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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봉 송익필

가례주설家禮註說 序

작성자향산 김문진|작성시간26.06.06|조회수34 목록 댓글 0

 

                                                       가례주설家禮註說   序

 

가례家禮

     

○  황간(黃榦)이 말하기를,

“예전에 여러 선사(先師)께 들으니, ‘예(禮)라는 것은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이며, 인사(人事)의 의칙(儀則)이다.’ 하였다. 대개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며, 만물은 각자 모두 다른데, 예의 제도는 이미 그 가운데에 보존되어 있다. 오행(五行)에 있어서는 화(火)가 되고, 사시(四時)에 있어서는 하(夏)가 되며, 사덕(四德)에 있어서는 형(亨)이 되는바, 모두가 천리의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바뀔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은 오상(五常)의 성(性)을 품부받아 태어났는바, 예의 체(體)가 비록 태어난 처음에 갖추어져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이 형용되어서는 공경(恭敬)과 사손(辭遜)이 되고, 드러나서는 위의(威儀)와 도수(度數)가 된다. 그렇다면 이는 또 모두가 인사(人事)에 있어서 당연한 것으로 그만둘 수가 없는 것이다.

아득한 옛날에는 습속이 순후하여 역시 이 이치의 안에서 편안하게 행하였다. 세대가 내려와 말세의 풍속이 되면서는 인심이 사특해지고 천리가 어두워지게 되었다. 이에 비로소 예라는 것이 세상 사람들을 권면하는 도구가 되었다.

선생(先生 주희(朱熹))께서 다시 《가례》를 지어서 후학(後學)들에게 남겨 놓았다. 대개 천리는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이 예 역시 하루라도 빠뜨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였다.

○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성주(成周) 시대에는 예로써 세상을 유지하여 왕조(王朝)와 사서(士庶)들에게 예가 있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그 뒤에 진화(秦火)의 액운이 있은 뒤로는 남은 것이 얼마 없었다. 한위(漢魏) 이후로는 백성들의 예가 깡그리 다 없어져서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사대부로서 예를 좋아하는 자로는 당(唐)나라 때에는 맹선(孟詵)이 있었고, 송(宋)나라 때에는 한기(韓琦)가 있어서 혹 저술을 하기도 하였으나, 박잡하여 순수하지 못하였다. 문공(文公)이 지은 《가례》 한 책은 실로 만세에 통행되는 법전이다.”

하였다.

○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예를 제정함에 있어서는 제때에 맞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인(聖人)이 일어나서 예를 만들 경우에는 반드시 지금의 예를 인하여서 그 중도를 잡아서 만들 것이므로, 반드시 다시금 옛사람들의 복잡하고 번다한 예를 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공자(孔子)가 선진(先進)을 따른 것은 이미 이런 뜻이 있었던 듯하다.”

하였다.

선진(先進)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선진은 예악(禮樂)에 있어서 문(文)과 질(質)이 마땅함을 얻었고, 후진(後進)은 예악에 있어서 문이 질보다 지나쳤다.” 하였다.

근종추원(謹終追遠)

○ 주자가 말하기를 “신종(愼終)하는 자는 상(喪)에 있어서 그 예를 다하고, 추원(追遠)하는 자는 제사에 있어서 그 정성을 다한다.” 하였다.

양씨 복(楊氏復) 소주(小註)에 나온다. 이하 11조항도 같다.

○ 자(字)는 지인(志仁)이며, 주 문공(朱文公)에게 수학하였고, 황직경(黃直卿 황간(黃榦))과 서로 친하게 지냈다.

선생(先生)

○ 주자가 말하기를 “선생은 부형(父兄)이다.”라고 하였다.

○ 《예기(禮記)》 〈곡례(曲禮)〉의 주에 이르기를 “선생은 부형의 칭호이다.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자는 부형과 같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들이 스스로를 동생과 아들에 비하는 것이다.” 하였다.

복모상(服母喪)

○ 이방자(李方子)가 말하기를 “건도(乾道) 5년 9월에 선생이 어머니인 축 영인(祝令人)의 상을 당하였다.” 하였다.

동항(童行)

○ 동항은 아주 어린아이의 항렬을 말한다.

선생이 역책하다.〔先生易簀〕

○ 《예기》 〈단궁(檀弓)〉에 이르기를,

“증자(曾子)가 병이 위독했을 때 악정자춘(樂正子春)은 침상 아래에 앉아 있었고, 증원(曾元)과 증신(曾申)은 발치에 앉아 있었고, 동자는 한쪽 구석에 앉아 촛불을 잡고 있었다. 동자가 말하기를 ‘선생님의 대자리는 화려하고 고우니, 대부가 사용하는 자리인가 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자춘이 말하기를 ‘조용히 하라.’ 하였다. 증자가 듣고 두려운 기색을 띠며 말하기를 ‘그렇다. 이것은 계손(季孫)이 선물해 준 것인데 내가 미처 바꾸지 못했다. 원아, 일어나서 돗자리를 바꾸어라.’ 하자, 증원이 말하기를 ‘아버님의 병이 위중하시니 움직일 수 없습니다. 다행히 아침까지 별일이 없으면 조심스레 바꾸겠습니다.’ 하니, 증자가 말하기를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저 아이만 못하구나. 군자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덕으로써 하고, 소인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고식적인 것으로써 한다. 내가 지금 무엇을 구하겠느냐. 나는 바름을 얻어서 죽으면 그뿐이다.’ 하였다. 이에 증자를 들어 올리고 돗자리를 바꾸었는데, 다시 자리에 누워 미처 안정되기도 전에 숨을 거두었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돗자리를 바꾸고 갓끈을 매는 데에서는 단지 옛사람들이 예법을 삼간 것만을 본다.”

하였다. 주자가 또 말하기를,

“계손씨(季孫氏)가 선물해 준 것과 증자가 받은 것은 모두 올바른 예가 아니다. 혹자가 이를 인하여 습속으로 삼은 탓에 바르게 될 수 없었다.”

하였다. - ‘병이 위중하다.〔病革〕’의 극(革) 자는 음이 극(亟)이다. -

그 책이 처음 나왔다.〔其書始出〕

○ 진순(陳淳)이 말하기를,

“선생의 막내아들(주재(朱在))이 말하기를 ‘승사(僧寺)에서 잃어버렸는데, 어떤 사인(士人)이 그것을 기록해 두었다가 마침 아버지를 장사 지내는 날 가지고 왔으므로, 그를 인하여 얻었다.’라고 하였다.”

하였다.

《의례》를 경으로 삼는다.〔儀禮爲經〕

○ 《의례(儀禮)》 〈사관례(士冠禮)〉의 소(疏)에 이르기를,

“《주례(周禮)》라는 이름은 하(夏)나라와 은(殷)나라의 예와는 구별하여 취하였으므로 《주례》라고 하는 것이다. 《의례》를 《주례》라고 하지 않는 것은, 다른 시대의 예법이 있음을 겸하여 보이고자 해서이다. 《주례》와 《의례》는 모두 주공(周公)이 섭정(攝政)한 지 6년째 되는 해에 제정하였다.”

하였다.

사마씨(司馬氏)

○ 이름은 광(光)이고, 자는 군실(君實)이며, 온국공(溫國公)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고씨(高氏)

○ 이름은 항(閌)이고, 자는 억숭(抑崇)이다.

치상에 대하여 유명을 남겼다.〔遺命治喪〕

경원(慶元) 6년(1200) 3월 갑자일(甲子日) 오시(午時) 초각(初刻)에 주 문공(朱文公)이 정침(正寢)에서 졸하니, 향년이 71세였다. 3월 기미일 밤에 제생(諸生)을 위하여 〈태극도(太極圖)〉에 대해 해설하였으며, 경신일 밤에 〈서명(西銘)〉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해설하였다. 신유일에 《대학》의 성의장(誠意章)을 고쳤으며, 갑자일에 침소(寢所)를 중당(中堂)으로 옮기라고 명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에 제생이 다시 들어가서 병문안을 하면서 청하기를,

“만일 돌아가시게 되면 《서의(書儀)》의 예법을 써서 장례를 치릅니까?”

하니, 주자(朱子)가 머리를 흔들었다. 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의례》에 따라서 합니까?”

하자, 주자가 역시 머리를 흔들었다. 이에 또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의례》와 《서의》를 참작하여 합니까?”

하니, 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눕히다가 잘못하여 건(巾)을 건드리자, 문인(門人)에게 눈짓을 하여 바르게 씌우라고 하였다. 손을 저어 부인(婦人)을 물리치면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 제생이 읍(揖)하고서 물러났다. 얼마 뒤에 편안한 모습으로 서거하였다.

한 위공(韓魏公)

○ 이름은 기(琦)이고,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존양(存羊)

○ 이에 대한 일은 《논어(論語)》에 나온다.

〔안〕 존양의 뜻을 붙인 것은 당시에 종법(宗法)이 행해지지 않아 장자(長子)가 죽으면 적손(適孫)이 봉종(奉宗)을 하지 못하고 차자(次子)가 제사를 주관하였는데, 주자는 오히려 종법을 보존하고자 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 가례주설(家禮註說) : 구봉이 초고를 써 놓은 것을 본 대본(臺本)을 편집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6대손인 김상성(金相聖)이 잘못된 것을 교정하여 편집한 것이다. 그런데 애초에 구봉이 초고를 작성하면서 각 예서(禮書)에 나오는 경문(經文)이나 주소(註疏)의 설을 임의대로 축약하거나 덧붙인 것도 있으며, 뒤섞어서 기록해 놓은 곳도 있다. 이러한 상태의 초고를 김상성이 편집하면서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탓에 경문(經文)과 주설(註說)과 소설(疏說)이 뒤섞여 있는 곳도 있고, 부호의 사용도 명확하지 않으며, 출전(出典) 역시 불분명한 곳이 많다. 이 〈가례주설〉은 그 내용이 비록 소략하기는 하지만, 주희(朱熹)의 《가례》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주설(註說)을 붙여서 만든 최초의 주석서이며, 사계 김장생의 《가례집람(家禮輯覽)》의 모태가 된 책이다. 또한 곳곳에 들어 있는 구봉의 안설(按說)은 구봉의 예학(禮學)에 대한 경지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한기범, 구봉 송익필의 예학 사상, 충남대 유학연구소, 2011》

 

[주1] 가례(家禮) : 남송의 성리학자인 주희가 의례(儀禮)에 관한 예절과 절차를 정리한 책이다. 4권으로 된 정본 외에 7권으로 된 《가례》가 있다. 그 순서는 가례도설(家禮圖說), 가례서(家禮序), 통례(通禮), 관례(冠禮), 혼례(婚禮), 상례(喪禮), 제례(祭禮)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주희가 말년에 제시했던 예설(禮說)과 다른 점이 많기 때문에 위작이라는 논란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회암집(晦庵集)》에 〈가례서(家禮序)〉가 있고 〈가례부록(家禮附錄)〉에 이 책을 잃어버렸다 다시 얻게 된 경위를 밝히고 있기 때문에 대체로 주희의 저서로 보고 있다. 이 책은 고려 말에 주자학과 함께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조선 시대에는 사대부가의 기본 예법서로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시대와 풍습의 차이로 인해 조선의 현실과 맞지 않는 점이 있어 많은 예송(禮訟)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주2] 황간(黃榦) : 송(宋)나라 민현(閩縣) 사람으로, 자는 직경(直卿), 호는 면재(勉齋),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안경 지부(安慶知府)가 되어 덕정(德政)을 폈다. 저서에 《경해(經解)》, 《면재문집(勉齋文集)》이 있다. 주희의 문인이자 사위로서 경학(經學)에 밝고 심지(心志)가 견실하였다. 주희의 도학을 계승한 인물로 평가된다. 《宋史 道學列傳 黄榦》

 

[주3] 구준(丘濬) : 명(明)나라의 학자이다. 자는 중심(仲深), 호는 심암(深菴)ㆍ경산선생(瓊山先生)ㆍ경대(瓊臺),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벼슬은 문연각 태학사(文淵閣太學士)를 지냈고 특히 주자학(朱子學)에 정통하였다. 저서에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주자학적(朱子學的)》, 《가례의절(家禮儀節)》 등이 있다. 《明史 丘濬列傳》

 

[주4] 성주(成周) :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의 동북쪽에 있는 지명이다. 주(周)나라 경왕(敬王) 때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전국(戰國) 시대에는 낙양(洛陽)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흔히 동주(東周)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주5] 진화(秦火) : 진 시황(秦始皇)에 의해 일어난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을 말한다. 진 시황 때 사람들이 정치에 대하여 비평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천하의 시서(詩書) 및 백가(百家)의 서책들을 모두 모아 불태웠으며, 선비들을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史記 秦始皇本紀》

 

[주6] 맹선(孟詵) : 당나라의 학자로, 이양산(伊陽山)에 거주하면서 방약(方藥)을 연구하였다. 저서에 《식료본초(食療本草)》 등이 있다. 예서(禮書)로는 한 권으로 이루어진 《가례》와 《제례(祭禮)》 및 2권으로 이루어진 《상복요(喪服要)》가 있다. 《舊唐書 方伎列傳 孟詵》

 

[주7] 한기(韓琦) : 송나라 때의 명재상으로, 자는 치규(稚圭), 호는 공수(贛叟),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벼슬은 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저서로 《안양집(安陽集)》, 《간원존고(諫垣存稿)》 등이 있으며, 예서로는 《한위공제식(韓魏公祭式)》이 있다. 《宋史 韓琦列傳》

 

[주8] 공자(孔子)가 …… 것 : 선진은 선배와 같은 말이다. 공자 시대에 선배들은 예악(禮樂)에 있어 문(文)과 질(質)이 적당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촌스럽다고 비판하고, 후배들은 예악에 있어 문이 질보다 지나쳤는데도 당시 사람들은 도리어 군자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공자가 “내가 만일 예악을 쓰게 되면 선진을 따르겠다.”라고 하였다. 《論語 先進》

 

[주9] 근종추원(謹終追遠) : 신종추원(愼終追遠)과 같은 말로,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와 선조의 제사를 지낼 때 애통함과 경건함을 극진히 하며 예법에 맞게 행하는 것을 말한다. 종(終)은 부모의 죽음을 뜻하고, 원(遠)은 선조를 뜻한다. 《논어》 〈학이(學而)〉에 “어버이 상을 당했을 때 신중하게 행하고 먼 조상님들을 정성껏 제사 지내면 백성들의 덕성이 한결 돈후하게 될 것이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10] 양씨 복(楊氏復) : 송나라의 학자인 양복(楊復)을 가리킨다. 신재(信齋) 선생이라고 불렸으며, 저서로 《가례의례도(家禮儀禮圖)》, 《가례잡설부주(家禮雜說附註)》가 있다.

 

[주11] 이방자(李方子) : 송나라의 학자로, 자는 공회(公晦), 호는 과재(果齋)이며, 주희의 제자이다.

 

[주12] 건도(乾道) : 송나라 효종(孝宗)의 연호로, 기간은 1165~1173년이다.

 

[주13] 축 영인(祝令人) : 축은 주희 어머니의 성(姓)이고, 영인은 어머니에 대한 존칭이다.

 

[주14] 진순(陳淳) : 송(宋)나라의 학자로, 자는 안경(安卿)이고, 북계(北溪) 선생이라고 불렸다. 주희에게 잠시 배웠으며, 주희의 어록(語錄)을 기록하였다. 《성리자의(性理字義)》 등을 저술하였다.

 

[주15] 사마씨(司馬氏) : 송(宋)나라 신종(神宗)ㆍ철종(哲宗) 때의 명상(名相)인 사마광(司馬光)으로, 호는 제물자(齊物子)이다. 속수(涑水) 선생이라 부른다. 저서에 《자치통감(資治通鑑)》, 《독락원집(獨樂園集)》, 《서의전가집(書儀傳家集)》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서의전가집》은 흔히 《서의(書儀)》, 또는 《사마씨서의(司馬氏書儀)》라고 칭해지는데, 주희의 《가례》는 《서의》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宋史 司馬光列傳》

 

[주16] 고씨(高氏) : 송나라의 학자인 고항(高閌)을 가리킨다.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흔히 식재(息齋) 선생이라고 불렀으며, 《춘추집주(春秋集注)》를 저술하였다.

 

[주17] 항(閌) : 대본에는 ‘開’로 되어 있다. 문맥에 근거하여 ‘閌’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18] 경원(慶元) …… 서거하였다 : 《주자실기(朱子實記)》에 나오는 내용이다. 《주자실기》는 명나라 대선(戴銑)이 찬한 책으로 모두 1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희의 시말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였다.

 

[주19] 존양(存羊) : 《논어》 〈팔일(八佾)〉에 “자공(子貢)이 곡삭(告朔)의 희양(餼羊)을 철폐하고 싶어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너는 그 양이 아까우냐? 나는 그 예를 사랑한다.’라고 하였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흔히 예를 보호하기 위해 형식일 뿐이라도 옛 제도를 보존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序

 

家禮

黃氏榦曰。聞諸先師曰。禮者。天理之節文。人事之儀則也。蓋自天高地下。萬物散殊。而禮之制已存乎其中矣。於五行則爲火。於四序則爲夏。於四德則爲亨。莫非天理之自然而不可易。人稟五常之性以生。禮之體。雖具於有生之初。形而爲恭敬辭遜。著而爲威儀度數。則又皆人事之當然而不可 

容已也。隆古習俗醇厚。亦安於是理之中。出降俗末。人心邪僻。天理堙晦。始以爲强世之具矣。先生更爲家禮。以惠後學。蓋以天理不可一日而不存。則是禮亦不可一日而間缺也。○丘氏濬曰。成周以禮持世。王朝士庶。莫不有禮。秦火之厄。所餘無幾。漢魏以來。民庶之禮。蕩然無餘。士夫之好禮者。唐有孟詵。宋有韓琦。或有著述。駁而不純。文公一書。實萬世通行之典也。○朱子曰。禮時爲大。有聖人者作。必將因今之禮。裁酌其中。必不復取古人繁縟之禮也。孔子從先進。恐已有此意。

先進

程子曰。先進於禮樂。文質得宜。後進於禮樂。文過其質。

謹終追遠。

朱子曰。愼終者。喪盡其禮。追遠者。祭盡其誠。

楊氏復 小註下十一條同

字志仁。受業文公。與黃直卿相友善。

先生

朱子曰。先生。父兄也。○曲禮註。先生。父兄之稱。可爲人師者。猶父兄。故學者自比於弟子。

服母喪

李氏方子曰。乾道五年九月。先生丁母祝令人憂。

童行

童行。童穉之行也。

先生易簀

檀弓。曾子寢疾病。樂正子春坐於床下。曾元曾申坐於足。童子隅坐而執燭。童子曰。華而睆。大夫之簀與。子春曰止。曾子聞之。瞿然曰然。斯季孫之賜也。我未之易也。元起易簀。曾元曰。夫子之病革矣。不可以變。幸而至於朝。請敬易之。曾子曰。爾之愛 

我也不如彼。君子之愛人也以德。細人之愛人也以姑息。吾何求哉。吾得正而斃焉。斯已矣。擧扶而易之。反席未安而沒。○朱子曰。易簀結纓。但看古人謹於禮法。又曰。季孫之賜。曾子之受。皆爲非禮。或者因仍習俗。未能正耳。病革之革。音亟

其書始出

陳氏淳曰。先生季子云。亡於僧寺。有士人錄得。會先生葬日携來。因得之。

儀禮爲經

士冠禮疏。周禮。取別夏,殷。故言周。儀禮不言周者。 

欲見兼有異代之法。同是周公攝政六年所制。

司馬氏

名光。字君實。贈溫國公。諡文正。

高氏

名開。字抑崇。

遺命治喪

慶元六年庚申三月甲子午初刻。文公終于正寢。享年七十一。三月己未夜。爲諸生說太極圖。庚申夜。說西銘甚詳。辛酉。改大學誠意章。甲子命移寢于中堂。黎明。諸生入問疾。因請曰。萬一不諱。當用 

書儀乎。朱子搖首。然則當用儀禮乎。亦搖首。然則以儀禮書儀參用之乎。乃頷之。就枕誤觸巾。目門人使正之。揮婦女無近。諸生揖而退。良久。恬然而逝。

韓魏公

名琦。封魏國公。

存羊

事見論語。(按)以寓存羊之意者。當時宗法不行。長子死則適孫不得奉宗。而次子主祀。朱子猶且存宗法故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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