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회 설교: 21장 네 번째 설교
1556년 12월 31일 화요일
신 21:18-21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여기서 우선 첫째로 자녀를 둔 자들의 책임과 의무가 무엇인지 보이며, 둘째로 자녀가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의한 교정 단계를 지나쳐 자라날 때, 그들의 행위는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며, 온 나라 위에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는 감염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뿌리 뽑혀야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 첫 번째 요점에 관하여, “만일 어떤 사람에게 고집스럽고 완악한 아들이 있고, 그를 개혁하기 위해 자신의 노력을 다하였다면”, 이라고 말해집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들의 의무를 이행한다고 전제하시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자녀는 그들에 대하여 회계를 보고해야 한다는 조건과 함께 그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식의 목 위에 고삐를 풀어놓고 그를 날뛰는 망아지처럼 놀게 내버려 두었다면, 그는 그 자식에 의해 눈이 뽑혀 마당 마땅하며, 그 자식이 행하는 모든 악은 그의 아버지가 그를 징계하는 데 태만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탓으로 돌려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내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세가 여기서 아버지와 어머니들에게 그들의 자녀를 양육하는 데 부지런하라고 경고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만일 징계가 유익을 내지 못한다면, 그들의 자녀는 완전히 회복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본문으로 우리 자신에게 유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신 자는 그들을 잘 기르는 데 특별한 조심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잘 주목합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의 모든 재물보다 앞서 선호되어야 할 독특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만일 어떤 사람이 게을러서 그의 자녀들이 함부로 행하도록 방임한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유익과 존귀를 그가 멸시하는 것을 볼 때, 그것은 하나님을 무겁게 노엽게 하는 배은망덕이 아닙니까? 사람들이 자기 집안의 다른 어떤 것을 그들의 친자녀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길 때, 그들은 반드시 철저히 눈이 먼 것이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그들의 자녀보다 그들의 암소, 황소, 또는 말에 더 많은 염려를 둡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상품과, 자신의 토지와, 자신의 목초지를 소중히 여깁니다. 그리고 그러는 와중에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은 홀로 내버려 둡니다. 그들은 어떤 이방인에게 배우러 보내져 마땅한데, 그는 모든 물건이 고안될 수 있는 한 가장 정교하게 꾸며지고 장식된 어떤 집안에 있으면서, 그 집 주인의 아들이 비열한 부랑자이자 잘못 양육된 것을 보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말하기를, “나는 여기 남겨진 이 오물 위에 반드시 침을 뱉어야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상업과, 그들의 수입과, 그들의 소유지, 정말로, 그리고 그들의 가축에 대하여 그토록 부지런하고 깨어 있으면서, 그리하여 그들이 자녀보다 그들의 개와 말을 위해 더 많은 염려를 담당하는 자들에 관하여 말하자면, 우리가 위대한 영주들이 그들의 자녀보다 그들의 매와 사냥개들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을 보는 바와 같이, 그러한 눈먼 비참한 자들은 그들의 짐승 같음을 드러내어 사람들이 그들을 모든 지혜와 이성이 너무나도 결여된 족속으로 여겨 혐오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남자나 여자가 자녀를 두었다면, 그들은 그들을 기르는 일을 살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주로 아버지의 의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머니 역시 그녀의 권리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어떤 자녀가 너무 기고만장하여 “내 어머니는 여자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가서 하나님과 시비를 가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기서 권위가 권세가 한편에만 주어지는 만큼, 다른 편에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을 보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만 홀로 자녀를 다스리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어머니 역시 그 존귀와 탁월함의 몫을 가지기를 원하시며, 자기 어머니에게 순종하려 하지 않는 그 자녀는 은혜를 지나친 자로 여겨져 죽음에 처하도록 정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들 둘 다는 그들의 권세가 닿는 가장 먼 곳까지 그들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존귀하게 하신 것을 볼 때, 그녀가 그녀의 편에서 그녀의 의무를 행하기 위해 스스로 힘쓰는 것은 선한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그들의 자녀에게 악을 행하도록 허락하지 않거나, 그들을 거기로 훈련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본성 자체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들은 또한 그들을 선함 안에서 양육하고 교훈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아버지가 말하기를, “나로 말하자면, 나는 내 아들의 이 악함을 지지하지 않으며, 그것을 싫어하지만, 어찌할 수가 없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매우 단순한 핑계이며, 용납되거나 가치 있게 여겨지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말해지기를, “너는 참으로 멍청이로다. 왜냐하면 네가 그 자리에 세워진 것을 볼 때, 그리고 그분께서 너로 네 자녀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시는데, 네가 그가 잘못 행하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으니, 너는 멍청이에 불과하다”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어머니들에게 조심성을 요구하셔서, 그들이 그들의 자녀를 가르치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하고, 그들의 행동과 성품에 눈을 두어야 하며, 만일 그들 안에 어떤 잘못이 있다면, 그것을 교정하고 그 일에 매우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을 배웁시다.
이제 만일 아버지가 어머니와 더불어 자기 자녀의 잘못을 용납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단지 태만히 한 것만으로도 이토록 정죄를 받는다면, 그들이 자녀의 악행을 두둔하고,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감싸주며, 다른 어떤 사람이 그 방탕함으로부터 그들을 바른길로 인도하려 할 때 분노한다면, 그들에게는 어떤 일이 임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부모들이 그렇게 행하는 것을 봅니다. 참으로 태만은 너무나 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자녀들의 손으로부터 어떤 봉사를 받는 것 외에는 그들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들은 자기 자녀들이 배운다면, 마음속으로 좋게 여길 것입니다. 무엇을 하도록 말입니까? 자기 집안의 일과 거래들을 생각하게 하거나, 어떤 기술을 익혀서 자녀들이 나이가 들었을 때, 자신들에게 아무런 비용도 들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어떤 이익을 거둘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들을 위해서는 보통 염려가 충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함과, 행실의 정직함과, 다른 모든 미덕에 관해서는, 그들은 결코 그것들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속담이 말하듯) 그러한 일들이 방앗간에 곡식을 가져다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아버지는 자기 자식의 악덕으로 인해 어떤 불이익도 뒤따르지 않는 것을 보는 한, 그것을 눈감아주는 것을 마음속으로 기꺼이 눈감아주려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악의도 결합해 있어서, 비록 어떤 사람이 그들의 자녀를 개혁하려고 다가갈지라도, 그들은 그 사람을 대적하여 일어설 것이며, 자기 자녀를 편들고,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면서까지 그들을 옹호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삯을 그들에게 지불하십니다. 우리는 온 성읍이나 나라에서 가장 지독한 수전노들과, 단돈 일 페니나 이빨을 하얗게 닦을 한 도드킨을 위해서라도 자기 손가락 끝을 물어뜯을 가장 인색하고 비열한 자들이, 창녀들에게 아낌없이 주느라 자기 아버지의 주머니를 털 수밖에 없는 행음자들을 자녀로 두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창녀는 언제나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식은 자기 아버지의 강도가 되며, 그런데도 아버지는 만족하며 그를 옹호하고, 어떤 사람이 그 일로 그를 징계하려 하면 분노하여, 그가 마귀인 것처럼 자신의 독을 내뿜습니다. 참으로 이것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모든 경우에 그렇게 일어나며, 이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러한 일들을 보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 갚으심 또한 바라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는 수전노요, 탐욕에 너무 빠져 땅바닥에서 야위어 가며, 슬픔 없이는 빵 한 조각도 감히 먹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러는 와중에 너에게는 자신의 음행을 유지하기 위해 너에게서 좀도둑질을 하고 훔치는 아들이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요 악한 악당이며, 네 아들이 너를 닮기를 필연적으로 원하고, 네가 그런 방식으로 그를 옹호하는 것이 그의 죄와 악을 조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네가 마땅히 받아야 할 바에 따라 너에게 보응하십니다. 왜냐하면 너는 네 재물이 삼켜지고 온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어 모든 사람이 네 수치를 바라보게 되나, 너 자신은 그것을 결코 깨닫지 못하기에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이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백한 심판을 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이 교훈을 마음에 새깁시다. 만일 아버지와 어머니가 태만하다면, 그들은 자기 자녀에게 온갖 종류의 악을 행하도록 허락한 것과 다름없이 하나님 앞에 책망 받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자녀를 교정하고 그들을 바른길로 돌이키려고 노력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분노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철저한 마귀가 되었음을,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림받은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자기편에서 경고를 받아 우리의 의무를 이행합시다. 그리고 자녀를 둔 자들은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말되, 그들로부터 어떤 지상의 이익을 거두기 위함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참으로 그것은 부수적인 일이 될 수는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요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아버지의 지위에 세우시는 존귀를 베푸셨으니,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손에 맡기신 자녀들을 그분께 돌려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며, 그들을 그분께 참된 제물로 드려 그분을 공경할 선한 씨앗이 항상 남아 있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대대로 번성해야 한다고 자주 말하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평생 그분을 섬긴 후, 우리의 사후에도 선한 후손이 남아 하나님의 영광이 꺼지거나 묻히지 않고, 그분을 향한 찬양이 영원히 지속되도록 우리의 권세가 닿는 한 최선을 다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건대) 그것이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목표로 삼아야 할 푯대입니다. 그리하여 심지어 자녀가 없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동일한 마음과 소원을 가져야 하며, 정말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행위로써 그것을 또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특별한 이유로 그 일에 얽매인 자는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가 자기 집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거울을 볼 때, 그것은 성경이 그토록 높이 찬양하는 복이니(시 128), 말하자면 “나에게 내 어린 자녀들이 둘러 있고, 하나님께서는 마치 그분의 손가락으로 가리키듯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시며, 내 집을 돌보신다는 것을 나에게 보여주신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분께서는 여기 내 씨앗으로부터 그분의 형상을 따라 나에게 어린 자녀들을 창조하셨고, 그들은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니, 이는 내가 그들을 그분께 봉헌하고 그분께 순종하도록 그들을 빚어 가는데 더욱 움직이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러한 가르침과, 자신의 눈을 둘 그러한 푯대를 두고서도 자신의 의무를 행하도록 결코 격발되지 않는다면, 그가 멍청이보다 더 악한 자임이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이 존중할 만한 바를 잘 주목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마음에 새겨, 여기서 그들에게 말해진 바, 즉 자녀가 있다면 그들을 신실하게 양육하는 일을 행하도록 그들을 자극하게 합시다. 그리고 나아가 그들 안에서 어떤 악한 성품이나 비행을 볼 때, 그것을 교정하기 위해 수고하여,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였다고 증언할 수 있게 합시다.
이제 나아가, 여기에는 완악함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이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특정한 잘못들에 관해서라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기 자녀들을 바른길로 인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잘못들이 처벌받지 않고 지나가도록 의도하지 않으신 것은 사실입니다. 자녀가 아버지가 있든 어머니가 살아 있든 어떤 방식으로든 죄를 범했을 때, 그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의 징계 아래 있다는 핑계로 처벌로부터 면제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경우를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곧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재판장 앞으로 데려가 그를 죽음에 처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기 커다란 극단이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그것이 다른 사람의 수단에 의한 것일지라도, 자기 아들이 법에 의해 처벌받는 것을 보는 것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큰 마음의 고통인지 잘 압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할 수 있는 모든 구제책을 시도해 보기 전까지는 자기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는 것이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그토록 커다란 교만과 완악함이 언급된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니니, 곧 아버지가 자기 자녀를 교화하기 위해 스스로 힘쓰고 자신의 권세가 닿는 한 최선을 다했음에도, 더 이상 행하는 것이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음을 깨닫고,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그를 재판장의 손에 내어주어 죽음에 처하게 해야만 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기 자녀들이 교정될 소망이 완전히 지나갔음을 볼 때까지, 그들을 징계하는 일을 계속해 나가야 함을 봅니다. 그리고 내가 이것을 덧붙이는 이유는, 부모들이 때때로 자기 자녀들이 첫 번째 꺾임에 교화되지 않을 때, 너무나 인내심을 잃어버려서, 순전한 원망으로 그들을 홀로 내버려 두고, 그리하여 그들의 자녀들이 온갖 방탕함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 자녀가 분수를 넘어서 완악하며, 그 성품이 너무나 완고하고 악하게 기울어져 있어서 교화될 수 없음을 경험으로 알게 될 때까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여기서 명령하시는 그 자녀 양육을 계속해서 진행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들은 이 경우에 인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온유함은 이 일에 있어서 올바르게 요구되는 미덕이기 때문인데, 만일 아버지가 자기 자신의 용기만을 신뢰한다면, 자녀들을 가르치는 데서 어떤 완강함을 발견할 때 자녀들을 망치게 될 것이며, 그것은 언제나 고통스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기 자녀를 양육하는 일에 전념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자기 자녀를 자신들의 소원대로 빚어낼 수 없고, 자녀들이 필연적으로 고삐를 이빨로 물고 늘어진다면, 참으로 그것은 부모들의 커다란 슬픔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무엇이라 말합니까? “자식에게 한 마디면 충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에게 한 방울의 정직함이라도 있다면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버지는 그런 방식으로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지라도, 그 피조물을 하나님께로 얻어오려는 고려도 없이 함부로 달리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징계에 관해 말하면서 우리에게 권면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오히려 여전히 인내를 사용해야 합니다. 참으로 그는 우리에게 그들의 악함 속에 너무나 완고해진 자들을 움직이기 위해 날카로움과 엄격함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러면서도 그것이 온유함과 인내와 짝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아버지들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들이 그토록 인내심을 잃어버려서 자기 자녀들의 교정을 포기해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에서 아버지들이 자기편에서 경고를 받아, 자기 자녀들이 경솔함과 변덕에 빠져 잘못 행동하는 것을 볼 때 스스로를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배웁시다. 그리고 비록 그들이 첫 번에 자녀들을 얻을 수 없고, 그들을 온유함으로 인도하여 그들 자신의 자원하는 마음으로 바른길을 택하게 만들 수 없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그러한 종류의 고통을 겪는 일에 전념하게 하시고,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인내를 시험하시는 것이 그분의 뜻임을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처럼 여러분은 우리가 이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다른 점을 보게 되는데, 여기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신들의 편에서는 구제할 도리가 없음을 발견하고 그리하여 재판장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교정 불가능한 강퍅함과 완악함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제 아버지와 어머니가 제출해야 하는 증거로 나아갑시다. “그들이 성문으로 와야 한다”고 말해지는데, 왜냐하면 옛날에는 그곳이 재판하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재판의 자리로 나아가 그곳에서 말하기를, “우리의 이 아들은 우리를 대적하여 완악하고 고집스러우니, 우리가 그를 개혁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그에게 유익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방탕한 자요 술주정꾼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그를 당신들의 손에 처하게 합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증거 위에 그 자녀가 돌에 맞아 죽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아버지와 어머니들에게 그러한 권위를 주시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피를 흘릴 만큼 그토록 잔인해질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며, 그것은 완전히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이 그들 자신의 자녀들과 관련되어 있음을 볼 때, 그 사안을 더 이상 정밀히 조사하거나 가려내지 않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을 믿어주는 것은 선한 도리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어머니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자녀들을 대적하여 증인들을 데려오게 만드는 것은 그들에게 수치가 될 것이며, 일반적인 기소 방식으로 그들을 다루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신 지위를 깎아내리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러한 특권이 주어지는 것을 볼 때, 그들은 자신들의 의무에 대하여 더 많은 고려를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을 믿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그들의 마음속에 자기 자녀들을 향한 그러한 애정을 본성적으로 인쇄하시고 새겨두셔서, 그들이 자녀들에게 해를 입히느니, 차라리 죽기를 원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만일 어떤 사람이 너무나 악하고 짐승 같아서 자기 자신의 자녀를 대적하여 거짓되게 어떤 일을 꾀하고, 우리 하나님께서 인류 안에 인쇄해 두셨으며, 짐승들에게서조차 어떤 발자취와 불꽃을 볼 수 있는 그 자애로운 인자함이 자신에게는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면, 사람이 그토록 도를 넘어 자신을 망쳐버리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부모들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자녀들을 대적하여 자신들의 말을 믿어주심으로써 그들에게 어떤 존귀를 베푸시는지 보게 되며, 이 일은 그들로 하여금 자녀들을 더 많이 사랑하고 모든 온유함으로 그들을 기르도록 스스로 더 힘쓰게 만들어야 마땅하고, 정말로, (심지어 그들을 징계할 때에도)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주는 규칙을 사용하게 해야 하니, 곧 부모들이 너무나 커다란 엄격함으로 자기 자녀들의 낙심을 자아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엡 6:5). 왜냐하면 여러 번 자녀가 낙심하는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자기 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어떤 온유함도 사용하지 않고, 그의 행함 속에 어떤 이성이나 사랑도 두지 않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 분별력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짧게 요약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존귀를 베푸실수록,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행하도록 더욱 얽매인다는 점에 주목합시다. 예를 들어, 어떤 존귀의 지위나 상태로 승진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심히 얽매셨음을 고려해야 하며, 자신들의 의무를 행하기 위해 스스로 더 힘써야 마땅하니, 이것은 일반적으로 모든 지위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들에 관하여 명시적으로 말해집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둔 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권력과 권위를 남용하는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잘 지킬 수 있도록 그러한 방식으로 자녀들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러한 목적으로 그들에게 위임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기서 나아가,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기 자녀들이 교화 불가능함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들을 재판을 통해 고소할 수 없다는 사실이 선언됩니다. 나는 이 본문이 죽음의 처벌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이미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기 자녀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기도 전에 그들을 죽음에 처하게 만든다면, 그들 역시 자녀를 파멸로 이끈 원인 제공자로서 자녀와 함께 묶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어떤 아버지는 말하기를, “나는 내 아들의 음탕함에 동의하지 않았고, 그를 홀로 내버려 두었을 뿐이다”라고 할지 모릅니다. 예,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파수꾼으로 세우셨을 때 당신은 잠들어 있었어야 합니까? 당신은 자기 자녀를 인도하여 그가 단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게 했어야 하며, 그를 지도하기 위해 곁에 있었어야 합니다. 당신은 짐승이라도 인도했을 터인데, 당신 자신의 후손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겼단 말입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고 당신이 파수꾼으로 임명된 그 피조물을 홀로 내버려 두고서, 그처럼 사소한 핑계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므로 만일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기 자녀들이 완고하고 교화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이 막막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자신들이 그들을 징계하며 의무를 다했다는 것을 먼저 증언할 수 없다면, 그들 자신 또한 유죄로 여겨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음탕하게 행한 것이 그들을 함부로 달리도록 방임한 부모들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음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만일 어떤 사람이 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면, 그가 어떻게 자라났는지,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어떤 가르침을 받았는지를 조사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해악이 바로 그 샘에서 흘러나온 것이라면, 아버지는 아들과 마찬가지로 처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여러분은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바가 무엇인지 보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 두 가지 악덕이 언급됩니다. “우리의 이 아들은 방탕한 자요 술주정꾼입니다.” 이것이 다른 악덕들은 교정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아닙니다. 도리어 이 두 가지 종류 아래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든 미덕과 정직함 안에서 자기 자녀들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방탕함과 술취함(rioting and drunkenness) 아래에서, 그분께서는 삶의 모든 방종(all looseness of life) 포함시키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방탕함이 처벌을 받는다면, 훨씬 더 흉악한 다른 일들에는 무엇이 행해져야 하겠습니까? 음행과 도둑질과 위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와 같은 다른 일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이 두 가지 악덕에만 제한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기 자녀들의 행실을 깨어 있는 눈으로 살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만일 그들 안에서 어떤 잘못된 행동이나 방탕함을 발견한다면, 그들을 개혁하고 그들의 악한 행실로부터 다시 돌이키기 위해 자신들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한 가지 요점입니다. 짧게 요약하자면, 이것은 마치 자녀들에게 어떤 은밀한 잘못들이 있다면,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들을 깨어 있는 눈으로 바라보고 다시 교화하여, 그들이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완전히 같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특정한 잘못에서 자녀를 묵인함으로써 그를 망쳐버린다면,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습니까? 하나의 악은 그 뒤에 백 가지 더 많은 악을 끌어당길 것이며, 그리하여 그 자녀는 상실되고 파멸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크게 주의해야 하며, 자기 자녀들이 더욱더 악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하나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다른 잘못에 빠지게 하여, 결국 날이 갈수록 서로보다 더 악해지지 않도록 그 위험을 미연에 방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들이 자기 자녀들에게서 방탕이나 술취함을 방임한다면, 그러한 악덕들은 그 자체로도 이미 충분히 나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방탕한 자는 돼지가 될 것이며, 완전히 무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하나님의 피조물을 남용하는 무절제함 외에 다른 것이 없다 할지라도, 참으로 그것은 너무나 과한 일입니다. 술취함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연 속에서 사람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빼앗아 버리는 일종의 짐승 같음입니다. 방탕한 자는 게으르고 무익한 부랑자가 되어 모든 것을 배를 채우는 데 써버렸으므로, 자신의 과도함을 채울 방도가 부족할 때 필연적으로 도둑질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술주정꾼은 훨씬 더 나쁩니다. 세상은 이러한 악한 폐해들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방지해야 하며, 그러한 해악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함께, 사람들이 치명적인 파멸에 이를 때까지 어떻게 하나의 악에서 다른 악으로 굴러 떨어지는지가 우리에게 보입니다. 만일 어떤 자녀가 그의 어린 시절에 탐식가이거나 술주정꾼이라면, 글쎄요, 사람들은 그것들이 나쁜 품행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들은 묵인될 것이며 치명적인 죄로 여겨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녀들이 그러한 수단으로 인해 어떤 지점에 이르는지를 봅니다. 만일 그 방탕함이 그들 안에서 교정되지 않고, 그들이 여전히 자신들의 완악함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결국 그들은 재판관의 손에 넘겨져 죽음에 처해야 합니다. 상황이 그러하니, 우리가 스스로를 속이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도리어 우리 안에 어떤 악덕이 있을 때마다, 만일 완악함이 그것과 짝을 이룬다면, 우리는 날이 갈수록 서로보다 더 고집스럽고 마음이 완강해질 것이며, 그리하여 사람들 앞에서는 단지 작게 여겨지고, 말하자면 용서받을 수 있는 죄로 여겨졌던 잘못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범죄가 될 것임을 확신합시다. 이제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피는 것을 배웁시다. 그리고 우리 안에 어떤 악덕이 있음을 깨달을 때, 그것이 우리를 온통 파멸로 밀쳐 떨어뜨리고 마침내 우리를 침몰시켜 결국 마지막 처벌, 즉 치명적이고 죽음에 이르는 처벌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만들지 않도록, 그것을 고치기 위해 우리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이 요점에 관해서는 이만큼 해둡니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향한 자녀들의 의무에 대하여 다룹시다. 참으로 자녀들이 스스로 지혜롭고 사려 깊어서, 자신들을 가르치고 특별히 그들의 잘못에 대해 징계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괴롭게 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바랄만한 일입니다. 그리고 진실로 우리의 본성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잘 다스려진다면, 자녀는 책망을 받거나 강요를 당할 때까지 지체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생각하기를, ‘아, 내가 무슨 목적으로 세상에 살고 있는가?’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이와 같이 고려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섬기고 공경하게 하시려고, 그리고 나아가 나에게 그 목적으로 주신 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순종하게 하시려고 나를 여기 두셨다. 반대로 만일 그들이 나라는 수단을 통해 슬픔 외에는 아무것도 거두지 못한다면, 땅이 나를 삼켜버리도록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는 것이 내게 더 좋았을 것이다.’ 자녀는 그런 방식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청년기에는 분별력이 부족하고 자녀들이 스스로 요구되는 만큼 교화되지 않으므로, 적어도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다스려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 안에서 어떤 악덕을 찾아낸다면, 그들이 그것을 일깨움 받을 때 그것을 인정해야 하며, 단지 잘못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고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녀가 자기 아버지 앞에서 자신을 낮춤으로써 회개하는 시늉을 한 후에도 자신의 방탕함을 계속 유지한다면, 그것은 위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자신의 성품을 바꾸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방탕함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자기 아버지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자녀가 잘못을 저질렀거나 자신이 어떤 악덕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고서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하셔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두게 하셨다면, 그는 스스로 이와 같이 고려해야 합니다. ‘자, 하나님께서 이 방편을 통해 너에게 그분의 손을 내밀고 계신다. 왜냐하면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는 하나님의 손이자, 그분께서 너를 복된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자신의 차례를 따라 사용하고자 하시는 그분의 도구 외에 무엇이겠는가? 왜냐하면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가 내 악덕을 교정하려고 다가오는 것을 볼 때, 만일 내 자존심이 꺾이고 낮아져서 그들의 교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서는 것이요, 그분을 공개적으로 거역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확실히 자녀들은 우리 위에 있는 이 상전의 지위가 온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 위에 가지는 상전의 지위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왕들과 군주들과 재판관들이 존경받아야 마당 하지만, 그러한 종류의 상전 지위는 그토록 사랑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군주나 재판의 칼을 휘두르는 자신의 상전에게 교정 받는 것을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말하고, 정말로, 그를 때릴지라도, 자녀가 그에게 복종하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비록 아버지가 그에게 잘못을 행하거나 그를 욕하며 말하기를, “이 악당아, 이 교수형에 처할 놈아, 이 은혜를 모르는 녀석아, 네가 무엇을 하려느냐? 네가 마음의 고통과 슬픔으로 나를 죽일 때, 너는 필연적으로 너의 위에 하나님의 원수 갚으심을 불러 내리는 것이다”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아버지가 자기 자녀를 향해 그러한 거침을 사용할 때, 자녀가 그에게 자신을 낮추고 그를 대적하여 전혀 대꾸하지 않은 채, 마치 말 못 하는 자처럼 된다면, 그의 아버지의 손에서 교정을 받고 그러한 방식으로 그에게 자극을 받은 것은 그에게 커다란 존귀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어머니들에게 주신 이 상전의 지위가 우리가 심지어 본성적으로도 가치 있게 여겨야 하는 것임을 볼 때, 만일 자녀가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경고에 머리를 흔들며, 뻔뻔스럽고 완전히 부끄러움을 모르는 모습을 보여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신에게 말하는 바를 개의치 않고, 자신들의 잘못을 일깨워 준다는 이유로 그들을 향해 입술을 삐죽거린다면, 그는 온전히 은혜를 지나친 자가 아닙니까? 사람이 그의 손에서 더 무엇을 말하거나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제 자녀들은 이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는 것이 둘째 돌판에 주어진 첫 번째 계명이며, 사도 바울이 밝히는 바와 같이 어떤 약속, 내 말은 특별한 약속이 딸린 율법의 유일한 계명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엡 6:2).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는 것을 비웃는 자들이 하나님을 멸시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모든 약속을 조롱하고 그분의 모든 복을 고의로 거부하고 버림으로써 자신들의 불신앙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일깨움 받습니다. 이는 마치 그들이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번성하는 것에 신경 쓰지 않으며, 그러한 방편은 원치 않는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러하다는 증거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후,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말씀을 덧붙이십니다(출 20:12). 이는 마치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순종한다는 이 조건 외에는, 내가 너희를 번성하게 하거나 너희에게 복을 내릴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스스로 완고해지는 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박탈당하든 그렇지 않든 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배은망덕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는 것에 관해 말씀하실 때 예전(禮典)적인 형식을 뜻하신 것이 아님을 우리는 또한 주목해야 합니다. 도리어 자녀들은 스스로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주신 것은 내가 그들의 손에 의해 다스려지고 그들의 인도 아래 살아가게 하려는 의도이다.’ 그러므로 자녀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빚진 공경은 어떤 예전적이고 위선적인 겸손을 가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온유하게 행동하고, 부모가 자신을 다스리게 허락하며, 부모가 자신의 잘못을 말할 때 순종하여 고치는 데 있습니다. 이것들이 바로 자녀들이 고려해야 할 일들이며, 특별히 종교가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종종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녀들의 손에 의해 거역당해 마땅한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그들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거역하는 것 외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너무나 악해서 자기 아들이 속임수와 음탕함과 배은망덕과 위증과 배신에 빠지기를 원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평생 하나님을 멸시해 왔으며, 오직 자신들의 학교에서 자기 자녀들을 기르려고만 시도하는 수많은 아버지를 봅니다.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말하기를, “네가 나를 닮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부인하겠다”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처럼 저주스러운 말을 하는 것을 들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평생 행음자로서 온 나라를 자신의 더러움으로 감염시킨 자나, 신성모독자나, 술주정꾼이 필연적으로 자기 아들이 자신과 같아지기를 원할 것입니다. 이제 그러한 경우에 자녀들은 마땅히 자신들의 부모를 거역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바쳐야 할 공경과 순종에 관해 말하면서, “주 안에서”라는 이 예외 조항 혹은 덧붙이는 말을 써넣었습니다(엡 6:1).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위를 차지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동일한 이유로 나도 조금 전에, 이 율법의 계명에서 요구되는 공경은 특별히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기 자녀들을 잘 훈련하고 그들의 악덕을 교정하기 위해 자신들의 노력을 다할 때 행해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자녀들은 반드시 순종해야 하며, 부모가 자신들의 악덕을 그토록 정죄하는 것을 들을 때 부모의 경고와 징계를 모두 받아들여 그에 따라 자신을 개혁하지 않는다면, 자신들이 하나님과 본성의 질서 모두를 거역하는 자임을 보여주는 것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이 스스로를 변명하거나 자기 부모를 거역하는 것이 가벼운 잘못이라고 확신하지 못하도록, 여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불순종을 죽음으로 정죄하십니다. 이 선고를 내리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자녀가 너무나 마음이 완강하여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의 교정이 그에게 유익을 내지 못할 때,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입니까? 우리는 언제나 그러한 자는 괴물과 같다는 이 점으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며, 본성을 거스르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가 싫어하고 혐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본성을 거스르는 것을 묵인한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저주와 원수 갚으심이 우리를 대적하여 타오를 것입니다.
이제 만일 하나님께서 집안에 감독자를 주셔서 자신의 잘못을 말하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셨음에도, 자녀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가 부모를 멸시하는 것은 명백히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어머니 위에 자신의 표식을 인쇄해 두셨으니, 만일 어떤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격 안에서 인정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방인들조차 자신들이 하나님과 부모에게 바치는 순종에 관해 흔히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본성이 그들에게 가르쳐 준 바와 같이) 그것은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 안에 어떤 종교가 있고, 어떤 최고의 존엄을 인정하며, 거기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자는 또한 필연적으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방인들이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말했으니, 그것이 그들의 공통된 문체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이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너무나 지혜가 결여되어 있다는 결론이 뒤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의무를 알기 위해 이방인의 학교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크게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자녀들은 자신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불순종할 때, 그것이 가벼운 잘못이 아니며, 쉽게 용서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왜입니까? 그들에게는 본성의 본능이 있었고, 그들은 마땅히 그것을 따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거역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이며, 그것에 일치하여 다른 곳에서 말하기를,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자비 없이 죽임을 당하리라”고 하였습니다(출 21:15).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때린다면, 글쎄요, 그는 그 일로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때린다면, 그것은 그가 사람을 죽인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본성 안에 어떤 질서나 이성도 없을 것입니다. 왜입니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본성 안에 세워두신 그 기초에 눈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니, 즉 사람이 그처럼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적하여 설 때, 그것은 마치 사람이 하늘과 땅을 함께 혼돈 속에 뒤섞으려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녀들 안에 어떤 온유함의 불꽃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사탄에게 온전히 사로잡혀서 완전히 교화 불가능한 상태가 아니라면, 그들을 두려움 속에 붙잡아 두는 역할을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본문에서 더 기억해야 할 바입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해 말해야 할 만큼 다 말하기에는 시간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이제 결론으로 나아갑시다. 결론은 곧, 이 세상의 아버지들을 거역하여 범하는 불순종이 하나님의 법에 의해 이토록 중하게 처벌을 받는다면, 사람들이 자신들의 하늘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을 때, 그들에게는 어떤 일이 임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교정들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 자녀를 양육할 때, 그는 그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역자이며, 그의 목소리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법을 주신 분이 바로 자신임을 더 명백한 방식으로 선언하셔서, 우리가 그분의 하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성경을 가지게 하실 때, 그것은 집안에서 아버지나 어머니가 말하는 것보다 더 큰 권위를 지닌 목소리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교회로 나아오며, 그곳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하나님께서는 마치 자신이 친히 그 자리에 계신 것처럼 그분의 말씀이 들리도록 전달하시기 위해 그 장소와 설교단(the pulpit)을 두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이처럼 기록되어 있고 우리에게 이처럼 전파되는 것을 볼 때, 그것을 거역하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기는 자들은 괴물과 같이 거부당해야 하며 결코 용납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사람들이 그들을 용납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들이는 일이 아닙니까? 그것이 우리 가운데 아무리 오래 숨어 있을지라도 결국에는 필연적으로 드러날 것이며, 우리는 고의로 그리고 알면서도 악을 옹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의 대가를 치르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이 비교를 해나갑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조물 안에서 그분께서 각자에게 주신 지위에 따라 인정받기를 원하시는 것을 볼 때, 그리고 또한 그분께서 탁월한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순종하기를 원하셔서 나머지 사람들이 그들의 교정을 받고 그들에게 복종하게 하시는 것을 볼 때, 그분께서 자신의 거룩한 입으로 친히 말씀하실 때,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은 훨씬 더 당연한 도리이며,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와 그분의 말씀이 전파되는 것을 들을 때, 그분께서는 그렇게 행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자신의 교회 안에 그분의 말씀을 전파하는 자들이 자신의 아들의 인격을 대변해야 한다는 이 질서를 세워두셨음을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의 존엄을 멸시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긴 것이 가벼운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이 일을 잘 살피도록 합시다.
마지막으로, 여기에서 “너는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고 말씀하시는 바를 주목합시다.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앞에서 들었던 바를 다시 반복하시는데, 곧 극악무도한 범죄들이 우리 가운데서 길러질 때 그것이 우리를 감염시키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온 밀가루 반죽 덩어리를 부풀게 하는 데 많은 누룩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우리에게 말해질 뿐만 아니라, 경험 또한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재판관들은 악을 뿌리 뽑는 일에, 정말, 사람들의 잘못을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바대로 처벌하는 일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사람의 교정이 필요하다면, 그것이 행해지게 하고, 사람을 죽음에 처하게 하는 이 극단적인 상황이 언제나 미연에 방지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 범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때는 엄격함과 엄정함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악이 고의로 길러진다면, 사람들은 결국 자신들이 그것으로 인해 무엇을 얻게 되었는지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와 함께 경고를 받아, 우리 눈앞에서 보는 본보기들을 통해 우리 자신에게 유익을 얻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법의 질서에 의해 어떤 처벌이 집행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의 대가를 치르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가르치고 계심을 이해해야 하며,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깊이 고려해야 합니다. 나아가, 만일 재판관들과 판사들이 여기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지상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을 거역하여 범하는 불순종을 처벌하라고 그분께로부터 명시적으로 명령을 받았다면, 명백한 하나님의 멸시나, 어떤 종교 없음이나, 그분의 말씀을 대적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그러한 일들은 훨씬 더 용납될 수 없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그것들이 용납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반역이며, 그분께서는 그것을 처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재판관과, 공의를 집행하기 위해 통치하는 자리에 세워진 모든 자는 하나님께서 무엇보다도 자신의 존귀를 그들에게 맡기셨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특별히 그 일에 있어서, 정말, 우리 모두가 함께 우리의 행함으로 우리의 온전한 소원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통치하시는 것이며, 우리가 그분의 말씀이 멸시당하고 조롱받는 것을 원치 않고, 오히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존경받기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러한 방식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고 우리를 번성하게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열심히 나타내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우리의 좋으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를 길들이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너무나 많은 비참함과 부패함으로 기울어져 있을지라도, 적어도 고집스럽고 교화 불가능하게 되지는 않게 하시고, 도리어 그분의 말씀에 의해 경고를 받을 때, 우리 각자가 자신을 낮추고, 그분께서 우리의 어깨 위에 메워주시는 멍에를 조용히 메게 하소서. 그리고 그분께서 사람들을 통해, 특별히 우리를 인도하고 다스리는 책임을 맡기신 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내리시는 징계들을 인내로 감당하게 하사, 우리 각자가 상전들에게 복종해야 하는 자임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마땅한 순종을 돌려드리게 하소서. 또한 우리가 억지로 강요당하고 박차를 맞을 때까지 결코 지체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경고들을 (그것이 어디로부터 오든지 간에) 하나님의 경고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이는 모든 진리가 그분으로부터 나오며, 그러한 방편을 통해서도 그분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우리뿐만 아니라 땅 위의 모든 나라와 백성에게도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