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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망각의 왕 4

작성자박미정|작성시간26.06.08|조회수13 목록 댓글 0

《별을 심는 아이》

4부. 망각의 왕

하늘이 어두워졌다.

조금 전까지 은은하게 빛나던 별빛 들판은 순식간에 검은 그림자에 덮였다.

수천 개의 종이 동시에 흔들렸다.

딩—

딩—

딩—

그 소리는 마치 울음 같았다.

잊혀진 이름들의 울음.

잊혀진 꿈들의 울음.

루시아는 언덕 위에 서 있었다.

그녀의 손안에서 별빛 씨앗이 떨리고 있었다.

언덕 아래에서는 거대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형상도,

짐승의 형상도 아니었다.

안개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고,

그림자처럼 퍼졌다가 다시 응집되었다.

그리고 그 몸속에서는 수많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를 기억해 줘…”

“내 이름을 잊지 마…”

“나는 여기 있었어…”

루시아는 눈물을 삼켰다.

그것은 괴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세상에게 잊혀진 존재들의 목소리였다.

기억의 정원사가 앞으로 나섰다.

“저 존재가 바로 망각의 왕이다.”

아린이 물었다.

“왕이라고요?”

정원사는 슬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저런 존재는 아니었단다.”

바람이 멈추었다.

종들도 잠시 울음을 멈추었다.

“아주 오래전 그는 별을 기록하던 아이였다.”

루시아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별을 기록하던 아이.

정원사는 계속 말했다.

“밤마다 별들의 이름을 적고,

꽃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며,

세상이 잊지 않도록 기억을 보관하던 아이였지.”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점점 기억하는 일을 멈추었다.

꿈을 잊었고,

약속을 잊었고,

별의 이름을 잊었다.

아이의 기록도 잊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아이의 이름마저 잊혀지고 말았다.

정원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외로움이 저 존재를 만들었다.”

그 순간.

망각의 왕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검은 안개 속에서 두 개의 눈이 나타났다.

깊고 슬픈 눈이었다.

“기억…”

낮고 오래된 목소리가 울렸다.

“왜 기억해야 하지?”

하늘이 흔들렸다.

종들이 다시 울기 시작했다.

“결국 모두 잊혀질 텐데.”

루시아는 가슴이 아팠다.

그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꽃은 시들고,

사람은 늙고,

시간은 모든 것을 멀어지게 만든다.

망각의 왕은 손을 들어 올렸다.

순간 수많은 종들이 하나둘 꺼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모습도 희미해졌다.

별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때.

별빛 씨앗이 루시아의 손안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반짝!

반짝!

반짝!

그리고 첫 번째 별꽃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루시아.”

“네.”

“별을 심으렴.”

루시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문득 아리아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세레나를 품어 주었던 여왕.

첫 번째 별꽃을 깨워 주었던 마음.

그들은 싸워서 세상을 구한 것이 아니었다.

기억하고,

이해하고,

사랑했을 뿐이었다.

루시아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별빛 씨앗을 땅에 심었다.

모두가 놀랐다.

아린도.

정원사도.

망각의 왕도.

씨앗은 천천히 흙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잠시 후.

작은 빛 하나가 땅에서 피어올랐다.

작은 새싹.

별빛으로 이루어진 새싹이었다.

망각의 왕은 처음 보는 듯 그것을 바라보았다.

새싹은 자라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리고 작은 꽃 한 송이를 피웠다.

꽃은 특별했다.

꽃잎마다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잊혀진 이름들.

사라진 꿈들.

잊고 지냈던 약속들.

그 꽃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순간.

언덕 위의 종 하나가 환하게 빛났다.

딩—

그리고 작은 소녀 하나가 외쳤다.

“내 이름이 기억났어!”

또 다른 종이 빛났다.

딩—

“나도!”

딩—

“나도!”

딩—

“나도!”

수천 개의 종들이 하나둘 빛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이름이 돌아오고 있었다.

별들도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망각의 왕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서 검은 안개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기억날 수 있을까?”

루시아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당연하지.”

망각의 왕의 눈에 처음으로 눈물이 맺혔다.

그 순간.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오래된 빛 하나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수천 년 동안 잊혀져 있던 그의 진짜 이름.

그 이름이 이제 곧 돌아오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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