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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신명기 설교

신 19:1-7

작성자doulosdei|작성시간26.06.16|조회수26 목록 댓글 0

112회 설교: 19장 첫 번째 설교

1556125일 목요일

 

19:1-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여러 민족을 멸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땅을 네게 주시므로 네가 그것을 받고 그들의 성읍과 가옥에 거주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 가운데에서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 전체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길을 닦고 모든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하게 하라 살인자가 그리로 도피하여 살 만한 경우는 이러하니 곧 누구든지 본래 원한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인 일, 가령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의 이웃을 맞춰 그를 죽게 함과 같은 것이라 이런 사람은 그 성읍 중 하나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이니라 그 사람이 그에게 본래 원한이 없으니 죽이기에 합당하지 아니하나 두렵건대 그 피를 보복하는 자의 마음이 복수심에 불타서 살인자를 뒤쫓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잡아 죽일까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기를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라 하노라

 

 

 

 

여기 기록된 법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해 제정된 것이지만, 오늘날 우리 또한 이를 통해 더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통해 악의를 품고 고의로 저지른 살인에 어떤 형벌이 집행되어야 하는지 밝히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흔히 말하는 우발적 사고로 일어난 일은 죄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실 이러한 일들은 단순히 어쩌다 일어나는 우연이 아니며, 다른 성경 구절에 나타나 있듯 위에서 계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일입니다. 성경은 어떤 사람이 나무를 베다가 나뭇가지가 다른 사람의 머리를 쳐서 죽게 만들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결정하신 일이라고 말씀합니다(21:13). 거룩한 성경은 우리가 일어난 일들을 운명의 장난으로 돌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손길이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또 다른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매우 소중히 여기사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심을 우리가 믿음으로 깨닫기를 바라십니다(12:7).

더 나아가 본론으로 돌아와 보면, 이 본문은 모든 잘못이 자발적인 것, 즉 사람들이 알고도 고의로 저지르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제 기록된 본문을 계속 읽어 나가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영토가 더 넓어질 때까지 세 도피성을 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다음 강해에서 살펴보겠지만, 또한 여호수아 20장에 선언되어 있듯 그들에게는 총 여섯 개의 도피성이 필요했습니다(20:1,7). 그럼에도 백성들이 그 땅을 온전히 평화롭게 차지하기 전까지는, 흔히 말하는 우발적 사고로 살인을 저지른 모든 이들이 피할 수 있도록, 오직 세 곳의 도피성만을 지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도 그 특권을 악용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어떤 부류의 살인자가 보호를 받을 수 있는지 덧붙이십니다. 그분은 부지불식간에 이웃을 죽인 자라 말씀하시며 한 가지 예를 드십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재목을 베러 갔다가 도끼가 손에서 미끄러져 이웃을 맞춰 죽게 했다면, 그 사람은 그런 행동을 할 의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도피성 중 하나로 도망쳐 목숨을 건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단순히 실수로 그랬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특권을 누릴 당사자가 진정으로 자격이 있는지 엄격한 조사를 통해 사건의 전말과 진실을 철저히 검증하고 명백히 입증해야 했습니다(22:35). 특히 이전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었음이 증명되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죽음이 인간의 편에서 선한 마음 외에 다른 의도가 없었던, 오직 하나님의 정하신 뜻 외에는 달리는 다른 원인이 없었음이 드러나야 했습니다.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살인자는 도피성 중 한 곳으로 피하여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 기간이 흐르는 동안, 죽은 자의 친족들이 품은 격한 감정과 원한이 가라앉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야 그는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첫째로 우리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일을 얼마나 크게 혐오하기를 원하시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이는 우리가 잘 주목해야 할 점입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우리의 생명이 그분께 매우 소중하고 그분께서 우리의 생명을 지극히 아끼신다는 점에서, 그분이 우리를 향해 품으신 사랑이 어떠한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미련한 짐승들을 여기시는 것보다 우리를 더 귀하게 여기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생명을 이토록 소중히 여기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이 그분께 이토록 고귀한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아버지와 같은 사랑으로 사랑하신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는 이를 통해 자신의 의무를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웃에게 어떠한 가해나 폭력도 행할 수 없으며, 만일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께 치명적인 죄를 짓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창세기 9장에 말씀하듯, 그렇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9:6).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그분의 형상을 새겨 놓으셨으므로, 누구든지 악의를 품고 이웃을 해하는 자는 자신의 능력이 닿는 한 극도로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악행을 삼가고, 우리로 인해 아무도 상처받지 않도록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라는 경고를 받게 됩니다.

실제로 우리는 필연적으로 저질러진 살인일지라도 거기에는 일종의 더러움이 수반됨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전쟁터에서 적군을 죽일 때, 비록 그 일이 합법적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사람의 손을 더럽히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대하 22:8; 28:3). 하나님께서 그것을 범죄로 전가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적들과 싸울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죄로 인해 자연의 질서가 이토록 어지러워진 것을 보며 슬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형제가 되어야 하고, 우리와 같은 모양으로 지음 받은 모든 사람 속에서 우리 자신의 육체를 발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저러한 방식으로 그들을 파멸로 몰고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전쟁의 시기라 할지라도 적들을 대항해 갑옷을 입는 자는 마음속으로 슬퍼하며 행해야 하고, 이러한 잔혹한 일이 사람들의 커다란 사악함 때문에 일어나는 것임을 스스로 되새겨야 합니다. 이 모든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평화롭게 살아가야 하며, 각 사람이 화평과 화목을 유지하기 위해 힘쓰고, 어떠한 악행도 저지르지 않도록 우리의 손을 묶어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살인을 얼마나 크게 싫어하시는지 밝히신 것에 대하여, 우리는 (사도 요한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는 온갖 종류의 미움이 곧 살인으로 간주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요일 3:15)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행할 수 있는 모든 그릇된 행동을 멀리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 마음에 그들을 향한 원한이나 적개심을 품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살인죄를 지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첫 번째로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는 부지불식간에 사람을 죽인 사람에게는 무죄를 선언하십니다. 그분은 보라고 말씀하시며, 그러한 사람에게는 죽음의 심판이 내려지지 않을 것이니, 그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하늘의 재판장께서 이와 같은 판결을 내리셨는데, 그 어떤 피조물이 감히 그에 맞서 반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그러한 사람은 죄가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게 선언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집과 유업을 버려두고 낯선 곳으로 가서 살아야 하며,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죄가 없음을 아시면서도 왜 그를 이토록 괴롭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분은 당사자에게 잘못이 없을지라도, 우리 중에 그 어떤 살인자도 용납하지 않고, 그들을 가능한 한 엄중히 처벌하며 온전히 혐오하게 하려는 본보기로서 이 일이 행해졌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부지불식간에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여전히 어느 정도의 처벌을 감당해야 하고 속죄하는 사람처럼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는 그가 스스로를 낮추고 다음과 같이 인정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진실로 나는 아무런 해를 끼칠 의도가 없었고, 이 불행한 사고는 내 부지불식간에 일어났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내 손과 발을 모두 다스려 주시기를 그분께 간절히 기도해야 할 큰 필요가 내게 있음을 경고하신다. 더욱이 내 손에 의해 사람의 피가 흘려졌으니, 비록 내 편에서는 아무런 악한 의도가 없었을지라도, 나는 그 일을 슬퍼해야 하며, 우리 주님께서 사람의 생명을 이토록 소중히 여기시니, 우리 역시 언제나 생명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점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이 법에 관하여, 이 점을 한 가지 중요한 사실로 삼으십시오.

이제 두 번째 점에 관하여,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위험과 원인을 미연에 방지해야 함을 보여주시며, 이와 관련하여 살인자가 그 도피성들 중 하나로 피해야 한다고 덧붙이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죽은 자의 친족 중 누군가가 분노에 휩싸여 자기 이웃의 죽음에 대해 보복함으로써, 그 재앙이 배가 될까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폐단을 피하기 위해 피난처가 될 성읍들이 지정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앞서 말했듯) 주님께서 재앙이 우리에게 닥칠 때까지 우리가 기다리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우리가 그에 대한 해결책을 취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죽은 자의 어떤 친족이 그 일로 분노하여 그가 내 사촌을 죽였다”, 혹은 내 형제를 죽였다라고 말하며, 그 분노 속에서 죄 없는 자에게 달려들어 그를 죽이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땅은 피로 더럽혀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살인 저지른 자가 자신을 향해 분노를 일으킬 만한 자들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죄 없는 자에게 그토록 원한을 품는 자가 스스로를 변명할 수 없음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상대방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감추어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일어나는 일들을 인간이 좌우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막아설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아무런 악한 의도나 생각도 없었던 사람을 향해 그토록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필시 너무나 악의적인 원한과 적개심일 뿐입니다. 하지만 비록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과 죄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친히 그 폐단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법들, 시민 정부를 위해 만들어진 정치적 법들이 인간을 온전함으로 이끌기 위해 기능하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그 법들은 우리 사이에 온전한 거룩함을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빠지기 쉬운 악덕을 치유하기 위해 기능합니다. 우리가 철저히 정결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 사방에 빗장을 지르셔야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만일 우리의 마음이 사악함으로 기울어질지라도, 우리가 마음속으로 품은 사악한 욕망을 실행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손을 붙잡아 두시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다스리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악을 삼가도록 명령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온전히 그분의 뜻에 의해 다스려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7:7). 이는 내가 이전에 강해했던 도덕법, 곧 십계명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정치나 외적인 통치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의도가 그분의 백성을 정직함으로 인도하여 그들 사이에 좋은 질서가 있게 하려는 것이었음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감정이 실행에 옮겨지지 않도록 억제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이 본문에서, 만일 우리에게 각 사람의 의무가 무엇이며 그가 마땅히 행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밝히라고 요구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부지불식간에 손으로 타격을 가했고 그 사실이 충분히 입증되었다면, 가장 가까운 친구나 친족은 보복하기 위해 나서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자기 뜻으로 자신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은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요,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밀한 섭리로 정하신 일을 한낱 필멸의 인간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한 교리로 인도하고자 하셨다면,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실정법을 만드실 때에는, 사람들이 뒤따라올 수 있는 폐단들을 주목하고 이를 방지하며, 해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미리 피하여 모든 원인에 대해 문을 닫아걸라고 말씀하시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십니다. 살인이 일어났을 때도 이와 같습니다. 범죄한 자는 길을 떠나 도피성 중 하나로 피하여, 보복을 원하는 가장 가까운 친족이 그렇게 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더 이상의 타격이 그치고, 추격자가 자신의 격앙된 분노를 따라 그 성읍 안으로 밀고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또한 범죄한 자는 용서를 받되, 그에게 어떤 잘못이 있다면 그것이 용납되어야 하고, 나아가 그렇게 처우를 받은 사람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다른 본문에서 그 도피성들이 레위인들에게 속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35:6). 이는 하나님께서 그곳으로 도움을 구하러 오는 자들의 보호자가 되도록 레위인들을 그곳에 세우셨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만일 누군가 범죄한 자를 대적하여 싸움을 걸러 추격해 온다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그를 가로막고 나서서 당사자의 보호를 도맡아야 했습니다. 이 본문에 관해서는 이쯤 해두겠습니다.

이제 요약하면, 우리는 이로부터 하나님께서 교황청(Popedome, 가톨릭교회)에서 고안해 낸 것과 같은 면책 특권(Franchises)을 만들려 하지 않으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이 보기에 살인자나 도둑, 혹은 강도가 교회로 피신하여 사법관이 감히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할 때, 하나님께서 잘 공경 받으시는 것처럼 여겨지나 봅니다. 참으로 이는 오래된 미신이며, 그럼에도 그것이 악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성전을 거룩하게 하려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위험에 처한 자들이 도우심을 구하려 그분의 성전으로 피하곤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죄가 있는 당사자들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원수들에게 부당하게 추격당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위엄이 추격자들의 분노를 가라앉혀 주기를 바라며 성전으로 피신할 때나 유익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범죄자들이 처벌을 면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받지 않도록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지도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솔로몬은 아도니아가 성전 제단의 뿔을 잡았을지라도, 그를 그곳에서 끌어내어 죽이겠다고 맹세했습니다(왕상 1:52). 솔로몬은 성전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형벌을 받아 마땅한 자가 처벌 없이 도망치도록 내버려 둘 만큼 눈이 멀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이름과 위엄을 핑계 삼아 그분의 공의를 뒤흔들거나 좌절시키는 것은 하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살인과 강도짓을 처벌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우리는 도리어 그분을 범죄자들의 후원자로 만들려 합니다. 그리하여 자객이 교회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영예를 위해 사법의 손길로부터 그곳에서 보호받아야 한다고 하니,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모순되시는 꼴이 됩니다. 그러므로 교황청에서 이러한 면책 특권을 도입한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들의 폭정이 지금 우리가 보는 것처럼 모든 질서를 뒤흔들어 놓기 이전의 일이며, 이는 악한 미신으로 행해진 일이었습니다. 고대로부터 어떤 종류의 특권들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도를 넘어 박해받는 극빈층을 위한 것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 종이 주인에게 잔혹하게 학대를 당한다면, 그는 피신하기 위해 어떤 상(image)으로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황제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우상으로 만든 셈이었지만, 그것이 행해진 목적 자체는 악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의 사정이 조사를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인이 아무런 이유 없이 종의 목을 베려 하거나 학대하려 했다면, 주인은 종을 다른 곳에 팔고 그 대가로 돈을 받도록 강제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무죄한 자가 죽음에서 구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고안된 피난처(Sanctuaries)는 사람들 사이의 모든 시민적 질서와 공평함을 왜곡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정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한 어리석은 형태의 헌신을 경멸하셨고, 그것을 싫어하심을 결과로써 보여주셨습니다. 옛날에 교회로 피난처를 찾아왔던 자들은 설교를 들으러 전혀 오지 않던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1300년 전에 글을 쓴 고대 교부들이 이에 대해 어떻게 불평했는지 보게 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와서 피난처를 구하는 저들은 우리가 아는 자들이 아니요, 우리가 매일 보는 자들도 아니며, 하나님의 교리를 받으러 이곳에 오는 우리의 제자로 여기는 자들도 아니다. 그런 부류는 결코 우리에게 피난처를 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교회의 특권을 누리고자 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방탕한 자들,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 그리고 매일 선술집과 사창가를 드나드는 자들이다. 그들은 어떤 잘못이나 범죄를 저지르고 나면 곧바로 피난처를 찾아 우리에게 도망쳐 온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 주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자신의 교회를 도둑의 소굴로 만드는 그러한 무질서를 참지 못하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7:11). 참으로 그것은 본래 다른 의미였으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전이 악을 행하는 자들의 은신처로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점은 일반적인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교황청의 교회들이 비록 하나님께 봉헌된 곳이었을지라도, 범죄자들에게 특권을 주고 나아가 채권자들을 괴롭게 하는 등의 악한 일들에 사용됨으로써 도리어 다시 더럽혀졌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비록 오늘날 그것들이 사탄의 사창가이자 우상들의 소굴 외에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그들은 그러한 특권들을 잘도 누리고 있으며, 그렇다고 우리가 그것 때문에 그들을 미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그곳에서 온갖 종류의 무질서가 지배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제 우리 편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결코 비행이나 범죄를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반대편을 보면, “그러한 살인을 저지른 당사자는 스스로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법관들은 살인을 저지른 자가 이전에 그의 이웃을 미워했는지, 혹은 그에게 어떠한 원한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알기 위해 그 문제를 부지런히 조사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는 그 어떠한 핑계도 용납되어서는 안 됨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별력은 모든 재판관에게 있어야 하며,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는 사람의 답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행위 자체를 들여다보아야 하고, 진실을 철저히 짜내어 밝혀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종종 재판관들은 기꺼이 속아 넘어가려 하고, 사건에 어떤 구실이 덧입혀질 때 보고도 못 본 척하며, 아무리 사소한 핑계일지라도 이를 받아들이곤 합니다. 그들은 , 그가 이러저러한 일로 스스로를 변명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범죄자의 말을 그대로 믿어준다면, 그는 언제까지고 자신을 변명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조사를 수행해야 하며,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부지불식간에 살인을 저지른 자들에게 보호를 제공하셨을 때, 그것이 고의적인 범죄자들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그 자체로 선한 법이 악용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만약 어떤 특권들이 선하고 올바른 것일지라도, 악한 자들을 위해서는 쓰이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특권을 부여하는 자들은 이 점을 잘 고려해야 하며, 사람들이 때때로 자신들의 행위를 악한 방종으로 이끌어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자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는 다른 모든 측면을 미리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보살핌을 받을 가치가 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사 올바른 법을 만들어 놓으셨음에도, 교활한 악인들은 즉시 그것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는 특권을 악용하려는 자들의 기도를 꺾어버릴 분별력이 필요하며, 이러한 특권은 오직 그럴 만한 자격이 있고 마땅히 받아야 할 자들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허락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살인이 저질러졌을 때, 하나님께서 행하라고 명령하신 조사에 관하여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두 가지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는 재판석에 앉은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 그들은 사소한 핑계를 용납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하며, 명백한 범죄가 저질러졌을 때는 누가 그 잘못을 저질렀는지 찾아내어 처벌받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시신이 발견되었을 때, 사법관이 어떠한 지체나 편파성 없이 즉시 부지런히 조사해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명령하셨는지 보게 됩니다(21:1). 만약 살인자를 찾을 수 없을지라도, 그곳이 어떤 마을이나 성읍의 경계 근처라면, 그 주변을 철저히 조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읍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그 유혈 사태에 무죄함을 엄숙히 선언해야 했으며, 만약 범인을 안다면 그를 폭로하겠다고 서약해야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끝난 후에는 제사 또한 드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피를 흘리는 일을 얼마나 크게 혐오하시는지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관원들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함께 모여, 비록 아무도 자신들에게 요구하지 않을지라도, 의무감에서 자발적으로 공의를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그들이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들의 의도가 범죄를 숨기려는 것이 아니며, 만약 그것을 알게 된다면 은폐하지 않고 자신들의 능력이 닿는 한 끝까지 보복하겠다는 선언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더 나아가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손길에 자비를 구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관할 구역 내에서 살인이 저질러지는 것을 허용하심으로써 그들을 낮추고자 하셨고, 그들이 그 땅에서 그 죄를 완전히 씻어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판석에 앉은 자들이 깨어 있어서 그 어떤 비행도 조장되지 않도록 해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은폐되어 있다면, 그것이 밝혀질 수 있도록 부지런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일단 사건의 증거를 확보했을 때에는 그 죄를 처벌하는 데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자들의 공범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이 점을 첫 번째로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나아가 사법관과 재판관들은 모든 사건을 심리할 때, 눈을 똑바로 뜨고, 사람들이 교활하고 은밀하게 행동하는지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한다면, 지금보다 증거들을 더 잘 파악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일을 그냥 넘겨버리며, 그 사실들이 밝혀지지 않는 것에 만족하곤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범죄를 심리할 때 사람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여기에서 보여주십니다. 여기에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반적인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비록 우리 모두가 범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칼을 차는 사법관으로 임명된 것은 아닐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재판관이 되는 영예를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고전 11:31).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닥칠 때, 우리 자신의 범죄와 잘못에 대해 스스로를 두둔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부지런히 심리합시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심리하는 데 이토록 부지런해야 해서, 설령 양심의 가책이나 찔림을 느끼지 못할지라도, 우리 자신에게 비난받을 만한 점이 있는지 없는지 샅샅이 훑어보아야 한다면, 하물며 우리 자신의 양심의 증언에 의해 유죄가 확정되어 우리 안에 어떤 악한 성향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때에는 스스로를 정당화하려 드는 것을 극도로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일이 어떻게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지 보게 됩니다. , 관원들이 여기에서 자신들의 의무를 부지런히 행하라는 경고를 받고 있음을 우리가 깨닫는 만큼, 우리는 그 구체적인 점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스스로를 고발하는 고발장을 제출하고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두둔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는 의무를 지우셨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덧붙여서, 우리 주님께서 여기 정해 놓으신 심리에 관하여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보면, 이처럼 맞아 죽은 당사자와 타격을 가한 다른 사람 사이에 어떤 원한 관계가 있었는지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그들 사이에 원한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고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내가 앞서 언급했던 사실, 즉 모든 범죄는 자발적인 것이며,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는 바로 그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을 훨씬 더 잘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살인을 저질렀을 때, 그가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그가 그 당사자에게 어떤 원한이나 악의를 품었는지 알아봄으로써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첫째로, 원한이나 악의가 곧 살인의 샘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마음속으로 사람을 미워하는 자들을 모두 살인자로 선언하시고, 비록 안에 감추어져 있을지라도, 그 원한을 정죄하시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거나 기이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살인자가 심리를 받으러 올 때, 손이 비난을 받습니까? 칼이 비난을 받습니까? 아니면 가해진 그 타격이 비난을 받습니까? 아닙니다. 비난을 받아야 마땅한 것은 손을 움직이게 하고 사람을 부추겨 살인을 저지르게 만든, 이전에 품었던 악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이토록 이웃을 미워하는 자들을 모두 살인자로 간주하시는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이 사실은 우리가 모든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여 우리의 악의(malice) 위로 해가 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경고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사탄에게 우리를 차지할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형제들아, 사탄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합니다(4:26,27).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에게 기회를 줍니까? 그분은 우리의 분노 위로 해가 지도록 내버려 둠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안에 어떤 앙금을 키우고 마음속에 원한을 증폭시킨다면, 비록 처음에는 그것을 깨닫지 못할지라도, 결국에는 너무나 저주스러운 감정에 사로잡혀 나중에는 그것을 극복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원한이 그토록 악한 일을 낳는 것을 볼 때, 각 사람은 스스로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불쾌한 일이 닥쳐서 사람의 관점에서는 보복할 정당한 명분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가 어떤 악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될 때에는 그 모든 일을 제쳐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완악해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억제하기 위해 간절히 싸워야 합니다. 마귀가 우리 안에서 그렇게 역사하여 우리가 오늘 품은 원한이 내일 우리로 하여금 살인하고 죽이도록 준비시키고, 그리하여 독이 든 마음이 손을 사로잡아 끌고 가지 않도록 두려워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이것은 참으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올바르게 심리하기 위해서 단순히 우리의 손이나 발, , 그리고 귀로 행한 일들만 살펴보아서는 안 되며, 반드시 내면으로 들어가 우리의 생각과 악한 욕망, 그리고 우리를 유혹하고 부추기는 모든 것들을 뒤져보아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곳에 우리 죄에 대한 올바른 심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실제 행동으로 살인이나 도둑질, 혹은 음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려 할지라도, 그의 마음이 악한 정욕으로 물들어 있다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에게 무죄를 선언하려는 노력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범죄와 잘못에 대해 우리 자신을 합당하게 조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양심 속으로 들어가야 함을 마음에 새깁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악한 정욕뿐만 아니라, 우리를 부추기고 악으로 이끌었던 생각들까지도 정죄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것 또한 하나님 앞에서 이미 지옥에 떨어질 만한 치명적인 죄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처럼 그 사람이 이전에 그의 이웃을 미워했는지 안 했는지 조사해야 한다는 이 본문에서 우리가 어떤 가르침을 받는지 여러분은 보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전에 지나간 시간이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실 히브리어 본문에는 어제나 그저께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지나간 모든 과거의 시간을 나타내는 그들의 일상적인 관용 표현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이 당장 눈앞에 드러난 행위만을 보아서는 안 되며, 더 나아가 이전에 어떤 악이 잠복해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함을 밝히고자 하셨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여러 정황을 내세우고 당장 그 자리에서 잘못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이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하루 만에는 찾아낼 수 없는 일도 한 달이면 밝혀질 수 있고, 한 달 만에는 찾아낼 수 없는 일도 일 년이면 밝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러한 일이 세상의 재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면, 우리 각자 역시 우리 자신을 향해 이와 같이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잘못을 숙고하기 시작할 때, 현재 일어난 일들만 바라보지 말고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니다. “어찌하여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것은 내가 내 안에서 이 악덕을 오랫동안 키워왔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그것을 잘라내어 버렸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이토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떠했는가? 나는 내 악행 속에서 스스로를 두둔했고, 이 저주받은 씨앗이 내 마음에 뿌리를 내리도록 방치했으며, 그것을 억누르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고의로 하나님을 시험하려 했던 것처럼 보일 만도 하다. 그러므로 내가 이토록 참혹하게 넘어지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며, 나 자신이 바로 그 원인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잘못에 대해 이와 같은 심리를 해야 하며, 단지 현재 저지른 행위 때문에만 스스로를 정죄할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니다. “, 슬프도다! 만약 내가 사탄을 대적하여 무장했더라면, 혹은 내가 오랫동안 그에게 길을 열어주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가 나를 속일 수 있는 방도를 내 스스로 만들어주지 않았더라면,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내 자신의 게으름이 문제였고, 그 때문에 내가 처음부터 맞서 싸웠어야 할 이 악한 정욕에 내 자신을 내어주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올바르게 심리하고자 할 때, 또다시 무엇을 주목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곳에서 언급된 당사자들 사이에 이전에 원한 관계가 있었는지 조사해야 한다는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가 어떤 교리를 얻어야 하는지 여러분은 보게 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러한 사람에게는 죽음의 심판이 내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내가 이미 언급한 사실을 더 잘 증명하는 데 쓰입니다. ,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목적이나 의도, 혹은 의지로 인해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면, 그는 범죄자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무죄를 선언하셨으니, 인간이나 그 어떤 피조물도 그를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실은 내가 맡아 강해하고자 하는 교리를 더욱 확고히 해줄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잘못이란 자발적인 것이라는 점을 잘 인정해 왔습니다. 이방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 글을 쓸 때에도 그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말했습니다. “법은 일의 결과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의 의도를 처벌한다.” 또한 철학자들이 이에 대해 글을 쓸 때에도, 의지에서 비롯되지 않은 미덕이나 악덕은 없다고 능히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눈을 속이고 있으며, 우리의 손이 피로 물들지 않았거나, 세상에 명백한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거나, 요약하자면 우리가 어떤 악행을 저지른 사실이 입증되지 않는 한, 스스로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죄가 의지에서 비롯된다는 나의 이전 언급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철저히 심리하고자 할 때에는 우리의 의지로부터 시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 자신 안에서 악한 행위, 즉 악의나 악한 의지를 찾을 수 없다면 그것은 범죄가 아닙니다. 내가 악한 감정은 자발적인 것이라고 말할 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행하는 조사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잘못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누신 데에는 다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 한 종류는 범죄(crimes)”라 불리고, 다른 종류는 부지불식간의 죄(ignorances)”라 불립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비록 그릇된 일을 행할 의도나 뜻이 없었을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의롭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의 뜻은 우리 안에 악한 감정이나 욕망이 없어서 우리가 어떤 의지로도 그것에 마음을 두지 않았고, 사건 전체가 뒤따라온 불행한 사고에 기인해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나는 일상적인 대화의 관습을 따라 그것을 불행한 사고(mischance)”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섭리로 돌려야 하며, 그 어떤 것도 운명(fortune)을 통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이 우리 편에서 일어날 때, 그것이 우연이나 운명에 의해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 사이의 흔한 화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이전에 아무런 원한도 품지 않은 채 자신의 이웃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사람에게는 죽음의 심판이 내려지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신 데서, 우리가 실질적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 만약 그의 타격이 미리 품은 목적이나 의지적 의도 없이 행해진 것이라면 그는 무죄 방면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서로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것을 얼마나 금하고자 하셨는지, 그리고 더 큰 폐단을 피하기 위해 무죄한 자가 얼마 동안 길을 떠나 피신해 있도록 하실 만큼 우리의 불완전함을 얼마나 깊이 용납해 주셨는지를 몇 마디 말 속에서 보게 됩니다. 내가 이전에 밝힌 바와 같이, 그분의 의도가 우리가 살인을 얼마나 크게 혐오해야 하는지 보여주려는 데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화평과 화목을 유지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선하심을 잘 주목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대로 살았다면, 우리 사이에는 오직 하나의 공동체적인 연대만이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서로 떨어져 분리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각 사람이 홀로 물러나고, 각자가 자기 재물을 따로 소유하며, 각자가 자기 유업을 분할하고, 각자가 저마다의 소유권을 홀로 가지게 되는데, 이는 바로 우리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법이 일반적인 원칙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용납하고 계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다른 많은 방도들이 존재합니다.

두 형제가 다툼과 불화 없이 평화롭게 함께 살지 못하고,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 사이마저도 그와 같은 지경에 이르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일이 아닙니까? 이것들은 부끄러운 일이며 온전히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토록 가깝고도 거룩한 끈으로 묶여 있는 자들마저도 우정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우리가 들짐승보다 더 악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인간의 악덕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더 큰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때로는 마땅히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당사자들이 도리어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이 본문에서 그와 똑같은 처방을 사용하십니다. 그분은 사람이 자신의 집과 유업을 버려두고 낯선 곳으로 가기를 원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자기 이웃을 향한 사랑 때문에 분노에 휩싸인 자가 더 악한 일을 저지를 기회를 얻지 않도록, 또한 그 사람을 눈앞에서 직접 봄으로써 자극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것을 볼 때, 우리의 악덕 속에서도 우리를 용납하시고 우리가 무작위로 날뛰지 않도록 합당한 방도를 찾아내시며, 더 나아가 친히 본을 보이시어 악의 모든 원인을 미리 방지하거나 잘라내라고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짧게나마 주목합시다. 그분의 선하심은 아버지의 사랑보다 더 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극도로 경계해야 합니다. 마귀는 언제나 깨어 지켜보고 있으며, 우리가 악을 행할 아주 작은 기회라도 허용한다면 즉시 우리를 걸어 넘어뜨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굴레를 단단히 씌우고 깊이 생각하며 우리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니다. “, 만일 내가 그러한 일을 저지른다면, 나는 그러한 악에 유혹될 수 있으니, 내 자신을 그로부터 지키기 위해 힘써야 하겠구나. 왜냐하면 마귀는 나보다 훨씬 더 교활하여 내가 일단 그의 그물에 걸려들고 나면 내 처지가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악의 모든 원인을 어떻게 잘라내야 하는지 보여주시며, 만일 우리를 어떤 악으로 이끌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미리 피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은 교훈을 들려주셨으니, 우리는 우리의 온 삶을 타락시키고 더럽히며, 우리 자신을 온갖 무질서 속에 완전히 내던지게 만드는 모든 악한 행위들을 삼갈 뿐만 아니라, 간접적인 방식으로라도 우리를 악으로 이끌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멀리하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이 지닌 위엄 앞에 다 함께 무릎을 꿇고 우리의 잘못을 자복합시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과오를 더욱더 깊이 느끼게 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가 자신의 죄를 스스로 되새겨 자기 자신의 재판관이 되고 스스로를 정죄하는 법을 배우게 하사, 하늘의 재판장으로부터 용서를 얻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그분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가 그분 앞에서 죄인이 되게 만든 우리의 모든 허물을 묻어주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죄를 매일매일 더욱더 면밀히 심리하여, 죄에 대하여는 죽고, 우리를 자신의 말씀으로 부르시는 그분의 의로우심에는 매일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옵소서. 이와 같은 은혜를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이 땅 위의 모든 백성과 나라들에게도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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