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회 설교: 22장 두 번째 설교
1556년 1월 3일 금요일
신 22:5-8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 길을 가다가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 새가 그의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보거든 그 어미 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되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 네가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
내가 여기서 반복하여 서술한 이 첫 번째 법은 우리의 모든 행실에 있어 우리가 정직함(honest)을 갖도록 살피고 모든 방종함(looseness)을 피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진실로 사람이 이런 방식이나 저런 방식으로 옷을 입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이 질서 있게 행해지기를 원하십니다. 만일 사람들이 변장을 하고, 필요가 아니라 어리석음을 위해 쓰이는 그러한 의복을 입는다면, 그것은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자들이 방탕하다면, 그것이 어찌 된 일입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본성을 잊은 것입니다. 여자는 마땅히 정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부끄러움이 없어 그들이 기어이 질서를 어지럽히려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짐승과 같은 상태입니다. 이것이 곧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어서는 안 되고,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의 요체입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구분이 있어야 함은 타당한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령 기록된 율법이 없었을지라도, 본성 자체가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여자는 머리를 가리고 교회에 나와야 하며 머리카락을 귀 주변에 늘어뜨려서는 안 된다고 말할 때, 그는 같은 점을 보여줍니다(고전 11:5). 그가 무엇이라 말합니까? “우리가 너희에게 그러한 것들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느냐?”라고 합니다. 만일 여자가 머리를 깎았다면, 그녀가 감히 밖에서 머리를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남자는 비록 머리를 깎았을지라도 머리를 드러내는 데 있어 충분히 대담할 수 있으나, 여자도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이며, 모든 이가 그녀를 조롱할 것이고, 그녀는 기어이 머리를 숨겨야만 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성경이나 기록된 말씀 없이도 이것을 알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알맞은 것을 살피도록 하기 위해 여러분 안에 일종의 정숙함의 씨앗을 심어 놓으셨음을 보지 못합니까?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려 의도하신 바는, 모든 이의 옷차림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 구분이 있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점을 주목합시다. 진실로 사람들이 그토록 변장을 하고 다닐 때, 어떠한 위험들이 뒤따르는지 우리는 봅니다. 많은 불편한 일들이 그들에게 동반되며, 하나님께서 그들로 인해 불쾌해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법을 제정하신 것은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변장하기를 즐기는 자들은 하나님을 멸시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도 알다시피 남자들이 여자의 의복을 걸치고 여자들이 남자의 의복을 입는 이러한 가면극과 가장극(maskings & mummings)에서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설령 그로부터 아무런 악이 뒤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행위 자체가 하나님을 불쾌하시게 합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그것에 대해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누구든지 그렇게 하는 자는 가증한 자입니다. 우리가 고의로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기보다는, 이 말씀이 우리 머리털을 곤두서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외에도, 이러한 일을 용납하는 것이 모든 음행으로 향하는 틈을 열어주는 것임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러한 변장들은 경험이 증명하듯 음란함의 유혹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남자들에게는 그들 스스로를 위한 별도의 의복 양식을, 여자들에게는 그들의 각 성별에 부합하는 또 다른 종류의 차림새를 정해주신 것이 필요 이상의 일이었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이 점에 관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심지어 우리의 의복에 있어서도 정직함이 있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실로 (내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것이 핵심적인 지점은 아닙니다. 만일 사람이 우리 삶의 온전함을 이 일에 둔다면, 그것은 마치 말 앞에 수레를 두는(본말전도) 것과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생략되어서도 안 됩니다. 심지어 이교도들조차 우리에게 교훈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만일 정직함에 대한 고려가 없다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머지 덕망들이 더 이상 덕망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는 셈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행동과 처신에 있어 어떤 질서와 분별과 정숙함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들은 짐승으로 퇴화한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복에 있어 일종의 정직함을 살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걷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가 됩니다.
진실로 사람들은 쉬이 지나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여자처럼 옷을 입지는 않을지라도, 만일 그들이 어떤 야한 차림을 하거나 자신들을 구경거리처럼 만든다면, 그러한 과도함은 이미 다른 측면에서 하나님을 불쾌하시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여자들이 남자의 의복을 입지는 않을지라도, 만일 그들이 너무 화려하고 호화로우며 너무 큰 과시를 하려 한다면, 그들은 내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다른 측면에서 여지없이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남자들이 여자처럼 되지 않도록 옷을 입어야 한다는 점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그들이 신부처럼 차려입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여자로 만들지 않으신 것을 후회하고 자신들의 성별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또한 여자들이 군인처럼 옷을 입고 다닐 때 (손에 물레를 들기보다는 차라리 어깨에 총을 메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듯이), 그것은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며 우리는 그것을 혐오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가르침을 받지 않았거나 하나님의 어떤 법이나 규례가 없을지라도, 우리 스스로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며, 조금이라도 순결함의 불꽃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그렇게 판단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무엇보다 먼저 남자들이 사용하는 의복 양식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남자로 창조하셨음을 보여주어야 하며, 여자들 또한 그들의 성별에 부합하는 정숙함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보게 됩니다. 첫 번째 지점에 관해서는 이와 같습니다.
두 번째 지점에 관하여, 또한 일반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차려입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용도(vse)와 정직함(honesty)을 존중하기를 원하신다는 점을 주목합시다. 이것들이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할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용도입니다. 내가 용도라고 말하는 의미는, 사람들이 추위와 더위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줄 만한 그러한 의복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직함으로 내가 의미하는 바는, 그들이 마치 연극을 하러 가는 것처럼, 혹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옷차림의 기이함 때문에 “저게 누구지? 오, 아무개구나”라고 말하며 쳐다보게 만들기를 바라는 것처럼 변장한 방식으로 입고 꾸며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용도를 준수한다면, 즉 단지 몸을 가리는 것만으로 충분히 여긴다면, 그리고 그와 함께 일반적인 질서를 깨뜨리지 않는 정도를 지킨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규칙입니다. 또한 여자들이 자신들을 꾸미는 데 너무 기교를 부리지 않고, 자신들의 치장을 구경하도록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장하시는 정직한 종류의 행실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사도 바울은 여자들이 ‘거룩한 정직함’ 혹은 ‘합당한 거룩함(comely holiness)’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딤전 2:9). 믿음 있는 여자들의 복장과 의복에 대해 말할 때, 그는 그들이 단지 정직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와 더불어 사람들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진보했음을 알 수 있도록 어떤 거룩함의 표지를 가져야 함을 뜻하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의복의 첫 번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고려한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과도한 화려함에 그렇게 크게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셔츠나 코트를 입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가리라고 명령하셨음을 상기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형상이 우리 안에서 일그러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옷 입음은 우리 조상 아담의 죄를 생각하게 해야 합니다. 죄로 인하여 우리가 더위와 추위 모두에 종속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우리의 수치의 표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우리 부패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서 일그러지지 않았더라면, 벌거벗음 그 자체는 부정직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고려를 한다면, 분명 우리는 지금보다 우리의 의복에 있어 질서와 정도를 지키는 데 더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음란함으로부터 순결하고 깨끗해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부적절한 일들을 미연에 방지하기를 원하신다는 점을 배웁시다. 예를 들어, 그분께서 “너는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 그 계명은 이 현재의 본문을 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했듯이, 여기에 기록된 모든 법은 행실에 관한 것이며, 선한 삶의 규칙들이고, 십계명에 귀속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열 가지 문장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남자가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라고 한 것이, 하나님께서 열한 번째 계명을 세우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중에 더 나은 생각을 하셔서 우리가 이전에 그분으로부터 들었던 것에 무엇인가를 덧붙이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너는 간음하지 말라”는 그분의 말씀에 대한 하나의 해석일 뿐입니다. 어찌 그러합니까? 간음을 금하심에 있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도 처벌받을 만하고 비난받을 만한 그 행위 자체만을 금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복이나 우리 행실의 어떤 부분에 있어서도 나타나지 않도록 사실상 모든 불결한 행동을 금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복이 불결함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정도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뒤범벅(hotchpotch)을 만들려 하고, 그러한 무질서한 처신으로 모든 것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에 아무런 개의치 않았다는 비난을 받을 만큼 방종함으로 달려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한 해악을 피하기 위해, 남자와 여자 모두 각자의 소명(vocation)을 따르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비록 우리가 실제로 간음을 범하지 않았을지라도,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간음으로 치우치는 어떤 악덕에 물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남자와 여자가 의복 양식에 있어 서로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 문장을 통해, 그분이 “너는 간음하지 말라”는 이 전의 말씀을 해석하고 확증하려 하셨음을 배웁시다. 이것이 마땅히 그러해야 할 만큼 잘 받아들여진다면, 우리 사이에는 지금보다 더 나은 규칙이 세워질 것이며, 의복의 남용을 시정하는 데 그러한 장애물들이 없을 것입니다. 어떤 나라들에서는 그 비용의 사치스러움이 곧 교정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제 자수와 너무나 호화로운 것들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이며, 보아하니 남자들이 고의로 여자의 치장으로 자신들을 과하게 꾸미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대비책이 마련될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정죄 받아야 할 다른 악덕들을 살피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을 변장시키기 위해 새로운 양식을 찾기 시작하면 결코 멈춤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것이 악한 뿌리에서 나오는 것처럼, 또한 악한 결말로 치우치게 됩니다. 야망과 교만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것들이 지금처럼 흔히 보이지 않았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단지 뽐내고 허영을 부리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으로 쓰이지도 않을 것들에 자신들의 돈을 쏟아 붓기 위해, 기꺼이 굶주림과 목마름과 신체의 수많은 다른 불편함을 견뎌내는 무리가 아주 많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합니까? 오, 그들은 화려한 의복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들은 멀리서 사람들이 자신들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주시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날 그것을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봅니다. 이 어리석은 호기심은 모든 시대에 걸쳐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군림해 왔으며, 오늘날에도 그들은 여전히 그것으로부터 교정되지 못한 채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과 본성을 멸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지자 스바냐를 통해 하신 말씀을 듣습니다(습 1:8). 거기서 그분은 항상 새로운 방책을 갈망하며 신기하고 기이한 옷차림을 찾는 그러한 사람들을 위협하십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분은 이러한 화려함과, 멀리서 주목받고 더 존대받기 위해, 그리하여 사람들이 “아무개가 새로운 양식을 발명했다, 아무개가 새로운 옷차림을 찾아내는 데 능숙하다”고 말하게 하려고 매일 새로운 양식을 찾는 사람들 그 자신을 정죄하십니다. 참으로 그러한 자들은 재봉사가 되도록 선고받아 마땅합니다. 목에 태블릿(tablets), 즉 사람들이 멀리서 쳐다볼 수 있는 호화로운 보석들을 기어이 걸치려 하는 이 위대한 영주들과 화려한 청년들은, 자신들을 변장시킬 그토록 다양한 종류의 의복을 찾아내는 데 큰 즐거움을 느끼고 있으니, 마땅히 모두 재봉사(taylors)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우리가 앞서 언급한 용도와 정직함,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규칙으로 돌아와야 함을 보여주신다는 점을 주목합시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지킨다면, 그것이 그분께 받으실 만한 봉사가 될 것임을 확신합시다. 반대로, 만일 우리가 매 순간 옷을 갈아입고, 우리 자신을 변장시키려는 어리석고 무절제한 욕망에 이끌린다면, 그것이 설령 아무런 악을 내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불쾌하시게 하는 일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어리석은 허영심에서 비롯되는지를 봅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허영에 빠져 있을 때, 분명 그들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멸시하며 결코 돌보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만심에 감염되어 기어이 칭찬을 들으려 합니다.
이제 사람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행할 때, 그 안에 아무런 악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 모든 변장과 과도함이 과도한 지출 외에 온갖 종류의 부패와 음행, 그리고 그와 유사한 것들로 치우치는 것 말고 무엇을 지향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그러한 위험들로부터, 그리고 우리의 몸을 음란함과 다른 오염들로 더럽히는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악한 기회들을 피해야 하며, 우리를 음란한 악한 욕망이나 다른 곳으로 유혹할 수 있는 그 어떤 것과도 상관하지 말고, 절제 있고 필요에 맞게 우리 자신을 차려입어야 함을 주목합시다. 이와 같이 여러분은 이 계명을 어떻게 실행에 옮겨야 하는지 그 요체를 보게 됩니다.
이제 모세는 덧붙이기를, “만일 사람이 새의 둥지를 발견한다면 새끼들은 취할 수 있으나, 어미 새가 알을 품고 있거나 새끼들을 돌보고 있을 때에는 그 어미를 놓아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눈에 보기에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기록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린 새들보다 더 크고 필요한 일들에 대해 말할 것이 없었겠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차라리 만일 사람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를 보거든 그녀를 괴롭히지 말고, 오히려 그녀를 구제하고 도우며, 어떤 경우에도 그녀를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곧 천진난만한 영혼인 유아를 해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방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어미 새가 새끼를 품고 있을 때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말할 필요가 무엇이었습니까? 이로써 그분은 자신이 모든 잔인함을 얼마나 크게 가증히 여기시는지를 더 잘 표현하려 하셨습니다. 만일 그 잔인함이 고작 작은 새들에게 미칠 때조차 그분이 그것을 견디지 못하신다면, 사람이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해치는 일로 나아갈 때, 즉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를 때 처벌받지 않고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작은 새들에 대해 말씀하심으로써, 단순히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보다 그분의 의미를 훨씬 더 잘 선포하셨음을 주목합시다. 그것은 마치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너희 자신을 그토록 친절한 마음을 갖도록 길들이고, 작은 새들조차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어떠한 잔인한 행위도 하지 말라. 너희끼리만 그것을 실천하지 말고, 작은 새를 볼 때에도 스스로 이와 같이 고려하라. 아니,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정직함과 이성에 더 잘 길들이기 위해, 우리에게 항의할 수 없는 피조물들에게조차 그것의 어떤 증거와 증언을 제시하기를 원하신다.”
어린 새는 우리에게 이성을 요구하거나 우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우리가 보기에) 그것들을 귀하게 여길 필요가 없고 정직함은 오직 사람들 사이에서만 사용되어야 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일을 통해 우리의 감정들을 더 잘 다듬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웃을 대하게 되었을 때, 그 일에 의해 제약을 받아 이렇게 말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무엇인가? 우리가 새들에게조차 잔인한 것이 허용되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우리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잔인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은 우리 주님께서 작은 새들에 대해 그렇게 말씀하신 대목에서 우리가 첫 번째로 기억해야 할 바를 보게 됩니다.
이제 이 법의 핵심으로 들어갑시다. 성경은 “어미를 반드시 놓아줄 것이요, 새끼는 네가 취하라”고 말씀합니다. 어미 새가 새끼를 품고 있을 때, 그 안에서 우리는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도리에 대한 하나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때때로 이 미련한 새들이 우리에게 교훈을 가르치기도 하는데, 이는 남녀가 너무나 짐승같이 되어 하나님께서 부득이 그들을 짐승들에게 배워오라고 학교로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안다”고 말했을 때(사 1:3), 그는 인간의 사악함을 상기시키고 마치 “너희는 들짐승보다 못하니, 가서 그들에게 배워라”고 꾸짖으려 했던 것입니다. 소가 자기 구유나 외양간을 아는 것은, 여러분이 마땅히 주 너희 하나님을 알아야 함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여러분을 자신의 양 떼와 교회 안으로 모아주시는 은혜를 베푸셨음에도 여러분이 여전히 들짐승보다 못한 상태로 남아 있다면, 여러분은 자연의 질서를 완전히 잊었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새들이 이토록 새끼들을 돌보는 것을 볼 때, 자녀를 돌보지 않는 남녀는 분명 그들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듯 어떤 방탕한 자들은 아내와 자녀가 집에서 굶주리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면서, 그 집 전체를 부양할 수 있는 돈의 세 배나 되는 금액을 술집에서 탕진하곤 합니다. 또한 자녀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어머니들도 있는데, 그들의 유일한 목적은 자녀로부터 손을 떼는 것이며, 자녀를 위해 수고를 감내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사랑과 다정함이 전혀 없음을 드러내며, 이 분야에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들짐승보다 더 못한 존재임을 증명합니다. 짐승들은 새끼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만 돌보지만, 인간은 그로부터 자신들의 평생에 걸쳐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배웁니다.
새들은 왜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만 새끼를 돌봅니까? 새는 평생 부모의 다스림을 받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성이 없는 피조물이기에 그럴 의무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비록 자유를 누릴 나이가 되었을지라도, 여전히 권면을 통해 인도와 다스림을 받아야 하며, 부모는 자녀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들의 의무를 상기시켜 주어야 합니다. 짐승에게는 이것이 필요하지 않으나, 짐승들조차 새끼들이 자신들의 책임에서 벗어날 때까지는 그 의무를 다합니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기 기록된 말씀, 즉 “어미가 새끼를 품고 있을 때 잡지 말라”는 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어미가 새끼를 품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보듯 어미 새는 새끼를 버리느니, 차라리 자기가 벌레들에게 먹히는 고통을 당하려 합니다. 어미 새는 마치 고문대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왜입니까? 새끼들을 돌보는 마음이 너무나 커서 그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이유를 묻는다면,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이것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새들에게 심어주신 본성적인 성향과 움직임에 따라, 새끼들을 볼 때 그들이 자기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비록 그런 보살핌 속에 앉아 있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일지라도,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그 일을 수행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목격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무를 보여주시는 하나의 그림을 보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여기서 자녀를 위해 간절히 수고해야 한다는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먹이고 부양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하듯이, 어머니 또한 그 일에 부지런히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그러한 처지에 묶어 두셨음을 인정하고, 기꺼이 그리고 솔직하고 자유로운 선의로 그 일에 굴복할 때, 그것이 하나님께 받으실 만한 봉사가 됨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 책임의 형상을 보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듯 부모가 자녀에게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보여주고 계신데, 우리가 그것을 뒤엎으려 한다면, 그것은 마치 아이가 제 책을 불태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학교에 다니라고 책을 사주었는데 그것을 갈갈이 찢어버린다면, 그 아이는 매를 맞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이 책을 우리가 불태우고, 어미로서 혹은 아비로서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필연적인 강권함에 이끌려 있는 그 가련한 새를 우리 손으로 죽여 도살자 노릇을 함으로써 그분이 자연에 세우신 질서를 고의로 파괴한다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닥치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우리를 위해 만드셨듯이 새들도 우리의 먹거리로 주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련한 새들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서 그분의 봉사에 전념하고 있을 때조차 우리가 그들을 아끼지 않을 만큼 잔인하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자들을 향해 우리가 지켜야 할 도리를 거울처럼 우리 눈앞에 제시하시며 베풀어 주시는 그 은혜를 거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이 나갔거나 너무 잔인한 분노에 휩싸여 있지 않다면, 그 가련한 새들이 도리를 다하기 위해 그토록 목숨을 내놓는 것을 볼 때 가련함과 긍휼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실 새들이 새끼를 품고 있을 때, 그 어미를 잡는 것은 하나님과 자연을 모욕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때의 어미 새들은 너무나 수척해져서 마치 거품이나 진흙처럼 아무 먹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주님께서는 인간을 제어하시며, 그들의 욕망이 완전히 무질서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십니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너희가 무엇을 하려느냐? 너희는 거기에 아무런 영양분이나 힘이 없음을 본다. 내가 그들을 나의 보호 아래 두는 동안에는 그것들이 양식으로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고 새들에게 그토록 잔인하다면, 분명 그는 이웃에게도 잔인할 것입니다. 새들이 번식할 때, 그들을 죽이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자는,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면 이웃의 목도 기꺼이 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왜 우리 주님께서 새끼들을 빼앗길지라도, 어미 새만은 안전하게 보호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는지 보게 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을 사용할 때, 그 사용이 질서 있게 되도록, 특히 우리 평생에 걸쳐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기르도록 배움을 얻습니다. 이 계명의 목적은 바로 그 지점으로 귀결됩니다.
내가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새들에게 어떤 큰 온전함을 두시려고 이 일을 고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작은 것에서 더 큰 것으로 나아가는 논증을 통해, 우리가 이웃을 향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가르치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이 자신의 도리를 다하고 있을 때, 그를 괴롭히거나, 그가 하나님과 자기가 책임져야 할 이들을 향해 의무를 다하느라 분주하다는 핑계로 그에게 고통을 준다면, 우리는 이중으로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만일 누군가 유모나 어머니가 자녀에게 도리를 다하고 있을 때, 그를 불안하게 한다면, 그것은 분명 이중의 잔인함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우리 각자가 이웃을 돕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들을 하기 위해 수고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을 돕기에 힘써야 하며, 그 일과 관련하여 그 누구도 괴롭힘이나 해를 당해서는 안 됩니다. 새들을 괴롭히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데, 하물며 이전에 선포된 것처럼 우리의 형제로서 우리와 연결된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하겠습니까?
이제 다음으로 이어지는 내용은, “사람이 집을 지을 때, 그 지붕 사면에 난간이나 울타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 땅의 가옥들에 적용되던 것이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집을 평지붕으로 지었으며, 모든 동방 국가들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같은 방식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지금 은밀히 듣는 것을 후에는 지붕 위에서 전파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27). 우리가 이 본문을 읽을 때, 이곳 나라들에서 사용되는 건축 형태에만 눈을 둔다면, 이는 생소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서 설교를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집은 마치 망루처럼 만들어져서 사람이 그 위를 오르내리며 걸어 다닐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러한 집들에 난간이나 울타리가 없다면, 사람들이 거기서 떨어질 위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자녀들이 집 꼭대기에 올라갔으므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해 많은 이가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남종이, 때로는 여종이, 결과적으로는 어린아이가 떨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모두가 위험에 처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집 사면에 난간을 만듦으로써, 이를 미리 대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이곳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스스로 숙고해야 합니다. 내가 이미 제시한 열쇠, 즉 우리의 삶 전체를 선하게 다스리는 데는 오직 열 가지 조항만이 있을 뿐이라는 원칙을 따라야 합니다. 흔히 말하듯 “양 한 마리에서 다섯 번째 다리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항상 이 지점, 즉 하나님께서 그분의 율법을 두 돌판과 십계명에 요약하셨을 때, 모든 의로움과 공정한 처신의 완전한 규칙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점을 견지해야 합니다.
여기서 자기 집에 피를 흘리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집을 짓는 방식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로써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생명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해야 하는지를 어떻게 보여주셨는지 보게 됩니다. 이 점을 한 가지 포인트로 주목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는 “살인하지 말라”는 이 계명의 해석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단지 살인이나 목을 치는 일, 때리는 일, 그리고 이웃을 괴롭히는 일을 삼가는 것만으로 충분합니까? 진실로 그러한 일들은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언급되기만 해도 혐오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살인을 금하심에 있어 훨씬 더 깊은 고려를 하셨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께 귀중하므로,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힘이 닿는 데까지 이웃의 생명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그들에게 아무런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으로 우리의 의무를 다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이웃에게 그 어떤 해로움도 끼치지 않도록, 또한 이웃에게 해나 손실이 뒤따를 그 어떤 원인이나 기회도 제공하지 않도록 살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고 앞서 하신 말씀을 이 본문을 통해 더욱 명확하게 우리에게 일러주셨음을 여러분은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규칙에 따라, 우리는 앞서 설정되고 앞서 표현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단 한 번의 금령만을 내리셨으나, 우리는 그로부터 우리의 이웃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찾아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당신은 그 누구도 당신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를 바라며, 오히려 그가 당신의 생명을 보존해주고 다른 사람의 부주의로 인해 당신이 위험에 처하지 않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 또한 이웃을 향해 그와 똑같은 마음을 내어주도록 하십시오.
또한, 하나님께서 여기서 한 부분을 통해 전체를 포함하셨음을 주목합시다. 그분은 사람들의 집 지붕에 난간이나 울타리를 만드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지만, 이는 마치 사람들이 집을 지을 때마다 그로 인해 어떤 불편한 일도 뒤따르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여 지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지혜가 부족하여, 마치 들어오는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작정이라도 한 듯 집안 시설들을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은 발을 어디에 디뎌야 할지 상당한 기술이 필요할 정도이며, 매우 조심하여 스스로를 잘 살피지 않으면, 목이 부러질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그렇게 악한 마음을 품은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자가 자기 집에 피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즉 자기 집을 사람의 피로 더럽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변을 잘 살피고, 우리의 건축이 위험이 없도록, 우리 자신의 편의를 구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비난받아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선포된 바와 같이)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친히 살피시며, 우리 중 누구도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모든 불편한 일들을 미리 대비하신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그토록 부성애적인 관심을 쏟고 계심을 볼진대, 그분의 은혜로운 선하심을 인정하고 그에 완전히 매료될 이유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비록 여기서 우리의 의무가 제시되고 있지만, 즉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가 이웃 생명의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지만,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선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여기 우리에게까지 낮아지셔서, 그분이 우리의 생명을 지켜보고 계시며, 친히 그 보호자가 되려 하신다는 점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것을 보고 있으니, 그분의 선하심에 대한 독특한 증거를 가진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우리의 몸은 고작 송장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것들을 유지하시며, 우리에게 그 몸에 닥칠 수 있는 위험들을 훨씬 전부터 미리 대비하여 보존하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을 보는 것이 우리를 마음 깊숙이 감동시키고, 우리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우리가 이 세상과 현재의 삶에 베풀어 주시는 이러한 선하심을 알게 될 때, 한 단계 더 높이 올라가 그분께서 우리의 영혼에 대해서는 훨씬 더 큰 관심을 쏟고 계심을 의심하지 맙시다. 그분께서는 이미 경험을 통해 이를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방종한 망아지처럼 놀지 않고 (성경이 말씀하듯) 그분의 날개 아래로 와서 스스로를 품는다면, 그분의 보호 아래 머무는 한 우리가 보존될 것임을 굳게 신뢰하고 그분 위에 담대히 머뭅시다. 그분께서 우리를 안전하고 온전하게 지켜주실 것임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이 외에도, 이웃의 몸을 위험에 빠뜨리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유죄라면, 이웃의 길에 걸림돌을 놓아 그들을 구원의 길에서 돌아서게 만드는 자들은 그분께 훨씬 더 큰 책임을 추궁받게 될 것임을 주목합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무턱대고 화살을 쏘아 지나가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혔다면, 그는 비난받아 마땅하며 처벌 또한 받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서로를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턱대고 쏜 화살에 그러한 일을 전혀 예상치 못한 가련한 사람이 죽었다면, 나에게 변명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그를 위해 미리 주의를 기울였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유사한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잘못이나 소홀함으로 인해 이웃이 어떤 불행에 빠진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저지른 범죄이며, 세상 또한 그러한 일이 처벌받아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웃을 넘어지게 하되, 단지 그의 팔이나 다리, 혹은 목을 부러뜨리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영혼을 파멸에 이르게 한다면 그것이 어찌 된 일입니까? 우리는 사람들의 길에 놓인 걸림돌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가련한 영혼들을 완전히 파멸시키고 거꾸러뜨리는 역할을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교회 안에 혼란과 걸림돌을 만들어낼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우기 시작하신 것들을 파멸로 몰아넣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가장 중대한 반역죄 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살핍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격에 그토록 관심을 쏟고 계심을 보며 우리 각자 그분의 본을 따릅시다. 우리가 사람들의 몸에 어떤 해가 미치지 않도록 미리 대비한다면, 그들의 영혼에 대해서는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더 나아가, 각 사람의 집에 관하여 여기서 하시는 말씀을 주목합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집안사람들에게 나쁜 본을 보인다면, 그는 자기 집에 피를 가져오는 것, 즉 자신이 거하는 집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나쁜 것, 곧 온갖 종류의 저주를 불러들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종교를 멸시하는 자라, 자기 집에서 하나님이 모욕당하는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아니, 그는 입을 열 때마다 어떤 신성 모독이나 마귀 같은 소리를 내뱉을 뿐입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그의 아내는 음탕하거나, 술꾼이거나, 지옥의 악마 같아서 하나님의 두려움도 없고 예의도 없으며 정숙함도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이 외에도 그곳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수많은 나쁜 본보기들이 보입니다. 이러한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이 자기 집을 고의로 더럽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거기서 무엇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재산이 있고 권속이 많을지라도, 그에게 주어진 처소이자 그가 거하는 곳을 더럽혀서 모든 곳이 오물로 가득하게 만든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예를 들어, 그의 자녀들이 나쁜 훈육을 받고, 그의 종들이 제멋대로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데 전념하는 대신 방종함과 실족함의 원인들만 가득하다면, 이 본문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그의 집이 더럽혀졌다는 것 외에 다른 결과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 모든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자들은 모두 그분 앞에서 살인자로 간주된다고 선언하신 후, 마찬가지로 각 사람이 자기 집안을 잘 살펴서 그곳에서 어떠한 범죄도 일어나지 않게 하고 가련한 영혼들이 파괴되지 않도록 해야 함을 덧붙이셨음을 주목합시다. [예를 들어] 어린 자녀들이 사악한 양육으로 인해 부패하고 망가지지 않게 하며, 종들과 집안사람들이 자신들을 망칠 만한 그 어떤 것도 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오히려 주인과 여주인이 스스로 처신을 잘하여 하나님께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시고 섬김을 받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집이 세상의 흔한 오물로 더럽혀지거나 오염되지 않고, 우리가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계심을 나타냄으로써 몸과 영혼의 모든 측면에서 그분의 복이 그 위에 부어지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죄를 자복하며 선하신 하나님의 위엄 앞에 엎드립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욱더 깊이 느끼게 하셔서, 우리의 모든 질병을 고치실 수 있는 의사이신 그분께로 돌아가게 해주시기를 간구합시다. 또한 우리를 친히 그분께로 불러 모아 주셔서, 우리가 모든 절제와 겸손함으로 주님을 섬기기 위해 우리 자신을 순결하고 더럽혀지지 않게 미리 지키게 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아울러 우리 각자가 이웃을 돌보고 살피며, 서로를 구제할 준비를 갖추고 (가능한 한) 모든 괴롭힘과 해를 끼치는 일을 피하게 해주시기를 간구합시다. 그리하여 이러한 방편을 통해 우리가 한마음으로 그분께 진실한 자녀임을 나타내고, 온전한 신뢰 속에서 그분을 부를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주님의 말씀을 전할 참되고 신실한 사역자들을 일으켜 주시기를 기뻐하시길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