
스토리중심을 까먹지 말고 나중에 다시 기억해주면 고맙겠다.

▒ 사진 : 노자






(사진설명) 노자는 원명이 이이(李耳)로 자(字)는 백양(伯陽), 시호는 담(聃)으로, 그는 광대(光大)한 이(李)씨 성(姓)의 제 1인이다.
그는 춘추 전기의 동이족 국가 초(楚)국 고현(苦縣) 인이다.



우선 당(唐) 황실의 미스테리부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당나라 하면
하이브리드화된 지나족이 한족(漢族)의 정체성을 가진 이후
지나 역사상 가장 번성한 왕실이다.

진나라 시황제의 혈통 여(呂)씨와 왕실의 뿌리 성씨
영( )이 동이족이라는 건 앞서 밝힌 바 있지만
당 황실이 동이족이라 하면 얼른 납득이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정인지의 「고려사」를 보면

왕건의 혈통이 바로 당나라 숙종의 혈통으로 나오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동이족의 대륙사관적 시각이 아닌
반도사관의 시각으로 보면 전혀 감 잡지 못할 기사임을 알아야 한다.


당나라는 본래
중원본위의 국가에 속했으며
당나라의 황실 성(姓) 씨인 이(李) 씨는 동이족인 노자(老子)의 성(姓)씨에서 온 것이다.

지나의 사가들도
당 황실의 이(李) 씨 성이 이적(夷狄)의 혈통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唐初的皇室及其父祖之輩都有夷狄血統)
(당초적황실급기부조지배도유이적혈통)

따라서
당나라 초기의 정책, 사회풍속 등을 다시 한번 돌아보면 새로운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노자(老子)의 원명은 이이(李耳)로,
자(字)는 백양(伯陽)이며,
시호(諡)는 담(聃)이니, 광대(光大)한 이(李) 씨 성의 제(第) 1인이다.

그는 춘추(春秋) 전기(前期)의 동이(東夷)족 초국(楚國) 고현인(苦縣人)이다.


(계속)



(김산호 화백의 탁록대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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