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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에 관한 글들

[스크랩] 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

작성자노자 善|작성시간06.05.01|조회수194 목록 댓글 0
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
오강남 저 | 현암사
2002년 06월


'의식의 폭'을 넓혀가는 과정, 곧 우리가 지금까지 지니고 살아온 불완전한 의식 구조에서 해방되어 제약받거나 비뚤어지지 않은 실재 그 자체, 있는 그대로의 실상의 세계, 실재 세계의 다른 차원들을 계속 'real'한 것으로 발견하고 깨쳐가는 'realization(실재화, 현실화, 의식화, 자각, 깨달음)'의 과정, 이것이 곧 구도의 길, 진리의 길이라고 믿고 싶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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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리뷰

◎ 다시, 신은 죽는다
이 책은 전작『예수는 없다』와 훌륭한 보완 관계를 이룬다.『예수는 없다』가 당면한 기독교 문제에 구체적으로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이 책은 종교 일반에 관한 원론적인 문제로 관심을 넓혔다. 도대체 종교라는 것이 무엇인지, 종교를 갖는다면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할지에 중점을 두고, 종교라는 한 이름 아래 공존하는 천차만별의 주장과 양태를 꼼꼼히 되짚음으로써 허상을 버리고 실재하는 본모습을 찾아간다.

요즘처럼 넘쳐나는 주장과 교리 사이에서 종교다운 종교를 알아보고 신실한 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해 선택한 종교가 오히려 절대 권위와 행동 강령으로 억압하는 모순된 상황이 비일비재하지 않은가. 저자는 그런 신앙을 설파하는 종교를 닫힌 종교라 명명하고, 그런 신은 '없다'고 선언한다.

◎ 지금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은 정말로 옳은가 - 열린 종교를 찾아가는 길
닫힌 종교와는 달리,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상을 절대화하거나 거기에 안주하지 말고 그것을 초월하는 실재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것을 강조하는 종교가 열린 종교다. 열린 종교는 인간의 생각이나 안목이 어쩔 수 없이 제약되고 불완전한 것임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열린 마음으로 진리의 깊고 넓은 면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깨쳐갈 것을 추구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시작하고 어떤 단계를 밟아 나가야 할까. 이 책은 친절하고도 명쾌하게 그 길을 제시해준다.

1부 진리의 길은 열린 종교로 출발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우리가 부지불식간 지니고 있는 기본 자세를 점검한다. 진리로 가는 길의 출발점은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마음'이다. 허상과 실상을 구별해내고, 마음을 열고, 끊임없는 탐구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이것은 이미 형성된 틀을 통해 불환전하게 감지되는 현상 대신, 궁극적인 실재를 향해 의식의 폭을 넓혀가는 과정이다. 분명 이것은 다른 이들이 마다하는 좁은 길이자 외로운 길이될 것이다.

2부 자유의 길에서는 본격적인 종교론으로 들어가, 과연 종교를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의 문제를 검토해본다. 저자는 비교종교학자답게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와 유교, 힌두교까지 동서고금의 종교를 넘나들면서 그들이 한결같이 '지금 이대로의 나'에서 '새로운 나'로 바뀌는 엄청난 변화의 체험을 지향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것은 우리의 전 존재를 뒤흔들고 뒤바꾸는 체험, 즉 삶과 세계를 보는 관점, 삶의 진로와 의미 등 모든 것이 완전 변화를 일으켜 궁극적인 자유를 체험하게 되는 지점이다.

3부 믿음의 길에서는 종교인으로서 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기독교인의 입장을 상정해서 살펴본다. 교회와 교리, 성경, 헌금, 전도, 기도와 명상 등, 기독교인이라면 한 번쯤 고민해봤음직한 사항들을 구체적이고 냉철하게 짚어가며 어떻게 믿는 것이 바르게 믿는 것인가를 깊게 들여다본다.

◎ 다시 이 책을 펴내며
이 책은 저자가 젊은 시절 비교종교학에 본격적으로 몰입하면서, 인간으로서 종교학도로서 당면했던 몇 가지 실존적 물음을 놓고 고뇌한 흔적을 기록한 것이다. 캐나다 토론토 교민 신문에 연재된 글이 묶여『길벗들의 대화』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그것이 다시 개정되어『길벗들의 대화』, 그리고『열린 종교를 위한 단상』으로 나왔다. 이후 절판되었다가『예수는 없다』를 읽은 독자들의 거듭되는 요청과, 또 그 사이 달라진 한국의 종교적 분위기를 감안하여 재발간하는 것이다. R형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었던 것을 일반 서술문으로 바꾸고, 개정판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을 감안, 새로운 자료와 글을 보완하였다. 특히 부록으로 실은 '깨침과 메타노이아'는 한국의 두 거대종교인 불교와 기독교의 역사와 근래에 시도되는 두 종교간의 대화 노력 등을 관찰하고 바람직한 21세기 종교로서의 방향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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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 리뷰
다시 문제는 '종교간 관용'이다

종교학자 오강남 박사의 책 제목 『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에서, 그 '그 한가지 질문'은 대체 어떤 질문인가 ? 유대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빌라도)의 바로 이 질문일 것이다. "진리가 뭐여 ? " 예수님은 이 질문을 외면한다. 어째서 ? 예수님은 필라투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입이 닳도록 대답했는데 또 물어? 그리고, 다시 대답한들 자네 같은 청맹과니가 알아먹을 수 있을 것 같은가 ? "

예수님은 그 질문에 이미 여러 차례 대답했다. 필라투스가 들었어도 알아먹지 못했다면 그가 들으려 하지 않았거나 예수님이 진리에다 이름을 붙이기보다는 슬쩍 돌려서 '다르게 말하는' 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 말씀이 알레고리, 즉 '여느 방식과는 다르게 한 이야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 노자님, 장자님도 알레고리의 명수들이다. 오박사도 돌려서 말하기를 좋아한다. 지난해 그가 펴낸 책 『예수는 없다』에 나오는 '허스키 이야기', 인용하기에는 너무 길어서 내 나름으로 요약해본다.

"캐나다 어떤 마을사람들은 '개'라고 하면 썰매 끄는 개 '허스키'밖에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자 진돗개가 흘러들어온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 토론이 벌어진다. 이것도 개로 인정해주어야 하지 않겠나 ? 인정해주다니, 그건 허스키에 대한 모독이다 ! 허스키가 아니면 개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은 한국에까지 전해져 그 수가 해가 갈수록 늘어난다. 세월이 흘러 캐나다 마을로는 별별 개가 다 들어온다.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의 개들은 서로 비슷비슷하니까 개로 인정해줄 수밖에 없구나, 이렇게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 때 한국 유학생 둘이 허스키 연구차 캐나다로 들어간다. 둘은 충격을 받는다. 허스키만이 개라는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둘 중 하나는 진돗개를 개로 인정하는 타락한 믿음을 개탄하면서 한국으로 돌아간다. 나머지 하나는 마음의 문을 열어 허스키만 개라고 믿어온 자신을 어리석게 여기면서 한국으로 돌아온다. 캐나다 마을을 개탄하던 학생은 허스키 맹신자들의 섬김을 받고, 마음의 문을 열었던 유학생은 맹신자들의 따돌림을 당한다."

"종교를 개에 견주다니"하면서 골내는 독자는 달은커녕 오박사의 손가락밖에는 보지 못한다. 이제 밝히거니와 나와 오박사의 저서 『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과의 인연은 질겨서 길다. 1983년 1월에 나온 책, 한국 기독교의 실상을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길벗들의 對話』는, 제목에 '종교'라는 말이 들어가는 책이면 놓치지 않고 사들이던 나에게 충격에 가까운 기쁨을 안겨주었다.

사람들이 자유, 진리, 믿음이라는 말에 실어증세를 보이던 시절, 이 책은 내 눈을 비벼, 눈꺼풀을 덮고 있던 비늘이 여러겹 떨어져 나가게 했다. 이 책을 통한, 기독교의 배타주의에 대한 뼈아픈 반성과 질타, 종교 다원주의의 씨 뿌리기는 골수 오강남주의자의 가슴을 울리는데 그치고 책은 곧 절판되었다. 90년 내가 출판사 편집주간 자리에 앉으면서 처음으로 한 것은 오박사가 봉직하고 있는 캐나다의 리자이너 대학으로 팩스를 넣는 일이었다. 나는 그 책을 내손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이 일은 성사되지 못했다.

해서 10여년 뒤에 나온 『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은 훨씬 넓어지고 깊어진, 20여년 전의 『길벗들의 對話』, 바로 그 책의 수정보완본이다.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랬듯이, 제목이 불온하기 짝이 없는 책을 잇따라 펴내고 있는 오박사는 어째서 예수님에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거는 것일까 ? 카잔차키스가 그랬듯이 오박사 역시 예수님을 매우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글을 쓰는 나 또한 그렇다. 그러니 바라건대 독자들은 오해하지 마시기를. 예수님은 그 한가지 질문을 외면하지 않았다 ! 예수님은 있다 !

--- 중앙일보 행복한책읽기 02/06/15 이윤기 (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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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진리에 있어 종교란 무엇인가

우선 책 제목의 궁금증부터 풀어보자. 예수가 외면한 한 가지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예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요한복음 18:38)고 물었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물음에 답을 주었던 예수가 이 심오한 질문에 무어라 대답했는지 성경에는 기록이 없다. 캐나다 리자이나대학 비교종교학과 교수인 저자는 예수가 침묵을 지켰다고 보았다. “‘진리’라는 것이 어떤 말장난이나 정의(定義)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침묵을 통해 웅변적으로 나타낸 것”이라는 해석이다.

‘무엇이 진리인가’를 책 앞장에 끌어내고, 여기서 눈길 끄는 책 제목까지 뽑아낸 것은 출판사측의 재치다. 83년 처음 책으로 엮여 나왔을 때 제목은 『길벗들의 대화』, 96년 개정판은 『열린 종교를 위한 단상』이었다. 전작 『예수는 없다』(현암사·2001)를 읽었던 독자들이 요청해 과거 글을 다시 손질해 낸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철학서는 아니다. 오히려 종교론에 가깝다. ‘종교를 통해 생각해보는 우리의 삶’이라고 할까.

따라서 책은 몇 가지 한계점을 드러낸다. 첫째, 캐나다 토론토 교민신문에 연재된 글을 모았기 때문에 호흡이 짧다. 말 그대로 단상이다. 둘째, 올해 환갑을 맞은 저자가 30대 유학 초년병 시절 고민했던 기록이어서 시간적 거리감이 크다. 셋째, 변증법적 유신(有神)론자로 읽히는 오교수가 기독교 신도를 대상으로 시도한 대화라 아무래도 기독교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도덕경』 『장자』 해설서를 냈던 저자의 이력에서 짐작되듯 노장(老莊)과 유·불교, 그리스 철학 및 서구신학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내공의 파괴력은 독자에게 매력으로 다가선다. 기독교인의 종교관을 논한 3부를 제외한 1부 ‘진리란?’과 2부 ‘종교란?’은 그래서 편안하게 읽힌다. 오교수는 “종교학 전공학도의 실존적 고백으로 봐달라”고 부탁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책이 “달을 가리키는 가냘픈 손가락” “높은 곳으로 올라서게 하는 작은 디딤돌”이 되길 바란다고.

자, 이제 반복 사용되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궁극 실재(實在·Reality)’의 세계로 한 걸음 들어가보자. 궁극 실재란 하느님, 절대선, 도(道), 브라만(梵), 공(空) 무엇이라 불러도 되는, ‘우리가 알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신비한 방법으로 진짜 절대적으로 존재하고 진짜 절대적으로 차 있는 무엇’이다.

오교수가 말하는 ‘길벗’이란 신(진리)을 향해 나아가는 외로운 길의 안내자, 참 스승 또는 동반자다. 이문회우(以文會友·글로 벗을 만나고), 이우보인(以友輔仁·벗을 만나 사람됨이 깊어진다·논어 12:24)이라 했던가. 종교는 궁극 실재로 가는 자각과 변화의 체험, 그 자체이며 정해진 ‘나’를 버리고 본래의 ‘나’를 찾는 부활의 여정이다.

구도의 길,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 나선 우리는 길벗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글을 ‘생각의 씨앗’ 삼아 길을 함께 가보자고 저자는 은근히 권유한다. 물론 오교수의 자상한 길 안내에도 불구하고 메타노이아(의식구조의 개변·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멀고도 험한 것은 당연하다.

단지 오교수에 따르면 궁극·절대·초월의 진리는 “언설(言說)을 이(離)하고,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필설(筆舌)을 절(絶)하고, 현묘(玄妙)하고… inexpressible,indescribable,inexplicable,unspeakable”하다고 하니 작은 위안이 된다 할까. 저자는 “종교는 무슨 설명(explanation)이 아니라 체험(experience)”이란 위로도 해주고 있다.

--- 문화일보 북리뷰 02/06/14 노성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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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종교는 우물안 개구리에 세상 보여주는것"

지난해 『예수는 없다』는 책으로 한국 기독교, 특히 개신교를 신랄하게 비판해 주목을 받았던 오강남 교수 (61·캐나다 리자이나대 비교 종교학 교수)의 첫인상은 전혀 도발적이지 않았다. 스트라이프 무늬 와이셔츠에 넥타이도 매지 않고 콤비 양복을 걸친 그는 부드럽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가 두 번째 책『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현암사)을 펴냈다. 학회 참석차 잠시 귀국한 그를 만났다. 기독교적 배경에서 자라고 공부했지만, 그의 대화에는 예수 못지 않게 석가도 많이 등장했다.

-‘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이 도대체 뭔가요?

“그걸 얘기하면 책이 안 팔리죠 (웃음). 빌라도가 예수에게 ‘진리가 뭐냐’고 물었는데 예수는 답을 외면합니다.”

-왜요?

“첫째는 빌라도 주제에 감히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하다니, 둘째는 말해 보았자 빌라도가 알아 듣지 못할 것이다, 셋째는 진리가 너무 엄청나고 크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그랬다. 저는 셋째 가설을 믿어요. 도(道)란! 진리란! 입으로 꺼내는 그 순간, 멀어지는 거니까.”

-그런데, 진리에 대한 책은 왜 쓰셨어요?

“‘눈물의 씨앗’이란 말이 있듯 ‘생각의 씨앗’을 주고 싶어서지요. 나는 ‘진리’를 말하고자 하는게 아니에요. 그러면 교주가 됐겠지 (웃음). 목마른 사람에게 물가까지 안내하는 가이드에요. 물을 먹든 말든 그건 그 사람 자유지요. 또 불꺼진 방에 촛불을 건네 주는 사람이랄까. 방에 앉든, 서든, 책상에서 공부를 하든 그건 저마다의 몫이지요.”

-지난 책의 주제는 한국 사회의 기독교였는데, 이번 책은 종교 일반을 다루셨네요.

“교민 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을 묶었습니다. 도대체 종교란게 뭐길래 이 야단들인가, 이 야단중에 종교를 갖는다면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뭐 이런거지요.”

-종교가 뭐에요?

“변화하는 거지요. 궁극 실재와의 관계속에서 내가 변화하는 체험입니다. 종교는 그것을 위한 수단과 방법이지, 이론이나 교설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달을 보는 것인데 우리 기독교는 손가락에 관심이 많아요.”

-먹고 사는것도 힘든데 진리탐구라니…. 정신적 사치 아닌가요?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면 만족해야 하는데, 만족을 모르는게 인간이에요. 산다는게 뭔가, 의미가 뭔가 뭐 이런 고민을 합니다. 그건, 지적 유희가 아닙니다. (사는 게) 답답하니까 몸부림 치는 겁니다. 석가도 처음엔 사는게 힘드니까 의문을 가진 겁니다. 같은 티끌이라도 손바닥안에 있으면 감각이 없지만, 눈에 들어가면 아픕니다.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이 있지요. 일종의 축복입니다.”

-고통이 아니구요?

“하하하. 석가는 세상이, 삶이 고통임을 아는 것이 모든 것의 기본이라고 했지요.”

-결국 무엇을 얻을 수 있나요?

“자유지요. 자기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게 신(神)을 찾는 거고 궁극 실재를 찾는 거지요. 하늘에 존재하는 신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런 깨침은 어떻게 가능한가요?

“일단 모든 고정관념, 편견을 벗어 놓고 열어 놓아야지요. 그 다음 교리나 조직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궁극의 실재를 찾아 내가 바뀌는 체험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종교가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는 없습니다. 우물안 개구리에게 바깥 세상을 보여 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종교지요. 성경은 우물밖 개구리가 우물안에 들어가 말해 준 것입니다. 바깥 세계를 표현한 인디케이터, 즉 손가락이지요.”

-어쨌든, 역사는 합리와 이성이 이끌어 가고 있는데 ‘영성’의 강조는 도피 아닌가요?

“윌버라고 하는 학자는 20세기를 기준으로 이전 세기를 합리 이전, 20세기를 합리, 그 다음 세기를 합리를 넘어서는 ‘트랜스 합리의 세기’라고 했어요. 합리에 대한 반성은 원시로 돌아 가자는 퇴행이어서는 안됩니다. 이성을 넘어서는 것으로 가야지요. 그게 직관입니다. 신비가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통찰이지요.”

-자칫, 허무로 빠질 수도 있겠는데요.

“영성의 표현과 열매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물론 속세를 벗어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쁜 것은 아니지요. 장자에 보면, 요임금이 산에 사는 네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망연자실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들은 산에 가만 앉아 있어도 요임금 같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갖는 겁니다. 요임금을 통해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거지요. 그렇다고 모두가 다 산에 갈 필요는 없지요. ‘어떠 어떠 해야 한다’는 획일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자! 나가자! 하면 구호나 행동은 강력해질 수 있지만. 하긴, (나처럼) 나가도 되고 안나가도 된다고 하면 흐리멍텅하지. 절대화 시켜야 돈이 생기고 힘이 생기는데 말이에요. 하하하.”

-‘절대’를 믿으세요?

“물론이지요. 절대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는 ‘단절’이 아니라 이것도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지는 ‘관계’입니다. 절대자가 있느냐?는 물음은 ‘있다’ ‘없다’는 존재의 카테고리에 묶이는 겁니다. 불교의 ‘무’(無)‘지요. 그러나 이 무도 결국 유의 상대개념이니까 다시 무를 부정하는 ‘무무’ ‘무무무’가 나옵니다. ‘절대’는 체험의 영역이지, 언어의 영역이 아니지요.”

-기독교계도 그렇지만, 불교계도 요즘 공격을 많이 받고 있는데….

“일리가 있습니다만, 스님들한테 참선하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라는 이야긴 잘 모르는 소리지요. 우물안 개구리에게 밖에서 가져온 빵을 나눠주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물안 세계가 전부가 아니다’고 이야기해 주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보시를 세 가지로 나눕니다. 물질을 나눠주는 재(財)보시, 진리를 나눠주는 법(法)보시, 용기와 위로를 나눠주는 무외(無畏)보시가 있습니다. 물질만 나눠 주는 게 다는 아니지요.”

-한국 종교에 대해 하시고 싶은 말씀은….

“문제의 발단이 되지말고 해결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동아일보 02/06/13 허문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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