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희 시사칼럼■
철문은 안에서 열린다
― 장동혁 사태가 드러낸 국민의힘 내부 엘리트의 자기파괴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밖에서 부순 것이 아니다. 안에서, 누군가 손잡이를 돌리고 있다.
국민의힘이 6·3 지방선거에서 받아 든 성적표는 초라했다. 광역단체장 16곳 중 4곳. 서울과 대구·경북·경남. 숫자로만 보면 참패다. 그러나 패배는 숫자로 설명되지만, 붕괴는 구조로 설명된다. 지금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패배의 숫자가 아니다. 그 패배라는 말 뒤에 무엇이 숨겨지고 있는가다.
선거 당일 투표용지가 부족했다. 일부 투표소에서는 투표가 멈췄다. 유권자는 투표소에 갔다가 번호표를 들고 기다려야 했다. 전북교육감 선거에서는 1,104명의 투표 결과가 전산에서 누락됐다. 선관위 시스템은 이미 2023년 국정원과 한국인터넷진흥원 합동 보안점검에서 100점 만점에 31.5점이라는 참담한 점수를 받았다. 일부 시스템 비밀번호가 ‘12345’였다는 사실까지 드러났다.
이것을 단순한 부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부실은 우연히 발생한 행정착오일 때 가능한 말이다. 그러나 반복되고, 구조적이고, 선거 결과의 신뢰를 근본부터 흔드는 선거관리 실패를 두고도 부실이라는 한 단어로 덮으라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해명이 아니라 회피다. 이것은 단순 부실로 덮을 수 없는 의혹이다. 국민주권이 흔들린 사건이고, 자유민주주의의 심장을 겨눈 사안이다. 그렇다면 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끝까지 밝혀야 한다.
그런데 더 섬뜩한 장면은 그다음이다.
국민의힘 내부 일부는 선관위를 향해 먼저 묻지 않았다. 왜 투표용지가 모자랐는가. 왜 일부 투표소에서 투표가 멈췄는가. 왜 국민이 번호표를 들고 기다려야 했는가. 왜 전산에서 1,104명의 표가 사라졌는가. 왜 선관위는 국민이 납득할 만큼 모든 것을 열어 보이지 않는가.
민주당을 향해서도 먼저 맞서지 않았다. 이 사태로 누가 이득을 보았는지, 왜 민주당은 검증보다 조롱과 프레임을 앞세우는지, 왜 선관위의 책임을 끝까지 따지지 않는지 묻지 않았다.
그들이 가장 먼저 겨눈 것은 장동혁이었다.
패배의 책임을 지라며, 사퇴하라며, 지도부 수명이 다했다며, 당대표를 향해 칼을 들었다. 마치 국민의힘의 모든 패배가 장동혁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처럼. 투표용지 부족도, 전산 누락도, 선관위 보안 취약성도 모두 장동혁의 책임인 것처럼.
이상하지 않은가.
선관위와 민주당을 향해야 할 칼이 장동혁을 향한다. 의혹을 따져 묻는 당대표를 보호하기보다, 그를 ‘음모론’의 상징으로 몰아세운다. 민주당이 쓰는 언어를 국민의힘 내부 일부가 먼저 받아 적는다.
이 장면이야말로 지금 국민의힘의 병리다.
음모론이라는 무기
장동혁 대표는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두고, 이를 어떻게 부르든 핵심은 참정권 박탈이라고 했다. 부정선거라고 외치는 청년들을 음모론 프레임에 가둬서는 안 된다고 했다. 부실선거라 부르고 싶으면 그렇게 부르면 된다. 그러나 그 분노를 음모론으로 몰아 입을 막지는 말라는 뜻이었다.
이 말이 그렇게 위험한가.
투표용지가 부족했다. 투표가 중단됐다. 유권자가 현장에서 기다렸다. 선거관리기관이 선거 당일 국민의 투표권 행사를 온전히 보장하지 못했다. 이것은 정치적 상상도, 괴담도 아니다. 실제 벌어진 일이다. 그렇다면 유권자가 묻는 것은 당연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누가 책임지는가.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무엇을 고칠 것인가.
그런데 당내 일부는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선관위를 향해 “증명하라”고 요구하기보다, 자기 당대표를 향해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참정권 침해 가능성을 따져 묻는 청년들의 분노를 보호하기보다, ‘부정선거 음모론’이라는 단어로 먼저 선을 그었다. 한 의원은 장동혁이 음모론을 이용해 당권을 유지한다고까지 했다.
음모론이라는 말은 편리하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검증하지 않아도 된다. 질문하는 사람의 지성과 인격을 한꺼번에 깎아내릴 수 있다. “그건 음모론”이라는 한마디면, 시민은 광신도가 되고, 분노는 병리가 되고, 검증 요구는 민주주의의 절차가 아니라 치워야 할 오염물이 된다.
그러나 이 말이 가장 위험해지는 순간은, 그것이 권력을 향한 질문을 막는 도구가 될 때다. 투표용지가 왜 부족했는지, 전산 입력 오류는 어떻게 발생했는지, 선관위 시스템은 국민이 신뢰할 만큼 안전한지 — 이 질문들에 하나씩 답하는 대신 ‘음모론’이라는 단어 하나로 덮는다면, 그것은 진실을 지키는 언어가 아니다. 진실을 열어보지 않기 위한 방패다.
더 심각한 것은 이 방패를 보수 내부가 먼저 들고 나온다는 점이다.
보수란 무엇인가. 법치와 절차를 중시하는 세력이다. 국가기관의 자의성을 경계하는 세력이다. 권력이 “믿어라”고 말할 때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세력이다. 특히 선거라는 제도 앞에서는 누구보다 엄격해야 할 세력이다.
그런데 지금 일부 보수 엘리트들은 거꾸로 간다. 선거관리기관에는 관대하고, 그 실패를 따져 묻는 자기 유권자에게는 가혹하다. 국가기관의 부실보다 시민의 질문을 더 위험하게 본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보다 ‘부정선거’라는 단어를 더 무서워한다.
검증을 두려워하는 보수는, 보수가 아니다.
‘부실’이라는 말 뒤에 숨은 것
이제 그 ‘부실’이라는 말 뒤에 무엇이 있는지, 드러난 사실을 하나씩 놓아보자. 이것은 추측이 아니라, 선관위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와 보도로 확인된 사실들이다.
첫째, 중앙선관위는 지난해 12월 본투표 용지 인쇄 하한을 60%에서 50%로 낮췄다. 그런데 이 중대한 결정을 위원회 의결도, 회의 한 번도 거치지 않고 사무총장 전결로 처리했다. 국민의 투표권이 걸린 변경을 간부 한 사람의 서명으로 끝낸 것이다.
둘째, 그 결과 전국 1만4288개 투표소 가운데 1371곳에서 인쇄량이 유권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열 곳 중 한 곳꼴이다. 송파구는 146개 투표소 중 129곳이 하한선조차 지키지 못했다. 국민이 번호표를 들고 기다리거나 발길을 돌려야 했던 것은 그 직접적 결과였다.
셋째, 사고 후 대응은 더 참담했다. 송파의 한 투표소에서 오후 2시 20분 투표가 멈췄는데, 추가 용지 배송 지시는 2시간 50분이 지난 5시 10분에야 내려왔다. 국민이 투표소 앞에 줄을 선 그 세 시간 동안, 선거관리기관은 무엇을 했는가.
넷째, 책임자의 태도다. 노태악 당시 선관위원장은 축소 지침을 “사전에 보고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지침이 선거 6개월 전 이미 그에게 보고됐던 것으로 드러나자, 그는 말을 바꿨다. 책임의 정점에 선 사람의 해명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다섯째, 가장 서늘한 대목. 문제가 된 송파의 투표용지 보관 상자는, 법원이 증거보전을 명령하기 다섯 시간 30분 전에 폐기물 수거업체에 의해 사라졌다.
이것을 하나하나 떼어 보면 ‘실수’라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회의 없는 전결, 절반도 못 채운 인쇄, 세 시간의 방치, 번복된 해명, 그리고 사라진 상자 — 이 다섯을 한자리에 놓고도 ‘단순 부실’이라는 한 단어로 덮으라는 것은 국민에게 눈을 감으라는 요구다.
부실이라는 말은 때로 권력의 가장 안전한 피난처가 된다. 실수였다고 하면 책임은 흐려진다. 착오였다고 하면 의도는 사라진다. 관리 미흡이었다고 하면 구조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방향의 오류가 반복되고, 그 책임을 묻는 목소리만 ‘음모론’으로 몰린다면, 국민은 더 이상 부실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묻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단순한 무능이었는가, 아니면 의도가 있었는가. 그 답은 국민이 정하는 것도, 선관위가 덮는 것도 아니다. 수사가 밝혀야 한다. 떳떳하다면 원자료를 열면 된다. 누가 결정했는지, 어떤 기준으로 줄였는지, 어느 투표소에 얼마를 배정했는지, 추가 용지는 언제 누가 보냈는지, 전산 누락은 어떤 권한자에 의해 발생했는지 — 열어 보이면 끝날 일이다. 열지 못한다면, 국민은 그 거부를 또 하나의 의혹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사안은 이미 어느 한 진영의 것이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조차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중대한 사안으로 규정하고, 검찰과 경찰이 참여하는 합동수사본부 구성과 국정조사를 언급했다. 진보 정부의 대통령조차 철저한 진상규명을 말한 사안을,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이 먼저 ‘음모론’으로 축소한다면 — 이것은 진보보다 검증에 소극적인 보수라는 자기모순이다.
이재명 대통령조차 사태의 심각성을 인정하는데, 국민의힘 내부 일부는 왜 장동혁을 먼저 공격하는가. 선관위와 민주당을 향해야 할 질문이 왜 국민의힘 당대표를 향한 사퇴 압박으로 바뀌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지금 국민의힘이 피하고 있는 질문이다.
‘민주당 2중대’라는 말의 의미
‘민주당 2중대’라는 말은 거칠다. 그러나 그 말이 왜 나오는지 보아야 한다.
민주당과 같은 주장을 한다고 해서 모두 2중대는 아니다. 정치에는 사안별 일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마다 민주당이 만든 프레임을 보수 내부에서 먼저 받아 적고, 민주당이 공격하고 싶은 대상을 보수 내부에서 먼저 공격하며, 민주당이 불편해하는 보수 유권자의 목소리를 보수 내부에서 먼저 눌러버린다면, 그것은 의도가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민주당의 일을 대신하는 것이 된다.
선관위 의혹 앞에서 검증보다 당대표 사퇴를 먼저 외치는 자, 민주당의 프레임을 받아 장동혁을 치는 자, 보수 유권자의 분노를 음모론으로 모는 자, 참정권을 빼앗겼다고 외치는 청년들의 입을 막는 자 — 그들이 어떤 마음이었든, 그 행동의 결과는 하나다. 민주당의 부담을 대신 덜어주는 것이다.
보수의 이름으로 보수를 공격하고, 중도확장의 이름으로 보수 유권자를 추방하며, 합리의 이름으로 정당한 의혹을 덮는 정치. 그것이 지금 국민의힘 안에서 벌어지는 가장 위험한 장면이다.
내가 ‘2중대’라는 거친 말 대신 ‘결과’라고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가 누구와 손잡았다는 음모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행동이 낳는 정치적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의도보다 정직하다.
엔추파도스는 누구인가
최근 보수 내부에서는 ‘엔추파도스’, 곧 겉으로는 같은 편처럼 보이지만 안에서 문을 열어주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 떠돌았다.
그렇다면 지금 이 단어를 누구에게 붙여야 하는가.
참정권 침해 문제를 제기하는 당대표가 엔추파도스인가. 선거관리 부실을 검증하자는 청년들이 엔추파도스인가. 투표용지가 부족했던 현실을 두고 끝까지 따져 묻자는 보수 유권자가 엔추파도스인가.
아니다.
정말 내부를 비우는 것은 민주당이 던진 프레임을 국민의힘 안에서 먼저 받아 적는 정치다. 당대표를 흔들기 위해 선거 신뢰 문제를 축소하는 정치다. 참정권을 말하는 유권자를 ‘부담스러운 강성층’으로 밀어내는 정치다. 외연확장이라는 이름으로 기존 지지층을 잘라내고, 중도라는 이름으로 자기 유권자의 분노를 부끄러워하는 정치다.
보수를 무너뜨리는 것은 반드시 바깥의 공격만이 아니다. 때로는 안에서 문을 열어주는 손이 더 위험하다. 밖에서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던 철문은, 안쪽의 누군가가 손잡이를 돌리는 순간 열린다.
지금 국민의힘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바로 그 장면이다.
중도확장이라는 이름의 유권자 추방
당내 일부는 늘 같은 말을 한다. 중도확장. 외연확장. 합리적 보수. 수도권 보수. 청년 보수.
말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그 말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을 보라. 중도확장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먼저 밀려나는 사람은 언제나 기존 보수 유권자다. 외연확장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먼저 조롱당하는 사람은 선거 때마다 표를 준 사람들이다. 합리적 보수라는 이름으로 가장 먼저 배제되는 사람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거리로 나온 시민들이다.
정당의 확장은 자기 지지층 위에 새로운 지지층을 더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의힘 일부 엘리트가 말하는 확장은 기존 지지층을 부끄러워하고, 그들을 잘라내고, 민주당이 용인할 수 있는 만큼만 보수가 되자는 식이다. 그들은 이것을 중도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중도가 아니다. 그것은 유권자 추방이다.
진짜 중도확장은 의혹을 덮는 데서 오지 않는다. 선거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면 보수든 진보든 납득할 때까지 열어 보자는 태도에서 온다. 선관위가 잘못했으면 책임을 묻고, 제도에 허점이 있으면 고치고, 의혹이 있으면 검증하는 것. 이것이 중도이고, 상식이고, 법치다.
그렇다면 왜 어떤 이들은 이것을 두려워하는가. 답은 하나다. 그들은 보수 유권자를 정치의 주체로 보지 않는다. 관리할 대상, 달랠 군중, 선거 때만 필요한 표, 이미지가 나빠지면 잘라낼 부담으로 본다. 그러니 유권자가 질문하면 불편하고, 분노하면 두렵고, 거리로 나오면 창피하다. 자신들이 짜놓은 여의도 문법 밖에서 움직이면 극우라고 부른다.
그러나 유권자의 질문을 부끄러워하는 정당은, 유권자의 표를 받을 자격이 없다.
장동혁을 겨누는 칼의 방향
장동혁을 비판할 수 있다. 당대표도 비판받아야 한다. 선거 패배의 책임도 물을 수 있다. 정치인은 누구나 평가의 대상이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는 공격은 단순한 책임론이 아니다. 칼의 방향이 이상하다.
국민의힘이 지금 가장 먼저 겨눠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낳은 선거관리 시스템인가. 선거 불신을 조롱하며 보수 유권자를 극우로 몰아가는 외부 프레임인가. 아니면 그 프레임에 맞서 유권자의 분노를 받아 안은 장동혁인가.
정치에서 칼의 방향은 중요하다. 칼은 늘 명분을 따라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일부 국민의힘 인사들의 칼은 이상한 곳을 향한다. 민주당을 향해야 할 칼이 장동혁을 향한다. 선관위를 향해야 할 칼이 청년들을 향한다. 참정권 침해 가능성을 겨눠야 할 칼이 ‘부정선거라고 말할 자유’를 향한다.
이쯤 되면 물어야 한다.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보수인가. 아니면 보수 내부에서 자신들이 차지한 자리인가.
심판은 이미 시작됐다
흥미로운 것은, 이 검증의 목소리를 누른 자리에서 민심이 어떻게 움직였는가다.
선거 직후 여론은 흔들렸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격차는 줄었고, 일부 조사에서는 국민의힘이 민주당을 앞섰다.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운영 평가도 데드크로스 논란에 들어갔다. 원인을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선관위 사태와 보수 유권자의 재결집이 중요한 변수로 거론됐다.
무엇을 말하는가. 의혹을 덮자는 것이 민심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검증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음모론’으로 누른 그 자리에서, 오히려 유권자는 더 크게 반응했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표를 달라고 할 때는 주권자라 부르면서, 선거가 끝난 뒤 질문하면 음모론자라 부르는 정당을 오래 참아주지 않는다.
장동혁을 지키자는 말은 한 정치인을 우상화하자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보수 유권자가 질문할 권리를 지키자는 뜻이다. 의혹을 검증하자는 목소리를 ‘음모론’으로 몰아 입막음하지 말자는 뜻이다. 민주당이 만든 프레임을 보수 내부가 대신 집행하게 두지 말자는 뜻이다.
철문은 안에서 열린다
한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는 바깥의 적만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더 위험한 것은 안에서 문을 열어주는 손이다. 밖에서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던 철문은, 안쪽의 누군가가 손잡이를 돌리는 순간 열린다.
장동혁을 흔드는 이들은 착각하고 있다. 그들이 겨누는 것은 한 사람의 대표가 아니다. 그들이 겨누는 것은 투표용지 부족 앞에서 분노한 유권자의 질문이다. 참정권 박탈 앞에서 침묵하지 않겠다는 시민의 본능이다. 선거의 신뢰를 끝까지 확인하겠다는 자유민주주의의 마지막 방어선이다.
보수는 바깥에서만 무너지지 않는다.
자기 유권자를 버릴 때 무너진다. 자기 지지층의 분노를 부끄러워할 때 무너진다. 선거의 신뢰보다 당의 이미지를 먼저 걱정할 때 무너진다. 검증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권력보다 먼저 ‘음모론’이라 부를 때 무너진다. 민주당이 던진 언어를 자기 당 안에서 먼저 반복할 때 무너진다.
국민의힘은 지금 선택해야 한다.
선거의 신뢰를 끝까지 열어젖히는 자유민주주의 정당으로 다시 설 것인가. 아니면 자기 유권자를 부끄러워하며, 조용하고 안전하고 관리 가능한 보수로 쪼그라들 것인가.
철문은 늘 안에서 열린다.
지금 그 문고리를 잡고 있는 손은 누구의 손인가.
역사는 그 손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국민은 그 손을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 권경희 메가포커스 발행인·대표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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