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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신명기 설교

신 23:20-23

작성자doulosdei|작성시간26.06.10|조회수32 목록 댓글 0

134회 설교: 23장 여섯 번째 설교

1556129일 수요일

 

23:20-23 “타국인에게 네가 꾸어주면 이자를 받아도 되거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네가 서원하지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리라 그러나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어제 간략히 선언된 바와 같이, 만일 여기에 담긴 약속이 우리 마음에 잘 새겨진다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그러한 수단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생계를 꾸리는 것에 만족할 것입니다. 우리가 속임수를 쓰고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불신앙 때문입니다. 그것이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억제하시려는 의도로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이 약속을 언급하시는 이유입니다(1:5). 히브리서에서 사도가 모든 종류의 탐욕을 바로잡고자 할 때 우리를 인도하는 지점도 바로 이곳입니다(13:5).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과 함께 모든 정직함과 공평함 속에서 살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이 복을 항상 우리 눈앞에 두어야 한다는 점을 잘 명심합시다. ,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우리를 부양하실 책임을 친히 맡으셨기에, 우리 각자는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의 섭리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계를 위해 수고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용하신 수단들을 사용합시다. 만일 우리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고 않고 어떻게 해서든 부유해지려 생각한다면, 반대로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그분의 복을 거두어 가신다면,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쓴들 그 결과가 어떠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진실로 모든 것은 물처럼 빠져나갈 것이며 우리는 뒤처지게 될 것입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제멋대로 재산을 늘리도록 한동안 내버려 두실지라도, 결국 그것은 그 자신과 그의 자녀들 모두에게 화로 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유혹에 미혹되지 맙시다. 많은 사람이 타인을 약탈하고 수탈함으로써 큰 이익을 얻고 많은 재물을 쌓는 것을 볼 때, 그것으로 인해 그들을 시기하지 맙시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복은 세상의 그 어떤 부보다 훨씬 더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복은 자신의 경계를 지키며 모든 악한 거래를 멀리하는 자들에게만 약속된 것입니다. 진실로 우리가 눈을 뜨기만 한다면, 여기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말씀에 대해 충분히 경고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떠합니까? 모든 사람이 너무나 앞만 보고 달려가기에, 매일 우리에게 명백히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그 일들을 우리는 고려하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세상의 큰 부분을 집어삼켰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는데, 그가 얼마나 갑자기 소멸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지를 보면 누구라도 당황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탐욕과 착취 등을 어떻게 저주하시는지를 마치 손가락으로 가리키듯 우리에게 보여주시지만, 우리는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불평하며 말합니다. “, 보라, 우리는 스스로 앞서 나갈 줄 알았는데 그 사이에 우리는 뒤처지고 말았구나.” 그렇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지하고 있는지, 혹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범위를 넘어 나아가지는 않았는지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 모든 가르침을 통해 더 나은 길로 나아가기를 배웁시다. 사방에서 그토록 움켜쥐고, 굶주린 늑대 노릇을 하며, 오직 속임수와 영악함만으로 순박한 이들을 에워싸고 함정에 빠뜨리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저주하시는 것을 볼 때, 즉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허물어뜨리시고 소멸시키시는지 볼 때 말입니다. 반면에 건전하고 정직하게 걷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을 볼 때, 비록 그들에게 커다란 풍요는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그들을 먹이시고 그들의 가족을 돌보시는 것을 우리가 목격할 때 말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 그토록 저주받은 세상의 모든 수단을 갖기보다, 오히려 우리의 하나님으로부터 이와 같이 복 받기를 훨씬 더 갈망합시다.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favor)은 어떤 사람이 살아갈 방편이 넉넉지 않을 때, 그가 막대한 수입과 부유한 상거래와 주머니 속의 돈, 그리고 창고와 지하실에 가득한 자기만의 비축물을 가졌을 때보다 훨씬 더 밝게 빛납니다. 왜 그러합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모든 것을 넉넉히 갖추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자신을 도와주실 필요가 없다고 계산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살아야 하거나, 자신을 부양할 방편이 많지 않을 때, 그리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길어야 1년 안에 다 소진될 정도일 때에도, 줄어들지 않고 계속 나아가며 자신의 재산이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쌍히 여기신다고 확신할 때그가 이처럼 시간을 보내고 연말에 이르러,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셨음을 인정하게 될 때(제가 말하건대) 그곳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훨씬 더 명백한 선언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결과로써 그분께서 자신의 백성을 어떻게 축복하시는지, 그리고 그분의 복이 얼마나 큰 효력이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이제 이와 함께, 하나님께서는 고리대금, 착취, 뇌물 수수와 같은 악한 거래를 사용하지 않는 자들을 축복하시되, 참으로 그들이 손을 대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라고 여기 기록된 말씀을 명심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이 구절에서 자신이 게으름을 축복하지 않으실 것이며,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허용된 수단으로 최선을 다하기를 원하신다는 점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 일은 무엇이든 행하도록 우리 자신을 헌신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그분의 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무익한 덩어리처럼 있으려 한다면, 그분께서 우리를 버리실지라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왜 그러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번영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실 때 덧붙이시는 조건을 우리가 보기 때문입니다. , 우리 각자가 자신을 그분께 드려야 하며, 그분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행할 것을 요구하신다는 점입니다. 이제 수단이 항상 사람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님을 인정하나, 그럼에도 우리 편에서는 우리의 힘이 닿는 대로 선한 일에 힘쓰도록 노력해야 하며, 모든 염려로부터 자신에게 특권을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사안의 결론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유대인들 사이에서 모든 종류의 고리대금을 금지하셨을 때의 목적은 오늘날 사람들이 그것을 삼가게 하려는 것이었음이 선언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동일한 하나의 유대로 묶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화목하게 된 이상, 우리는 모든 고리대금과 그 밖의 악한 거래들을 버려야 하며, 세상 그 누구에게라도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과 다르게 행해서는 안 됩니다(7:12). 왜 그러합니까? 우리가 같은 나라 사람이든 먼 곳 사람이든, 우리는 모두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 하나님께서 우리 사이에 세워주신 그 이웃 관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15편에 기록된 바, 하나님의 교회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고리대금이나 불법적인 거래로 일을 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점으로 돌아갑시다(15:5 참고). 그러한 거래는 타인의 재물을 빼앗는 것이며, 우리가 마땅히 구제해야 할 자들을 오히려 갉아먹는 짓입니다. 짧게 말하자면, 이것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우리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실로 그것이 이 모든 일의 취지이며, 사람들이 다른 이들에게 해와 손해를 끼칠 수 있는 그 어떤 악한 계약들을 위장함으로써 하나님과 장난을 치지 않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또한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신 바를 부지런히 주목합시다. ,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요구되는 참된 온전함을 가졌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빌려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6:35). 이는 우리가 모든 이득과 증가분을 삼가야 할 뿐만 아니라, 만일 우리가 베푼 선행을 결코 같은 방식으로 갚을 수 없는 가난한 자가 있다면, 그곳에서 우리의 관대함이 나타나야 함을 의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일 우리가 보상을 기대한다면,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섬김이 하나님께 열납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이처럼 여러분은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첫째로, 그들은 속임수든 착취든 모든 종류의 해를 끼치는 행위를 삼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그들은 궁핍한 자들을 돕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능력을 고려해야 하며, 자신에게 그것을 행할 방편이 있는 만큼 필연적으로 궁핍하여 도움을 구하는 자들을 구제해야 합니다. 참으로 인간의 사악함은 이 문제가 매일 다뤄질 것을 요구하며, 사람들이 같은 목적을 위해 훈계하고 또 많은 이들 안에 있는 잔인함을 억누를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바를 마땅히 그래야 하듯 배울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많은 설교와 방대한 책들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본성 자체가 각자의 본분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듣는 데 둔하고, 더욱이 결코 충분치 않을 것이며 땅이 여전히 우리를 저버릴 것이라는 그러한 불신앙에 사로잡혀 있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권고를 받고 격려를 받아야 할 처지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해줄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되며, 제가 말씀드린 그 짧은 교훈을 항상 의지하며 각자 스스로를 일깨워야 합니다.

이제 모세는 사람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반드시 이행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그에게 죄로 돌려질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는 만일 사람이 서원을 삼가고 전혀 서원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악도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서원에 얽매어 두지 않으시며, 다만 그들이 서원한 바를 완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하십니다. 만일 그들이 아무것도 서원하지 않기로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일로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기서 서원이 언급될 때, 그것이 사람이 분별없이 무작정 약속하고 싶어 하는 그 어떤 것을 무차별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주목합시다. 성경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원할 때 우리가 상대해야 할 분, 즉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모든 서원은 사람들이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를 지혜롭게 판단할 만큼 경외함 속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명심합시다. 실제로 내가 어떤 사람에게 무언가를 약속한다면, 나는 그가 그것을 받아들일지 아닐지를 스스로 숙고할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을 조롱하듯 그가 기뻐하지도 않을 일을, 그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모른 채 약속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그가 그런 일을 좋아하는지 아닌지 그분의 뜻을 알 만큼 그를 존중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더 깊이 묻지도 않고,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분께 서원하려 든다면, 그것은 그분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을 죽을 수밖에 없는 피조물보다 더 가볍게 여기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세의 이 교훈을 통해 더 나은 유익을 얻으려면, 이 중요한 근거를 세워야 합니다. 그가 서원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사람들이 공상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서원하기에 선하고 합법적인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진실로 서원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그분께 무언가를 서원할 때, 그것은 그분을 공경하고 그분께 경의를 표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원의 의미를 주시해야 합니다. 서원의 의미는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마음에 상기시키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 모두가 우리에게 가능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드리고자 힘쓴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빚진 것의 백분의 일도 그분께 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분께 무언가를 드릴 때, 우리는 그로 인해 우리가 그분께 매여 있으며, 그분께 신세를 지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서원이 이루어지며, 사람은 이를 통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선언하고 바칩니다. 이는 마치 주여, 내가 모든 것을 당신께 돌려드립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내가 그분께 드리는 그분의 은혜에 대한 인정이며, 마치 어떤 사람이 매년 소작료를 낼 때 자신이 경작하는 땅이 주인의 소유임을 인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하나님께 서원을 드릴 때,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기 위해 행하는 것이며, 그 사실을 가시적인 표로써 확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인간의 욕망을 따라 섬김을 받으실지, 아니면 그분 자신의 뜻에 따라 섬김을 받으실지 고려해 봅시다. 의심할 바 없이 그분은 친히 명령하신 방식대로 섬김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시도하면서 헌신(devotion)’이라는 그럴싸한 명분 아래 자신들을 가리려 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삼상 15:23). 그분은 그것은 헌신이 아니라, 너희가 마치 마법사나 박수무당이 되어 너희의 주술과 부적을 신뢰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가 행하는 그 무엇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정죄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말씀으로 가르쳐 주신 방식 외에는 그 어떤 섬김도 받지 않으실 것임을 우리는 듣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고 명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삼하 15:22). 그러므로 우리의 뇌리에 스치는 것은 무엇이든 그분께 서원하지 않도록 우리의 경계를 지킵시다. 왜입니까? 그것은 그분께 거부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이라는 이 말씀을 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앞서 언급한 서원의 목적을 고려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 그저 선하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것이 선한 목적을 위해, 그리고 정직하고 진실한 의도로 행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서원이 무엇인지 숙고해야 합니다. 율법 시대에 드려진 서원들은 일종의 엄숙한 감사의 표시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들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건강을 회복시켜 주신다면, 성전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겠다고 서원하곤 했습니다. 그가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자신이 건강을 되찾은 것이 하나님 덕분임을 고백하고, 자신을 병에서 건져주신 그분을 자신의 아버지로 인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전쟁터에 나갈 때나 위험한 항해를 앞두었을 때도 사람들은 이와 같은 서원을 했습니다. 우리는 야곱의 사례를 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태어난 고향 땅, 곧 기업으로 약속하신 땅으로 다시 데려다주신다면, 모든 소유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여기서 야곱의 의도는 무엇이었습니까? 비록 그가 아버지의 집에서 쫓겨나 낯설고 모르는 나라로 떠나는 가난한 도망자 신세였고 항상 죽음의 공포가 눈앞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가나안 땅의 상속자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곳으로 다시 인도하실 것임을 스스로 확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통해 그 약속을 보장받았기에, 그 사실을 자신 안에서 더욱 확고히 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마치 그 일이 이미 성취되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여기며, 이 감사의 서원을 덧붙였습니다. “나의 하나님, 당신께서 저를 안전하고 건강하게 집으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지금은 제가 모든 것을 잃고 이 땅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의 하나님, 당신께서 제게 약속하셨으니, 당신께서 저를 인도하셔서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을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제 이 은혜를 인정하며, 당신께서 제게 주실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바칠 것을 약속합니다.” 여러분은 이 사례가 율법 시대에 이루어진 서원들의 취지와 의미를 얼마나 충분히 설명해 주는지 보게 됩니다. , 서원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의 도구로 쓰였으며, 이러한 방식을 통해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정이자 그분께 드리는 일종의 경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사람이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또 그분께서 무엇을 받으시는지 판단하고 숙고함이 없이 드리는 서원들이 얼마나 헛될 뿐만 아니라, 그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예배를 타락시키는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왜 서원하는지도 모른 채 서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짓되게 오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례와 경험이 우리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이미 언급된 그 원리, 즉 서원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속한 것이기에 만일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진중함 없이 무턱대고 서원한다면, 마땅히 순결하고 깨끗하게 지켜야 할 것을 추하고 더러운 혼합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라는 점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예배를 더럽히는 것이며, 그분의 영광을 강탈하는 행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톨릭교도들이 얼마나 무딘 지각을 가졌는지 보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서원을 증명하기 위해, 마치 어떤 사람이 계약서나 문서의 일부분만 취하고 나머지는 다 파기해 버리는 것과 같이 본문을 완전히 부수어서 가져오는데, 그것이 명백한 거짓이 아니겠습니까? 가톨릭교도들의 행태가 이와 같습니다. 그들은 서원이라는 단어를 읽을 때 , 그렇다면 우리가 한 모든 서원을 하나님께 이행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먼저 그 서원들이 합법적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을 살해하려 공모하고 엄숙한 합의로 결탁했던 자들도 서원을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누가 이제 그들이 그 서원에 매여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신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들은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엄숙히 서원했습니다(23:12). 진실로 이것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살인 공범으로 만들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보십시오, 얼마나 마귀적인 합의입니까?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즉시 엄숙한 서원으로 확증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각이 바로 서 있다면 우리는 그러한 모든 서원을 정죄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언제 서원이 이행되어야 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모세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그분께 드려지고 바쳐지는 것을 받으시는 당사자로 지정한 것은 결코 이유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없다면 모든 서원은 아무런 가치도, 아무런 효력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가톨릭교도들은 그들의 서원에서 무엇을 합니까? 첫째로, 그들은 어떤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취하여 그것으로 스스로를 하나님께 묶어버립니다. 그러고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큰 신세를 지셨으며, 자신들이 그분으로부터 넘치도록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어떤 이는 특정 성인에게 순례를 가겠다고 서원하고, 어떤 이는 9일 기도를 서원하며, 또 어떤 이는 특정 요일에 육식을 하지 않거나 축일 전날에 금식하겠다고 서원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 중 단 하나라도 기뻐하시는지 고려해 봅시다. 의심할 바 없이 그분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순례를 가는 것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유대교적 행태일 뿐만 아니라, 악한 부패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율법 아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여야 할 하나의 성전을 두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으나, 그것은 이제 폐지되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친히 입으로 명하셔서 선택하신 그 장소조차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우리가 시온 산이나 사람들이 선택한 그 어떤 장소로 가지 않고도 온 세상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불러야 한다면, 제가 묻건대 어떻게 사람들이 자기 머릿속에서 그러한 거룩한 장소들을 만들어낼 수 있겠습니까? , 어떻게 그들이 자기 환상을 따라 로마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혹은 그 밖의 이름 모를 곳들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특정 요일에 육식을 금하는 것 역시 순전한 미신에 불과함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이 어떠한 음식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지 않고 절제하며 모든 음식을 먹도록 정하셨습니다. 마치 어떤 음식이 다른 음식에 비해 부정하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며 이와 다르게 행하는 자는 누구든지 마귀를 섬기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경건을 내세울 수도 있겠지만, 의심할 바 없이 마귀가 그에게 일을 시킨 것이며, 그는 마귀에게 그 품삯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교도들이 금식할 때 행하는 그 모든 잡다하고 하찮은 일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께 서원 된 것이 아님을 보며, 비록 그분의 이름이 빌려졌을지라도 그분께서는 그 모든 것을 거부하실 것임을 압니다. 왜입니까? 그중 어느 하나도 그분의 말씀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톨릭교도들은 자신들이 이행할 수 없는 것을 서원합니다. 예를 들어 수사들과 사제들이 말하는 이른바 종신 정결 서원이 그러합니다. 이제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정결을 지켜야 한다는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정결은 결혼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태에서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유지하며 정직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톨릭교도들 사이에는 결혼을 금하는 것 외에 다른 정결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이 서원을 드리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이행할 능력이 있는 일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마귀적인 오만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절제의 은사가 있다면, 그는 항상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며 모든 겸손으로 그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그에게 주신 것이 무엇이든 내일도 계속해서 주셔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물처럼 빠져나갈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부분에서 우리를 어떻게 처분하실지 알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결혼을 금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허용하지 않으신 일을 금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늘의 천사처럼 탁월한 덕을 가졌을지라도 결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그리로 부르셨고, 그에게는 치료책으로서 결혼을 사용할 자유가 있으므로 그것을 사용하게 하십시오. 그러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즉 절제의 은사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합시다(19:11). 그리고 그분의 주인이 하신 말씀을 신실하게 해석한 성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각자 부르심을 받은 대로 행하라고 권고합니다(고전 7:17). 그러므로 사람이 결혼을 금할 수 있는 힘이 자기 자신에게, 마치 자기 소맷자락 속에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마귀적인 오만입니다. 만일 그가 그것을 서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대적하며 그분을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으로 드려야 합니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로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 평생에 걸쳐 결혼을 금하는 은혜를 주실지 아닐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그분께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항상 주여, 당신께서 제게 주신 것을 당신께 드립니다라고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능력을 살펴야 합니다. 게다가 탁발 수사가 청빈을 서원하는 것이 얼마나 현저한 조롱입니까? 그들 중 일부는 청빈을 서원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합니까? 실상 그들은 돈주머니와 자루를 움켜쥐고, 공동 모금을 할 것이며, 가장 좋은 기부금을 냄새 맡아 찾아내는 사냥개처럼 사방에서 다른 사람들의 재물을 자기들에게로 옮겨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청빈을 서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분을 조롱하는 것이며, 다른 모든 사람의 희생으로 기름지고 살찌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이 수사들처럼 돼지우리 같은 곳에 숨어 지내는데, 그들은 많은 토지와 수입을 가지고 있으며 먹고 마시는 것으로 배가 터질 지경임에도 청빈을 서원합니다. 이 청빈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노골적으로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마지막으로 그들은 순종을 서원합니다. 누구에게 합니까? 수도원장이나 소수도원장에게 합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모든 순종, 즉 통치 규범에 속한 모든 것으로부터 특권을 얻으려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부모 아래 복종하게 하신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들은 수사라는 명목 아래 이 멍에를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재판관들과 정의의 칼을 가진 자들 아래 복종하게 하셨으나, 수사는 이 모든 것에서 자신을 제외하려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든 유대와 경계를 깨뜨리는 것이 그에게는 합법적인 일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시지 않는 새로운 순종을 자기 자신의 작업장에서 위조해 낸다는 구실 아래 행해집니다. 이처럼 우리는 가톨릭교도들이 일반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자신들이 하는 모든 서원으로 하나님을 조롱할 뿐만 아니라 대적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정면으로 맞섬으로써 그분의 복수를 자신들의 머리 위로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성경의 이 구절들을 왜곡하여 모든 서원이 분별없이 이행되어야 한다고 증명하려 드는 것은 너무나 거친 짐승 같은 어리석음입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서원할 능력이 있는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서원을 받으실지, 그리고 그것이 그분께 기쁨이 될지 아닐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제가 말씀드린 대로) 의도와 취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서원 그 자체가 선한 것일지라도, 그 의도가 악하다면, 그 서원은 부패하고 가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미 야곱이 자기 소유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한 것을 언급했습니다. 누군가 야곱처럼 행할 수는 있겠지만, 야곱과 같은 영에 이끌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야곱의 본을 따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려는 목적이 아니라, 공로를 세우려 하거나 혹은 자신이 품은 다른 어떤 망상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의도와 취지가 고려되어야 하며, 우리가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하나님께 서원하는지를 잘 숙고해야 합니다. , 이것저것을 행함으로써 공로를 쌓거나 하나님을 우리에게 매어두려는 그러한 어리석은 망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도록 우리를 자극하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대해 우리가 그분께 매여 있음을 확증하기 위해 행해져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그 은혜를 온전히 다 갚을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러한 공개적인 확언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이 순수하고 단순하게 준수되지 않는다면, 겉보기에 아무런 악이 없어 보일지라도 우리의 모든 서원은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께 거부당할 것입니다. 이 구절을 우리는 이와 같이 이해해야 합니다.

이제 기록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너의 입으로 말한 바를 스스로 이행하고, 네 자원하는 마음으로 서원한 것을 완수하라. 네가 전혀 서원하지 않거나 서원을 삼간다면 네게 죄가 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선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을 얽매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자유를 남겨두셨는지를 보게 됩니다. 이는 그들이 더 솔직하고 자발적인 선한 의지로 그분을 섬기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성 바울은 하나님께서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말하였습니다(고후 9:7). , 억지스러움이 없는 마음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순수한 경건으로 드리는 자를 의미합니다. 만일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혹은 구제금을 내면서도 강요당하거나 몹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린다면 그것은 그분께 거절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참한 구두쇠들이 하는 짓을 봅니다. 그들은 구제를 하면서도 이를 갈며, 가능하다면 한 푼도 내놓지 않으려 버팁니다. 한 손을 펼칠 때조차 다른 한 손으로는 빠져나가는 모든 것을 꽉 붙들려 합니다. 이러한 예물들이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겠습니까? 의심할 바 없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어떠한 엄격한 결속에 묶어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유롭게 내버려 두셨다고 말하는 이유를 여러분은 보게 됩니다. 이는 그분께서 진실하고 너그러운 애정으로 섬김을 받으시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가 여기서 명시적으로 네가 서원하지 아니하면, 네게 죄가 되지 아니하리라고 말한 까닭입니다.

만일 율법 시대에도 그러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더욱더 그로부터 자유로워져야 마땅합니다. 당시에는 사람들 사이에 서원이 흔했고, 우리 주 예수께서 아직 세상에 오시기 전이었으므로 그 시대의 연약함에 따라 그러한 의식들로 훈련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또한 신자들은 그 시대에 주어졌던 모형과 그림자들을 따를 필요가 있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러한 의식들을 정하셔서 그들을 어린아이처럼 붙들어 두셨을지라도,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소위 고삐를 늦춰 주셨으며 그들에게 서원을 권장하거나 자신을 얽매도록 유도하지 않으시고, 그 문제를 그들의 선택과 자유에 맡겨 두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율법 시대와 같은 속박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복음 아래 살고 있는데, 사람들이 무언가 서원하지 않으면, 충분히 경건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이것저것 서원하고 타인보다 앞서 나가려 할 때, 우리 주님께서 그것을 크게 기뻐하시리라 생각합니까? 반대로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분께서 정하신 바를 지키고, 우리의 모든 온전함이 담겨 있는 보편적인 규칙을 따르기를 훨씬 더 원하십니다.

더욱이 만일 어떤 사람이 서원을 통해 하나님의 율법에 무언가를 덧붙이려 한다면, 설령 그 서원 자체에 다른 악이나 결함이 없더라도, 그는 정죄 받아야 마땅하다는 점을 주목합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언하신 것에 그 어떤 것도 덧붙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원을 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 외에 무언가를 더 드리려는 식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항상 그분의 섬김 안에 붙들어 두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원칙을 지향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은 여전히 그분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진실로 우리에게 내가 이것을 바치겠다혹은 저것을 바치겠다라고 말할 특별한 규칙은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우리의 선택에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허용하신 범위를 넘어서는 안 되며, 그분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요구하신다고 아는 것 이상을 시도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사람들이 이러한 제어 장치에 붙들려 있지 않다면, 의심할 바 없이 우리가 서원하는 모든 것은 부정하고 마귀적인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부인하고 정죄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주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어떠한 큰 결속이나 속박을 지우지 않으시고 서원 여부를 그들의 선택에 맡기셨음을 보여주신 이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그분의 뜻은 만일 서원이 합법적이라면, 그것이 이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서원에 무엇이 요구되는지를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서원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지 알고 싶습니까? 우리는 첫째로 그것이 그분의 뜻에 부합하는지를 고려해야 하며, 둘째로 우리가 서원하는 바가 우리 능력 안에 있는 일인지를, 셋째로 우리의 의도와 취지가 정직하고 선한 규칙에 의해 다스려지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일 이 모든 것들이 갖추어졌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 앞에 그 의무를 다하기를 원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사안을 잘 숙고해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아가 우리 자신을 그분께 제물로 드리라는 부르심을 받았기에 우리 평생을 위한 일반적인 서원을 이미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부르심의 목적이 무엇인지 안다면, 그는 분명히 자신을 하나님께 서원하여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죄함 가운데 그분을 섬겨야 한다는 조건으로 우리를 영접하시고, 부양하시며, 그분의 자녀로 입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그러한 조건으로 우리를 받으시기에, 우리 각자는 자신을 그분께 드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진실로 우리가 그분의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지 않고서는 이 일을 할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또한 신자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때, 그들은 자기 자신의 힘을 신뢰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시도하거나 어떤 온전함에 도달하겠다는 망상으로 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비록 자신의 선한 의지가 약하고 불완전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아주신다는 사실에 우선 근거를 둡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들에게는 죄 사함이 약속되어 있으며, 그 약속 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 속에 있는 결점들을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성령으로 그들을 다스려 주시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근거 위에서 모든 신자는 자신을 하나님께 서원하여 드려야 합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이처럼 서원하여 드렸으니, 우리가 서원한 바를 반드시 이행하도록 주의합시다. 우리가 주목하고 두려워해야 할 경고가 덧붙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네게 죄로 돌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우리가 만일 율법이나 복음의 말씀을 단 한 마디도 들어본 적 없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의롭게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려는 목적으로 우리를 이 세상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그분께 부르심을 입고, 자신을 온전히 그분의 순종에 헌신해야 함을 알며,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자들은 자신들이 이중으로 얽매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일 그들이 그 결속을 깨뜨린다면, 그들의 잘못은 훨씬 더 크며 변명의 여지는 훨씬 더 적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을 우리를 위한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드린 그 일반적인 서원은 우리의 세례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으니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아버지로 공경합시다. 그분께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택하셨으니, 진실로 그분의 섬김에 우리 자신을 드립시다. 우리의 모든 삶이 그분의 순종 아래 있게 합시다. 참으로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합시다.

하지만 이제 개별적인 서원들에 관하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그것을 행하는 것이 합법적인지 묻는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그 점에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신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원을 적게 하면 할수록 항상 우리에게 더 좋습니다. 진실로 우리가 모든 서원을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자유에 맡겨 두셨음을 볼 때, 그것이 합법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우리 각자는 자신의 부르심 안에서 걷는 것에 만족합시다. 그리고 서원을 사용하여 우리 자신을 과도하게 얽매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걸어가야 할 때, 가야 할 길이 우리 앞에 제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 자주 곁길로 새어버려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깝게 하며, 결국 다윗과 함께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라고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19:12).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는 마땅히 필요한 지혜가 결여되어 있으며, 이리저리 방황하고 곁길로 새는 일이 발생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없이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있는 연약함 때문에 일상의 도리를 지키는 것조차 우리에게 힘겨운 일이라면, 마치 그 모든 것을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듯이 우리 자신에게 더 어려운 짐을 지우려 하는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우리가 모든 서원을 삼가고 다음과 같이 말하는 명쾌한 단순함에 만족해야 함을 보게 됩니다. “나는 나의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명령하셨는지 본다. 나는 더 나아가지 않고 그 명령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은혜를 인정하기로 뜻을 정했다면 그것을 반드시 이행하도록 주의합시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에게 한 약속도 지켜야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께 직접 향하며 그분을 당사자로 삼았을 때는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요약하자면, 이 구절을 통해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께 신실하고 믿음직스러워야 한다는 점을 명심합시다. 그분께서는 친히 그러한 분이시며 결코 자신의 약속을 어기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께 무언가를 기다림에 있어 기만당할 것이라고 의심하지 맙시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가 그분께 매여 있기를 원하셨으니, 우리 각자는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행동하지 말고 그분의 섬김 안에 굳게 머물도록 주의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았음이 우리에게 선언되었으니,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토록 귀한 값으로 우리를 사신 그분의 것임을 압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께 순종하며 살고 죽읍시다. 본성 자체로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순종과 또한 우리가 그분께 약속한 순종을 돌려드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힘쓰지 맙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순전하게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고, 이로써 우리가 참으로 그분의 백성임을 나타내게 하소서.

 

이제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 면전에서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며 무릎을 꿇읍시다. 우리가 그 잘못들을 더욱더 깊이 느끼게 하시고, 그 느낌으로 말미암아 오직 그분 안에서만 해결책을 구하는 회개에 이르게 하시기를 간구합시다. , 그분께서 우리를 온전히 새롭게 하시고 그분의 의로 우리를 입히실 때까지 우리의 지난 허물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구합시다. 그리하여 다 함께 고백합시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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