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지식 게시판

우리나라 제과 제빵 변천사

작성자011821546|작성시간06.02.22|조회수1,186 목록 댓글 0
도입기 (1882~1916)



우리나라에서의 빵의 전래는 구한말에 비밀리에 입국한 선교사에 의해 이루어 졌으나 확실한 연대나 선교사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단지 1834년에 프랑스인으로 모방 신부와 사스땅이, 1856년 같은 프랑스 신부 베르뇌(S. F. Berneux)가 입국한 사실을 참고로 알 수 있다.



당시에는 성교사들이 숯불을 피운 후에 떡시루를 엎고 그 위에 빵반죽을 올려놓은 다음 오이 자배기(주; 둥글납작하고 아가리가 쩍 벌어진 질그릇)로 덮어 화로를 만들어 빵을 구웠다. 제품의 모양이 마치 우랑과 같다고 하여 우랑떡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최초로 소개된 빵과자로 알려져 있다. 당시 빵은 면포라 불렀고, 카스테라는 눈처럼 희다고 하여 설고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후 1918년에 러시아 공관이 세워졌고, 워베르 러시아 공관의 처제인 손탁이 공관 앞에서 정동구락부를 개설하여 차류와 양식을 판매하였다. 그녀는 처음에는 양과자를 만들어 민비에게 선사하여 환심을 산 뒤 민비에게 서양요리 강습도 해 주고 손수 요리도 만들어 바쳤다.



당시 고종은 양식을 매우 즐긴 것으로 유명한데 한일합방 전에 이미 양식파티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32살의 올드미스인 손탁은 고종의 양식시중으로 선망을 얻어 마침내는 정동의 왕실 부속건물을 기증받아 황실의 양물 일체를 취급하는 어용계( 御用係)를 맡아보게 되었다.



그 후 제과업의 싹을 틔우게 되는 유년기는 한일합방 이후 일본을 통해 그들의 화과자와 양과자가 유입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일본인들은 알사탕과 막과자를 진고개에 팔았다고 하며, 찹쌀모찌는 이미 인천 등지에서 반매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과자업들은 차츰 남대문 시장에 모여 도매상을 열었고, 소배상들은 주로 종로에 운집해 있었다. 당시 대표적인 과자로는 개당 1전하는 접과자와 생과자, 알사탕 등이 있었으며 도매상들이 이를 만들어 소규모 구멍가게나 지방업자들에게 공급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제과업의 초창기 모습이라 할 수 있다.



1899년 9월 18일 경인철도 개통을 시초로 경부선, 경의선이 개통됨에 따라 한반도와 만주까지의 철도가 완성되면서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을 경유하여 만주로 이동함에 따라 철도역 주변의 숙박시설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철도회사가 자체적으로 건설하고 운영하게 되었고 이에 부산 역사를 2층으로 건립하여 1층은 대합실로, 2층은 호텔 객실로 꾸며 개관하였는데 이 호텔이 우리나라 철도호텔의 효시이다. 이어 1914년 조선호텔에 이르기까지 많은 호텔이 개관하였다.



호텔에서는 빵과 아이스크림, 푸딩, 쿠키등이 만들어져 식탁에 올랐으며, 일반 제과점은 1925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리나라 기술자와 자영업자가 다소 생겨 나기 시작했다.







유년기 (1910~1945)



유년기였던 일정 말기에는 통제경제로 모든 물자는 배급을 통해서만 입수할 수 있었다. 종군 무렵에는 제빵, 제과의 주원료인 밀까루가 품귀해지자 온갖 잡곡가루와 심지어는 콩깨(비료로 쓰이는 대두)까지 선을 보였는가 하면 조개껍질을 미세하게 분쇄한 헬즈라는 상품을 배급, 소맥순과 혼용토록 하였다.



설탕은 제과 생산품의 산출 기준이 될 정도로 중요 원료인지라 생산 실적 조사의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설탕 배급량이 줄어들어 더 이상 빵 · 양과자점을 경영할 수 없어 폐업하고 지방으로 소개한 제과업자도 있었다.



1925~45년 까지의 특징은 서울의 시계확장과 인구증가, 그리고 많은 제과업자의 진출로 과자 소비가 큰 폭으로 증가했던 시기였다.







소년기 (1945~1960)



8.15 광복 전의 판매 형태는 지금과 달리 단일 점포가 있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도 소매가 확실히 구분되어 도매 업자는 생산시설을 갖추고 소매점에 제품을 제공하였다. 그러던 것이 광복과 더불어 자가제조, 자가판매의 형태로 판매구조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 주된 이유로는 다음과 같다.

1) 광복전에 대부분의 제과들이 일본인들의 양산공장에서 생산되었었는데 패전으로 일인들의 업소가 폐쇄되었고,

2) 해방을 맞아 미국으로부터 다량의 원호물자가 유입되어, 밀까루와 설탕도 쉽게 입수되었다는 점.

3) 제2차 세계대전중에 감미식품에 굶주렸던 대중의 소비성이 급증되어 빵, 양과자의 공급이 요구되었을 뿐 아니라, 생산 원가에 비하여 부가가치가 대단히 높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오븐은 장작오븐이 처음 등장하였고 그 다음이 숯을 쓰는 오븐, 연탄 오븐, 가스오븐, 전기오븐의 순으로 발전해왔다.







청년기 (1961~1970)



해방이 되면서 자가제조, 자가판매로서 구조변화가 급속히 진전되어 전국의 제과점 수는 500여개소에 이르렀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지금까지의 제과점이 단일 점포체제이던 시대를 멋어나서 양산체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당시 식생활 개선의 일환으로 분식을 장려하게 되었는 바, 이는 제과점이 국가 정책에 순응하는 성격이 되어 양산업체 태동의 사회적 여건이 성숙되었다.



원 부재료 면을 살펴보면 6.25 전쟁 후 원.부재료 모두 외제품에만 의존했던 것과는 달리 195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점차 국산품을 사용하여 빵과자를 만들게 되었다.







성년기 (1971~1980)



제3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되었던 1972년부터 현재까지를 빵.양과자업계의 성년기라 볼 수 있다. 미국의 원호물자는 1970년대 초를 정점으로 해마다 감소를 가져왔고 정부에서는 백미 소비 억제책으로 국제시장 가격이 저렴한 소맥을 수입, 적극적인 분식 장려를 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급속한 빵류의 소비증가는 빵.양과자업계 발전의 기폭제가 되기도 하였다. 종전 빵.양과자점에서만 팔던 빵이 식생활 개선이란 바람을 타고 급증하는 소비추세에 따라 1969년에는 삽립식품 공업주식회사가 발족하였고 계속하여 부산, 대구등 지방에서는 양산 공장이 속출하였다.



또 1979년부터 호텔이 과자류 제조업 허가를 취득해냄에 따라 신라, 프라자, 워커힐 호텔 등이 1년동안 20여개소의 업소를 오픈하면서 이 중 일부 호텔은 이후 별도 법인으로 독립하여 신라명과나 프라자 제과의 전신이 되기도 하였다.







정착기 (1981~현재)



1990년대에 들어서 제과업계의 최근 변화라면 아무래도 수도권에서 포화상태에 이른 각 프랜차이즈 업체들의 지방 진출과 그에 따른 지방공장 준공을 들 수 있다. 또 대기업의 베이커리 업체에 대한 진출도 이미 1980년대 초부터 예상되어온 바였지만 최근에 더욱 적극적인 모색과 진출이 이루어지고 있다.



1980년대 소비자의 구매형태 및 업계의 변화외 제품의 소비형태를 살펴보면 1980년대 초반까지 하더라도 식빵과 단과자류가 주종을 이루었으며, 케이크의 경우도 버터크림 케이크의 선호도가 높았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중반부터는 보리빵, 옥수수빵, 건강빵, 등과, 케이크에 있어서도 당도가 낮고, 크림양이 적은 제품을 찾게되었다.



또한 1980년대 후반기에는 수입 자유화로 유럽 명품 제품이 국내 에 보급되면서 한층 고급화되었다. 특히 다이어트식의 확대로 건강빵류를 비롯, 바게뜨 등 프랑스 빵과 페이스트리 제품의 신장세가 두드러졌다.



이와 더불어 진출 업계의 대부분이 외국 제과업체와 기술합작의 형태여서 차츰 대형화, 고급화되어가는 추세는 가속화될 전망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