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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사 이정구

대학강어 - 전 4장 강어. 본말(本末)에 대한 풀이

작성자향산 김문진|작성시간26.06.14|조회수11 목록 댓글 0

 

                                                      전 4장 강어. 본말(本末)에 대한 풀이

 

대저 사물에 있어 마땅히 해야 할 것은 모두 본(本)이 있고 말(末)이 있지 않음이 없으니, 본은 먼저 해야 할 바이고 말은 뒤로 해야 할 바이다. 그러므로 말이 다스려지기를 바라면 반드시 먼저 그 본을 다스려야 하니, 본이 다스려지지 않고서 말이 다스려지는 경우는 있지 않다. 진실로 먼저 해야 할 바를 먼저 하고 뒤로 해야 할 바를 뒤로 한다면 본말의 순서를 알았다고 할 만하다.

이 장에서 이른 바 “송사(訟事)를 처결함은 내가 남들과 같지만 반드시 송사가 없도록 할 것이다.” 한 것에는 명명덕ㆍ신민의 관계와 같은 본말ㆍ선후의 의미가 들어 있다. 성인의 송사를 처결함도 진실로 보통 사람과 다름없이 오직 참으로 알고 진실로 실천하여 뜻이 성실하고 마음이 바름으로 해서 그 스스로 자신의 명덕(明德)을 밝힌 것이 지선에 그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자연 그 덕화(德化)가 백성들에게 스며들어서 그들의 마음을 크게 감복시킴으로써, 실정(實情)이 없는 거짓된 사람으로 하여금 느끼고 깨달아 자신을 새롭게 고치고자 할 뿐 감히 허탄(虛誕)한 말을 늘어놓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굳이 송사를 처결하지 않더라도 절로 처결할 송사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있는 송사를 잘 처결하는 정도로는 제대로 신민(新民)을 한 것이 아니고 처결할 송사가 없어야 비로소 신민의 지극한 경지라 이를 만하다. 백성들로 하여금 송사가 없도록 하는 것은 오직 명덕을 밝힌 사람이라야 가능하다. 자기의 덕이 이미 밝아졌고 백성의 덕이 절로 새로워졌다면 이야말로 본말의 순서를 얻은 것이다.

혹 자기의 명덕을 밝히는 공부에는 힘쓰지 않고 한갓 사지(私智)만 부려서 구구하게 곡직(曲直)과 진위를 가리는 데에만 급급하면, 내 자신에 있는 본(本)이 이미 백성들의 뜻을 크게 두렵게 하기에 부족하여 분쟁(分爭)하고 변송(辨訟)하는 즈음에 장차 분란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 막을 수가 없게 된다. 이로써 신민의 효험을 바란다면 또한 말(末)이 아니겠는가.

《대학》의 전(傳)을 쓴 이가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본말의 뜻을 풀이하고 또 종결지어 “이를 본(本)을 안다고 한다.” 하였으니, 학자로 하여금 선후의 순서를 알아서 마땅히 행해야 할 도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

 왕 통판의 강어

이 장(章)은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본말의 뜻을 풀이하였다. 《대학》의 경문(經文)을 보면, ‘사물에는 본말이 있다〔物有本末〕’는 말을 공자가 하였으므로 역시 공자가 다른 날에 한 말로써 이를 입증한 것이다. 옛날에 공자가 “송사를 처결함은 내가 남들과 같지만 반드시 백성들로 하여금 송사가 없도록 할 것이다.” 하였으니, 대저 여기서 소송하는 사람은 실정이 없는 사람이고 소송하는 말은 허탄한 말인 것이다. 그런데 성인이 실정이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허탄한 말을 늘어놓지 못하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은 과연 어떠한 공부를 하였길래 이러할 수 있었던 것인가.

성인은 사물의 이치가 이르고 앎이 지극해짐〔物格知至〕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밝아졌던 것이니 밝아지면 천하의 거짓을 살필 수 있으므로 백성들이 스스로 그 밝음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며, 뜻이 성실해지고 마음이 바루어짐〔意誠心正〕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공정해졌던 것이니 공정하면 천하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으므로 백성들이 스스로 그 공정함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송사를 처결하지 않아도 송사가 절로 없어지게 되는 까닭이다.

백성들에게 송사가 없는 것은 백성들의 덕이 새로워졌기 때문이고, 백성들로 하여금 송사가 없도록 하는 것은 자기의 덕이 밝아졌기 때문이다. ‘백성들로 하여금 송사가 없도록 할 것이다’라는 말을 보면 정치를 하는 근본을 알 수 있다. 즉 믿음이란 집안, 나라, 천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의 몸, 마음, 뜻, 앎에 있는 것이니, 명명덕ㆍ신민과 본말ㆍ선후의 순서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장에서 중점은 ‘송사가 없도록 할 것〔使無訟〕’ 한 구절에 있으니, ‘사(使)’ 자 안에 명덕(明德)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실정이 없는 자가 거짓말을 늘어놓지 못하도록 한다〔無情者不得盡其辭〕’는 구절은 ‘송사가 없도록 한다’는 뜻을 되풀이한 것이고, ‘크게 두렵게 한다〔大畏〕’는 구절은 ‘사(使)’ 자의 뜻을 되풀이한 것이다. 이 장은 《논어(論語)》의 원문과는 다른 점이 있으니,《논어》에서는 ‘송사를 처결함〔聽訟〕’과 ‘송사가 없도록 함〔無訟〕’으로써 본(本)과 말(末)을 나누었는데 여기서는 명명덕과 신민으로써 본말을 나누었다. 그러므로 ‘송사를 다스린다’는 구절은 의미가 전혀 가벼워져 단지 ‘송사가 없도록 한다’는 구절 안에 포함됨으로써 이 두 구절이 본말의 관계에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傳四章講語。釋本末。

 

夫事物之當爲者。莫不有本而有末。本者所當先。而末者所當後也。故欲末之治。則必先治其本。本之不治。而能治其末者未之有也。苟能先其所當先。後其所當後。則可謂知本末之序矣。此章所謂聽訟使無訟。卽明明德新民之本末先後也。蓋聖人之聽訟。固無異於衆人。唯其眞知實踐。意誠心正。所以自明其明德者。無非止於至善。故自然有以薰陶漸染。大服民之心志。能使無實之人觀感悔悟。求以自新而不敢盡其虛誕之辭。是以不待聽訟而自無可聽之訟也。然則有訟能聽。非所以新民也。無訟可聽。方可謂新民之至矣。使民無訟。唯明明德者能之。己德旣明而民德自新。則斯乃得本末之序者也。苟或不務明其明德。而徒欲逞其私智。區區於曲直情僞之辨。則其本之在我者。旣不足以大畏其志。分爭辨訟之際。將不勝其紛紜而莫之旣也。以是而求新民之效。不亦末乎。傳者引孔子之言。以釋本末之意。而又結之曰此謂知本。欲使學者有以知所先後。而不違於當行之道也。

附王通判講語

此引夫子之言釋本末。見聖經物有本末之論。自夫子發之。亦自夫子他日之言徵之也。昔者。夫子曰。聽訟吾猶人也。必也使無訟乎。夫訟者之人。無情實之人也。訟者之詞。虛誕之詞也。聖人能使無情之人。不敢盡其虛誕之辭。果何脩而得此哉。蓋由聖人物格知至。其心明矣。明則有以察天下之僞。故民自畏其明。意誠心正。其心公矣。公則有以服天下之心。故民自畏其公。此訟所以不待聽而自無也。夫民無訟者。民德之新也。使民無訟者。己德之明也。觀使民無訟之言。可以知出治之本。信不在家國天下。而惟在吾身心意知之間。明德新民本末先後之序。斷可識矣。重在使無訟一句。使字。內含明德意。無情句。是申無訟。大畏句。是申使字。此章與論語不同。論語以聽訟無訟分本末。此以明德新民分本末。故聽訟句全輕。只在無訟句內。見出本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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