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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철학의 개념적 변화의 몇 가지 원천

작성자손님|작성시간06.02.21|조회수38 목록 댓글 0
분석철학의 개념적 변화의 몇 가지 원천



1. 1950년대와 1960년대를 지나 분석철학은 그 모습을 변모시킨다. 그것은 바로 환원주의의 실패와 함께 분석성과 종합성의 이분법과 사실과 가치, 또는 서술적 판단과 평가적 판단의 이분법이 희미해 지면서 나타난 변모이다. 서얼(J.Serale)은 이러한 변모의 계기를 다음 다섯 가지로 열거하고 있다. 

즉 (1) 분석성과 종합성에 대한 콰인의 비판 (2) 오스틴의 언어행위이론 (3) 기초주의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반박 (4) 윤리학과 정치철학에서 롤즈의 공헌 (5) 쿤 등에 의해서 주도된 과학철학의 변화 등이 그것이다. - 로티는 셀라스의 {경험론과 심리철학}(Harvard Univ. press, 1997.)에서 1950년부터 시작되어 70년대 부근에 완결된 분석철학의 변모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계기를 다음 세 가지로 들고 있다. 그 하나가 바로 콰인의 {경험론의 두 독단}이며, 다른 하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그리고 셀라스의
{경험론과 심리철학}이라는 논문이다.



2. 이미 우리가 본 것처럼 논리적 실증주의나 칼 포퍼 등은 경험적 지식의 모형이 물리과학 등에서 제공된다고 본다. 또 과학적 지식은 축적적이며 과학적 방법의 체계적 적용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적이고 경험적인 명제들은 경험에 의해 확증되거나 반증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살아남은 과학적 이론은 이성적이며, 그 지식은 축적적이며 객관적이다.



과학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바로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1962)를 통해 급격하게 변모한다. 쿤에 의하면, 과학의 역사는 과학적 지식이 축적적이며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혁명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에서 뉴톤적 물리학에로의 전환은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라, 하나의 패러다임을 다른 패러다임으로 변경하는 것이다. 하나의 패러다임이 문제에 직면할 때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나고, 그것은 사물들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해 준다. 정상과학은 단지 이러한 패러다임 안에서 문제 해결의 과정에 불과하다. 쿤과 마찬가지로 페이어아벤드(Paul Feyerabend)도 하나의 단일한 이성적 방식으로서 과학적 방법에 의문을 표현한다. 과학의 역사는 단 하나의 이성적인 과학적 방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비이성적인 방법을 포함하여 다양한 방법들을 보여준다. 바로 이 점에서 과학적 방법에 대해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견해는 그 어떠한 것도 허용될 수 있다는 무정부주의적인 것이다.





때때로 쿤은 과학적 이론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고 있는 세계의 실재를 거부하는 것처럼 주장하기도 한다. 쿤은 실재론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탈실증주의적 과학철학에 대한 비판적 논쟁의 주제이다. 과학혁명의 구조에 대한 쿤의 주장을 용인한다고 해서 이것으로부터 실재론에 대한 부정은 도출되지 않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페이어아벤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과학적 방법의 다양성을 용인하지만, 그러나 과학적 방법에 그 어떠한 이성적 제약이 없다는 주장을 용인하지는 않는다.



쿤이나 페이어아벤트의 주장은 실증주의적 과학관뿐만 아니라 초기 분석철학관에 변화를 가지고 온다. 논리적 실증주의가 그랬듯이 통일과학이나 단일한 과학적 방법을 추구하는 철학자들은 별로 없다. 나아가 쿤이나 페이어아벤트가 강조한 것처럼 과학철학은 과학의 역사나 구체적인 과학적 실천에 더욱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 가령 양자역학에 대한 토론, 벨의 정리에 대한 토론 등은 물리학의 문제가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철학적 탐구가 시작된다는 전통적 생각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3. 쿤이나 페이어아벤트가 실재론을 부정하는 큰 논거의 하나가 경험적 관찰의 중립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탈실증주의적 과학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모든 관찰은 이론부여적이다. 즉 경험적 관찰과 이론적 개념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관찰을 해석할 수 있게 하는 이론적 틀, 또는 개념체계는 바로 주어진 실재에 대한 생각을 부정하게 만든다. 칸트가 보여주었듯이 이러한 이론적 틀, 개념체계 안에서 우리는 다양하게 실재를 구성한다. 이렇게 다양하게 구성되는 실재 중에서 어느 것이 진정한 실재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실재조차 또다른 개념체계에 의해 구성되는 것에 불과하다.





칸트가 인식구성설이라고 불렀던 이러한 생각은 논리적 실증주의가 가졌던 기초주의적 사유에 대한 비판이다. 과학조차 엄밀한 경험적 기초를 근거로 하여 이룩된 체계가 아니다. 따라서 철학도 과학들에 근거를 마련해 주는 기초적 작업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는 무엇보다도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철학은 순수하게 기술적(de-scriptive)이다. 따라서 철학은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언어에 보다 확고한 기초를 마련해 주는 것도 아니고, 보다 정교하고 엄밀한 언어로 대체하는 것도 아니다. 철학적 문제는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언어의 올바른 기술로부터 해소된다. 과학철학자들에게서 이론적 틀이나 개념체계의 구실을 하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에서 주장되는 '언어게임'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에 의하면 우리의 언어는 행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서 '언어게임'이라는 용어는 언어를 말한다는 것이 활동 혹은 삶의 형식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현저하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PI:23) 더 나아가 이러한 언어게임은 무한하게 다양하다. "얼마나 많은 종류의 문장들이 있는가? 주장, 질문, 명령 등?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종류들이 있다. ...... 이러한 종류의 다양성은 단 한 번에 고정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유형의 언어, 새로운 언어게임이 존재하게 되고 다른 것들을 희미해 지거나 잊혀지게 된다. ..... 언어에서 도구의 다양성, 혹은 그것들이 사용되는 다양성, 단어와 문장의 다양한 종류와 {논리철학논고}의 저자를 포함해서 언어의 구조에 대해서 논리학자들이 이야기한 것을 비교해 보는 일은 재미 있을 것이다."(PI:23) 


언어는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사용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매우 다양한 기능을 한다. 언어게임이 수행하는 다양한 기능은 어떤 한 가지의 본질적인 기능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반성을 갈망하면서 감추어진 본질을 추구하는 철학적 노력은 다양한 언어사용을 무시하면서 또 언어 속에서 발견되는 가족유사성(family-resemblance)를 무시하면서 우리의 언어를 머리 속에 존재하는 관념들의 체계로 바라보거나, 아니면 단지 세계를 기술하는 지칭도구로서만 간주한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는 우리의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면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에 의하면 철학은 이러한 언어사용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다. 즉 "철학은 언어의 실제적 사용을 어떠한 방식으로 방해하지 않는다. 철학은 단지 그것을 기술할 뿐이다. 철학은 또한 언어의 실제적 사용에 어떠한 기초를 제공할 수도 없다. 그것은 모든 것을 그 있는 바대로 나둔다."(PI:124) 바로 이런 의미에서 철학적 분석은 환원적이거나 기초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4. 콰인은 그의 {경험론의 두 독단들}에서 비트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환원주의와 기초주의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콰인에 의하면 경험론은 두 가지 독단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분석성과 종합성의 이분법이며, 다른 하나는 환원주의적 독단이다. 분석성과 종합성의 이분법을 부정하는 콰인의 논변은 간단하다. 그것은 분석성을 정의하는 그 어떠한 시도도 순환성을 면키 어렵다는 것이다. 분석성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분석성의 개념과 유사한 개념, 즉 필연성, 의미, 정의, 대치가능성, 의미론적 규칙 등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분석성에 대한 비순환적 정의의 불가능성과 함께 콰인은 분석성의 대표적 특성, 즉 분석판단은 수정이 불가능하며 반박할 수 없다는 생각을 비판한다. 콰인에 의하면 그 어떠한 수정으로부터 벗어난 진술은 없다. 이런 의미에서 분석진술이 나타내는 논리적, 의미적, 개념적, 이론적인 것들과 경험적인 것들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의 지식을 순수하게 경험적인 것으로 환원하려는 논리적 실증주의의 현상론적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의 언어는 복합적인 연쇄망이다. 이 연쇄망 주변부에 있는 경험이 변화를 야기시키며, 우리는 다양한 실용적 조정에 의해서 그러한 변화를 제어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언어는 원자론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련의 명제들로 되어 있고, 또 그 명제들은 서로 고립된 채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언어는 전체적 연쇄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콰인의 이러한 전체론의 주장은 바로 듀헴(Duhem)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때때로 듀헴-콰인 논제라고 불리운다.





만약 콰인의 주장처럼 분석성과 종합성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다면,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명제를 분석명제로 특성짓기 어렵다. 따라서 철학자의 작업과 경험적인 과학자의 작업은 그리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따라서 콰인의 주장은 철학이 다른 종류의 경험과학과 분명하게 구분된다는 주장을 거부하게 만든다. 철학은 다른 개별과학보다 일반적이지만, 그러나 개별과학과는 다른 특수한 논리적 지위나 우선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철학은 다른 경험과학과 일종의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콰인의 주장이 바로 '철학의 자연주의화'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경험론의 두 독단}에서 말하는 두 가지 독단들을 "페기함으로써 생기는 한 가지 결과는 사변적 형이상학과 자연과학 사이에 가정되었던 경계가 흐려진다는 것이다. 또 다른 결과는 실용주의에로의 전환이다."



5. 언어와 행위에 밀접한 연관성을 주목하고 있는 비트겐슈타인이나 의미 등의 내포적 대상에 대해서 회의적 눈초리를 보이면서 행동주의적으로 언어를 이해하고 있는 콰인에게서 보듯이, 우리의 언어는 단지 세계를 기술하고 대상을 지칭하는데 사용되는 것만은 아니다. 오스틴(J.L.Austin)이나 서얼(J.Searle)은 이런 문맥에서 언어행위론(Speech Act theory)를 발전시키고 있다. 오스틴에 의하면 분명히 유의미하지만 그러나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닌 아주 중요한 진술들이 존재한다. 가령 "나는 올 것을 약속한다"라는 발언은 일종의 보고도 아니며 어떤 사태를 기술하는 것도 아니며, 감정의 표현도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발화는 서술하는 것이거나 무엇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면서 무엇을 하는 것이다. 


오스틴은 이러한 종류의 발화를 바로 '수행사'(performative)라고 부른다. 이러한 수행사와 인지사(constantive)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존재한다. 즉 인지사는 참이거나 거짓이지만, 그러나 수행사는 적절하거나(felicitous) 부적절한 것이다. 또한 인지사는 말하거나 서술하는 것인데 반하여 수행사는 어떤 행위이거나 수행이다. 오스틴은 이러한 인지사와 수행사의 구분을 더욱 발전시키면서 오히려 인지사를 수행사의 일부분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수행사들의 어떤 종류들에도 참이거나 거짓을 말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인지사들의 어떤 종류들도 적절성과 부적절성으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서술하거나 주장하는 것도 바로 우리가 수행하는 언어행위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맥에서 오스틴은 우리 언어행위를 locutionary act, illocutionary act, perlocutionary act 둥의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오스틴의 철학은 언어철학을 바로 행위의 철학으로부터 근거짓는다. 언어행위가 바로 우리 인간이 언어로서 수행하는 활동인 한에 있어서 언어를 분석하고 해명한다는 것은 우리 행동을 분석하고 해명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향적인 행동은 심적 현상의 표현이기 때문에 언어철학이나 행위철학은 바로 심리철학의 두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언어철학이 모든 철학의 처음이 아니라 바로 심리철학이 모든 철학의 근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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