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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바람이 머무는 자리

작성자박미정|작성시간26.06.08|조회수15 목록 댓글 0

바람이 머무는 자리

하늘과 맞닿은 넓은 들판이 있었다.

봄이면 연둣빛 물결이 흐르고, 여름이면 들꽃이 피어나며, 가을이면 은빛 억새가 바람과 함께 춤추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바람의 들판이라 불렀다.

신기하게도 그 들판에는 언제나 바람이 머물렀다.

멀리 산을 넘어온 바람도,
강을 건너온 바람도,
바다를 지나온 바람도

잠시 그곳에 들러 쉬어 갔다.

그래서 들판은 늘 살아 있는 듯 흔들리고 노래했다.

그 들판 가까이에 작은 마을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을에는 루아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다.

루아는 꽃을 사랑했다.

들꽃 한 송이에도 인사를 건넸고,
나무 한 그루에도 이름을 붙여 주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보며 말했다.

“루아가 지나간 자리에는 꽃이 피어난다.”

하지만 루아는 고개를 저었다.

“꽃은 원래 아름다웠어요.
나는 그 아름다움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볼 뿐이에요.”

어느 날이었다.

루아는 바람의 들판을 걷다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후우우…”

누군가 한숨을 쉬는 소리였다.

루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누구세요?”

그때 다시 소리가 들렸다.

“여기야.”

루아는 깜짝 놀랐다.

목소리는 바람 속에서 들려왔다.

“혹시… 바람이 말하는 건가요?”

“그래.”

바람이 웃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고 있는 바람이란다.”

루아는 눈을 크게 떴다.

“바람도 말을 하나요?”

“듣는 사람이 없었을 뿐이지.”

바람은 살며시 억새를 흔들었다.

은빛 꽃들이 물결처럼 출렁였다.

“왜 한숨을 쉬고 있었나요?”

루아가 묻자 바람은 잠시 침묵했다.

“나는 떠나야 하는데 떠날 수가 없단다.”

“왜요?”

“내가 머무는 동안 사람들은 행복해했어.
꽃도 피고 새들도 노래했지.
그래서 떠나기가 두려워졌어.”

루아는 처음으로 슬픈 바람을 보았다.

바람은 늘 자유로운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람은 원래 떠나는 존재 아닌가요?”

바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루아는 매일 들판을 찾았다.

그리고 바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 날은 구름 이야기.

어느 날은 별 이야기.

어느 날은 꽃 이야기.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이었다.

들판의 억새가 온 세상을 은빛으로 물들였다.

루아는 바람에게 말했다.

“당신은 왜 이곳을 그렇게 사랑하나요?”

바람은 조용히 웃었다.

“이곳에는 기다림이 있거든.”

“기다림이요?”

“그래.”

바람은 멀리 하늘을 바라보았다.

“꽃은 봄을 기다리고,
새는 계절을 기다리고,
사람은 사랑을 기다리지.”

루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가 행복해지는 순간을 기다린단다.”

루아는 그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며칠 뒤,

마을에 큰 가뭄이 찾아왔다.

강물은 줄어들고 꽃들은 시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걱정했다.

들판도 점점 힘을 잃어 갔다.

그날 밤,

루아는 바람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왜 우세요?”

바람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을 지켜 주고 싶은데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루아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아니에요.
당신은 이미 많은 것을 하고 있어요.”

“무엇을?”

“희망을 주고 있잖아요.”

바람은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 조용해졌다.

루아는 미소 지었다.

“꽃은 당신을 기다리고,
새도 당신을 기다리고,
사람들도 당신을 기다려요.”

그 순간이었다.

하늘 저편에서 작은 구름 하나가 떠올랐다.

바람은 조심스럽게 그 구름을 밀어 주었다.

구름은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비가 내렸다.

촉촉한 빗방울이 들판을 적셨다.

꽃들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새들도 노래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기뻐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그 비가 바람의 용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다.

어느 날 바람은 루아를 찾아왔다.

“이제 떠나야 할 것 같아.”

루아는 슬펐다.

그러나 울지 않았다.

“다시 돌아오실 거죠?”

바람은 웃었다.

“물론이지.”

“언제요?”

“네가 꽃을 보며 웃는 날.”

루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곧 오겠네요.”

바람은 환하게 웃었다.

이윽고 하늘 저편으로 날아갔다.

시간은 흘렀다.

겨울은 지나고 봄이 왔다.

들판에는 다시 꽃이 피었다.

루아는 꽃들 사이를 걸었다.

그리고 문득 익숙한 바람을 느꼈다.

“왔군요.”

후우우—

부드러운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꽃들이 흔들리고 억새가 노래했다.

바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아는 알 수 있었다.

바람은 떠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여행을 다녀온 것이라는 것을.

그날 이후 사람들은 그 들판을 더욱 특별하게 부르게 되었다.

바람이 머무는 자리.

바람이 쉬어 가고,
꽃이 피어나고,
사람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곳.

그리고 누군가의 미소가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드는 곳.

루아는 오늘도 그 들판을 걷는다.

바람은 여전히 그녀 곁을 지나간다.

그리고 들판은 오래된 동화처럼 조용히 속삭인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과, 다시 만날 것을 믿는 마음 속에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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