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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신명기 설교

신 23:12-17

작성자doulosdei|작성시간26.06.10|조회수23 목록 댓글 0

133회 설교: 23장 네 번째 설교

1556127일 월요일

 

23:12-17 “네 진영 밖에 변소를 마련하고 그리로 나가되 네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볼 때에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려 그 배설물을 덮을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넘기시려고 네 진영 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결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 종이 그의 주인을 피하여 네게로 도망하거든 너는 그의 주인에게 돌려주지 말고 그가 네 성읍 중에서 원하는 곳을 택하는 대로 너와 함께 네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고 그를 압제하지 말지니라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남창이 있지 못할지니

 

 

 

우리는 하나님께서 옛적에 율법 아래 있는 백성들을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모든 순결함 가운데 훈련하고자 하셨음을 이미 보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어떤 종류의 오점이나 더러움도 없이 스스로를 거룩하게 지키는 습관을 갖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방금 읽은 첫 문장이 지향하는 주요한 목적입니다.

사람이 배설할 때 그 오물을 덮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여기에 언급된 것을 처음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런 일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담길 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정직하게 이름 붙이기조차 민망한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언급했듯이, 백성들이 몸에 관한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섬김 안에서 온전한 거룩함을 유지하도록 인도받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율법에 씻는 예식(washings)이 언급된 것은 영혼의 정결함이 단지 손을 씻거나 몸을 적시는 물 조금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정결하게 하지 않으면, 부정해진다는 사실을 경고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죽은 시체를 만지기만 해도 그는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평생 손이나 발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어떤 식으로든 오점을 남기지 않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은 악으로 향하는 기회들로 가득 차 있으며, 우리 역시 무언가를 손에 잡자마자 곧바로 범죄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다음의 사실을 고려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대하신다면, 우리를 혐오하실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입니까? 우리는 불결하고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 부정함에 대한 치료책을 구하는 것입니다. 물이 영혼까지 들어가 우리를 정결하게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인간에게 씻김과 깨끗해짐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징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그 물이 상징하는 바에 따라 인도되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여기서 말하는 바, 곧 사람들이 배설물을 내버려 두어 악취가 나거나 질서가 어지러워지면, 하나님께서 노하신다는 점을 잘 주목합시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런 물리적인 것들에 매여 계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순결하고 깨끗하며, 우리의 몸 또한 그에 부합하여 악한 정욕과 애착으로 우리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다면, 하나님께는 그 모든 것이 한결같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수많은 허물에 대해 너무나 쉽게 스스로를 면죄해 버리고, 욕망의 고삐를 풀어버림으로써 온갖 악으로 치닫기 때문에, 이 법은 사람들이 아주 작은 일에서조차 모든 부정함을 주의하는 습관을 갖게 하려는 의도로 주어졌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정직하지 못한 행실을 보인다면, 그는 틀림없이 마음이 완악해져서 불결한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어떤 이들이 그토록 짐승처럼 변해버린 것을 보는 바와 같습니다. 그들이 일단 하나님과 모든 정직함을 잊어버리면 모든 수치심을 벗어 던지게 되며,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를 분별할 지각조차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됩니다. 이것은 바로 스스로를 악한 습관에 내맡긴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충분한 이유가 있으셨기에, 몸에 속한 이 모든 일에서 자신의 백성을 억제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용변을 볼 때 은밀한 곳에서 하도록 하셨습니다. 왜입니까? 만약 그들이 불결하고 부정한 백성이었다면, 그러한 불결함이 그들에게 더 큰 불명예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일들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 대해서도 제멋대로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걷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우리는 그러한 정직함으로 절제하고 다스려져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면 집안을 청소하고, 구석진 곳에 먼지가 남지 않도록, 혹은 손님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만한 그 어떤 것도 남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며, 우리가 평생 행하는 모든 일 속에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눈여겨보시는 우리 하나님께 우리가 어떠한 경외심을 품어야 마땅하겠습니까?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불쾌하시게 해 드리지 않도록 세심히 주의하며, 그분 앞에서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앞서 언급했듯이, 하나님께서 이러한 썩어 없어질 것들 때문에 노여워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감정에 종속되거나 그것에 휘둘리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미숙함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너무나 무디고 세속적인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몸에 관한 일들을 통해 영적인 것으로 나아오도록 경고 받을 필요가 매우 컸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그들의 오물을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게 하신 이 법의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이유를 덧붙이십니다. “나는 너희 중에 있느니라. 만일 너희가 이와 같이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서 돌아설 것이니라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만드실 때 백성의 건강이나 그와 유사한 것만을 고려하신 것이 아님을 선포하십니다. 또한 이것은 단지 시민 사회의 정책(civil policy)에 관한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거리를 청소하거나 그와 같은 일들을 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사람들의 건강을 위한 것이기에 매우 좋은 질서입니다. 만약 그런 일들이 지켜지지 않아 도시 안에 오물과 진흙 더미가 쌓여 있다면, 사람들은 그곳에 제대로 된 질서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러한 불결함을 금하실 때는 단지 그런 차원만을 고려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높은 목적을 겨냥하셨으니, 곧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음과 같이 생각하도록 깨우치려 하신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거하실 만큼 우리에게 이토록 은혜를 베푸시니, 우리도 영혼과 몸의 순결함 가운데 걷는 법을 배우자. 무엇보다 먼저 우리 영혼이 모든 악한 생각과 애착으로부터 정결해지게 하고, 둘째로 우리 몸 또한 정직함(honesty) 가운데 지켜지게 하여, 사람들 앞에서 불결한 일을 저지르는 데 마음이 완악해지거나 모든 수치심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자.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의무를 잊어버리는 지름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우리 편에서 이러한 것들을 주의해야 합니다. 다만 의식에 얽매여 이 법과 그와 유사한 법들을 엄격히 준수했던 유대인들의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그토록 경멸했던 이 법의 진리와 본질을 붙들어야 합니다. 세상의 보편적인 관습은 언제나 사물의 형식이나 겉치레에만 몰두하고 본질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바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은 채 이 의식만을 준수했던 것이, 결국 하나님을 가지고 노는 기만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모든 준수 행위는 위선에 불과했으며,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 식으로 왜곡하고 변질시킬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참으실 수 없는 배신행위가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폐단이 나타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겉모습만 번지르르하게 꾸밀 수 있다면, 그런 외적인 것들로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 자신이 육신에 속해 있기에, 하나님을 자신들의 잣대로 측정하려 듭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는 다음을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작은 일들을 명령하실 때에는 우리를 더 깊은 도리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이 목표를 조준합시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원리에 따라,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들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에서 명한 이 작은 일들도 마땅히 행해야 하겠지만, 항상 가장 주요하고 근본적인 점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23:23).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압니다. , 하나님께서는 제사가 아니라 긍휼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은 사람들 사이에 신실함(faithfulness)과 공의(judgement)와 정직(uprightness)이 있는 것입니다. 제사나 씻는 예식, 그리고 그와 유사한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본뜻은, 사람들이 그러한 것들을 통해 훈련받아 자신들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호의에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죄를 눈앞에 마주할 때 슬퍼하며, 그 예식들이 스스로를 기소하는 증거가 되게 하여, 죄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릴 때 하나님으로부터 용서와 자비를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명심해야 할 요지입니다.

이제 모형(figure)은 지나가고 폐지되었으므로, 우리는 이 법의 외적인 준수에 골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습니까? 오늘날 이 법은 우리에게 쓸모없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 법을 읽지 말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이 법이 세상 끝날까지 자신의 교회를 위한 교훈이 되기를 의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형은 흘려보내되,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 모두에게 가르쳐진 바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것은 곧 모든 일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오염시키고 더럽히는 일을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 사람을 더럽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음식에 관해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힙니다(15:18). 우리가 품고 있는 사악한 감정의 수만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만큼의 오점을 지니고 있는 셈입니다. 음행은 어디에서 옵니까? 그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야심은 어디에서 옵니까? 탐욕, 시기, 교만,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사악한 욕망은 어디에서 옵니까? 사람의 영혼이 이러한 추악한 얼룩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 앞에서 오염될 때, 영혼은 곧바로 몸을 그 길로 끌어당깁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악한 생각을 실행에 옮길 때, 보십시오, 우리의 몸 또한 영혼과 함께 동일한 불결함에 휘말리게 되어 우리는 완전히 더럽혀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오염된 불결함이 하나님을 우리에게서 쫓아버리는 원인이 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봉헌하는 법을 배웁시다. 이와 더불어 사도 바울이 말한 바, 곧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려 하니,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몸을 모두 정결하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고전 6:20; 고후 6:16). 이것이 바로 모세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진영 가운데 항상 거하시며, 그들을 구원하시고 원수들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신다고 말하며 내세운 이유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어서 덧붙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서 어떤 불결한 것을 보실 때, 그분께서 너를 떠나시지 않도록 주의하라.” 오늘날 이 호의는 옛 백성들에게 주어졌던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의 인격 안에서 우리와 어떻게 결합되셨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들어있던 언약궤 안에서처럼 어떤 그림자 아래에 계신 것이 아니라, 신성의 모든 충만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며, 그분은 참으로 육신으로 나타나신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2:9).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그분께서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와 연합하시는 이토록 큰 은혜를 우리에게 기꺼이 베푸셨음을 볼 때(딤전 3:16),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옛 백성들에게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가까이 계시며, 참으로 그분의 덕과 권능을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이 느끼게 하신다는 점을 명심합시다. 우리는 언제나 그분의 보호 아래 있으므로, 그분의 권능이 우리를 지탱하고 보존하시기 위해 여전히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28:20), 그것은 분명 그들이 복음을 전파하며 겪어야 할 모든 갈등 속에서 그들을 강건하게 하려는 의도였으며, 또한 그분의 권능에 있어서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임을 우리에게 선포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통치 아래 있음을 기억합시다. 그분은 비록 하늘로 올라가셨으나 만물을 충만케 하시며, 하늘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 중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는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우리는 그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며, 남편과 아내 사이보다 하나님의 아들과 우리 사이의 연합이 더 큽니다(4:10; 5:30). 상황이 그러하므로, 이와 같은 자비로운 호의가 우리로 하여금 모든 불결함으로부터 스스로를 멀리하게 하는 동기가 되게 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우리 하나님과 나누어야 할 이 거룩한 연합을 굳게 지킵시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우리의 원수들을 우리 손에 넘겨주시고 모든 악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일인지를 부지런히 주목합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만약 하나님의 호의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수만 가지 죽음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었을 것임을 경고 받게 됩니다. 진실로 우리 각자가 자신의 연약함을 철저히 살핀다면, 만약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방어를 위해 강력하게 싸워주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매 분 매 초마다 멸망했을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우리를 지키시는 주님이 충분히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지옥의 모든 군대가 우리를 대적하여 결집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라면, 그들은 결코 승리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원수들의 손에서 보존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거하시기에 그들을 이기고 우리 발아래 굴복시키는 승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한편으로 사람들이 스스로 너무나 나약하고 자신을 방어할 힘이 전혀 없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느껴야 함을 봅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어떻게 담대하게 자랑할 수 있는지도 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에게로 받아주셨으며, 그들을 보존하시고 그들의 보호처(safegarde)가 되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신실한 자들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이 영광은 오직 겸손함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불신하는 법을 배우고 우리 안의 연약함을 고려할 때 우리 스스로는 망할 수밖에 없음을 느끼기 전까지는, 결코 하나님에 의해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경고의 말씀 또한 무겁게 받아들입시다. 그분은 말씀하시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서 불결한 것을 보실 때, 너를 떠나시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불쾌하시게 할 만한 우리 안의 불결한 것들은 단지 육신적인 불결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빈궁함으로 인해 때로는 벌레가 생기고 때로는 악취가 나는 가난한 오두막에 얼마나 자주 거하십니까? 그곳에는 자신의 필요를 채울 길조차 없고, 하물며 즐거움을 누릴 방도는 더더욱 없는, 보기에 가련한 가난한 나사로들이 있습니다. 분명 대다수 사람에게 불결해 보일 수 있는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을 불쾌하시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게 만드는 불결함은 바로 마음에서 비롯되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몸을 더럽히는 그 타락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죽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인간과 같다고 생각하거나, 그분께서 인간적인 감정에 휘둘리신다고 생각지 맙시다. 오히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도 영적인 순결함이 있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 제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를 오염시키는 것들, 곧 음행과 시기, 증오, 배신, 탐욕, 야망, 그리고 교만을 우리로부터 멀리 던져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불결하며 하나님을 불쾌하시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이 이러한 것들로 더럽혀질 때 그 사악함은 갑절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중에 모시기를 원한다면, 이러한 모든 오염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법을 배웁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 것처럼, 만약 우리가 순결한 성전이 되지 못한다면, 그분 또한 우리에게서 물러나실 것입니다. 오직 순결이라는 조건 위에서만 그분은 우리 중에 거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네 주께서 너를 떠나시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이 경고는 우리의 머리카락이 쭈뼛 서게 할 만큼 엄중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 이 영광을 주셨고, 우리 모임의 가장 귀한 자리를 차지하시겠다고 선포하셨으니, 우리 각자가 그분을 거절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고, 우리의 오염된 행실로 인해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공적인 질서를 세우는 것은 마땅한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개인적으로 스스로를 살핍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보편적으로 모든 정직함이 유지되도록 노력하여, 하나님께 성별된 백성이 됩시다. 만약 우리 각자가 불결한 행실에 자신을 내맡겨서, 어떤 이는 간음하는 자가 되고, 어떤 이는 도둑질과 속임수와 강탈을 일삼으며 오직 불법적인 수단으로 부를 쌓는 데만 몰두하고, 또 어떤 이는 이웃을 해치고 무너뜨리는 사악한 술책에 빠져들며, 또 다른 이는 오만과 야망에 가득 차 신성모독이 마음껏 판을 치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 각자가 우리 모임에서 하나님을 추방하고 그분을 쫓아내기로 공모한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사이에 이토록 죄악이 왕성하고 끔찍한 혼란이 가득함을 볼 때, 우리 자신을 잘 살핍시다. 이 경고를 이 해악을 억제하는 고삐로 삼읍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를 축복하시려 우리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쫓아버린 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본문에 관해 명심해야 할 요지입니다.

이제 모세가 덧붙입니다. “만일 이방인 중에서 나온 종(이미 설명해 드린 바와 같이 노예를 의미합니다)이 도망하여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로 피신해 온다면, 그를 그곳에 거하게 하고 그의 주인 손에 다시 넘겨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 법을 통해 의도하신 바를 잘 헤아리지 못한다면, 이 법은 언뜻 보기에 부당해 보일 수 있습니다. 당시의 종들은 오늘날의 소나 말과 같은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놀라울 정도로 고통스럽고 짐스러운 일들을 시켰으며, 주인은 그들에 대해 생사여탈권을 가졌습니다. 이방인들 사이에서는 주인이 종을 옥에 가두거나 고문하거나 심지어 죽이려 할 때, 재판관에게 가서 호소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누구나 자기 집 안에서 마음대로 처형할 수 있었으니, 이는 참으로 가혹한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이미 말씀드렸듯이, 당시 종들은 말이나 소처럼 동산(moveable goods)’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재산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빼앗는 것이 허용되지 않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매우 악한 일이라 할진대, 어찌하여 그의 종을 돌려보내지 않고 붙잡아 두는 것이 허용되었겠습니까? 이는 주인의 정당한 권리를 가로채는 부당한 행위이자 상해를 입히는 일처럼 보일 수 있으며,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간접적인 방식으로 도둑질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처럼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법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한 종들에게 일종의 특권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있습니다. 그들이 이방인들 아래 사는 동안에는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없었고, 그러한 자유도 누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더 나은 길로 돌아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특권으로서 이러한 면제권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나아가 주인들의 지나친 잔인함 때문에 법 자체가 종들에게 어느 정도 숨통을 틔워 주어야 했다는 점을 주목합시다. 주인들은 종들에 대해 부여된 권한을 지독하게 악용하여, (유리잔을 깨뜨리는 것과 같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자비나 긍휼 없이 종들을 옭아매고 때리곤 했습니다. 이러한 사례들 때문에 사람들은 종들에게 피난처를 허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조차 만약 종들이 어떤 신전(temple)으로 도망친다면 주인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완전히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아마도 그들을 더 부드럽게 대해줄 다른 사람에게 팔릴 수 있게 하려는 조치였습니다. 또한 황제의 동상을 붙들 수 있다면 그들은 안전을 보장받는 것과 같았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여기 기록된 법에서 동일한 점을 배려하셨습니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이방인들이 폭정보다 더한 잔인함으로 종들을 고통스럽게 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가련한 영혼들이 피신할 곳을 얻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통과 환난에 짓눌린 그들이 참된 신앙(true religion)으로 인도될 수 있는 수단을 얻게 하려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그토록 기가 꺾였을 때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여 더 이상 어찌할 바를 알 수 없게 되었을 때,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순종으로 이끄는 훌륭한 준비 과정이 됩니다. 우리가 마음 편히 지내며 즐거움에 빠져 있을 때에는 그 즐거움에 취해 하나님을 아무것도 아닌 분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법이 겨냥하고 있는 핵심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법(speciall lawes)을 내실 때 결코 스스로 모순되지 않으신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이러한 특별법들을 일반적인 교리(generall doctrine)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만약 어떤 종이 속임수를 쓰거나 악의를 품고, 혹은 그와 유사한 다른 이유로 도망쳤다면, 그것은 그에게 죄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도둑질은 결코 선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바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유다 땅에서 도망친 종을 받아주어야 한다는 이 특별법과 특권이 선포되었을 때, 이것이 종들에 관해 우리 주님께서 이전에 주신 말씀을 폐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네 이웃의 남종이나 여종을 탐내지 말라고 하신 말씀 역시 여전히 온전한 효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종을 붙잡아 두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으며, 종들이 주인을 속이는 것 또한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어떤 종이 그들에게 도망쳐 와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거하기를 갈망했을 때, 이 허락이 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가 억압을 당했다거나, 주인으로부터 너무나 방탕하고 잔인한 대우를 받아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정당하고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 미리 전제되어야 할 사항입니다. 왜냐하면 (말씀드린 대로) 십계명에 담긴 율법은 결코 변치 않는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요약을 가질 때, 그 안에는 우리에게 온전히 보증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모든 개별적인 법을 십계명에 비추어 측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특별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해야 할지 시험해 보는 진정한 시금석(touchstone)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이 원리로 되돌려 보내지 않는다면, 결코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두 돌판에 새겨 주신 그 열 가지 계명 안에 완전한 의로움(perfect righteousness)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그러하므로,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사안들을 살핀다면 결코 미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 여기 법이 있습니다. 이 사안이 하나님의 예배(the service of God)에 속한 것입니까, 아니면 둘째 돌판, 즉 우리가 사람들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그 돌판에 속한 것입니까? 그것은 둘째 돌판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것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첫 번째 계명에 속하는지, 살인하지 말라는 두 번째에 속하는지, 간음하지 말라는 세 번째인지, 도둑질하지 말라는 네 번째인지,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다섯 번째인지, 아니면 마지막으로 탐내지 말라는 여섯 번째에 속하는지를 살펴봅시다. 우리가 이처럼 사안을 고찰하여 이것은 이러이러한 계명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그 사안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문을 여는 열쇠를 갖게 된 것입니다. 만약 어떤 법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이 첫 번째든 두 번째든 세 번째든 혹은 네 번째 계명이든 간에, 우리는 그 법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더 큰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입니까? 우리는 그 법이 지향하는 목적(end)을 고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법이 (흔히 말하듯) 양쪽 모두에 걸쳐 있다면, 그것을 첫째 돌판과 둘째 돌판 모두에 비추어 보며 양자를 혼합하여 생각하면 그 또한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유대 땅을 가련한 노예들을 위한 피난처로 허락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율법이 여전히 온전한 효력을 유지하기를 원하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결론을 내리자면, 하나님께서는 이 대목에서 주인들이 행사했던 지나치고 포악한 잔인함을 치료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적으로는 자신의 슬픔을 덜어줄 아무런 방도를 찾지 못한 채) 모든 도움으로부터 끊어진 가련하고 고통 받는 자들이 유대 땅으로 들어와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불의하고 억울하게 고통 받는 자들을 우리 힘이 닿는 데까지 도와야 한다는 경고를 받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사악한 다툼을 지지해서도 안 되며, 악한 일을 감싸주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한 종류의 자비를 베푸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정결하다고 결코 입증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온갖 방탕한 허물들이 그저 묻히기만을 바라는 자들이 많으며, 그들은 종종 신심(devotion)’이라 일컬어지는 어리석은 동정심을 발휘하여 기꺼이 악행을 조장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그런 식으로 인도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주목합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고통 받는 가련한 영혼들을 볼 때, 긍휼히 여겨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압을 향해 하신 말씀을 듣습니다. “모압아, 너는 내 백성의 피난처였거늘, 너는 네 그늘 아래 피신하러 온 자들을 뒤쫓으며 고함치고 위협하였도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악행으로 인해 정당한 벌을 받은 것이라 할지라도,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이 불신자들에게 그토록 잔인한 대우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불신자들은 폭군처럼 그들을 치러 왔고, 모든 것을 약탈하고 삼키려 드는 이리 떼처럼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 보십시오. 가련한 유대인들이 모압 땅으로 도망쳤을 때, 우리 주님께서는 그 나라를 그들을 위한 피난처로 정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떤 선지자가 그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일러주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인간애(humanity) 자체가 우리에게 이를 설득하기 때문입니다. 전쟁이나 그 밖의 다른 폭압으로 인해 고국에서 쫓겨난 가련한 사람들을 볼 때,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들을 영접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정중하게 대접하라는 메시지를 보내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타인에게 박해받고 고통당한 가련한 영혼들이 우리와 함께 있을 때, 그들에게 온갖 폭력과 잔인함을 행사하려는 원수들의 손아귀에 그들을 다시 내던지는 것은 너무나도 무정한 일임을 명심합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본문에서 가슴에 새겨야 할 교훈입니다.

우리가 이토록 불의하게 압박받는 모든 이들, 그리고 아무런 이유 없이 과도하게 고통 받는 이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긍휼히 여겨야 한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고난 받는 가련한 영혼들에게는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하겠습니까? 훨씬 더 마땅한 이유로 우리는 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그들의 고난 중에 그들을 구제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돕지 않는다면, 선지자가 모압 사람들에게 한 말을 우리 또한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16:3).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장 은밀한 은신처에서조차 몰아내실 것이라고 덧붙였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자기들에게 도망쳐 온 백성을 폭로하여 먹잇감으로 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폭군들에 의해 박해받게 내버려 두거나, 그들을 우리 가운데서 몰아냄으로써 그 사악한 일에 폭군들과 동참한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분명 그러한 잔인함을 결코 좌시하지 않고 벌하실 것입니다. 훗날 우리 차례가 되어 (반드시 오게 될) 그와 같은 방문을 받게 될 때, 사람들은 우리를 구석구석에서 사냥하듯 몰아낼 것이며, 우리는 온 세상 그 어디에서도 피난처를 찾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맡기신 이들을 내버리려 애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요지입니다.

나아가 제가 이미 다루었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이전에 미신 속에서 방황하던 이들을 진리의 지식으로 인도하기 위해 우리가 최선을 다할 것을 명령하신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타국에서 넘어와 자신을 의탁했던 그 종들은 결국 하나님의 섬김(service)에 합당하게 빚어졌습니다. 비록 그들이 처음에는 무지하고 미숙했을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익숙해지고 마침내 그 법에 온전히 자신을 맞추어 가는 것은 합당한 일이었습니다. 상황이 그러하므로,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격려하여 길 잃은 가련한 양들을 찾게 하시고,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며 하나님의 양 떼 안으로 모으기를 원하신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러한 관습과 관련하여 우리가 명심해야 할 요지입니다.

모세는 세 번째로 이스라엘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또한 불결하고 가증한 남창(fornicator)이 있지 못할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음행은 일반적인 음행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본성에 반하는 극악무도하고 추악한 짓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봉헌된 백성에게 이러한 사악함을 금지해야 했다는 사실, 특히 당시에 음탕한 행실이 너무나 극심하여 여인들이 자신을 추잡한 정욕에 내맡기는 창녀의 집뿐만 아니라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그토록 불결한 짓을 저지르는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것이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닙니까? 이는 우리의 머리카락이 쭈뼛 서게 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영으로 붙들어 다스려 주시지 않는다면, 인간 스스로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경고 받게 됩니다. 이러한 타락이 오늘날에야 처음 세상에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태고부터 있어 왔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이래로,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만 했고, 그의 모든 후손 또한 사악함에 방치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악덕과 극악한 범죄의 뿌리는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고 고삐가 풀려 제멋대로 행동할 때 싹트게 됩니다. 본문의 내용이 바로 그러합니다. 우리는 인간이 자연적인 음행에 만족하지 못하고, 짐승보다 못한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는 것을 봅니다. 일반적인 좀도둑질에 만족하지 못하고, 강도질과 해적질을 일삼으며, 세상 그 어떤 도둑질보다 사악한 수법과 모략을 꾸며냅니다. 인간은 본성에서 너무나 멀리 벗어나 매일같이 기괴한 방식들을 고안해 내며, 원수를 죽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잔인함을 끝도 없이 확장하려 듭니다. 요컨대, 하나님께서 다스려 주시기 전까지 인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잘 살펴본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지옥의 하수구와 심연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자기 안에 수많은 사악함을 기르고 있기에,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주시지 않는다면 그 해악은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방인들 사이에서조차 어느 정도의 정직함이 유지되었던 것은 인류 가운데 여전히 선한 도리를 남겨두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덕분이었습니다. 진실로 이방인들은 마땅히 그래야 할 만큼 하나님을 섬기려는 의도를 결코 갖지 않았으며, 그들의 행위 중 그 무엇도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것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만물이 완전히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을 통치하셨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떤 질서와 정직함 속에 붙들어 두심으로써 자신의 섭리의 징표를 보여주시는 것은, 그분께서 인류를 보살피고 계심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려 하심임을 배워야 합니다. 반면에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을 질서 아래 두기 위해 손을 내밀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짐승조차 인간보다 더 정직하게 행동할 만큼 추악하고 가증스러운 일들을 보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고려해야 할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도 스스로 혐오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파렴치한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들의 본보기가 아주 오래전부터 주어졌음을 보고, 세상이 갈수록 더욱 악해져만 간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깨닫고 있으니, 만약 하나님께서 이를 바로잡아 주시지 않는다면,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 끝은 무엇이겠습니까? 의심할 여지없이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없었더라면, 사람들 사이의 모든 정직함은 깨끗이 씻겨 내려가 버렸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 대목에서 주신 경고를 통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이 법조차도, 온 세상에서 거룩하고 택함 받은 자라 일컬어지는 백성들 사이에서 그러한 가증한 일들이 왕성하게 일어나는 것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는 점을 주목합시다. 성경은 때때로 자신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지 않은 왕들에 대해 말할 때, 그곳에 창녀의 집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본성에 반하는 추잡한 불결함이 있었으며, 이러한 사악함이 위세를 떨쳤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그곳이 어디였습니까? 바로 유다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 떨며 두려움과 경계함 가운데 걸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날개 아래 숨겨 주시고, 그러한 타락이 우리에게 닥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방탕한 행실이 일단 한 번 허용되면, 사람들은 모든 것이 법적으로 허용된 줄로 착각합니다. 그러한 수치스러운 일들이 묵인되고 어떤 지역에서 무법한 자유가 주어지면, 사람들은 개들처럼 음란함에 자신을 내맡길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더 크고 극심한 불결함에 빠지게 됩니다. 상황이 그러하므로, 우리는 우리 가운데 모든 음행의 오염이 제거되고 우리가 깨끗이 정결해질 수 있도록 전반적으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목표하시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이것은 시민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둘째 돌판의 세 번째 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에 속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창녀의 집이 허용되지 않습니까? 음행은 하나님의 눈에 가증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뜻은 우리의 영혼과 몸이 모두 온전히 그분께 봉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음행을 혐오하시는데, 만약 공개적으로 창녀의 집이 허용되고, 간음하는 자들에게 아무런 처벌이나 징계가 내려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음행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될 것임을 뜻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려 하시는지를 봅니다. , 어떤 사람들이 본성의 모든 정직함을 잊어버릴 만큼 극심한 죄에 빠진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의 손길이 붙들어 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에게는 짐승 같은 면모밖에 남지 않을 것이라는 그 비참함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고 우리를 일깨워, 우리가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거나 참으로 완전히 빠져 있는 이러한 부패함으로부터 우리를 건져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게 합시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고, 고삐 풀린 말처럼 행동하지 맙시다. 사악한 기회를 엿보거나 간음이나 그 밖의 사악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 무법한 자유를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맙시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합당하게 빚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순전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를 순결하게 지킵시다.

 

이제 우리의 허물을 고백하며 선하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가 그 허물들을 더욱더 깊이 느끼게 해 주시기를 간구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부르기를 기뻐하셨고, 참으로 자신이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거듭 선포하셨으며,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영혼에 대해서도 그분의 도우시는 권능을 깨닫게 하셨으니, 이로 인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게 되기를 소원합시다. 또한 우리 각자가 스스로를 더욱 세밀하게 살피고 우리 자신의 더러움을 깨달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순결함으로 나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분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정결하게 하셔서, 우리가 오직 영혼과 몸을 우리 하나님께 봉헌하는 일에만 전념하게 되기를 기도합시다. 아울러 우리가 모든 정직함과 진실함 속에서 서로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 이것이 항상 우리의 사악한 애착을 죽이는 데 도움이 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에 매일 베푸시는 유익을 누리는 데 방해가 되지 않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은혜를 우리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백성과 민족에게도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합시다.

, 다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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