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수록된 글은 인터넷에 올라잇는 글을 수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출처도 밝혀 놓았으니 문제는 없을 것으로 봅니다
노자를 공부하는 회원님께 공부를 위하여 자료를 위하여 모아 놓은 것 뿐입니다
혹시 저자분들이 자기 소개를 원한다면 글을 남겨주시면 다른 부분을 정정해 놓겟습니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강사: 김 춘 영 선생
들어가는 말
如是我聞(여시아문) - 나는 이렇게 들었다. 금강경 첫마디.
도덕경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집에 있는 책을 세어보니 그 권수가(老·莊을 포함해서)15권이나 되었다. 보지는 않고 책만 많이 모아 두었다. 노·장을 읽다보면 해석한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서두에 쓴 "如是我聞(여시아문)"처럼 내 경험으로 깨달은 바를 이렇게 말한 뿐이니 너그러우신 이해가 있으시기를 바란다.
도덕경은 81편의 시편으로 되었다. 전편 37편을 道經(도경)이라 하고 하편 34편 이후를 德經(덕경)이라한다.老子(노자)는 기원전 5세기 사람으로 짐작한다. 순자(旬子. BC315~236)의 글에 노담(老聃)의 이름이 나온다. 사마천(BC145-86)에 의해 쓰여진 史記列傳(사기열전)에 老子는 楚(초)나라 고현 곡인리 태생으로 성은 李씨요 이름은 耳(이)요 시호는 담(聃)이라 적혀있다. 周(주)나라 문서실의 기록관으로 녹을 먹고 있다가 떠날 즈음에 지금의 세관에 근무하는 尹喜(윤희)라는 자가 "선생은 이제 숨으려 하는거 같은데 이 사람을 위해 가르침을 남겨주시오"라는 청을 듣고 상·하 두 편의 글을 5000여자의 글에 남기고 떠났다. 또 다른 이설도 있다.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노패자라는 설도 있고 주나라의 史官(사관)담(聃)이라는 말도 있다.
또 이설 老子(노자)의 어머니가 배나무에 기대어 쉬고 있는데 대낮에 별똥별과 눈이 맞아 70년을 뱃속에 있다가 늙어서 백발이 되어서 태어났다고 노자라 한다. 노자는 철학자이다.
그 당시 세계를 이해하고 미래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하여 써놓은 책이다. 세계를 넓게 보는 눈으로 통찰력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 노자를 읽을 때 어떤「사유」를 포착할 줄 알아야한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세상을 움직이는「사유」「까닭」을 읽어내야 한다. 그럴려면「있음」에 접근하고, 「있음」에 접근하다보면 「존재」에 까지 밀고 들어갈 수 있다.
노·장을 읽을 때「자기」가 중요하다. 「자기」를 주장하고 읽으면 심오한 뜻을 깨칠 수가 없다. 자기의 경험법칙 안에서만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넓히는 작업이다. 자기 경험법칙 안에 타인의 경험법칙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이 이해하고 더 많이 포용하며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늘 한계를 경험한다.「자기」와 다름에 대하여 거부하고 배척하고자하는 강한「자아」가 또아리 틀고 있음을 모르고 있기도 한다. 노·장을 읽는 데에도 종교의 차이만큼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한다. 나는 노자 1장 강의를 들을 때 아! 천지는 하나님이 만드셨구나 하고 깨달았는데(나는 기독자 이니까) 그 선생님의 연구소를 방문하여 노자에「영생」의 개념이 있는냐고 여쭈었더니「없다」라는 대답이셨다. 그는 무신론자이시다. 그래서 노·장을 주해하는 사람마다 모두 조금씩 다르게 해석한다.
나는 无爲堂(무위당) 장일순 선생과 이현주 목사의 老子(노자)이야기와 多夕(다석 柳永模)지음, 박영호 편역의 老子(노자)와 宋恒龍(송항룡) 교수의 강의 내용에 많이 의존하였다.
1. 철학으로서의 老子(노자)
노자 1장의 첫줄에 道(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도대체 "道"란 무엇인가? 易經(역경)의 첫줄에도 道(도)에 관한 글이 나온다.노자의 "道(도)"해석은 여러 가지인데 易經(역경)의 해석은 단일하다 一陰一陽之謂道 生生之謂易(일음양지위도 생생지위역), 즉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면 그것이 도이다. 생생하게(우주학적)살아 있는 것, 즉 이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공간 위에서 항상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하는 것이 "易(역)"이다. 즉 一陰一陽(일음일양)하는 것이 "道(도)"이다 (宋교수)
老(노)·壯(장)·易(역)에 비추어 보면 과학은 허구(虛構)다. 왜냐, 同一性(동일성)이 무너진다. 反復性(반복성)이 무너진다. 과학은 반복하는 법칙위에서만 성립한다. 그래서 "普遍性(보편성)"이 무너진다.
"道(도)"란
1.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이라서 나타낼 수 없다.
2. 표현(表現)할 수 없다(문자와 언어로 담을 수 없다)
3. 규정(規定)할 수 없다.
4. 만질 수도 없다.
5. 형상화(形象化)할 수 없다.
그럼 "道(도)"란 무엇인가?
만물의 근원, 만물의 본체이기 때문에 표현할 수 없다. 그럼 과연 표현할 수 없는 존재는, 규명할 수 없는 존재는 무엇일까? 사실 周易(주역)은 "시간"哲學이다. 시간을 세밀하게 자른 것이 "찰나(刹那)"이다. 실생활에 "찰나"가 필요 없을 정도인데 동양사상에서는 時·空間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도 표현될 수 없다. 왜냐 "찰나"적으로 변하는데 어떻게 표현 할 수 있겠는가?
老子(노자)는 "破(파)"하는 철학이다 不定(부정)의 철학이다.
무엇을 깨느냐 모든 것이 시시때때로 변화하는데 규명할 수 없는 사실을 깨는 것이다.
"道可道 非常道(言) (도가도 비상도)(언)“
언어는 道(도)를 드러내는 양상인데 왜 분리하는지 모르겠다.
道(도)는 言(언)이다. 위의 문제는 "言語(언어)"를 문제 삼는다. 言表(언표)하면, 즉 말로 표현하면 이미 "道(常道)가 아니다.
書不盡言, 言不盡意(서불진언 언불진의)- 문자는 말로 표현하는 것만 못하고 언어는 사실의 뜻을 표현하지 못한다.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언어로 道를 표현할 수 없다. 말로서 표현된 것은 常道(상도)(늘 있는 道(도), 근원적으로 있어왔고 앞으로도 늘 있을 道(도))가 아니다.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참도(常道(상도))가 아니요.(불변의 도가 아니요)-보류해놓고 노자가 표현하는 道(도)는 언어로 표현 할 수 없는 것,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참 도가 아니다.
名可名이면 非常名(명가명이면 비상명)
여기서는 의미 즉 개념을 문제 삼는다.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커피 맛)
백묵 하나를 표현하려고 해도 금방시간이 지나니까 변화해 버렸기 때문에 꼭 그대로 표현할 수 없다.
이름을 命名(명명)하면, 이름을 지어서 부르면 그 본 실체의 모습은 아니다.
意味(名=개념으로 규정된 것은)로서 존재하는 것은 그 개념이 지시하는 참다운 모습(실상)은 아니다. - 하나로 규정된 모습은 있을 수 없다. 머물러 있지 않고 시시로 변하는데 규정된 모습은 있을 수 없다. 내 경험만큼만 보인다. A가 경험한 것과 B가 경험한 것은 다르다. 조건, 시간, 공간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름 붙이는 순간, 이미 개념(이름)으로 규명된 것은 사실의 세계가 아니다. 그 본래의 모습은 지나갔다.
無名 天地之始(무명 천지지시)
노자에 있어서는 始終(시종)이 없다. 그래서 生死(생사)가 없다. 天(천)은 陽(양)이고 地(지)는 陰(음)이다 그러니까 변화가 시작이다. 존재의 시작이다. 모든 존재의 개념의 대표는 천지(음양)이다.
"始(시) - 모든 변화하는 존재 자체가 "始(시)"이다.
道(도)는 그때그때 의미로(개념으로)변화 하는 것, 변화 앞에서 있는 것이 道(도)이다.
오늘은 어제하고 다르다. 오직 창조와 창신이 있다. 그래서 "破(파)"하다는 것이다.
破(파) - 머물러 있는 것을 깨라. 자꾸 着心(착심)에서 벗어나라 "깬다"는 것은 다른 차원으로 바뀐다는 것
잠에서 깨다. 그릇을 깬다(가치가 달라졌다). 한번 깨어서 가만히 있으면 道(도)가 아니다. 계속 깨어 나가야 한다. 살아있는 것이 된다.
生覺(생각) - 생생하게 깨닫는다. 살아서 깨고 또 깬다.
無名(무명) - 여기서 名(명)은 설명되어지고 규정, 개념화 되어지지 아니한 것은 무명이다.
무명은 無爲自然(무위자연)이다.
무명은 모든 존재의 시·공간을 벗어날 실존의 본모습이다.
有名(유명)은 萬物之母(만물지모)
有名(유명)은 말로 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구체적으로 표현 된 것을 만물이라 한다. 모든 의식성 속에 들어올 때 만물이다. 돌·나무·의자·물·공기 등이 구체적으로 존재한다. 有名(유명)은 즉 경험에 바탕하는 세계이다. 설명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고 규정할 수 있는 세계는 만물의 바탕이다.
1장의 결론은
有名(유명) - 道可道(도가도), 名可名(명가명) → 표현된 세계
無名(무명) - 非常道(비상도), 非常名(비상명) → 표현할 수 없는 세계, 근본·근원·無爲自
然(무위자연) (함이(행위)없이 스스로 그러한 것)
老(노)·莊(장)을 공부하는 목적도 溫故而知新(온고이지신)하자는 것이다.
옛날 것, 고전을 찾아 들어가서(온) 新(신), 즉 生命(생명), 자꾸 새로운 모습으로 살려내자는 것 定型(정형)의 틀 속에서 끌어내어 살아 있는 生命(생명)으로 살려 내자는 것이다.
제1장(道의 本體)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
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徼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徼(요: 변방 요, 돌다, 구하다)
말로 설명된 진리는 영원한 진리가 아니다.
이름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이름은 없다.
이름 붙일 수없는 진리에서 하늘과 땅이 나왔으며
진리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이름을 가진 만물이 나온다.
나는 늘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 자체와
진리의 작용으로 나타난 현상을 동시에 보고자 한다.
실체와 현상이 동일하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사실이 그러하니 아득하고 신비롭다. 실체가 곧 현상이요, 현상이 곧 실체이다.
정신계와 물질계의 모든 현상 신비한 현상이 다 실체와 현상의 작용이다.
제2장(養身: 몸을 온전하게 보살핌)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 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皆:모두 개 /斯:이 사,어조사 /已:이미 이,그치다 /恃:믿을 시 /焉:어조사 언
온 세상 사람이 모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여기지만,
무엇을 아름답다고 여기면 그와 동시에 추한 것도 생긴다.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은 것을 좋다고 여기지만,
무엇을 좋아한다고 여기면 그와 동시에 좋지 못한 것도 생긴다.
어느 한 쪽을 인정하는 것은 다른 쪽이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양이 있는 현상과 모양이 없는 근원,
어려움과 쉬움,
길고 짧음,
높고 낮음,
맑은 소리와 탁한 소리,
앞과 뒤,
이런 것은 모두 상대적으로 동시에 생긴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욕심을 부려 억지로 하지않으며,
누구를 훈계하거나 가르치려 들지도 않는다.
온갖 일을 하면서도 누구를 부추기거나 잔소리를 하지 않고,
무엇을 만들어내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일을 하고서도 뽐내지 않는다.
무엇을 완성해 놓고도 거기에 집착하거나
자기가 무엇을 했다는 생각이 없다.
그는 어디에 머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원하다.
제3장(安民:사람들의 마음을 편히 쉬게 함)
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是以 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常使民 無知無欲
使夫智者 不敢爲也
爲無爲 則無不治
※尙:숭상할 상 /敢:감히 감, 결단성 있음
학벌과 재능 있는 사람을 높이면,
질투심과 경쟁심이 일어나
사람들 사이에서 다툼이 사라지지 않는다.
재물을 너무 귀하게 여기면,
소유에 대한 욕망이 생겨
남의 것을 훔치려고 할 것이다.
욕심을 일으킬 만한 것을 과시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터득한 사람은
겉마음을 비우고 속마음을 채우도록 가르치며,
에고(ego)의 의지를 약하게 하고 참 자아(自我)를 강하게 하도록 한다.
그는 머리로 판단하는 지식과 욕망을 버리게 한다.
그러면 뭘 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말이 많아도
그들의 말은 허공을 치는 주먹질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욕망과 에고의 의지와 피상적인 앎을 버리고)
자연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면 모든 것이 조화롭게 흘러 갈 것이다.
제5장(虛用:비어 있는 근원의 쓸모)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天地之間 其猶橐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多言數窮 不如守中
※芻:꼴 추, 말린풀 /狗:개 구 /猶: 오히려 유, 마치~ 과 같다 /橐;전대 탁 풀무 /籥;피리 약
屈:꺽일 굴, 마르지 않는다 /愈: 나을 유, 더할 /數;자수 삭
하늘과 땅은 편견이 없다.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다)
만물을 동등하게 대한다.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처럼 대한다)
도를 터득한 사람도 편견이 없다. (세상이치를 깨달은 사람은 어질지 않다, 情이 없어서일 까? 아니다)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한다. (모든 사람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처럼 담담하게 대한다)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와 같다. (하늘과 땅 사이 공간은 마치 풀무와도 같지 않은가?)
속이 비었으면서도 생성이 멈추지 않고, (비어 있으나 마르지 않고, )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많이 나온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점점 더 많이 나온다)
말이 많으면 생명력이 빨리 소진한다. (말이 많으면 막힘이 잦으니)
그러니 비어있는 근원에 머물러 (흉중에 넣어두고 지킴만 같지 못하구나)
고요히 침묵하도록 하라.
제25장(老子의 自然觀)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寥兮
獨立而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 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故 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域中 有四大 而王居其一焉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寂兮寥兮(적혜료혜:고요할적,어조사혜,쓸쓸할료- 고요하고 보이지않음)
하늘과 땅이 있기 전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소리가 없어 들을 수도 없고, 모양이 없어 볼 수도 없으나,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우뚝 서서 변치 않는다.
그 영향력은 미치지 않는데 없고, 움직임도 멈추지 않는다. 가히 만물의 어머니라 할만하다.
사람의 상대적인 개념으로는 그 이름을 붙일 수 없어 나는 그저 ‘도’라고도 하고
마지못해 ‘큰 것’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크기 때문에 무한정 뻗어나간다. 무한정 뻗어 나가기 때문에 멀리 간다.
멀리가면 마지막에는 근원으로 되돌아온다.
(결국은 아무 곳으로도 가지 않고, 자기 안에서 만물을 기르는 것이다)
도 자체는 무한하다. 하늘과 땅과 사람은 모두 도가 스스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과 사람 역시 무한한 것이다. 이렇게 도가 자신을 나타내는 양상을 크게 넷으로 나눌 때 사람도 그중 한 자리를 차지한다.
사람은 땅의 법칙을 본받고, 땅은 하늘의 법칙을, 하늘은 도의 법칙을 본받는다.
그리고 도는 스스로 그러한 자신의 본성을 본받는다.
동구권 여행기
모스크바 일정을 끝내고 성·페테르스부르크행 야간열차를 탔다. 안내서에는 열차이름이「붉은 화살」이라고 되어있는데 화살처럼 빠른가 보다. 기대가 되었다. 저녁 10시 역에 도착하여 4인1실의 열차에 오르고 보니 기대는 절망으로 변했다. 9시간 동안 어떻게 가나? 이 찜통의 무더위 속에 반바지와 부채를 챙겨오지 않은 것이 후회막급이다. 또 가이드는 방마다 다니면서 문 단속법과 안에서 튼튼한 잠금장치가 있는데도 잠금장치를 잠근 후에 줄을 사용해서 문고리를 다른 고정된 부분에 단단히 묶어두고 문은 절대 열지 말라고 한다. 어제 모스크바 공항 입국장에서 서울의 친구부부를 만났는데 우리는 다음날 저녁 열차 편으로 이동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김형! 도둑 조심하시오 가방을 기둥에 묶고 열쇠를 채워야 하오"라고 당부하던 말도 생각나고.... 그런데 웬 이불은 이렇게 두텁노 비좁은 공간에 있는 이불은 짐칸위에 억지로 쑤셔 박고 창문을 열어보려고 안간힘을 쓰니 조금 열렸다. 그래도 바람한점 없는 날씨가 아무도움을 주지 않는다. 드디어 열차가 움직인다. 바람이 솔솔 분다. 하루의 일정이 피곤한지라 곧 잠에 빠져든다. 추워서 눈을 뜨니 창문은 닫혔고 모두가 천덕꾸러기 이불을 깔고 모포를 덮고 잔다. 새벽 4시반 벌써 창밖은 여명의 밝음이 찾아왔다. 문을 열고 복도를 보니 우리 일행이 왔다갔다 한다. 화장실 옆에 반 평쯤 되는 흡연실이 있다. 그곳에 안병주 선생님께서 나와 계신다. 아침 문안을 여쭈고 자연히 러시아의 자연경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러시아는 모스크바를 중심하여 동서로 1000㎞안에 산이 전혀 없다고 한다. 모스크바에서 성·페테르스부르크까지 800㎞를 8시간 반 동안 이 열차로 달린다. 지금우리는 삼림지대를 지나고 있다. 미명의 어스름 속에서도 창밖으로 스치는 나무는 그 유명한 자작나무들이다. 나무 등걸이 희끗희끗하며 지나간다. 몇 시간이고 끝이 없는 것 같다. 정말 평원 앞에 큰 대자를 붙여 대평원(大平原)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안병주 선생님은 우리에게 맹자를 가르쳐 주신 분이다. "진리의 벗 39호"에 보면 톨스토이가「부활」을 집필하게 된 배경을 말씀해 놓으셨다. 우리가 지금 러시아를 횡단하고 있지 않는가. 자연히 이 러시아의 자연이 배출한 문호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부활집필의 배경을 여기에 잠깐 옮겨보겠다. 고니시(少西)라는 일본인 러시아 유학생에 의해 한문에서 러시아어로 번역된 老子의 원고를 읽고 영·독·불어로 번역된 老子의 번역문과 대조하여 읽은 뒤 자신의 취향에 맞게 의역하여 완성한 것이「톨수토이 역 노자 도덕경」인데 톨스토이는 노자의 철학에 대단히 심취 하였던 것 같다. 「노자」변역 작업이 진척되어 제 31장의 "무기란 상서롭지 못한 도구이니 군자의 도구가 아니다.(兵者不祥之器, 非君子之器)라는 대목에 이르자 톨스토이는 책상을 치고 뛸 듯이 기뻐하며 "참으로 통쾌하다. 非戰論을 이처럼 極論할 수 있기에 노자는 위대하다"라고 격찬하여 마지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老子번역이 막 끝났을 때 러시아의 코카사스 지방에서는「도호불」이라는 토속종교의 신도들에 의해 모든 폭력을 부정하고 전쟁을 없애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다. 병영안에 있는 자들은 총을 버리고 훈련을 거부하였으며 촌락에서는 흉기로 변할 수 있는 낫이나 괭이까지도 소각할 정도로 이 운동은 철저하였다. 마침내는 정부조직까지도 폭력의 한 형태라 하여 납세를 거부하기까지 이르렀다. 러시아 정부에서는 형벌을 무서워하지 않고 여자와 어린이까지 자진해서 이 운동에 순교하는 신도들을 결국은 외국으로 추방하게 되었는데 톨스토이의 호소로 캐나다에서 이들의 이주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들 2만 명 교도들의 수송비를 마련하기 위해 톨스토이가 10년 동안 執筆했던 창작의 붓을 들어 완성한 대작이 저 유명한 작품「부활」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은 이야기를 내가 관계하는 작은 모임에서 말했을 때 그 모임의 책임자가「출전」이 어디냐고 물었다. 오늘 이 기회에 선생님에게 그 출전을 여쭈어 보았다. 선생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톨스토이 기념관에 마이크로필름으로 저장되어 있는 내용인데 일본의 「강담사」에서 그것을 복사하여 만든 작은 책자를 구해서 읽어 보았노라고 말씀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어제 모스크바 대학에서 박미하일 교수에게 여쭈어 보았단다. 톨스토이의 노자 번역본을 보았느냐고 하였더니 이야기는 들었는데 구해보지는 못했노라고 하시더란다.
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출전은 확실하다고 말씀하셨다. 이제 선생님과 말씀을 나눈지도 1시간이 휠씬 지나 창밖의 경치는 삼림지대를 지나서 관목 숲의 습지를 지난다. 대평원의 지평선 위로 오늘의 임무를 수행하려고 햇님이 솟으려는 듯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있다. 낮은 키의 수풀사이 사이로 호수와 늪지가 보이고 새벽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달리는 열차 속에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바라보며 아침을 맞는다. 선생님께서 말씀을 드렸다. "제가 가지고 있는 책 중에 톨스토이의 "요약복음서"라는 책이 있는데 요즘은 절판이 되어서 책방에서는 구해 볼 수 없는데 보고 싶어 하는 사람끼리 복사하여서 보고 있노라"고 그랬더니 말씀하시기를 晋나라 곽상(郭象)이라는 사람이 장자를 주해할 때 "복음"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다한다. 장자의 내용이 "실패한 사람에게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성공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겸양(謙讓)의 념(念)을 갖게하기 때문에 장자는 복음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톨스토이는 세상의 부와 명예를 얻고 나서 나이 50세 때 자살하려고 할 만큼 깊은 고뇌에 빠진다. 나는 무엇이냐? 나의 생의 의미는 어디에 있느냐? 라는데 대해 자신에게 묻고 또 주위의 모든 현인들에게 물어서 얻은 답이 "너는 원자의 우연한 결합의 결과이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에는 의미가 없다. "인생 그 자체가 악이다"라는 결론을 얻고 깊은 절망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였다.(요약복음서. 톨스토이 저 p25) 톨스토이가 그리스도교에 인도된 것은 그런 고민 속에서 나날을 보내는데 그의 주위에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대부분 부귀에 의해서도 타락하지 않는 사람들, 인생에 있어서 확실한 의미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 성경을 깊고 넓게 읽어 4복음서를 요약하여 한권으로 정리할 정도로 성경을 탐독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이름아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닌 "교회의 가르침"을 왜곡되고 구부러진 가르침"이라고 하면서 비정통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그의 삶과 행동하는 실천력 앞에서 나는 많은 가르침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후에는 종전의 모습과는 다른 삶을 살아간다. 농노들에게 자기의 토지를 나누어 주고 자유를 준다. 그의 마지막도 나에게는 멋지게 보인다. 기차 여행을 하던 중 열이 심하게 나서 어느 시골의 역에 내리게 된다. 추운지방이라 역 대합실에 사람이 많았는데 사람들을 비키게 하고 톨스토이를 알아본 사람들이 그를 눕게 하려니까 "내가 누우면 이 사람들이 밖에 추운데 나가야 되니까 앉아있겠다"라고 하였다. 결국 역장이 자기 집에 모시고 가서 침대에 눕히자 운명하였다고 한다.
안병주 선생님과는 두 번째 해외여행을 하게 되었다. 아침 인사를 여쭐 때 마다 일어나서 인사를 받으시고 언제나 웃음으로 겸손하신 모습을 뵐 때 마다 기쁨이 더 한다.
한편 연만하신 연세에도 불구하시고 톨스토이가 번역한 노자를 러시아어로 읽고 싶어 러시아어 공부를 시작하셨다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세월과는 관계없는 "청년정신"이 나 또한 도전을 받게 된다. 이번 여행에서 안병주 선생님과의 만남도 하나의 큰 수확이다.
(1999. 9. 18 김춘영씀)
그리고 출처도 밝혀 놓았으니 문제는 없을 것으로 봅니다
노자를 공부하는 회원님께 공부를 위하여 자료를 위하여 모아 놓은 것 뿐입니다
혹시 저자분들이 자기 소개를 원한다면 글을 남겨주시면 다른 부분을 정정해 놓겟습니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강사: 김 춘 영 선생
들어가는 말
如是我聞(여시아문) - 나는 이렇게 들었다. 금강경 첫마디.
도덕경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집에 있는 책을 세어보니 그 권수가(老·莊을 포함해서)15권이나 되었다. 보지는 않고 책만 많이 모아 두었다. 노·장을 읽다보면 해석한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서두에 쓴 "如是我聞(여시아문)"처럼 내 경험으로 깨달은 바를 이렇게 말한 뿐이니 너그러우신 이해가 있으시기를 바란다.
도덕경은 81편의 시편으로 되었다. 전편 37편을 道經(도경)이라 하고 하편 34편 이후를 德經(덕경)이라한다.老子(노자)는 기원전 5세기 사람으로 짐작한다. 순자(旬子. BC315~236)의 글에 노담(老聃)의 이름이 나온다. 사마천(BC145-86)에 의해 쓰여진 史記列傳(사기열전)에 老子는 楚(초)나라 고현 곡인리 태생으로 성은 李씨요 이름은 耳(이)요 시호는 담(聃)이라 적혀있다. 周(주)나라 문서실의 기록관으로 녹을 먹고 있다가 떠날 즈음에 지금의 세관에 근무하는 尹喜(윤희)라는 자가 "선생은 이제 숨으려 하는거 같은데 이 사람을 위해 가르침을 남겨주시오"라는 청을 듣고 상·하 두 편의 글을 5000여자의 글에 남기고 떠났다. 또 다른 이설도 있다.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노패자라는 설도 있고 주나라의 史官(사관)담(聃)이라는 말도 있다.
또 이설 老子(노자)의 어머니가 배나무에 기대어 쉬고 있는데 대낮에 별똥별과 눈이 맞아 70년을 뱃속에 있다가 늙어서 백발이 되어서 태어났다고 노자라 한다. 노자는 철학자이다.
그 당시 세계를 이해하고 미래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하여 써놓은 책이다. 세계를 넓게 보는 눈으로 통찰력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 노자를 읽을 때 어떤「사유」를 포착할 줄 알아야한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세상을 움직이는「사유」「까닭」을 읽어내야 한다. 그럴려면「있음」에 접근하고, 「있음」에 접근하다보면 「존재」에 까지 밀고 들어갈 수 있다.
노·장을 읽을 때「자기」가 중요하다. 「자기」를 주장하고 읽으면 심오한 뜻을 깨칠 수가 없다. 자기의 경험법칙 안에서만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넓히는 작업이다. 자기 경험법칙 안에 타인의 경험법칙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이 이해하고 더 많이 포용하며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늘 한계를 경험한다.「자기」와 다름에 대하여 거부하고 배척하고자하는 강한「자아」가 또아리 틀고 있음을 모르고 있기도 한다. 노·장을 읽는 데에도 종교의 차이만큼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한다. 나는 노자 1장 강의를 들을 때 아! 천지는 하나님이 만드셨구나 하고 깨달았는데(나는 기독자 이니까) 그 선생님의 연구소를 방문하여 노자에「영생」의 개념이 있는냐고 여쭈었더니「없다」라는 대답이셨다. 그는 무신론자이시다. 그래서 노·장을 주해하는 사람마다 모두 조금씩 다르게 해석한다.
나는 无爲堂(무위당) 장일순 선생과 이현주 목사의 老子(노자)이야기와 多夕(다석 柳永模)지음, 박영호 편역의 老子(노자)와 宋恒龍(송항룡) 교수의 강의 내용에 많이 의존하였다.
1. 철학으로서의 老子(노자)
노자 1장의 첫줄에 道(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도대체 "道"란 무엇인가? 易經(역경)의 첫줄에도 道(도)에 관한 글이 나온다.노자의 "道(도)"해석은 여러 가지인데 易經(역경)의 해석은 단일하다 一陰一陽之謂道 生生之謂易(일음양지위도 생생지위역), 즉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면 그것이 도이다. 생생하게(우주학적)살아 있는 것, 즉 이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공간 위에서 항상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하는 것이 "易(역)"이다. 즉 一陰一陽(일음일양)하는 것이 "道(도)"이다 (宋교수)
老(노)·壯(장)·易(역)에 비추어 보면 과학은 허구(虛構)다. 왜냐, 同一性(동일성)이 무너진다. 反復性(반복성)이 무너진다. 과학은 반복하는 법칙위에서만 성립한다. 그래서 "普遍性(보편성)"이 무너진다.
"道(도)"란
1.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이라서 나타낼 수 없다.
2. 표현(表現)할 수 없다(문자와 언어로 담을 수 없다)
3. 규정(規定)할 수 없다.
4. 만질 수도 없다.
5. 형상화(形象化)할 수 없다.
그럼 "道(도)"란 무엇인가?
만물의 근원, 만물의 본체이기 때문에 표현할 수 없다. 그럼 과연 표현할 수 없는 존재는, 규명할 수 없는 존재는 무엇일까? 사실 周易(주역)은 "시간"哲學이다. 시간을 세밀하게 자른 것이 "찰나(刹那)"이다. 실생활에 "찰나"가 필요 없을 정도인데 동양사상에서는 時·空間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도 표현될 수 없다. 왜냐 "찰나"적으로 변하는데 어떻게 표현 할 수 있겠는가?
老子(노자)는 "破(파)"하는 철학이다 不定(부정)의 철학이다.
무엇을 깨느냐 모든 것이 시시때때로 변화하는데 규명할 수 없는 사실을 깨는 것이다.
"道可道 非常道(言) (도가도 비상도)(언)“
언어는 道(도)를 드러내는 양상인데 왜 분리하는지 모르겠다.
道(도)는 言(언)이다. 위의 문제는 "言語(언어)"를 문제 삼는다. 言表(언표)하면, 즉 말로 표현하면 이미 "道(常道)가 아니다.
書不盡言, 言不盡意(서불진언 언불진의)- 문자는 말로 표현하는 것만 못하고 언어는 사실의 뜻을 표현하지 못한다.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언어로 道를 표현할 수 없다. 말로서 표현된 것은 常道(상도)(늘 있는 道(도), 근원적으로 있어왔고 앞으로도 늘 있을 道(도))가 아니다.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참도(常道(상도))가 아니요.(불변의 도가 아니요)-보류해놓고 노자가 표현하는 道(도)는 언어로 표현 할 수 없는 것,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참 도가 아니다.
名可名이면 非常名(명가명이면 비상명)
여기서는 의미 즉 개념을 문제 삼는다.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커피 맛)
백묵 하나를 표현하려고 해도 금방시간이 지나니까 변화해 버렸기 때문에 꼭 그대로 표현할 수 없다.
이름을 命名(명명)하면, 이름을 지어서 부르면 그 본 실체의 모습은 아니다.
意味(名=개념으로 규정된 것은)로서 존재하는 것은 그 개념이 지시하는 참다운 모습(실상)은 아니다. - 하나로 규정된 모습은 있을 수 없다. 머물러 있지 않고 시시로 변하는데 규정된 모습은 있을 수 없다. 내 경험만큼만 보인다. A가 경험한 것과 B가 경험한 것은 다르다. 조건, 시간, 공간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름 붙이는 순간, 이미 개념(이름)으로 규명된 것은 사실의 세계가 아니다. 그 본래의 모습은 지나갔다.
無名 天地之始(무명 천지지시)
노자에 있어서는 始終(시종)이 없다. 그래서 生死(생사)가 없다. 天(천)은 陽(양)이고 地(지)는 陰(음)이다 그러니까 변화가 시작이다. 존재의 시작이다. 모든 존재의 개념의 대표는 천지(음양)이다.
"始(시) - 모든 변화하는 존재 자체가 "始(시)"이다.
道(도)는 그때그때 의미로(개념으로)변화 하는 것, 변화 앞에서 있는 것이 道(도)이다.
오늘은 어제하고 다르다. 오직 창조와 창신이 있다. 그래서 "破(파)"하다는 것이다.
破(파) - 머물러 있는 것을 깨라. 자꾸 着心(착심)에서 벗어나라 "깬다"는 것은 다른 차원으로 바뀐다는 것
잠에서 깨다. 그릇을 깬다(가치가 달라졌다). 한번 깨어서 가만히 있으면 道(도)가 아니다. 계속 깨어 나가야 한다. 살아있는 것이 된다.
生覺(생각) - 생생하게 깨닫는다. 살아서 깨고 또 깬다.
無名(무명) - 여기서 名(명)은 설명되어지고 규정, 개념화 되어지지 아니한 것은 무명이다.
무명은 無爲自然(무위자연)이다.
무명은 모든 존재의 시·공간을 벗어날 실존의 본모습이다.
有名(유명)은 萬物之母(만물지모)
有名(유명)은 말로 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구체적으로 표현 된 것을 만물이라 한다. 모든 의식성 속에 들어올 때 만물이다. 돌·나무·의자·물·공기 등이 구체적으로 존재한다. 有名(유명)은 즉 경험에 바탕하는 세계이다. 설명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고 규정할 수 있는 세계는 만물의 바탕이다.
1장의 결론은
有名(유명) - 道可道(도가도), 名可名(명가명) → 표현된 세계
無名(무명) - 非常道(비상도), 非常名(비상명) → 표현할 수 없는 세계, 근본·근원·無爲自
然(무위자연) (함이(행위)없이 스스로 그러한 것)
老(노)·莊(장)을 공부하는 목적도 溫故而知新(온고이지신)하자는 것이다.
옛날 것, 고전을 찾아 들어가서(온) 新(신), 즉 生命(생명), 자꾸 새로운 모습으로 살려내자는 것 定型(정형)의 틀 속에서 끌어내어 살아 있는 生命(생명)으로 살려 내자는 것이다.
제1장(道의 本體)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
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徼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徼(요: 변방 요, 돌다, 구하다)
말로 설명된 진리는 영원한 진리가 아니다.
이름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이름은 없다.
이름 붙일 수없는 진리에서 하늘과 땅이 나왔으며
진리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이름을 가진 만물이 나온다.
나는 늘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 자체와
진리의 작용으로 나타난 현상을 동시에 보고자 한다.
실체와 현상이 동일하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사실이 그러하니 아득하고 신비롭다. 실체가 곧 현상이요, 현상이 곧 실체이다.
정신계와 물질계의 모든 현상 신비한 현상이 다 실체와 현상의 작용이다.
제2장(養身: 몸을 온전하게 보살핌)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 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皆:모두 개 /斯:이 사,어조사 /已:이미 이,그치다 /恃:믿을 시 /焉:어조사 언
온 세상 사람이 모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여기지만,
무엇을 아름답다고 여기면 그와 동시에 추한 것도 생긴다.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은 것을 좋다고 여기지만,
무엇을 좋아한다고 여기면 그와 동시에 좋지 못한 것도 생긴다.
어느 한 쪽을 인정하는 것은 다른 쪽이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양이 있는 현상과 모양이 없는 근원,
어려움과 쉬움,
길고 짧음,
높고 낮음,
맑은 소리와 탁한 소리,
앞과 뒤,
이런 것은 모두 상대적으로 동시에 생긴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욕심을 부려 억지로 하지않으며,
누구를 훈계하거나 가르치려 들지도 않는다.
온갖 일을 하면서도 누구를 부추기거나 잔소리를 하지 않고,
무엇을 만들어내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일을 하고서도 뽐내지 않는다.
무엇을 완성해 놓고도 거기에 집착하거나
자기가 무엇을 했다는 생각이 없다.
그는 어디에 머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원하다.
제3장(安民:사람들의 마음을 편히 쉬게 함)
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是以 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常使民 無知無欲
使夫智者 不敢爲也
爲無爲 則無不治
※尙:숭상할 상 /敢:감히 감, 결단성 있음
학벌과 재능 있는 사람을 높이면,
질투심과 경쟁심이 일어나
사람들 사이에서 다툼이 사라지지 않는다.
재물을 너무 귀하게 여기면,
소유에 대한 욕망이 생겨
남의 것을 훔치려고 할 것이다.
욕심을 일으킬 만한 것을 과시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터득한 사람은
겉마음을 비우고 속마음을 채우도록 가르치며,
에고(ego)의 의지를 약하게 하고 참 자아(自我)를 강하게 하도록 한다.
그는 머리로 판단하는 지식과 욕망을 버리게 한다.
그러면 뭘 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말이 많아도
그들의 말은 허공을 치는 주먹질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욕망과 에고의 의지와 피상적인 앎을 버리고)
자연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면 모든 것이 조화롭게 흘러 갈 것이다.
제5장(虛用:비어 있는 근원의 쓸모)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天地之間 其猶橐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多言數窮 不如守中
※芻:꼴 추, 말린풀 /狗:개 구 /猶: 오히려 유, 마치~ 과 같다 /橐;전대 탁 풀무 /籥;피리 약
屈:꺽일 굴, 마르지 않는다 /愈: 나을 유, 더할 /數;자수 삭
하늘과 땅은 편견이 없다.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다)
만물을 동등하게 대한다.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처럼 대한다)
도를 터득한 사람도 편견이 없다. (세상이치를 깨달은 사람은 어질지 않다, 情이 없어서일 까? 아니다)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한다. (모든 사람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처럼 담담하게 대한다)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와 같다. (하늘과 땅 사이 공간은 마치 풀무와도 같지 않은가?)
속이 비었으면서도 생성이 멈추지 않고, (비어 있으나 마르지 않고, )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많이 나온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점점 더 많이 나온다)
말이 많으면 생명력이 빨리 소진한다. (말이 많으면 막힘이 잦으니)
그러니 비어있는 근원에 머물러 (흉중에 넣어두고 지킴만 같지 못하구나)
고요히 침묵하도록 하라.
제25장(老子의 自然觀)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寥兮
獨立而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 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故 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域中 有四大 而王居其一焉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寂兮寥兮(적혜료혜:고요할적,어조사혜,쓸쓸할료- 고요하고 보이지않음)
하늘과 땅이 있기 전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소리가 없어 들을 수도 없고, 모양이 없어 볼 수도 없으나,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우뚝 서서 변치 않는다.
그 영향력은 미치지 않는데 없고, 움직임도 멈추지 않는다. 가히 만물의 어머니라 할만하다.
사람의 상대적인 개념으로는 그 이름을 붙일 수 없어 나는 그저 ‘도’라고도 하고
마지못해 ‘큰 것’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크기 때문에 무한정 뻗어나간다. 무한정 뻗어 나가기 때문에 멀리 간다.
멀리가면 마지막에는 근원으로 되돌아온다.
(결국은 아무 곳으로도 가지 않고, 자기 안에서 만물을 기르는 것이다)
도 자체는 무한하다. 하늘과 땅과 사람은 모두 도가 스스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과 사람 역시 무한한 것이다. 이렇게 도가 자신을 나타내는 양상을 크게 넷으로 나눌 때 사람도 그중 한 자리를 차지한다.
사람은 땅의 법칙을 본받고, 땅은 하늘의 법칙을, 하늘은 도의 법칙을 본받는다.
그리고 도는 스스로 그러한 자신의 본성을 본받는다.
동구권 여행기
모스크바 일정을 끝내고 성·페테르스부르크행 야간열차를 탔다. 안내서에는 열차이름이「붉은 화살」이라고 되어있는데 화살처럼 빠른가 보다. 기대가 되었다. 저녁 10시 역에 도착하여 4인1실의 열차에 오르고 보니 기대는 절망으로 변했다. 9시간 동안 어떻게 가나? 이 찜통의 무더위 속에 반바지와 부채를 챙겨오지 않은 것이 후회막급이다. 또 가이드는 방마다 다니면서 문 단속법과 안에서 튼튼한 잠금장치가 있는데도 잠금장치를 잠근 후에 줄을 사용해서 문고리를 다른 고정된 부분에 단단히 묶어두고 문은 절대 열지 말라고 한다. 어제 모스크바 공항 입국장에서 서울의 친구부부를 만났는데 우리는 다음날 저녁 열차 편으로 이동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김형! 도둑 조심하시오 가방을 기둥에 묶고 열쇠를 채워야 하오"라고 당부하던 말도 생각나고.... 그런데 웬 이불은 이렇게 두텁노 비좁은 공간에 있는 이불은 짐칸위에 억지로 쑤셔 박고 창문을 열어보려고 안간힘을 쓰니 조금 열렸다. 그래도 바람한점 없는 날씨가 아무도움을 주지 않는다. 드디어 열차가 움직인다. 바람이 솔솔 분다. 하루의 일정이 피곤한지라 곧 잠에 빠져든다. 추워서 눈을 뜨니 창문은 닫혔고 모두가 천덕꾸러기 이불을 깔고 모포를 덮고 잔다. 새벽 4시반 벌써 창밖은 여명의 밝음이 찾아왔다. 문을 열고 복도를 보니 우리 일행이 왔다갔다 한다. 화장실 옆에 반 평쯤 되는 흡연실이 있다. 그곳에 안병주 선생님께서 나와 계신다. 아침 문안을 여쭈고 자연히 러시아의 자연경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러시아는 모스크바를 중심하여 동서로 1000㎞안에 산이 전혀 없다고 한다. 모스크바에서 성·페테르스부르크까지 800㎞를 8시간 반 동안 이 열차로 달린다. 지금우리는 삼림지대를 지나고 있다. 미명의 어스름 속에서도 창밖으로 스치는 나무는 그 유명한 자작나무들이다. 나무 등걸이 희끗희끗하며 지나간다. 몇 시간이고 끝이 없는 것 같다. 정말 평원 앞에 큰 대자를 붙여 대평원(大平原)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안병주 선생님은 우리에게 맹자를 가르쳐 주신 분이다. "진리의 벗 39호"에 보면 톨스토이가「부활」을 집필하게 된 배경을 말씀해 놓으셨다. 우리가 지금 러시아를 횡단하고 있지 않는가. 자연히 이 러시아의 자연이 배출한 문호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부활집필의 배경을 여기에 잠깐 옮겨보겠다. 고니시(少西)라는 일본인 러시아 유학생에 의해 한문에서 러시아어로 번역된 老子의 원고를 읽고 영·독·불어로 번역된 老子의 번역문과 대조하여 읽은 뒤 자신의 취향에 맞게 의역하여 완성한 것이「톨수토이 역 노자 도덕경」인데 톨스토이는 노자의 철학에 대단히 심취 하였던 것 같다. 「노자」변역 작업이 진척되어 제 31장의 "무기란 상서롭지 못한 도구이니 군자의 도구가 아니다.(兵者不祥之器, 非君子之器)라는 대목에 이르자 톨스토이는 책상을 치고 뛸 듯이 기뻐하며 "참으로 통쾌하다. 非戰論을 이처럼 極論할 수 있기에 노자는 위대하다"라고 격찬하여 마지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老子번역이 막 끝났을 때 러시아의 코카사스 지방에서는「도호불」이라는 토속종교의 신도들에 의해 모든 폭력을 부정하고 전쟁을 없애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다. 병영안에 있는 자들은 총을 버리고 훈련을 거부하였으며 촌락에서는 흉기로 변할 수 있는 낫이나 괭이까지도 소각할 정도로 이 운동은 철저하였다. 마침내는 정부조직까지도 폭력의 한 형태라 하여 납세를 거부하기까지 이르렀다. 러시아 정부에서는 형벌을 무서워하지 않고 여자와 어린이까지 자진해서 이 운동에 순교하는 신도들을 결국은 외국으로 추방하게 되었는데 톨스토이의 호소로 캐나다에서 이들의 이주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들 2만 명 교도들의 수송비를 마련하기 위해 톨스토이가 10년 동안 執筆했던 창작의 붓을 들어 완성한 대작이 저 유명한 작품「부활」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은 이야기를 내가 관계하는 작은 모임에서 말했을 때 그 모임의 책임자가「출전」이 어디냐고 물었다. 오늘 이 기회에 선생님에게 그 출전을 여쭈어 보았다. 선생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톨스토이 기념관에 마이크로필름으로 저장되어 있는 내용인데 일본의 「강담사」에서 그것을 복사하여 만든 작은 책자를 구해서 읽어 보았노라고 말씀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어제 모스크바 대학에서 박미하일 교수에게 여쭈어 보았단다. 톨스토이의 노자 번역본을 보았느냐고 하였더니 이야기는 들었는데 구해보지는 못했노라고 하시더란다.
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출전은 확실하다고 말씀하셨다. 이제 선생님과 말씀을 나눈지도 1시간이 휠씬 지나 창밖의 경치는 삼림지대를 지나서 관목 숲의 습지를 지난다. 대평원의 지평선 위로 오늘의 임무를 수행하려고 햇님이 솟으려는 듯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있다. 낮은 키의 수풀사이 사이로 호수와 늪지가 보이고 새벽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달리는 열차 속에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바라보며 아침을 맞는다. 선생님께서 말씀을 드렸다. "제가 가지고 있는 책 중에 톨스토이의 "요약복음서"라는 책이 있는데 요즘은 절판이 되어서 책방에서는 구해 볼 수 없는데 보고 싶어 하는 사람끼리 복사하여서 보고 있노라"고 그랬더니 말씀하시기를 晋나라 곽상(郭象)이라는 사람이 장자를 주해할 때 "복음"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다한다. 장자의 내용이 "실패한 사람에게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성공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겸양(謙讓)의 념(念)을 갖게하기 때문에 장자는 복음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톨스토이는 세상의 부와 명예를 얻고 나서 나이 50세 때 자살하려고 할 만큼 깊은 고뇌에 빠진다. 나는 무엇이냐? 나의 생의 의미는 어디에 있느냐? 라는데 대해 자신에게 묻고 또 주위의 모든 현인들에게 물어서 얻은 답이 "너는 원자의 우연한 결합의 결과이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에는 의미가 없다. "인생 그 자체가 악이다"라는 결론을 얻고 깊은 절망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였다.(요약복음서. 톨스토이 저 p25) 톨스토이가 그리스도교에 인도된 것은 그런 고민 속에서 나날을 보내는데 그의 주위에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대부분 부귀에 의해서도 타락하지 않는 사람들, 인생에 있어서 확실한 의미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 성경을 깊고 넓게 읽어 4복음서를 요약하여 한권으로 정리할 정도로 성경을 탐독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이름아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닌 "교회의 가르침"을 왜곡되고 구부러진 가르침"이라고 하면서 비정통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그의 삶과 행동하는 실천력 앞에서 나는 많은 가르침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후에는 종전의 모습과는 다른 삶을 살아간다. 농노들에게 자기의 토지를 나누어 주고 자유를 준다. 그의 마지막도 나에게는 멋지게 보인다. 기차 여행을 하던 중 열이 심하게 나서 어느 시골의 역에 내리게 된다. 추운지방이라 역 대합실에 사람이 많았는데 사람들을 비키게 하고 톨스토이를 알아본 사람들이 그를 눕게 하려니까 "내가 누우면 이 사람들이 밖에 추운데 나가야 되니까 앉아있겠다"라고 하였다. 결국 역장이 자기 집에 모시고 가서 침대에 눕히자 운명하였다고 한다.
안병주 선생님과는 두 번째 해외여행을 하게 되었다. 아침 인사를 여쭐 때 마다 일어나서 인사를 받으시고 언제나 웃음으로 겸손하신 모습을 뵐 때 마다 기쁨이 더 한다.
한편 연만하신 연세에도 불구하시고 톨스토이가 번역한 노자를 러시아어로 읽고 싶어 러시아어 공부를 시작하셨다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세월과는 관계없는 "청년정신"이 나 또한 도전을 받게 된다. 이번 여행에서 안병주 선생님과의 만남도 하나의 큰 수확이다.
(1999. 9. 18 김춘영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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