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가 창조한 개념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것이 탈구축(deconstruction)이다. 원래는 하이데거의 '해체(존재론적 형이상학의 비판)'을 번역하려는 시도로부터 탄생한 것이라고 한다. 하이데거는 플라톤 이래의 형이상학은 존재론적(신학적)이라고 하면서 '존재자'와 '존재'의 구별을 통해 그때까지의 형이상학의 해체를 꾀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존재에 대한 물음도 역시 존재를 드러내는 로고스. 진리. 의미를 향한 물음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데리다는 이 역시 로고스 중심주의적인 현전의 형이상학이라고 비판했다.
때문에 데리다의 탈구축은 '서구의 존재론 혹은 형이상학의 기초 개념을 만들어낸' 로고스 중심주의적인 '구조 또는 건축물을 해체하고 재구축한다'는 것이다.
탈구축은 그때까지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구성하고 있는 각양각색의 계층질서적인 이항대립을 해체하는 것이 된다.
예를 들면, 내부/외부. 주관/객관. 의식/존재. 지성/감성. 음성언어/문자언어 등등, 탈구축은 이런 이항대립을 전도시키고 비켜나가게 하고 경계를 애매하게 함으로써 무효화한다. 말하자면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의미의 결정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탈구축 전략은 텍스트 독해의 방법이란 측면도 포함한다. 실제로 탈구축은 1970~1980년대 미국에서 문학 연구에 응용되었고 '해체비평'이라는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은 문학 텍스트를 대상으로 탈구축적인 독해. 비평을 실천하는 것이다. 작가의 전기적 사실과 작품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 등, 텍스트 외부를 일체 고려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텍스트만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 텍스트가 지닌 모순, 다의성을 드러내고 하나의 의미로 독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확실히 '해체비평'은 단일한 의미의 독해를 회피하는 것을 통해 거꾸로 텍스트가 지닌 한계를 밝히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 한편, 무한히 해석을 증식시킴으로써 정교한 유희를 경쟁적으로 다투는 문자만의 '유희'로 귀결되기도 했다.
데리다는 텍스트 독해에 있어서 "텍스트 바깥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텍스트의 한계를 노정시키는 것은 텍스트의 타자성과 만나는 것, 즉 텍스트에 편입되지 않는 타자이다.
데리다는 법과 정의의 관계를 물으면서 탈구축을 다음과 같이 재정의했다. 법은 정의를 달성하기 위해서 부정한 폭력을 단죄하는 것이다. 법은 항상 자신이 정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법과 정의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법은 항상 탈구축이 가능하다. 법이 절대적인 정의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은 정의를 탈구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의는 탈구축될 수 없기 때문에 법은 항상 탈구축이 가능하게 된다. 법은 항상 특수한 자를 적용 대상으로 포섭하지만, 정의는 항상 특이한 단독의 타자로서 남게 되는 것이다.
이렇다면 탈구축은 주어진 법의 모순을 명확하게 하고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자명화한 담론적. 제도적 구축물을 결정 불가능한 타자의 경험 앞으로 해서 결정에 수반되는 조건과 책임을 묻는 것, 혹은 그 책임을 떠맡는 것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 밖의 생물이 한국에 와서 인간의 재산을 훔쳤다고 하자. 만일 그 생물에게는 훔치는 것이 선이라고 한다면 한국의 법은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즉 타자의 경험으로 향할 때, 훔치는 것이 왜 나쁜가, 훔치면 안 된다는 법을 왜 만들어야 하는가와 같은 의문이 타자의 경험에 비추어져 생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탈구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