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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신명기 설교

신 23:7-11

작성자doulosdei|작성시간26.06.10|조회수26 목록 댓글 0

132회 설교: 23장 세 번째 설교

1556122일 수요일

 

23:7-11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그들의 삼 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느니라 네가 적군을 치러 출진할 때에 모든 악한 일을 스스로 삼갈지니 너희 중에 누가 밤에 몽설함으로 부정하거든 진영 밖으로 나가고 진영 안에 들어오지 아니하다가 해 질 때에 목욕하고 해 진 후에 진에 들어올 것이요

 

 

 

우리는 모세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바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이미 선포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세상의 다른 모든 민족으로부터 구별하셨으므로, 그 특권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저 주시는 은총으로 선택하신 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그분의 값없는 선하심에 얼마나 깊이 매여 있는지를 더 잘 이해하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앞서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들 개인의 어떠한 가치나 고결함 때문에 그들을 이처럼 온 세상보다 앞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자신에게로 모으셨을 때 비로소 양자로 입양되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불신자들의 더러움과 섞이지 말고, 모든 거룩함 가운데 머물러야 한다는 권고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토록 자신에게 봉헌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자들과 짝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했는데, 그것은 자신들을 감염시켜 하나님의 은혜를 왜곡하는 일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음을 확신하는 것은, 우리가 어둠 속의 소경처럼 걷지 않고 빛을 받은 자들로서, 곧 우리의 의로운 태양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자들로서 걷게 하려 함입니다. 그러므로 요컨대 모세가 이 본문에서 다루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에게 부여된 그 은혜의 소유권을 굳게 지켜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누군가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의 상태를 보았다면, 여기서 정해진 금령을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아아, 가련하게도 그들은 이미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해 왔고, 자신들의 소유라고는 땅 한 평도 없었으며, 모든 곳에서 쫓겨난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마치 그들이 대단한 귀족이거나 높은 지위에 있는 것처럼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베푼 은혜를 소중히 여기라. 모압 사람들은 너희의 명백한 원수이니 받아들이지 말되, 에돔 사람과 애굽 사람은 3대째에 받아들여라.” 그렇습니다. 하지만 에돔 사람들이 이처럼 방황하고 떠도는 백성에게 들어와서 얻을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또한 에돔 사람들은 이미 자신들의 기업을 평안히 차지하고 있었고 아무도 그들을 괴롭히지 않았기에, 이 말씀은 언뜻 불필요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 그리고 세상의 온갖 감미로운 즐거움을 다 가진 것보다, 그를 자신의 교회로 부르실 때 베푸시는 그 호의를 더 가치 있게 여기신다는 점을 주목합시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왜 유대인들에게 그가 저주하고 거부한 자들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명하셨는지 그 이유를 보게 됩니다. 여기서 문제는 모압 사람이나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연합함으로써 세상적인 유익 면에서 더 큰 이득을 얻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교회의 지체가 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인격 안에서 맺으신 그 양자 됨에 동참하게 된다면, 구원의 기업에 이르는 유익을 얻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 고려해야 할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지금 세상으로부터 멸시를 당하고, 참으로 저 불신자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교만함에 가득 차 세상적으로 승승장구하며 우리를 발등상으로 삼아 짓밟는 것조차 아까워할 정도로 우리를 비웃을지라도, 우리가 스스로 이처럼 비천함에 처해 있음을 볼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로운 눈길을 던지시고,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시는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베푸셨으며, 오늘날 우리가 그분의 집안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압시다. 진실로 이것은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세상에서 가치 있게 여기는 그 모든 것보다 뛰어난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바, 곧 우리가 세상의 그 모든 거대한 왕국들보다 하나님 앞에서 더 귀하게 여김을 받는다는 사실은 언제나 변치 않을 것입니다(43:3). 그러니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삼아 자신의 집으로 모아주신 하나님의 그 호의에 만족하는 법을 배웁시다. 다른 모든 것이 부족할지라도 인내하며, 세상이 우리를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너무 상심하거나 슬퍼하지 맙시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가장 비참하고, 겉보기에 우리보다 더 나쁜 처지와 조건에 있는 사람이 없는 듯 보일지라도,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아버지가 되어주시고, 우리를 입양하셔서 하늘의 기업으로 부르신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충분히 기쁜 일이 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에돔 사람들에 관해 하신 말씀을 봅시다. 하나님의 뜻은 그들이 원한다면 3대째에 그들을 받아들여 참으로 교회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덧붙이시기를,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형제, 즉 친족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에돔 사람들의 조상인 에서가 이삭의 맏아들이었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저 주시는 선하심으로 그 순서를 바꾸지 않으셨더라면, 본래 그가 야곱보다 앞서야 했을 것입니다. 모압 사람들 또한 롯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자손의 친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그들을 끊어내셨는지 보았습니다. ,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이 기업에 이르는 것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혈통으로는 가까워야 했던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스스로를 완전히 멀어지게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베푸신 자비로운 호의를 방해했으며, 적어도 그것이 훼방 받지 않은 것은 그들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발람을 매수했고, 하나님의 복을 무효로 만들며 그분의 약속을 폐지하려 애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에게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봅니다.

그러나 에돔 사람들에게는 그와 같은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여전히 기억하시며, 그분의 호의를 그의 온 가문에까지 넓히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에서가 잠시 그 복에서 제외되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가 다른 이방 민족들처럼 그 복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이 두 민족의 상태를 각각 고려해 본다면, 선지자 말라기가 말한 바가 진실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1: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특권을 고려하지 않는 배은망덕함을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보인 사랑을 잊었느냐? 어떤 면에서 그러하냐?”라고 하십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받은 바를 발로 짓밟은 악한 자들로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불러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에서가 야곱의 형제가 아니냐? 그러나 내가 너희 조상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노라. 나의 뜻은 그가 광야와 산지 속에 갇히는 것이었으나, 너희에게는 이 모든 땅을 기업으로 주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에서와 비교하여 야곱의 가문에 베푸신 선하심을 얼마나 드높이시는지 보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세는 에돔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복종하고자 한다면, 그들이 3대째에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참으로 그 안에 온전히 통합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할례받기를 자처하는 자는 항상 받아들여졌으나, 3대째가 되기 전까지는 백성의 몸(body)으로 온전히 간주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에서의 자손들이 야곱의 가문과 동등하게 여겨진 것이 아님을 주의 깊게 살핍시다. 다만 그들 중 누구라도 자신의 친족 관계를 버린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섬기도록 구별하신 이 복된 가문의 수에 포함되어 그들 가운데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실 때, 그것이 아브라함의 온 가문에게 주어졌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구원의 약속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집안 전체와 거기서 나올 자손들에 대하여 특별한 배려와 호의를 가지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17:20). 참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명하신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할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압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호의의 표징입니다. 이제 이 표징이 이스마엘에게 주어졌으니, 그가 아무런 표징도 갖지 못한 채 완전히 더러워진 이방인들(Paynims)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함은 마땅한 이치입니다. 여기서 제가 특별한 표징이 없다고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해를 비추시고 온 세상을 먹이심으로써 모든 이에게 아버지가 되심을 증명하시기 때문입니다(5:45). 그러나 여기서의 문제는 양자됨의 보증(warrant of adoption)’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그 보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 집의 상속자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보십시오, 그는 끊어집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 비유를 인용하여, 하나님의 교회 안에 부름 받은 자들이 많을지라도, 결국에는 그 큰 유익을 누릴 자격이 없어 다시 쫓겨나고 추방당하는 자들이 있음을 보여줍니다(21:10; 4:30). 에서의 경우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이삭의 아들이었으며, 야곱과 쌍둥이 형제였습니다(25:24). 그러므로 두 민족이 완전히 같은 조건과 상태에 있어야 할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에서가 형이었기에 마땅히 동생보다 앞서야 했으나, 그는 자신의 권리를 박탈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것이 순전히 그분의 호의에 의한 것임을 깨닫게 하시려고 자연의 질서를 바꾸셨습니다. 성경이 보여주듯이, 우리가 하나님보다 앞서갔다거나 무언가 공로를 세웠다거나, 혹은 그분께서 우리를 다른 이들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실 만한 근거가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작고 비천하며 마치 때를 못 맞추어 태어난 자들과 같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심으로써 자신의 선하심을 더욱 드높이십니다.

여러분은 에서가 아버지의 집에서 어떻게 쫓겨났는지 봅니다. 그가 이 세상의 모든 편의로부터 멀어졌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부유하고 넉넉했습니다. 참으로 그는 동생 야곱보다 백배는 더 행복해 보였습니다. 야곱이 그 땅에서 여전히 나그네로 머무는 동안, 에서는 안락한 거처를 얻었고 그 자손들은 평안히 정착했습니다. 참으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에돔 땅에서 통치권과 지배권을 가졌습니다. 반면에 불쌍한 야곱은 먼 타국에서 도망자 신세였습니다. 야곱이 돌아왔을 때, 그는 에서 앞에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했으니, 그의 생명은 마치 늑대의 아가리에 물린 가련한 양처럼 에서의 손에 달린 듯 위태로워 보였습니다(33:4).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는 여기저기 방황하며 살 공간조차 거의 없었고, 남의 눈치를 보아야 했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시는 것조차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고, 가진 모든 것에 대해 시비와 고초를 겪었습니다. 결국 기근 때문에 고향을 떠나 애굽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에돔 사람들은 그렇게 쇠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자신을 위해 택하실 때 베푸시는 그 특별한 호의를 나타내고자 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선하심이 아브라함의 온 가문에 미쳤음을 봅니다. 비록 육신을 따른 자녀들이 교회의 일원으로 인정되거나 공인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들 가운데에는 항상 은혜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터키인이나 다른 이방인들보다 가톨릭교도들에게 훨씬 더 가까운 이웃입니다. 그 이유는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고 모든 종교적 가르침을 타락시켰으며, 보기 끔찍할 정도로 수많은 오용과 부패에 얽혀 있을지라도,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어떤 발자취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의 집과 우리(fold)에 두셨음을 보여주는 가시적 표징인 세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가톨릭교도들이 마치 에돔 사람들과 같음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먼저 부름 받았고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파된 구원에 참여했어야 마땅한 자들이며, 세례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그 표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예배를 왜곡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에게 임한 자비로 부름 받게 하는 그 믿음을 통째로 없애버린 것과 다름없기에, 그들을 에돔 사람처럼 여기는 것은 지당한 일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맺고 있는 형제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능한 한 그들을 다시 데려와 우리가 다시 결합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어떻게 다시 결합된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가톨릭교도들과 타협하기 위해 하나님의 순전한 진리로부터 돌아서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와, 우리 모두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순종함으로써 화해하고, 우리를 자신의 날개 아래 보호하실 유일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게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가톨릭교도들이 이처럼 나아와 자신을 바로잡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우리 사이에 세우신 형제 됨을 생각하여 모든 온유함으로 그들을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그렇게 할 뿐만 아니라,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찾아 구원해야 합니다.

애굽 사람들에 관해서는, 그들 또한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너는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 사람들이 휘두른 잔인한 폭정으로 인해 가혹한 종살이로 억압받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베푼 유익 또한 인정되기를 원하십니다. 애굽 사람들이 비록 이스라엘 자손들을 그토록 불의하게 억압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근의 때에 그곳으로 피신하여 도움을 받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가 잊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애굽의 포로 생활과 앗수르의 포로 생활을 비교하며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52:4). “참으로 내 백성이 기근을 피하여 애굽에 머물러 갔고, 필연적인 이유가 그들을 그리로 몰아넣었도다. 애굽 사람들이 그들을 억압한 것은 분명 그들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이나, 적어도 그들에게는 이 사람들이 우리에게 스스로 몸을 맡겼다고 말할 법한 구실이라도 있었느니라. 그러나 앗수르 사람들에 관해서라면, 그들은 제 발로 와서 내 백성을 괴롭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당한 부당한 대우와 그들이 견뎌야 했던 수많은 해악에 대해 정당하게 불평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애굽 사람들에게 빚진 것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가 그들의 나라에서 보호를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누구에게서든 받은 선행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경고를 받습니다. 그리하여 설령 나중에 그 사람에 의해 해를 입거나 심하게 억압받는 일이 생길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인내하며 항상 마음속에 이렇게 새겨야 합니다. “좋다, 비록 이 모든 일이 있을지라도 나는 여전히 그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노라.” 진실로 나는 그런 자들에 대해 슬퍼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수단으로 삼아 우리를 도우시고 구제하셨다면, 그 사실이 우리 안에서 항상 우선되어야 하며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그들의 친구로 남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 본문에서 우리가 마음 깊이 새겨야 할 훌륭한 교훈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3대째에 회중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가증한 것들로 자신을 더럽히거나 그들과 조금이라도 섞이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애굽 사람들이 처해 있던 절망적인 상태에 그대로 머물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분께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도록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 우리 주님께서 애굽과 에돔 백성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참된 신앙으로 나아오는 데 훨씬 더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문이 열렸을 때, 하나님께서 제안하신 유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더욱 엄중한 정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법의 참된 취지이자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신의 백성이 종교를 혼합하고 타락시켜 애굽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각자가 제멋대로 기워 붙인 조각들로 종교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자신들의 모든 부패함을 버린다면, 나무에 접붙여진 가지처럼 하나님의 교회에 연합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시편 45편에서 솔로몬의 아내에 대해 언급된 내용을 봅니다. 그녀가 비록 왕의 딸이었을지라도, 성경은 그녀에게 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그 본문을 통해 일종의 일반적인 규칙을 주셨음을 압니다. ,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낯선 자였고, 구원의 교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모든 자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친족과 출신, 그리고 이전의 모든 삶의 방식을 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뒤에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름과 인격 안에서 우리와 혼인하게 하신 분께 온전히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영적인 혼인을 맺으시는 목적은 우리가 그분의 몸의 지체가 되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에돔 사람과 애굽 사람에게 교회의 문을 열어주신 것은, 그들이 오염된 것들을 들여와 하나님의 예배를 타락시키거나 혼합물을 만들게 하려 하심이 아님을 명심합시다. 오히려 에돔 사람과 애굽 사람이 나아와 하나님의 법에 모든 점을 일치시키고, 그 안에 담긴 순전한 교리에 동의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토록 자비로우셔서 우리를 자신의 교회로 삼아주셨음을 보건대, 우리가 그분의 날개 아래 머물며 이쪽저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배웁시다.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길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고, 우리가 받은 순전한 교리를 굳게 붙잡읍시다. 그리고 교화되어 돌아오고자 하는 자들을 영접할 준비를 합시다.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들뿐만 아니라, 멀리 있는 우리의 친족들에게도 팔을 벌려 그들을 얻고 이기려 노력합시다. 다만 언제나 한 가지 조건을 잊지 말아야 하니, 곧 그들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우리와 함께 하나님께 다시 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돔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 모두에게 허락하셨던 이 호의와 그들에게 베푸셨던 유익은, 나중에 그들 자신의 고의적인 악의로 말미암아 다시 거두어지게 되었습니다. 시편에서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니라고 기록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137). 여러분은 성령께서 에돔 사람들에게 어떻게 새로운 저주를 선포하시는지 봅니다. 그들은 야곱의 자손들과 형제였으며, 아시다시피 교회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났음에도 그러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압 사람들을 배려하셔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과 전쟁을 벌이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그들 사이에 있었던 옛 형제 됨과 친족 관계를 기억하게 하셨음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압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거부하고, 거짓 선지자를 매수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무효로 만들려 온 힘을 다할 정도로 심하게 독이 올랐을 때,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마귀적인 반역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여 공모했을 때, 그들의 무례함에 대해 갑절의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에돔 사람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나는 천 대까지 네 하나님이 되리라하시고(17:7) 이삭에게로 이어진 그 약속을 어떻게 소중히 여기셨는지 봅니다. 그러나 에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러한 선하심을 악용하고,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뿌리째 뽑히기를 바랐을 때, 그것이 하나님을 향해 전쟁을 선포하고 공개적으로 도전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들은 마땅히 에서가 뒤로 밀려나 장자권을 잃었음을 기억했어야 하며, 리브가가 아이를 배었을 때 선포된 것처럼(25), 이 일이 오직 하나님의 작정과 정하심으로 말미암아 일어났음을 기억했어야 합니다. 에돔 사람들은 마땅히 이러한 것들을 고려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긴 인내로 그들을 참아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향해 그토록 독기를 품었기에, 앞서 인용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저주하시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는 그들을 향한 무시무시한 위협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은 세상 모든 민족 중에서도 가장 저주받은 백성으로 여겨집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의 예배를 완전히 폐지하려 애썼고, 할 수 있는 한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특권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스스로 불러들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께서 제안하셨던 호의에 대해 아주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어떤 방식으로든 가까이 다가오실 때, 우리 편에서 귀먹은 사람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받습니다. 오히려 그분께서 베푸시는 호의를 받아들이고, 제때에 그 은혜로 말미암아 더 나은 상태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야생마처럼 길들여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멍에 아래 두려 하실 때, 그분께 가까이 나아오기는커녕 오히려 뒷발질을 하며 대항한다면, 그분의 호의는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저주가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호의가 우리에게 제안되는 즉시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하여,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가 그분께 얼마나 깊이 매여 있는지를 깨달아 우리 자신을 온전히 그분의 섬김에 드리기에 힘씁시다. 이것이 본문에서 애굽 사람들에 대해 하신 말씀을 통해 우리가 명심해야 할 요지입니다.

이제 모세는 덧붙이기를, “백성이 적군을 치러 출진할 때에 모든 악한 일을 스스로 삼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 몇 가지 예를 듭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모세가 의도적으로 전쟁에 관해 말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전쟁터에서는 모든 일이 허용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화로운 시기에 각자 자기 집에 머물 때에는 좋은 질서를 유지하고 시민 통치를 지탱하는 것이 더 쉬운 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법이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사람이 구제할 수 없는 수많은 무질서가 발생하고, 더 이상 사람들을 억제할 방도가 없게 됩니다. 아무리 많은 강탈과 폭력이 자행될지라도, 사람은 그저 누워 울부짖을 뿐 그것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사람들 사이에 더 이상 질서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모세는 사람들이 비록 전쟁터로 나갈지라도 모든 악한 일을 삼가야 하며, 온갖 사악함에 휩쓸려가는 법 없는 방종을 스스로에게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사람들에게 수많은 유혹과 기회가 주어질지라도, 하나님을 섬기고 공경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복종시켜야 합니다. 참으로 사람들이 제정신이라면, 평화로울 때보다 전쟁의 시기에 더 큰 두려움과 신중함으로 행할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문턱에 서 있고 사방에서 위험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면, 그만큼 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마땅히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굴복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그분께 모든 것을 의탁하며 그분께서 우리의 인도자가 되어주시기를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너무 미련하지만 않다면 진실로 그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쟁 중에 있을 때에는 우리를 압박하는 필요와 도처에서 위협하는 위험들 때문에 더욱 엄격한 규칙을 지켜야 하며, 우리 하나님의 순종 아래 가장 평온하게 머물러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경험을 통해 정반대의 상황을 봅니다. 북소리가 울리자마자 법은 침묵해야 한다는 듯이 사람들이 모든 일에 스스로 면죄부를 주어, 더 이상 질서의 규칙도, 절도나 한도(mean or measure), 귀 기울여야 할 훈계나 경고도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인간의 마음이 이토록 악하게 기울어져 있기에,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의무를 상기시키며 말씀하십니다. “비록 군인이 되면 모든 일이 허용된다고 믿는 이 사악한 관습이 온 세상에 군림할지라도,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라. 오히려 모든 사악한 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라. 너희가 들판에 나가 적군을 마주할 때, 너희 자신의 집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자유가 허용될 것이라 생각하지 말라.” 그 이유는 너희가 하나님의 깃발 아래서 싸워야 하며, 참으로 하나님을 너희의 대장으로 모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부대에 방탕한 건달들과 타락한 자들이 있다는 비난을 받음으로써 내가 이토록 모독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그들 위에 부를 수 있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릴 수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여기서 전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먼저 다음의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 세상에 널리 퍼진 악습이 결코 우리를 정당화해 줄 수 없으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서 회계(account)를 보고해야 할 때, “모두가 그렇게 했습니다라거나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나 흔한 일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쓸모없는 변명이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즉시 대답하실 것입니다. 진실로 군인들이 취하고 행사하는 이 무법한 방종보다 더 관습적으로 굳어진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어느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종의 법처럼 굳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의 권리를 결코 박탈당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말씀하시기를 모든 악한 일을 스스로 삼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비록 우리가 세상의 모든 죄악이 마치 끝없는 바다나 온 세상을 덮친 홍수처럼 넘쳐나는 것을 볼지라도,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제멋대로 악을 행하고 죄 짓는 일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그 누구도 바로잡을 수 없는 그런 극심한 무질서와 포악한 일들을 목격하며 감히 입 밖으로 불평 한마디 내뱉지 못하는 형편일지라도, 우리는 그 모든 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핑계할 수 있다고 생각지 맙시다. 오히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봅시다.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행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그와 반대되는 판결을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첫째로 명심해야 할 점입니다.

또한, 만약 우리가 수많은 유혹에 노출되어 있고 세상적으로는 그렇게 행해도 용납될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조차 악을 행하는 것이 금지되었다면, 하물며 그러한 유혹이 없거나 그리 크지 않을 때 범죄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은 갑절의 잘못입니다. 모든 사악함에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 같은 전쟁의 시기에도 우리가 스스로를 엄격히 지켜야 한다고 하셨거늘, 하물며 우리가 선한 삶의 규칙을 따를 수 있고, 상황이 그토록 무질서하지 않으며, 마귀가 우리를 죄악으로 끌어들일 수단이 그리 많지 않을 때에,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전혀 기억하지 않은 채 온갖 방탕함으로 달려든다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제가 묻건대, 그러한 잘못은 더 큰 형벌을 받아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항상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찾아야 한다는 점을 주목합시다. 세상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고 그분을 섬기는 일에서 멀어지려 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평화로울 때에는 쾌락과 즐거움에 취해 방황하며 온갖 부패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을 멈추지 못하고, 전쟁 중에는 훨씬 더 악하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 우리는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고통과 환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환난을 통해 우리를 자신에게로 부르고 계심을 압시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그분께서 우리를 자신의 날개 아래 숨겨주셔야 하기에, 그분은 우리가 그만큼 더 세심하게 그분을 섬기기를 원하신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만약 우리에게 평화의 시기가 주어졌다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깊이 생각하고, 평온함 가운데 그분께 간구하며, 날씨가 맑고 고요할 때 우리의 의무를 훨씬 전부터 더 잘 살필 수 있는 여유를 주신 것임을 압시다. 폭풍과 구름으로 날씨가 어두워지면 사람들은 (흔히 말하듯) 돌을 던지면 닿을 거리 앞도 보지 못하지만, 태양이 밝고 맑게 빛날 때에는 멀리 있는 것까지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안과 고요함을 허락하실 때에는, 우리 각자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순종 아래 두어 그분께서 우리를 기쁘게 여기시도록 하며, 우리가 혼란과 무질서로부터 멀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분께서 부드러움으로 우리를 이끄실 때 뒤로 물러나지 않으며, 마치 그분께서 더 이상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분의 멍에를 떨쳐버리지 않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요컨대 이것이 우리가 이 본문에서 얻어야 할 교훈입니다.

여기 기록된 예시, 즉 모세가 몸이 부정한 자는 마땅히 다른 이들의 모임에서 격리되어야 한다고 한 것에 관하여, 결론으로서 두 가지 점을 짧게 주목해 봅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의식들을 통해 자신의 백성이 몸과 영혼 모두를 온전히 순결하게 지키기를 원하셨다는 점입니다. 진실로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자가 단지 물로 몸을 씻는다고 해서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이러한 썩어 없어질 요소들은 우리 영혼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정하셨기에, 그것들은 우리에게 유익이 됩니다. 마치 세례의 물이 다른 보통의 물과 같지 않은 것과 같으니,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특별한 용도로 거룩하게 구별하셔서,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을 받았다는 보증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것을 소유하게 되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주신 그 도움을 우리 자신의 유익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옛 시대의 백성들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취급받았기에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의식을 가졌으나, 그들과 비교할 때 우리는 장성한 사람의 상태에 이르렀습니다(3: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몸의 어떤 부정함에 대해 물로 씻으라고 명하신 것은, 그분께서 친히 선포하신 대로 우리가 하나님께 봉헌된 자로서 모든 순결함 가운데 걸어야 하며, 우리 안에 어떤 부패함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정결하게 씻어내야 함을 모든 이가 알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법이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우리의 교훈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봅니다. 비록 오늘날 우리가 율법의 옛 의식들을 가지고 있지 않고, 몸에 어떤 얼룩이나 부정함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몸을 씻어야 할 의무는 없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 진리와 본질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으므로, 고린도후서에서 사도 바울이 권면한 바와 같이(고후 6:17), 우리 몸과 마음의 모든 부패함으로부터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여, 계속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 가운데 악이 자라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악이 방치되어 온 양 떼를 감염시키도록 내버려 둔다면, 결국 그 감염이 도처에 퍼져 고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 외에 무엇이 남겠습니까?(17:8). 이것이 바로 교회 안에 출교(excommunication)가 제정된 이유입니다. 만약 무질서하고 방탕한 삶을 삶으로써 그릇되게 행동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껴 스스로 겸손해지고 다시 양 떼로 돌아와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하려는 목적으로, 또한 다른 이들 역시 이를 통해 경고를 받아 악행이 마치 모든 것이 허용된 양 무법한 자유를 얻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그들을 잠시 교회로부터 격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비록 이 상징(figure)이 더 이상 사용되지는 않지만, 우리는 옛 백성에게 명령된 바를 통해 선하고 유익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옛 조상들이 가졌던 것과 같거나 참으로 그보다 훨씬 더 큰 약속을 우리가 받았음을 알고, 우리의 몸과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 온전히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앞서 말씀드린 그 순결함에 도달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마땅합니다. 동시에, 만약 그 감염으로 양 떼를 부패시키는 자들이 있다면,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질서에 따라 그들을 격리해야 합니다. 그들이 자신의 악함을 깨닫고 회개하여 결국 그 격리가 그들을 정결케 하는 약이 되게 함으로써, 감염이 더 이상 퍼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항상 질서 있게 유지됨으로써, 하나님께서 부정한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끌어내어 구별하신 것이 헛된 일이 아니었음을 사람들이 알게 해야 합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영으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가 온전히 그분의 것이 되어 살든지 죽든지 그분께 참된 제물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허물을 고백하며 선하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께서 우리를 참된 회개로 어루만져 주시기를 간구합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분으로부터 돌아선 것을 스스로 한탄하며, 그분께서 우리를 온전히 자신의 뜻에 합당하게 빚어주시기를 무엇보다 간절히 바라게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 육신의 모든 부패함과 연약함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의로 옷 입어, 우리의 온 삶 속에 그분의 영광이 빛나게 되기를 소원합시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실 만한 허물이 항상 없을 수 없기에, 그분께서 우리를 자신의 저 하늘 나라로 인도하실 때까지 우리의 불완전함을 너그러이 보아주시기를 기도합시다.

, 다 함께 전능하신 하나님,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하고 기도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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