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선생집 서(白沙先生集序)
하늘이 세도(世道)를 위하여 염려한 것이 지극하다 하겠다. 평피 왕복(平陂往復)은 없을 수 없는 세변(世變)인데, 대체로 기수(氣數)에 매인 것이라 하늘도 또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변(變)이 장차 이르려고 할 적에는 하늘이 반드시 뛰어난 인물(人物)을 내어서 책임을 맡기어, 혹은 사공(事功)을 이루게 하기도 하고 혹은 풍렬(風烈)을 수립하게 하기도 함으로써 이 세상의 이 도(道)가 끝내 힘을 입게 되는 것이다.
대저 뛰어난 인물의 경우는 태어날 때에 실로 천지(天地)의 간기(間氣)를 얻어 우뚝이 뛰어나서 존몰(存沒)에 따라 드러나거나 묻히지 않기 때문에, 읊조리고 담소한 나머지도 모두 후세의 중히 여기는 바가 되는 것인데, 오래 전 옛 사람은 그만두고라도 근대(近代)에서 찾아본다면 고상(故相) 백사(白沙) 이공(李公)이 바로 여기에 가깝다 하겠다.
우리 나라가 임진란(壬辰亂) 이후로 대변(大變)을 만난 것이 모두 세 번이다. 왜구(倭寇)가 침입했을 적에는 나라가 다 망하고 남은 것은 겨우 한 터럭[一髮]과 같았는데, 공이 으뜸으로 큰 계책을 세워 천조(天朝)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윽고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어 임금의 계책을 도와서 분주(奔奏)하고 선후(先後)하여 중흥(中興)의 업(業)을 잘 이루어 내었다.
또 정응태(丁應泰)가 우리 나라를 무함하였을 적에는 화기(禍機)의 치열하기가 임진란보다 심하여, 황제(皇帝)가 한번 현혹됨에 미쳐서는 사태가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리하여 조정의 신하들이 의기가 저상되어 안절부절못하면서 누구도 앞장서서 그 봉염(鋒焰)에 맞서려는 이가 없었는데, 공이 단기(單騎)로 사명을 받들고 제정(帝庭)에 가서 호소하여, 국가에 대한 무함을 명쾌하게 씻음으로써 임금의 근심이 풀리도록 하였으니, 그 공은 더욱 위대한 것이었다.
또 한 세대를 지나서는 인륜(人倫)의 변고를 만나서, 간신(奸臣)이 임금의 악(惡)을 유도하여 군모(君母)를 폐하기를 청함으로써 금용(金)의 화(禍)가 조석(朝夕) 사이에 닥쳐오고 있었으니, 사람의 사람 된 도리가 하루 아침에 모조리 땅에 떨어진 것이다. 이 때 한창 또 도거(刀鋸)와 정확(鼎)을 진열하여 기세를 올리고서 말하는 자를 감시하고 있었는데, 공이 용기를 분발하여 한 마디 말을 뱉어서 부자(父子)ㆍ군신(君臣)의 의리를 정립하고, 끝내 이것으로 죄를 얻어서 머나먼 변방에 유찬되어 죽고 말았다. 그러나 공의 한 마디 말을 힘입어 지척에 있는 장추궁(長秋宮)에는 끝내 불측한 행위를 가하지 못하였으니, 그 천륜을 동량처럼 버티어 부지한 것을 자못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러니 비록 ‘우뚝하게 천지(天地)에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그럴 만하다.
본조(本朝)의 태평 성대가 2백 년을 계속되다가, 불행히도 공의 세대를 당하여 세 번이나 대변을 만나서 세 번이나 기절(奇節)을 세움으로 인하여 사직(社稷)이 장구하게 보존되고 이륜(彛倫)이 재차 행하여졌으니, 진실로 하늘이 낸 사람으로서 간기(間氣)를 얻은 것이 있는 이가 아니면 그 누가 여기에 참예할 수 있겠는가.
공은 재주가 매우 높고 학식이 매우 해박하였으므로, 문장(文章)을 하는 데에 뛰어난 기운이 있어, 조사(藻思)가 솟아 넘치고 탁월하고 격렬하여 조금도 속박됨이 없었다. 그래서 그 중에 잘 된 것은 고인(古人)의 수준에도 멀지 않고, 그리 잘 되지 않은 것도 또한 지금 사람들로서는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공은 이것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서, 저술(著述)한 것도 이따금 초고(草稿)를 버리고 거두어 두지 않았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아, 그러나 또한 어찌 많은 것을 필요로 하겠는가.
숙손표(叔孫豹)가 썩지 않는 것을 논한 데에 입언(立言)이 최후에 있었는데, 문장(文章)은 또 입언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렇다면 공이 수립한 것은 절로 충분히 천추(千秋)에 빛날 것이니, 구구한 문사(文詞)의 전해지고 안 전해지고는 족히 공에게 경중(輕重)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공의 풍도를 사모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곧 이미 지나간 하찮은 종적(蹤迹)이라도 모두 영구하게 전하려고 할 것인데, 더구나 정신이 쓰인 것이며 언어로 발산된 것임에랴.
공이 작고한 지 이미 12년째가 되었으나 가집(家集)이 아직 세상에 행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이공 현영(李公顯英)이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는바, 그가 강릉(江陵)의 이 사군 명준(李使君命俊)과는 모두 옛날 공의 문객이었는지라, 개연히 서로 합의하여 공의 유고(遺稿)를 모아서 판각(版刻)에 부치자, 공의 여러 아들이 유(維)에게 서문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불녕(不佞)한 유는 약관(弱冠)의 나이에 한 마을의 자제로서 공의 문에 가 뵙게 되어 국사(國士)의 대우를 입었었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 고루한 말을 꾸미어 이 작업을 돕는 것은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으므로, 공의 평생 행적을 대략 서술하여 하늘이 공을 낸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바이다. 아, 이와 같지 않다면 문장이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어찌 족히 먼 후세에 전할 수 있겠는가. 뒤에 이 책을 보는 이들은 또한 근본한 바를 알 것이다.
숭정(崇禎) 기원(紀元)의 2년인 기사년 윤사월(閏四月) 하순(下旬)에 분충찬모입기정사공신(奮忠贊謀立紀靖社功臣) 자헌대부(資憲大夫) 행 사헌부대사헌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춘추관사 세자우부빈객(行司憲府大司憲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同知經筵春秋館事世子右副賓客) 신풍군(新豊君) 장유(張維)는 삼가 서(序)하다.
[주1] 평피 왕복((平陂往復) : 필연적인 세상의 변천을 뜻한다. 《주역》태괘(泰卦) 구삼효(九三爻)에 “평탄한 것은 반드시 기울어질 때가 있고, 가는 것은 반드시 돌아올 때가 있다[無平不陂 無往不復].” 한 데서 온 말이다.
[주2] 분주(奔奏)하고 선후(先後)하여 : 분주는 천하 사람들에게 임금의 덕과 명성을 효유 선양하는 것을 말하고, 선후는 앞뒤에서 서로 임금을 인도하는 것을 말한다. 《詩經 大雅 綿》
[주3] 금용(金)의 화(禍) : 금용은 성(城) 이름인데, 진 무제(晉武帝)의 양 황후(楊皇后)는 본디 어질고 부덕(婦德)이 뛰어나서 매우 총애를 입었으나, 무제가 죽은 뒤에 태자비(太子妃) 가씨(賈氏)의 무함을 입어 폐서인(廢庶人)이 된 채로 금용성에 안치되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31》 여기서는 바로 조선 선조(宣祖)의 계비(繼妃)인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선조가 죽고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한 뒤에 이이첨(李爾瞻)ㆍ정인홍(鄭仁弘) 등에 의해 폐해져서 서궁(西宮)에 유폐(幽閉)된 사실을 비유한 것이다.
[주4] 숙손표(叔孫豹)가 …… 있었는데 : 속손표는 춘추 시대 노(魯) 나라의 대부(大夫)였는데, 그가 말하기를 “가장 높은 것은 입덕(立德)이요, 그 다음은 입공(立功)이며, 그 다음은 입언(立言)이니, 아무리 오래 되어도 소멸되지 않으면, 이것을 곧 영원히 썩지 않는 것이라고 이른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左傳 襄公 24年》
白沙先生集序[張維]
天之爲世道慮也至矣。平陂往復。世變之不能無者。盖繫於氣數。天亦無能如之何也。然其變之將至也。天必爲生英人偉士。畀以其責。使或成其事功。或樹其風烈。而斯世斯道。終有賴焉。若夫人者。其生也實得天地之間氣。卓然不隨存沒而顯晦。欬唾笑談之遺。皆可爲後世重。古之人遠矣。求之近代。故相白沙李公。其庶幾乎。國家自壬辰來。遭大變者三焉。倭寇之難。國之不亡。僅如一髮。而公首建大策。請援於 天朝。旣而。長本兵贊 睿謨。奔奏先後。克成中興之業。丁應泰之誣我也。禍機之烈。劇於壬辰。卽 天鑑一眩。事有不忍言者。廷臣失氣蹜䠞。莫肯前當其鋒焰。而公單車㘅 命。赴愬 帝庭。使國誣洞雪而 主憂以釋。則其功益偉矣。閱世而遘人倫之變。奸臣逢惡。請廢 君母。金墉之禍。迫在昕夕。人之所以爲人者。一朝墜地盡矣。方且陳刀鋸列鼎鑊。盛氣以胥言者而公明目張膽。吐片辭以定父子君臣之義。竟坐此竄絶塞以沒。然賴公一言。長秋咫尺地。卒不得以不測加焉。則其所撑柱之而扶持之者。殆有不可以言盡者。雖謂之磊磊軒天地。可也。 本朝昇平二百年。不幸當公之世。三遘大變而三立奇節。 社稷靈長。彛倫再叙。苟非天之所生而有得於間氣者。其孰能與於此哉。公才甚高學甚博。爲文章。有奇氣。藻思涌溢。踔厲不羈。其至者。去古人不遠。而不至者。亦非今人所能及。顧公於此不甚屑意。所著述。往往棄稿不收。故存者不能多。噫。亦何待於多哉。叔孫豹論不朽。立言㝡後焉。文章。又立言之靡者。公之所樹立。自足以照耀千秋。區區文詞之傳
否。不足爲公重輕。然自慕公之風者謀之。卽陳蹤末迹。皆欲其流傳永久。况於精神之所運。言語之所發者乎。公之沒已一紀。家集尙未行。會李公顯英按關東。與江陵李使君命俊。皆故公客也。慨然合筴。彙公遺稿付剞劂。而公諸子屬維引之。維不佞弱冠。以里中子。獲及公門。蒙國士之遇。今而餙其固陋之辭。以相玆役。義不敢辭。故略述公生平。以見天之生公有不偶然者。嗚呼。不如是。文章雖美。何足以傳於遠。後之覽者。其亦知所本之哉。崇禎紀元之二年歲在己巳閏四月下旬。奮忠贊謨立紀靖社功臣,資憲大夫行司憲府大司憲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同知經筵春秋館事,世子右副賓客,新豐君張維。謹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