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칼빈 신명기 설교

신 19:19-20:4

작성자doulosdei|작성시간26.06.16|조회수22 목록 댓글 0

116회 설교: 19장 다섯 번째 설교와 20장 첫 번째 설교

15561217일 화요일

 

19:19-20:4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너희 중에서 행하지 아니하리라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너희가 싸울 곳에 가까이 가면 제사장은 백성에게 나아가서 고하여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말미암아 놀라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적군과 싸우시고 구원하실 것이라 할 것이며

 

 

 

 

우리는 어제 하나님께서 이웃을 대적하여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어떤 형벌을 정하셨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재판관들과 손에 공의의 칼을 쥔 이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로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 편에서 우리에게 행해지는 잘못들을 인내로써 견뎌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 우리가 그들이 처벌받도록 추적한다면, 그것은 악의적인 원한이나 복수의 마음에 의해 행해져서는 안 되며, 도리어 처벌받아야 할 당사자가 나중에 더 이상 범죄하지 않도록 막기 위함이요, 또한 다른 이들이 그렇게 행하도록 대담해지지 않도록, 그 어떤 난폭한 짓이나 폭력적인 거래도 허용되지 않게 하려는 목적이어야 하며, 처벌받는 자의 본보기를 바라봄으로써 모든 사람이 두려움 속에 머물게 하려는 목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방편에 의해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리가 어떻게 율법의 교리와 매우 잘 조화되는지를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우리가 악에 대항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자신의 이웃을 죽음에 처하게 한 자는 사형에 처해져야 하며 아껴두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합니다. 이제 첫눈에는 여기에 어떤 상충됨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범죄자가 처벌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누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지를 고려해야 하니, 곧 그분께서 권세를 주어 세우신 이들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악을 악으로 대항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의 의미는 우리 각자가 같은 모양으로 되갚아 주기보다는 오히려 평안하게 살며 잘못들을 인내로써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분이 마태복음 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입니다(5:38). “옛 사람들에게 말한 바, 눈은 눈으로, 손은 손으로 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겉옷을 가지려 하는 자에게 속옷까지도 가지게 하라.” 우리는 유대인들이 상기 법을 어떻게 오용했는지를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어떤 부당한 일도 처벌받지 않은 채 빠져나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핑계 아래, 그들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원수들에게 복수하기를 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시민 정치의 법들과, 온전함을 요구하며 우리의 마음과 감정들을 다스리는 데 쓰여 그로 인해 어떤 사람에게 해악을 조장하는 것이 비록 그가 그것을 마땅히 받아야 할지라도, 적법하지 않게 만드는 하나님의 법들 사이에 차이점을 두어야 합니다. 시민법과 지상의 정치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에게 행해진 잘못들의 보상을 구할 허락을 주며, 재판관은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켜 줄 의무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잘못을 당한 당사자가 악의적인 마음을 품고 있고, 그의 원수들을 고소하는 것이 그에게 복수하기 위함이라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변명될 수 없습니다. 비록 그가 사람들 앞에서는 공의를 집행 받았고, 그들이 그의 명분이 좋고 적법하다고 말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정죄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인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우리에게 기쁨과 봉사를 행하는 자들에게 악을 바라지 않는 것이 무슨 덕이 되겠습니까?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습니까?(5:46).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에게 부끄러움과 고통을 줄 때, 우리가 그것을 참아내며, 선을 행함으로써 그들의 악을 이기고자 힘쓴다면, 그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자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는 그분의 본보기를 따르는 자들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시민 정치의 법들과, 영적이며 사람 마음에 있는 모든 감정들을 다스리는 데 쓰이는 하나님의 법 사이의 이 앞서 언급한 차이점을 주목합시다. 이제 정치에 있어서는 아무도 자신의 이웃을 대적하여 그 어떤 것도 기도하지 않고, 사람들이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사람들이 재산에서나 인격에서나 이름에서나 서로에게 그 어떤 불쾌한 일도 유발하지 않고, 범죄하는 자는 누구든지 처벌받는 것 외에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실 때, 그분은 단지 너희 자신을 악으로부터 삼가고, 범죄하는 자가 처벌받게 하라고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또한 여인을 음욕을 품고 바라보며, 그녀와 부정함을 행하기를 바라는 것이 적법하지 않으며(5:28), 우리의 이웃을 미워하는 것이 그를 살인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율법이 지상의 정치보다 어떻게 더 높이 솟아오르는지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전한 순전함 가운데 그분 앞에서 걷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폭행하거나, 까닭 없이 그를 미워하는 것이 적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우리가 그렇게 할 정당한 명분과 명목을 가지고 있을 때조차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그때 우리에게 행해진 잘못들을 용서하고 같은 모양으로 되갚아 주지 않아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원수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5:44). 그리고 비록 그들이 우리를 험담하고 자신들의 마음속에서 우리가 백 번이라도 파멸하기를 바랄 수 있을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그들의 안녕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이것을 첫 번째 요점으로 주목하십시오.

참으로 우리의 원수가 우리에게 해를 끼치려고 돌아다녔을 때, 그의 안녕을 바랄만큼 우리의 감정들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억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나, 그럼에도 우리는 그렇게 하도록 우리 자신을 채찍질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우리 안에서 거스르는 저항을 느낄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변명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것이 사람의 본성과 온전히 정반대됨을 깨닫고, 그것이 단지 권고일 뿐 분명하고 명시적인 명령은 아니라는 이 주해로 그것을 얼버무리려 했던 교황주의들처럼 행해서는 안 되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모독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만약 우리가 그분의 자녀로 여겨지기를 원한다면, 자신에게 범죄한 자들을 용서하시는 그분의 선하심을 따라, 우리 자신을 빚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힘이나 우리 자신의 본성의 성향에 주목하지 맙시다. 도리어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서 어떤 앙심을 느끼거나, 사람이 우리를 괴롭혔을 때 참지 못하는 초조함의 격정으로 인해 복수를 원하게 된다면, 우리 하나님께 의지하여 그분께서 우리 안에 있는 과도한 열정들을 제압해 주시기를 간구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격양된 상태에 있을 때 우리에게 온유함의 영을 주사 우리로 하여금 인내하게 하시고, 그리하여 그 해악이나 부당한 일이 우리가 견디기에 너무 어렵고 번거롭지 않게 하시며, 우리가 그것을 온화하게 넘겨버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간구합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처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헛된 구실들로 우리 자신을 속이지 않도록 주의하는 법을 배웁시다.

우리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한 법을 주셨음을 보건대, 우리 자신의 악하고 부패한 감정들을 변명거리로 핑계 삼아 그것을 거꾸로 뒤집지 맙시다. 정말로, 그리고 사람의 본성이 너무나 왜곡되게 기울어져 있어서, 만약 스스로를 매우 면밀히 살피지 않는다면,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게 될 것임을 우리는 주목합시다. 내가 어제 해설한 법, 곧 무죄한 사람의 죽음을 기도한 당사자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법은 매우 공정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복수할 허락을 얻는 것이 합당합니까? 악을 악으로 되갚아 주도록, 굴레가 우리 목에 느슨하게 풀려 있어야 하겠습니까? 확실히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변명거리로 삼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태생적으로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기 쉬움을 보게 되니, 그러므로 우리는 그만큼 더 깨어 있을 필요가 있으며, 하나님께서 이것이나 저것을 말씀하실 때, 어떤 목적을 겨냥하셨는지를 고려해야 하는데, 곧 우리가 그 안에서 눈멀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마치 그것을 보지 못한 체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조금도 유익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악덕들을 교정하고 우리의 모든 악한 감정들을 제쳐두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우리는 선하고 거룩한 법들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 어떤 사람이 법의 절차에 따라 처신하면서도 그 사이에 자신의 마음에는 앙심이 가득하여 굽은 방편으로 자신의 원수를 무너뜨리고자 구한다면, 그것은 악한 처사이며 하나님께 정죄 받는 방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거의 일상적인 관습입니다. 왜냐하면 소송과 우정은 드물게 짝을 이룬다는 이 공통된 속담에 따라, 법정으로 가는 사람들 중에 서로 원수가 아닌 자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만약 사람이 그와 같은 어떠한 앙심을 품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께 범죄 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하지만 그는 공의의 방편을 사용하고 있으니, 그것이 적법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처사 방식이 허용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은 순전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선하다는 이 말씀에 따라,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악한 감정들을 굴복시켜야 마땅합니다. 성 바울은 거기에서 음식들에 대해 말하고 있으나, 우리는 동일한 말씀을 다른 모든 것들에도 적용할 수 있으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용을 위해 무언가를 지정하실 때마다, 그것은 선하고 유익하다는 것이며(1:15), 정말로, 진실로 우리 편에서 우리의 악한 감정들로 그것을 더럽히지만 않는다면 그러합니다. 만약 우리 안에 어떠한 더러움이 있다면, 우리가 만지는 그 모든 것이 즉시 그 자리에서 더러워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공의의 질서가 우리의 사용과 유익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지정된 거룩한 것임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도 만약 내가 원한에 찬 마음을 품고, 내 대적에게 어떠한 악의를 품는다면, 그때 나는 하나님께서 거룩한 사용을 위해 봉헌하셨고, 그 자체로 순전하고 깨끗했던 그것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악한 감정들을 개혁하는 법을 배웁시다. 우리가 그렇게 행했을 때, 그때에야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것이 우리에게 선하고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으니,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그분의 뜻과 의도에 반하게 바꾸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제 다루어졌던 본문과 관련하여 우리가 사실상 기억해야 할 내용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전쟁에 관한 사안들에 대해 덧붙이시는 말씀으로 나아갑시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가서 네 대적과 싸우려 할 때에, 비록 네가 너보다 강한 그들을 볼지라도,” 그들의 백성의 수가 너보다 훨씬 많을지라도, 그리고 그들에게 병거와 말이 있을지라도, “그들처럼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라하십니다. , 비록 그들이 모든 면에서 너보다 더 잘 갖추어지고 비축되어 있을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네 마음이 위축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이유를 덧붙이십니다. “왜냐하면 네 하나님이 너와 함께 가시며, 그분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분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너는 그분의 선하심과 권능을 신뢰하십시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백성에게 자신들이 원하는 때에 자신들의 뜻대로 전쟁을 할 수 있는 허락과 자유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정당한 명분이 있을 때에만 그리하신다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에 의해서만 전쟁을 행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나라 백성 중 그 누구도 살려두는 것이 금지되었고, 노예로 삼기 위해 남겨둔 어린 아기들과 여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칼로 쳐 죽여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남자들로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칼날에 처해지도록 정해졌으니,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그러한 심판을 내리셨고, 그것은 원인 없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을 참아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전히 완악하고 개혁되지 않은 채로 지속되었다는 것은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에게 기업으로 주어진 가나안 땅을 한 번 완전히 정복하고 나면, 그때에는 평안히 앉아 있을 수 있었으며, 나중에 실제로 그러했던 바와 같이 이웃들이 자신들을 괴롭히지 않는 한, 그들은 이웃들을 침략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에게 약속되었던 온 땅을 결코 다 차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 자신의 잘못과 배은망덕 때문이었으니, 그리하여 그들은 다윗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곤경과 괴로움 속에 있었습니다. 다윗이 그의 모든 원수들을 굴복시켰습니까? 그가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약속되었던 기업을 온전히 차지하게 해 주었습니까?(삼하 7:10). 만약 그가 그렇게 행했다면, 그때 그는 곧바로 그의 이웃들과 전쟁을 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어떠한 시비를 걸어서도 안 되었고, 정복으로써 자신의 왕국을 확장하고자 구해서도 안 되었습니다. 도리어 그가 도발을 당했던 것이니, 그러므로 그는 자기 백성의 나라를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본문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그러한 전쟁들을 다루고 있음을 주목합시다. 예컨대 한 군주가 부당하게 공격을 당했을 때, 그때 그는 힘으로 자신의 원수에게 대항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의 소유나 한 도시의 영토, 또는 한 나라의 지방들을 어지럽히고자 기획하는 사람은 강도보다 나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참으로 그들을 왕들과 군주들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권세를 그토록 오용하고 자신들의 경계에 만족하지 못한 채, 정당한 명분이나 명목도 없이 그것을 반드시 확장하고자 하는 자들은 참으로 존귀한 도둑들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자들은 도둑들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재판관이 도둑이나 강도를 처벌해야 마땅하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부터 권세를 정함 받은 이들도 자신들의 백성들을 어지럽히고 괴롭히는 데 빠진 그와 같은 모든 자들을 대적하여 무장을 갖출 수 있으며, 그러한 종류의 전쟁들은 적법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반드시 맡아야 할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격려하시며, 그들이 원수들을 대적하여 전쟁하러 나갈 때, 마음이 약해지거나 겁쟁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유 없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주목해야 할 내용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악한 명분을 옹호하는 자들을 도우시는 것이 그분의 뜻이라고 우리가 추측하지 않게 하려 함이며, 만약 그러하다면 그분은 자신을 부인하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자신의 백성과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실 때마다, 그분의 의미는 그들의 시비가 정당하고 이치에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필연적으로 전쟁이 일어날 때, 그 전쟁이 평화를 도모하고 그것을 얻기 위한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는 조건하에, 필연성에 의해 전쟁을 하는 것이 적법하다는 것을 지나가는 길에 거둘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직 구약성경만을 위한 것이며 오늘날에는 사정이 이와 같지 않다고 상상하는 어떤 기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그들의 원수들로부터 구원해 주시겠다고 허락하시는 곳에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그분의 약속이 단 한 번만이 아니라, 영원토록 유효하다는 것을 일반적인 규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서는 칼과 창이 쟁기와 보습으로 바뀔 것이며(4:3), 더 이상 괴롭힘이나 폭력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참으로 회심하고 개혁될 자들의 측면에서 보면 매우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양과 같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곰과 사자가 함께 살 것이며, 어린 아기가 그 둘을 다스릴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11:6).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성령으로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실 자들에 대해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이 전파될 때, 세상이 하나님께로 회심한다거나 그들 모두가 자신들의 행실을 바꾼다는 것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어서,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더욱더 악해지고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더욱더 독이 오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에게 제안된 은혜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여 자신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명백히 그분을 멸시했기 때문에, 상실한 마음(reprobate sense)을 통해 사탄에게 내어줌이 마땅합니다.(앞서 언급한 전제들을 고려할 때) 하나님께서도 그들로부터 돌아서시고 사탄이 그들을 끌고 가 온갖 악 속으로 휩쓸어 가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습니까? 복음의 설교를 들은 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더욱더 악해지는지를 부디 주목하십시오. 그렇다면 모두가 양이 될 정도로 그렇게 회심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들의 분노는 더욱더 불타오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끊임없이 악한 사람들이 있고, 참으로 군주들 자신도 자신들의 야망과 탐욕, 그리고 다른 악한 음욕들에 너무나 휩쓸린 나머지 자신들의 행위에서 아무런 절제도 지키지 않고, 오직 자신들의 악한 뜻을 만족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고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들고자 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성 바울이 선언하는 바와 같이 권세를 가진 자들에게 칼의 사용을 남겨두셨고, 그들이 강한 손을 가지도록 정하셨습니다(13:4). 이로써 만약 전쟁이 적법하다면, 하나님의 이 약속이 여전히 효력을 발휘한다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우리가 인내로써 우리의 영혼을 소유해야 마땅하다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행정관들의 직무가 그쳐야 한다거나, 그분께서 그들을 무장시키신 것이 아무런 목적이 없다거나, 그들이 단지 우상처럼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백성들이 공격을 당하고 고통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능력을 주시는 한 자신들의 목숨을 걸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까닭으로 신실한 군주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쟁의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인도자가 되시고, 자신들이 원수들과 싸워야 할 때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시며, 자신들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가 알게 하려는 목적으로, 나는 이 본문에 더 오래 머물렀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그분의 도우심을 확신하고 언제나 그분께 피하여 달아나게 하려 함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그것이 이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한 요점임을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주권자가 되시지 않는 한, 그 어떤 전쟁도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또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그분의 손의 권능으로 무장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또한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의논을 구해야 하며, 그분의 성령께서 우리가 취한 조언을 주관하시는 분이 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들이 그분의 뜻을 묻지도 않은 채 자신들의 머리로 착수하는 모든 기도들이 저주를 받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이 애굽 왕국과 동맹을 맺거나 그들과 다른 어떠한 친밀한 거래에 들어갔을 때,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내 의논에 의하지 않고, 직조물을 짜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30:1). 그리고 곧바로 그분은 해설을 덧붙이시기를, “정말로, 왜냐하면 너희가 내 입에 묻지도 않고 사안들을 결정하기 때문이다하셨으니, 곧 내 말씀에 의해 그 일이 적법한지 아닌지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 뜻에 정착하려 하지 않고, 내 성령이 너희의 통치자가 되시거나, 너희를 주관하시도록 허락하지 않는구나. 그러므로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라고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애굽 왕국은 만약 너희가 그것에 기대면 너희 밑에서 부러질 갈대와 같을 것이니, 그것은 오직 너희의 목을 부러뜨리는 데 쓰일 뿐이요, 그래요, 그것은 그것을 의지하는 자의 손을 찌르는 날카로운 갈대처럼 너희를 찌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구원을 받고자 한다면, 우리 자신을 온전히 그분의 뜻에 맞추어야 하며, 그분의 말씀에 의해 허용되지 않거나, 그분이 인정하신다고 우리가 확신하지 못하는 그 어떤 것도 시도해서는 안 됨을 우리가 주목합시다. 그러고 나서야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의 편이 되실 것과, 우리가 그분의 권능으로 보호를 받아 우리의 모든 원수들을 이기고 승리를 거둘 것을 철저히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 기록된 말씀들을 잘 달아보아야 마땅합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비록 네가 네 대적이 너보다 강하고 말과 병거를 훨씬 더 잘 갖추었으며, 그들의 백성의 수가 더 많음을 볼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로써 그분은 (여호사밧 왕이 선언했던 바와 같이) 우리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로 하나님의 권능을 측정해서는 안 됨을 보여주시니(대하 20:6,12,15,20), 왜냐하면 그분에게는 십만 명의 군대를 패퇴시키는 것이 한 줌밖에 안 되는 무리를 패퇴시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아니며, 큰 군대에게 승리를 주시는 것만큼이나 열두 명의 사람들에게 승리를 주시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이것이니, 곧 만약 우리가 세상의 힘을 잘 갖추고 있으면,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신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우리가 아무것도 없이 벌거벗겨져 있고 우리의 원수들이 우리에게 너무 강하면 그때 우리는 낙담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이러한 하등의 방편들에 얽매어 두고, 그분께서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가지고 그 일을 하실지 미리 알려주지 않으시거나, 사람들이 말하듯 그것의 확실한 담보를 우리에게 주지 않으시면, 그분께서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의 전능하심을 너무나 크게 깎아내리는 것이요, 모든 질서를 거꾸로 뒤집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의해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바로 우리의 원수들이 아무리 강하고 막강할지라도 낙담하지 않은 채 지속함으로써 그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 위에 한 번 입김을 부시기만 하면 되며, 그러면 곧바로 그들의 모든 권능이 박살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전능하다고 보여주시는 부분은, 가장 큰 권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피조물들이 아무런 일도 전혀 할 수 없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그것의 아주 작은 조각까지도 사라지게 만드신다는 점에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단지 내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어 그들이 자신들을 드높이지 못하게 하겠고, 내가 그들의 용기를 빼앗아 그들을 흩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시는 것 외에 더 하실 수 없다면 그것은 작은 일이겠으나, 그분에게는 자신의 자녀들을 구원하실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때로 그분은 우리의 원수들을 엄청난 불길 속에 두사, 그들이 우리를 대적하여 미친 사람들처럼 날뛰게 하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우리를 대적하여 모든 것을 준비해 두게 하십니다. 그리고 때로 그들이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획책했을 때, 그분은 그들이 사자 같은 마음을 가지도록 내버려 두시며, 그 방편에 의해 그들은 그러한 광포함으로 격분하여 모든 가망성으로 볼 때 천둥처럼 자신들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반드시 무너뜨릴 것처럼 보입니다.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허용하셨습니까? 그러나 정작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면, 그때 그들은 아무런 힘도 전혀 가지지 못할 것이며, 그리하여 그들이 도모했던 일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처음에는 너무나 두려운 모습으로 나아와 모든 것을 다시 진동하게 만들지라도, 그럼에도 그분은 그들의 손에서 칼을 쳐서 떨어뜨리실 것이니, 그리하여 그들은 그 어떤 것도 실행에 옮길 수 없을 것이요, 요약하자면 그들은 물처럼 흘러가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에서 이러한 경우들에 하나님의 권능을 잘 달아보아야 마땅함을 주목합시다. 그리하여 그분께서 사람들이 자신들을 드높이고 모든 것이 그들의 바라는 바대로 온전히 갖추어지도록 내버려 두셨을 때, 그분께서 그 모든 것을 발아래 짓밟으실 것임을 의심하지 맙시다. 이것을 첫 번째 요점으로 주목하십시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상태와 처지를 고려하게 될 때, 우리가 그분께 의지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롭지 않으시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때때로 자신의 친히 가지신 선하심과 권능에 더 큰 광채를 부여하시려고, 우리가 어떠한 곤경 속에 처하도록 내버려 두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주위를 둘러볼 때 아아,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고 부르짖게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에게 몸을 맡겨야 할지 알지 못할 것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책을 다 썼을 때, 우리는 이미 절반은 패배한 사람처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에게는 우리의 모든 부족함을 채워주실 방편이 있으니, 오직 우리가 그분의 때를 기다리며, 여호사밧과 함께 말하기를, “우리 하나님에게는 무수히 많은 무리를 대적하여 적은 수에게 승리를 주시는 것이, 적은 무리를 대적하여 큰 군대에게 승리를 주시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니, 그분에게는 다 똑같도다합시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권능을 의지하며, 우리 앞에 놓일 그 모든 유혹에 대항할 방편을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임을 의심하지 맙시다. 그리고 특별히 사탄이 우리의 용기를 약화시키고 우리를 절망 속으로 몰아넣으려고 돌아다닐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항합시다. 이와 같이 여러분은 우리의 원수들이 아무리 강하고 우리를 이길 능력이 아무리 뛰어날지라도 우리가 그것에 낙담해서는 안 된다는 이 말씀에서 우리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참으로 우리는, 선지자들에 의해 대단히 자주 확언 된 바와 같이, 교회의 안녕이 말이나 병거에 있지 아니하고, 창이나 그 어떤 종류의 갑옷이나 화포에도 있지 아니하며, 오직 하나님의 권능에 있다는 것을 일반적인 규칙으로 삼아야 합니다(31:3).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필연적인 교훈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승승장구하고 보기에 영광스러울 정도의 그러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습니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깎아내려질 것이요,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방편에 의해 보존된다고 추측하게 되어, 마땅히 그래야 하듯이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지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그분께 부르짖는 것은 한낱 의식적인 방편에 불과하게 되거나, 혹은 우리의 마음이 교만과 자만으로 부풀어 오를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토록 지나친 오만함에 빠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낮추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취하시기 위해, 그분의 뜻은 우리로 하여금 아무런 힘도 장비도 없이 이리들 가운데 있는 양들과 같이 되게 하시는 것이요, 모든 면에서 무장하고 갖추며 방비를 한 그러한 원수들에게 사방으로 둘러싸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가망성으로 볼 때, 우리는 매일같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며, 우리를 죽이려고 끊임없이 목에 칼이 겨누어져 있는 양들과 같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상태에 있으니,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 의해 영광을 받으려 하신다는 것과, 그분께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부르신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합시다. 이는 우리가 온전히 그분만을 의지하고 그분의 선하심과 보호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만약 그분께서 도우시려고 자신의 팔을 뻗지 않으신다면 몸을 맡길 곳조차 알지 못할 자들로서 곤경이 우리를 죄어오는 것을 볼 때, 그분께 부르짖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은 우리의 원수들의 권세를 고려할 때 그것이 아무리 클지라도 낙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곳에서, 우리가 이 교훈을 어떻게 사용하여 가치 있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모세가 어떻게 많은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주목합시다. 그 까닭은 우리에게 어떠한 위험이 닥쳐올 것처럼 보일 때, 우리가 사로잡히게 되는 그 두려움을 즉시 이겨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너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네 마음이 낙담하거나 위축되지 말며, 너는 그것에 깜짝 놀라지 말고, 너는 그것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보십시오, 그가 단 한 가지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어떻게 네 가지의 서로 다른 용어들을 사용하는지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은 결코 말의 과장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바라본 것입니까?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시험해 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의 원수들의 힘과 막강함을 볼 때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낙심하거나, 실망해서는 안 된다는 이 점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유 없이 이토록 오래 머무시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싸움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에는 충분히 깊이 잠들 수 있고, 사람이 보기에 우리가 얼마나 둔감한지 놀라울 정도이며, 우리는 결코 그 어떤 위험도 우리 가까이 올 수 없다고 믿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정말로 본격화되고 우리가 한 번 죄어 옴을 당하게 되면, 그때에는 우리가 얼마나 크게 당황하는지 참으로 보기에 안타까울 정도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를 아무리 격려해 주실지라도, 그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에 생기를 돋우지 못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우리 안에서 그토록 큰 지배력을 행사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어서 우리의 낙담함으로부터 구제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하스가 예루살렘 성이 포위당할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았을 때 어떠한 처지에 처했는지를 보게 됩니다(7:12).

게다가 우리가 위험에 처할 때, 그 어떤 두려움도 우리를 온전히 압도하지 못하게 하여,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다시 헤어 나올 수 있게 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여기에서 너희는 놀라지 말며, 너희 마음이 낙담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바를 우리가 주목합시다. 우리 주님께서 이와 같은 방식의 말씀을 사용하실 때, 그것은 마치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 만약 내가 너희에게 단지 두려워하지 말라고만 말했다면, 그것으로 너희에게 충분해야 마땅하도다. 그러나 너희가 내 편에서 확신을 얻었을 때조차, 여전히 두려워하기를 그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내가 잘 아노라. 그러므로 이제 마음을 굳세게 먹고 너희에게 새로운 힘을 모으라. 그리고 결국에는 너희 앞에 닥치는 모든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견고하게 너희의 장비를 붙잡고 버티라고 하시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즉시 다시 위로받을 수 없을 만큼의 그러한 정신적 고통을 느낄 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몇 마디 말로 이해하게 됩니다. 만약 하나님의 한 가지 약속이 우리에게 충분하지 않다면, 우리는 또 다른 약속으로 나아갑시다. 그리고 이어서 세 번째 약속으로 나아갑시다. 그래요, 그리고 불신앙의 씨앗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온전히 뿌리 뽑힐 수 있도록, 우리가 모든 곤경을 이겨내기 위해 우리 자신을 채찍질합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처신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들 중 하나를 들었음에도 만약 그의 마음이 여전히 평안을 얻지 못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과 싸우며 스스로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비록 내가 연약할지라도, 나 자신의 어리석음에 양분을 주어서는 안 되며, 도리어 하나님 안에서 나 자신을 강건하게 해야 하도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만약 내가 그분의 어떠한 단 하나의 약속으로도, 나 자신을 평안하게 하지 못한다면, 나는 너무나 배은망덕한 자로다. 하나님의 입이 열리는 바로 그 자체가 내게 충분하지 않단 말인가? 내가 그분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나는 너무나도 왜곡된 자가 아닌가? 그렇도다. 하지만 이 저주받은 불신앙이 내 안에서 지배하고 있는 만큼, 나는 그것에 대항하여 싸워야 하니, 그 싸움이 격렬하면 격렬할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욱 채찍질해야 하도다. 그렇다면 내 안에 있는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내 손에 의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마땅하니, 그리하여 그분의 약속이 승리하고, 내가 내 안에서 그것의 열매를 깨닫게 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그리합니까? [만약 한 가지 약속이 쓰이지 못한다면,] 우리는 두 번째 약속을 붙잡아야 합니다. 내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도우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 한 번만이 아니며, 성경 전체가 온통 그러한 약속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시금, 우리가 그것이 여전히 우리에게 충분히 유익하지 못함을 볼 때, 우리는 더 나아가 하나님의 또 다른 약속을 붙잡고, 그것에 의해 우리 자신을 확정해야 합니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사탄이 격퇴당할 수 있도록 그 약속들을 서로서로 위에 쌓아 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와 정면으로 맞서 싸울 능력이 없다면, 하나님의 약속들로 요새나 성벽을 만듭시다. 그래요, 그것들로 방벽과 이중의 해자를 만듭시다. 그리하여 원수가 결코 우리에게 도달할 수 없게 하고, 우리가 담대하게 그를 대적할 수 있게 합시다. 이와 같이 모세가 우리가 우리의 원수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토록 자주 반복하는 이 본문에서 우리가 거두어야 할 내용은, 첫째로 우리가 위험이 나타나자마자 두려워하는 것, 곧 우리의 본성 안에 있는 질병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요, 둘째로 한낱 힐끗 보는 것으로 하나님의 약속들을 그저 조금 맛보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그것들에 고정하고 매일같이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훈련함으로써 그것의 치료제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후 여기에 그 이유가 뒤따릅니다. “왜냐하면 네 하나님이 너와 함께 가시기 때문이다. 정말, 곧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이시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모세는 우리가 우리의 원수들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다른 방편은 전혀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뿐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을 달아보고, 우리 주위를 둘러보며 서 있는 한, 아아,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 놓이겠습니까? 우리는 필연적으로 수많은 공포와 염려 가득한 생각들로 끊임없이 시달려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선한 확신과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자 한다면, 오직 단순하게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날개 그늘 아래 밀접히 머무는 법을 배웁시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 위에 세우는 모든 대담함은 저주를 받은 것임을 경고 받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원수들을 이길 유익과 원조를 가졌다는 이유로 이것이나 저것을 신뢰한다면, 그리하여 우리의 신뢰를 그것에 얽매어 둔다면, 우리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 동안은 바람으로 부풀어 올라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기죽일 수 없다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나,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무례함을 비웃으실 것이며, 그것이 연기보다 나을 것이 없음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참된 담대함과 용기, 그리고 견고함의 기초는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 고정하고, 그분께서 우리의 편이 되심을 확신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까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내는 것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니, 도리어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약속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네 하나님이 너와 함께 가실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요, 진실로 내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그분의 말씀의 보증 없이 그 어떤 것도 시도하지 않고 앞장서서 달려가지 않는다면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보내고자 하는 곳이면, 어디든 굴러다니는 우리의 테니스공이 되려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대장과 왕으로 모시는 영광을 돌려 드려서, 그분 아래에서 싸우고 그분의 말씀에 의해 우리에게 허용되지 않은 그 어떤 것도 기획하지 않으며, 도리어 우리 위에 있는 온전한 주권을 그분께 양도해 드릴 때, 우리는 그분의 도우심을 결코 결핍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깜짝 놀라거나 우리를 두려워하게 만들 그 어떤 계기가 있을 때마다,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 고정하는 법을 배우고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보증을 붙잡읍시다. 그것은 곧 그분께서 우리의 필요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언제나 가까이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진실로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보호를 친히 떠맡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이 우리의 원수들에게 원수가 되실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안녕을 유지하시는 분임을 확언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만약 사람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에게 그 어떤 해악을 가하려고 돌아다닌다면, 그들이 자신을 대적하여 서는 것이요, 그분께서 그들과 우리 사이에 자신을 방패로 두시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니, 이것이 어찌 특별한 특권이 아니겠습니까? 거룩한 성경은 이와 같은 비유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방벽이라 불리시고, 때로 우리의 높은 탑이라 불리시며, 때로 우리의 성벽이라 불리시고, 때로는 우리의 방패라 불리십니다. 다시금, 그분께서 자신들이 우리를 얼마나 크게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려 하실 때 말씀하시기를(32:10),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다하시니, 이는 우리를 대적하여 기획될 수 있는 모든 해악을 느끼거나 알아차리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정이 이와 같아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지키신다는 이 보증을 우리가 가졌음을 보건대,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원수들을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히 강하시다는 것을 의심하지 맙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이 스스로 가져올 수 있는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팔과 비교할 때, 온전한 헛됨과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만큼, 세상의 모든 힘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김으로써 그분께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돌려 드립시다. 그렇다면 모세가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보내며 말하기를, “나의 친구들이여, 너희 자신들이 어떠한지에 대해 결코 골똘히 생각하며 서 있지 말고, 너희가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함으로 알라. 비록 너희가 전쟁을 위한 아무리 큰 장비를 가졌을지라도, 여전히 너희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분 안에서 강건하여지며 거기에서 용기를 얻으라고 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덧붙입니다. 이로써 그의 의미는, 그들이 이미 경험을 통해 하나님만으로 자신들에게 충분하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사람의 권세를 보고 놀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의 편이 되시어 너희의 나라를 유지하시는 한, 결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그들의 안전에 무슨 가망성이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홍해에 이르렀을 때, 그들이 온전히 파멸당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한편에는 바다가 있었고, 다른 편에는 바로가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으니, 그들이 그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14:10).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이 큰 무리의 백성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습니까? 그들이 무기 다루는 일에 익숙했습니까? 확실히 아닙니다. 그들은 이리 떼가 바로 가까이에 와 있는 양 떼와 같았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위해 일하셨는지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그들이 이전에 느끼고 알았던 일들을 그들에게 상기시킵니다. 마치 그가 말하기를, “너희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그분을 의지한다면, 결코 실망하게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자신의 행하심을 통해 이미 너희에게 충분히 보여주셨도다. 그리고 그분의 권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도다. 그렇다면 너희가 그분의 보호하심 아래 있는 것만으로 너희에게 충분하다는 것을 아는 만큼, 그것에 계속 머물러 있으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이주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의 상태를 어떤 방식으로 유지하실지에 대한 선례를 그들에게 주셨음을 상기시키는 일이었으니, 곧 사람의 능력이 미치는 범위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그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동일한 규칙을 가져야 함을 주목합시다. 왜냐하면 (내가 선지자들의 글에서 이미 인용한 바와 같이) 신실한 자들의 안녕은 말이나 병거의 많음이나 갑옷의 힘이나 군사들에게 있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도우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 있는 우리의 상태에 가장 독특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이 그러한 종류의 말씀들을 사용할 때 말하고 있는 대상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벧전 1:10,12). 사정이 그러하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 행하셨던 그 기이한 일들이, 그분께서 우리를 유지하실 것이라는 확실한 보증이 우리에게 됨을 확신합시다. 그리하여 비록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해 보이고, 비록 우리가 우리의 원수들의 권세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연약함을 바라볼 때 낙담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과 이해를 초월하여 일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마음에 간직해야 할 내용입니다.

다시금 우리는 이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전에 우리에게 주셨던 모든 경험이 우리의 구원을 더욱 잘 확신하게 해 주어야 하며, 그분께서 이전에 우리를 구원해 주셨던 일을 기억하여 그분을 더욱 신뢰하게 만들어야 함을 주목합시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그분께서는 우리가 결코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방편들을 충분히 찾아내실 수 있으며, 나아가 그분의 선하심은 줄어들지 않고 그분은 언제나 한결같이 강하시다는 것을 거둡시다. 우리가 그분께 의지하기만 한다면, 그분께서 우리를 능히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립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전에 우리에게 베푸셨던 은혜로운 선하심과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구원을 잘 돌이켜봅시다. 그리고 그것들을 고려할 때, 그분께서 이전에 우리의 보존자가 되어 주셨음을 나타내신 것에 대해 그분께 감사드리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후로도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께 담대히 의지할 명분과 계기를 삼읍시다. 그리하여 그분께서 우리의 구원을 온전한 완성에 이르게 하실 때까지 자신이 시작하신 대로 지속하실 것임을 의심하지 맙시다.

이제 만약 이것이 우리의 육체적인 원수들에 관하여 하신 말씀이라면, 우리는 동일한 말씀을 사탄과 죄, 그리고 우리의 영혼의 끝없는 구원을 대적하여 싸우는 다른 모든 것들에 적용할 훨씬 더 큰 이유를 가집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사안에 대해 더 길게 해설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는 우리가 이 교훈을 활용하여 유익을 얻는 것으로 충분히 삼읍시다. 그것은 곧 만약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의지한다면, 그분께서 우리를 보존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그리하여 비록 우리가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고,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처럼 보이며, 사람들이 우리보다 우세한 것처럼 보일지라도그래요, 오직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만을 갈망하는 불신자들이 그럴지라도바로 그때조차 우리는 담대하고 안전하게 우리의 길을 계속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어떠한지, 혹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연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이 우리와 가까이 계실 것이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 것이며, 우리를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사 우리의 원수들을 향해 자신의 진노를 발하시고, 마치 그들의 처사가 자신과 직접 연관된 것처럼 그들을 향해 분노를 불태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치 그 모욕이 자신에게 가해지고 그 도전이 자신의 인격을 향해 이루어진 것처럼, 그 시비를 친히 떠맡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하거니와) 우리가 그분의 손으로부터 이와 같은 약속을 받았음을 보건대, 우리는 그것을 담대히 신뢰하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허락해 주시며, 우리 가운데 선한 화합을 유지해 주시기를 간구하면서, 두려움과 경외함 속에서 계속 걸어갑시다. 그리고 비록 악인들에게 굴레를 풀어 주사 그들이 우리를 대적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하게 하시는 것이 그분의 뜻일지라도, 우리는 그분께 의지하기를 그치지 맙시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그분의 손에 맡기기만 한다면, 그분께서 친히 선하시고 신실한 파수꾼이 되어 주실 것임을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악한 감정들이 우리 안에 있음을 우리가 한 번 깨달았을 때,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단지 그것들을 싫어하고 정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도리어 그것들의 치료제를 구하게 하사, 우리의 온전한 갈망이 모든 사람에게 사랑스럽고 온유하게 나타나는 것이 되게 하시며,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평화를 구하고 그것을 도모하여 그 어떤 사람도 우리에게 해를 가할 어떠한 계기도 가지지 못하도록 모든 원인을 제거하도록, 그분의 친히 가지신 형상을 따라 우리를 개혁해 주시기를 간구하면서,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의 위엄 앞에 우리의 허물들을 인정하며 무릎을 꿇읍시다. 그리고 나아가, 그분께서 우리를 자신의 보호하심 아래 이토록 받아주사 우리가 우리의 행실 속에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라며, 그분께서 이 육체적이고 일시적인 삶에서조차 우리의 방어자가 되심을 미리 나타내 보이시는 것을 보건대, 그분께서 사탄과 온갖 종류의 죄에 대항하여 우리를 지키시려고 우리를 감찰하고 계심을 우리가 의심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가 그분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으로 더욱더 굳건해지게 해 주시기를 구합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 안에서 살지 않고 그분을 위해 살게 하려 함이니, 그분께서 친히 우리의 삶을 돌보아 주시기를 허락하시는 것을 보건대 우리의 삶이 그분께 봉헌되는 것이 마땅한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이 은혜를 우리뿐만 아니라 땅 위의 모든 백성과 나라들에게도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