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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된 미래, 상상된 과거: 카의 역사론
- 김현식 (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 -
세계사 시간, 가장 첫 시간에 선생님은 칠판에 이 한 문장을 쓰셨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부단한 대화이다.” by E.H.카 그 때는 그저 무작정 받아쓰고 ‘아-그런가보다’라고 넘어갔었다. 그 말의 진정한 의미에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은 것은 대학교에 들어가 교양과목의 참고서적으로 선정된 역사란 무엇인가를 접하고였다.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익명의 마이 리뷰에서
1. 부동의 카, 불멸의 역사란 무엇인가
2. 카의 표면: 기브 앤드 테이크
3. 카의 이면: 마스터 앤드 콘트롤
4. 이성과 진보: 카의 아이덴티티
1. 부동의 카, 불멸의 역사란 무엇인가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유명하다. 그저 그 정도가 아니라, 참으로 유명하다. “대학 다닐 때 민석홍 선생님이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어 보라시길래, 읽어 봤지. 놀라웠어. 아~, 역사란 이런 거구나라는 걸 깨달았지.” 우리 교회 목사님 말씀. 워낙 서양사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지만, 카 예찬에는 끝이 없다. 불멸의 카, 만인의 역사란 무엇인가. 건조한 인문학 서적, 그것도 무미(無味)한 이론서임에도 불구하고, 단우, 다문, 조은 등 다양한 출판사에서 간행된 역사란 무엇인가의 판본 수는 열(十)을 훌쩍 뛰어넘는다(영한대역본도 있음!). 게다가 수많은 작품이 부침하는 역사이론 분야에서의 베스트셀러는 언제나 카였다. 어디 이뿐인가.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는 카의 저 유명한 정의가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명쾌한 해답으로 못박혀 있다. 부동의 카, 불락(不落)의 역사란 무엇인가. 참으로 우리 모두는 카의 자식이 아니던가. 희끗한 선학들이 떠올리는 길현모 역(譯)의 단아한 역사란 무엇인가, 검푸른 후학들이 파고드는 김택현 역의 정치(精緻)한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학 강단에 설 때, 혹 역사란 무엇인가를 훑고 지나갈 때, 카의 말을 인용치 않은 자 누구이며, 역사란 무엇인가를 들먹이지 않은 자 누구리요.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끈질긴 사슬, 이 영겁의 고리.
왜일까. 그렇담 무엇 때문일까. 필쇠필멸(必衰必滅)의 인간적 법칙을 뛰어넘는 이 놀라운 생명력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선은 친숙함이다. 한국의 서양사를 만들고 다듬어낸 선학들은 연이은 번역과 강의 등을 통해 카를 ‘인구에 회자’케 하였고, 그 뒤를 이은 ‘장강의 뒷물결’들은 ‘전가의 보도’인양 이를 물려받아, 역사란 무엇인가를 필독의 교양서로 만들었다. 게다가 카의 작품은 짧고 쉽다. 사학개론, 또는 역사철학분야는 본디 역사학의 ‘계륵’이다. 일반적으로 역사가들은 역사의 의미를 다루는 역사이론이나 역사적 지식의 특성 등을 탐구하는 역사철학을 역사학의 본령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볼 때, 역사가의 소명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일 뿐, 역사란 무엇인가를 둘러싼 사변적인 논쟁과 추상적인 이론의 모색은 (‘사고에 대한 사고’를 본업으로 삼는) 철학자들의 업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이러한 역사가들조차 역사학의 대상과 방법, 그 가치 등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무얼, 왜, 어떻게 탐구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무언가를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역사이론에 관한 한, 역사가들의 입장은 그리 유쾌하지 못하다. 무시하자니 맘 불편하고, 파고들자니 난감해진다.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안성맞춤의 해법이었다. 원문 160여쪽의 짧은 분량은 소화불량의 위험성을 없앴고, 사변적․현학적 냄새를 제거한 직업적 역사가의 쉽고 평이한 문체는 이론에 대한 역사가들의 편두통을 가라앉혔다. 더욱이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은 책의 1장만 읽어도 얻어지는 양 보였으니, 카의 작품은 역사이론에 대한 역사가들의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에 실로 충분한 것이었다. 일례로 베른하임(E. Bernheim)의 사학개론(조기준 역)과 비교해 보자. 한때 선학들 사이에서 유행하였을 이 책(단기 4287년에 간행됨!!)역시 “전문적 소양이 없는 사람들이 역사학을 이해하는 데 적합하도록” 쉽게 쓰인 작품이었다. 게다가 사학개론적 지식을 전해주는 데는 카의 책보다 한수 위다. 서양 사학사의 흐름 정리, 다양한 학파들의 사관 요약 등은 차치하더라도, ‘비판’을 둘러싼 역사적 방법론의 고찰은 세밀화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베른하임의 저서는 오늘날 골동품이다. 새 판본이 모출판사에서 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른하임의 저서는 여전한 변방이다. 이유? 간단하다. 인지도가 턱없이 부족한데다, 길고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역사학이란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제활동에서 시간적 및 공간적으로 이루어지는 발전의 제사실을 심리적인 인과관계 및 그때그때의 사회적 가치와 연관되는 인과관계에서 구명하고 또 서술하는 과학이다.” 비록 카의 주장들, 예컨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과학으로서의 역사학, 진보에 대한 확신, 인과관계 탐구의 중요성 등을 압축시킨 놀라운 정의이지만, 카의 말과 비교해 볼 때 얼마나 ‘철학적’인가. 단언컨대, 역사의 의미와 방법론을 캐내기 위해 사학개론의 마지막 쪽까지 따라붙는 직업적 역사가는 정녕 소수일 게다.
그러나 카의 신화가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른바’ 그것의 균형감 때문이다. 카에 따르면,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관계는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의 평등한 관계여야 한다. 즉, 역사가는 사실의 비굴한 노예도 아니며 포악한 주인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념은 오늘날 인식 주체의 전횡을 정당화하고 용인하는 양 보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확산됨에 따라 그 숭고한 빛을 더하는 데, 역사가 담론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퍼져갈수록 카의 가치는 더욱 굳건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일까. 카는 과연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평등한 관계를 강조한 것일까. 물론 역사란 무엇인가의 1장에서 카가 중도(中道)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부정될 수 없다. 역사는 사실의 객관적인 편찬이라는 암초와 역사는 역사가의 정신의 주관적인 산물이라는 암초 사이를 안전하게 빠져나오는 것이야말로 카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1장 이후의 카의 모습이 1장에서의 카의 모습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는 점차 역사가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다 급기야 5, 6장에 이르러 역사란 역사가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속살을 드러내고야 마는데, “그래도 그것은 움직인다”며 오크쇼트(M. Oakeshott)와 포퍼(K. Popper)의 콧등을 후려치는 6장 말미의 격정적인 선언이야말로 이러한 확신의 절정이다.
이 글의 목적은 카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는 데 있다. 즉, 카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평등한 관계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를 역설하였음을 밝히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역사란 기억된 미래를 위해 과거를 상상하는 것이라는 명제가 카의 진정한 사론으로 부각될 것인 데, 이는 1장에서의 카의 논지와 1장 이후에 점차 드러나는 카의 색다른 주장을 파고듦으로써 입증될 것이다. 아울러 이성, 객관성, 진보, 유용성 등에 대한 카의 모던적 강박증이 그의 절대전제로 부각될 것이다. 이는 지식은 유용해야만 한다거나 진보에 기여하는 것만이 쓸모있다는 파라노이아가 카의 실용주의적 사관의 궁극적인 원인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지식은 객관적이어야 한다는(보다 정확히 말해, 주관적인 것은 결코 객관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강박관념이 카로 하여금 딜레마, 곧 실제로는 사실에 대한 역사가의 우월한 위치를 시종 강조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평등성을 천명하는 모순에 빠지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역사란 무엇인가에 감춰진 틈을 드러냄으로써, 카의 내의(內意)를 밝히는 것이야말로 이 글의 의도인 것이다.
2. 카의 표면: 기브 앤드 테이크(Give & Take)
카 전설의 시작과 끝은 역사란 무엇인가의 1장이다. 1장을 통해 카가 이야기되고 압축된다. 그렇다면 1장의 요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명제를 통해 부각되는 중용에의 권고이다. 곧 과거의 사실에 무게중심을 두는 역사관과 현재의 역사가에 무게중심을 두는 역사관 사이에서의 절묘한 균형잡기야말로 이른바 카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론들은 누가 왜 주장한 것일까.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길래 카는 이를 극복하고자 그토록 애쓴 것일까.
자신의 명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카는 그 이전의 역사론을 두 부류로 단순화한다. 랑케(L. von Ranke)로 대별되는 객관적 실증주의가 그 하나이며, 콜링우드(R.G. Collingwood)로 대변되는 주관적 상대주의가 다른 하나이다. 이 가운데 전자는 사실의 신성성, 역사가와 사실의 완전한 분리 및 사실의 능동적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우선 사실을 확인하라. 그 뒤에 거기서 결론을 끌어내라”는 말을 역사학의 옥조(玉條)로 부각시킨다. 이러한 주장의 귀결점은 “역사란 확인된 사실들을 모아놓은 것”이라는 “상식적인 역사관”인데, 이에 따르면 역사가의 임무란 단지 과거의 사건들이 실제로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카는 이러한 사관을 단적으로 거부한다. 그 토대인 사실(문서) 숭배주의가 “어리석은 오류”이기 때문이다. 카에 따르면, 상식적인 역사의 주창자들은 “사실은 스스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가정하고, 그럼으로써 “역사란 논박될 수 없는 객관적인 사실을 최대한으로 편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모든 역사가들에게 똑같은, 말하자면 역사의 척추를 구성하는, 어떤 기초적인 사실이 있다”고 주장한다. 헤이스팅스 전투는 1066년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그 일례이다. 그러나 카가 볼 때, 이는 논리의 황당한 비약이다. 단순한 사실의 확정, 예컨대 헤이스팅스 전투가 1065년이나 1067년이 아니라 1066년에 벌어졌음을 아는 것은 역사가의 작업을 위한 필요조건일 뿐, 본질적인 기능이 아니고, 그럼으로써 “기본적인 사실은 대개 역사 그 자체의 범주가 아니라 역사가의 원료라는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본적인 사실을 확정해야 할 필요성은 사실 자체의 어떤 성질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의 선험적 결정에 따라 좌우된다.” 이는 “어떤 사실에게 발언권을 줄 것이며 그 서열과 차례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역사가”이고, 사실의 선별 작업을 통해 과거에 대한 단순한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바꾸는 것도 역사가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사실은 결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실은 역사가가 허락할 때에만 말하는 것으로, 역사가가 그 안에 무엇인가를 채워 넣을 때까지는 바로 서있지 못하는 자루와 같은 것이다. 따지고 보면 역사에서의 인식 주체와 인식 객체의 관계, 곧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관계를 논한 1장의 제목을 (흔히 번역되듯) ‘역사가와 사실’이 아니라, (김택현이 제대로 번역했듯) ‘역사가와 그의 사실’로 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해석이라는 요소는 모든 역사적 사실에 개입”하며, 그럼으로써 역사가와 분리된 객관적인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카가 볼 때, “견고한 사실들을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축적하는 것이 역사의 기초라는 신념, 사실이란 스스로 말하며 아무리 많아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신념”은 근절되어 마땅한 것이었다. 그 지속력이 완고할 뿐만 아니라, 그 해악이 뿌리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믿음은 “무미건조한 사실적 역사들을, 그리고 사실의 바다 속에 흔적도 없이 가라앉은 허섭스레기들에 관해서 더욱더 많이 알게 된 자칭 역사가들의 세세하게 전문화된 전공논문들을 점점 더 엄청나게 양산”시켜 왔다. 게다가 역사가를 단순한 호고가(好古家)나 병적인 사료수집가로 전락시키는 바, “이 이단론에 굴종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 고약한 직업인 역사를 포기하고 우표수집에 또는 무언가 다른 종류의 고물수집에 착수하거나 아니면 정신병원에서 끝을 맺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카에 따르면, 사실 물신주의에 기초한 객관적 실증주의는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의 위상을 굳히기는커녕, 오히려 역사학을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가 해석의 필연성과 역사가의 능동성을 강조하고 사실 숭배주의를 혹독히 비난한다고 해서, 크로체(B. Croce)-콜링우드류의 주관적 상대주의를 옹호한 것은 결코 아니다. 카는 물론 역사학에 대한 그들의 기여를 인정한다. 우선 올바른 사실관의 정립이다. 크로체로부터 콜링우드로 이어지는 관념론적 사상가들은 “역사의 사실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할 수도 없는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역사는 해석”이며 사실은 항상 역사가에 의해 굴절된 것임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역사가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그들의 행위의 배후에 있는 생각을 상상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올바른 역사적 방법론의 토대를 마련해 준다. 게다가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과거를 조망할 수 있고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을 논증함으로써, 역사가의 바람직한 소실점(消失點)을 제시해 준다. 카가 볼 때, “역사가의 기능은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서 과거를 지배하고 이해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는 이들의 손(手) 역시 놓아 버린다. 끝에는 파국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카 스스로 부정코자 한) 실증적 객관주의의 교과서, 상대주의 공박문의 모범이라 할 카의 절교사(絶交辭)를 직접 들어보자.
역사를 구성하는 데에서 역사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만일 그것을 논리적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면, 모든 객관적인 역사를 배제시키는 것이 되기 쉽다. 역사는 역사가가 만드는 것이 되어 버린다. ··· 이런 식의 결론은, 역사란 ‘어린아이의 글자맞추기 상자와 같아서 어떤 단어든 원하는 대로 이어 붙일 수 있다’는 프루드의 말처럼, 완전한 회의주의에 이르게 된다. 콜링우드는 ‘가위와 풀의 역사’에, 그리고 역사를 사실들의 단순한 편찬으로 간주하는 견해에 반대한 나머지, 위험스럽게도 역사를 인간의 두뇌에서 직조된 것으로 보는 입장에 다가서게 되었고, 따라서 결국 ··· 조지 클라크 경이 말한 결론, 즉 “객관적인” 역사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역사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는 이론 대신에 의미는 무한하다는 이론, 즉 그 어떤 의미도 그것과 다른 어떤 의미보다 더 올바르지 않다 ··· 는 이론을 얻게 된다. 뒤의 이론이 앞의 이론만큼이나 옹호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어떤 산이 보는 각도를 달리 할 때마다 다른 형상으로 보인다고 해서, 그 산은 객관적으로 전혀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거나 무한한 형상을 가진다고 할 수는 없다. 해석이 사실들을 확정하는 데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고 해서, 그리고 현존하는 어떠한 해석도 완전히 객관적이지 않다고 해서, 이 해석이나 저 해석이나 매한가지이며 역사의 사실들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객관적인 해석을 내릴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카의 위태로운 역주행.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가는 여전히 역사가의 마음속에서 재구성되어야만 할 것”이라고 단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역사적 사실이라는 단단한 핵(核)이 객관적으로 그리고 역사가의 해석과는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믿음은 어리석은 오류”라고 단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카는 이러한 논리의 끝을 파멸로 상정하여 ‘객관적인 역사’라는 랑케의 뜰로 선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물론 카 자신에게 이러한 방향전환이 사실 숭배주의로의 복귀를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역사학의 진로를 가로막는 두 개의 암초 사이로의 힘겨운 항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사실을 존중해야 한다는 역사가의 의무”를 일깨움으로써 “이론의 여지가 많은 사실이라는 과육”과 “해석이라는 단단한 속알갱이”를 절묘하게 결합시키는 것인바, ‘대화’ 개념을 통한 역사 개념의 정립이 그것이다.
역사가는 그의 사실들의 비천한 노예도 아니고 난폭한 지배자도 아니다. 역사가와 그의 사실의 관계는 평등한 관계, 주고받는 관계이다. ··· 역사가와 역사의 사실은 서로에게 필수적이다. 자신의 사실을 가지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쓸모없는 존재다. 자신의 역사가를 가지지 못한 사실은 죽은 것이며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전설화된 명구(名句)의 탄생. 결국 카는 그 스스로가 현재의 역사가에, 그리고 그/그녀가 수행하는 능동적․주체적 역할에 무게중심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들을 짓밟으면서 오만하게 해석을 내리는 사례들”을 제거하기 위해, 사실 숭배가 아니라 사실 존중에 기초한, 그리고 해석 숭배가 아니라 해석 존중에 기초한 상보(相補)의 평등 관계를 역설하였던 것이다.
3. 카의 이면: 마스터 앤드 콘트롤(Master & Control)
평등관계의 강조는 그러나 표면일 뿐이다. 선언에 불과할 따름이다. 카의 말이 만약 역사 연구는 사료에 기초해야 한다든가, 역사가는 기본적인 사실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함을 뜻한다면, 이는 분명히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 뿐이다. 이는 피상적인 일반론의 무의미한 반복으로서, 카 스스로도 기본적인 사실의 확정은 역사가의 의무이지 결코 역사가의 목표가 아님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카의 말에는 처음부터 역사가의 주도권이 전제되어 있다. 즉, 카에 따르면 대화는 흔히 상정되듯 역사가와 그/그녀로부터 분리된 사실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화는 역사가와 그/그녀의 사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바, 이는 곧 역사가와 역사적 사실 사이의 대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역사적 사실이란 필연적으로 역사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역사가와 그/그녀의 사실 사이의 평등성은 허약한 추상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평등의 관계를 판가름할 구체적인 기준이 불명료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무엇에 근거하여 그 역사가는 사실의 비굴한 노예이고, 저 역사가는 포악한 주인이며, 이 역사가는 공정한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료에 담겨 있는 이른바 “진짜 목소리”(authentic voice)가 그 기준일까. 그러나 슈트레제만(G. Stresemann)의 예에서 카가 보여주듯, 이 역시 역사가의 마음속에서 재구성된 것이 아닌가. 결국 판단의 주체는 역사가이며, 그/그녀의 (주관적인) 사고틀이 (객관적인)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평등관계의 강조가 허성(虛聲)인 보다 큰 이유는 카 스스로가 이를 폐기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주장을 심화시키는 과정에서 카는 사실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고, 주체로서의 역사가의 위상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그리하여 1장과는 다른, 그리고 1장에서 혹평했던 역사관을 설파하게 되는 데, 실용주의적 사관이 바로 그것이다. “로빈슨의 죽음이라는 슬픈 사건”이 이의 단적인 증거인 바, 이제 로빈슨의 죽음에 대한 카의 고찰을 재검토해봄으로써 그의 참모습을 드러내보자.
로빈슨이 있었다. 애연가였고, 담배가 피고 싶었다. 그런데 없었다. 어찌하랴. 담배 사러 집을 나섰다. 이미 늦은 밤, 길은 어두웠다. 굴곡심한 모퉁이 건넛길은 칠흑처럼 캄캄했다. 담배에 대한 일념으로 길을 건넜으나, 끝내 담배 맛을 보진 못했다. 건너던 중 차에 치어 죽었기 때문이다. 운전자는 존스였다. 그날 존스는 파티에 참석했고, 주량이상의 술을 마셨다. 그런 그가 어둡고 고불고불한 도로에서 정비 불량의 차를 몰다 로빈슨을 친 것이었다.
단순한 플롯의 이 이야기를 카가 지어낸 이유는 분명하다. 역사란 인과(因果)의 탐구라는 주장 및 원인에 대한 연구란 곧 원인의 다양화와 원인의 등급화(또는 단순화)를 의미한다는 주장을 예증하기 위해서였다. 즉 이 이야기를 통해 카는 “역사란 과거의 사건을 원인과 결과의 질서정연한 전후관계 속에 배열함으로써 성립”하며, 이를 위해 역사가는 한 사건에 대해 다양한 원인들을 제시하고, 동시에 “그들 간의 상호관계를 고정시키게 될 원인들의 일정한 위계질서를 수립”해야 함을 증명코자 했다. 예컨대 로빈슨 사건의 경우, 역사가는 우선 그의 죽음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원인들을 찾아내야 한다. 카가 찾아낸 것들을 예로 들자면, 로빈슨의 흡연욕, 빈 담뱃갑, 열악한 도로, 존스의 과음 및 음주운전, 불량 브레이크의 자동차, 정비소의 나태한 정비가 그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원인들의 탐구와 나열은 시작일 뿐이다. 뒤이어 원인의 등급화 작업이 진행되어야 하는데, 역사가는 “합리적이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원인들”과 “무시해도 괜찮은 우연한 원인들”을 구분함으로써 로빈슨 사망의 “실제 원인”을 찾아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카가 “역사란 역사적 중요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의 과정”이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인의 등급화 즉 어느 하나의 원인이나 어느 일련의 원인들 혹은 또 다른 일련의 원인들의 상대적인 중요성을 가려내는 것은 역사가의 해석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수한 인과적 전후관계 중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을 선별해 내는 기준은 무엇일까.
우선은 개연성이다. 곧 여타의 유사한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판별의 기준이다. 로빈슨 사건의 경우, 그의 흡연욕과 빈 담뱃갑이 사망 원인의 범주에서 누락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끽연욕구와 비어있는 담뱃갑이 비록 로빈슨의 죽음의 한 요인이라 할지라도, 이들과 교통사고의 관계는 말 그대로 우발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반쯤 취한 상태의 운전자, 결함이 있는 브레이크, 컴컴한 길모퉁이”는 실제 원인이 될 수 있는데, 이들과 교통사고의 관계는 직접적이며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카에게 이같은 교통사고와의 연관성 자체가 원인 선별의 기준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선택의 기준은 실상 따로 있는데, ‘유용성’이 바로 그것이다. 논의의 핵심인 만큼 카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이성은 보통 어떤 목적을 위해 그 능력을 발휘한다. 지식인들은 이따금 재미삼아 사고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말하자면 인간의 사고란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보기에, 우리가 어떤 설명을 합리적인 것으로 보았고 어떤 설명을 합리적이지 못한 것으로 간주했다면, 우리는 어떤 목적을 위한 유용한 설명과 그렇지 못한 설명을 구분한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사건의 경우, 운전자의 음주벽을 단속하거나 브레이크의 상태를 더욱 엄격하게 검사하거나 도로의 개설계획을 개선한다면 교통사고에 의한 사망률의 저하라는 목적에 유효하리라고 생각한 것은 이치에 닿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흡연을 억제함으로써 교통사고에 따른 사망률을 저하시킬 수 있다고 추정한 것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바로 이 점이 구분의 기준이었던 것이다. 역사에서의 원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합리적인 원인과 우연적인 원인을 구별한다. 다른 나라, 다른 시기, 다른 조건에 적용될 수 있는 합리적인 원인은 교훈을 얻어낼 수 있는 유익한 일반화를 도출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우리의 이해력을 넓히고 심화해 준다는 목적에 이바지한다. 우연적인 원인은 일반화될 수 없다. 또한 그것은 말 그대로 독특한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교훈도 가르쳐주지 않으며 그 어떤 결론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이다.
요컨대 카에 따르면 합리성은 개연성이며, 개연성은 곧 유용성이다. 즉 교훈 제공의 유용한 원인만이 합리적이고 중요한 실제 원인이며, 그 어떤 가르침도 제공하지 못하는 무용한 원인은 터무니없고 무시할만한 우연적인 원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유용성 여부의 판단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연구자의 연구 목적이다. 목적에 얼마나 이바지하는가의 여부가, 연구자의 탐구 목적에 부합하는 교훈을 얼마나 제공하는가의 여부가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을 가름하는 궁극의 규준이기 때문이다. 결국 로빈슨 사건의 경우, 카는 교통사고와의 연계성 때문이라기보다는 교통사고 사망률의 저하라는 목적과의 관련성 때문에 로빈슨의 흡연욕구를 배제한 것이었다.
이처럼 역사의 해석에서 카에게 중요한 것은 목적과의 연계성이며, 교훈 제공의 여부이다. 따지고 보면 그가 역사학과 자연과학의 유사성을 주장하는 가운데, 역사가도 일반화해야 함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카가 볼 때, “일반화의 진정한 핵심은 우리가 이를 통해 역사로부터 가르침을 얻고자 한다는 것, 즉 어떤 일련의 사건들에서 이끌어낸 교훈을 다른 일련의 사건들에 적용하고자 한다는 것”(104)이고, 그럼으로써 일반화를 통해 역사가는 “미래의 행동에 대한 타당하고도 유용한 일반적인 지침”을 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카가 “일반화를 거부하면서 역사는 오로지 특수한 것에만 관계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격렬히 비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는 교훈을 주어야만 하며 교훈은 또한 일반화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고 확신한 그가 볼 때, 그들은 “역사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사란 무엇인가. 만약 연구자의 “의도된 목적이 역사에서의 인과관계를 다루는 열쇠”이고 그 목적에의 기여 정도가 원인 선별의 기준이라면, 그리고 일반화를 통한 유용한 교훈의 추출과 전달이 역사 연구의 핵심이라면, 역사란 대체 무엇일까. 여전히 역사는 현재의 역사가와 과거의 사실 사이의 대화일까. 그리고 그 대화는 기브 앤드 테이크의 공평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유용성, 교훈, 연구 목적이 부각되는 시점에 이르러 카의 역사개념은 급변한다. 우선 미래가 중심축으로 등장하는 바, 역사의 정의는 “과거의 사건들과 서서히 등장하고 있는 미래의 목적들 사이의 대화”로 탈바꿈한다. 게다가 역사가의 정의도 변화하는데, 이전의 역사가가 끊임없이 왜라고 질문하는 자였다면, 이제 참다운 역사가는 “왜라는 질문에 더하여 어디로라는 질문”도 끊임없이 제기하는 자로 진화한다. 이런 점에서 카가 볼 때, 역사가들은 과거를 상상하고 미래를 기억한다는 네이미어(L.B. Namier)의 말은 절대적으로 옳다. “오직 미래만이 과거 해석의 열쇠를 제공”하는 바, 역사가의 방향 감각, 역사가의 미래관, 역사가의 미래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만이 과거 해석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교통사고 사망률의 감소라는 목표가 로빈슨 사건의 탐구 목적으로 자동 설정되고, 그럼으로써 음주운전 등이 로빈슨 사망의 원인으로 부각된 참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카가 볼 때, 이렇게 방향 설정된 연구만이 “미래의 보다 나은 세계”, 이 경우 교통사고로 인한 사상자의 수가 감소된 사회의 건설에 실제로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역사가와 그의 사실 사이의 관계는 더 이상 기브 앤드 테이크의 공평한 관계일 수 없다. 역사가의 ‘미래 의식’과 이에 기초한 역사가의 ‘의도된 목적’이 합리성(=중요성=개연성=유용성=교훈)의 기준인 이상, 사실의 선별과 사건의 해석을 주도하고 지배하는 것은 바로 역사가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카가 볼 때, “역사의 사실들은 순수하게 객관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역사가가 부여하는 의미에 의해서만 역사적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역사에서의 객관성은 사실의 객관성일 수 없으며, 오로지 관계의 객관성, 즉 사실과 해석 사이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이의 관계의 객관성일 수 있을 뿐이다.”
로빈슨의 죽음이라는 슬픈 사건으로 되돌아가 보자.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조사의 객관성은 우리가 정확한 사실들을 입수하는 것이 아니라―그 사실들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우리가 관심을 가졌던 사실다운 사실들 혹은 중요한 사실들과 우리가 무시해도 괜찮았던 우연한 사실들을 구별하는 것에 달려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구별하는 것이 쉽다고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중요성에 대한 우리의 기준이나 검증은, 다시 말해서 우리의 객관성의 토대는 분명한 것이었고, 또한 그것은 당면한 목표, 즉 교통사고 사망자의 감소라는 목표와 연관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가는 교통사고 사상자를 감소시킨다는, 단순하고도 제한된 목적을 앞에 두고 있는 조사자보다 덜 행복한 사람이다. 역사가도 역시 해석이라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때 중요한 것과 우연한 것을 구별하기 위해서 중요성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준이 필요하며, 그 기준은 또한 그의 객관성의 기준이기도 하다. 따라서 역사가도 당면한 목적과의 연관 속에서만 객관성의 기준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카에 따르면 합리적이고 유용한 해석의 기준은 물론 객관적인 해석의 기준마저도 사실 그 자체에서 발견될 수 없다. 그 기준은 오로지 역사가가 지닌 목적, 역사가의 미래에 대한 전망에서만 찾아낼 수 있는 바, “이러한 역사의 방향감각만이 우리가 과거의 사건을 정리하고 해석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4. 이성과 진보: 카의 아이덴티티
미래를 기억한다? 이는 정녕 역설이다. 말 그대로 오지도 않은 것을 기억하라니 말이다. 그러나 카에게는 이것이 확고한 진리였다. 미래를 기억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역사가는 미래에 대한 확실한 비전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바, 바로 이것이 합리적이고 실용적이며 객관적인 사실 해석의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사가의 미래관은 어떠한 것일까. 그/그녀가 갖추어야 할 바람직한 미래상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이성의 영역이 무한히 확장”되는 세계, “인간의 잠재력이 부단하게 발전”하는 세계로서 곧 “자기 자신과 환경을 이해하고 지배할 수 있는 인간능력이 끝없이 증대”되는 세계이다.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의 5, 6장에 이르러 ‘진보’에 대한 신념을 역사가에게 끊임없이 요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볼 때 “그 이름에 걸맞는 역사는 역사 그 자체 안에서 방향감각을 찾아내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이 쓸 수” 있는 바, 역사의 진보를 확신하는 역사가들만이 “문학―의미도 중요성도 없는, 과거에 관한 꾸며낸 이야기와 신화들의 묶음”이 아닌 참다운 역사를 서술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의 역사가들은 다른 역사가들보다 더 지속적이고 더 완전하며 더 객관적인 역사를 쓰고 있다. 이들은 과거에 대한 그리고 미래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가진 역사가들이다. 과거를 다루는 역사가는 미래의 이해에 다가설 때에만 객관성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카에게 “역사란 이성의 발휘를 통해서 환경을 이해하고 그것에 작용해온 인간의 오랜 투쟁”이며, 참다운 역사서술이란 이성의 이러한 투쟁이 “혁명적으로 확장”되어온 과정, 즉 “환경뿐만이 아니라 그 자신까지도 이해하고 그 자신에게까지 작용을 가하려고 애쓰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이외의 것은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이며 주관적인 역사일 뿐이다. 쓸모없는 사이비 지식일 따름이다. 역사 연구의 결과가, 역사적 지식이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환경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대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쓸모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카의 역사는 주체 우선의 거대담론이다. “새로운 영역으로의 이성의 기능과 힘의 확장”이라는 목표에 짜 맞추어진 사실들의 행렬이고, 역사가의 신념과 방향감각에 의해 각색된 진보의 이야기이며, 이성과 진보의 미명하에 부각된 승자들의 이야기이다. “나는 크리켓의 역사에 관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 그러나 그 역사책은 아마 한 점도 못 올렸거나 실격당한 사람들의 이름이 아니라, 수백 점을 기록한 사람들의 이름으로 장식되어 있을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1장에서 콜링우드의 사관을 비판하는 가운데 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역사가가 반드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눈을 통해서 자신이 연구하는 역사적 시대를 바라보아야만 하고, 또한 과거의 문제들을 현재의 문제들의 열쇠로서 연구해야만 한다면, 그는 사실에 관한 순전히 실용적인 견해에 빠져서 올바른 해석의 기준은 현재의 어떤 목적에 대한 그 해석의 적합성이라고 주장하지 않을까. 이러한 가설에 따른다면 역사의 사실은 무(無)가 되고 해석이 전부가 된다. ··· [미국의 실용주의자들에 따르면] 지식이란 어떤 목적을 위한 지식이다. 지식의 유효성은 목적의 유효성에 좌우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론이 전혀 공언되지 않은 경우에서조차, 그 실천이 적지않이 걱정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나는 이러한 위험의 실체를 느끼지 못한 채 사실들을 짓밟으면서 오만하게 해석을 내리는 사례들을 나의 연구 분야에서 수도 없이 보아왔다.
타당한 지적이다. 그렇다면 카의 경우는 어떠할까. 이러한 비난에서 그는 과연 자유로울까. 카는 분명 자신의 결백성을 역설할 것이다. 보아라. 나는 역사가의 해석에 맞추어 사실이 만들어짐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가의 사실에 맞추어 해석이 만들어짐도 강조하지 않았던가. 원인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역사가와 그의 원인의 관계는 역사가와 그의 사실의 관계와 똑같이 이중적이고 상호적인 성격을 가진다. 원인은 역사과정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을 결정하며, 그의 해석은 원인에 대한 그의 선택과 배열을 결정한다.” 이렇게 말한 자가 바로 내가 아닌가.
그러나 문제는 이 모두 말 뿐이라는 데 있다. 실제로는 역사가의 목적이 원인을 선별하고, 바로 이렇게 선별된 원인들이 사건의 실제 모습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로빈슨의 죽음이라는 슬픈 사건으로 되돌아가보자.” 카에 따르면, 로빈슨의 흡연욕구나 빈 담뱃갑이 배제되고, 음주운전이나 정비 불량의 자동차가 실제 원인으로 간주된 것은 이 사건의 연구 목적이 교통사고의 감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로빈슨 사건의 연구 목적이 이와는 다른 것이라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예컨대 누군가 흡연자의 수를 줄이기 위해 이 사건을 탐구한다면, 이 경우 로빈슨 죽음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밤길을 나서도록 강요했고, 컴컴한 건널목을 건너게 만들었던 로빈슨의 지독한 흡연욕구가 아닐까.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로빈슨의 죽음은 슬픈 사건이 아닐까. 조금만 참으면 될 것을 참지 못한 탓에 비명횡사했으니 말이다. 결국 이 경우, 로빈슨의 흡연욕구가 사망의 실제 원인으로 간주되고, 로빈슨 사건은 한 니코틴 중독자의 슬픈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흡연자의 수가 줄어든 세계, 이 세계가 보다 나은 미래라는 신념, 이러한 미래를 실현하려는 의지, 그 목적 하에 이루어진 과거사의 연구, 그리고 이에 따른 원인의 선별. 이는 카가 그토록 강조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이의 관계의 객관성”에 의거한 철저히 합리적이고 유용하며 객관적인 역사 연구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이러한 해석에 씁쓸한 뒷맛을 느낀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 해석의 경우, 지식의 유효성은 목적의 유효성에 좌우되었으며, 당면한 목적에 대한 적합성이 올바른 해석의 기준이 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주고받는 공평한 대화? 포악한 주인도 아니고 비굴한 노예도 아닌 친구로서의 관계? 표면일 뿐이다. 거죽일 뿐이다. 역사가가 사실의 해석을 지배하고 통제한다는 확신이야말로 카의 실체인 바, 카에 따르면, “역사에서의 판단 기준은 보편타당성을 요구하는 원리가 아니라 가장 효율적인 것”이며, 이 효율성의 잣대는 바로 역사가 자신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주제어
카,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가와 사실, 랑케, 콜링우드, 인과관계
E. H. Carr, What is History, Historian and his Facts, Leopold von Ranke, R. G. Collingwood, Cause and Effec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