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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신명기 설교

신 20:16-20

작성자doulosdei|작성시간26.06.16|조회수27 목록 댓글 0

119회 설교: 20장 네 번째 설교

15561220일 금요일

 

20:16-20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 너희가 어떤 성읍을 오랫동안 에워싸고 그 성읍을 쳐서 점령하려 할 때에도 도끼를 둘러 그 곳의 나무를 찍어내지 말라 이는 너희가 먹을 것이 될 것임이니 찍지 말라 들의 수목이 사람이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에워싸겠느냐 다만 과목이 아닌 수목은 찍어내어 너희와 싸우는 그 성읍을 치는 기구를 만들어 그 성읍을 함락시킬 때까지 쓸지니라

 

 

 

 

어제는 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거주하던 민족들을 대항하여 그토록 엄격한 선고를 내리셨는지가 밝혀졌습니다. 그분께서 그 이전에 그들을 용납하셨고 그들이 정죄 받을 때까지 그들을 참아주셨다는 사실이 여러분에게 전해졌으며, 이에 따라 우리가 그러한 본들로부터 유익을 얻어야 하되, 부분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자신의 심판 집행을 연기하시며, 그동안 우리에게 회개로 돌아갈 시간을 주실 때, 우리가 그분의 인내를 악용하지 않기 위함이며, [또 부분적으로는] 그분께서 사람들에게 그토록 극심한 엄격함을 집행하시는 것을 우리가 볼 때, 그분께서 그들이 전적으로 은혜를 저버렸음을 아시고, 오랜 시간 전에 이미 그들의 머리 위에 그러한 정죄를 쌓아두셨기 때문임을 우리 자신에게 확신시키기 위함이라는 사실이 전해졌습니다(2:4). 이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해당 선고의 집행자로 지정하시어, 가나안 사람들과 그와 같은 자들이 유대인들의 손에 의해 완전히 뿌리 뽑히게 하셨다는 점에 주목하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왜 그렇습니까? 본문에 명시적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보증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지 않았다면, 자신들의 머리로 그것을 감행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령하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 어떤 일도 시도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평생 동안 마음에 새기고 준수해야 할 일반적인 규칙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들의 한계를 넘어설 때, 즉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선포하신 것의 테두리 안에 자신들을 유지하지 않을 때에는, 비록 그들이 훌륭하고 칭찬받을 만한 일들을 행할지라도 그것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덕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이렇게 하는 것이 좋으니 내가 거기에 내 자신을 바치겠다고 말할지라도, 그동안 하나님께서 그를 그 일로 부르시지 않으셨고 그에게 그렇게 행동하라고 명령하는 그 어떤 말씀도 없다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일들에 무모하게 도전하는 그의 행동은 언제나 하나님의 손에 의해 정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 행위가 그 자체로 선하고 훌륭하다고 주장할지라도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 왜냐하면 그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손에서 순종을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자신을 살피고 자신의 의무가 자신을 어디까지 인도하는지를 고려합시다. 만일 단지 작은 가정을 다스릴 뿐인 사람이 자신에게 치안관의 직무를 떠맡긴다면, 그것에 대해 무엇이라 말해야 하겠습니까? 그 안에는 매우 큰 혼란이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집안의 종인 사람이 자신에게 속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떠맡긴다면, 여러분은 모든 것이 질서에서 벗어남을 보게 됩니다. 또한 만일 아내가 자신의 남편을 제압하고 그를 자신의 부하로 만든다면, 본성이 가진 정직함은 온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조심스럽게 자신들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부르시는 길이 어떠하든 그 길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가졌을 때에는, 사람들에 의해 저지당하거나 방해받아서는 안 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라고 명하시면 우리는 가야 하며, 비록 온 세상이 우리를 대항하여 나설지라도 우리는 고개를 돌리지 말고 여전히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행정관들과 공의의 사역자들(ministers of justice)은 자신들의 손에 칼을 쥐고 있으며, (사도 바울이 말하듯) 그것은 헛된 것이 아니니,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범죄자들을 처벌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13:4). 이제 만일 그들이 그 일에 있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동안 하나님께 어떤 변명을 굳이 주장하려 한다면, 그들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그들을 직무에 세우셨을진대, 그분께서는 또한 그들에게 자신들의 상태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대담하고 용기가 가득하기를 원하신다고 그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옛적에 브리스 사람, 아모리 사람, 가나안 사람, 여부스 사람과 그와 같은 자들을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해 모든 유대인에게 무슨 명령이 주어졌든 간에, 오늘날 모든 사법 사역자들에게도 똑같은 명령이 주어지니, 즉 그들은 온갖 종류의 오염을 길러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든 자들을 이 땅에서 제거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경우를 말하자면, 우리를 어떤 곤경에 빠뜨릴 수 있는 자들을 우리가 완전히 뿌리 뽑고 죽음에 처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우리 자신의 악덕들을 완전히 뿌리 뽑는 일을 살핍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거기에서 충분히 힘겨운 싸움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우리는 우리를 타락시키고 망칠 수 있는 자들과 상관하지 않도록 또한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상 너무나 앞으로 잘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너는 가나안 사람들을 죽음에 처하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똑같이, 우리 또한 우리를 오직 악으로만 유혹하고 우리를 사악함으로 격동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의 무리를 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연약하여, 세상의 아주 작은 빌미도 우리를 길 밖으로 밀어내고, 얼마 전 앞에서 선포되었듯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뒤에 남겨두고 떠나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섬김과 모든 정직함을 기꺼이 뒤엎으려 하는 모든 자들을 하나님의 교회에서 제거하기 위해 우리의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너희 중에서 그 악한 자를 내쫓으라고 말할 때,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어떤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물질적인 칼을 사용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고전 5:13). 왜냐하면 그들은 행정관의 상태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그 의미는 출교를 뜻하니, 그리하여 만일 어떤 사람이 음행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욕하는 자로 판명된다면, 그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어야 마땅한 그분의 교회를 타락시키는 일이며, 그곳을 돼지우리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러움이 그곳에 누워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도대체 무슨 처사란 말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사악하고 법이 없는 삶을 인도하는 그와 같은 모든 사람들을 잘라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해당 본문에서 거두어야 할 교훈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멸시자들과 무법하고 무질서한 삶을 인도하는 자들을 죽일 칼이 우리의 손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을 우리 가운데서 내쫓아야 하며, 이와 함께 히브리서에 우리에게 주어진 경고를 기억해야 합니다(12:15). 사도가 말하기를 너희는 쓴 뿌리가 자라나서 괴롭게 하거나, 그것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더러움을 입지 않도록 오직 크게 주의하라고 합니다. 경험이 보여주기를, 인간 안에 있는 연약함 때문에 모든 것을 망치는 데에는 오직 아주 작은 타락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덕을 여전히 기르는 빌미가 되지 않도록 이 문제를 바로잡기를 배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가 그분의 섬김의 모든 순전함 속에서 유지되도록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은, 걸림돌들이 양육되거나 유지되지 않게 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 각자가 사람들의 인격 자체는 아끼고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 모든 사람 안에서 악덕을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가나안 사람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우리는 그 대신에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한 불량한 사람이 파멸 속으로 달려가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용납 받고 아첨을 받으며 자신에게 단 한 마디의 말도 건네지지 않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한 자를 대항하여 나는 엄격함을 사용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그에게 수치를 주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만일 다른 방도가 있다면 그리해서는 안 됩니다. 진실로 만일 그가 고집을 부리고 하나님을 대항하여 완고함을 유지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더욱 변명할 수 없게 될 것이며, 우리는 마치 그에게 피를 뽑아내거나, 그에게 어떤 혐오스러운 약을 처방하는 것처럼, 그를 날카롭게 꾸짖음으로써 참으로 그의 영혼의 건강을 도모해야 합니다. 이처럼 여러분은 우리가 사람들의 인격은 아끼면서도 우리의 힘이 닿는 한, 그들의 악덕은 죽여야 마땅함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점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의 교리를 우리가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지게 되는 칼에 비유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악한 격정들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전에는 거룩하지 못했을지라도, 우리가 이처럼 낮아져서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고 우리 자신을 온전히 부인할 때, 그때부터 우리는 그분께 봉헌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것이 우리의 인격 위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왕 노릇 하는 모든 악덕들 위에 행해지는 한 종류의 죽음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죄를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처신해야 마땅합니다.

이제 만일 여기에서, 사악하고 삐뚤어진 자들을 얻기 위해 그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법에 어긋나지 않는지 질문이 제기된다면, 나는 대답하기를, 어떤 사람이 그들이 치유될 수 없는 상태임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참으로 그러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또는 그가 마치 파멸로 가는 큰길 위에 있을 때 첫 돌격부터 그 사람을 포기해 버리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에 의해 구속된 그 비참한 영혼의 파멸을 촉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바른길에서 벗어난 자들을 다시 돌이키기 위해 충분히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험에 빠뜨려서는 안 됩니다. 만일 내가 내 자신이 연약함을 알면서도, 미련한 나의 이웃을 얻는다는 핑계로 그와 함께 나 자신을 전복시킨다면, 내가 그것으로 무엇을 얻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그러한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점에 있어서 어떻게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을지 주의합시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자신을 면밀히 살피고, 자기 자신의 상상에 따라 처신하지 맙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와 함께, 하나님을 멸시하는 모든 자들을 미워하되, 참으로 그들을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도 용납할 수 없을 만큼 미워하여, 그들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을 우리가 볼 때, 그 일로 인해 너무나 슬퍼하고 마음이 아픈 나머지 그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별하고, 그들의 무리를 온전히 피하며, 참으로 진심으로 그들과 그 어떤 교제도 하기를 거부하는 것에 관한 시편의 말씀을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139:20). 그와 일치하여 동일한 시편의 다음 구절에서 말씀하시기를(139;21), 우리는 그와 같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전쟁을 치르는 모든 자들을 향해 완전한 미움을 품어야 하며, 그리하여 우리의 힘이 닿는 한 그들의 치명적인 원수가 되어야 하되, 그들의 인격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치유될 수 없는 사악함 때문에 그리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 외에도 우리는 교회의 질서를 또한 유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썩은 지체처럼 버려졌는데도, 우리가 가서 여전히 그와 동행한다면,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모든 신실한 자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교회의 지체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 안에 있는 힘을 다하여) 분열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그처럼 버려진 자들과 아주 친밀하게 지내고 우리 자신을 그들과 마찰시키는 데까지 나아갈 때,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경멸하는 것이며 우리가 그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그들을 가버리게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바울이 다른 곳에서 말하듯) 우리가 교회에 의해 버려진 자들일지라도 원수로 여겨서는 안 되며, 여전히 형제로서 그들에게 경고해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살후 3:15).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들의 무리에 친밀하게 자주 드나들고 그들의 사악함에 동참할 정도로 그들과 깊은 우정 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그것은 자신들이 그들과 함께 얽히기를 원한다는 징후이며, 그들은 그들과 함께 똑같은 정죄를 받아 마땅합니다. 이처럼 여러분은 요컨대 오늘날 우리가 이 교훈을 어떻게 실천에 옮겨야 하는지를 보게 되는데, 즉 행정관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모든 타락을 제거하기 위해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모든 범죄와 악한 행위와 무질서를 처벌하는 일에 자신들에게 맡겨진 칼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자기편에서 동일한 질서를 지키도록 살펴야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자는 우리 사이에 이 규칙을 지키기를 배워야 하니, 즉 만일 교회 안에 어떤 걸림돌들이 있다면 그것들을 용납해서는 안 되고, 병든 양처럼 나머지 양 떼를 오염시키는 데 기여하는 자들은 내쫓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그들이 물질적인 칼로 죽임을 당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들이 신실한 자들의 무리로부터 내쫓겨서 스스로 부끄러워할 수 있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들과 함께 더러워지지 않도록 주의하게 하여, 사람들이 그들을 용납할 수 없고 그들과의 아는 척을 견딜 수 없으며, 도리어 그들이 치명적인 전염병처럼 피해야 할 대상이 될 만큼 그들이 그런 방식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멸시자임을 알게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둘째 점입니다.

셋째 점은, 우리가 악덕들을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해 노력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들의 인격은 구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리하여 우리가 비참하고 미련한 사람들을 볼 때, 만일 가능하다면 그들을 다시 구원의 길 안으로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우리는 그들의 모든 격정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야 하니, 즉 우리가 그들 안의 모든 악을 죽여야 마당하며, 이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칼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는 내가 앞서 말했듯이 진실로 복음 전파가 그러한 권능을 가져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각 사람은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이웃들 안에 있는 악덕들을 완전히 뿌리 뽑은 것만으로는 우리에게 충분하지 않고, 가장 주요한 점은 우리 자신을 고치고 개혁하는 것이며, 악이 우리 안에 자리 잡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한 번 그 안에서 완고해지면 그것을 바로잡을 시간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차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또한 주목해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여기에서 우상숭배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보건대, 우리가 그로 인해 그분께서 자신의 섬김을 타락시키는 것을 얼마나 크게 싫어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실로 이 점은 이전에 이미 설명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그것을 다시 생각나게 함을 입을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섬김의 건전함, 즉 그분의 말씀에 따라 잘 정돈된 종교에 결코 온전히 고착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멀리 휩쓸고 가는 우리 자신 고유의 어떤 어리석은 열심들이 언제나 있으며, 우리가 잘 행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 마음에 너무나 들기 때문에 우리의 겉보기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르시는 것과 같으니, 그것은 마귀 같은 자만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자 한다면 우리가 언제나 순종에서 시작하는 것이 우리에게 마땅하기 때문이며, 즉 우리는 그분의 뜻에 따르지 않고 그분의 말씀에 합치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시도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전에 자신이 모든 미신과 우상숭배를 혐오하신다고 선포하셨던 것처럼, 그분께서는 이 장소에서 심지어 가증함(abominations)’이라는 단어 속에서 그것을 다시 확증하시니(18:9), 이 단어는 지긋지긋하고, 염증이 나며, 가증스럽고, 그분께서 거부하시며 용납하실 수 없는 것들과 같은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처럼 격동되시고 그분의 진노가 우리의 미신들에 의해 이토록 촉발되는 것을 볼 때, , 우리가 무엇을 행하려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순전한 교리에 우리 자신을 고착시키고, 그분을 섬겨야 할 때마다 내가 여기 앞에서 말했듯이 이쪽으로나 저쪽으로나 곁길로 비껴가지 말며,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모든 마음의 단일함으로 포용합시다. 그것이 한 가지 점으로 기여하게 합시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이 자신들의 신들에게 행한 그 가증한 일들을 너희에게 가르쳐 너희를 유혹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가 여기에서 또한 주목합시다. 이로써 그분께서는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 본성적으로 쉽게 잘못 인도됨을 보여주십니다. 내가 얼마 전 선포했듯이, 악덕들에 관해서 우리가 고삐를 아주 조금이라도 풀어놓는다면, 우리는 곧바로 전복될 것이라는 점은 사실입니다. 음행이 극도에 달해 왕 노릇 할 것이고, 도둑질도 그러할 것이며, 술 취함과 온갖 종류의 방탕함도 그러할 것이고, 신성모독도 그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바른길 안으로 인도하는 것은 힘든 일인 반면, 그 반대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곧바로 그 길로부터 돌아서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참으로 파리 한 마리가 윙윙거리는 것조차 우리로 하여금 즉시 곁길로 가게 만들 것이므로, 비록 우리가 이전에 그 길 안에 잘 들어섰을지라도,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선을 행하는 일에 끝까지 버티는 사람들을 이토록 적게 보는 원인입니다. 많은 이들이 한동안 좋은 기색을 보여서 여러분은 그들을 경이로울 정도로 선한 사람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손을 한 번 바꾸는 사이에 모든 것이 망가집니다. 다른 어떤 이들은 그렇게 빨리 타락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러분은 그들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대항하여 자신들의 등을 돌렸는지를 보며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내가 앞서 말했듯이,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고려하지 않으며, 이와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 속에 깨어있지 않고, 사악함의 빌미들을 차단하려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들 고유의 확고함을 그토록 많이 신뢰하고 악에 잘 저항할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을 파멸 속으로 거꾸러뜨리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만을 처벌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종의 자기 자만이 없는 것이 아니며, 결과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두려움 속에서 살지 않고, 그분의 성령의 은혜로 피난처를 구하지 않는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악덕으로, 그러나 특별히 우상숭배로 얼마나 쉽게 인도되는지를 배웁시다. 이는 바라보기에 비참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각 사람이 그것의 학교를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에게 미신의 그 어떤 본이 없을지라도, 여전히 우리 각자는 우리 자신들 안에서 그것을 위조해 낼 수 있습니다. 만일 천주교의 더러움이 무엇을 뜻하는지 결코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그대로 버려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붙잡히지 않는다면, 그들이 나이가 들었을 때 그들 각자는 이러한 것과 이러한 것이 좋도다하며 자기 자신만의 열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비참할 정도로 이토록 변덕스러우며, 우리의 지혜는 미신들과 우상숭배들을 고안해 내기에 대단히 재빨라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 내가 그러한 것을 보았고 그러한 것이 행해지곤 하였노라고 말할 가라지의 씨를 뿌리는 자들을 우리가 가지게 될 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 해악은 끊임없이 양육될 것입니다. 더 멀리 갈 것도 없이, 여러분은 우리 가운데 있는 이 우상숭배의 옛 바구니들(panniers)이 언제나 자신들의 옛 더러움의 일부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이전 미신들의 어떤 악한 뿌리가 자신들 내면에 여전히 남아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범위를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곧바로 우리가 걸어 나왔던 그 지하감옥들 속으로 다시 실려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신실한 자들은 미신에 익숙해진 그러한 무리에 의해 잘못 가르침을 받지 않도록, 좋은 감시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원인 없는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 해악이 차단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본성은 곧바로 압도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지정되었던 [바로잡음의] 방편은 오늘날 우리에 관해서는 적용될 자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숭배자들을 죽음에 처할 칼이 우리의 손에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니, 나는 사적인 개인들인 우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를 자신들의 마귀 같은 사악함 속에 얽어매려 구하는 모든 자들의 무리를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의 치료법은 (내가 앞서 말했듯이)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아는 것이며, (그분께서 사람들이 자신들 마음에 위조해 내는 모든 더러움들로부터 우리를 구별하시는 것을 보건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의 순전한 교리에 우리 자신을 고착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확실한 규칙이니, 우리가 그것을 따릅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모세가 덧붙이는 말을 계속해 나갑시다. , “어떤 성읍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포위될 때, 사람들은 그것을 포위하기 위해 어떤 종류의 나무들을 베어내어 무너뜨릴 수 있으니,” 왜냐하면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포위 공격 무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포 대신에, 그 당시에는 성벽을 부수기 위한 어떤 기구(engines)들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에게 목재가 필요하다면, 그들은 과일나무를 베어서는 안 되고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들을 베어야 하며, 그것들로 자신들의 용도를 채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열매를 맺고 그로부터 양식을 거둘 수 있는 나무들은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기에서 어떻게 한 명령이 규정되어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선고의 의미는 다소 어두우며, 그러므로 그것은 다양하게 설명됩니다. 그리고 진실로 나는 그 위에 다소 머무를 것이나, 다만 그것을 훑어보는 정도로만 그리하겠습니다. 문자 그대로는 이와 같습니다. “사람은 네 얼굴 앞에 포위에 이르기 위한 들판의 나무가 아니니라.” 이제, 어떤 이들은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방식으로 나무들을 파괴하는 자들을 조롱하려 하셨다고 받아들입니다. [마치 이와 같이 말하려는 듯이] “무엇이냐? 나무들이 너를 대적하여 너를 대항해 오고 너에게 저항하는 원수들이냐?” 그렇다면 만일 사람들이 나무들을 베어 넘어뜨리고 그 지방을 황폐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유치한 종류의 보복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들이 이 본문을, 그처럼 황폐하게 만들고 거주자들의 양식을 파괴하는 그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우리 주님의 뜻이었다고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원수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대적하여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까? 나무들과 생명이 없는 것들을 대적하여서입니까? 진실로 여러분은 용맹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해석이 다소 억지스럽다는 것을 깨닫고 말하기를, “들판의 나무는 사람의 것이니, 즉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무에게 결실함을 주셨을진대, 그분께서는 그것을 사람들과 그 지방 거주자들의 영양 공급을 위해 지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백성이 정복당할지라도, 그들이 복속되었을 때, 그들이 살아가야 할 방편이 있고, 자신들의 정복자들에게 조공을 바칠 방편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이들은 이 말씀들, (네 얼굴 앞에 포위에 이르기 위한)이라는 말을, 그 성읍을 포위하는 자들을 돕기 위한 것으로 이와 같이 이해하니, 왜냐하면 만일 그들에게 양식이 부족하다면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성읍이 포위되었을 때, 만일 자신들의 군대를 유지할 방편이 없다면, 그들은 그곳을 떠나야만 하는데, 이 나무들이 결과적으로 그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고유의 생계 수단을 가서 박탈하는 것은 큰 미련함이라고 우리 주님께서 (그들이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그것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히브리인들은 보통 비유를 보충하기 때문에, 그것은 이와 같이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사람이 네게 대항하여 포위 속에 나아오기 위한 들판의 나무를 대신하리라.” 그리고 이 해석은 매우 합당하고 자연스러우며, 나는 그것에 대해 긴 분석을 하지 않을 것이니,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나는 모든 사람에게 기여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이 그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그 의미를 붙잡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전쟁의 때일지라도 과일나무들을 베어내는 것을 금지하셨을진대, 그 원인을 덧붙이시니, 즉 사람들이 들판의 나무들을 대신해야 마땅함을 보건대, 그러므로 그들은 차라리 그들을 대적하여 자신들을 세우고 공공연한 원수들을 대적하듯이, 그곳에 자신들의 분노를 표출해야 마땅하다는 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포위에 나아올 수 있고, 참으로 너를 대적하여 전투의 충돌에 나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약하자면,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비록 여기에서는 다른 문자적 노출에 대해 말할지라도 모든 것은 하나의 결말로 귀결되듯이) 전쟁의 때에 사람들이 나무들 위에 자신들의 화풀이를 해서는 안 되고, 자신들의 원수들 위에 그리해야 마땅함을 선포하려 하셨으니, 왜냐하면 자신들의 원수들은 자신들을 괴롭히기를 구하고 그러므로 저들이야말로 저항 받아야 마땅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법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주는지 고려하러 나아갑시다. 전쟁의 때에 우리가 과일나무들을 베어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비록 우리의 칼이 뽑혔을지라도, 우리 자신의 기쁨에 따라 온갖 종류의 잔혹함을 사용하는 것은 법에 어긋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런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올바른 전쟁들, 곧 그분께서 친히 인정하시어 사람들을 죽이도록 허락하시는 그러한 전쟁들에 대해 말씀하시면서도, 우리가 그 지방을 완전히 황폐하게 만들지 않도록,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인류애를 유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전쟁이 우리 앞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것을 완전히 파멸로 만들 만큼, 그러한 방식으로 법에 어긋나지 않는 것은 아님을 주목합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이 비록 자신들을 가능한 한 많이 억제할지라도, 여전히 너무나 많은 악이 저질러질 것임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만일 단 한 사람의 사람만이 죽임을 당할지라도, ,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의 한 형상이 훼손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수많은 무리를 죽이는 데까지 이르러, 그로 인해 수많은 과부와 아비 없는 자식들이 생겨날 때에는, 그것이 도대체 무슨 처사입니까? 게다가 비록 사람들의 재물과 소유가 보존될지라도, 많은 사람이 자신들의 집에서 쫓겨나고 잘못 다루어짐을 입어 어떤 이들은 추위로, 어떤 이들은 결핍과 궁핍으로 죽어가니, 그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이 전쟁의 때에 가능한 한 치우침 없이 처신할지라도, 여전히 수많은 무질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점에 있어서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잔혹함과 악한 처사로부터 스스로를 삼가기 위해 더욱 힘써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 주님께서 심히 원수들 사이에서조차, 심지어 그분께서 이전에 죽이도록 허락하셨을 때에도 그와 같은 공평한 처사가 유지되기를 원하셨을진대, 하물며 친구여야 마땅하고,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자들에 대해 손가락 하나를 치켜세우는 것도, 아니 우리의 혀끝으로 삐뚤어지게 말하는 것조차 법에 어긋나는 우리들 사이에서는 무엇이 행해져야 하겠습니까? 왜냐하면 비록 어떤 사람이 우리를 격분하게 하고 우리를 괴롭게 할지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와 전쟁을 치르도록 허락하지 않으시며, 도리어 우리가 인내 속에서 우리의 영혼을 소유하고 선을 행함으로 악을 이기기 위해 분투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21:19; 12:21).

이제 만일 우리에게 잘못과 해를 저지르는 자들과 우정을 유지하고 그들의 복리를 도모해야 마땅하여, 우리가 그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괴롭게 하는 것이 법에 어긋날진대, 내가 여러분에게 묻건대, 우리에게 결코 잘못이나 해를 저지르지 않았고, 우리에게 그 어떤 손실도 입히지 않은 자들을 우리가 해치려고 꾀할 때, 그것이 용납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법이 단지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우리 주님께서 이 법이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교훈이 되어, 그 누구도 우리에 의해 손해를 입었다고 불평할 수 없도록, 우리의 힘이 닿는 한 그토록 공평한 처사를 유지하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우리가 이 법을 우리의 교훈에 어떻게 적용해야 마땅한지를 보게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우리가 비록 생명이 없는 것들일지라도 과일나무들을 아껴야 마땅할진대, 하물며 사람들의 인격은 얼마나 더 아껴야 하겠습니까? 진실로 이 말씀은 나무들 자체를 위하려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것들에 의해 먹임을 받고 부양을 받는 사람들을 고려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확실히 나무들은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 어떤 특권도 전혀 가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아낌을 받지 못하고 모두 칼날에 처해질 때 그것은 도대체 무슨 처사란 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둘째 점입니다. 이제 계속 나아갑시다.

여기에서 황폐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규례를 유지해야 마당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니, 특별히 우리가 사람들을 향한 그분의 선하심과 아버지 같으신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안식하도록 땅을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파멸을 일삼고 그 땅의 가련한 거주자들을 쫓아내어, 그리하여 심지어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평화의 때에조차, 그들이 모든 것이 황폐해지고 땅이 황량해진 것을 발견할 때, 그리고 이전에는 잘 경작되었던 곳이 이제는 사과 한 개를 딸 나무 한 그루조차 남지 않은 광야처럼 되었을 때, 그것은 그분께서 인류를 향해 선포하셨던 하나님의 선하심을 좌절시키는 것과 다름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비록 돌보다 더 단단할지라도, 마땅히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야 할 그러한 은혜를 대적하여,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대적하여 우리가 그토록 싸울 때, 우리가 우리의 격정 속에서 전적으로 눈이 먼 것이 아님이 틀림없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기에서 우리가 잘 주목해야 할 일반적인 규칙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즉 우리가 그 어떤 황폐함이나 약탈을 저지르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 우리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이 세상에 두셨고, 이 삶에 필요하다고 그분께서 아시는 일들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셨도다. 이제 만일 내가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계를 위해 땅에 주신 것들을 굳이 약탈하려 한다면, 나는 인류에게 선포하셨던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 이상 나타나지 못하도록 좌절시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로다. 그리고 내가 이처럼 내 이웃뿐만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해서도 유익했던 하나님의 자비로운 선하심을 폐지하고, 그것이 더 이상 진행되거나 왕 노릇 하지 못하게 가로막을 때, 내가 이 땅 위에서 부양받을 가치가 있겠는가? 내가 참으로 하나의 괴물과 같지 않은가?’ 이것은 (내가 말하건대) 우리를 잘 억제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우리가 그 어떤 악의에 휩쓸려 나무와 집과 그와 같은 다른 것들을 황폐하게 만들 만큼 사악한 마음을 품게 될 때, 우리는 이 고려 사항으로 우리 자신을 통제합시다.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대적하여 전쟁을 치르는 대상이 누구인가? 그것은 피조물들이 아니라, 바로 그곳에서 자신의 선하심을, 그것도 어느 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 또한 그 수 안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사람을 향해 친히 나타내시는 당사자이시로다.” 이 점이 잘 고려되었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처럼 전쟁들이 그토록 무모하게 감행되지 않았을 것이며, 지방들이 사방에서 아낌없이 황폐해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와 같은 종류의 잔혹함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 사이에서, 옛적에 심지어 이교도들 사이에서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지방들을 불태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며, 그것은 사람들의 목을 베는 것보다 더 악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지방이 사방 십 리(ten leagues)나 불타버렸을 때, 그 가련한 거주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틀림없이 울타리와 덤불 아래로 가서 죽거나 평지 위에서 파리해지며 누워 있어야만 할 것이니, 도리어 그들을 즉시 죽음으로 끝내주는 것이 더 큰 자비의 점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관습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그것이 법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관습이 어디에서 오겠습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았고, 그 원인으로 인해 그들이 그분으로부터 온전히 소외되었으며, 결국에는 전적으로 짐승처럼 되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하여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요, 가톨릭교도요, 기독교의 지지자들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오늘날 이토록 질서에서 벗어나 야만성이 그들 가운데 가장 온전히 왕 노릇 하는 것을 보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인류가 보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원수들의 땅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도리어 자신들 고유의 백성들조차 아낌없이 죽이기에 이릅니다.

오늘날에는 투르크인들의 법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왕 노릇 하고 있으니, 그것은 사람들이 땅의 주권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자신들의 지방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그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원수가 우세를 점할 것처럼 의심한다면, 그들은 그가 오기 전에 앞의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불태웁니까? 군주 자신이 보호 아래 두고 있는 그 가련한 백성들을 불태웁니다. 히스기야의 인격 속에서 선한 왕의 직무에 대해 말씀하시는 바와 일치하여, “너는 폭풍 속에 숨을 곳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그가 자신의 백성들을 위한 피난처와 망명처의 장소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25:4). 폭풍이 밀려와서 모든 것이 파멸로 갈 것처럼 보일 때, 왕은 자신의 날개를 펼쳐 자신의 백성들을 덮고 그들을 보호해야 하며, 인류가 보기에 그는 참으로 그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마당합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한 군주는 자신의 백성들을 유지해야 마당합니다.

그와 반대로 여러분은 한 군주가 이토록 눈이 멀어, 단 한 알의 곡식도 남지 않도록 모든 것을 불태우고 황폐하게 만들라고 명령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 그러나 그로 인해 가련한 백성들이 굶어 죽나니, 다른 방도가 없도다. 아무것도 아껴서는 안 되며, 내가 정복자처럼 왕 노릇 하기 위해 모든 것이 무너져야 하느니라.” 사람들이 이토록 멀리 나아갈 때에는, 틀림없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육십 년 전의 본들을 가서 찾을 필요가 없으며, 우리의 조상들이 말하는 것을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나간 이십 년 안에서, 그리고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그만큼의 일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해악은 단지 지속될 뿐만 아니라 여전히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 열매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한 군주가 자신을 고해하고 죄 사함을 받으며, 자신의 등 뒤에 십자가를 그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니, 그에게는 의식들이 충분할 것입니다. 그가 한 무리의 모조품 같은 섬김들을 이행했을 때, 그는 온전하고 깨끗하게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에게 그의 의무를 보여주려 한다면, 그는 그것에 대해 듣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자신이 첫째로 하나님께, 그리고 그다음으로 사람들에게 무슨 빚을 지고 있는지에 대해 들을 때에는 훨씬 더 견디지 못합니다.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전쟁을 치러야 마땅한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시는 것 이상으로 시도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자신의 한계와 테두리 안에 머물러야 마땅한지에 대해 들을 때에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의 위엄을 훼손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젖먹이 아기를 기쁘게 하려는 것처럼 한 무리의 하찮은 잡동사니들로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 그에게는 충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편에서 무엇이 우리에게 법에 부합하는지를 고려하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들의 머리 위에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촉발하는 자들과 상관하지 맙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토록 큰 혼란들로부터 건져내 주신 것을 보건대, 우리가 그분께 감사를 드리고 더 이상 그들을 따르지 맙시다. 이는 그분의 보복이 우리를 대항하여 더욱 끔찍해지도록 촉발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이제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간에, 비록 우리가 사적인 개인들일지라도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땅을 우리의 양육 유모(foster mother)와 같도록 지정하셨음을 아는 만큼, 그 어떤 황폐함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는 이 교훈을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그리고 땅이 우리를 부양하기 위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태를 여는 것을 보건대, 우리는 그것이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손을 내밀어 자신의 선하심의 증거들을 제공하시는 것과 전적으로 같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마음을 품는다면, 이 교리는 단지 전쟁의 때뿐만 아니라 평화의 때에도 우리에게 유익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이 잘 존중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온통 악을 행하는 데에만 몰두해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우리가 날마다 그러한 일들로 우리의 귀를 두드림을 당할지라도 우리는 그것들을 마음에 두지 않으니, 그것의 본들이 너무나 명백합니다. 참으로 심지어 가련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때에 그것을 팔기보다는, 차라리 자신들의 곡식이 자신들의 곡물창고 안에서 망가지고 해충에게 먹히며, 그것이 놓여 있는 곳에서 썩어버리기를 더 바라는 자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련한 백성들을 굶겨 죽이는 일을 자신들의 마음속에서 찾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과일나무들을 베어버리는 것과 전적으로 같지 않습니까? 보라, 곡식은 거두어졌고, 우리 주님께서는 가련한 사람들이 부양받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선하심과 복 주심을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이제 그것은 곡물창고 안에 사재기 되어 있고,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부르짖으며 더 이상 그것을 견딜 수 없을 만큼 가격이 크게 오를 때까지 자물쇠와 열쇠 밑에 단단히 보관됩니다. 그러면 그동안에 곡식은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곰팡이가 피고 썩어버립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들이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던 자들을 때때로 조롱하시며, 그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이 아님을 그들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힘이 닿는 한,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을 향해 선포하셨던 그 선하심과 아버지 같으신 사랑을 대적하여 싸우기라도 하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매장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마치 과일 맺는 나무들을 베어 넘어뜨리고 파괴하려 나아가는 것처럼 자연의 온전한 질서를 왜곡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행해져야 하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심지어 원수들 사이에서조차 어떤 인류애가 준수되기를 원하셨음을 보건대, 우리가 평화와 형제애 속에서 동료처럼 함께 살아가야 마땅함을 보건대, 우리 안에 있는 힘이 닿는 한 화목과 우정 속에서 살아가기를 힘쓰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그 어떤 세상적인 것들보다 훨씬 더 귀중한) 자신의 영적 은사들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을 때에는, 우리의 이웃들을 우리와 함께 참여하는 자들로 만들기를 힘쓰고, 우리의 악의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시는 그 선하심을 좌절시켜 박탈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일시적인 유익들을 사용하는 일 속에서 그토록 신중하게 처신해야 마땅할진대, 하물며 우리의 영혼의 구원에 관계된 영적인 복들 안에서는 무엇을 해야 마땅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과일나무들을 뿌리째 뽑지 않기를 배우십시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씨앗임을 보건대, 그것이 좋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그것을 사방에 널리 퍼뜨리기를 힘씁시다. 그리고 그것이 뿌리를 내렸을 때, 그것이 황량한 나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좋은 과일을 맺는 나무를 내도록 합시다. 이처럼 여러분은 만일 우리가 이 본문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합당하게 유익하게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거두어야 하는지를 보게 되니, 즉 참으로 그와 같은 방식으로, 비록 우리가 전쟁 속에 있지 않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백성으로 택하셨음을 보건대,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평생토록 우리와 함께 지속되어야 마땅한 그와 같은 올바름의 점을 여기에서 보여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의 위엄 앞에 우리의 허물들을 인정하며 무릎을 꿇고, 그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더욱더 느끼게 해 주셔서 우리가 참된 회개 안에 더 잘 안착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우리 안에 있는 연약함들을 볼 때, 우리 자신에 대해 슬퍼하고 싫어하며,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두려움 속에 붙잡아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비록 우리가 오늘날 세상이 온전히 질서에서 벗어난 것을 보고, 우리 자신이 온갖 종류의 걸림돌들로 사방이 끔찍하게 둘러싸여 있을지라도, 우리가 여전히 그분의 깃발 아래 붙잡혀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기 원하시는 곳은 어디든지 따를 수 있게 하시고, 그 방편을 통해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며, 우리 또한 우리가 그분의 백성이라는 사실과 그분께서 자신을 섬기도록 우리를 구별하여 뽑아내셨다는 사실로 인해 그분 안에서 바르게 자랑할 수 있게 하기를 기도합시다. 그분께서 이 은혜를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땅 위의 모든 백성과 나라들에게도 베풀어 주시기를 기뻐하사, 사로잡혀 있는 미신들과 우상숭배들로부터 모든 가련하고 무지한 백성들을 돌이키셔서, 그리하여 그들을 자신의 진리의 지식으로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하여 그분께서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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