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고 있지 않은 것을 주기'
라캉의 사랑에 관한 정의
사랑을 이렇게 정의함에 따라,
1. 이제 사랑은 더 이상 고집스러운 '있음'에 대한 요구로 부터
나만을 사랑해 달라는 확인할 수 없는 시험으로 부터 벗어난다.
그 요구들...
그/그녀가 무엇을 하건, 무엇을 주건 간에, 그 모든 것들의 구체적 가치는 말소 되고,
그 모든 것은 '지금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맞나요 ?'라고 묻는 사랑의 시험으로 바뀐다.
그러나, 그것은 소유로서, 타자를 소유함으로써,
그러나, 그것은 타자의 그 구체적 모습이 아니라,
단지, 여기에 있어 달라는,
즉, 그/그녀의 어떤 것이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지운, 단지 '여기에 있음'으로....
단지 있음 그 자체로,
그/그녀는 환원된다.
그렇게 사랑의 대상은 '여기에 있음' '항상 여기에 있음'으로 환원된다.
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여기에 있어달라고 호소하듯이...
그러나, 그것은 소유도 아니며-왜냐하면,
그 모든 구체적인 것을 추상적 요구로 증발 시켰기 때문에....
소유 아닌 것으로서, 소유 보다 더한 집착을 소유 보다 강한 소유 아닌 것으로....
그렇게 사랑이란 이름을 달고, 우리에게 설레이는,
그러나 이내 가장 고통스러운, 사랑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저주의 세례를 내린다
그/그녀는 내것...
그러나, 확인되지 않는 사실...
. 여기에 있음으로 인해서만.... 내것이 되는...
그러나, 누가 누구의 것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
사랑을 이렇게 정의함에 따라,
2. 사랑은 같음/다름의 지겨운 거울놀이를 벗어나게 된다.
이제 사랑은 더 이상 나와 같아 달라는,
나와 다름은 참을 수 없기에, 내가 당신을 사랑한 것은
나와 닮았기 때문에, 나와 같아 달라는, 그런 요구가 아니게 된다.
같은 것은 사랑하며, 다른 것은 증오한다...
그러나, 거울상에서 왼쪽과 오른쪽은 항상, 엇갈려 있듯이
이러한 요구속에서는 사랑/증오는 엇갈린 서로 마주 보는 상이 된다.
그러나, 무엇을 기준으로 같음과 다름이 나뉠 수 있을까 ?
고백한다... 난 너를 사랑한다고...
묻는다.... 왜 날 사랑하냐고....
대답한다... 이런 저런 이유 때문이라고....
되대답한다... 그건 네가 사랑하는 허상이지, 난 아니라고....
되되대답한다... 그래도, 난 너를 사랑한다고...
그러나, 그것이 너의 진실일 거라고....
여기에 같음의 비밀이 있지 않을까 ?
같음이란, 지금 나와의 같음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또는 과거의 어떤 시점에서의 같음까지 포함한다면....
그리고, 때로는 그 같음이란 것이, 무의식적 수준에서 구성되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그녀에 같음을 요구하며,
무의식적 환상에서 내게 쾌락을 주는 그 위치를 요구하며,
그/그녀가 그러해 주기를 요구하는 것....
어떤 남자는 어떤 여자를 끔찍히도 배려하고 돌보아 준다....
그러나, 어느 날, 그 남자는 그 여자가 더 이상 배려해주고 돌봐줄 필요가 없어졌을때,
이내 그 여자는 더 이상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다.
사랑의 이름으로 해 주었던 모든 것,
그건, 그녀가 계속해서, 그의 동정과 도움을 필요로하는 불쌍한 여자이기를 그가 요구했고,
그녀는 그 자리를-아마도 그의 불쌍한 어머니의 자리를 떠 맡으며, 그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매혹의 빛을 잃어 버렸다.
그가 그어 놓은 같음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더 불쌍한 여자를 찾아 떠났다....
같음이란 그렇게....
사랑하는 이를 대상으로, 환상의 대상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이느, 그/그녀가 아니라,
거울상에 비친 나의 반쪽, 내 신체의 일부, 내 것의 한 부분일 뿐이다....
2.5 곁에 있어 달라는 요구/ 나와 같아 달라는 요구...
그것은 사랑이 불리는 것의 매듭점이며,
여느 매듭이 그러하듯이,
한 코를 찝어 들어 올리는 그렇게 풀리는 매듭이 된다
갑자기 그/그녀의 부재가 가져다 주는 불안.
갑자기 같음에 있지 않은 그/그녀의 빗나감
이로써, 사랑은 의심으로, 증오로,
이미 하나의 감추어진 폭력이었지만,
이제 드러난 폭력이 된다
그것이 드러나건/ 드러나지 않건 논리는 같다
그건 사랑하는 이의 대상으로의 격하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얼마나 폭력에 가까운가 ?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자위행위에 가까운 것일까 ?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무의식적 폭력을 자아라는 의식이라는 들뜸을 가지고
가리고 있었던 것일까 ?
사랑을 이렇게 정의함에 따라,
3. 우린 다른 사랑을, 사랑 보다 더 한 사랑을, 사랑을 넘어선 사랑을
요구가 아닌 욕망의 수준에 있는 사랑을
타자에게 대상이 되어 달라고 요구하기 보다는, 내가 대상이 되기를 욕망하는
그런 수준의 사랑으로 건너 간다
우린 모두, 말을 하는 한,
우리에 대한 것들을 모두 언어에게 기탁하는 한
우리가 우리에게 우리는 무엇이라고 이해하는 것,
우리가 타자들에게 나는 무엇이라고 소개하는 것,
이 모두는 단지, 내 자신의 결핍, 공백을 회피하기 위한,
내 자아의 교묘한, 속임수일 뿐이다.
자신의 공백과 결핍을 마주대하며,
타자의 또한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욕망이란 이 공백을 주위로 도는 영원히 지속될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
이 욕망의 알 수 없는 수준을, 무엇을 해달라는 요구로 환원함 없이.
그 알 수 없음을 알 수 없음으로 놓아 두면서,
그러면서, 타자와 관계 맺음할 수 있는 것.....
욕망과 사랑의 위대함....
이제 질문을 바뀐다...
내가 그/그녀를 사랑하는가 ? 에서 그/그녀는 나를 욕망하는가 ?
내가 그/그녀에게 욕망받으려면,
내가 그/그녀에게서 사랑을 받으려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
난 그렇게 대상이 된다
내 안에 무엇을 그/그녀가 욕망할까 ?
내 안에 무엇이 그/그녀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
이 물음은 다음에 펼쳐질 역설에 의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바뀐다.
난 그/그녀에게 존재를 줄 수 있을까 ?
그러나, 욕망이란 그것이 '---이 되고픔'이라면,
그리고, 그 '---이 되고픔'이
사랑을 매개로 타자의 욕망을 경유한 것이라면,
그리고, 이 '---이 되고픔'이 나의 존재를 가져다 주는 것이라면,
우린 하나의 역설을 바라 보게 된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그/그녀의 욕망의 원인이 되게끔 한다
그렇게 난 그/그녀가 되고픈 것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난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난 그것을 준다
그리고, 그/그녀는 내가 준것을 받음으로써, 그것이 된다
라캉의 정의처럼 난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준다
사랑은 상호적인 것이다...
상대방 또한 내게 그/그녀가 갖지 않은 것을 주며,
그렇게 난 그것을 받고,그렇게 존재함으로 되어간다.
사랑이란 그렇게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줌으로써 그/그녀를 존재하게끔 하는 것
그러나, 그것은 같음/다름의 거울 놀이가 아닌,
그/그녀 무엇을 욕망하는지는 항상, 알지 못하는 수수께끼이며,
그 알지못함을 자극하는 그/그녀의 결핍에 대한 탐구...
그/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어,
그러나, 내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 라는 질문들....
이 질문들은 결코 답해질 수 없기에,
서로 교환되는 존재는 항상 같은 것이 아니라,
언제나 맥동친다...
요구의 언어처럼 차가운 투명성이 아니라,
불투명한, 그러나 그 차가운 투명성 보다
더 설레이는 시적 언어들의 교환속에서,
서로에 대한 욕망은 언제나 새롭게 구성되어가며
난 또 다시 상대방이 갖지 않은 것을 받으면서 다른 내가 되어 가고
상대방 역시 내가 갖지 않은 것으 받으면서 다른 이가 되어 가며
이는 다시 결핍을 만들어 내고,
그 결핍에 대한 탐구가 이어지며,
그/그녀는 무엇을 욕망하고 있을까의 물음이 다시 이어진다.
이로써 사랑은 있어달라는 요구도 나와 같아지라는 요구도 아니다
오히려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의 질문속에서,
그때서야 타자의 욕망에 눈을 뜨며,
타자가 원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며,
그것이 되려고 한다
또 다른 한 편에서는,
난 그것이 되기 위해 가져야 할 것을 갖지 않았기에
왜냐하면, 욕망의 해답이란 언제나 언어 저편에 존재하며,
그것은 단지 시적 은유의 반짝임,
또는 일상적 언어적 은유의 반짝임을 통해
잠시 나왔다 사라지는 것이기에,
난 그것을 준 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
또한 난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그녀의 욕망의 대상이 됨으로써
그것을 주고,
그/그녀에게 존재를 선물한다
그리고, 나도 받는다
타자와의 소통... 욕망의 불투명함이 갖는... 설레임... 권태없는 관계....
폭력으로부터 멀어지는 사랑....
때로는, 설레이는 연극으로서의 사랑....
이러한 탐구는 그/그녀는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때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은 같음이 전제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전제한다
서로 엇갈려 가는 다름, 그럼에도 잠시동안의 열정적인 교차가 존재하는 다름
이와같은 같음/다름이 서로 배제 하지 않는, 서로 반대말이 아닌,
나선형으로 엉켜 돌아가는 같음과 다름의 묘한 변증법....
이때서야 우린 자위해위를 벗어나는 것이 아닐까 ?
내 쥬이상스를 환상속에서 그/그녀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인정하고 그것과 엇갈려
감이 오히려 욕망을 낳고, 설레임을 낳는 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더 달콤한 관계가 열리듯이,
타자의 쥬이상스를 인정하고 그것과 엇갈려 가는 것이,
환상속에서나 가능한 완전한 성관계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더 큰 다른 쥬이상스를 가능하게 한다는 라캉의 역설처럼....
사랑이란 그렇게 넘어섬의 질서로....
강한 시적 언어로 그 얇은 근거 없는 거울을 깰...
그래서, 라캉의 사랑에 대한 정의는 울린다....
욕망과 쥬이상스 수준에서의 타자 존중의 논리가...
필립 쥴리엥의 말이 생각난다....
욕망의 언어는 은유적 언어, 에로틱한 언어라는 것....
비가 온다... 오는 것은 비이다...
그러나, 그 비는 바다에 떨어지는 비는,
물에 물을 더 할 뿐인데 왜 이리 아름다운가....!
비가 온다... 오는 것은 비이다...
그러나, 아스팔트에 떨어지는 비는,
이내 하수구로 숨어들어갈 텐데,
그런데도 한 순간 도시는 젖어서,
그 메마름을 잠시나마 망각하는가.... !
그렇게 지금도 비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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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라깡, 욕망과 성의 철학자
흔히 서양 철학의 근본주의적 전통을 뒤흔든 세 사람의 사상가로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를 꼽는다. 서양 철학은 고대 희랍의 소크라테스 이래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다양한 사조들의 각축장이었고 이것들은 서로 비판과 수정을 통해 발전적으로 전개되어 왔음에 틀림없다.
그 가운데서도 서양의 독특한 지적 전통을 형성하는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주체의 개념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유하는 자아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데카르트를 비롯해서 개인의 무한한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는 실존주의자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의 인간 이해는 합리적 본성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이해에 쐐기를 박고 인간의 비합리적인 본성을 전면적으로 드러낸 사람들이 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경제적 하부구조가 차지하는 무게를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율적 정신을 가정하는 철학들의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가차없이 비판한 바 있다. 니체는 인간 내부의 비이성적인 욕구와 의지를 찬미하며, 합리적 인간의 기만적 특성을 폭로하는 데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설가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자아 이면에 있는 강렬한 무의식적 성본능의 작용을 드러내고 이를 심리치료에 의해 증명함으로써 인간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박살낸 사람이다. 이들 중 가장 현대적인 의미에서 영향력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프로이트가 아닐까 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내밀한 성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공적, 이론적 용어로 자리매김한 장본인이다. 20세기 이후부터 한 세기를 풍미한 그의 이론의 혁명적 영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 정신분석학이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확산되어 가는 오늘날 프로이트를 독창적인 방법으로 재해석하고 그의 철학적·문화적 의미를 부각시킨 것은 라깡(1901~1981)의 공적이다.
서구사회에서 정신분석학은 라깡과 더불어 정신과 의사의 심리치료실에서 나와 일반인들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지적 양분이 되었다. 라깡은 1930년대 이후 파리의 세미나에서 자신의 논문들을 발표하면서 프랑스 지성계에 꾸준히 영향력을 행사해 왔고 68혁명 이후에는 가히 사회현상이라고 할만한 열풍을 일으켰다.
맑시즘과,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합한 실존주의가 주류였던 당시 프랑스 지성계는 정신분석학이 개인을 너무 강조하고 사회, 경제, 정치적 맥락을 무시한다는 비판 아래 라깡에 덜 호의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학생들과 일반인들까지 참가한 68문화혁명은 진정한 인간 해방이 정치적인 것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이것은 기존의 제도와 관습의 경직성을 타파하려 할 뿐 아니라 냉전으로 얼어붙은 개인의 상상력과 의식을 해방하고 자유로운 자기표현을 통한 새로운 인간관계를 모색하려는 점에 있어서 너무나 인간적인 요구라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라깡의 이론은 개인으로 다시 돌아와 사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연결하는 새로운 사고틀을 제시함으로써 혁명 이후 세대에 걸맞는 인간 이해를 제공했다고 평가된다.
인간은 욕망의 존재
자끄 라깡은 1901년 파리의 유복한 가톨릭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모범적이고 우등생으로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는 정치학과 의학 중에서 망설였으나 결국 의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의과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철학, 문학, 초현실주의 사상에 관심을 갖고 앙드레 브르통, 루이 아라공, 바타이유, 클로소프스키 등을 만나 교류했다.
1926년 라깡은 신경학회에서 첫 발표를 하였으며 1932년에는 의학박사 학위논문인 「인성과 관련된 편집증적 정신이상」을 제출하고 책으로 출판했다. 이 때부터 정신분석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1933년부터 무수히 많은 기고, 강연, 발표회 등의 활동을 했다.
1934년 마리 루이즈 블롱댕과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1936년 마리엔바트에서 개최된 국제 정신분석학회에서 ‘거울 단계’에 관한 글을 발표하고 1951년 유명한 ‘도라에 관한 세미나’를 개최하였으며 이런 식의 세미나를 자신의 집에서 29년 동안 계속했다. 1953년 파리 정신분석학회를 탈퇴하고 프랑스 정신분석학회를 창립하였으며 그 해 바타이유의 아내였던 실비아와 재혼했다. 1969년에는 68혁명의 진원지였던 파리 뱅센느 대학의 정신분석학과의 창립 책임자가 되었으며 1981년 사망했다.
라깡은 전통적으로 인간을 합리적이며 주체적인 존재로 본 데 반발하면서 인간이 욕망의 존재임을 부각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어디까지나 프로이트주의자로 남아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에 있어서 무의식을 지배하는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libido)는 일종의 물리적 에너지로서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힘으로 간주되는 반면,
라깡은 무의식의 구조와 그것이 나타나는 양상을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을 도입하여 인간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해명하고자 한다. 이미 프로이트도 정신치료에 있어서 언어적 표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상인에 있어서도 농담이나 말실수 등에서 무의식의 작용이 있음을 관찰하였다. 라깡은 이러한 면을 단지 부각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무의식을 전적으로 언어적 질서에 의해 재조명한다.
무의식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발산할 출구를 찾는데 그 방식이 언어학의 법칙에 따른다. 언어기호는 소쉬르가 말한 것처럼 기표와 기의의 관계 즉 음성 표현(또는 시각적 이미지)과 그것이 함축하는 개념과의 관계에서 그 의미가 드러난다.
그러나 이 두 요소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말을 할 때 기표의 내용에 충실하고자 해도 본의 아니게 표현 자체에 이끌려 다른 내용이 되는 수가 종종 있다. 이것은 사실상 우리의 의도와 무관하게 무의식이 그 안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아마도 우리는 운명적으로 거짓말쟁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말이란 전적으로 무의식의 표현이며 무의식은 언어로 나타날 경우 자신의 본 의도를 부정하고 속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대화시 나타나는 겉보기의 논리와 합리성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무의식적 욕망에 이끌려 간다. 이처럼 기표는 필연적으로 기의와 분리되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규칙에 의해 작용한다.
예를 들면 부모의 성교를 목격한 어린아이에게 그 행위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치 않으나 그것은 시각적 이미지 즉 기표로 아이의 뇌리에 각인되어 그 아이가 성인이 된 후 그것 자체의 운동 방식에 의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처럼 기표가 기의를 온전히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더구나 그것을 인식하는 통합된 자아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은유적
이와 같은 사실은 라깡의 언어관에 의해 분명해진다. 라깡은 언어가 기본적으로 은유적이라고 본다. 은유는 그것이 의미하고자 하는 복잡한 내용을 하나의 단어로 압축시킴으로써 내용의 다양성과 풍부함을 억압한다. 언어화의 과정은 바로 이러한 은유적 압축과정을 거친다. 언어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반영할 수 없는 까닭에 상징적 기능에 머물 수밖에 없으며, 이로 인해 적나라한 체험의 세계는 무의식으로 침잠한다.
라깡은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언어의 상징기능 자체에 의해 무의식의 내용이 형성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이의 인성발달을 특징짓는 단계들인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가 구분된다. 이것들은 각각 프로이트의 이드, 자아, 초자아처럼 한 개인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세 종류의 힘이기도 하다.
실재계(the real)는 출생과 더불어 시작되며 생물학적 욕구를 포함하는 경험세계 전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인간은 성장하면서 사회 속에서 이미 의미를 가지는 체험, 상상, 언어를 통해 세계와 접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미지의 세계로 남는다. 따라서 실재는 언제나 우리에게 환상이나 신기루처럼 다가갈 수 없는 느낌, 일종의 결핍감을 준다. 유아는 어머니와의 접촉을 통해 성감대를 발달시키는데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 드러나는 구조를 형성한다.
상상계(the imaginary)는 거울 단계라고도 하며 유아시절에 자아가 형성되는 단계이다. 대략 생후 6~18개월 사이에 일어난다. 아이는 거울 속의 이미지를 통해 자신이 하나의 통일체라는 것을 인식하고 나르시시즘적인 만족에 빠진다. 그러나 거울 속의 자기동일성은 주체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영상을 매개로 하기 때문에 상상적인 것이며 그 속에서 진정한 자아는 소외되어 있다. 진정한 자기동일성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겨난다.
상징계(the symbolic)는 언어 활동을 통해 타인과의 소통이 가능해지는 시기이다. 정상인은 언어사용을 통해 타인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또 타인에 의해 인정받음으로써 자신을 정립한다. 즉, 자기 자신 속에 타자의 위치를 마련해야 하며 이 타자가 바로 구조이고 또한 나의 다른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언어적 질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회 구조 안에 자신의 위치를 등록하는 것이다. 사회적 자아는 상상계적 자아를 끊임없이 억압함으로써 견고하게 된다.
라깡은 상징계로 진입한 인간의 내부에서도 이 세 질서간의 갈등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폭로한다. 실재계는 인간이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으며 돌아갈 수도 없는 불가능의 세계이다. 상상계는 인간의 자아의식이 허구와 기만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상징계는 실재계와 상상계를 억압함으로써 인간의 욕망이 결코 충족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불가능, 기만, 부재(不在)는 각각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가 가진 본질적 특성들이다. 이 음울한 단어들은 자신의 의지대로 사고하고 행동하며 욕망을 충족시키는 하나의 통합된 주체가 있지 않다는 것을 시적으로 그려 준다. 라깡이 비록 프로이트와 달리 무의식의 구조를 탐구하고 그것을 언어적 규칙에 의해 해명하고자 하였지만 무의식은 우리가 상징계로 들어오면서 멀어진 실재계와 관계하기 때문에 그것의 의미는 근원적으로 불가해한 것이다.
그것은 루소가 잘 보여준 것처럼 인간의 삶이 자연에서 문화로 이행하면서 상실한 것들과 관계된다. 프로이트는 문명은 억압의 역사라 하지 않았던가. 라깡은 이들과 더불어 사회적 삶이 상실과 결핍에 의해 수행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라깡에서 이미 후기구조주의가 보여 주는 인간과 진리에 대한 회의주의의 일면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