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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산 이유원

좌씨전(左氏傳)

작성자향산 김문진|작성시간26.06.10|조회수28 목록 댓글 0

 

 

                                                                        좌씨전(左氏傳)

 

○ 《춘추》의 삼전(三傳)인 《좌전(左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은 모두 경문(經文)을 잘 해설하였으나 단점이 있다. 정강성(鄭康成)은, “《좌전》은 예(禮)에 대해 잘 풀이하였고, 《공양전》은 참언(讖言)에 대해 잘 풀이하였고, 《곡량전》은 경(經)에 대해 잘 풀이하였다.” 하였고, 무자(武子) 범영(范甯)은, “《좌전》은 화려하고 풍부하나 잘못이 무(誣)에 있고, 《곡량전》은 맑고 아름다우나 잘못이 단(短)에 있고, 《공양전》은 논리적이나 잘못이 속(俗)에 있다.” 하였다. 유지기(劉知幾)는, “《좌전》은 의리에 있어서 세 가지 장점이 있고, 《곡량》과 《공양》 두 전은 의리에 있어서 다섯 가지 단점이 있다.” 하였고, 원보(原父) 유창(劉敞)은, “《좌전》은 부고(赴告)에 구속되었고, 《공양전》은 참위(讖緯)에 이끌렸고, 《곡량전》은 일월(日月)에 군색하였다.” 하였다. 최백직(崔伯直 백직은 송나라 최자방(崔子方)의 자)은, “《좌전》은 천(淺)하고, 《공양전》은 험(險)하고, 《곡량전》은 오활하다.” 하였고, 조이도(鼂以道 이도는 송나라 조열지(鼂說之)의 자)는, “《좌전》의 잘못은 전일하면서도 방종하고, 《공양전》의 잘못은 잡다하면서도 구차하고, 《곡량전》은 방종하지 않고 구차하지 않으나 따르기만 한 잘못이 있다.” 하였고, 문정공(文定公) 호안국(胡安國)은, “사건은 《좌전》이 가장 잘 구비되었고, 예(例)는 《공양전》이 가장 명확하고, 의리는 《곡량전》이 가장 정밀하나, 어떤 것은 잘못이 무(誣)에 있고 어떤 것은 잘못이 난(亂)에 있고 어떤 것은 잘못이 천착에 있다.” 하였고, 소온(少蘊) 섭몽득(葉夢得)은, “《좌전》은 사건만 전하고 의리는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에는 자세하지만 일이 반드시 사실적이지는 않고, 《공양전》과 《곡량전》은 의리만 전하고 사건은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전에는 자세하지만 의리가 반드시 합당하지는 않다.” 하였고, 문공(文公) 주희(朱熹)는, “《좌전》은 사학(史學)으로 사건은 상세하지만 이치가 어긋났고, 《공양전》과 《곡량전》은 경학(經學)으로 이치는 정밀하지만 사건은 착오가 있다.” 하였다.

학자는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려야만 거의 성인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당(唐)나라의 경학가인 담조(啖助)와 조광(趙匡) 이후로 사적인 생각에 의지하고 억측으로 결정하는 것이 심하여 세 전(傳)을 물리쳤으니, 이것은 마치 집에 들어가면서 문을 통하지 않는 것과 같다.

○ 여 성공(呂成公 성공은 송나라 여조겸(呂祖謙)의 시호)이 이르기를, “《좌전》에 세 가지 병통이 있으니, 주(周)나라와 정(鄭)나라가 인질을 교환했다고 쓰면서 임금과 신하의 의리를 밝히지 않은 것이 하나이며, 인사(人事)를 억지로 재앙이나 상서에 끌어다 붙인 것이 둘이며, 관중(管仲)과 안영(晏嬰)의 일을 기록하는 것은 잘했으면서 성인(聖人)의 일을 말할 때에는 형편없이 한 것이 셋이다.” 하였는데, 개보(介甫) 왕안석(王安石)은, 좌씨(左氏)를 육국(六國) 시대의 인물로 의심할 만한 대목이 11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 임금이 백성에 대해서도 충(忠)이라고 하니, 계량(季梁)이 이르기를, “임금이 백성들에게 이롭게 해 줄 것을 생각하는 것이 충(忠)입니다.[上思利民忠也]” 하였다. 자식이 부모에 대해서도 자(慈)라고 하니,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맛있는 음식으로 부모를 사랑한다.[慈以旨甘]” 하였다. 성현(聖賢)이 충(忠)을 말한 것도 임금을 섬기는 데에만 전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으니, 이를테면 남을 위하여 일을 도모할 때에 반드시 충심으로 한다고 하였고 벗에 대해 반드시 충심으로 고한다고 하였고 어버이를 섬길 때에도 반드시 충심으로 봉양한다고 하였거니와, 선(善)으로 사람을 가르치는 것, 이익이 백성들에게 미치게 하는 것 등 어느 것도 충(忠) 아닌 것이 없다.

○ 하도(河圖)에 이르기를, “곤산(崑山)에서 오색(五色)으로 흐르는 물이 나는데, 그 가운데 백수(白水)가 중국으로 들어가 이름이 하수(河水)가 되었다.” 하였다. 그러므로 진 문공(晉文公)이 구슬을 하수에다 던지며 “저 백수와 같으리라.” 하였던 것이다.

○ 개지추(介之推)가 말하기를, “몸을 장차 숨기려고 하는 마당에 어찌 제 몸을 꾸미겠습니까.” 하였으니, 군자의 은거는 이름할 수가 없다.

○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소평(召平)이 사호(四皓)보다 고고하고, 신도반(申屠蟠)이 곽태(郭泰)보다 훌륭하다.” 하였다.

○ 초(楚)나라가 흥기할 때에는 거칠게 만든 수레를 타고 누더기 옷을 입는 등 검소를 위주로 하더니, 쇠퇴할 때에는 비취로 만든 이불을 덮고 표범 가죽으로 만든 신을 신는 등 사치를 위주로 하였다. 그 나라가 흥기할 것인지 쇠퇴할 것인지는 검소한지 사치한지를 보면 알 수 있다.

○ 신포서(申包胥)는 장자방(張子房)과 비슷한 천하의 선비이다. 초(楚)나라가 오(吳)나라의 공격을 받아 패하게 되자 진(秦)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여 오(吳)나라를 물리친 점은 한(韓)나라가 망하자 한(漢)나라 군사를 빌려 진(秦)나라를 멸망시킨 점과 유사하고, 영(郢) 땅에 침입한 원수를 갚지 못한 대목에서는 한(漢)나라를 따라 도모하여 항우(項羽)를 멸망시킨 점과 유사하고, 초나라 임금이 입성한 뒤에 상(賞)을 받지 않고 피한 점은 한(漢)나라의 왕업이 이루어진 뒤에 일을 사양한 점과 유사하다. 하(夏)나라가 쇠퇴한 후로 성대한 충성심을 발휘한 자는 이 두 사람뿐이나 초나라는 다시 일어나고 한(韓)나라는 멸망하였으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거니와 자방(子房)의 뜻만은 펴진 것이다.

내가 생각건대, 옛사람 중에서 오직 한(漢)나라의 제갈 무후(諸葛武侯)만이 이들의 뒤를 이을 수 있으니, 몸 바쳐 있는 힘을 다하되 죽고 나서야 그만둔 점은 그 뜻이 한결같다 하겠다. 양(梁)나라의 왕림(王琳)과 당(唐)나라의 장승업(張承業)은 공을 비록 이루지 못하였으나 아마도 그다음은 될 것이니, 공을 이루고 이루지 못한 것만 가지고 논할 일은 아니다. 아, 춘추 시대에 망한 나라가 52개국이나 되지만 그런 사람을 보지 못하였으니, 수(遂) 땅의 인씨(因氏), 함씨(頷氏), 공루씨(工婁氏), 수수씨(須遂氏)가 겨우 제(齊)나라의 수졸(戍卒)을 섬멸한 정도였고, 이미 망한 나라를 다시 존속시킨 자는 오직 신포서 한 사람뿐이었다.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 어손(御孫)이 이르기를, “검소는 덕 중에서 큰 덕이고, 사치는 악(惡) 중에서 큰 악입니다.” 하였으니, 옛날 임금의 마음에 혁신을 불러일으킨 자는 반드시 검소함을 거론하였다. 그런데 동중서(董仲舒)는 대책(對策)에, “검소는 중용의 도리에 합당한 성인의 제도가 아닙니다.” 하였고, 공손홍(公孫弘)은 이르기를, “군주의 병통은 광대(廣大)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였으니, 동중서와 공손홍의 바르고 사악함은 비록 다르지만, 한 무제(漢武帝)의 사치스러운 마음을 열어 준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 진(晉)나라 대부 백종(伯宗)은 직언(直言)하기를 좋아하였으나 진나라에 용납되지 못하였고, 제(齊)나라의 시호가 무자(武子)인 최저(崔杼)는 진언(盡言)하기를 좋아하였으나 제나라에 용납되지 못하였으니, 이는 소인(小人)이 많고 군자(君子)가 적었기 때문이다. 한(漢)나라의 선비들은 아첨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장유(長孺) 급암(汲黯)을 어리석다고 하고 주유(朱游)를 미쳤다고 하였으며, 진(晉)나라의 선비들은 활달한 것이 습관이 되어 변망지(卞望之)를 비루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군자의 지킴은 습속(習俗)으로 바꿀 수 없다.

○ 유현(劉炫)이 이르기를, “《국어(國語)》는 좌구명(左丘明)이 지은 것이 아니다.” 하였고, 소온(少蘊) 섭몽득(葉夢得)이 이르기를, “옛날에 좌씨(左氏)와 좌구씨(左丘氏)가 있었다.” 하였으며,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이 이르기를, “좌구(左丘)가 실명(失明)하고 나서 《국어》를 지었다.” 하였다. 이제 《춘추(春秋)》의 전(傳)은 좌씨가 지었고 《국어》는 좌구씨가 지었다고 하였으니 한사람이 될 수 없으며, 문체(文體)도 같지 않으니 한사람의 글이 아닌 것이 매우 분명하다. 좌씨(左氏)는 대개 좌사(左史)의 후손이니 관직으로 성씨를 삼은 자이다. 문공(文公) 주희(朱熹)가 이르기를, “좌씨는 초(楚)나라 좌사(左史)인 의상(倚相)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그의 글이 초나라 일을 설명한 부분은 상세하다.” 하였고, 사마씨(司馬氏)는 이르기를, “좌씨가 《춘추》에 전(傳)을 내고 싶어서 먼저 《국어》를 지었으니, 《국어》의 내용은 전(傳)만큼 정밀하지 못하다.” 하였다.

○ 송(宋)나라 백희(伯姬)에 대하여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부인으로서 백이(伯夷)라 할 만하니, 좌씨가 ‘시집가지 않은 처녀의 태도이지 부인의 태도는 아니다.’라고 평한 것은 잘못이다.” 하였고, 육순(陸淳 순은 당(唐)나라 육질(陸質)의 본명)이 또 이르기를, “백희의 행동은 계승하거나 후세에 전할 만한 도가 아니다.” 하였는데, 문정공(文定公) 호안국(胡安國)이 육순을 기롱하여 이르기를, “이 말로 보건대, 그가 살기를 탐내고 죽는 것을 아깝게 여긴 것을 알 수 있으니, 이는 천명(天命)을 모른 것이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육순이 소인배인 왕숙문(王叔文)의 당이 되고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니, 이는 그가 천명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 위후(衛侯)가 북궁희(北宮喜)에게 정자(貞子)라는 시호(諡號)를 하사하고, 기주조(祈朱鉏)에게 성자(成子)라는 시호를 하사하였으니, 이것은 신하로서 생존시에 시호를 받은 경우이다. 위 명제(魏明帝)에게 유사(有司)가 주달하기를, “폐하께서는 예(禮)를 제정하고 악(樂)을 지어 나라를 부흥하셨으니, 위 열조(魏烈祖)라 하겠습니다.” 하였으니, 이것은 임금으로서 생존시에 시호를 받은 경우이다.

○ “계씨에게 보기 좋은 나무가 있었는데 한 선자가 노닐었다.[季氏有嘉樹 韓宣子譽之]”에 대해 복건(服虔)이 이르기를, “예(譽) 자는 노닌다는 뜻이니, 선자(宣子)가 그 나무 아래에서 노닐었다는 말이다. 하언(夏諺)에 ‘한 번 유람하고 한 번 즐김이 제후의 법도가 된다.[一游一譽 爲諸侯度]’ 하였다.” 하였다.

○ 장문중(臧文仲)이 옥경(玉磬)으로 제(齊)나라에 식량 지원을 요청했다는 말은 《노어(魯語)》에 보인다. 송(宋)나라 홍매(洪邁)의 《용재삼필(容齋三筆)》 서박고도(書博古圖)에 이르기를, “《좌전》에 옥경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 옛날에는 일구(一句)를 일언(一言)이라고 하였으니, 《좌씨전》에 ‘자태숙의 구언[子大叔九言]’이라고 하였고, 《논어》에 ‘한마디로 말하면 사무사이다[一言蔽之曰思無邪]’라고 하였다.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이후로 구(句)라는 칭호가 있게 되었고, 지금은 일자(一字)를 일언(一言)이라고 하니, 예를 들면 시(詩)에서 오언(五言), 육언(六言), 칠언(七言)과 같은 것들로,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 “장공이 오생(寤生)하였다.[莊公寤生]”는 대목에 대해 《풍속통(風俗通)》에 이르기를, “속설(俗說)에, 태어나자마자 눈을 뜨고 보는 것을 오생이라고 한다.” 하였다.

○ 노(魯)나라가 토지세를 거두려고 하자 중니(仲尼)가 이르기를, “주공(周公)께서 정하신 법이 있다.” 하였고, 진(晉)나라가 형정(刑鼎)을 만들자 중니가 이르기를, “진나라는 시조인 당숙(唐叔)이 천자한테 받았던 법도(法度)를 지켜야 할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노나라와 진나라가 나라를 세우게 된 근본이다. 이 때문에 고조(高祖)의 법도를 따른 한(漢)나라는 다스려졌고 태종(太宗)의 법제(法制)를 바꾼 당(唐)나라는 어지러워진 것이다. -하(夏)나라는 전칙(典則)이라 하고, 상(商)나라는 성헌(成憲)이라 하고, 주(周)나라는 구장(舊章)이라 한다.

 

                                                                              左氏傳

 

三傳。皆得於經而有失焉。左氏善於禮。公羊善於讖。穀梁善於經。鄭康成之言也。左氏豔而富。其失也。穀梁淸而婉。其失也短。公羊辯而裁。其失也俗。范武子之言也。左氏之義有三長。二傳之義有五短。劉知幾言也。左氏拘於赴告。公羊牽於讖緯。糓梁窘於日月。原父之言也。左氏失之淺。公羊失之險。糓梁失之迂。崔伯直之言也。左氏之失專而縱。公羊之失雜而拘。糓梁不縱不拘而失之隨。鼂以道之言也。事莫備於左氏。例莫明於公羊。義莫精於糓梁。或失之誣。或失之亂。或失之鑿。胡文定之言也。左氏傳事不傳義。是以詳於史而事未必實。公羊糓梁傳義不傳事。是以詳於經而義未必當。葉少蘊之言也。左氏史學。事詳而理差。公糓經學。理精而事誤。朱文公之言也。學者取其長舍其短。庶乎得聖人之心矣。啖趙以後。憑私臆决甚。而閣三傳。是猶入室而不由戶也。呂成公。謂左氏有三病。周鄭交質。不明君臣之義一也。以人事傅會灾祥二也。記管晏之事則善。說聖人之事則陋三也。王介甫疑左氏爲六國時人者。十一事也。君之於民。亦曰忠。季梁云。上思利民忠也。子之於親亦曰慈。禮云慈以旨甘。聖賢言忠。不顓於事君。爲人謀必忠。於朋友必忠告。事親必忠養。以善敎人。以利及民。無適非忠也。

河圖曰。崑山出五色流水。其白水入中國。名爲河。故晉文公投璧于河曰。有如白水。介之推曰。身將隱。焉用文之。君子之潛也。名不可得。先儒謂召平高於四晧。申屠蟠賢於郭泰。楚之興也。篳路藍縷。其衰也。翠被豹舃。國家之興衰。視其儉侈而已。申包胥似張子房。天下士也。楚破矣。請秦師以却吳。韓亡矣。借漢兵以滅秦。其相似一也。入郢之仇未報。則從漢爲之謀。以滅項。其相似二也。楚君旣入而逃賞。漢業旣成而謝事。其相似三也。自夏靡之後。忠之盛者。二子而已。然楚國復興而韓祀不續。天也。子房之志則伸矣。我思古人。唯漢諸葛武侯可以繼之。鞠躬盡力。死而後已。其志一也。若梁之王琳。唐之張承業。功雖不就。抑可以爲次矣。不當以功之成否論。吁春秋亡國五十二。未見其人也。遂之四氏。僅能殲齊戍。其亡而復存者。唯一包胥。豈不難哉。御孫曰。儉。德之共也。侈。惡之大也。古之革君心者。必以儉。董仲舒對策。乃謂儉非聖人之中制。公孫弘亦云。人主病不廣大。舒弘正邪雖殊。而啓武帝之侈心則一。伯宗好直言而不容于晉國。武子好盡言而不容于齊。小人衆而君子獨也。漢士習於諂諛。而以汲長孺爲戇。朱游爲狂。晉士習於曠達。而以卞望之爲鄙。君子之所守。不以習俗移也。

劉炫謂國語非丘明作。葉少蘊云。古有左氏左丘氏。太史公稱。左丘失明。厥有國語。今春秋傳作左氏。而國語爲左丘氏。則不得爲一家。文軆亦自不同。其非一家書明甚。左氏盖左史之後。以官氏者。朱文公謂。左氏乃左史倚相之後。故其書說楚事爲詳。司馬氏謂。左氏欲傳春秋。先作國語。國語之文。不及傳之精也。宋伯姬。先儒謂。婦人之伯夷。左氏謂女而不婦。非也。陸淳又以爲。非可繼可傳之道。胡文定譏之。謂以此卜其貪生惜死。不知命矣。愚謂淳黨叔文而不羞。由其不知命也。

衛侯賜北宮喜謚曰貞子。賜祈朱鉏謚曰成子。是人臣生而謚也。魏明帝有司奏。帝制作興治。爲魏烈祖。是人君生而謚也。

季氏有嘉樹。韓宣子譽之。服虔云。譽。游也。宣子游其樹下。夏諺曰。一游一譽。爲諸侯度。臧文仲以玉磬告糴于齊。見魯語。容齋三筆書博古圖。謂左傳無玉磬之說。非也。古以一句爲一言。左氏傳。子大叔九言。論語一言蔽之曰思無邪。秦漢以來。乃有句稱。今以一字爲一言。如五言六言七言詩之類。非也。莊公寤生。風俗通云。俗說。而墮地未能開目視者。謂之寤生。魯用田賦。仲尼曰。有周公之典在。晉鑄刑鼎。仲尼曰。晉國將守唐叔之所受法度。魯晉所以立國也。是以漢循高祖之法則治。唐變太宗之制則亂。夏有典則。商云成憲。周云舊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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