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공학
“그럴 듯한 이야기일 뿐이야”
르원틴(Richard Lewontin)과 굴드(Stephen Jay Gould)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이 진화 심리학이 그럴 듯한 이야기(just so story)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해석의 기술일 뿐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정신분석과 꿈의 해석도 비슷한 비판을 받았다.
비판자에 따르면, 정신분석가나 진화 심리학자가 만들어낸 그럴 듯한 이야기에 사람들이 혹해서 믿기도 하지만 그것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 그럴 듯함에 혹해서 온갖 미신을 믿는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나는 정신분석도 그런 미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진화 심리학의 역공학(reverse-engineering)과 정신분석의 해석(interpretation)은 어떤 면에서 비슷한 전략을 취한다. 여기서는 두 전략을 비교해 보고 어떤 면에서 비슷하고 어떤 면에서 다른지를 살펴볼 것이다.
페일리의 시계와 프로이트의 조각 그림 맞추기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 1743-1805)의 『Natural Theology(자연 신학, 1802)』에 나오는 내용과 프로이트의 「꿈해석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소견」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는 대신 조금 각색하여 들려줄 생각이다.
먼저 페일리의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여러분은 시계공이 시계를 만드는 것도 보았고 그 시계를 누군가 사는 것도 보았다. 여러분은 그 사람이 사막을 걷다가 그 시계를 버리는 것도 보았다. 시계를 본 여러분은 시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할까? 물론 시계공이 만들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시계공이 만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 이번에는 다른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자. 여러분이 황량한 사막을 걷다가 어떤 물건을 하나 발견했다고 하자. 그 물건은 우리가 시계라고 부르는 것처럼 생겼으며 매우 잘 작동한다. 여러분은 그 시계가 왜 사막에 놓여 있는지를 전혀 모른다. 여러분은 이 시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할까?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사막 속에 있는 철분이 엉켜서 우연히 시계가 만들어졌다고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계는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정교하며 시각을 알리는 기능을 너무나 잘 수행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계를 어떤 사람이 만들었다고 추측할 것이다. 이것을 설계의 논증(argument from design)이라고 부른다.
이번에는 프로이트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여러분이 조각 그림 맞추기 퍼즐(jig-saw puzzle) 공장에 가서 그 퍼즐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았다고 하자. 그 퍼즐 중 하나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그려져 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그 퍼즐을 사는 것도 보았다. 여러분은 그 사람이 사막을 걷다가 그 퍼즐 뒤섞어서 버리는 것도 보았다. 그 버려진 퍼즐을 본 여러분은 그 퍼즐이 어떻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할까? 물론 공장에서 사람(또는 사람이 만든 기계)이 만들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그 퍼즐을 만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퍼즐에는 원래 어떤 그림이 있었다고 생각할까? 여러분은 당연히 <모나리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나리자>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 이번에도 다른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자. 여러분이 사막을 걷다가 어떤 물건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1000 개의 조그만 종이 조각들이다. 심심했던 여러분은 그 조각들을 맞추어본다. 마침내 다 맞추어보니 <모나리자>가 되었다. 이 때 여러분은 이 조각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할까? 이 때에도 사람이 만들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원래 <모나리자>라는 그림이 인쇄되었는데 그것을 조각들로 나누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1000개의 조각들을 아귀가 잘 맞게 맞추어 보니 <모나리자>가 선명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누군가 종이 조각들을 임의의 모양으로 잘라 아무렇게나 색칠 했는데 그 조각들을 맞추어보니 아귀도 잘 맞고 결국 <모나리자>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페일리와 프로이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서로 매우 비슷하다. 두 경우에 모두 최종 산물을 보고 그 산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추론을 한다. 시계 같이 정교한 장치를 보았다면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지 않고도 누군가 지적인 존재가 만들었다고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연히 그런 장치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너무나 희박해 보이기 때문이다. 흩어져 있는 조각들을 맞추어 보니 <모나리자>라는 그림이 되었을 때 우리는 누군가 지적인 존재가 종이에 <모나리자>라는 그림은 인쇄하거나 그려서 조각 내었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조각에 아무렇게나 색칠을 했는데 다 조합했을 때 <모나리자>가 될 확률이 너무나 희박해 보이기 때문이다.
페일리는 이런 논증 방식을 이용해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다. 인간의 눈은 시계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정교하다. 또한 눈은 사물을 보는 기능을 매우 잘 수행한다. 따라서 눈이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페일리는 시계를 인간이 만든 것처럼 눈을 신이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이런 논증 방식을 이용해서 정신분석이나 꿈의 해석이 정확하다고 주장했다. 꿈에서 나온 내용들과 그 내용에서 연상한 내용들은 그림 조각에 해당한다. 그 연상들을 이용해서 매우 그럴 듯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면 그것을 우연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생각이다. 따라서 누군가 처음에 <모나리자>라는 그림을 인쇄했듯이 꿈을 꾼 사람의 무의식이 나중에 꿈 해석자가 재조합해낸 이야기와 비슷한 것을 꿈 꿀 당시에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모나리자>를 1000 개의 조각으로 나누어 섞는 것은 꿈을 꾸는 것에 상응하며, 그 1000 개의 조각을 다시 조합하는 과정은 꿈의 해석에 상응한다.
자연 선택과 적응
청년 시절에 다윈은 페일리의 글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다윈은 결국 페일리의 생각을 거부하게 된다. 다윈은 신을 자연 선택으로 대체했다. 다윈에 따르면 복잡한 눈을 만들어낸 것은 무지막지한 자연 선택이다.
하지만 다윈이 페일리의 생각을 모두 버린 것은 아니다. 페일리의 핵심 논리를 다윈은 받아들였다. 눈처럼 매우 정교하고 복잡하며 어떤 기능을 잘 수행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 선택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다윈의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이것은 도킨스(Richard Dawkins)의 『눈먼 시계공』으로 이어지며 진화 심리학자들이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현대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눈의 정교한 구조는 유전적 부동(genetic drift)의 산물일 수 없다. 오직 자연 선택만이 그런 정교한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역공학
공학자는 먼저 목적을 염두에 둔다. 예컨대 공학자는 시각을 알리는 기계를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그 후 공학자는 시각을 알릴 수 있도록 구조화된 물건 즉 시계를 만들어낸다. 이것을 공학(engineering)이라고 한다. 어떤 목적 또는 기능에서 출발하여 복잡한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역공학(reverse-engineering)은 그 반대 과정을 말한다. 구조에서 출발하여 기능을 추론해낸다. 어떤 사람에게 시계를 주었을 때(그것이 시계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고) 그것이 시각을 알리는 기능을 한다는 것을 알아내는 것이 역공학이다.
역공학은 인공물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생명 현상에서도 역공학은 가능하다. 예컨대 눈의 구조를 살펴보고 눈의 기능이 “보는 것” 또는 “전자기파를 이용해서 주변 환경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임을 알아내는 것도 역공학이다. 생리학의 발전은 역공학의 발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생리학자는 심장의 기능은 피를 펌프질하는 것임을, 폐의 기능은 산소를 공급하는 것임을, 헤모글로빈의 기능은 산소를 운반하는 것임을, 간의 기능은 독소를 해독하는 것임을 알아냈다.
비판자들은 역공학 자체로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본다. 그들은 “진화하는 것 봤냐?”라고 묻는다. 하지만 그들은 신체 기관에 역공학을 적용하는 것에는 별로 시비를 걸지 않는다. 예컨대 심장을 보고 “심장의 진화론적 기능은 피를 펌프질하는 것이며 심장은 적응이다”라고 주장할 때는 별로 시비를 걸지 않는다. 심리 현상을 설명할 때도 시각 메커니즘이나 맛 선호 메커니즘을 역공학으로 설명할 때는 가만 있다가 질투나 공격성을 그런 식으로 설명하면 화를 내기 시작한다.
역공학의 강력함은 과거의 과정을 보지 않고도 추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계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지 않고도, <모나리자> 조각 그림 맞추기 퍼즐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지 않고도 그것을 누군가 지적인 존재가 만들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추론 방식이 진화론에서 중요한 이유는 과거에 대해 알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임머신을 만들어서 과거의 진화사를 직접 관찰할 수 없다. 행동과 정신은 화석으로 남지 않기 때문에 역공학을 쓰지 않고 심리 현상을 연구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기능과 적응
진화 생물학자가 기능이라는 단어를 쓸 때에는 일상적 의미와는 상당히 다르다. 진화 생물학적 의미에서 눈의 기능은 보는 것이다. 하지만 시계의 진화론적 기능이 시각을 알리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진화 생물학적 의미의 기능 개념은 자연 선택 개념, 적응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어떤 메커니즘이 자연 선택의 결과 진화했으며 그것이 하는 일 때문에 그 메커니즘이 진화했을 때에만 그것이 하는 일을 기능이라고 말한다. 시계의 진화론적 기능을 따질 수 없는 이유는 시계가 진화한 것이 아니므로 자연 선택의 산물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눈을 살펴 보자. 절대 다수의 생물학자는 눈이 자연 선택의 산물이라고 믿는다. 인간의 눈이 그토록 교묘한 형태로 진화한 이유는 더 잘 볼 수 있었던 우리의 조상들이 더 잘 번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생물학자의 믿음이다. 이럴 때 눈을 적응이라고 하며 눈의 기능은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 시계의 경우는 다르다. 여기서 눈은 생리적으로 발달하며 시계는 인공물이라는 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거미줄은 거미의 몸의 일부가 아니라 거미가 만들어낸 건축물이다. 그럼에도 절대 다수의 생물학자들은 거미줄이 적응이며 사냥이 그 기능이라고 믿는다. 진화론자들의 믿음에 따르면 거미줄이 사냥에 적합하도록 잘 설계된 것처럼 진화한 이유는 거미줄을 이용해서 사냥을 더 잘 한 거미가 번식을 더 잘했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의 조상 중에 시계를 잘 만든 사람이 더 잘 번식했기 때문에 현재의 인간이 시계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정교한 시계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진화론적 시간 척도로는 매우 최근의 일이기 때문에 그런 설명은 성립하지 않는다.
교묘함 – 적응의 척도
눈의 진화를 완벽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수억 년에 걸친 진화사를 완벽하게 재구성해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물론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진화론자들은 눈이 자연 선택의 결과 진화했다고 굳게 믿는다. 아마 진화론자는 다른 동물을 전혀 본 적이 없어서 인간의 눈에 대해서만 알고 있으며, 인간의 진화사에 대해 전혀 모르더라도 그렇게 믿을 것이다. 왜냐하면 눈처럼 복잡하고 교묘한 구조가 우연히 생겼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두 가지뿐이다. 신이 창조했다고 믿는 것과 자연 선택의 산물이라고 믿는 것.
어떤 일을 잘 하도록 누군가 설계한 것처럼 매우 정교한 구조가 있을 때 진화론자는 적응을 떠올린다. 그렇다고 매우 정교한 구조를 모두 적응이라고 보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시계는 매우 정교하지만 시계를 적응이라고 보는 진화론자는 없다.
피아노를 열심히 배운 사람은 악보를 보면서 거의 자동적으로 피아노를 친다. 피아노 연주를 담당하는 뇌의 부분을 보면 마치 피아노 연주를 위해 누군가 설계한 것처럼 매우 잘 설계되었음이 밝혀질 것이다. 그래도 진화론자들은 피아노 연주 메커니즘을 적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피아노는 진화론적 시간 척도로 보면 매우 최근에 발명되었기 때문에 그 동안 피아노 연주 메커니즘이 진화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시계와 피아노 연주 메커니즘 자체는 적응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구조는 우연히 생겼을 리가 없다. 시계는 인간이 만든다. 그리고 인간은 적응들의 집합이다. 시계라는 복잡한 구조(적응이 아니다)는 인간의 뇌라는 복잡한 구조(적응들의 집합)의 산물이다. 마찬가지로 피아노 연주 메커니즘(적응이 아니다)은 학습 메커니즘(적응)의 산물이다. 매우 잘 설계된 것처럼 구조화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적응이거나 적응의 산물이다. 아직까지 두 가지 설명 이외에 설득력 있는 설명은 제시된 적이 없다.
매우 교묘하게 생긴 것이 있다면 적응과 연결시킬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매우 교묘한 것만 적응인 것은 아니다. 매우 어설픈 구조도 적응일 수 있다. 어떤 생물이 뱀이 없는 섬에서 수억 년을 진화했다고 가정하자. 그 생물이 사는 섬에 누군가 뱀을 풀어주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아마 그 생물은 뱀 회피 메커니즘을 진화시킬 것이다. 수천만 년이 지나면 뱀 회피 메커니즘이 매우 정교할 것이다. 하지만 뱀 회피 메커니즘 진화 초기에는 매우 조잡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진화는 점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적응은 다른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도 조잡할 수 있다.
매우 조잡한 구조도 적응일 수 있다. 하지만 진화론자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조잡한 구조를 적응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진화론자는 더욱더 교묘할수록 적응이라고 더욱더 확신하게 된다. 왜냐하면 다른 식의 설명을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일을 매우 조잡하게 한다면 그것은 우연의 산물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질투의 사례
대부분의 진화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질투를 적응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인간의 질투 메커니즘이 짝(애인 또는 배우자)을 빼앗길 위험에 대한 방어라는 기능을 잘 하도록 매우 정교하게 설계된 것만 같이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질투 메커니즘의 구조로부터 질투 메커니즘의 기능을 추론해내는 역공학을 적용하여 진화 심리학자들은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질투의 사례는 눈의 사례만큼 인상적이지는 않지만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질투 메커니즘의 구조와 질투의 기능이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를 살펴보자.
첫째, 질투는 부정적 감정이다. 부정적 감정은 위험과 연결되어 있다. 다쳤을 때, 맹수의 위협이 있을 때, 친족이나 친구가 위험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부정적 감정을 느낀다. 질투는 자신의 짝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거나, 성교를 했거나, 그에 준하는 일이 벌어졌을 때 느낀다. 이것은 자신의 번식에 위협적인 일이다. 자신의 아내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면 이혼당할 가능성이 커진다. 인간의 번식은 보통 결혼 상대와의 사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혼당하는 것은 번식을 위협한다. 자신의 짝이 성교를 했다면 이미 깊은 사이일 가능성이 큼을 암시한다. 그리고 남자의 경우에는 특별한 위험이 덧붙여진다. 남의 자식을 키울 수 있는 것이다.
둘째, 남자는 짝이 다른 남자와 성교를 했을 때 상대적으로 여자보다 더 민감하다. 여자는 자신의 뱃속에서 태어난 자식이 자신의 유전적 자식임을 ‘확신’할 수 있다. 반면 남자의 경우에는 다르다. 자신의 아내의 뱃속에서 태어난 자식은 다른 남자의 유전적 자식일 수도 있다. 만약 아내가 다른 남자와 성교를 했다면 말이다. 따라서 질투 메커니즘이 잘 설계되어 있다면 남자가 성교에 더 민감할 것이며 실제로도 그렇다.
셋째, 질투하는 사람은 둘을 떼어놓으려고 한다.
넷째, 질투에 빠진 사람은 짝의 상대(짝과 사랑에 빠진 사람 또는 짝과 성교를 한 사람 또는 짝과 그에 준하는 일을 벌인 사람)에게 적개심을 느낀다.
다섯째, 질투는 감시로 이어진다.
여섯째, 질투는 결별로 이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질투가 부적정인 감정이라는 것을 당연시한다. 하지만 논리적으로는 질투가 긍정적인 감정일수도, 상황에 따라 긍정적이기도 하고 부정적이기도 한 감정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질투에 빠진 사람이 짝의 상대에게 더 큰 호감을 느끼는 방향도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 여기서 언급한 질투의 모든 현상이 그 반대일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질투 메커니즘은 마치 짝을 잃을 위험이 있을 때 그 위험을 해결하여 번식 경쟁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도록 누군가 설계한 것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질투에 대한 문화 결정론의 설명
위에서 질투가 적응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질투가 적응이 아니라는 설명이 가능할까? 문화 결정론자들은 해당 문화권에서 질투를 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을 왜 하필이면 모든 문화권에서 질투가 존재하며 질투의 양상이 매우 비슷한지를 설명할 수 없다. 문화 결정론자들은 이 문제를 질투가 없는 문화권이 있다고 우김으로써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 등의 인류학적 보고는 근거가 희박하다.
또한 부정적 감정을 느끼라고 가르치는 것이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해당 문화권에서 “질투는 기분 좋은 것이야”라고 가르치면 질투하는 사람이 기분이 좋아질까?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다. 감정 반응은 거의 자동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학습으로 쉽게 조절되지 않는다. 게임에서 져도 열 받지 말고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아무리 가르쳐도 지면 열 받는다.
정신분석과 진화 심리학 – 유연성의 차이
그렇다면 프로이트의 전략은 어떨까? 내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는 그의 해석 방식이 너무나 유연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비유에서 그림 조각들은 딱딱하며 아귀가 잘 들어맞는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방식은 그렇지 않다.
그는 해석(이야기)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온갖 유연함을 발휘한다. 그에 따르면 무의식은 어떤 것을 그 자체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 반대로 표현하기도 한다. 만약 꿈에 나온 어떤 내용이 해석에 잘 들어맞지 않으면 프로이트는 그 내용을 반대로 해석함으로써 끼워 맞출 수 있다.
진화 심리학의 역공학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예컨대 “질투는 긍정적 감정일 수도 있고 부정적 감정일 수도 있다”, “질투는 짝의 상대에 대한 분노로 이어질 수도 있고 사랑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식으로 논리를 펴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역공학을 한다면 모든 특성을 적응 가설에 끼워 맞출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무의식은 모순을 모른다. 따라서 해석에 모순이 포함되어 있어도 프로이트는 개의치 않는다. 물론 진화 심리학자는 모순이 나오면 그 가설을 포기한다. 프로이트는 어떤 내용을 그 자체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어떤 것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인간의 연상은 무궁무진하다. 만약 꿈에 나온 어떤 내용을 그 자체로 해석하기도 하고, 그 내용에 대한 반대로 해석하기도 하고, 어떤 것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그 상징의 반대로 해석하기도 하고, 그 내용에서 연상된 어떤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그 연상의 반대로 해석하기도 하고, 그 연상을 어떤 것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그 상징에 대한 반대로 해석하기도 하고, 그 연상에서 연상된 다른 어떤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그것의 반대로 해석하기도 하고, 그것을 상징적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그 상징의 반대로 해석하기도 한다면 만들어 낼 수 없는 이야기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