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회 설교: 18장 첫 번째 설교
1555년 11월 22일 금요일
신 18:1-8 “레위 사람 제사장과 레위의 온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 분깃도 없고 기업도 없을지니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물과 그 기업을 먹을 것이라 그들이 그들의 형제 중에서 기업을 가지지 않을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니 그들에게 말씀하심 같으니라 제사장이 백성에게서 받을 몫은 이러하니 곧 그 드리는 제물의 소나 양이나 그 앞다리와 두 볼과 위라 이것을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또 네가 처음 거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네가 처음 깎은 양털을 네가 그에게 줄 것이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택하여 내시고 그와 그의 자손에게 항상 여호와의 이름으로 서서 섬기게 하셨음이니라 이스라엘 온 땅 어떤 성읍에든지 거주하는 레위인이 간절한 소원이 있어 그가 사는 곳을 떠날지라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 이르면 여호와 앞에 선 그의 모든 형제 레위인과 같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섬길 수 있나니 그 사람의 몫은 그들과 같을 것이요 그가 조상의 것을 판 것은 별도의 소유이니라”
하나님이 제사장들과 레위의 모든 지파에게 남겨두신 권리에 대한 언급이 이전에 있었고(신 12:19; 14:22), 하나님께서 여기에서 그것에 대한 언급을 다시 하시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제사장들이 그들의 본분을 기억하는 것, 즉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그 존귀함을 앎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더욱 신실하고 기쁘게 스스로를 바치는 것이 매우 필요했기 때문이며, 또한 나머지 지파들이, 하나님께서 레위의 아들들을 택하시기를 기뻐하셨으니, 그 존엄함이 그들에게 머물러야 마땅하며, 그 누구도 그것 때문에 그들에게 어떤 원망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참으로 우리는 그들에게 대항하여 일어난 자들이 어떻게 있었는지를 보며, 하나님께서는 친히 세우신 그 제사장 직분을 보증하시기 위해 기적을 행하셔야만 했으니, 곧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고 꽃이 피게 하신 것이며, 그것을 영원한 기념물로 보관하라고 그가 명하셨습니다(민 16:1; 17:5,8). 다른 이들에게는 모세가 그들이 자기 자신의 친족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그들을 높이고자 한 것처럼 보였으니, 왜냐하면 그 자신도 레위 지파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동일한 지파 안에 제사장 직분을 규정했기 때문에, 그들은 모세가 전적으로 육신적인 애정에 따라 그것을 행했다고 생각하여 그것에 대해 투덜거렸으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그것의 창시자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만약 반역을 일으킨 자들이 큰 악의에 사로잡히지 않고 선량했다면, 정녕 의심할 원인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에게는 그 자신의 자녀들이 있었음에도, 그는 그들 중 누구도 제사장들의 존귀한 지위에 두지 않았고, 도리어 그 자녀들로부터 그것을 멀리 치우고 그들을 가장 낮은 자리에 두어, 마치 그들이 지파 내에서 아무런 존중도 받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세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이익을 고려했다면, 정녕 그는 자신의 집안을 우선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반대로 자신의 자녀들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었으며 그들을 억제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복종하였고 자신의 머리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그가 레위 지파에게 제사장 직분을 주면서, 그들의 나머지 형제들 가운데서 그들에게 배정되었던 기업을 그들에게서 박탈하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그 땅은 나중에 그것이 분할된 그 열두 지파에게만 약속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의 주이자 주인으로 삼으신 그 당시에, 레위도 그 땅의 상속자가 될 자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가 그것에서 제외되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가 하나님의 법도를 따랐으며 자신의 머리로 어떤 것도 발명하지 않았음을 봅니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레위인들에게 그들이 나머지 지파들 사이에 이처럼 흩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형벌이었다고 말하기 때문인데(창 49:6,7), 비록 그것이 나중에 은혜로 바뀌었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하심으로 그가 레위에게 두셨던 그 저주를 씻어내셨을지라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본래의 근거에 눈을 돌린다면, 그것에 대해 야곱이 레위와 시므온이 악했다고 선언하면서, 그가 생각으로나 말로나 결코 그들과 짝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파멸에 처하지 않게 된 것이 그들 덕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덧붙이기를, “너는 널리 흩어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나머지 모든 자들은 그들에게 배정된 자신들의 기업을 가졌으나, 너는 네 형제들 가운데서 방랑자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자신의 온 지파를 향해 이토록 가혹하고 치욕적인 선언을 발하는 것을 볼 때, 그가 그 지파를 향해 편파적이고자 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온전히 그 반대임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영에 인도된 사람으로서, 그는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영원히 부끄럽게 만들었으며, 만약 그들이 어떤 존귀함이나 존엄함을 가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로부터 오는 것으로 인정되기를 원했고, 앞서 말한 치욕이,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하심으로 그것을 치료하지 않으셨다면, 레위가 자신의 기업을 온전히 빼앗겨 마땅했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나 그의 사람들에게 어떤 시기를 품을 원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악의가 그러하여, 사람들은 모든 것에 대해 투덜거리고 불평할 구실을 잡으며, 그것은 사탄이 주로 획책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때에 아무도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가고자 하지 않으나, 더 낮은 지위에 있는 모든 자들은 괴팍하여 의무는 없이 우월함만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의 말씀을 전파함으로써 하나님의 봉사에 스스로를 바치고자 하거나, 혹은 “내가 나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노라”라고 말하듯이 바른 뜻을 가진 애정으로 그것을 구하는 자를 당신은 얼마나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영으로 그들을 두려움 속에 붙잡아두지 않으신다면, 모든 자들이 일종의 자기만족에 이끌리며, 이러한 측면에서 이 교훈은 모든 사람이 오직 주님의 성전 뜰에만 있는 것으로 만족하게 하려는 의도로 그들에게 주어집니다(시 65:4). 그리하여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도, 의무가 없다면 모든 사람이 마음속으로 높아지기를 바란다는 것을 봅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정녕 그러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머지 지파들은 자신들의 몫을 가졌고 자신들의 집에서 평안히 지냈음에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향해 투덜거리기를 그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제사장 직분을 그러한 방식으로 권위 있게 하셔야만 했으니, 그것이 모든 비방으로부터 면제되고 그 어떤 사람도 그 안에서 어떤 것도 제멋대로 바꾸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교리를 다시 반복하신 이유를 봅니다.
이제 제사장 직분을 세습되게 하는 것은 무질서한 처사처럼 보일 수 있었으니, 왜냐하면 가장 적합한 자가 선출되었어야 했기 때문이며,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식으로 한 친족을 택하여 그 자녀들이 어떠한 자들이든 간에 자신들의 아버지를 승계하게 하셨단 말입니까? 이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에 좋은 질서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반대들에 맞서 자신의 권위를 방패처럼 세우셔야만 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왜, 혹은 어떤 고려로 레위 지파를 자신의 봉사를 위해 택하셨는지 캐묻는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행하셨다는 사실이 우리를 만족시켜야 하며(시 33:4), 비록 그것의 이유가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좋게 여겨야 마땅합니다. 그는 그 까닭을 아시며, 그것이 우리에게 충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지파를 [자신의 성소에서 그를 섬기도록] 규정하셨을 때, 그들의 직분을 수행하는 데 요구되는 그러한 은혜의 은사들을 그들에게 부여하실 수 있으셨음을 우리는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유능하게 만드실 방도를 충분히 가지고 계시는데, 우리가 왜 혹은 무슨 까닭으로 그가 다른 사람보다 도리어 한 사람을 택하시는지 따지기 시작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이 그를 기쁘게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이유로 사람은 왜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보다 한 사람에게 자신의 영을 더 주시는지 질문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한 사람은 미련하여 배움이나 그 외에 어떤 뛰어난 은사도 그에게 없는 것을 볼 것이며, 또 다른 사람은 큰 탁월함을 부여받은 것을 볼 것이니, 이것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며, 그 위에 우리는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것에 대해 투덜거리는 자는, 자신이 결국 너무나 크신 주인과 상대해야 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지파를 택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충분해야 마땅합니다. 상황이 어떠할지라도, 그는 여기에서 모든 유대인들의 입을 막고, 그가 세워두신 그 질서를 거룩하고 침해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들이 지켜야 마땅함을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을 한 가지 요점으로 주목하십시오.
이와 함께 (내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자신들의 봉사를 행하는 데 더욱 부지런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자신들의 본분을 기억나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이 게으른 자들처럼 살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상치되는 일이었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확립하신 그 질서를 더럽히는 일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이유 모두를 눈여겨보신 것이며, 우리 역시 우리의 편에서 그것들을 주목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직무나 직책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자신들을 그 자리에 세우신 이가 누구이며, 무슨 목적으로 그리하셨는지를 끊임없이 마음에 품고,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는 그것이 그들을 갈고닦거나 날카롭게 하는 자극제가 되어, 그들이 자신들의 직무에서 무익하게 되지 않고, 오히려 그 직무에 신실하게 전념하여, 그리함으로써 하나님께 그것에 대한 회계를 보고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 가지 요점으로 삼으십시오.
또한, 우리는 우리를 세워두신 그 자리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다른 사람이 우리보다 앞서가는 것을 볼 때 우리 중 누구도 슬퍼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몸의 모든 지체가 눈과 귀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며, 모두가 위에 있을 수는 없고, 눈과 손뿐만 아니라 다리와 발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고전 12:19).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고 우리 각자가 복종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백성의 무리 안으로 받아들이시기를 기뻐하사, 그의 성전에 작은 구석이라도 주셔서 우리가 그의 교회 안에 통합되게 하신 것으로 우리에게 충분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존귀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곳에 두기를 기뻐하셨으니, 우리는 더 이상을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들이 우리가 이 본문에서 기억하여 그 교리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야 할 일들입니다.
더 나아가 기록되기를,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그 온 지파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분깃이나 기업을 얻지 못할 것이요, 그들은 그들의 기업으로 희생제물들을 먹을 것이라. 그리고 주님이 그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친히 그들의 기업이 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모세는 한편으로 자신의 형제들과 친족들에게서 모든 기업을 박탈합니다. 이 안에서 우리는 레위가 흩어질 것이며, 그가 어떤 정해진 장소에 아무런 거처나 머무를 곳을 가지지 못하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선언이 실행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레위의 자녀들은 마치 조각조각 찢겨진 몸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형벌을 영예로 바꾸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타나는데, 왜냐하면 우리의 정죄가 되었어야 할 일들을 도리어 우리의 유익과 구원으로 되돌아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람들을 향해 이처럼 일하십니다. 그리하여 비록 그들의 죄 때문에 그들을 벌하실지라도, 그 일들을 그들의 수치가 되었어야 할 목적과는 반대되는 목적으로 바꾸심으로써 그들이 그와 함께 자신의 선하심을 느끼게 하십니다.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레위의 모든 후손들에게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기업이 되신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것은 다른 모든 것들 위에 있는 존귀의 명칭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다른 모든 자녀들은 가나안 땅에 자신들의 몫을 가졌으나, 하나님께서는 레위를 위해 자신을 남겨두시며 말씀하시기를, “나를 붙잡으라, 내가 너의 기업이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왕국이 이미 하나님에 의해 배정되었던 특권을 가진 유다 지파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몫이 다른 모든 지파보다 어떻게 더 나았는지를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서 왔습니까? 만약 당신들이 그 기원에 눈을 돌린다면, 레위의 죄가 그를 추방당해 마땅하게 만들어 그가 아무런 정해진 거처도 없이 방랑자처럼 되었을 수도 있었음을 볼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안을 그렇게 예비하사 악을 선으로 바꾸시고 치욕을 존귀로 바꾸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를 벌하실 때, 낙심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하며, 그러면서도 우리의 잘못과 허물을 스스로 부끄러워하여,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그의 징계가 우리에게 유익이 되게 하실 것과 그리하여 우리가 그와 그의 천사들 앞에서 더욱 존귀하게 될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 앞에서 얼마간의 수치와 치욕을 잠시 견뎌야 할지라도, 신실한 자들이 하나님의 손에 맞았을 때 좋은 위로로 삼아야 할 바는 오직 자신들의 현재의 고난만을 바라봄으로써 스스로를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결과와 종국을 생각하는 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쓴맛을 단맛으로 바꾸신다는 점입니다.
더 나아가, 레위인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 되신다고 일컬어진 것은, 그들이 더욱 기쁜 마음으로 온전히 하나님의 봉사에 스스로를 바치게 하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이 농업이나 상업의 매매, 그리고 그와 같은 다른 일들에 분주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직무로부터 돌아서게 되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신 일을 행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예루살렘에 있는 자들은 성전에서 봉사하고, 지방에 널리 흩어진 자들은 종교를 순수하게 유지하며, 백성들이 무질서하게 자라나지 않도록 붙잡고, 각자의 자리에서 그들을 가르쳐, 그들이 모든 순결함 속에 보존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말 2:7). 왜냐하면 그러한 조건 위에서 그들이 택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인 없이 하나님께서 자신이 레위인들의 기업과 분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니, 이는 하나님의 봉사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다른 데로 끌려가지 않고, 자신들의 본분을 온전히 이행하는 데서 물러설 핑계를 가지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참으로 사도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들에게 적용하여 말하기를, 만약 모세의 법에 의해 제단에서 봉사하는 자들이 제단에 의해 부양을 받았다면,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영적인 희생제물을 올려드리는 직무를 맡은 자들 역시 마땅히 부양을 받고 유지되어야 하며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고전 9:13,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레위인으로 삼으시는 존귀를 행하셨음을 배워야 하니,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회복시키실 때에 이전에는 레위인이었던 자들이 그때에는 제사장이 될 것이요, 모든 평범한 백성들은 레위인이 될 것이라 하신 이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사 66:21). 그리고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셨으니, 이전에 이방인이었고 하나님과 아무런 면식이 전혀 없었던 우리가 이제는 아브라함의 자녀들의 몸에 속하기 위해 교회 안으로 들어왔으며, 약속의 상속자들이었던 그들과 다름없이 좋은 처지에 있게 되었습니다(엡 2:13). 그리하여 우리는 레위인이 되었으니,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그의 독생자의 이름 안에서 그분께 친밀하게 나아갈 길을 얻어, 그리하여 우리가 담대히 그분을 우리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히 10:19,20). 그리고 바로 동일한 측면에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 부르는데(벧전 2:9), 왜냐하면 우리가 이전에는 뒤로 물러가 있었고, 어떻게 하나님께 도달해야 할지 알지 못했으며, 우리를 그분께로 데려다줄 그 어떤 방도도 가지지 못했으나, 이제는 그가 우리를 자신에게로 부르시되, 참으로 마치 우리가 제사장인 것처럼 하시기 때문이며, 이는 염소나 양이나 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물질적인 성소로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께 봉헌하고 우리를 모든 부정함으로부터 씻기 위해 흘려진 그 피를 가지고 들어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하늘의 성소로 들어가 하나님 면전에 우리 자신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 되신다고 일컬어진 이 교리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합시다. 이 세상에서 재물과 소유를 가진 자들이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나, 다만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제7장에서 규정해 둔 그 조건, 즉 소유를 가진 자는 없는 자같이 하고, 언제나 한쪽 발을 들어 올린 채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매여 아래의 진흙 속에 단단히 박혀 있지 말아야 하며, 도리어 우리 자신이 이 세상에서 오직 나그네일 뿐임을 기억하고, 그리하여 언제나 하늘의 안식처를 위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조건 위에서 그러합니다(고전 7:30).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잘 소유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우리는 참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며, 이곳에 머무르거나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제사장이 되게 하시는 그러한 존엄함으로 높이셨으니, 우리는 그의 제단으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으니, 이는 그가 우리를 그의 아버지 하나님께 봉헌하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정이 그러하니, 우리는 시편 제16편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행합시다(시 16:5). 왜냐하면 오직 레위인들에게만 하나님이 그들의 분깃이라고 일컬어졌음에도,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분깃이 되셨기 때문에 자신에게 아름다운 분깃이 있다고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그가 말하기를, “내게 아름다운 구역(몫)이 있으니, 이제부터 나는 마치 내게 무언가 부족한 것처럼 불평할 원인이 없도다. 왜냐하면 나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내게 주셨고, 그가 나의 분깃이 되셨으며, 내가 그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레위 지파 출신이 아니었는데, 그렇다면 그가 제사장들만큼 소유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랑하는 것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한동안 그 지파를 남겨두신 것이 그러한 방식이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온 백성으로 하여금 동일한 복에 동참하게 하려 하셨음을 잘 알았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너희가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 하신 말씀과도 일치합니다(출 19:6). 그리고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다른 방식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기를,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 하였으니, 즉 말하자면 너희는 모두 마치 일종의 작은 왕들과 같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며 그것이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기 때문이고, 그가 너희에게 너희를 모든 온전함 속으로 인도할 구속주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은 이 왕국이 세상의 다른 왕국들과 같지 않고 제사장 직분과 짝을 이루고 있음을, 즉 말하자면 그것이 하나님께 성별되고 봉헌되어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것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분깃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만약 이것이 모형의 시대에 일컬어졌다면, 오늘날 우리는 훨씬 더 그렇게 해야 마땅하니, 왜냐하면 앞서 인용된 예언이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지체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우리가 이전처럼 더 이상 뒤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접해 주실 것과 우리가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게 될 것이라는 확신에 찬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당신들은 주님이 그들의 분깃이 되셨다고, 참으로 그가 그들에게 약속하신 바, 그대로라고 일컬어진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가 어떻게 유익을 얻어야 마땅한지를 봅니다.
그리고 레위가 자기 자신의 가치나 공로를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이것뿐이었으니, 곧 나는 기업을 빼앗겨 마땅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나의 존귀함으로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 되심을 확신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수고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오직 극심한 혼란밖에 없기 때문이며, 도리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삼으실 만큼, 참으로 정죄 받아 마땅한 우리를 이토록 귀하게 여겨주신 일에 대해 우리에게 주신 그 약속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여기에서 모세가 말하는 그 특권과 헤아릴 수 없는 유익을 누리기 위해 기반을 두어야 마땅한 바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우리에게 아무런 고려도 두지 않은 채, 우리를 그 약속으로 돌려보낸다는 점을 잘 주목하십시오, 이는 우리 자신의 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우리가 그 유익에 대하여 오직 우리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하심에 빚지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이제 결론적으로 백성들 역시 제사장들을 향해 자신들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니(그가 말하기를), 제사장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자신들의 권리를 얻게 하라는 것인데, 곧 모든 희생제물의 오른쪽 넓적다리와 두 볼과 위(胃)라, 이것들을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첫 열매들과 또한 너희 양들의 털과 함께 그들을 위해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제사장들을 부양하라고 명시적으로 명령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거기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며, 그 안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봉사를 크게 귀하게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성전에서 봉사할 사람들이 있어야만 했고, 만약 그들이 부양받지 못한다면, 종교는 마치 폐지되는 것과 같았을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그 일에 힘쓰라고 명령하신 것은 이유 없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권고를 받지 않고서도 마땅히 잘 행했어야 했다는 것은 사실이나, 우리는 세상의 배은망덕함을 보는데, 하나님을 향해 어떤 본분을 행해야 할 때에 그들은 앞으로 박차를 가해져야만 하며, 재촉 받지 않는 한 결코 자발적으로 그 일에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유대인들 사이에서 그러했다면, 우리 사이에서는 훨씬 더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게을러서 하나님을 향해 결코 우리 자신을 다하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우리는 요구를 받고 준비되어야만 합니다. 이 부패함이 우리 안에 있음을 우리가 아는바, 우리 각자가 스스로를 일깨우고 앞으로 박차를 가합시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를 따르며 그가 자신의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고하시는 바를 효력 있게 만듭시다. 그것이 우리가 이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바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여기에서 일컬어진 바를 주목해야 하니, 곧 “만약 레위인들 중 누구라도 주님께서 경배 받으시기 위해 택하실 그곳으로 기꺼이 오고자 한다면, 그는 자신의 고향 집에서 얻는 것 외에도, 그들의 형제 중 한 사람으로서 성전의 모든 봉헌물 중 자신의 몫과 분깃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이 시골에 조상들로부터 물려 받은 집들을 가지고 있었다면 (과연 사방에 그들에게 배정된 성읍들이 있었듯이), 그들은 그것들을 자신들을 위해 보관해야 했고, 그러면서도 그들이 성전에서 봉사하는 동안에는 그곳에서 드려지는 봉헌물 중 자신들의 몫을 얻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명시적으로 “그의 마음의 간절한 소원”을 말씀하시니, 이는 하나님께서 여기에서 오직 자신들의 안락과 편의만을 구하는 자들에게 게으름의 구실을 주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바른 뜻을 가진 마음으로 그를 섬기러 온 자들에 대해 말씀하시고자 했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내가 이전에 당신들에게 말하기를, 레위의 자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상속할 정해진 분깃이 없었고, 다만 가나안 땅 전역에 걸쳐 이리저리 흩어져서 한 사람은 이곳에 다른 사람은 저곳에 정해진 성읍들을 가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일컬어지기를, 만약 그들 중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군가가 온전히 하나님의 봉사에 스스로를 바치고자 하는 경건한 열망을 가진다면, 그는 그렇게 할 수 있으니, 곧 자신이 거하던 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곳에서 온전히 하나님의 봉사에 스스로를 바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백성들을 끊임없이 종교의 순수함 속에 붙잡아두기 위해 레위인들이 씨앗처럼 사방으로 흩어져야 한다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었으며, 오직 그들 중 일부의 사람들을 고려하여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소망하지는 않았음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레위인들의 대부분은 예루살렘보다 더 비옥한 곳들에 거했으니, 그 지방은 가나안의 온 땅 중에서 결코 가장 좋은 곳 중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목초지 지방에 거하던 자들이 가장 부유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선지자들이 그들을 어떻게 꾸짖는지를 보나니, 이르기를 “너희 바산의 암소들아” 하였으니, 왜냐하면 이스라엘 왕국이 자신들의 풍요함으로 인해 매우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암 4:1). 그렇다면 레위인들은 매우 비옥하지는 않은 장소에 머물며 자신들의 모든 편의와 집들을 버려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만약 누군가가 헛된 영광의 욕망에 이끌렸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납하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일컬어지기를, 만약 그들 중 누군가가 선한 뜻으로 성전에서 봉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고자 한다면 그는 거절당하지 않을 것인데, 다만 그의 의도가 하나님의 봉사에 스스로를 바치려는 것임이 나타나고, 그가 선한 용기를 가지고 그 일을 행할 때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실상 여기에서 하나님의 의도가, 백성들을 가르치는 자신들의 일반적인 본분 외에도 끊임없이 희생제물 곁에 있기를 갈망하는 그러한 자들에게 탁월한 지위를 주고자 하신 것이었음을 봅니다. 그것이 한 가지 요점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온전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우리는 성전의 봉사가 오직 희생제물을 올려드리는 것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침과 저녁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노래하고 공적인 기도를 드리며, 참으로 밤에도 파수를 보는 것에 있었음을 고려해야 하는데, 그리하여 그 직무를 수행하는 데는 얼마간의 고됨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시편에 기록되기를, “주님을 송축하라 그를 섬기는 자들아, 참으로 그의 집 곧 성전에서 밤에 파수를 보는 자들아” 하였습니다(시 34:1). 레위인들이 자신들의 반열과 차례에 따라 아침부터 밤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백성들의 이름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는 것에 분주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밤새도록 견뎌야만 했으니, 한 부류의 사람들이 하루 종일 하나님의 찬양을 노래하는 데 분주했을 때, 그들이 다음 날 아침 백성들이 함께 모일 때 다른 이들에게 길을 보여주기 위해 그곳에 참석해야 하는 것이 그들 사이의 정해진 질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의 명령에 따라 엄숙한 희생제물이 드려져야 할 때 레위인들은 언제나 참석해 있었습니다. 요약하자면, 성전은 결코 비어 있지 않았으며, 그들은 등불을 유지하고 그와 같은 다른 일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제단 위의 불을 지키기 위해서도 밤을 새워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그러한 방식으로 예루살렘에 온 자들에게 어떤 특권을 허락하기를 기뻐하셨는지 그 까닭을 봅니다.
그리고 이로써 첫째로 우리는 레위인들의 직무가 이중적이었음을 이해하게 되는데, 곧 한편으로 그들은 백성들을 가르치고 율법의 수호자이자 유지자가 되어, 사람들이 어떤 미신으로도 돌아서지 않고, 선한 보살핌의 부족으로 인해 이교도처럼 되어 하나님의 봉사를 멸시하는 데 이르지 않게 하며, 도리어 그가 무슨 목적으로 자신들을 세상에 붙잡아두셨는지를 언제나 마음에 품고 자신들의 온 삶을 그를 영화롭게 하는 일로 돌리게 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레위인들의 직무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사람들에게 의식(儀式)들의 의미를 가르쳐야 했으니, 곧 희생제물들이 모든 사람이 저주를 받았고 사형에 처해졌다는 것과 그들이 희생제물 없이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참으로 눈앞의 광경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히 10:4; 11:12). 그리고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화목을 이룰 만큼 충분한 희생제물은 아무것도 없었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올려드리신 것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레위인들의 본분이 어떻게 백성들을 가르쳐 그 의식들이 구속주에 관하여 자신들에게 주어졌던 그 약속으로 그들을 인도하게 하는 것이었는지를 봅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레위인들은 더 나아가 하나님께 기도해야만 했고, 대제사장은 온 백성의 이름으로 성막 안으로 들어가야 했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가치가 없으며, 오직 자신들보다 앞서가서 그들의 처지에서 마치 하나님의 면전 안으로 들어갈 중보자의 방도를 통해서만 그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행해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에서 봉사한 레위인들은 시골에 널리 흩어져 있던 자들보다 더 고된 직무를 가졌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들이 성전에서 드려진 모든 희생제물과 봉헌물 중에서 자신들의 몫을 취하는 앞서 말한 유익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의식들을 귀하게 여기신 것이 이유 없는 일이 아니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레위인들에게 이 특권을 허락하심으로써, 그는 자신이 그 의식들을 좋게 여기시며, 그것들이 지켜지기를 원하신다는 것과, 이와 함께 그것들을 굳건히 하기 위한 방도들이 유지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나, 그것은 하나님 자신을 고려해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짐승의 피를 자신에게 바치라고 요구하셨단 말인가? 왜인가?’ 그것은 악취일 뿐입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오직 더러움과 악취만을 일으킬 수 있는 그 기름을 불태우라고 요구하셨단 말인가?’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가 그러한 외적인 일들 속에서 취하신 어떤 기쁨 때문이 아니라, 백성들의 구원과 유익을 위하여, 그들을 약속된 구속주에 대한 끊임없는 소망 속에 붙잡아두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기도와 그들의 찬양과 그 외에 모든 행위들은 신실한 자들을 길들이는 역할을 하여, 그들이 더 좋은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집에서, 자신의 방에서, 자신의 침상에서, 그리고 자신의 식탁에서 각자 스스로 기도하라고 명령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럼에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연약함과 냉랭함을 알아차리사, 우리가 함께 모여 한마음으로 그를 부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그렇게 행해졌습니다. 그곳에는 시편을 노래하는 것이 있었고, 온 백성의 이름으로 감사를 드리는 것이 있었으며, 기도와 그와 같은 다른 일들이 있었고, 마지막으로 향료으로 분향하는 것이 있었으니, 이는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좋은 향기의 희생제물이며, 향료의 연기처럼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백성들을 하나님의 봉사에 더 잘 길들이기 위하여, 그리고 그들이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을 따라 자신들을 빚어가게 하기 위하여 행해졌습니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오직 그 한 지파만을 편애하여 행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온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그러한 질서를 세우셨음을 봅니다. 왜냐하면 만약 제사장 직분이 중단되고 성전의 질서가 폐지되었다면, 백성들은 어떠한 지경에 처했겠습니까? 모든 것이 파멸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그들이 포로로 사로잡혀 가고 성전이 허물어졌을 때, 그들이 마치 버림받은 백성처럼 되어 이전처럼 하나님께 찬양하기 위해 자신들의 입을 열 수 없었음을 봅니다. 사정이 그러하니, 우리 주님의 의도가 그 한 지파만을 편애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의 온 교회의 유익과 구원을 이루려 하신 것이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시 137:4). 이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교회의 질서에 대한 언급이 있을 때에도, 그것은 어떤 적은 수의 사람들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크고 작은 자들을 모두 자신에게로 이끄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딤전 2:4). 그리고 그가 공적인 기도와 성례의 집행을 규정하신 것은, 그것들이 없다면, 우리의 구원이 서 있을 수 없고 모든 것이 망가지며, 그의 은혜가 일종의 사라짐 속으로 가버릴 것임을 그가 아시기 때문임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의식들에 관하여, 그의 말씀에 의지하는 것에 관하여, 그리고 신실한 자들의 무리 가운데서 그분을 부르기 위해 어떤 정해진 장소에 함께 모이는 것에 관하여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일들을 행하는 데 우리가 더욱 좋은 용기를 가지게 해 주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복리를 위해 이 일들을 규정하셨음을 고려하여,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물러서지 말아야 하며, 우리 각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그것들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의 이름 안에서, 주님의 면전에서 먼저 와 있는 자신들의 형제들과 함께 봉사하기 위해 그곳에 있을 것이라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주님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나타내 보이시는 바와 같은 하나님의 위엄 외에 다른 아무것도 뜻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성전 안에 갇혀 계시다는 것과 같이 이토록 조잡하고 짐승 같은 상상을 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며, 도리어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두셨음을, 즉 그가 확실한 징표들을 주신 대로 그곳에서 자신의 위엄이 알려지게 하려 하셨음을 그들이 언제나 마음에 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성소와 제단들(온전한 번제물이 희생되던 제단뿐만 아니라, 진설병이 놓이고 향품이 불태워지던 다른 제단들 모두)과 그곳의 그 외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의 간구를 가납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보증의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성전에 머무는 자들이 하나님의 이름과 위엄을 섬긴다고 명시적으로 일컬어진 까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언급 역시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이루어지니, 이는 그가 이전에 가르치셨던 일들을 확증하는 것으로서, 백성들이 그곳에서 하나님을 부르기 위해 성전에 의지할 때 실망하지 않게 하려는 것인데, 왜냐하면 레위인들이 도움을 구하기 위해 그에게 도피하는 자들을 도울 준비를 한 채 언제나 그곳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것은 모형의 시대에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신성의 모든 충만이 그 안에 거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우리의 하나님께 의지한다면(골 2:9), 하나님께서 자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임을 우리는 주목해야 하니, 즉 말하자면 그가 우리를 눈여겨보고 계시다는 것과 우리를 향해 문이 닫혀 있지 않고, 우리가 그의 임재 안으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실질적인 효력으로 알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인도받기 위하여,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고하신 바를 실행에 옮겨야 하니, 곧 그가 우리 가운데 계시게 하려는 목적으로 우리가 그의 이름 안에서 함께 모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상달되기를 원하고 우리의 봉사가 그에게 잘 가납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위선 없이 참되고 순결한 마음으로 함께 모여야 하며, 그리할 때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서 이처럼 다스리사 하나님께서도 이와 함께 우리를 돕고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손을 내밀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처럼 그분께 우리의 기도를 올려드리고 우리 각자가 자신을 그의 손에 맡겼을 때, 그가 우리의 행위를 눈여겨보고 계심을 우리는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그의 말씀을 듣고 그를 구하기 위해 함께 모이는 우리의 이 현재의 행위들이 그에 의해 명령된 것임을 우리가 아는바, 우리가 그의 눈앞에 있으며, 그가 불쌍히 여기심으로 우리를 바라보사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고려하여 그것들을 예비하시고, 그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을 우리는 의심하지 맙시다. 그리고 우리 편에서도 믿음으로 이처럼 그분께 올라가, 그가 자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는 것, 즉 특히 우리가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그 길을 통해 그분께 나아갈 때, 그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임재를 느끼게 하신다는 것을 온전히 확신하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그리할 때 그가 우리를 이처럼 나아오게 하사, 그가 우리를 자신의 나라로 들어 올리실 때까지 자신의 보호 아래 우리를 늘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허물을 인정함과 함께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의 위엄 앞에 무릎을 꿇고, 그가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더 잘 느끼게 해 주시기를, 참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서 이처럼 거꾸러져서 참된 회개로 그를 구하고 그의 약속들을 의지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아무리 비참할지라도, 그가 우리를 가납해 주실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하니,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공로를 신뢰하여 그분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통로가 된 그의 순전한 선하심을 신뢰하여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또한 더 나아가 그가 우리를 우리의 육신의 그 어떤 부패함으로도 더럽혀지도록 내버려 두지 마시고, 그가 우리를 자신의 제사장 직분으로 부르셨으니, 우리의 모든 생각과 애정과 소망들을, 참으로 우리의 온 몸과 영혼까지도 그분께 올려드림으로써 우리 자신을 그분께 봉헌할 은혜를 우리에게 또한 허락해 주시기를 원하시오니, 이는 그분께서 그것들을 통해 더욱더 존귀함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며, 아직 그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이 그분께로 인도되어, 그리하여 우리가 다 함께 그의 독생자 안에서 그분을 경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이 이루어지게 하시기 위하여, 그가 그의 말씀의 참되고 신실한 사역자들을 일으켜 세워주시기를 기뻐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