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별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니체의 인식론에 대한 비판
모든 존재, 혹은 인식의 대상은 보편성과 개별성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철학의 인식론은 이 보편성과 개별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탐구합니다. 그래서 철학자는 보편성을 중시하는 쪽과 개별성을 중시하는 쪽으로 나뉘게 되는데, 실제가 그러한 것 이상으로 한쪽으로 치우치는 철학은 당연히 근본적인 모순을 잉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니체의 철학이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를 밝혀보도록 하겠습니다.
니체는 특히 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그의 영원회귀 사상은 세상을 '영원히 타는 불(ever-living fire)'로 묘사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세계관과 닮아있고, 그의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는 세계는 '만물은 유전한다.(panta rei)'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대명제와 닮아있습니다. 이러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인식론은 존재의 특성 중에 개별성을 특히 중시하는 것입니다. 니체의 인식론 역시 개별성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실제 이상으로 개별성을 중시하는 인식론은 존재의 보편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게 되며, 또한 그 보편성을 인식하고자 하는 인간 이성의 능력도 부정하게 됩니다. 이미 이러한 회의주의적 시각의 선구자들은 그리스시대에도 있었으니, 그들은 소피스트들입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는 니체와 또 그에게 영향을 받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가들이 주장하는 해석주체로서의 인간존재와 상당히 흡사합니다. 개별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와 보편성에 대한 지나친 불신이 인간 이성에 대한 회의주의와 진리에 대한 회의주의로 빠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보편성에 대한 불신은 곧 언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보편이성이 존재자들간의 보편성을 인식하여 이를 개념화한 것이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사과'라는 한 단어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 이성에 의한, 사과로 불리우는 존재들에 대한 보편성의 인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또한 이것이 사회적으로 유통되는 단어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 이성에도 보편성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인간 이성에 보편성이 없다면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소피스트들은 바로 언어를 이용하여 언어에 대한 불신을 표현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사물 간의 보편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언어 자체가 탄생할 수가 없으며, 인간 이성 간에 보편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고도로 추상화된 니체와 탈근대주의자들의 언어표현과 사상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즉 존재는 보편성과 개별성을 동시에 갖는 존재이며, 그 존재의 보편성과 개별성은 둘다 알맞게 존중되어야 존재에 대한 올바른 사고가 가능한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인식론이 보편이라는 극단에 치우쳐있다면 헤라클레이토스와 소피스트들, 그리고 니체의 인식론은 개별성이라는 극단에 치우쳐있습니다. 이렇게 인식론에서부터 잘못되게 치우쳐있는 니체의 철학은 당연히 그에 걸맞는 모순적인 주장들을 펼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2. 개인에만 치중해있는 니체의 철학
니체의 철학은 철저히 개인에서 시작해서 개인으로 끝납니다. 물론 개인에 한해서는 그의 인식론이 타당한 부분이 있습니다. 개인의 인식은 필연적으로 오류를 포함하게 되어있으며, 개인에게 있어서는 '해석'이 '진리'보다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니체가 망각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점입니다.
인간 존재는 개인으로서도 존재하지만, 동시에 여러가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도 존재하며, 크게는 보편인류의 구성원으로도 존재합니다. 즉 인간이라는 존재는 단순히 '개인'인 것만은 아닙니다. 인간은 개인의 자아도 가지고 있지만 여러가지 공동체의 구성원이기에 그에 걸맞는 사회적 자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개개인의 인간으로 구성된 여러가지 공동체는 단순히 개인들의 집합이 아닌 새로운 유기체입니다. 그것은 나름의 법칙을 가지고 생성 소멸하며, 또한 나름의 공동체 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류단위로 보편화 된 것이 바로 '보편이성'입니다. 언어는 바로 보편이성이 작용한 가장 좋은 예입니다. 민족 단위의 보편이성이 각각 존재들의 보편성을 파악하고, 그에 알맞게 언어를 창조하였기에 그 구성원들간에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개개인의 인간의 인식력에는 명백하게 한계가 있어 사물들간의 보편성을 인식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편이성의 영역으로 그 주체가 확대되면 인간공동체의 인식력은 더욱더 확장됩니다. 물론 보편이성으로 확장된 인간공동체의 이성 역시 많은 한계를 가지며, 잘못된 인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보편으로 볼 때 인간의 보편이성은 꾸준히 진리에 접근하여 왔으며, 수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의 성취는 그러한 인류보편이성의 진리에 대한 접근의 가장 뚜렷한 예시물이 될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인간 개개인의 인식능력과 이성은 틀림없이 많은 한계를 가지지만, 인류보편의 인식능력과 이성은 그러한 개인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또한 그러한 인류보편의 이성이 성취한 결과는 또한 그 구성원들의 인식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철저히 사회적인 존재이며, 한 인간의 존재적 특성은 철저히 당시대의 사회에 의해서 규정됩니다. 그렇게 규정된 상태에서 비로소 각 개인의 개별성들이 발현됩니다. 따라서 사회를 배제한 상태의 철저한 '개인'을 설정하고, 이를 바탕으로하여 인간에 대해 사고하는 것은 많은 오류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니체 본인 스스로는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유리된 절대적 개인'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스스로가 '해석의 주체'로써 존재에 대한 주체적인 해석을 완성했다고 생각할지는 모르나, 그의 사상 역시 그가 몸담았던 시대와 사회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는 19세기의 독일인문학 교육을 받았고, 바그너나 살로메 등 동시대인들과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으며, 서양의 철학적 전통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의 사상은 철저하게 당시대와 당시 사회의 시대적 요청으로부터 잉태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사회를 고려하지 않은 '개인'을 설정하며, 그 개인의 인식론과 이성으로부터 그의 철학을 펼쳐나갑니다. 그런 그의 철학이 많은 문제점을 갖게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3. 니체가 시도한 '형이상학의 해체'에 대한 비판
플라톤은 사물의 보편성을 중시하여, 그의 독특한 '이데아론'을 완성하고 개별에 대한 보편의 우위를 주장합니다. 이러한 플라톤의 사유는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이성의 능력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합니다. 따라서 그는 개인보다는 사회를 중시하는 사고를 하는데, 이때문에 칼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에서 파시즘의 선구자로 비판받기도 합니다.
니체 역시 플라톤의 사상과, 그가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로 부르는 기독교를 맹렬하게 비판합니다. 그에 의하면 플라톤의 형이상학은 부단히 생성 소멸하는 세계로부터의 도피에 불과하며,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피안은 '힘에의 의지'가 약한 자들의 도피처에 불과합니다.
사실 그의 플라톤에 대한 비판은 모든 '보편가치론'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성 소멸하는 현실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인위적이고 허구인 보편가치론을 통해서 도피하려고 한다는 것의 그의 플라톤 비판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선과 악, 도덕, 기타 등등 모든 보편가치들은 허구인 동시에 억압이며,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그가 썼듯이 '불을 뿜는 용'입니다. 그 용의 비늘들에는 천년이나 된 보편가치들이 번쩍거립니다.
그러나 과연 '도피처로서의 보편가치'가 가치의 본질일까요? 만약에 니체가 주장하듯이 보편가치라는 것이 그렇게 부정적이고 일종의 타락에 불과하다면, 왜 사람들은 그러한 보편가치들을 지켜왔을까요? 니체의 시대가 '타락한 보편가치론'의 시대였고, 그랬기에 니체는 '보편가치론'의 일부분만을 보고 보편가치론 전체를 비판한 것은 아닐까요?
'보편가치'라는 것 역시 보편이성의 사유로부터 출발하며, 그 근원에는 공동체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회를 이루고 살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개인에 대한 의식화가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개별적인 가치들을 주장한다면 사회라는 것 자체가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는 공동체에 걸맞는 보편가치들이 있어야 하며, 그로부터 선과 악, 도덕 등의 보편가치들이 생겨납니다.
만약에 개인들만이 실존한다면 보편가치들이 성립될 수 없을 것입니다. 개인만이 실존한다면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명제는 극히 타당한 것이 되고, '선과 악'과 같은 가치들도 개인이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개인인 동시에 사회로서 실존합니다. 이러한 사회의 필요에 의해 보편가치론들이 등장했던 것이고, 이러한 보편가치론들은 사회를 유지하고 구성해나가는데 중요한 주춧돌 중에 하나입니다. 만약에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유지시켜주는 어떤 보편가치론이 없이 가족의 개개인이 모두 개별적 가치들을 주장한다면, 그 가족은 성립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정은 어느 공동체나 마찬가집니다.
즉 사회를 구성하기 위하여 보편가치론이 등장했던 것입니다. 보편가치론을 부정했던 소피스트들은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반사회적인 사상들을 유포하고 다녔습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플라톤의 철학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보편가치론이 니체의 시대가 되면 타락하게 되는데, 니체가 비판한 것은 바로 그 타락한 보편가치론입니다. 보편가치론은 틀림없이 긍정적인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4. '해석주체'로서의 개인과 '힘에의 의지'에 대한 비판
니체가 말하는 개인은 '해석주체'이며, '힘에의 의지'를 숭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니체가 설정한 개인은 위에서도 미리 밝혔듯이 소피스트들에 의해 이미 주창된 것입니다. 프로타고라스는 '해석주체로서의 개인'을 주장했으며, 고르기아스는 이성에 대한 철저하게 회의적이었고,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말로,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의 기본이 되는 사고를 주장합니다.
해석주체로서의 개인, 그리고 힘에의 의지를 숭상하는 개인은 과연 사회와 양립할 수 있을까요? 해석주체로서의 개인에도, 힘에의 의지에도 도덕적인 잣대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아무런 사회적인 잣대도 없이 맘대로 해석하고, 맘대로 힘에의 의지를 추구하는 개인들이 뭉쳐서 사회라는 것이 구성될 수 있을까요? 사회가 유지될 수 있을까요?
사회적 가치들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맘대로 범했을 때 개인에게는 단기간으로 이익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개인에게도 본질적인 불이익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가치, 혹은 보편가치를 지키지 않고 맘대로 행동하며 생각하는 개인은 결국 홉스가 이야기 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불러올 가능성이 큽니다.
5. 디오니소스적 무한 긍정에 대한 비판
삶에 대한 '무한 긍정'이 성립할 수 있을까요? 니체는 긍정이라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긍정'은 '부정'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상대적 가치입니다. 무엇인가 긍정되려면 무엇인가는 부정되어야 합니다. 삶에 대한 '무한 긍정'이라는 것은, 삶에 대한 '무한 부정'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무한한 기쁨만 있는 천국'이라는 개념이 스스로 모순된 개념이며, 결국 지옥의 '무한고통'과 다를 바가 없듯이 말입니다. 니체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적 무한 긍정은 얼핏 듣기에는 그럴듯 하지만 결국은 허무주의로 연결될 뿐입니다.
이 외에도 니체 철학에 대해 비판할 것이 산더미처럼 많지만, 몇 가지 중요하게 생각하는 비판은 이 정도로 줄이고자 합니다. 요약하자면 니체 철학의 모순은 개별성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그의 인식론에서 출발하며, 그러한 인식론으로부터 파생되는 사회를 전제하지 않는 절대적 '개인'은 결국 반사회적인 인간상으로 귀결됩니다. 또한 그가 모든 보편가치들을 부정하고 다시 스스로의 가치를 세우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며, 인간은 사회적 존재인 이상 혼자 '해석 주체'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디오니소스적 무한 긍정'은 허구에 불과합니다. 그의 '영원 회귀 사상' 역시 삶에 대한 무한 긍정인 동시에 삶에 대한 무한 부정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이중성을 가집니다. 따라서 니체를 '허무주의의 완성자'라고 비판하는 하이데거의 관점은, 다소 무리한 부분이 있지만 상당히 타당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 Splendid Isolat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