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회 설교: 23장 다섯 번째 설교
1556년 1월 28일 화요일
신 23:18-20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네가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 식물의 이자, 이자를 낼 만한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 것이라 타국인에게 네가 꾸어주면 이자를 받아도 되거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우리는 율법에 따라 부정한 것들을 예물이나 제물로 바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음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부정하다고 선언하신 짐승들은 거룩한 제물과 섞일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를 통해 자신의 백성을 모든 순결함 속에 붙들어 두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의 취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가 바치는 것은 무엇이든 깨끗하고 순결하며 아무런 점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만일 어떤 사람이 개의 값을 가져온다면, 하나님께서 그것 역시 혐오하신다는 내용을 덧붙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말하듯) 개는 그 자체로, 그리고 그 본성상 부정한 짐승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 개를 바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므로 하지 않겠으나, 그것을 팔아서 받은 값은 바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모세는 이것 역시 가증한 것으로서 하나님께 거절당한다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음행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이며, 하나님께 미움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 하나님과 화해하고 자신의 잘못을 씻어내기 위해 음행의 대가를 가져오려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자신의 이름이 그러한 더러움 및 부정함과 섞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결과적으로 제가 말씀드린 율법의 선언, 즉 우리가 순결하고 거룩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는 궤변이나 교묘한 수수를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알게 하려는 의도에서—마치 사람들이 교묘한 수단을 동원하고 자신의 악행을 겉치레하여 하나님 앞에서 정죄되지 않을 수 있다고 스스로 믿는 것처럼—모세는 그것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직함(uprightness)과 건전함(soundness)에 이르러야 하는데, 그에 따르면 만일 어떤 것이 그 자체로 악하다면,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 역시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이 구절에서 취해야 할 교훈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첫 번째 요점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물은 순결하고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율법 시대에 이것이 요구되었다면, 오늘날 우리도 선지자 말라기가 말한 바에 따라 이를 잘 실천해야 마땅합니다(말 1:11).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드린 제물 속에 많은 부정함이 있었기에 그것들을 책망하신 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이름이 온 세상에서 불릴 때, 곧 내가 위대한 하나님이라 불리고 모든 사람에게 경배를 받으며, 사람들이 내게 순결하고 깨끗한 제물을 바칠 때가 올 것이다.” 이제 그곳에서 선지자는 그리스도 교회의 상태를 다루고 있으며, 약속된 구속주께서 오실 때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서 높임을 받으실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에게 해당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제 소나 양 혹은 다른 짐승들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러한 그림자들이 사라졌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일컫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합당한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롬 12:1). 즉, 모든 사람이 마음과 정신이 새롭게 됨으로써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하나님께서 신령한 제사를 요구하시며, 우리에게 우리의 혼과 몸을 바치라고 명하시는 것을 볼 때,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정결하게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제사에서 우리 자신의 더러움을 그대로 가져오려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큰 오용입니다. 우리 자신을 드리는 이 엄숙한 제사에 결합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예물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시편 50편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것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종의 제사입니다(시 50:23). 우리의 구제 역시 히브리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제사입니다(히 13:16). “가난한 나그네들과 궁핍하고 곤란 중에 있는 자들을 돕는 것을 잊지 말라. 그것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참된 제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진실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서 그러한 제사를 받으시게 하려면 우리는 순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지자 학개가 “우리가 만지는 것이 우리의 부정함으로 인하여 더러워질 것”이라고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거부하십니다(학 2:13). 그곳에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모든 화려함과 의식에도 불구하고 정죄 받았습니다. 왜입니까? 어떤 이는 강도질에, 어떤 이는 음행에, 또 어떤 이는 다른 악한 거래에 빠져 있었고, 또 다른 이는 잔인함과 시기와 원한이 가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성전에 나아와 겉치레를 하며 자신들이 놀랍도록 경건한 사람인 척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그 자신부터 부정할 때, 그가 만지는 모든 것 역시 더러워지지 않겠느냐? 참으로 그러하다. 그렇다면 너희의 제사들은 부정함으로 가득하구나. 너희의 손이 더러운데도 너희가 거룩한 것들을 만지러 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를 더욱 노엽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미 선언한 바와 같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순결하고 깨끗해야 한다는 것, 즉 우리의 모든 악한 생각과 애착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을 배웁시다. 만일 우리가 그것들에 얽매여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뻐하지 않으시며, 우리가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 그분의 섬김에 헌신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한다고 아무리 그럴듯하게 공언할지라도, 의심할 바 없이 그분은 그 모든 것을 거부하실 것입니다. 또한 만일 우리의 기도와 간구와 구제가 하나님께 열납 되기를 원한다면, 모든 것이 진실하고 자원하는 마음에서 나오도록 주의합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첫 번째로 명심해야 할 내용입니다.
만일 어떻게 사람이 그 안에 아무런 흠이 남지 않을 정도로 깨끗해지는 것이 가능한지 묻는다면, 우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완벽함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은 매우 확실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곳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우리의 더러움 속에 머물러 안주해도 된다는 식으로 면죄부를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자신이 부정함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고, 하나님 영의 권능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에 힘쓰며 온전한 순결함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마음을 품고 우리 안에 이러한 소망이 있을 때, 비록 우리의 제사들이 열납되기에 합당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받아들이기를 그치지 않으십니다. 왜입니까? 히브리서의 다른 곳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히 13:15). 즉,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와 감사의 제사와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바로 그분을 통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우리의 제사의 순결함이 어떤 식으로 평가되는지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 제사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적셔져서 모든 얼룩으로부터 깨끗해질 때 그러합니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을 섬기고자 애쓰는 자는 반드시 자신을 살피고, 자기 자신의 추함과 부정함을 알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두 마음을 품고 속임수를 쓴다면(double with God), 그분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록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가 본분 이상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가증한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또한 이와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을 눈속임하기 위해 우리의 상황을 겉으로만 꾸밀 수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교묘한 행위를 책망하시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 본문에 선언된 것처럼 우리의 잘못을 배가시킬 뿐이라는 점을 주목합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제물을 가져오면서도, 부정한 제물을 드리지 않겠다고 공언하는 것이 그저 사안을 그럴듯하게 색칠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여전히 “개값이나 개나 다 똑같다. 창기의 몸값이나 음행이나 나에게는 마찬가지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악에 부수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 중 어느 하나라도 붙들고 있다면, 우리는 항상 정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정직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듯, 하나님께서 두 마음(a double heart)만큼 미워하시는 것은 없습니다(시 12:3). 상황이 그러하니 각자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가 우리 스스로를 잘 시험해 봅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헛된 구실과 상상 속에서 스스로를 치켜세우거나 완고하게 하지 않도록 합시다. 오히려 우리 안에 하나님을 불쾌하시게 하는 어떤 악의 얼룩이 있음을 발견할 때, 우리 각자가 그 일로 인해 스스로를 불쾌히 여기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죽이는 제사를 드리며 다음과 같이 말합시다. “아아, 주님, 제 안에 악한 더러움이 많음을 잘 아오니, 제가 당신의 위엄 앞에 나아갈 때 저는 완전히 당황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 제가 이러한 죄악으로 점철된 제 자신을 보기에 마음이 무거운 줄 당신께서 아시오니, 이 마음을 당신께 제물로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거짓 없는 회개로 우리의 죄악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함을 일단 인지하신다면, 그분은 우리를 받아주실 것입니다. 이 회개야말로 우리가 그분께 빚진 제사이며, 어떤 악으로 기우는 것이나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이 마음의 고통이야말로 하나님께 제사, 즉 합당한 제사를 드리는 진정한 검이기 때문입니다(롬 12:1).
만일 하나님께 어떠한 꾸며낸 것도 가져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불의와 결부시킨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구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으로 합니까? 그들의 약탈물로 합니다. 그들은 약탈하고 강도질한 후에, 그 전리품의 일부를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께서 노여움을 푸실 것이라고 스스로 확신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짐승같이 하나님을 조롱하는 일은 없습니다. 어떤 이가 음행을 저질렀을 때, 그는 어떤 대가를 치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구속(redeeme)하려 계산할 것이며, 그것도 더러움으로 가득 찬 대가로 그렇게 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이 구절에서 말하는 바를 부지런히 주목합시다. 즉,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눈에 가증하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이미 그토록 죄를 범한 것만으로도 너무나 과한데, 거기에 두 번째 잘못을 더해서야 되겠습니까? 만일 어떤 이가 착취와 부당한 거래를 통해 다른 사람의 재물을 긁어모은다면, 그는 이미 너무나도 큰 잘못을 저지른 상태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하나님과 그런 식으로 장난을 치려하여, 그 재물의 이름 모를 일부분을 내놓거나, 구제의 방식을 취하거나, 혹은 (사람들이 천주교에서 하듯이) 나무토막(우상)에 예물을 바치거나, 미사를 노래하게 하거나, 어떤 연례 추도 예배를 정하거나, 어떤 예배당을 짓는 식으로 자신을 대속하려 생각한다면—만일 제가 말하듯 사람들이 돈이나 돈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키려 생각한다면—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배가시키는 것이며, 하나님을 더욱 큰 분노로 몰아넣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배신행위와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더러움과 결부시켜 마치 그분이 우리의 악행에 동조하시는 분인 것처럼 만드는 것보다 더 큰 모욕을 그분께 드릴 방법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하나님 앞에 어떠한 예물이라도 드리고자 한다면, 모든 종류의 부정함으로부터 반드시 멀어져야 함을 여러분은 보게 됩니다.
이제 모세는 이처럼 말한 뒤에, “유대인들이 그들의 형제들에게 은이나 곡식이나 포도주나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고리대금으로 물어뜯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 사이에서는 고리대금을 삼가게 하셨으나, 이방인(Paynims)들을 상대로는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것이 시민법일지라도, 앞서 언급했듯이 모세 오경에 포함된 모든 법을 십계명의 율법에 비추어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양심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십계명이야말로 모든 것의 완성(perfection)이며 우리 삶의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법을 마주할 때, 그것이 어느 계명에 속하는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시민법이라면, 질서와 통치(policy)에 관한 한 유대인들에게 고유하게 속한 것이지만, 그 실체와 근거, 즉 공평(equity)과 정직함(uprightness)은 우리에게도 남아 있다고 결론지어야 합니다. 제가 말하는 이 공평함은 단지 한때가 아니라 영원히 지속됩니다. 모든 정직함이 하나님의 의라는 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그런데 그 의는 영원하며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공평과 정직은 침해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비록 사람들이 이를 오용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신 모든 것이 의로우며 영원히 효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 앞에 그들은 충분히 유죄로 판명됩니다.
이제 본문을 달아봅시다. 모세는 유대인들이 자기들 사이에서 고리대금을 행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왜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는 고리대금을 행할 수 있게 허용하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인간이었기에, 그들의 재물을 약탈할 권한이 유대인들에게 부여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의 모든 민족, 즉 아모리 사람, 브리스 사람, 헷 사람 등의 재물을 유대인들에게 전리품으로 주셨다는 핑계를 댑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의 재물을 유대인들에게 약탈물로 주셨으므로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을 권한이 있었고, 심지어 그들 모두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큰 잘못을 범했으며, 하나님께 책망을 듣고 그에 따른 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헷 사람이나 아모리 사람, 여부스 사람, 가나안 사람, 혹은 그 땅의 다른 민족들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세상의 모든 민족을 일반적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집트와 시리아, 바다의 모든 섬, 그리고 유대인들과 상거래를 했던 모든 이들이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답변은 이 구절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통치상(policies sake) 유대인들에게 많은 것을 허용하셨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선한 것은 아니었음을 주목합시다. 이미 보았듯이, 그분은 어떻게 그것들을 허용하셨습니까? 진실로 그분은 그것들에 대해 형벌을 정하지 않으셨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구절에서 “너는 타국인들에게 고리대금으로 물어뜯을 수 있다”라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행위를 정당한(lawful) 것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처벌하지 않은 채로 두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둑질하지 말라”는 법은 항상 그 온전한 효력을 유지합니다. 이 말씀 아래서 우리는 이웃을 괴롭게 하는 어떠한 악한 관행을 행하는 것도 금지되며, 다른 사람의 손해를 통해 이득을 취하는 것도 금지됩니다. 짧게 말하자면, 사람들 앞에서는 이것이 도둑질로 정죄되지 않을지 모르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시민법은 모든 잘못을 처벌하지 않으며, 처벌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세상의 재판관들을 고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들은 처벌에 힘써야 마땅하지만, 최선을 다한 뒤에도 그 위대한 날에 심판받을 많은 악행들을 그대로 지나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고리대금을 행하고 이방인들을 이 구절에 언급된 방식으로 다루도록 허용하셨을 때, 그것이 사람들에게 도둑질을 금하신 그 계명을 해치려 하신 것이 아님을 주목합시다. 고리대금으로 자행된 이러한 도둑질이 사람들에 의해 처벌받지는 않았음을 인정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십계명에 담긴 의는 영원하며 사람이 그것을 바꿀 수 없다는 지점으로 항상 돌아가야 합니다. 상황이 그러하므로, 우리는 어떤 해를 끼치는 것이든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금지된 것이라고 결론지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들(유대인들)은 자기들끼리 착취나 다른 악행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이 사악한 관행을 마음대로 행해도 된다고 스스로 확신하고 있으나, 그들은 이것으로 결코 면죄부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두 곱절로 정죄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교회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셨으므로 그들은 우리와 연합해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잃었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쫓겨나 추방당했습니다. 그 사이에 우리는 육신으로는 그 혈통에서 나오지 않았을지라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여겨집니다(갈 3:7). 그러므로 비록 옛적에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고리대금으로 빌려줄 수 있는 특권을 가졌을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해도 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교회로부터 잘려 나갔고, 그들의 반역과 불순종으로 인해 사생아로 여겨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핵심이자 주요한 요점은 우리가 이 구절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 적용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너희 형제들에게 고리대금을 행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형제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가까이 있는 자들이나 멀리 있는 자들 모두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우리의 화평이 되러 오셨음을 압니다(엡 2:13).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가 양자되었음을 선언하신 때부터 모든 이들 사이에 공통된 형제 관계가 형성되었으며, 성경이 말하듯 이제 더 이상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은 없습니다(갈 3:28).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런 차별 없이 형제라고 일컬어지는 이상, 유대인들이 자기들 사이에서 지키도록 명령받았던 그 공평을 오늘날 우리도 우리 사이에서 지켜야 한다고 결론지읍시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는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고리대금으로 물어뜯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하나의 요점으로 명심합시다.
이제 우리는 ‘고리대금(usury)’이라는 단어가 여기에 쓰인 동사에서 유래했으며, ‘물어뜯다(To bite)’를 의미한다는 점을 주목합시다. (단어 대 단어로 번역하자면) “너는 물어뜯음으로 갉아먹지 말라” 혹은 “너는 물어뜯음으로 물어뜯지 말라”고 기록된 것입니다. 이처럼 ‘갉아먹음’ 혹은 ‘물어뜯음’이라는 단어는 비유적 표현을 통해 고리대금이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왜입니까? 그것이 고리대금을 짊어진 가난한 사람을 물어뜯고 소진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의 취지는, 우리가 이웃에게 어떠한 이득을 취함으로써, 그들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이득이란 타인의 손해를 통해 얻어지는 이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 단어들에만 엄격하게 매여 있지 않도록, 에스겔 18장에서 고리대금을 정죄할 때 여기에 쓰인 ‘물어뜯음’을 의미하는 ‘네셰크(נֶשֶׁךְ)’라는 단어만 사용한 것이 아님을 주목합시다(겔 18:13 참고). 그는 ‘증가’를 의미하는 또 다른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마치 원금 이외의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그 어떠한 이익도 남기지 못하도록 모든 종류의 이득을 금지하신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상거래를 그만두어야 할 것이며, 서로 합법적으로 사고팔 수도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금지하시는 것은, 자기 자신의 손해 없이 자기 재물을 내어주면서도 타인의 재산을 빨아먹으려 하고, 자신이 부유해질 수만 있다면, 이웃에게 해를 끼치든 말든 상관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이득이나 증가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 에스겔에 의해 정죄된 ‘증가(increase)’입니다.
또한 우리는 모세가 이 구절에서 사용한 다른 단어들을 부지런히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돈의 고리대금 이득뿐만 아니라, 곡식과 포도주와 모든 것의 이득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나로 말하자면, 돈으로는 고리대금 이득을 취하지 않았고, 다만 곡식이나 포도주로 취했을 뿐이며, 그것은 보상으로 받은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순전한 조롱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죄를 범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악행을 보지 못하시도록 기꺼이 교묘하게 행동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담이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가렸을 때, 그것이 그에게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압니다. 우리가 우리의 악한 관행을 색칠하기 위해 취하는 그 어떠한 부동하는 명분들이 아담의 무화과 잎이 그에게 주었던 것보다 더 나은 처지가 되게 하리라고 생각합니까? 사람들 스스로가, 심지어 완전히 눈먼 자들조차 우리의 악행을 더듬어 찾을 수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눈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이 고리대금은 오직 돈에만 있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너무나 어리석게 미혹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모든 종류의 이득으로 확장하셨음을 우리는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곡식이나 포도주로 증가분을 취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고리대금업자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용어에만 엄격하게 매여 있을 것이 아니라, 그로써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여기서 ‘물어뜯음’이라 불리는 것은 매우 명백합니다. 왜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보고 있으며, 단어 그 자체도 우리에게 설명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서 가난한 자들을 물어뜯고 갉아먹는 것에 대해 다루시는 것을 볼 때, 그분은 우리가 어떠한 불법적인 수단으로도 타인을 갉아먹지 말고, 다른 사람의 재물을 우리에게로 긁어모으지 말라는 주의 사항을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입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단어를 엄격하게 압박하면서 그로써 의미하는 바를 살피지 않는다면, 그는 단지 하나님을 상대로 교묘한 궤변가 노릇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거래를 고리대금이라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스스로를 변명하려 한다면, 그것은 순전한 기만입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오직 고리대금이라는 용어에만 집착하여 이로써 빠져나가고 자신의 상황을 깨끗이 하려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아무리 교묘하고 영악할지라도 그들을 무죄 방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그들이 타인의 재물을 집어삼키는 굶주린 늑대와 같다고 선언하십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사안을 위장할 수 있는 어떠한 구실이라도 있다면, 다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악한 관행에 어떤 색을 칠하기 위해 세상에서 그토록 다양한 계약 방식들을 찾아낸 바로 그 원인입니다. 제가 말씀드렸듯이 어떤 이들은 돈만 받지 않으면, 무사히 빠져나갈 것으로 계산합니다. 왜입니까? 어떤 이는 “돈은 돈을 낳지 않는다”는 어리석은 논리를 내세웁니다. 그러므로 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받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 나로 말하자면 돈은 받지 않겠다. 다만 내가 빌려주는 얼마간의 돈에 대해서 곡식을 이만큼 내놓아라.” 그런데 곡식은 가난한 사람이 연명하는 수단이 아닙니까? 그런데 내가 그가 영양을 섭취하고 연명해야 할 그것을 그에게서 강탈하러 가야 하겠습니까? 내가 그에게 그토록 잔인하게 굴었기에 그는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그러면서도 내가 고리대금업자가 아니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를 연명하게 할 그것을 그토록 빼앗느니 차라리 그의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것이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프랑스 사람들이 “이것은 고리대금이 아니다”라고 말하거나, 이곳 제네바 사람들이 “이것은 갱신(renewing)이 아니다”라고 말하듯이 용어로써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맙시다. 왜입니까? 그들은 양피지 한 장을 가져와서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함께 계약했는지 보십시오.” 그러나 태양이 그것에 충분한 빛을 비추어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한다면, 하나님의 눈은 그만큼 보지 못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종이 한 장이나 양피지 한 조각의 그림자로 하나님의 눈을 흐리게 하여 그분이 조금도 보지 못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은 그러한 처리 방식을 잘 사용하여 (제가 말씀드린 대로) “오, 나는 이러저러한 계약을 맺었으니, 그는 고리대금업자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번듯한 구실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안들이 위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형식적인 절차와 함께 우리를 정죄하실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사안의 본질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귀를 기울입시다. 그것은 우리를 속일 수 없는 규칙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것에 비추어 검토합시다. 그것이 어느 계명에 속하는지 고려합시다. 즉,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그런데 이 계명에서 도둑질이란 무엇입니까? 진실로 그것은 속임수든 폭력이든 타인의 재물을 우리에게로 긁어모으기 위해 사용하는 그 모든 수단들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타인의 손해로 우리의 이득을 삼으려 한다면, 만일 어떤 이들이 얻을 수 있는 한 긁어모으려 한다면, 만일 그들이 자신의 신용을 남용하려 한다면, 만일 그들이 가난한 자들의 목을 발로 밟으려 한다면, 만일 그들이 그들 위에서 폭군 노릇을 하려 한다면, 혹은 다른 이들이 아첨하고 아부하면서도 그러는 동안에 그물을 쳐 놓고 때로는 이리저리 뛰고 때로는 잠복하며, 자신의 이웃을 약탈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한다면—제가 말하듯 우리가 이와 같이 행동한다면—우리는 하나님 앞에 도둑입니다.
그러므로 고리대금이란 곡식이나 돈이나 그 밖의 어떤 것을 빌려준 대가로 취하는 불법적인 이득이라고 결론지읍시다. 예컨대, 만일 어떤 사람이 돈이 아니라 곡식을 빌려준다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고리대금업자가 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내세우는 “돈은 돈을 낳지 않는다”는 논리는 유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만일 내가 곡식을 빌려주면서, 곡식 가치가 40실링일 때 어떤 사람에게 “자, 나는 3파운드를 받겠다”고 말한다면, 내가 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내가 그에게 내 곡식을 넘겨주었으니, 그만큼의 돈을 내게 가져다주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의 가치보다 20실링을 더 가졌으니, 하나님 앞에 고리대금업자가 아닙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것이 허용될 수 있다고 스스로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득 취하기는 도둑질입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렸듯이, 사람들이 사용하는 모든 교묘한 수단들이 하나님의 눈을 가리지는 못할 것이며, 그분은 이러한 거래를 하는 모든 자들을 도둑이자 고리대금업자로 항상 정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각별히 주의합시다. “너희는 고리대금으로 이웃을 갉아먹지 말아야 한다”고 기록된 곳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결과적으로 이 단어들을 통해 우리에게 모든 행실에 있어 공평과 정직을 사용할 것을 명령하셨으며, 특히 우리가 이웃에게 빌려주어야 할 때 그러해야 함을 명심합시다. 기꺼이 이루어지는 대부(loane)는 빌리는 자의 필요를 위한 것이며, 그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궁핍한 자가 내게 오고 내가 그의 곤경을 느끼면서, 그가 현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쥐어짜고 그를 통해 어떤 악한 이득을 구하려 한다면, 사람들 앞에서는 나의 위장이 어떠한 식으로 받아들여지든 그것은 고리대금입니다. 설령 사람들이 부지런히 조사하여 내게서 비난할 만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면 어떠합니까? 그들이 사안을 면밀히 체로 쳤으나 내게서 잘못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떠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나를 정죄하실 것입니다. 왜입니까? 나의 계약을 위장함으로써, 도움을 바라는 자가 궁핍하다는 이 구실 아래 타인의 손해를 통해 나의 이득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고리대금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에는 긴 정밀 조사가 필요하지 않음을 여러분은 보게 됩니다.
여기에 사람들의 위선이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종종 그들은 자기 자신의 양심이 충분히 답을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저것에 대해 조언을 구하러 오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설교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조언을 구하는 자들에게 답할 수 있도록, 상인이 되어야 하거나 세상의 모든 거래에 능숙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업무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그토록 잘 아는 자들이, 왜 그러한 거래에 훈련되지 않은 이에게 와서 조언을 구합니까? 우리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교묘한 수수와 기만적인 책략을 가진 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을 속이고 나서, 만일 누군가 그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에서 아무런 악을 발견하지 못하겠다”라고 말해준다면, 하나님 앞에서 정결해졌다고 스스로 확신하려 합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는 숨겨진 악의를 알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때 그가 교리를 단지 일반적인 원칙으로만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과적으로 돌아가야 할 요점은, 우리가 빌려줄 때 우리 이웃의 궁핍함을 오용하여 “좋아, 여기에 딱 좋은 기회가 왔으니, 이제 내 이득을 챙길 수 있겠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점임을 명심합시다.
하지만 이제 어떤 사람은 빌려주는 행위를 통해 얻는 모든 종류의 이득이 금지되는 것인지 물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논의해 볼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정직하게 거래하여 자신의 물건을 정해진 가격과 기한에 넘겨준 경우를 가정해 봅시다. 만일 상대방이 약속한 날짜를 어기고 돈의 지급을 지체한다면, 의심할 바 없이 그는 빌려준 사람으로부터 억류하고 있는 그 위약금이나 이득을 지불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이자나 수익이 법정(Iustice)에 의해 정해졌을 때, 그것을 받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는 확실히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가 살아가야 할 방편인 나의 상품을 가져갔습니다. 오늘 팔아야 내일 다시 물건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상품의 수익을 가로막음으로써 내가 상점의 거래를 유지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자는, 내 목을 베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을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나는 그를 믿었고 그는 특정한 날에 지불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한은 지났고 나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수 없으며, 그는 나와 내 가족이 굶어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경우 법정이 그 사람을 위해 대책을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비록 오늘날에는 법정이 이 일에 있어 자신의 직무를 매우 빈약하게 수행하고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오늘날의 법정은 오히려 사기꾼들의 편을 들어주는 듯하며, 물어뜯긴 자가 법적 절차를 통해 합당한 것을 회복하러 올 때, 오히려 그의 머리 위에 새로운 벌금을 지우기 위해 법정에 온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진실로 사람이 그토록 기만당하고도 아무런 구제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악한 조롱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사람이 이와 같이 기만당했다면, 그는 이자와 이득을 취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비난받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용어나 단어에만 매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이미 선언된 바를 명심합시다. 즉, 법적으로 면책 받는 것이 우리가 구해야 할 전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5퍼센트의 이율을 정한 법이 있다고 합시다. 이는 일반적인 법으로서, 판관들이 모든 개별 사례마다 일정한 비율을 정할 수 없기에 사람들이 5퍼센트까지는 취할 수 있도록 정해둔 것입니다. 왜입니까? 상거래를 위해서이며, 또한 이 한도를 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그러므로 언제나 5퍼센트를 받는 것은 정당하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만일 궁핍한 자가 내게 왔는데, 내가 그에게서 이득을 취한다면, 내가 어떤 변명을 늘어놓을지라도, 나는 하나님 앞에 도둑이자 고리대금업자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는 궁핍한 상태이므로 나의 본분은 그를 돕는 것인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점 역시 우리가 명심해야 할 바입니다. 또한 이와 동시에 반대로, 우리가 고리대금이나 이자라는 단어를 피하려 할 때, 하나님의 눈에 더 크고 극악무도한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함을 주목합시다. 내가 법이 허용하는 이자도 받지 않고 돈을 빌려주며 아무것도 취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거기에 모든 것을 망쳐버릴 ‘꼬리’를 덧붙이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내게 100크라운을 빌려달라고 간청하는데, 그가 200크라운의 가치가 있는 땅 한 필지를 내게 저당 잡혔다고 합시다. 그런데 채무 기한을 넘기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 돈의 이득에 대해 법이 판결해 주는 것 이상을 취하지 않거나, 아예 아무것도 취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 땅을 강제로 매각하게 하고, 그는 내게 소유권을 양도하게 됩니다. 사람은 이 모든 일을 행하고도 마치 무고한 사람인 양 손을 씻을 수 있다고 스스로를 믿게 하려 합니다. 그는 “무엇이 문제인가? 나는 돈을 빌려주었고, 돈을 돌려받지 못했을 때 그 땅을 샀을 뿐이다.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그것은 내게 양도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상대방의 자발적인 동의에 의해 이루어진 일입니까? 내가 그 가난한 자의 목을 쥐고 내 손아귀에 넣은 채, 그가 “그 땅을 팔겠다”는 말을 하게 할 때까지 붙들고 있었다면, 그러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사이의 재판관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제가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전적으로 단어들에만 매여 있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체를 주시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떠한 착취의 죄도 짓지 않았는지, 우리에게 허용된 것 이상을 가지지 않았는지, 혹은 다른 사람의 재물을 우리에게로 긁어모으지는 않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종종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정직해 보이는 명분들을 취하며 그 안에 오직 거룩함만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겠지만, 그러한 명분들이 실제로는 사람이 합법적으로 취할 수 있는 이득보다 훨씬 더 타인을 쥐어짜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얼마나 많은 술책이 만들어져 있는지 보고 있으며, 지금 그것들을 일일이 다 다룰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러한 관행들이 지금처럼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기를 하나님께 바랄 뿐입니다. 하지만 어떠합니까? 자기 이득을 챙길 줄 아는 자들은 모두 이 방면에 박사들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장난을 치며 자신들을 가릴 수의(shrouding sheets)를 찾아내면서도, 핵심이자 가장 주요한 요점에는 결코 눈길을 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고리대금이 정당한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 우리가 단순히 ‘고리대금’이라는 단어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와 취지가 무엇인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이것을 더 잘 알기 위해서는 그분의 율법에 나타난 공평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즉 “우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한다”는 말씀을 듣습니다(마 7:12). 그분은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고리대금을 금지하는 것 역시, 우리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한다는 이 말씀 속에 포함되어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이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변명할 방법을 상담하는 대신, 각자 사안을 이렇게 검토해 보십시오. “자, 만일 내가 이 사람의 처지라면, 누군가 나를 고리대금으로 이토록 쥐어짜는 것을 원하겠는가?” 참으로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그 사람이 내게 부당한 짓을 하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감히 그렇게 말하지 못할지라도,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자신의 행위로 인해 스스로를 정죄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엇을 더 묻고 따질 필요가 있겠습니까? 또한 만일 우리가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행하지 않는다는 이 공평과 정직을 준수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죄 방면될 것입니다. 참으로 그러한 방면은, 이 법의 문구 형식을 정밀하게 살피느라 우리의 지력을 소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자기 몫을 가져야 하며, 우리가 타인의 재물을 훔치거나 약탈하거나 삼켜서는 안 된다고 뜻하신다는 이 근거 위에 우리가 확고히 서게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사기나 기만으로 이웃의 재물을 우리에게로 긁어모으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우리가 그를 돕고 구제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더 나아가 주목합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의 재물을 약탈할 권한이 조금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궁핍함을 돕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도둑질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오, 나는 아무도 속이지 않았다”라고 말한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속였다는 답변이 돌아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누군가를 도울 방편이 있음에도 단 한 푼도 내놓으려 하지 않고, 구제할 수단이 있는데도 내 이웃을 극심한 궁핍 속에 버려둔다면, 의심할 바 없이 나는 하나님 앞에 도둑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주목할 점은, 때때로 고리대금은 큰 이득보다 작은 이득에서 더 정죄 받아야 마땅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의도는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 어리석은 구실을 찾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제가 한 이 말이 처음에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사람이 좀도둑보다 대도(大盜)를 더 낫게 여겨야 한단 말인가?” 저는 단어를 가지고 논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때때로 큰 이득을 취할 때보다 작은 이득을 거둘 때 더 큰 사악함이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어떤 부자가 있는데 그는 궁핍한 상태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현금이 필요한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활할 방편은 있으나 항상 자신의 자산을 늘리고자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될 어떤 땅을 사고 싶어 할 것인데, 이는 필요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더 부유해지고자 하는 욕망 때문입니다. 이때 누군가 그에게 1,000크라운을 빌려준다면, 이 금액의 이득은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는 4플로린의 이득보다 훨씬 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나중의 돈(4플로린)은 누구에게 빌려준 것입니까? 어린 자녀들이 있고 그들의 입에 넣어줄 빵 한 조각조차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 빌려준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4플로린을 빌려주면서 1플로린을 이자로 받으려 하고, 그 가난한 사람이 한두 달 끝에 그 돈을 마련해야만 한다면, 이 고리대금 혹은 반환(Return)은 다른 것보다 더 악합니다. 그는 자신의 돈을 너무 빨리 되돌려 받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낡은 가죽을 뒤에 남겨두는 일이라는 점은 인정하나, 그사이에 그 가난한 사람이 어디서 새 가죽을 찾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작은 이득이 어떤 큰 이득보다 훨씬 더 해로운 것임을 보게 됩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그 이득을 감당할 수 있고 실제로 그로 인해 뼈아픈 고통을 겪지 않는 다른 이에게서 매우 큰 이득을 취하는 것보다, 가난한 사람을 훨씬 더 쥐어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결론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이 구절에서 우리가 어떠한 불법적인 수단이나 불의한 거래, 혹은 잔인함으로 다른 사람의 재물을 우리에게로 긁어모으는 것을 금지하신다는 점을 압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고리대금과 탈취를 변명하기 위해 교묘한 술책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누구도 쥐어짜서는 안 되며, 우리가 취하는 이득이 가난한 자들의 피를 빨아먹고 그들의 재산을 뼈까지 갉아먹는 세금이나 부과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심으로써 항상 본질을 강조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가 번영하게 하시려는 의도”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부를 쌓기 위해 사용하는 모든 불법적인 수단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그분의 복이 우리가 마련할 수 있는 그 어떤 준비보다 우리에게 더 유익할 것이며, 우리가 부유해지기 위해 들이는 모든 고통스러운 수고도 그분께 복을 받는 것만큼 큰 목적을 이루어주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번영하게 하실 것이며, 그분은 우리를 부양할 방편을 주시기에 충분히 부유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여기서 인간의 불신앙을 꾸짖고자 하셨음을 배웁시다. 사람들은 그분을 신뢰하지 못하고, 땅이 자신들을 저버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저마다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나는 이런 수단을 써야 해, 이런 묘책을 부려야 해, 이런 사업을 살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나는 모든 일에서 뒤처질 것이고, 수척해질 것이며, 이런 식으로 진행하지 않으면 생계의 절반도 꾸리지 못할 거야.” 우리가 이러한 불신을 가질 때,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러한 악한 거래를 사용하는 근본 원인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모든 것들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그분의 뜻에 합당한 것과 그분께서 허용하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시도하지 맙시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번영하게 하실 것이며, 그분의 복이 우리가 불법적인 수단으로 얻을 수 있는 그 무엇보다 우리에게 더 큰 도움이 될 것임을 확신합시다. 마찬가지로 약탈과 고리대금, 그리고 그와 같은 악한 거래에 자신을 내맡기는 모든 자들 위에 그분의 저주가 임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장차 더 자세히 선언되겠지만, 그들이 스스로에게 그러한 무법한 자유를 허용할 때 얼마나 끔찍한 혼란에 빠지게 되는지를 우리는 봅니다.
이제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 면전에서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며 무릎을 꿇읍시다. 그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분께 온전히 봉헌되어, 우리가 그분을 섬기러 나아갈 때 순결하고 그분께서 받으실 만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간구합시다. 비록 그 제사들에 항상 많은 점과 얼룩이 있을지라도, 그분께서 그것들을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러는 동안 그분께서 그것들을 고쳐주셔서,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온전함에 우리가 도달할 수 있게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우리가 입을 열어 그분께 부르짖거나 우리의 재물로 구제를 베풀 때, 어떠한 사악한 애착도 없이 행하게 하시고, 그분께서 우리 손에 맡기신 것을 잘 관리하여 훗날 우리가 그분께 회계 보고를 하러 갈 때 충성된 청지기로 발견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우리가 서로 정직하고 형제다운 거래를 하며 살아가고, 각자가 자기 자신의 이익을 구하되 이웃을 괴롭게 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사람이 가능한 한 우리의 도움과 구제를 받을 수 있도록 힘쓰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그분께서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신 형제애를 유지하려 힘씀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나타내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이 은혜를 우리뿐만 아니라 땅 위의 모든 백성과 나라들에게도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