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미꽃
2021년 3월 26일(금), 맑음, 부천식물원 외
아직 이른 봄이지만 부천식물원에서 노천 화단에 가꾸는 할미꽃은 피었겠지 하고 찾아갔다. 마치 내가 오기를
기다린 듯이 활짝 피었다. 비록 몇 포기 되지 않지만.
할미꽃은 미나리아재비과(Ranunculaceae)의 여러해살이풀이다. 할미꽃은 꽃이 피지 않았어도 할미꽃이라고 한
다. 국가생물종정보시스템에 등재된 할미꽃은 가는잎할미꽃, 노랑할미꽃, 동강할미꽃 등 8종에 이른다. 동 시스
템에 등재되지 않은 수입종을 감안하면 그 수효는 꽤 많을 거라고 생각된다. 여기서는 우리나라 고유종인 할미
꽃을 대상으로 살펴본다.
할미꽃(Pulsatilla koreana (Yabe ex Nakai) Nakai ex Mori)은 몸 전체에 긴 털이 촘촘히 나 있고 잎은 뿌리에서
뭉쳐나며 5개의 작은 잎으로 된 우상 복엽이다. 4~5월에 자주색 꽃이 줄기 끝에서 밑을 향하여 피고, 열매는 긴
달걀 모양의 수과(瘦果)로 5~6월에 익는다. 독성이 있으며 뿌리는 약용한다. 우리나라 제주도를 제외한 전역과
만주, 우수리강, 아무르 등지에 분포한다.
* 수과(瘦果)는 폐과(閉果)의 한 종류인데 씨가 하나로 모양이 작고 익어도 터지지 않는다. 미나리아재비, 민들
레, 해바라기 따위의 열매가 있다.
할미꽃의 유래는 이우철의 『한국 식물명의 유래』(일조각, 2005)에 따르면 백두옹(白頭翁), 노고초(老姑草)라 하
며 그 어원으로 “할미〔白頭〕 + 곳〔花〕, 주지화(注之花)〔白頭翁〕→주지곳/할십가빗불휘→할십갑이/할미십
갑→할미밋〔白頭翁〕→할미꽃으로 변화”했다 한다.
본래 ‘주지’는 별신굿에서, 나쁜 짐승이나 귀신을 물리치려고 씌우는 사자탈을 일컫는데, 농악대 상쇠의 상모
깃털 장식이 할미꽃을 연상케 하여 할미꽃보다 주지꽃이라 먼저 생겨난 명칭이다.(‘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인디카 - 화우의 야단법석 꽃이야기 138’에서)
한편, 김종원의 『한국식물생태보감1』(자연과 생태, 2013)에 따르면,
“십가비라는 명칭은 머리에 쓰는 갓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십갓이라고 해서 깃털 모양의 장식이 있는 모
자가 어원으로 추정된다. 십가비는 머리 부분과 모자와 깃털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설명될 수 있는 전통 제의
양식이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유미의 『한국의 야생화』(다른세상, 2003)에 따르면,
“할미꽃은 줄기가 굽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할미꽃이 피고 지고 열매가 익으면 그
열매에 흰털이 가득 달려 마치 하얗게 센 할머니의 머리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한자도 백두옹
(白頭翁)이다.”라고 한다.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설명이다.
할미꽃에는 전설이 하나 전해 내려온다.
한 할머니가 얼굴만 예쁘지 심보가 나쁜 큰손녀와 얼굴은 빼어나지 않아도 착한 작은손녀와 함께 살고 있었다.
두 손녀가 모두 시집을 가게 되자 할머니는 부잣집에 시집간 큰손녀와 살게 되었는데, 큰손녀의 구박이 너무
심해 더 이상 살기 어렵게 되었다. 할머니는 이웃의 가난한 집으로 시집간 작은손녀를 찾아가다가 기력이 다하
여 죽고 말았다. 마침 할머니가 걱정되어 찾아가던 작은손녀가 이를 발견하고 길가의 양지바른 곳에 묻어 드렸
는데, 그 무덤가에 피어난 꽃이 바로 할미꽃이라고 한다. 지금도 할미꽃은 뒷산의 양지바른 무덤가에서 가장 쉽
게 만날 수 있다. 이 슬픈 전설 때문인지 할미꽃의 꽃말은 ‘슬픔’과 ‘추억’이다.(이유미의 위의 책)
할미꽃 속명은 김종원의 위의 책에 따르면, “풀사틸라(pulsatilla)는 라틴어 풀사티오(pulsatio)에서 유래하고, 종
(鐘, bell)을 치다(striking 또는 beating)라는 의미가 있다. 할미꽃의 꽃 모양이 유럽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사용
하는 종 모양을 떠올리게 하며, 요리가 준비되었음을 알릴 때 부엌에서 사용하는 종과 흡사하다.”고 한다.
종소명 코리아나(koreana)는 우리나라가 원산지임을 나타낸다. 할미꽃의 영명도 한국할미꽃(Korean pasque-
flower)이다.
학명의 명명자 Yabe는 일본 식물학자 야베 요시타다(Yabe Yoshitada, 矢部吉禎, 1876~1931)이고, 명명자 Mori
또한 일본 식물학자이자 동물학자인 모리 다메조(Mori Tamezo, 森爲三, 1884~1909)이다. 모리는 한성고등학
교 교사, 경성제국대학 예과 교수 등으로 근무하면서 조선의 식물교과서를 만들기도 했다.
명명자 Nakai는 일본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 Nakai Takenoshin, 1882~1952)인데, 나카이에 대
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다. 그는 우리나라 특산식물의 62%에 달하는 527종 중 327종의 학명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그는 초대 조선 공사였던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1842~1917)의 도움으로 우리나라 식물을 조
사, 연구했는데 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금강초롱꽃의 학명(Hanabusaya asiatica Nakai)에 하나부사를 넣어
주기도 했다.
이윤옥의 『창씨 개명된 우리 풀꽃』(인물과사상사, 2015)에 의한 그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나카이는 1907년 도쿄대학교 이학부 식물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마쓰무라 진조(松村任三, 1856~1928)의
지도로 식물분류학을 전공한 뒤 한일병탄 1년 전인 1909년 27세의 나이로 함경도 원산에 첫발을 디딘 이래 성
진, 청진 등지에서 500여 종의 식물을 조사했다.
이후 그는 초대 조선 공사였던 하나부사의 도움으로 1914년 조선총독부 소속 식물조사원에 임명되면서 조선
식물을 본격적으로 조사하게 된다. 나카이가 조선 땅에서 완전히 발을 뗀 것은 1942년이므로 28년간 그의 발
에 밟히지 않은 조선 산하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카이는 1909년 6월 함경도를 시작으로, 1913년 제
주도와 지리산, 1914년 평안북도, 1916년 강원도와 금강산, 1917년 울릉도, 1919년 경상북도와 충청북도, 1928
년 남해안 일대, 1932년 황해도 지역에서 식물을 채집했다. 짧을 때는 10일에서 길 때는 100일씩 체류하며 한
반도 곳곳을 조사했다. 그가 채집한 우리나라 식물은 2만여 점이며, 이 가운데 상당수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나카이의 한반도 진출은 당시 식물 연구에 대한 서구 학자들의 연구에 자극받은 것이다. 식민지 확장을 노리던
일본 정부는 조선 식물자원을 조사한다는 나카이를 적극 지원했다. 물론 나카이를 비롯해 우에키, 마쓰무라, 이
사도야, 하라, 마키노, 기무라 등 수많은 일본 학자가 한반도에서 발견된 식물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려고 혈안
이 되어 있었다.
주) 당시 일본 식물을 연구한 서구 학자들로는 러시아 식물학자인 카를 막시모비치(Karl Maximovich,
1827~1891)를 비롯하여 ‘일본의 린네’라고 불리는 스웨덴 식물학자 칼 페테르 툰베리(Carl Peter Thunberg,
1743~1828), 독일의 식물학자로 일본식물의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긴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 1845~1866) 등이 있다.
나카이는 자신의 채집 기록을 『식물분류학회지』 제36권 3호에 실린 「외국인의 한반도 식물 채집 행적과 지명
재고」에 연도별로 정리해놓았다. 나카이가 자신의 이름을 붙인 우리 풀꽃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아직 모른
다. 나카이는 1940년, 58세에 한반도에서 마지막 채집을 하였는데 함경북도 무산군의 백암, 대택 등을 조사하
고 부령까지 이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카이는 60세에 은퇴하여 태평양전쟁 동안 네덜란드령 자바 섬의
보고르 식물원 원장으로 근무했다. 그리고 10년 뒤인 70세로 숨을 거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