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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 정경세

고려(高麗) 안렴사(按廉使) 신공 우(申公祐)의 묘표

작성자향산 김문진|작성시간26.06.16|조회수25 목록 댓글 0

                                               고려(高麗) 안렴사(按廉使) 신공 우(申公祐)의 묘표

 

상주(尙州) 관할의 단밀현(丹密縣) 곁에 자그마한 돌비석 하나가 길 왼편에 서 있는데, 거기에는 ‘효자리(孝子里)’라는 마을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고로(故老)들이 서로 전하기를 안렴사(按廉使) 신공(申公)이 살던 마을이라고 하며, 그 앞을 지나가는 자들은 경례(敬禮)를 하고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우(祐)이고, 고려조에 벼슬하여 관직이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일찍이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가 되었는데, 고려조의 고사(故事)에 때때로 근시(近侍)의 관원을 여러 도로 내려 보내어 산천(山川)에 제사 지내고 백성들의 풍속을 탐문하고 수령들의 근만(勤慢)을 살펴 출척(黜陟)하였다. 그것을 이름하여 안렴사라고 하였는데, 대개 한때의 극선(極選)이었다.

공은 혼탁한 세상에 처하여서도 능히 깨끗함으로 몸가짐을 하였으며,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 효성을 다하였다. 아버지인 판도판서(版圖判書) 휘 윤유(允濡)가 졸하자 여막(廬幕)을 짓고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묘 앞에서 호곡(號哭)하였는데, 대나무 두 그루가 묘 앞에 자라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효성에 감응한 소치라고들 하였는데 조정에 알려져 정문(旌門)을 받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 마을의 이름을 효자리라고 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사실은 국승(國乘) 및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려 있다.

공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이름이 광부(光富)와 광귀(光貴)이다. 광부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이름이 사렴(士廉)과 사빈(士贇)이며, 사렴은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지냈다. 그의 현손인 원록(元祿)이 뒤에 또 효행으로 공의 아름다운 행실을 뒤이어 정려(旌閭)되었다. 공의 8세손으로 지금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으로 있는 달도씨(達道氏)는 나와 아주 친하게 지내는 벗이다. 어느 날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 나에게 보여 주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께서 돌아가신 지가 이미 몇백 년이 지나서 의관(衣冠)을 파묻은 곳이 살고 있는 데서 동쪽으로 10리쯤 떨어진 곳인 사포(蛇浦)의 태향(兌向) 언덕에 있는데, 묘도(墓道)에 묘표가 없고 자손들이 또 먼 곳에 흩어져 살아 묘역을 살펴보는 것조차 제때에 할 수가 없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드디어 민몰되어 나무하고 꼴 베는 사람들이 묘 위에 올라가게 될 경우, 비록 후손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그곳을 알지 못하게 될까 걱정스럽다. 더구나 탁월한 선조의 행적이 장차 민몰되어 전해지지 않게 된다면, 이 어찌 슬프고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족형(族兄)인 승지공(承旨公)이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 이미 나와 여러 동종(同宗)들과 더불어 비석으로 쓸 돌을 뜨고 빗돌받침을 마련해 놓았으나, 미처 세우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이제 공이 해 주는 한 마디 말을 얻어 비석에 새기고자 한다. 그리하여 선조의 덕이 후세에 드러나게 해 준다면, 그 은혜가 아주 클 것이다. 이에 감히 절을 하고 청하는 바이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안렴공(按廉公)의 효성은 이미 귀신을 감동시키고 천지에 퍼져서 혁혁하게 사람들의 눈과 귀에 남아 있으니, 어찌 거칠고 졸렬한 나의 글이 있어야만 전해지겠는가. 돌아보건대 나는 상주 고을의 말학(末學)이고 공에게는 외예(外裔)가 된다. 그러니 의리에 있어서 사양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이에 드디어 가장을 상고해 보고 위와 같이 서술한다. 조정에 서서 역임한 관직의 차서 및 집안에서 거처할 적의 행의(行誼)에 대해서는 연대가 이미 멀어서 문적(文籍)을 상고해 증험할 수가 없기에 상세하게 쓰지 못한다. 그 후손들은 아주 많아서 역시 다 기록할 수가 없기에 대략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현재 조정에 있는 사람으로는, 문학군(文學君)이 있고, 그의 형인 적도(適道)는 상운도 찰방(祥雲道察訪)으로 있고, 동생인 열도(悅道)는 예조 좌랑으로 있다. 이른바 족형인 승지는 이름이 지제(之悌)로, 문명이 있어 대과(大科)에 급제해 사류(士類)들이 추중하는 바가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수를 누리지 못하였다. 그의 아들은 이름이 홍망(弘望)이다. 문학군의 아들 이름은 점(坫)과 구(坵)인데, 모두 준수하고 온아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마땅히 적지 않을 것이니, 신씨(申氏)의 복이 끊이지 않은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효자가 다하지 아니하니, 길이 너에게 아름다움을 주리라.〔孝子不匱 永錫爾類〕” 하였고, 또 이르기를, “군자는 만년토록 영원히 자손과 복을 주리라.〔君子萬年 永錫祚胤〕” 하였으니, 공을 두고 이른 말이 아니겠는가. 아, 아름답도다.

 

                                                                  高麗按廉使申公墓表

 

尙之轄丹密縣傍。有小石碑立路左。刻曰孝子里。古老傳以爲按廉使申公所居也。過者敬之。謹按公諱祐。仕高麗。官至掌令。嘗爲全羅道按廉使。麗朝故事。以時分遣近侍于諸道。祭告山川。廉問民俗。黜陟守令之幽明。名之曰按廉使。蓋極一時之選也。公處昏濁之世。能皎潔持身。事父母盡孝。父版圖判書諱允濡卒。廬墓三年。朝夕號于墓。有雙竹生墓前。人以爲孝感。事聞旌閭。以孝子名其里。事載國乘及輿地勝覽。公有二子。曰光富,光貴。光富有二子。曰士廉,士贇。士廉彥陽縣監。其玄孫元祿又以孝行趾公美旌閭。公之八世孫今侍講院文學達道氏與余友甚善。一日。以家狀示余而言曰。吾先祖歿已數百年。衣冠之藏。在所居之東十里許蛇浦兌向之原。而墓道無表。子孫又散居遠地。展省不能以時。恐久遂湮夷。撨牧或登丘壟。則雖雲仍亦不得識其處。況其卓絶之行又將泯泯無傳。則豈不悲且懼哉。族兄承旨公在世時。曁余諸同宗謀伐石具趺碣。未及樹而歿。今願得公一語而剞劂之。使先德顯於後。則爲賜大矣。敢拜以請。余惟按廉公之孝誠。旣已感鬼神而斡造化。赫赫在人耳目。奚待蕪拙而傳。顧余尙鄕之末學。而於公又外裔也。於義有不得以辭者。遂攷其狀而敍之如右。其立朝歷官次序及家居行誼。年代已遠而文籍無徵。不得以詳焉。其孫衆多。亦不能盡錄。略書于左。見今在朝者。文學君及其兄適道。祥雲察訪。弟悅道。禮曹佐郞。其所謂族兄承旨。名曰之悌。有文名取大科。爲士類所重。不幸而不克壽。有子名弘望。文學君有子名坫,丘。皆俊秀而溫雅。余所未及知者當亦不少。申氏之祿蓋未艾也。詩曰。孝子不匱。永錫爾類。又曰。君子萬年。永錫祚胤。非公之謂也耶。嗚呼休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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