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칼빈 신명기 설교

신 20:2-9

작성자doulosdei|작성시간26.06.16|조회수29 목록 댓글 0

117회 설교: 20장 두 번째 설교

15561218일 수요일

 

20:2-9 “너희가 싸울 곳에 가까이 가면 제사장은 백성에게 나아가서 고하여 그들에게...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적군과 싸우시고 구원하실 것이라 할 것이며 책임자들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새 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행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낙성식을 행할까 하노라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 과실을 먹을까 하노라 여자와 약혼하고 그와 결혼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를 데려갈까 하노라 하고 책임자들은 또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그의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낙심될까 하노라 하고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친 후에 군대의 지휘관들을 세워 무리를 거느리게 할지니라

 

 

 

 

우리는 어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이 위험에 처했을 때 그들에게 하도록 명령하신 권면이 무엇인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불신앙이 우리 안에 내린 깊은 뿌리로 인해 우리 안에서 고쳐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하여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훨씬 더 격렬한 방식의 말씀이 사용되기를 원하셨다고 여러분에게 간략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고, 확신에 찬 믿음으로 그분께 부르짖는 능력을 가로막는 그 두려움 가득함을 한 번 이겨내고 나면, 우리가 매우 큰 유익을 얻은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이것을 우리의 영적인 전투들에 적용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만약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멸하고자 구하는 원수들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해야 마땅하며, 그분께서 우리를 자신의 보호하심 아래 받아주셨음을 보건대, 우리의 필요할 때에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실 것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설득이 아무것도 아닌 이 현재의 삶의 위험들 속에서도 효력을 발휘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훨씬 더 귀중한 우리의 영혼의 구원에 관한 사안들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분께서 그러한 측면에서 우리를 저버리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백성의 필요할 때에 그들을 도우시려고 그들과 함께 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이 약속을, 우리의 영혼이 우리 하나님에 의해 통치를 받을 수 있도록 이와 같이 적용합시다. 그리고 만약 마귀가 우리를 거칠게 공격하여, 우리가 몸 둘 바를 알지 못할 만큼 이토록 큰 당황함 속에 빠짐으로써, 우리가 보기에 우리가 온전히 가라앉은 것처럼 보일지라도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으셨고, 여전히 우리와 함께 가신다는 것을, 즉 그분께서 아주 가까이 계시며, 그분의 은총과 권능이 여전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을 계속해서 소망합시다. 그리고 이것은 너무나도 필연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탄을 대적하여, 그리고 그가 우리를 대적하여 행하는 그 모든 공격들을 대적하여 서기에 얼마나 연약한지를 우리가 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너무나 둔감한 것이니,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우리 하나님께 피하여 달아나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구원을 의지하는 것 외에 다른 치료제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사탄과 그의 영적인 전투를 대적하여 버티기 위해, 우리 자신 안에서 우리의 도움을 구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잃어버릴 것이요, (마땅한 이치이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만함을 비웃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하나님 안에서 구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전혀 없으며,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데서 그분의 손으로부터 힘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를 한 번 강건하게 하셨을 때, 우리의 구원을 의심하지 말고, 도리어 그 동일한 구원을 우리의 온 삶에, 정말로, 우리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확장합시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께서 현재의 때에 나를 도우실 것이라고 소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며, 나는 오늘뿐만 아니라 이후로 영원토록 철저히 설득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로하시며 그들이 놀라거나, 낙담하거나, 무서워하거나, 깜짝 놀라서는 안 된다고 금지하시는 이 본문에서 우리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분께서 이토록 많은 단어들을 사용하시는 것은, 비록 우리에게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겁먹거나, 낙담할 이유가 아무리 많을지라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임을 철저히 확정하기 위해 우리가 그 약속들로 방패를, 정말로, 방벽을 만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약속들이 언제나 우리의 마음에 떠올라야 마땅함을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에 의해 구원을 받을 것이요, 마침내 승리를 확신하게 될 것이며, 우리가 아무리 큰 극단적인 상황 속에 빠져 있을지라도, 그분의 막강하고 무수한 손에 의해 회복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교훈을 제사장의 입을 통해 선포하게 하신 것이 결코 원인 없는 일이 아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율법이 기록되고 선포된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각 사람이 자기 혼자서 이 교훈을 마음에 새겼어야 마땅하다고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권위로 말하도록 제사장이 그곳에 몸소 임재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백한 뜻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는 것이 그 말씀을 가져오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고후 4:7).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 말씀은 우리 가운데서 매우 작은 권위만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설교자들에 관해 말하자면, 그들이 그저 부서지기 쉬운 흙그릇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요약하자면, 만약 우리가 오직 그들의 사람됨만을 바라본다면, 그들이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그들의 직무나 위임을 알게 되면, 그때 우리는 피조물을 골똘히 바라보지 말고, 그 목적으로 선택되고 뽑힌 사람들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의 말씀이 전파되도록 명령하신 하나님 자신을 바라보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의 말을 들을 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더 잘 갖출 수 있도록 우리를 깨우는 방편이 되니, 말하는 자가 스스로 찾아온 것도 아니요, 자신의 머리로 스스로 밀고 들어온 것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러한 질서를 정하셨으며, 자신의 교회 안에서 그것이 지켜지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 확신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의 영혼의 건강을 위한 내용을 우리에게 전파한다면, 비록 말하는 그 당사자가 어린 아기일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아는 그 내용들을 온전한 경외함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합니다. 진리는 결코 잘못 대접받아서는 안 되며, 우리는 말하는 당사자를 핑계로 삼아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누구이든 간에 와서 우리에게 진리를 가져다주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를 멸시한다면, 그것은 그의 주인을 모욕하는 것이요, 그분으로부터 가져온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분께 부당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의 구원의 교훈 안에서 세워지는 데 너무나도 차갑고 더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인격을 대리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도록 임명된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이 도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선택된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가 말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우시고 우리에게 일종의 준비를 주사 우리에게 들려오는 내용에 더 귀를 잘 기울이게 하심을 우리가 압시다.

우리는 한 가지 더 구체적인 본보기를 들 것입니다. 어떤 가련한 사람이 자기 안에서 발견하는 죄들로 인해 자신이 마치 버림받은 존재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며 마음의 고통 속에 있을 때, 그리하여 양심의 가책을 통해 자신을 괴롭히는 불안으로 인해 낙담하고 몸 둘 바를 알지 못할 때, 만약 한 신실한 사람이 그에게 나아와 하나님의 자비를 그 앞에 제시하며, 거룩한 성경 속에서 불쌍한 죄인들이 자비로 부름을 받고 있으며, 사람들이 믿음 안에서 그리고 회개함으로 그분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들을 거부하지 않으신다고 그에게 말해 준다면, 그것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미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볼 명분을 가지게 되며,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아아, 내가 마치 지옥에 있었던 것과 같았으나,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내게 주신 내용들을 가져다주는 이 사람을 내게 보내심으로써 나를 여기로 찾으러 오셨도다.’ 이와 같이 가련한 죄인은 기뻐할 명분을 얻고, 이전에 자신을 압도했던 슬픔으로부터 놓여나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그 교훈이 목자이자 공적인 책임을 맡은 자에 의해 선포된다면, 그 안에서 우리는 훨씬 더 좋은 보증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죄들의 용서를 전파하도록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그리스도의 교회의 상태에 관해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그 모든 자들의 직무는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우고, 병든 자들을 고치며, 마음의 고통 속에 있는 자들의 슬픔을 달래고, 감옥에 갇힌 자들을 풀어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고후 5:19; 61:1,2).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친히 가지신 아들의 입을 통해 훨씬 더 분명하게 선언되었으니,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가라, 너희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다라고 하십니다(18:18). 그분은 누구에게 말씀하십니까? 자신의 사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구원의 약속들을 전파할 것을 전제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 본문 아래에 숨어서 거룩한 성경을 악하게 더럽히는 교황이 우리에게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여기에서 어떤 독재 체제를 세우려 하셨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마귀 같은 파렴치함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복음의 전갈에 확실하게 권위를 부여하실 것이니, 특별히 그것이 자신의 목자들과 자신이 그와 같은 상태로 부르신 자들의 입을 통해 가져와 질 때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들의 용서를 전파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한 사람을 볼 때, 그것은 마치 공적이고 서약한 공증인에 의해 거래가 통과된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 본문에서 제사장에게 군대 안으로 들어와 그 말씀들을 하도록 명시적으로 명령하신 까닭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 말씀들이 더 큰 경외함으로 받아들여지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의 권능 안에서 우리를 굳건하게 하고, 그분께서 결코 우리를 저버리실 수 없다는 그분의 구원에 대한 온전한 확신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 우리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압시다. 그리고 우리는 집에서 자기 혼자 말씀을 읽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백성에게 선포되기를 원하시는 공적인 교훈으로부터 쉽게 취해 자신을 떼어놓는 저 공상적인 사람들과 같이 되지 맙시다. 도리어 우리는 그것이 결코 불필요한 질서가 아님을 우리 자신에게 확신합시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백성들이 이 현재의 삶의 위험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려고 제사장에게 입을 열어 백성들에게 말하도록 원하셨음을 보건대, 우리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도우실 준비가 되어 계시다는 것과, 우리의 영혼에 관하여 우리가 그분의 강한 손에 의해 구원을 받을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의지해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침 받아야 할 이유는 훨씬 더 큽니다. (내가 말하거니와) 우리는 이러한 내용들이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자신의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책임을 맡기신 자들의 입을 통해 선언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믿음이 배나 자라나야 하며, 우리는 마치 비록 우리에게 그 말씀들을 전하는 자가 어린 아기일지라도 참으로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로다라고 말하듯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정신을 더 잘 가다듬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목자라는 이름과 직함을 가진 자들의 인격을 이와 같이 제한하시고, 그들이 자신의 사자들과 같이 되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미련함을 감찰하시고 그것을 용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더욱더 받아들이고, 그것에 더 귀를 잘 기울이며, 그것에 더 감동을 받읍시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더욱 생생하게 제안하고 계심을 알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그 어떤 핑계도 대지 맙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 목적으로 사람이 선택되도록 허락하심으로써 자신을 더욱 명백하게 나타내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우리가 이미 앞서 18장에서 보았던 바와 같이 그분의 말씀들을 마치 하나님께서 친히 보실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받아들립시다(18:7). 이와 같이 여러분은 이 말씀에 관하여 우리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이제 모세가 덧붙이는 내용으로 나아갑시다. 그는 그들이 전투에 나가기 전에, 백성의 관원들이 새 집을 건축하고, 아직 거기에 거주하지 못한 자들과, 포도원을 가꾸고 아직 그 열매를 거두지 못한 자들과, 여자와 약혼하고 아직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결혼하지 못한 자들에게 떠날 허락을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떠날 허락을 주시며, 대적을 대항하여 전쟁에 나가도록 강제하지 않으시려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말미에 그가 말하기를, “만약 두려워하거나 낙담한 자들이 있다면, 그들 또한 자기 집으로 다시 돌려보내야 한다고 하니, 이는 다른 부류들과 같은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당하여 쫓겨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이유를 기록해 두었으니, 그들이 그 형제들의 마음을 낙심하게 하여 자신들과 같이 만들지 않게 하려함입니다. 이 일이 행해지고 나면, 그들 위에 지휘관들을 세우는 것이 그분의 뜻입니다. 이는 그들이 지휘관들을 임명하기 위해 대적에게 휴전이나 유예를 요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전쟁을 치러야 할 때 가장 중요한 요점은 큰 경험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두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먼저 의지하는 것이며, 그러고 나서 그분께서 허락하신 질서에 따라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행해지고 나서야 기술을 가진 지휘관들과 관리들이 선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세상의 원조로 자신들을 강건하게 하려고 생각하면서, 그동안에 하나님을 잊어버려 그분께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용이며 그들은 자신들이 속았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실상 모세가 뜻한 바였습니다.

이제 그가 새로 여자를 얻고, 아직 결혼하지 못한 자들과, 포도원을 가꾸고 아직 그 열매를 거두지 못한 자들과, 집을 건축하고 아직 거기에 거주하지 못한 자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에 관하여 말하자면, 이것은 고려의 대상이 되는 자들이 지나치게 강제당하지 않도록, 일종의 정직하고 공정한 처사가 사용되어야 함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 부류를 통해, 비록 큰 필요가 있을지라도,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자들은 아껴두어야 마땅함을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외에도 전쟁에 나갈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많이 있을 때, 사람이 자기 자신의 집에 거주하는 유익을 얻고, 자기 포도원의 열매를 거두기도 전에 그를 죽음으로 끌고 가는 것은 일종의 잔인함이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그것들은 참으로 본성적인 슬픔들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러한 사람들을 전쟁에서 면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내가 말한 바와 같이) 핵심적으로 이 요점으로 돌아와야 하니, 곧 비록 필요가 우리를 죄어오고 우리를 강제할지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어떤 특권과 자유를 얻기에 합당한 자들을 용납함에 있어서 우리는 일종의 온유함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가 집의 봉헌에 관해 말하는 것에 대하여, 비록 그것이 거기에 거주하는 것을 의미할지라도, 유대인들에게는 일종의 집의 봉헌을 하기 전에는,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집을 축복하는 일종의 의식을 행하기 전에는 자기 집 안에 정착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 의식은 율법 아래에서 준수되었으나, 다만 오늘날에는 우리 가운데 더 이상 사용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의 교훈은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으니, 곧 우리가 감사함 없이, 그리고 모든 것이 우리에게 순전하고 깨끗하게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함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양식과 우리의 먹고 마시는 것이 거룩하여진다고 말합니다(딤후 4:5). 그리고 어떻게 그리됩니까? 기도와 말씀에 의해서입니다.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떡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르시는 효능을 부여하신 피조물이지만, 만약 우리가 그것에 의해 우리를 먹이시고 지탱하시는 분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것을 먹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계유지를 위해 창조하신 것을 우리가 더럽힘으로써 왜곡할 때,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배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음식이 우리에게 깨끗하게 될 다른 방편은 전혀 없으니, 곧 하나님을 그것들의 부여자로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그분께 감사를 돌려 드리며, 그분께서 베푸시는 유익들을 우리가 합당하게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서 인도해 주시기를 그분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악인들과 신실하지 못한 자들이 이 세상에서 우리만큼 잘 먹고, 우리가 가진 것과 동일한 태양이 그들 위에 비추며, 우리가 먹는 것과 동일한 떡을 먹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모든 자들, 모든 불신자들, 하나님께 기도하지도 않고, 그분께 마음을 들어 올리지도 않은 채 돼지나 나귀처럼 자기 음식에 달려드는 모든 탐욕스러운 자들은 다 도둑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회계를 보고해야만 할 떡을 단 한 조각도 먹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의 보편적인 후사로 임명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1:2).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가 되어야만 하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그 어떤 유익들에도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의 몸에 접붙여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그것들에 대해 감사를 돌려 드리고, 우리가 자신의 아버지의 손에서와 같이 그분의 손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위한 생계유지를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서 통치해 주시기를 그분께 기도하지 않는 한, 우리의 모든 음식이 부정하며, 우리 편에서 그것들을 더럽히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의복과 다른 모든 것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용을 위해 그것들을 확실히 축복해 주셔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복과 생계유지, 그리고 거처가 바로 그러한 조건에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어떤 집안에 거주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봉헌함에 있어서 율법의 옛 모형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 거주할 당사자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로 하여금 여기 아래에 거주할 어떤 공간을 가지게 하시려고 물들을 스스로 물러가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땅 위에 머물게 하신 것처럼, 자신을 거기에 묵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여전히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각자는 스스로 이렇게 생각합시다. ‘비록 내가 작은 오막살이 하나만을 가졌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서 나를 여기에 두셨음을 인정하는 것이 내게 마땅하도다. 그리고 내 집이 내 스스로 매입한 것이든, 혹은 내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이든, 임차한 것이든, 그 외에 그 어떤 권원에 의한 것이든 간에, 나는 언제나 내 하나님 주님의 세입자로다.’ 우리가 그것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시다. 왜냐하면 그것이 물건들을 올바르게 성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우리의 집에 들어갈 때 그것들을 더럽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으며, 우리에게 이 삶의 편의들을 주신 분이 바로 그분이심을 인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와 함께 거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은 율법의 이 의식이 어떠한 목적을 지향했는지,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거두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이제 반대편에 대해서는, “포도나무의 열매를 거둘 때, 그 포도원이 속되게 되거나 공통의 것으로 만들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네 번째 해가 되기 전까지는 자신들의 포도나무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10:23-25). 그 첫 수확물은 공통의 것이 되어야 마땅했고, 그러고 나서야 그 주인은 이후로 그것의 유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포도원이 공통의 것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관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건져내신 그 시간 이후로, 우리는 율법의 멍에에 매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정이 어찌 되었든 간에, 비록 그 속박은 지나갔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에 의해 주어지는 교훈은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곧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유익들을 헤아려보고, 그것들의 일부를 궁핍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유한 자는 자신이 궁핍을 겪는 자들에게 빚진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그가 세금이 매겨지거나 부과를 당하여, 말하자면 너는 네 재산 중 이만큼을 바쳐야 하느니라하는 식은 아닐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재산들을 우리의 손에 맡기시되, 자신의 수납원과 같이 되라는 조건으로 그리하셨다는 것과, 우리가 그분의 선하심을 통해 소유하는 재산들을 누리는 것은 우리가 궁핍함을 겪는 자들을 구원할 의무가 있는 그러한 방식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에게 충분해야 마땅합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은 옛 모형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유익함을 보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그것들을 준수할 의무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들의 진리가 우리에게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이 현재의 삶의 모든 편의 속에서,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음을 보게 되니, 이는 그분께서 우리를 부성적으로 돌보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우리의 이웃들을 고려해야 하며, 우리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교통 혹은 사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는 그 어떤 시민적 질서도 없어야 한다거나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의 소유를 지킬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궁핍한 자들이 우리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을 아낌없이 베풀기 위해 스스로 힘써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은 앞서 언급된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면제에 관하여 우리가 실상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이제 모세가 덧붙이는 내용으로 나아갑시다. 그는 만약 두려워하고 낙담한 자들이 있다면, 그들 역시 그 형제들을 낙심하게 만들지 않도록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치러야 할 전쟁이 자신의 이름으로 치러지기를 원하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기꺼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아갈 군사들을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온갖 두려움 가득함을 이겨내고, 죽이는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런 감정도 없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고, 그분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심을 의심하지 않으며 그분께 부르짖을지라도, 우리가 연약함의 징표를 전혀 나타내지 않을 정도로 무감각하지는 않으나, 우리는 언제나 그것을 이겨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두려움 가득함에 압도당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표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는 영광을 돌려 드리지 않는데, 그분께서 어떻게 우리를 도우시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그분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대담하지 못하다면, 우리가 승리를 얻지 못하는 것에 대해 우리 자신 외에 누구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제 만약 우리가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분께서 우리로부터 자신을 거두시고 우리를 내버려 두시는 것이 마땅한 이치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은 이 본문에서 왜 관원들에게 낙담하고 겁 많은 군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명시적인 명령이 주어졌는지를 보게 됩니다. 나는 이미 여러분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날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야망이나 탐욕으로 전쟁을 기획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세상에서 통치하려는 열렬한 갈망으로 인해 전쟁을 일으키고 사람의 피를 흘림에 있어서 탐욕스러운 심연이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치른 전쟁은 필요에 의한 것이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행하는 그들을 인정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정이 그러했기 때문에, 그분은 군사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이로써 그분의 도우심을 확신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연약한 자들은 하나님의 군대 안에 있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혼란만을 야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여기에서 그 첫째를 그들이 그 형제들을 낙심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더하여, 그들 앞에 펼쳐진 하나님의 깃발이나 군기를 바라보아야 마당한 자들 사이에 그러한 자들이 섞여 있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키우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그들이 그 형제들의 마음을 낙심하게 할 수 있으며, 자신들의 마음이 낙담한 것처럼, 나머지 백성들 또한 두려워하고 놀라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이 이유는 깊이 헤아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말한 바와 같이) 이 이유는 잘 주목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일 속에서 그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어떤 일을 바라봅시다. 만약 단 한 명의 빈둥거리는 게으름뱅이가 있다면, 그는 무리의 나머지 모든 사람에게 낙심거리가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서로에게 용기를 주는 법인데, 사람들이 자기 일에 활기차게 나아갈 때에는 그 어떤 노동이나 직업도 아무리 힘들지라도 완수되기 마련이며, 그들이 선한 뜻으로 자신들의 노력을 다할 때에는 그 고통이 절반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한 사람이 빈둥거리기 시작하면, 그는 무리의 나머지 모든 사람을 시들해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이 악의 전부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게으른 자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스스로 힘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릴 어떤 구실을 찾아내어 투덜거리고 불평하기 시작할 것이므로, 한 사람은 자기 동료들을 다 망치기에 충분한 저 게으른 멍청이들 두 다스를 두는 것보다 차라리 고통을 감내할 마음이 잘 준비된 활기찬 사람 두세 명을 두는 것이 사람에게 훨씬 낫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명백히 보입니다.

만약 어떤 혼란이 있다면, 흔히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만약 어떤 무질서한 사람이 사람들의 무리 속에 자신을 밀어 넣는다면, 그는 쉽게 꺼지지 않을 그러한 불을 붙이는 화촉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신의 독보리를 뿌리기 시작하면, 그것이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너무나 멀리 퍼져나가 마침내 그 혼란과 불안이 다시 가라앉을 수 없을 만큼 커지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온 삶 전반에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공적인 직무에 이르게 될 때, 백성을 다스릴 마음이 어느 정도 잘 준비된 백이십 명의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만약 뒤로 물러서는 자가 단 두세 명만 있다면, 그 소수의 사람들이 나머지 모든 사람이 선을 행하는 것보다 백 배는 더 큰 해악을 끼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차를 끌 때, 만약 저 못된 짐승이 그들 사이에 있지 않았더라면, 짐을 싣고 원활하게 나아갔을 서너 마리의 좋은 말들을 단 한 마리의 고집 센 고리타분한 말이 어떻게 방해하는지를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회의에서나 큰 무리 가운데서 모든 좋은 질서를 무너뜨리려고 돌아다니는 악한 마음을 품은 자가 단 한두 명만 있을지라도, 여러분은 사안들이 얼마나 까다롭게 틀어져 버리는지를 보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더 큰 부분이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사람이 그 반대로 계산하려 할지라도, 그 두세 명은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들을 자신의 군대에서 온전히 끊어버리기를 원하신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며, 만약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 가운데 권세를 잡으시고 자신들에게 승리를 주심으로써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시기를 의도했다면, 그들이 전쟁에 나갈 때 자신들의 불신앙과 사악한 행실로 나머지를 망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저 무리를 모두 떨쳐버려야 했습니다. 우리는 기드온이 어떻게 일했는지를 보게 됩니다(7:3,5,6) 그리고 그의 본보기는 다른 모든 것들보다 주목할 만하니, 왜냐하면 그때 하나님께서 가장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그리고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 더 기억될 가치가 있는 기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이사야 선지자가 구속자의 손에 의해 하나님께서 행하실 구원에 관해 말하면서(9:4), 그것이 미디안의 날과 같을 것이라고, 즉 기드온의 손에 의해 미디안 사람들을 대적하여 주어졌던 승리와 같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원인 없는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가 큰 무리의 사람들을 모았을 때, 결국 그들 중 대부분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권능에 더 큰 영광을 돌리고자 하사 오직 작은 수의 사람들만을 가지고 그 일을 행하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드온이 그 목적을 위해 남겨둔 자들은 누구였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알아볼 수 있는 징표를 그에게 주셨으니, 곧 그들이 물을 마시러 왔을 때 물을 핥아 마시거나 마시기 위해 무릎을 꿇는 자들은 다 돌려보내고, 멈추지 않고 지나가면서 마시려고 손으로 물을 움켜쥔 자들은 원수를 대적하여 계속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표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목적으로 그리하셨습니까? 그들로 하여금, 그분은 대적을 대적하여 전쟁에 나가고자 하는 마음이 철저히 준비되고, 선한 뜻을 가진 자들 외에는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의 군대에 두려 하지 않으심을 이해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신다는 확실한 신뢰 외에는 나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삼백 명의 사람들이 거대한 군대를 대적하여 싸울 수 있었겠습니까? 특별히 항아리와 횃불과 등불을 가지고마치 어린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완두콩이 가득 찬 방광을 들고 있는 것처럼자신들의 원수를 깜짝 놀라게 하려 했으니 말입니다. 만약 그들 모두가 자신들의 마음속에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확실하게 설득되지 않았었더라면, 그들이 결코 그러한 방식으로 일하러 나아갔겠습니까? “우리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뜻에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면, 그분께서 우리의 필요할 때에 우리를 도우실 수 없으시겠으며, 미디안의 무수한 무리가 우리를 대적하여 설 때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실 수 없으시겠는가 함이라.” 그러니 이제 우리 주님의 의도가 이로써 전쟁에 나가는 모든 자들이 마치 그분의 깃발 아래에서 행군하듯 해야 하며 그분 안에서 자신들의 신뢰를 두어야 한다는 것과, 그분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담대함이 자신들의 믿음의 증거가 되어야 함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음을 우리가 주목합시다.

이제 이것을 우리 자신의 삶에 적용해 봅시다. 참으로 이 교훈은 오늘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군주들에 의해 실행에 옮겨져야 마땅합니다. 그들이 전쟁에 나갈 때, 그들은 먼저 어떤 이유가 자신들을 그리로 움직이는지, 즉 자신들의 전쟁이 정당한지 아닌지를 고려해야 하며,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서 여기에서 그들에게 보여주시는 질서를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들은 헛된 자만에 눈이 멀어 그 이상의 것은 전혀 구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그들이 전쟁에 나갈 때, 자신들의 우상들을 향해 행렬을 지어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온전한 조롱에 불과하니,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신성(神性)을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만큼이나, 그들이 헌신적으로 행하는 저 미신들에 관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듯이 그들은 자신들의 탐욕스러운 갈망에 눈이 멀어 있으며, 그들의 모든 신뢰는 오직 자신들의 힘과 장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만큼의 보병과 이만큼의 기병, 이만큼의 대포, 이러저러한 정보, 이러저러한 동맹, 그리고 이러저러한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전쟁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른 출발점,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함 가운데 걸어가고, 그 요점 위에 머물며, 모든 권능을 친히 가지신 분께 자신들을 의탁하는 데서 시작해야 마땅합니다. 그리하여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 중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더욱 일반적인 교훈이 주어지니, 이는 우리가 모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들이요, 우리의 상태는 단지 하루만이 아니라, 우리의 온 평생 동안 싸워야만 하는 상태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싸우지 않고서는 우리의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사정이 그러하니, 이 교훈을 우리의 가르침을 위해 적용합시다. 어떻게 그리하겠습니까? 시편 110편에서 그 해설을 취해봅시다(110:3). 거기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세우신 왕(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집하시는 군대 계수의 날에 백성들이 즐거이 헌신하며,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나아올 것이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부여하는 표식, 곧 그들이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임을 알 수 있고, 그분의 군대와 무리에 속해 있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표식은, 그들이 억지로나 노예처럼 강제되어 나아오는 백성이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그분께 바치고 봉헌하는 자들로서 순전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자신을 드리고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교훈을 진정으로 실천하는 것이니,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모든 개인의 측면에서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이 교훈은 전쟁의 필요성 속에서 신실한 자들 사이를 지배해야 마땅합니다. 그것 없이는, 만약 그들이 순전한 양심을 가지고 나아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기 방어를 위해 단 한 번 칼을 빼 드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들의 목이 백 번 베임을 당하는 것이 그들에게 더 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허락하시고 용납하시니, 우리가 그분의 인도하심 아래에서 싸우는 만큼 그분께서 확실히 우리의 편이 되시리라.” 만약 사람이 이것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분의 허락이나 허가도 없이 마치 하나님을 모욕하듯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손가락 하나를 까딱하는 것보다, 차라리 백만 번 멸망하는 것이 그에게 훨씬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의 필요성 속에서, 신실한 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들을 강건하게 하고, 의심이나 두려움 없이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이 교훈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탄이 결코 쉬지 않고 죄가 우리를 대적하여, 정말로, 심지어 우리 안에서 싸우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온 평생 동안 지속적인 전투를 치르고 있습니다(벧전 5:8; 8:7).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과 마주치기 위해 멀리 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본성 속에 품고 있는 생각들과 감정들이 얼마나 많은지 보십시오. 그것들은 다 우리 영혼의 파멸을 도모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싸울 준비를 갖추는 것이 우리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확실히 걸음마다 패배를 당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연약함이 얼마나 큽니까? 우리는 필연적으로 정신을 잃거나 차라리 온전히 둔감해져야 하니, 왜냐하면 우리는 그 어떤 저항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하여 우리의 원수는 세상의 임금이며(6:12; 7:14), 죄는 우리를 마치 자신의 결박과 줄로 붙잡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시지 않는 한 우리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도우심을 확신함 속에서 굳건해지고 용맹하게 싸우도록 하기 위함임을 배웁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습니까? 그분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임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순전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의지해야 하며, 안락하게 지내면서 그분을 우리에게서 멀리 두어 그분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지 않으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 되지 않으시는 것보다, 차라리 무수한 위험에 둘러싸이고 혹독한 공격을 견뎌내는 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육신에게는 그것이 거칠고 고통스러운 상태일지라도, 우리는 이 조건, 곧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서 싸우고, 집에서 게으르게 앉아 그분을 섬기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그분의 군대 소집의 날에 나타나는 쪽을 선택합시다.

이제 이 군대 계수의 날은 우리의 온 평생의 시간이며, 정말로, 또한 우리의 죽음의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양한 유혹에 의해 훈련을 받을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자신의 군대를 소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이 낙원의 천사들에게 보이도록 마치 무대 위에 세워진 것 같다고 말한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닙니다(고전 4:9). 그는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내용이 우리 각자에게도 관련되어 있으니, 곧 하나님께서 천상의 천사들 앞에서 우리의 소집 절차를 밟으시듯, 우리를 여기에 두기를 원하신다는 점이며, 이는 그분께서 우리를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토록 면밀히 살피시는 목적이 우리가 서로에게 선한 본보기를 보이게 하려 하심임을 우리로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정이 그러함을 보건대, 우리가 다윗이 앞서 인용한 본문에서 말하는 저 무리의 수와 결코 다르지 않다고 인정받을 수 있도록, 그러한 순종함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배웁시다. 즉 억지로나 강제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신들의 왕에게 자신을 드리는 자들과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이제 교회의 상태가 전투임을 보건대,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담대한 용기를 가진 자들을 모으는 것이 우리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이며, 만약 우리가 그 어떤 연약한 자들을 본다면, 우리가 그들과 연합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함을 압니다. 왜냐하면 다른 곳으로부터 그 어떤 것을 더 가져오지 않을지라도, 우리 각자 안에는 이미 연약함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다른 그 어떤 사람도 나를 사악함으로 유혹하지 않거나, 나를 선함에 있어서 차갑게 만들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데우시고 강건하게 하시기 전까지는 나 스스로도 충분히 게으르고 차갑습니다. 그러니 사정이 이러할 때, 내가 내 동료에 의해 악한 일에 부추김을 받고 그에 의해 더욱 연약해진다면, 그것이 어찌 된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함을 보건대, 우리를 낙심하게 만들 수 있는 자들과 관여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사활이 걸린 문제인지를 여러분은 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욕에 충분히 지배받기 쉽고, 모든 헛됨과 즐거움에 충분히 앞장서며, 하나님의 섬김으로부터 달아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하거니와) 우리 모두는 더 이상의 추가적인 자극이 없어도, 우리 자신 안에서 이미 악으로 너무나 많이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나 자신을 술 취하는 자들과 탐식하는 자들, 음행하는 자들과 저주하는 자들과 연합시킨다면, 내게 무엇이 남겠습니까? 내가 내 안에 이미 부덕과 죄의 씨앗을 가졌음을 보건대, 내가 악의 계기들을 구한다면, 그것이 도리어 그것을 증가시키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요, 나 자신을 내던져 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보시기에 우리는 일상적으로 그렇게 행하니,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해할 계기들을 스스로 구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며,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를 악한 무리로부터 건져내려 돌아다닌다면, 우리는 마치 그가 우리에게 큰 부당함을 행한 것처럼 그를 향해 이를 갑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스스로 이렇게 생각함으로써 이 교훈을 실천에 옮겨야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자신의 진영에 속하는 은혜를 허락하셨고, 나로 하여금 죄를 대적하고, 세상을 대적하며, 나의 모든 정욕을 대적하고, 정말로, 심지어 사탄 자신을 대적하여 싸우기를 원하시는도다. 참으로 그것은 매우 거친 맞대결이니, 내가 어느 하루 승리를 얻었을지라도, 나는 그다음 날 다시 새로운 전투들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도다. 그러므로 만약 내가 용맹한 용사처럼 행동할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내게 무엇이 남겠는가? 내가 내 안에서 생각하기에도 안타까울 만큼 수많은 방해물들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또한 미리 온전히 낙담해 있음을 보건대, 만약 나의 하나님께서 나를 강건하게 하지 않으신다면, 내게 무엇이 남겠는가? 그러나 그분께서 내게 그리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분께 부르짖으리로다. 다시금, 내가 나를 가로막거나 나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수많은 걸림돌들과 방해물들을 볼 때,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도움을 바라볼 것이요, 그것은 나로 하여금 모든 고난을 이겨내게 하기에 충분하리로다. 특별히 내가 그분의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다면, 그것은 나를 낙심하게 만들 수 있는 모든 두려움과 모든 불신앙을 물리치기에 충분하리로다.’

만약 우리가 지혜롭고 신중했었더라면, 우리는 우리가 늘 해왔던 것보다 이러한 내용들을 더 잘 생각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우리보다 앞서 행군하며 우리에게 선한 본보기를 보여주는 자들, 그리고 이전에 하나님의 섬김 안에서 단련된 자들을 따랐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자들과 동행했을 것이요, 그러한 자들과 친밀함을 가졌을 것이니, 이는 우리에게 그토록 큰 필요가 있음을 보는 만큼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그 훈련 안에 우리 자신을 계속 머물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실천에 옮겨야 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히 공적인 직무에 있는 자들, 즉 사법을 집행하고 다스리는 자들이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자들이든 간에, 마땅히 전투의 길을 보여주어야 할 자들과 관련된 경우에 가장 전형적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낙담하고 겁 많은 자들이 그러한 자리에 앉게 된다면, 그들이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것 외에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 안에서 관리들을 임명해야 할 때, 사람들은 지금 하는 것보다 더 선한 선택을 해야 마당하며, 그리하여 그 목적에 누가 합당하고 적합한지 고려하지도 않은 채, 혹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마땅히 자신을 헌신할 선한 뜻과 바른 마음을 가졌는지 아닌지 염두에 두지도 않은 채 무턱대고 가서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종종 사안들이 틀어지고 모든 것이 무질서하게 보이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니,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제안하시는 방편들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처럼 그분을 저버릴 때, 그들 또한 그분에 의해 버림을 받아 자신들이 버려진 존재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매우 마땅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규칙을 더 잘 따르도록 스스로 권면해야 하며, 우리 각자는 용기를 모으기 위해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군대와 무리에 속할 자격이 없음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사역자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해야 합니다. 곧 그들은 약한 무릎을 강건하게 하고 낙담한 마음을 격려해야 합니다(35:5).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올바른 사용은, 우리가 사람들의 손이 떨리고 그들의 무릎이 흔들리는 것을 볼 때, 우리의 생생한 격려를 통해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강건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역자들이 일단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고 나면, 사도가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다른 모든 사람 역시 그와 같이 해야 합니다(13:12). 왜냐하면 이 이사야의 본문은 거기에서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책임을 맡은 자들만이 약한 자들을 강건하게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그와 같이 해야 함을 보여주기 위해 인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감찰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토록 연약하게 바라보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좋은 도움을 주셨음을 우리가 압시다. 그분의 약속들을 우리 자신의 삶에 적용하사, 우리의 무릎이 흔들림을 느낄 때 우리는 그것을 활기차게 일으켜 세워야 하고, 우리의 손이 떨릴 때 우리는 그것을 강건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은 일관성과 용기로 이토록 요새화되어야 하므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행하심을 확실히 아는 자들로서 우리가 맞대결에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려 함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분에 의해 지탱될 것이요, 그분의 은혜는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의 본보기를 통해 그분께로 인도될 것이니, 그리하여 우리가 사탄을 대적하여 싸우도록 한마음 한뜻으로 강건해지기를 원합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모시고, 그분께서 우리를 자신의 천상의 안식으로 데려가실 때까지 우리가 견뎌내야 할 모든 맞대결과 공격 속에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다스리시기를 원합니다.

 

이제 우리의 허물들을 인정하며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의 위엄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그리하여 그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허물들을 더 잘 깨닫게 하시고 그것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구하며, 우리가 마침내 우리의 모든 원수들을 대적하여 승리를 얻고 그분께로 모두 함께 모여 우리가 거둔 승리의 열매를 누릴 때까지, 그분의 아래에서 그리고 그분의 손아래에서 더욱 잘 준비되어 싸울 수 있도록, 이후로 우리를 이와 같은 방식으로 통치해 주시기를 간구합시다. 그리고 우리 모두 이렇게 아룁시다. 전능하신 하나님, 천부여, 등등.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