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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봉 송익필

숙헌의 편지에 답하는 별지〔答叔獻書別紙〕

작성자향산 김문진|작성시간26.06.05|조회수16 목록 댓글 0

 

                                            숙헌의 편지에 답하는 별지〔答叔獻書別紙〕

 

〔율곡의 물음〕

북계 진씨(北溪陳氏)가 말하기를 “어떤 하나의 사물이 와서 붙었을 때 안에 있으면서 주재하는 것은 심(心)이고, 동하여 나오는 것이 기뻐하거나 노여워하는 것은 정(情)이다. 그리고 속에 어떤 하나의 물건이 있어서 능히 동하여 나오게 하는 것은 성(性)이며, 운용하는 것을 잘 헤아려서 사람을 기쁘게 하거나 노여워하게 하는 것은 의(意)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구봉의 답〕

무릇 기뻐하거나 노여워하는 것이 마땅한데 동하여 나오는 것이 기뻐하거나 노여워하는 것은 정(情)입니다. 기뻐하거나 노여워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데 동하여 나오는 것이 기뻐하거나 노여워하는 것도 정입니다. 마땅하여서 나오는 것은 선(善)이며, 마땅하지 않은데도 나오는 것은 불선(不善)입니다. 그러므로 선과 불선이 모두 정입니다. 참으로 마땅한 데에서 반드시 발하고 마땅하지 않은 데에서 반드시 발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마땅하게 되어서 마땅하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니, 의(意)를 운용하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오는 것에 마땅함과 마땅하지 않음이 있으므로, 운용하는 것에 능히 마땅하지 않은 것으로 하여금 마땅하게 하는 공이 있는 것입니다.

 

〔율곡의 물음〕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사람의 정은 발하기는 쉽고 억제하기는 어렵다.[人情易發而難制]”라고 하고, 정명도(程明道)가 말하기를 “사람이 능히 노여울 때에도 갑자기 그 노여움을 잊을 수가 있으니, 역시 외물의 유혹은 두려워할 것이 없음을 잘 알 수가 있다.[人能於怒時 遽忘其怒 亦可見外誘之不足畏]”라고 하였습니다.

〔구봉의 답〕

정(情)이 단지 선(善)한 데에서 발하고 불선(不善)한 데에서 발하지 않는다면, 주자가 말한 억제하기 어렵다는 경계와 명도가 말한 외물의 유혹에 대한 두려움은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이겠습니까. 무릇 심(心)은 적감(寂感)을 포함하고 동정(動靜)을 관통하는바, 포함하고 관통하는 것이 이미 그 바름을 얻었으면 감응하고 동하는 것이 어찌 불선함을 얻겠습니까. 그러므로 정에 선함과 불선함이 있는 것은 심이 바르거나 바르지 않은 때이고, 정에 불선함이 없는 것은 심이 이미 바르게 된 뒤입니다. 발하여서 모두 절도에 맞으면 정에 불선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율곡의 물음〕

주자가 말하기를 “성인은 기(氣)가 맑아서 심(心)이 바르다. 그러므로 성(性)이 온전하여 정(情)이 어지럽지 않을 뿐이다. 배우는 자는 마땅히 마음을 보존하여 성을 기르고 그 정을 조절하여야 한다.[聖人氣淸而心正 故性全而情不亂耳 學者當存心以養性 而節其情也]”라고 하였습니다.

〔구봉의 답〕

이른바 성인의 정(情)이 어지럽지 않다고 하는 것은 모두 선(善)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배우는 자가 그 정을 조절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혹시라도 불선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 선할 수가 없으므로 성인이 어지럽지 않은 것을 귀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가끔은 불선함이 있으므로 배우는 자가 잘 조절하도록 가르친 것입니다.

 

〔율곡의 물음〕

혹자가 정자에게 묻기를 “성은 선하고 정은 불선한 것입니까?[性善而情不善乎]”라고 하자, 정자가 답하기를 “정은 성이 동한 것이다. 요컨대 바른 데로 돌아갈 뿐이니 어찌 불선하다고 이름할 수 있겠는가.[情者 性之動也 要歸於正而已 亦何得以不善名之]”라고 하였습니다.

〔구봉의 답〕

이른바 “어찌 불선(不善)하다고 이름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은 전적으로 불선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명(性命)의 바른 것에 바탕을 둔 것은 참으로 불선한 것이 없고, 형기(形氣)의 사사로운 데에 바탕을 둔 것도 어찌 능히 모두 선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총명과 예지를 지닌 자만이 정(情)에 불선함이 없어서 능히 그 성(性)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하 사람들의 경우에는 선도 있고 불선도 있는 법입니다.

○ 이미 선유(先儒)의 설을 거론하였으나, 자기의 뜻을 가지고 그 뜻을 밝혀 보고 또다시 자기의 설을 가지고서 거듭해서 말해 보겠습니다.

무릇 아직 동(動)하지 않은 것이 바로 성(性)이고 이미 동한 것이 바로 정(情)이며 아직 동하지 않은 것과 이미 동한 것을 포함하는 것이 심(心)입니다. 심은 성과 정을 통괄하는 것입니다. 물[水]을 가지고 비유해 보면, 심은 물과 같습니다. 성은 물이 고요한 것이고 정은 물이 동하는 것입니다. 사단(四端)은 그 흐름을 하나하나 거론한 것이고, 칠정(七情)은 그 물결을 아울러 말한 것입니다.

물은 흐름이 없을 수가 없으며 또한 물결도 없을 수가 없습니다. 물결이 평지를 만나서 그 물결이 잔잔하게 흐르는 것은 물결이 그 바름을 얻어서이고, 물결이 모래와 돌을 만나서 그 물결이 거세게 흐르는 것은 물결이 그 바름을 얻지 못해서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어찌 잔잔하게 흐르는 것에 대해서는 물결이라고 하면서 거세게 흐르는 것에 대해서는 물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말하기를 “정에는 선과 불선이 있다.”라고 한 것입니다.

무릇 평지를 만나서 잔잔하게 흐르는 물결을 끌어다가 모래와 돌에 부딪쳐서 흐르게 하는 것은 의(意)입니다. 모래와 돌에 부딪쳐서 거세게 흐르는 물결을 끌어다가 다시 평지에서 잔잔하게 흐르게 하는 것도 의(意)입니다. 이 때문에 성인의 정은 모래와 돌에 부딪쳐서 거세게 흐르는 때가 없습니다.

안자(顔子)의 정(情)은 비록 혹 거세게 흐르더라도 석 달이 지난 뒤에는 능히 거세게 흐르던 물결로 하여금 잔잔하게 흐르게 할 수가 있습니다. 상인(常人)의 정은 한 번 거세게 흐르다가 한 번 잔잔하게 흘러서 거세게 흐르게 할 수도 있고 잔잔하게 흐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도척(盜蹠)의 정은 이미 모래와 돌에 부딪쳐 흐르는 것을 또다시 모래와 돌로 끌어다가 거세게 흐르게 한 것이어서 잠깐 사이도 잔잔하게 흐르게 할 수가 없습니다.

사단의 흐름은 혹시라도 멈추는 때가 없습니다. 그런즉 정에는 불선함이 없다고 한 것은 사단만을 끄집어내어 말한 것이고, 정에는 선과 불선이 있다고 한 것은 칠정을 통틀어서 말한 것입니다.

 

 

[주1] 북계 …… 하였습니다 : 북계 진씨는 송(宋)나라의 학자 진순(陳淳)으로, 호가 북계이다. 복건성(福建省) 장주부(漳州府) 용계현(龍溪縣) 사람으로, 주희의 문인이다. 저서에 《어맹대학중용구의(語孟大學中庸口義)》, 《북계자의(北溪字義)》, 《북계대전집(北溪大全集)》이 있다. 이 말은 《북계자의》 〈의(意)〉에 나온다.

 

[주2] 정명도(程明道)가 …… 하였습니다 : 정명도는 정호(程顥)를 가리킨다. 정호가 말하기를 “무릇 사람의 정 가운데 발하기는 쉽고 억제하기는 어려운 것은 오직 노여움이 가장 심하다. 다만 능히 노여울 때에 갑자기 그 노여움을 잊고서 이치의 옳고 그름을 본다면, 역시 외물의 유혹쯤은 미워할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도에 이르는 것이 역시 절반은 이른 것이다.[夫人之情, 易發而難制者, 唯怒爲甚. 第能于怒時, 遽忘其怒, 而觀理之是非, 亦可見外誘之不足惡, 而于道亦思過半矣.]”라고 하였다. 《宋元學案 卷13 明道上》

 

[주3] 적감(寂感) : 적연부동(寂然不動)과 감이수통(感而遂通)을 말한다. 적연부동은 고요히 아무 움직임이 없는 천지 운화(運化)의 신묘(神妙)함을 본체상에서 형용한 말이고, 감이수통은 감응하여 모든 이치에 통함을 현상 면에서 형용한 말이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역은 생각이 없고 하는 것도 없어 적막하게 움직이지 않다가, 느낌이 있을 때는 마침내 천하의 일을 통한다.[易, 无思也, 无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송대에 와서 성리학자들의 중요한 이론이 되었는데, 그 선구인 주돈이(周敦頤)가 《통서(通書)》에서 이와 같이 말하였다.

 

[주4] 동정(動靜) : 우주의 근원적 실체를 운동과 정지라는 측면에서 규정한 말이다. 변동(變動), 이동(移動), 운동(運動) 등을 동이라 하고, 정지(停止), 불변(不變), 정지(靜止) 등을 정이라 한다. 동과 정은 본래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진리에 대한 양면의 관점이다. 다만 그 진리를 체(體)와 용(用)으로 구별하여 볼 때 그 체를 정이라 하고, 그 용을 동이라 한다. 체용과 동정 등은 하나의 진리를 양면으로 말한 것이다.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무극이면서 태극이니, 태극이 동하여 양을 낳고 동이 극에 달하면 정해지며 정하여 음을 낳고 정이 극에 달하면 다시 동한다.[無極而太極. 太極動而生陽, 動極而靜, 靜而生陰, 靜極復動.]”라고 하였다.

 

                                                                      答叔獻書別紙

 

北溪陳氏曰。且如一件事物來接着。在內主宰者。是心。動出來。或喜或怒者。是情。裏面有介物。能動出來底。是性。運用商量。要喜那人。要怒那人。是意。夫當喜怒而動出來喜怒者情也。不當喜怒而動出來喜怒者亦情也。當而出來者善也。不當而出來者不善也。故善不善皆情也。苟必發於當而不發於不當。則皆當而無不當。意之運用底意安在。出來之有當不當。故運用之有能使不當者當之之功。朱子曰。人情易發而難制。明道云人能於怒時。遽忘其怒。亦可見外誘之不足畏情只發於善而不發於不善。則朱子難制之戒。明道 外誘之懼。何指。夫心者。該寂感貫動靜。該而貫之者旣得其正。則感與動。安得不善。故情之有善不善。心之正未正時也。情之無不善。心之已正後也。發皆中節。卽情之無不善也。朱子曰。聖人氣淸而心正。故性全而情不亂耳。學者當存心以養性。而節其情也。所謂聖人之情不亂者。非不謂皆善也。所謂學者之節其情者。非不謂或有不善耶。不能皆善。故貴聖人之不亂。時有不善。故訓學者以節之。或問性善而情不善乎。程子曰。情者。性之動也。要歸於正而已。亦何得以不善名之。所謂何得以不善名之者。不可以專言不善也。原於性命之正者。固無不善。原於形氣之私者。亦何能皆善。惟聰明睿智者。情無不善。以能盡其性也。自其下則有善有不善。○旣擧先儒之說。而以己意明其義。又申之以己說焉。夫未動是性。已動是情。而包未動已動者爲心。心所以統性情也。譬之水。心。猶水也。性。水之靜也。情。水之動也。四端。單擧其流也。七情。竝言其波也。水不能無流。而亦不可無波。波之在平地而波之溶溶者。波之得其正也。波之遇沙石而波之洶 洶者。波之不得其正也。雖然。豈以溶溶者爲波。而洶洶者不爲波哉。故曰情有善不善也。夫引平地溶溶之波而返走沙石者。意也。引沙石洶洶之波而還走平地者。亦意也。是以。聖人之情無沙石洶洶之時。顔子之情。雖或洶洶。於三月之後。而能使洶洶者溶溶焉。常人之情。一洶洶一溶溶。而可使爲洶洶。可使爲溶溶。盜跖之情。旣在沙石。又引沙石。洶洶焉。無溶溶之少間。然而四端之流。無時或息。情之無不善云者。拈出四端也。情之有善不善云者。統言七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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