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의 여왕
아주 먼 옛날, 높은 설산과 깊은 호수 사이에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작은 왕국이 있었다.
그 왕국의 이름은 아르비아였다.
아르비아에는 신기한 전설이 하나 전해졌다.
세상에 슬픔이 많아지고 사람들의 마음이 메말라 갈 때면 호수 깊은 곳에서 한 여왕이 깨어난다는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호수의 여왕이라 불렀다.
그녀는 왕관 대신 바람을 쓰고, 보석 대신 별빛을 달고 다녔다.
그리고 누구보다 사람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어느 해 겨울이었다.
유난히 길고 추운 겨울이 찾아왔다.
꽃은 피지 않았고 새들은 노래를 잊었다.
아이들은 웃음을 잃어 갔고 어른들은 걱정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마을에는 희망이라는 단어마저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설산 위로 새벽빛이 번지기 시작하던 어느 아침, 호수에서 은빛 안개가 피어올랐다.
잔잔하던 물결이 조용히 흔들리더니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꽃처럼 하얀 옷을 입고 청록빛 보석을 두른 여인이었다.
그녀의 걸음이 닿는 곳마다 얼음은 녹아내렸고, 차갑던 바람은 따뜻한 숨결로 변했다.
여왕은 말없이 산길을 걸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시들어 있던 들꽃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잠들어 있던 나무들은 연둣빛 새순을 틔웠고, 숲은 오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생기를 되찾았다.
하지만 여왕이 진정으로 찾아가고 싶었던 곳은 따로 있었다.
왕국 끝자락에 작은 오두막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는 루아라는 소녀가 홀로 살고 있었다.
루아는 한때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꽃을 보면 웃었고 새를 보면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사랑하던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떠난 뒤부터는 웃음을 잃어버렸다.
창밖에 꽃이 피어도 보지 않았고, 새가 노래해도 귀를 막았다.
마음속에 긴 겨울이 찾아온 것이다.
여왕은 조용히 루아를 찾아갔다.
“왜 울고 있니?”
루아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아무도 제 마음을 모르니까요.”
여왕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그럴까?”
그리고 소녀의 손을 잡고 호수로 데려갔다.
호수는 거울처럼 맑았다.
“저 안을 들여다보렴.”
루아는 조심스럽게 물속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햇살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할머니였다.
“할머니!”
루아가 외쳤다.
하지만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따뜻하게 웃어 주었다.
그 순간 여왕이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란다.”
“정말요?”
“그래. 기억 속에, 마음속에, 그리고 네가 웃는 순간마다 함께 살아 있는 거야.”
루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이번 눈물은 슬픔이 아니었다.
그리움이 사랑으로 변하는 눈물이었다.
그날 이후 루아는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꽃을 돌보고 새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들도 하나둘 웃음을 되찾기 시작했다.
왕국에는 다시 봄이 찾아왔다.
시간이 흘러 여왕이 떠날 날이 되었다.
사람들은 호숫가에 모여 아쉬운 마음으로 물었다.
“여왕님, 또 오실 건가요?”
여왕은 설산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누군가 희망을 잃어버릴 때.”
“누군가 사랑을 잊어버릴 때.”
“그리고 누군가 자기 마음의 소리를 듣지 못할 때.”
여왕은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마다 나는 바람이 되어 돌아올 거란다.”
그 말을 끝으로 여왕의 모습은 은빛 안개 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하지만 지금도 사람들은 믿고 있다.
호숫가에 서서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설산을 넘어오는 바람 속에서,
별빛이 물결 위에 내려앉는 밤이면,
어딘가에서 호수의 여왕이 미소 짓고 있다고.
그리고 그 미소는 오늘도 누군가의 긴 겨울을 끝내고 새로운 봄을 열어 주고 있다고.
그래서 아르비아 왕국에는 지금도 이런 말이 전해진다.
“가장 깊은 호수는 산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그리고 그 호수에 사랑과 희망을 비추는 사람은 누구나 작은 여왕이 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