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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히말라야의 속삭임, 내 안의 神이 눈뜨는 시간

작성자청랑|작성시간25.08.30|조회수196 목록 댓글 0

인도에는 두 개의 대서사시가 있는데

인도 북부가 배경인 ‘마하바라타’와 인도 남부가 배경인 ‘라마야나’다.

우리가 현재 가고 있는 리시케시는 인도 북부에 있지만

북부의 마하바라타가 아닌 남부 ‘라마야나’가 배경인 도시다.

리시케시를 상징하는 두 개의 다리 ‘람 줄라’와 ‘락슈만 줄라’는

라마야나의 주인공 라마찬드라와 동생 락슈마나에서 유래되었다.

 

라마야나는 라마왕이 주인공이지만 인기가 있는 인물은 단연 원숭이 장군 ‘하누만’이다.

중국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도 이 하누만에서 유래되었다.

 

라마왕이 악마의 꼬임에 빠져 죽게 될 위험에 처하거나,

전투에서 패하게 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일 때마다

원숭이 장군 하누만이 짠 나타나 모든 상황을 역전시켜 버린다.

하누만 신은 인도는 물론 동남아에서도 인기가 많은 데

무대에 하누만이 등장해 악당을 죽이고 주인공을 살리는 장면은 극의 하이라이트라

관객들이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다.

 

우리가 앞 뒤의 산이 무너져 중간에 고립되어 잘못하면 진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라마야나 이야기에 등장하는 하누만 같은 사람이 진짜 '짠' 하며 우리 앞에 나타났다.

 

물론, 우리는 대서사시 라마야나 이야기처럼,

그의 활약으로 무사히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가끔, 우리는 상황의 논리에 지나치게 몰입하게 되고,

그로 인해 흥분하고 들뜨게 되면서 중요한 걸 놓쳐 잘못되는 경우가 많은데,

내가 보기에 그날 밤의 상황이 그랬던 것 같다.

 

물론, 태양이 내리쬐는 무덥고 습한 길바닥에서 한나절을 기다리느라 지친 탓도 있었다.

가파른 비탈길에서 2미터나 되는 끊어진 길을 뛰어넘는 연습장면을 보다

문득 내면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이건 아니지 않니?

히말라야에서 들려온 듯한 그 목소리가 내 안의 신을 깨웠다.

 

우리는 다시 한번 차분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급하게 가야 하는 이유가 지금 내가 목숨을 걸 만큼이나 중요한 일인가를.

 

세상에 목숨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그냥 일은 일일 뿐이다. 급한 상황은 얼마든지 다른 대책으로 대체할 수 있다.

물론, 약간의 손해와 부탁과 미안함과 그동안 쌓은 신용과 신뢰에 얼마쯤의 타격은 입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 일이 내 목숨과 맞바꿀 정도의 일은 아니다.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을 먼저 하라고 한다.

 

이 말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사람들은 대부분 급한 일만 쫓다 정작 중요한 일은 놓치고 생을 마감한다.

돈, 명예, 출세, 성공, 등등. 그런 것들이 당장은 중요하고 급해 보이지만

아까운 인생 모두를 바쳐 구할 일은 아니다.

중요한 일은 내 안의 영혼, 내 안의 신을 찾는 일이다.

 

다행히, 최종의 결정을 보류하고, 다시 한국으로 전화를 걸어 불가피함과 양해를 구할 수 있었고,

해외의 출장은 다른 그룹과도 연계된 일이라

결국, 남자 한 사람만 출발하기로 결론을 수정했다.

 

남자는 오랜 기간 국선도 수련으로 단단한 몸과 날렵한 체력을 갖추고 있어 비탈길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길을 잘 알고 있는 현지의 가이드가 같이 가기로 했으니,

산에서 강도나 짐승을 만나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결정을 바꾸기로 하고, 조금 시간이 지난 뒤,

기적처럼 또 다른 길이 열렸다.

낮에 사람을 고용해 여러 루트를 알아보라고 부탁했는데 마침 연락이 왔다.

원주민들의 차들만 다니는, 또 다른 도로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길은 높은 벼랑에 꼬불꼬불한 길이라 너무 위험하고, 또 캄캄한 어둠이고,

간밤의 폭우로 중간에 끊어지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한두 명이면 가볼 만하다고 했다.

그게 비탈길을 걸어서 넘어가는 것보다 훨씬 덜 위험했다. 

문제는 다시 마날리 쪽으로 80킬로미터쯤 되돌아가야 간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곳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것도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다음 날 이른 새벽에 척후병처럼 두 명을 태우고 차 한대가 그 길로 출발했고

세 시간 쯤 뒤에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어둠이라 위험했지만,

중간에 무너지거나 끊어진 길은 없었고,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것이다.

 

됐다.

우리는 아침이 밝자마자 그 길로 출발했다.

 

그러나, 길은 겨우 자동차 한 대만 통과할 정도로 너무 좁았고 경사도 심했다. 

무려 10대나 되는 차들이 그 길을 통과해야 하고

금방 소문이 퍼질 테니 곧 그 길로 대형 버스나 트럭들이 몰리면

또다시 오도 가도 못하고 갇힐 수 있었다.

50킬로미터 정도의 좁고 위험한 비탈길을 어떻게 통과하느냐가 가장 큰 문제였다.

 

이때, 짠 하고 라마야나의 원숭이 장군 ‘하누만’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손오공이 타는 근두운을 닮은 작은 차를 타고

그 좁고 위험한 벼랑길을 그야말로 앞 뒤로 날아다녔다.

버스를 못 오게 막고 있는 차가 바로 '하누만 장군'의 근두운

처음에는 열 대 차량의 맨 앞에서 이끌다가 어떨 때는 중간으로,

또는 맨 뒤로 날아가 뒤처진 양 떼를 독촉하듯 행렬에서 뒤떨어진 차들을 몰고 갔다.

어디 갔지? 찾으면 어느 틈에 열 대의 맨 앞에 와서 마주오는 버스를 막고 있다.

분명 한 대만 겨우 다닐 수 있는 길을, 그는 손오공이 타는 구름 차 근두운처럼 자유자재로 날아다녔다.

 

인도에선 차들이 좀체 양보해 주지 않는다. 횡단보도에 사람이 건너려면 더 빨리 지나간다. 

특히 좁은 길에서 마주 보고 차들이 맞서면 웬만해선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서면 복이 달아난다는 뭐 그런 미신이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서로 양보하라고 빵빵거리고 더러는 주먹다짐으로 싸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하누만 앞에서는 모두 벌벌 기었다.

마주오던 모든 차들이 구석에서 기다리며 우리가 빠져나갈 때를 기다려줬다.

하누만 장군은 고맙다며 반드시 창문을 열고 인사했고 그들도 반갑게 인사했다.

 

설마 저 많은 운전사들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닐 텐데,

혹시 티브이에 출연하는 인기 연예인인가?

인기 연예인이 이른 아침부터 험한 산길에 가이드를 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진짜 하누만 장군인지도 모른다. 

 

마주 오는 차들은 하누만의 차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가끔 하누만 차를 못 알아보거나,

하누만이 뒤로 빠진 사이에 앞에 오는 차들이 비켜주지 않고 빵빵거리며

일촉즉발의 사태로 치달을 때도 있었다.

 

물론, 그때마다 하누만이 금방 날아와 창문을 열고 얼굴을 비치면

사람들은 급속도로 공손해지며 위험한 비탈길을 한참 후진하며 차를 뒤로 빼줬다.

대단한 위력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무려 80킬로미터를 무사히 되돌아갈 수 있었다.

드디어, 몇 시간만에 우리는 무사히 큰 길에 도착했고,

그는 악당을 물리친 하누만 장군처럼 맨 앞차 운전자와 쿨하게 악수를 나누었고,

내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그는 벌써 근두운을 타고 사라지고 없었다.

멀리 구름 사이로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잠깐 보았던 것도 같다.

진짜다.

라마야나에 등장하는 하누만 장군처럼 신이 눈뜨는 시간이 있다.

 

아무 때나 신이 오는 건 아니다.

그건 바로 주인공이 도저히 혼자서 이겨내기 어려울 만큼 큰 위기에 직면했을 때다.

요가난다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 속의 악당이 영웅을 끌어내기 위해 계획된 것처럼,

 악(惡)의 어둠은 정반대의 선량한 빛을 보여주기 위한 신(神)의 수단이다.

 영웅에 의해 무지(無知)의 악마가 정복될 때,

 인간은 비로소 무한자(無限子), 神을 깨닫는다.’ -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의 바가바드 기타

 

그래서 요가난다의 말처럼,

죽을 것 같은 고통과, 더 이상 버티기 힘든 고난과,

절망적인 병(病)은 인간이 신을 깨닫게 하기 위한 수단이기 되기 때문에

신성(神性)하다는 것이다.

 

가장 적절한 예가 바로 성경에 나오는 ‘욥기’ 즉 욥의 이야기다.

 

하나님과 사탄이 욥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욥의 모든 재산과 자식들을 모두 죽이고

심한 피부병을 앓게 해 사금파리로 몸을 긁게 할 정도로 고통스럽게 한다.

그 많은 낙타와 말들이 사라지고

열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모두 죽일 때까지도 믿음을 잃지 않던 욥은

심한 피부병의 고통으로 자신마저 죽기 직전까지 몰리자,

드디어 하나님을 욕하고 원망하기 시작한다.

 

이때 세 명의 친구가 네가 분명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고 비난했고,

욥은 내가 하나님이면 이런 식으로 하지 않는다며,

하나님의 수준까지 의심하며 비난했다.

 

이때 네 번째 친구 엘리후가 나타나,

고통이 사람을 구제하며 세상 끝에 몰린 절망적인 사람이

조금이라도 선하면 신은 기회를 줄 거라고 알려준다.

비로소 신이 눈뜨는 시간이 무르익었다는 뜻이다.

 

이에 욥은 하느님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고. 정말로 하느님이 '짠' 하고 나타난다.

 

욥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왜? 오로지 전지전능에다 한 점의 티끌없이 공의(公義)로워야 하는 하나님이

그만 사탄에 넘어가 죄없는 욥을 벌하기도 하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세 명 친구들의 주장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읽는 사람을 헷갈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친구 엘리후의 말처럼, 신이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 이유는

단 하나, 인간을 구제하기 위함이라는 게 욥기의 핵심이다.

건강하고, 똑똑하고, 부자에다, 행복한 사람에게, 신은 임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 사람은 진정으로 신을 갈구하지도 않는다.

밥 먹기 전에 건성으로 기도는 할 것이다. 그런 상태로는 절대 신에게 다가갈 수 없다. 

 

병들고, 죽을만큼 고통스럽고, 헐벗고, 굶주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간당간당할 때,

비로소 인간은 진심으로 신을 갈구하게 되고

비로소 신은 그가 있는 낮은 곳으로 임한다. 이게 보편적인 신의 법칙이다.

 

우리는, 이틀 동안 산사태로 오도가도 못하는 히말라야 협곡의 한복판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가 극적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위기를 대하는 각자의 태도는 제각각이고 이해도 제각각일 것이다.

그건 위기와 고통을 대하는 각자의 태도이고,

몫이기도 하다.

 

오늘도, 70억이 넘는 사람들이 지구 위에서 지금이라는 시간을 살고 있다.

고통에 생을 마무리하는 사람도 있고,

생의 첫날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고,

행복한 사람도 있고, 불행한 사람도 있고, 고통과 고난에 절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삶이 최고의 삶일까?

나는 욥처럼,

고통과 불행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삶이 최고의 삶이라고 믿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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