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칼빈 신명기 설교

신 22:9-12

작성자doulosdei|작성시간26.06.10|조회수44 목록 댓글 0

127회 설교: 22장 세 번째 설교

155618일 수요일

 

22:9-12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을 다 빼앗길까 하노라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 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포도원에 두 씨를 섞어 뿌리지 말 것과, 서로 다른 재료로 짠 옷을 입지 말 것과,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라고 금하신 것은, 인간이 스스로 고안해 내는 수많은 꾀를 억제하려 하신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마땅히 고수해야 할 명백한 순전함과 자연 그 자체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바를 변개하려는 인간의 성향을 다스리기 위함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이것저것 새로운 것을 고안해 내는 놀라운 창고와도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매일의 경험을 통해 보듯, 그 안에는 중용도 절도도 없습니다. 오늘날 모든 영역에서 사치와 과잉이 나날이 늘어만 갑니다. 사람들은 오직 쾌락과 즐거움, 화려한 겉치레와 과시, 그리고 소위 그들이 말하는 세련됨에만 자신을 내맡깁니다. 그리하여 만약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안정감이나 절제력이 있었다면 만족했을 법한 평범한 질서와 관습을 따라 사는 법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우리가 보듯 사람들은 정욕에 고삐를 풀어버리고 무법천지의 자유를 취하여, 온 자연의 질서 속에는 오직 뒤섞인 혼란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이제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어떤 겸비함 속에 붙들어 두시고자, 이 대목에서 다소 투박한 방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즉 몇 가지 특정한 사물들을 통해 그분께서 순전함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보여주려 하신 것입니다. 이는 매일같이 일어나는 기이한 고안들을 억제하고, 비록 인간의 정욕이 그토록 변덕스러울지라도 지나치게 유별나지 않게 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만족감 속에 스스로를 붙들게 하려 함입니다. “좋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면, 이성이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한 충분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도 없이 이것저것을 고안해 내는 방황하는 공상에 사로잡히지 맙시다. 각자가 자기만의 방식을 끌어들여 무질서한 욕망을 채우느라 스스로를 괴롭히며 헛되이 수고하지도 맙시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유익들을 누리되, 우리가 그것들을 절제하며 사용하기를 원하시는 그분의 뜻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누립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대목에서 명심해야 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제 각 문장에 대해 매우 방대하게 다룰 수도 있겠지만, 정작 우리는 그로부터 얻는 유익이 거의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서 겨냥하신 참된 목적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지점, 즉 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포도원에 이처럼 두 씨를 섞어 뿌리는 것과, 서로 다른 재료로 된 옷을 입는 것과,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밭을 가는 것을 금하셨는지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제 이 법들 하나하나로 돌아가 봅시다. “씨를 섞어 뿌리지 말지니라고 하셨는데, 이는 레위기 19장에서도 동일하게 언급된 바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라는 머리말을 사용하십니다. 그분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가 항상 다른 이들의 사례를 내세워 우리의 잘못을 은폐하려 하며,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일이라면 우리에게도 모든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백성에게서 그러한 모든 변명을 박탈하십니다. “내가 너희의 통치자임을 알라. 나를 따르고 나의 뜻을 굳게 붙들라.” 이 말씀은 참으로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에 반대되는 말씀을 우리에게 한 번이라도 주셨다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통용된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일을 행하는 자유를 제멋대로 누려서는 안 된다는 점을 우리가 깊이 되새기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니, 우리는 오직 그분께만 머물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두 씨를 섞어 뿌리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은 그렇게 함으로써 네가 뿌린 씨와 포도원의 열매를 거룩하게 할까 하노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거룩하게 한다(sanctifying or hallowing)’는 표현은, 곧 당신이 당신의 포도원과 거기서 거두어야 할 열매를 스스로 박탈당하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참되고 정직한 거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는 점을 보여주십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곡식을 심는다면, 섞임 없이 합법적인 방식으로 농사를 지어 사람들이 보고 보라, 여기 밀이 있고, 여기 보리가 있으며, 여기 콩과 완두가 있구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알곡이 제 종류대로 나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씨앗이 순수하지 않다면, 백성들이 속임을 당하는 것 외에 무슨 결과가 있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마땅히 있어야 할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의 먹거리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포도원에 씨를 뿌리는 것이 언급되는데, 그 나라들의 포도나무는 매우 방대하기 때문입니다. 그곳의 포도나무는 우리 것보다 크고 모양은 비슷하나 매우 넓게 퍼지며, 포도송이 또한 아주 큽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더 많은 공간과 자리가 필요했습니다. 결국 우리 주님의 뜻은 땅에 씨를 뿌릴 때, 백성들 사이에서 판매되는 양식이 단순하고 제 종류대로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바, 즉 사람들이 자연의 질서를 변경하지 말고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곡간에서 곡식을 속여서 섞는다면, 그것은 밭에서 곡식을 섞는 것과 마찬가지거나 오히려 그보다 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의 양식이 되어야 할 것이 그 본래의 종류에서 변질된다면, 거기에는 참된 정직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이 이 부분에서 얼마나 교활한지,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든 혹은 다른 이유에서든, 아니면 자신들의 기이한 기호를 채우기 위해서든 항상 얼마나 새로운 방식들을 만들어내려 하는지를 봅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굳게 붙드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따라야 할 바로 그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대단한 악이 발생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항상 이 원칙을 고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이에 순전함 혹은 단순함이 있어야 한다는 규칙을 주셨으니, 우리는 그것을 따릅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사물들 속에 행해지는 이 모든 혼합이, 교활한 술수와 기만에서 비롯되거나 어떤 유별난 호기심과 야심에서 나온다는 것을 봅니다. 둘째로 그것들은 사악한 이득을 지향합니다. 즉 사람들이 이웃의 손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 이렇게 하면 내게 아주 유리하겠지. 물건을 더 잘 팔 수 있을 테고 사람들은 쉽게 눈치채지 못할 거야. 혹은 다른 물건들과 섞여서 잘 팔릴 테니 가치는 그대로 인정받겠지만, 나중에 계산해 보면 내게는 훨씬 더 큰 이득이 남겠지.” 이처럼 이러한 섞음이 그토록 악한 뿌리에서 나와서 그토록 사악한 목적으로 향하는 것을 볼 때, 그것들이 이중으로 정죄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내가 전에 말했듯이) 하나님께서 밭에서 씨를 섞는 것을 원치 않으셨을 때, 그분은 어떤 사악한 목적을 가지고 행해지는 다른 모든 혼합 또한 금하셨음을 기억합시다. 만일 술통 안에서 포도주를 새로이 섞어 만든다면, 그것은 포도원에서 그런 섞음을 행하는 것만큼이나 나쁘거나 오히려 더 나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주목합시다. 우리는 단순한 순전함에 만족합시다. 한마디로, 자연의 질서를 유지하도록 합시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십니다. “너희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지니라.”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의 고려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짐승들에 대한 것으로,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짝 지어 놓으면, 그들은 훨씬 더 고통스러운 노동을 하게 됩니다. 둘째는 밭을 가는 일에 관한 것으로, 이처럼 서로 맞지 않는 짐승을 쓰면 일이 질서 있게 진행될 수 없으며 사실상 제대로 된 경작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굳이 나귀를 언급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그 나라의 나귀들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보는 나귀들과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데 쓰였으며, 우리 땅의 노새보다 네 배나 더 강하고 힘이 센 노새만큼이나 그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 소와 나귀를 함께 묶는다면 그 불균형이 너무나 심하여, 소는 자기와 같은 종류와 짝을 이뤘을 때보다 훨씬 더 괴로워할 것이고 나귀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성적으로 그들은 서로 잘 맞는 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짐승에게 이와 똑같은 법을 정하신 것은 아니나, (우리가 앞서 보았듯) 그분의 뜻은 인간이 짐승들을 온유하게 다루어 그들이 부리는 짐승들을 불쌍히 여기는 데 있습니다. 자기의 말이나 소에게 잔인함을 보이는 자는 결국 자기 이웃에게도 똑같이 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리라고 주신 짐승들을 그토록 잔인하게 다루는 자들은 참으로 마음이 완악해지기 마련입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수고하는 가련한 짐승들에게 잔인함을 드러낸다면, 그것은 그가 뒤틀린 성정을 가졌으며, 이성적인 피조물들에게도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확실한 징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법을 만드실 때 어떤 점을 살피셨는지 여러분은 이제 보게 됩니다. 또한 (이미 언급했듯이) 짐승들이 서로 맞지 않으면 땅도 제대로 갈릴 수 없습니다. 그들 사이에 정당하고 균등한 비율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노동은 결코 질서 있게 진행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다루었던 지점, 즉 하나님의 뜻은 그분의 백성이 기이한 고안들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 데 있다는 사실로 돌아가야 합니다. 보시다시피 인간은 언제나 그러한 방향으로 달려가며 그쪽으로 크게 기울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류의 섞음을 금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음과 같은 지점으로 훈련하려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우리의 유익과 편의를 위해 정하셨으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살펴 그 안에서 절도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을 사용할 때 하늘과 땅을 뒤섞어버리거나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진정 그분께서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그토록 방종하게 누리려는 자유를 억제하기를 원하신다는 점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당시에 이 계명으로 유대인들을 우리보다 더 엄격하게 묶어두셨을지라도, 이 교훈은 곧 더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제 여기 기록된 세 번째 법으로 넘어가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옷을 입는 것을 금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다루었던 내용, 즉 우리가 사물들 속에서 질서를 지켜야 하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저 소박한 순전함에 만족해야 한다는 사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제멋대로 모든 것을 혼란하게 만드는 법 없는 방종을 취하지 말고, 모든 사물이 어떤 목적으로 정해졌는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마(flax)와 대마(hemp)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좋습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각자의 용도에 맞게 써야 합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옷과 여러 가지를 만들 양털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사물들 속에서 안정감을 유지하며 그것들로 옷을 지어 입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향해 부성애 이상의 관심을 쏟고 계신다는 그분의 섭리를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에게 의복이 필요합니까? 우리에게는 셔츠가 있고, 겉옷이 있으며, 신발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에게는 신을 가죽이 있고, 몸을 가릴 옷감이 있으며, 덤으로 셔츠까지 있습니다. 오 주님, 당신은 어찌 이토록 모든 것을 잘 예비해 두셨나이까! 우리는 바로 이 사실을 상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일 사람들이 사물들을 마구 뒤섞는다면, 참으로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짐승과 다를 바 없게 됩니다. 사탄은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하여,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에 두신 이 질서 있는 차이를 무가치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차이를 통해 만물 속에 빛나는 그분의 무한한 지혜와, 스스로를 우리의 아버지로 나타내시는 그분의 지고한 선하심을 우리가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반면 사탄의 온전한 욕망은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하나님께서 인간의 용도와 필요를 위해 그 무엇도 잊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인간이 전혀 고려하지 못한 채, 이 아래의 것들을 방탕하게 낭비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서로 다른 재료로 짠 옷을 입지 못하게 하신 이유를 주의 깊게 주목합시다. 그것은 그들이 모든 사물을 적절한 용도에 맞게 사용하고, 사물들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생각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 손에 주셨는가? 이것은 어떤 목적으로 우리에게 봉사해야 하는가?’ 그리하여 인간이 지나친 호기심에 이끌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그대로 사물들의 본래적 용도에 만족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내가 앞서 말했듯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멍에는 율법 아래 있을 때와 같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듯 하나님께서 어린아이처럼 붙드셨던 그 시절의 사람들보다 우리는 더 큰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4:2).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더 엄격하고 마치 노예를 다루는 듯한 통제 아래 놓여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압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나이가 아직 타인들만큼의 자유를 허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도 지키고 행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법입니다. 나이가 들면 매질이나 그러한 엄격함으로부터는 벗어나겠지만, 여전히 그들은 어린 시절에 훈련받았던 그 정직함과 미덕들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의식이라는 그토록 엄격한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셨을지라도, 그 실체(substance)는 항상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하나님께서 비록 방식은 다를지언정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모든 혼란과 뒤섞임이 그분을 불쾌하시게 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의 뜻은 우리가 그분께서 베푸시는 은혜들을 절제하며 사용하고, 우리의 쾌락 속에서 방황하지 않으며, 우리 사이에 그 어떤 과잉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명백한 순전함을 밀쳐두기 위해 새로운 고안들을 짜내는 데 머리를 쓰지 맙시다. 그런 것들은 오직 돈을 갈취하기 위한 미끼에 불과하며, 실제로 이러한 교묘한 고안들은 남의 주머니를 털어내려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누군가 , 여기 아주 멋진 고안품이 있소라고 말하면, 즉시 어리석은 자들이 그 뒤를 쫓아가며 주머니를 비워버립니다. 만일 사람들이 소박한 순전함에 만족한다면, 누구나 덜 소비할 것이고 적은 것에도 만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한 번 길을 잃으면 그들에게는 멈춤이 없습니다. 이 새로운 것, 저 새로운 것에 대해 말하기 좋아하는 자는 다른 부분에서도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물건값을 부풀리는 계기가 되며, 모든 사람이 그 부분에서 정직하고 건실하게 걷는다면 그렇지 않았을 물건들을 더욱 조잡하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이 대목에서 얻어야 할 교훈입니다.

진실로 인간의 욕망은 너무나 무한하며, 마치 소용돌이치는 심연이나 바닥 없는 구덩이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모으기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사실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여기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일반적인 원리들을 들었다면, 우리 각자는 이후에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하며, 우리에게 주어지는 여러 대상(, 기회)들에 따라 우리의 행실 속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주님께서 그분의 은혜를 절제 있고 온건하게 사용하도록 우리를 억제하려 하셨음을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인간이 지나치게 방탕하여 자기 정욕을 채우려고 사물들을 마구 뒤섞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럽히는 일이라고 결론짓습니다. 본문에는 네가 거룩하게 할까 하노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곧 네가 더럽힐까 하노라는 뜻입니다. “씨의 충만함”, 즉 네가 거두어야 할 소출들을 더럽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때때로 이 거룩함이라는 단어를 저주받은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사용하는 창녀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는데, 이는 우리가 만져서는 안 될 저주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거룩한 것, 즉 하나님께 봉헌된 것은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록 관점은 다르지만 더럽혀지고 저주받은 것 또한 (사람이 만져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에서) ‘거룩하게 된 것'이라 불립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악한 용도에 적용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풍성함이나 증가분을 거룩하게 한다‘(, 부정하게 만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정욕을 위해 사물들을 무분별하게 섞을 때, 하나님의 은혜의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용도를 부정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이제 우리는 이 악덕을 단지 밀이 귀리나 다른 곡식과 섞이는 들판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사람을 경악게 할 만큼 온갖 가짓수가 난무하는 우리의 식탁 위에서도 찾아야 합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얼마나 이 악덕에 빠져 있는지, 그리하여 모든 사물을 변장시키려 애쓰며 자연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변경하고 바꾸기로 공모한 듯 보이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묻건대, 사람들이 이처럼 하나님의 질서를 변장시킬 때 그것이 사물들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심지어 하나님을 비웃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그 안에서 어떠한 중용도 지킬 줄 모른다면, 그분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누릴 자격이 우리에게 있겠습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아이가 절도 없이 음식을 처넣는 것을 본다면, 그 버릇을 고치기 위해 음식 조각을 더 작게 잘라 줄 것입니다. 또한 아이가 지나치게 맛있는 것만 밝히고 욕심을 부린다면, 그가 원하는 것과 정반대의 것을 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아이를 완전히 망치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이가 계속해서 그 쾌락에 젖어 살게 내버려 둔다면, 커서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우리가 성인이 되어서도 하나님께서 그토록 좋은 질서 속에 배분해 주신 은혜를 남용하고, 그 어떤 다양성으로도 만족하지 못할 만큼 그것들을 뒤섞어버린다면, 하나님께서 이를 지켜보시고 우리가 스스로는 자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실 때 강력한 처방을 쓰시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내게 선생님, 그렇다면 모든 섞는 행위가 다 죄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니오라고 답할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엄격하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섞임의 시작은 사악한 욕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인간의 어리석은 식욕을 채우기 위해 그토록 많은 다양성을 고안해 낸 자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이며, 우리는 그들을 혐오해야 합니다. 비록 그들이 당대에는 인정을 받아 사람들이 , 여기 훌륭한 요리사가 있군”, “, 여기 유능한 집사가 있네라고 칭송했을지라도 말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많은 진미를 만들어내고, 정교하고 새로운 소스들과 온갖 기이한 발상들을 조합하여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대접을 받길 원하는 자들의 기분을 맞춰줌으로써 영광을 얻었을지라도,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혐오해야 합니다. 그런 자들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모든 과잉과 악덕으로 이어지는 모든 것을 억제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그러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합니까? 우리 각자는 스스로를 고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상대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려는 듯 보입니다. 어떤 말을 들어도 우리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습관에 젖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분의 율법에 의해 다스려지고 그분의 뜻에 부합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정당한 소유임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줄이심으로써, 그러한 과잉들을 반드시 벌하실 것임을 의심하지 맙시다. 진정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께서 구별해 놓으신 것들을 부주의하게 뒤섞어버리는 사악함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예전처럼 우리에게 너그러운 아버지로 나타나지 않으실 때, 우리는 그분의 진노의 징표를 느껴야만 합니다. 우리가 지혜롭거나 사리 분별이 있다면, 그러한 징표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시는 말씀, 즉 하나님의 피조물을 뒤섞지 말고, 우리 삶의 방식에서 항상 소박한 순전함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충분할 것입니다. 우리의 먹고 마시는 문제에 관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것입니다. 곧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여, 하나님에 의해 양육 받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먹이시는 데 관심을 두시며, 그분이 우리의 생명에 그토록 큰 관심을 쏟고 계심을 볼 때, 그분이 진정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도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들의 진미에 취하거나 그 다양함에 빠져 멍청해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항상 하나님께 눈을 두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원칙이 우리의 의복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요컨대 사람이 여러 종류를 섞어 입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뿐만 아니라, 의복에 있어서도 가능한 한 큰 절제를 유지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만일 사람들이 여러 종류로 자신을 꾸미고 복장에 있어 수많은 어리석은 변장을 사용한다면, 그것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확실히 자연은 그런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방인들조차 만일 모든 사람이 이 부분에서 자연을 사랑한다면 그토록 다양한 음식이나 복잡한 의복은 필요치 않을 것이라고 말할 줄 알았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정욕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가는지! 정욕은 우리를 이것저것에 매달려 고생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까지 번거롭게 하며, 결국 온 세상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만족할 줄 안다면, 훨씬 더 평온하게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과잉에 빠져 있으며, 그것이 우리 수고의 끝이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마치 저주받은 영혼들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 잘못이 우리 자신 말고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미 언급했듯이) 사람들이 갈망하는 이 수많은 다양성이, 우리가 자연의 진정한 만족감 안에 머물지 못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수많은 증거가 된다는 점을 명심합시다. 물론 일부 망상에 사로잡힌 자들이 행했던 것처럼 극단적으로 정밀하고 가혹한 생활 방식을 고수하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연에 만족해야 하니, 유리잔도 고블렛도 없이 오직 맨손으로만 물을 마셔야 한다는 식의 주장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관대함을 베푸실 때 우리는 그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시편 104편에 기록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생필품인 떡과 물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즐겁게 할 포도주도 주셨다고 했습니다(104:14,15). 하나님께서 그분의 크신 은혜로 우리의 필요를 넘어 우리가 구하지 않은 것까지 주실 때, 좋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관대함을 받아들이고 감사함으로 선한 양심 안에서 그것을 사용할 자유가 우리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은 꽃이 피지 않아도 우리를 부양할 곡식을 내실 수 있었고, 잎사귀나 꽃 없이도 나무의 열매를 맺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감각을 즐겁게 하려 하셨으며, 우리가 기뻐할 수 있도록 그분이 주시는 모든 피조물 속에서 온갖 종류의 복을 우리에게 제시하려 하셨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들을 인간이 누리지 못하게 차단해야 한다는 저 야만적인 가혹함은 언급할 가치도 없으며 용납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탐욕스러운 욕망을 억제합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들을 잘 고려하여, 어떤 일이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 선을 넘지 않도록 합시다.

이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전한 단순함을 지킬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불필요한 혼합과 사물을 변조하는 행위는 언제나 악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허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이러한 사악함이 먹고 마시는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면, 의복에 있어서는 더욱 확연히 나타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부분에서 얼마나 큰 사치에 빠져 있는지 보십시오. 진실로 이러한 사악함은 오래전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군림해 왔으며, 성경이 이를 언급하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어느 때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여인들이 스스로를 치장하는 데 너무나 정성을 들이고 온갖 종류의 자잘한 장신구들을 가졌기에 그들의 의복에 관하여 말하면서, 마치 그들의 궤짝에 있는 목록을 조사하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낱낱이 파헤쳤습니다(3:15 ). 곧 그들의 목걸이와 브로치 그리고 그와 유사한 노리개들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화려함에만 매몰되어 그 사악함을 고칠 생각조차 하지 않기에, 하나님께서 능히 강력한 개혁을 단행하실 수 있음을 그들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심한 현상을 보고 있으며, 어떤 다양함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마치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고안해 내려는 듯하며 결코 끝이 없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이토록 육신에 매달려 있을 때, 정작 우리 영혼에는 전혀 관심이 없음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어리석은 욕망을 통해 세상에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아름다운 치장과 기묘한 발명품들을 찾아 헤매는 동안, 우리의 영혼은 녹슬어가도록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기교는 남녀가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임을 주목합시다. 왜냐하면 그들은 살아가기 위한 참된 규칙인 자연의 질서 안에 머물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피조물을 사용하는 방식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섞어 짠 옷감을 입지 못하게 하셨다라고 말하려는 듯이 옷이 짜인 실 가닥에 너무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주님의 뜻이, 우리가 의복에 있어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양식을 준수해야 하며, 사물을 변조하기 위해 그러한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허식을 사용하거나 과도한 치장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행할 때,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와서 집안 전체를 무질서하게 만드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잘 정돈된 집안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누군가 와서 솥과 접시를 뒤엎고, 침대 시트와 수건과 식탁보를 뒤섞으며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다면 그것이 어떠한 일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 즉 제가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모든 사치를 피하고 우리 자신의 공상에 따라 사물들을 뒤섞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주신 것을 우리 용도에 맞게 적용할 만한 절제를 유지하지 못할 때에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만약 이 점이 잘 주목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백성이라는 것과, 세상의 더러움에 우리 자신을 섞이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그분의 말씀을 가졌음을 실제로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분야에서 저질러지는 모든 악습을 늘어놓으려 한다면 설교 한 번으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오늘날 이 사악함이 얼마나 큰 미궁으로 자라났는지 우리가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커다란 수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살핍니다. 사람들의 헛된 욕망이 그들을 자극할 때, 우리는 우리 머릿속에 어떤 새로운 장치를 세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누군가는 이것이 멋질 거야라고 말합니다. 나는 또 다른 새로운 장치가 필요하고, 거기에 세 번째 장치까지 필요하게 됩니다. 사물의 필요성이나 용도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으며, 첫째는 사람들의 욕망을 즐겁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언제나 이익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치품에 돈이 쓰입니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찾아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그동안 사람들 사이에는 사악함과 불량함, 교활함과 불충실함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이것이 발견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해온 것보다 이 일을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음식에 대해 말씀하신 후 의복에 대해 말씀하시며, 사람을 치장하고 자연 속에 있는 모든 단순함을 왜곡하는 데 쓰일 만한 그러한 변덕은 없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이 교리를 우리가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보십시오. 참으로 우리의 시력이 너무 흐릿하지만 않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쉽게 분별하여 이것과 저것은 적절하지 않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입니까? 악한 관습이 우리를 바른길에서 너무나 벗어나게 하여 우리는 이 일에 있어 딱정벌레처럼 눈이 멀었습니다. 왜 우리 삶에 혼란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판단하지 못합니까? 우리가 사치의 불결한 찌꺼기에 너무나 취해 있어서 모든 감각을 잃고 멍청함보다 더한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단순하게 살아온 이들을 데려다가,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사는지 옆에서 보게 한다면, 그들이 오늘은 이것을 내일은 저것을 가지고 있고, 매일같이 새로 시작하며, 불과 사흘 전의 유행을 뒤떨어진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항상 새로운 장치들을 꾸며내고, 이 모든 것이 오직 돈을 벌기 위함임을 보게 한다면, 또한 다른 이들이 자신들의 과시와 화려함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소비하는지를 보게 한다면, (내가 말하건대) 단순함 속에서 자라온 이러한 선량한 사람들 중 몇몇은 그러한 어리석음들에 침을 뱉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변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악습이 우리 눈을 가릴지라도 하나님의 법은 언제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더 잘 살펴서 우리 자신을 되찾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그 정연함으로 우리 자신을 개혁하지 않는다면, 그 법은 우리의 철저한 혼란을 위해 남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이 그들의 의복 아랫부분에 술이나 테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해지는데, 이는 곧 그들의 의복이 넓은 테두리를 가져야 하며 가장자리에 주름을 잡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에 관한 언급은 민수기 15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곳에는 그들이 의복의 테두리를 함께 접기 위해 미세한 끈이나 비단 끈을 가져야 한다고 말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그곳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대목은 모호할 것입니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이 말해집니다. “너는 네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이나 테두리를 만들지니라.” 만일 이 단어들 외에 더 이상의 말이 없다면, 사람은 그 이유를 물을 것이나 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그 양식이 그들에게 기념물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것을 통하여 네가 하나님께 봉헌된 백성이며, 그분께서 너를 자기 보호 아래 두시고자 스스로 선택하셨음을 생각할지니라.” 이토록 작은 일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훈계하여 이렇게 말씀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보라, 우리는 자기들의 공상을 따라 걷는 이방인들과 같지 않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그 법을 지키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자신의 율법을 전달하셨기 때문이라.”

그리고 우리는 이와 유사한 것을 앞선 4장에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유대인들이 항상 그분의 율법을 생각하는 일에 자신들을 단련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율법의 구절들을 문설주에 기록할 것이며, 식탁에 있을 때에도 그것의 무언가를 가질 것이요, 참으로 너희는 내 율법을 몸에 지니고 그것으로 너희 자신을 꾸밀지니라. 다른 이들은 팔찌와 금 형상들을 가질지라도,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며, 너희가 그분의 교리를 잊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상기시켜 줄 내 율법의 한 조각을 가질지니라.” 참으로 그분은 여러분이 그것으로 술과 다른 장식들을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다른 이들은 오직 교만과 세상의 허영만을 위해 쓰이는 도금 장식들을 가질지라도,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서 내가 그분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안에서 나의 모든 기쁨을 취하며, 그것으로 나 자신을 장식하고 꾸미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상기할 목적으로, 너희 의복을 내 율법의 구절들로 꾸밀지니라.” 나의 삶에 관하여는, 내가 그분의 학교에서 교육받았음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분께서 이토록 나 자신과 연합하셨으니, 그분의 찬양과 영광이 사람들 앞에서 내 안에 빛나야 하며, 그리하여 그들이 내가 헛되이 할례를 받지 않았고, 하나님의 교회에 결합되기 위한 그분 언약의 표를 아무런 이유 없이 받지 않았음을 알게 해야 합니다. 이러한 점에 따라, 이제 유대인들이 그들의 의복 네 귀에 술을 만들고 그 위에 끈을 달아야 한다고 말해집니다. 제가 말씀드렸듯이, 이토록 작은 일에서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유익한 교훈을 전달하고자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우리와는 달리 만들어진 그들 의복의 끝과 테두리를 이런 식으로 여밀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마치 그들의 발뒤꿈치를 묶어두신 것처럼 그들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네가 걸을 때 너는 네 하나님의 길 안에 머물러야 하며, 네 평생토록 울타리 안에 거하여 법도를 넘어서지 말지니라.” 옷의 양옆이 터져 있고 꿰매어지지 않았기에, 그것들을 묶지 않는다면 보기 흉한 일이 되었을 것이므로, 이러한 작은 줄이나 끈으로 옷을 묶어 그들의 온몸을 가리게 한 것은 단정함을 위해서도 유용했을 것임을 나는 인정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정숙한 품위를 위해 잘 쓰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수기의 동일한 구절에 명시된 바와 같이, 그 안에는 이보다 더 높은 이유가 들어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이와 같은 훈계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보십시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다리가 묶여 있지 않고 마음대로라면, 그는 즉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뛰어다닐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 하나님께서는 네가 이러한 방식으로 이 끈들을 묶어 너의 모든 걸음걸이를 조절하도록 가르치기를 원하시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법이 언제나 너를 다스리게 하고, 네가 모든 점에서 그것을 준수하며 결코 거기서 벗어나지 않게 하려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대목에서 우리가 마음에 간직해야 할 실질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이제 이 의식은 더 이상 시행되지 않으며, 이러한 술과 끈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된 그림자들 아래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모든 면에서 그분의 법 안에서 우리 자신을 단련하는 것임을 주목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어린아이들을 위해 쓰였던 이러한 속박에서 벗어났음을 보건대, 우리가 더욱 간절하게 하나님의 법을 명심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읍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러한 술과 끈, 그리고 그와 유사한 것들에 의해 경고와 권고를 받음으로써, 우리 주님의 뜻은 그분의 법이 우리에게 억제책이 되게 하여, 우리가 여전히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할 자유가 없음을 가르치는 것임을 알게 하려 하십니다. 곧 우리의 손과 발, 영혼과 감각, 그리고 우리 몸의 모든 부분과 마음의 감정들이 그분의 명령과 금지 명령에 의해 억제된 채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더욱 주의 깊게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항상 하나님과 장난을 치며 모든 건전한 교리를 왜곡해 온 것을 우리가 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크고 화려한 술을 만들고 그 위에 성경의 훌륭한 구절들을 큰 대문자로 기록했을 때, 자신들의 모든 의무를 다했다고 스스로 믿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거룩함의 전부였으니, 우리 주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을 꾸짖으신 바와 같습니다. 그들은 일반 사람들보다 더 특별한 거룩함을 나타내고자 했기에, 매우 크고 넓은 옷단을 만들고 그 위에 멀리서도 보일 수 있도록 율법의 구절들을 써 놓았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수도승들이 그들의 수도복과 두건, 그리고 나머지 모든 잡동사니를 걸치고 있을 때, , 그들은 반쯤 천사나 다름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성한 의복 아래서, 그들은 비열하고 악한 욕망들, 참으로 모든 자연에 반하는 괴물임을 보여주는 그토록 충격적인 가증함들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도 그러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은 위선으로 하나님께 값을 치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의미와 진리를 더욱 주의 깊게 주목해야 합니다. ,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들의 옷자락에 술이나 끈을 다는 것과 같은 이러한 사소한 쓰레기들에는 관심이 없으시며, 그분의 뜻은 사람들이 그분의 교리 안에서 스스로를 단련하고 그것을 적절한 용도에 적용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상황이 그러하므로, 우리 자신을 잘 살피고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남용하지 맙시다. 율법 아래 살았던 조상들과 비교했을 때, 성인(成人)의 시기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우리 자신을 맞추려는 지혜가 없다면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 자신만 놓고 본다면 우리는 어린아이에 불과하지만, 옛 시대의 백성들과 비교한다면 우리는 노련하고 나이가 꽉 찬 성숙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결속시켜야 할 하나님의 법이 우리를 붙들어 매지 못하고 우리가 모든 악함 속으로 곤두박질친다면,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도자도 방향도 없는 무지하고 믿지 않는 자들처럼 방종한 자유를 취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타당한 이유 없이 우리를 그분의 봉사를 위해 훈련시키지 않으셨음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러한 상태로 우리 자신을 유지하도록 생각합시다.

 

이제 우리의 허물을 고백하며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 면전에 무릎을 꿇읍시다. 우리가 살아있는 회개에 감동되어, 우리를 도울 치료책을 손에 쥐고 계신 그분께 달려갈 수 있도록 그분께 간구합시다. 그리고 그분의 선하심과 아버지다운 너그러움으로, 우리가 목표로 하는 그 의와 거룩함의 충만함으로 우리를 입히실 때까지 우리를 참아주시기를 그분께 기도합시다. 또한 그분께서 우리 안에 있는 그 모든 얼룩으로부터 우리를 온전히 건져내실 때까지, 그분 앞에서 우리 자신을 슬퍼하기를 그치지 맙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렇게 말합시다.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등등.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