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회 설교: 18장 두 번째 설교
1555년 11월 27일 수요일
신 18:9-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우리가 모든 점에 있어서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우리 자신 안에서 결단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율법과 교훈을 주시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시작해야 할 첫 번째 지점은 하나님의 권위를 아는 것이며, 아무런 반박 없이 그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복종시키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율법 전반이 이러한 힘을 가지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이 일이나 저 일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무슨 목적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한 성경의 단 한 구절로부터라도 우리 자신에게 유익을 얻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영접할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잘 품읍시다. 예를 들어, 사람이 설교를 들으러 올 때, 비록 그가 그 내용을 들을지라도 하나님의 진리가 영접되어야만 한다는 것과 그것이 변론으로 맞서 싸울 것이 아님을 미리 알지 못한다면, 그 내용이 그의 중심을 찌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녕 우리는 자신들에게 들려진 일들이 참되다는 것과 그것들에 대해 대답할 수 없음을 충분히 확신하면서도, 여전히 그것들을 조롱하는 데로 나아가는 많은 자들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위엄에 의해 감동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를 만드시고 자신과 자신의 명령에 순종하도록 빚으신 그분께 우리가 복종해야 마땅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아는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그 일들을 영접하도록 우리가 재촉을 받을 때, 그의 진리가 우리 가운데서 지배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말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듣자마자 그의 말씀 앞에 떱니다(사 66:5). 그리하여 이제 당신들은 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그들이 그의 순전하고 단순한 뜻에 자신들을 붙잡아두어야 한다는 이 일반적인 규칙을 주시는지를 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미신에 치우쳐 있고, 심지어 고의로 속임을 당하고자 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먼저 우리를 모든 오류와 폐해로부터 건져내시고, 그다음 우리가 머물고 세워질 기초를 주시니, 곧 그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가 고하시는 바에 굳게 붙잡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기에는 두 가지 주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올바른 진리보다 도리어 사기와 거짓말에 자신들을 내어주는바,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있는 그 허망함을 바로잡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그는 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인도받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시며, 사탄의 모든 계책에 맞설 치료제를 그들에게 주십니다. 왜냐하면 만약 농부가 자신의 씨앗이 번창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먼저 자신의 땅을 갈아야 하며, 만약 어떤 해로운 잡초가 자라난다면, 그는 그것들을 뽑아내거나 잘라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루시니,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아무런 방해 없이 영접되게 하려는 목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악과 부패함을 우리에게서 제거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모든 구함은 우리 자신을 어리석음에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며, 마귀는 너무나 교활하고 영악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방도를 찾아내니,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너무나 변덕스러워서 우리의 모든 구함이 결국 속임을 당하는 것뿐임을 그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백성을 자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가운데 붙잡아두려는 것이었음을 잘 주목합시다, 그것이 그가 겨냥한 과녁이었습니다. 그리고 더욱이 우리가 앞서 말한 괴팍함에 사로잡혀 있어서, 우리 중 누구도 거짓말에 귀 기울이는 것을 삼가지 못하고, 우리의 지각이 너무나 부실하여 여전히 이 일과 저 일에 귀를 기울이며, 아무런 가치도 없고 오직 무익하고 허망한 일들에 대해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목적 외에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허황된 호기심과 사색들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에게 속한 자들을, 그들을 타락시키고 그의 진리로부터 물러서게 만들 수 있는 모든 일들로부터 돌이키십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여기에서 사실상 말씀하시기를, 만약 우리가 그의 백성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점술에도, 신접함에도, 마술에도, 죽은 자를 불러내는 주술에도, 친숙한 영들을 불러내는 일에도 얽매이지 말아야 하며, 도리어 이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서 제거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가 우리를 거부하시고, 우리를 온전히 버리실 것이라 하십니다. 그것을 한 가지 요점으로 주목하십시오.
이러한 여러 가지 종류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른 때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시간이 부족하여 그것들 모두에 대해 다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그사이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눈여겨보셨으며, 무엇을 겨냥하셨는지를 보는 것으로 우리에게 충분하게 합시다. 그렇다면 이것을 한 가지 요점으로 삼읍시다. 곧 만약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참된 제자가 되어 그의 말씀에 의해 마땅히 배워야 할 대로 가르침을 받아 유익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세상이 빠져 있는 모든 악한 미신과 모든 폐해를 버려야 하며, 만약 그것의 치료제가 우리를 거기에서 건져내지 않았다면, 우리 역시 그것들에 매료되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관습에 너무나 많이 치우쳐 있어서, 만약 어떤 일이 한 번 관습이 되면,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명시적으로 고하시기를 우리가 그러한 핑계들에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이 오류로 가득하여 사탄이 크고 작은 자들을 모두 속일 수 있는 전적인 기회를 얻은 것을 우리가 볼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따라 달려가지 맙시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리의 거대함 아래 우리 자신을 방패 삼거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믿는다” 혹은 “내가 보니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도 그렇게 하더라”라고 말하는 것이 우리에게 핑계가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일들을 충분히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세상의 모든 본보기들에 의해 유혹되어 끌려갈지라도, 그분이 언제나 그들보다 우선시되어야 하고, 최고의 지배권을 가지셔야 하며 우리의 존중을 받으셔야지, 우리가 그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을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이 점은 모세가 말하기를, “너희가 차지할 그 땅에 들어갈 때에 너희는 그것이 마치 공통의 법과 같고 사람들이 그렇게 행해왔음을 알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조금이라도 더 인정하시거나 그것에 만족해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라고 한 것에서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정죄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며, 비록 모든 사람이 어떤 한 가지 종류의 죄악으로 더러워졌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의 재판관 직무를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며, 그 어떤 무리가 아무리 거대할지라도, 그 무리에 의해 압도당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우리 자신을 그분께 드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군림하는 그 허망함들에 우리 자신을 얽매지 말아야 하며, 도리어 순전하고 바른 뜻을 가진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온전히 그분께 양보하여, 그 어떤 것도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가 그것을 영접하는 것을 가로막지 못하게 하고 그것이 끝까지 온전한 권위를 가지게 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것이 첫 번째 점입니다.
두 번째 점은, 세상이 무엇을 하든 혹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든 우리가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의 말씀에 따라 우리 자신을 빚어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이 아래에서 오직 반역만을 볼지라도, 우리는 그분께 우리 자신을 복종시키는 존귀를 행해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을 의식(儀式)적으로 경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니, 가장 중요한 점은 그의 말씀이 이처럼 지배하여 우리를 붙잡아두는 재갈이 되게 하고, 우리의 삶이 온전히 그에 따라 빚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토록 엄격하게 명령되었음에도, 우리는 온전히 그 반대의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봅니다. 이 안에서 우리는 인간의 악함과 배은망덕함의 명백한 거울을 봅니다. 왜냐하면 비록 하나님께서 그에게 바른 길을 보여주실지라도, 그는 여전히 길을 잃고 헤매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가증한 것들로 자신들을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를 어떻게 충분히 받았는지를 보며, 하나님께서 그들이 무엇으로 스스로 만족해야 하고 무엇에 머물러야 하는지를, 즉 그들이 그분의 친 입으로부터 배웠어야 마땅함을 어떻게 그들에게 보여주셨는지를 봅니다. 그가 그들에게 자신의 율법을 주셨고 선지자들을 일으키셨음에도,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추하게 길을 잃고 헤매는 것과, 귀가 가려워서 이 일과 저 일을 캐묻는 것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점술과 마술, 죽은 자를 불러내는 주술과 그와 같은 다른 일들이 그들 가운데 군림한 까닭이었으니, 그리하여 이사야 선지자 시대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사람이 매우 적었음을 우리는 봅니다. 보십시오, 선지자가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노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들이라” 하였습니다(사 8:18). 무엇입니까? 그가 자신과 함께하는 어떤 큰 무리를 가졌습니까? 아닙니다. 도리어 반대로 그가 말하기를, 그들이 미움을 받았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으니, 마치 자신들이 자연을 거스르는 괴물이라도 된 것처럼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한 자들은 자신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여겨지기를 원했으니, 마치 오늘날 교황주의자(가톨릭)들이 우리를 향해 우리가 한사코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며, 우리 스스로만 개혁을 요구하고 있으니, 그 까닭에 우리가 분파주의자라고 꾸짖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 시대에도 그의 제8장에서 그가 밝히고 있듯이 정확히 그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선언을 발하는 것과 그것을 확증하는 것을 삼가지 않고 말하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들을 친숙한 영들에게로, 그리고 죽은 자를 불러내는 주술로 돌이키려 하거든, 당신들의 하나님께서 당신들에게 전달해 주신 그 일들에 당신들 자신을 붙잡아두십시오. 그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다스리시고 모든 이에게 순종을 받으셔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그의 율법과 그의 증거에 머무십시오. 그리고 만약 백성들이 그것들을 대적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먼 자들이 붙잡혀질 수 없다면 쇠퇴와 멸망 속으로 가게 내버려 두고, 그동안 당신들은 교리의 순전함에 당신들 자신을 붙잡아두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까닭에 이사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방에 오직 불신앙밖에 없음을 볼 때에, 하나님의 증거를 봉인하고 그것이 너희에게 마치 닫힌 편지처럼 되게 하라. 그리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그리고 순종함으로 그것에 늘 자신을 붙잡아두기를 그치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제 만약 이 일이 옛날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다면, 오늘날 우리 역시 그와 같은 일을 마주할 수밖에 없으니, 사도가 히브리서에서 이 본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기독교 교회의 상태에 적용하여 보여준 바와 같습니다(히 2:13).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을 순결하게 섬기고자 갈망했던 자들이 이방인들이 아니라, 스스로를 하나님의 교회라 부르던 자들에게 미움을 받았다면, 오늘날 세상이 우리를 불손하게 바라볼 뿐만 아니라, 우리를 저주받은 자처럼 여길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인내로 견디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황주의자들의 그 모든 교만과 마귀 같은 자만심을 충분히 무시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이 배교하여 하나님을 버렸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자신들의 세례를 부인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율법에 우리 자신을 붙잡아두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비록 하나님의 진리가 영접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여전히 닫힌 편지처럼, 그리고 비축해 둔 보물처럼 계속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이 방황하여 어떤 이들은 미신을 따르고 어떤 이들은 오류를 따르는 것을 우리가 볼 때에,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그의 뜻에 따라 행하기를 힘쓰기만 하면, 그 길은 결코 틀림이 없으며, 우리가 길을 잃을 수 없음을 확신합시다. 모세가 이후에 말하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이리로 걸어가라”고 한 것처럼 그 길은 너무나 확실합니다(신 30:19; 사 30:24). 그러나 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여기 기록된 말씀들을 주목합시다. 그가 말하기를, “너희가 차지할 땅의 백성들은 많은 거짓말과 폐해로 더러워져 있으나 너희는 그렇게 행하지 말지니라” 하였습니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의 양 떼로 여겨지고 그의 권속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세상의 다른 모든 이들로부터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거나 우리의 눈을 따라 방황하지 말아야 하며, 도리어 우리의 시선과 우리의 모든 지각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하시는 바에 고정해야 한다는 것을 배웁시다. 비록 우리의 눈을 어지럽히고 참으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릴 수천 가지의 걸림돌을 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인 권위를 부여하여 그것이 우리를 늘 경외함 속에 붙잡아두게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본보기나 저 본보기를 보고 이리저리 쏘다니는 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한 번도 온전히 뿌리를 내리지 못했음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으로 발하시는 그 일들을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항할 무게추로 세우실 때, 이 말씀은 매우 커다란 중요성을 가집니다. 이는 마치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사람들과 함께 저울에 달려야 하겠느냐? 내가 그들에게 이처럼 저처럼 처신하라고 명령했을 때, 나의 권위가 깎여 나가고 의심을 받아야 하며, 나의 말씀이 효력을 가져야 마당한지 아닌지가 의문시되어야 하겠느냐? 그것은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는 일이 아니겠느냐? 피조물을 나와 비교하는 것보다 더 크고 추악한 혼란이 어디 있겠느냐? 사람들이란 무엇이냐? 그들 안에는 오직 맹목과 짐승 같은 어리석음밖에 없느니라. 참으로 그들이 스스로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어리석은 때이며, 나를 대적하여 자신들을 높이는 것은 순전한 미친 짓이거늘, 여전히 나의 말씀이 그들의 즐거움을 위해 훼손되어야 하겠느냐?”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들의 관습을 따르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것들로부터 돌이키시며 “너희는 그렇게 행하지 말지니라” 하실 때에는 어떤 일들이 널리 통용되어 왔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더 좋게 여겨서는 안 됨을 잘 주목합시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비추지 않으신 자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별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한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련한 짐승들처럼 온 들판을 헤매며 걸려 넘어지고 길을 잃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는 마치 어둠 속에 있는 것과 같다고 일컬어졌기 때문이며, 이와 함께 우리 안에는 오직 순전한 무지밖에 없고,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일들을 깨닫지 못한다고 일컬어졌기 때문입니다(엡 4:18; 고전 2: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우리는 마치 지루한 감옥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자신들을 인도할 그의 말씀과 진리의 등불을 켜주시는 그 은혜와 특권을 허락하지 않으심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하며, 도리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그 선하심으로부터 유익을 얻고 그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온전히 그 말씀에 우리 자신을 붙잡아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모세는 그들이 왜 그렇게 행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 까닭을 그들에게 고합니다. 모세가 말하기를, “너희의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해 한 선지자를 일으키실 터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하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저 단순히 미신과 점술과 그 외 모든 폐해에 우리 자신을 내어주지 말라고 금지당하기만 했다면,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불안함 속에 있었을 것이며, 누구라도 마땅히 항변하기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행하기를 원하신단 말인가? 그분은 우리 가운데 그 어떤 미신도 두지 말라고 금지하시면서, 그사이 우리를 불확실함 속에 내버려 두시니, 이방인들과 불신자들의 처지가 우리보다 더 나은 형편이 아닌가”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사람이 반박했을지도 모르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 사안을 잘 예비해 두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모든 폐해와 오류로부터 돌이키는 것은, 너희가 어느 쪽으로 돌아서야 할지 알지 못하여 당혹감과 혼란 속에 너희를 내버려 두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나의 말씀을 주어 그것이 너희가 유념해야 할 바가 되게 하려는 것이라”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만약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를 만족하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배은망덕함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불신자들 사이에 구별을 두시는 방편이,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스릴 인도자로 그의 말씀을 가져야 한다는 점임을 봅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우리는 세상이 제멋대로 치닫게 내버려 두어야 하니,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기반으로 삼을 만한 자기 자신의 소견이나 다른 사람들의 어리석음 외에 다른 아무런 교리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한 눈먼 사람이 다른 눈먼 사람을 인도할 때 그 자신이 먼저 걸려 넘어지고 다른 모든 이들이 그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마 15:14). 우리로 말하자면, 하나님을 우리의 스승과 교사로 모시고 있으니 그것으로 마땅히 만족해하며 머무릅시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지 않는 한, 오류로부터 건져내어 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참으로 수많은 무리가 자신들이 보는 그 허다한 어리석음들을 충분히 조롱할 수 있으니, 예를 들어 오늘날 당신들은 교황청 안에 있는 폐해들과 어리석은 장난감 같은 것들을 정죄하고 그것들을 활기차게 거부하는 많은 세속적인 사람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 자신 역시 결코 더 나은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어떤 정착함이나 뿌리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자신들이 정죄하는 그 오류들로 더러워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만큼 나쁘거나 혹은 더 악한 다른 오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 다수는 순전한 무신론자들, 즉 말하자면 종교도 없고, 하나님을 두려워함도 없는 자들이기 때문인데, 그들의 수치는 결국 마땅히 드러나기 마련이며,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그들을 타락한 마음에 내버려 두사 심지어 어린아이들조차 그들의 짐승 같은 어리석음을 비웃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에서 옵니까? (내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기 전까지는 우리가 결코 그 어떤 확실한 규칙도 가지지 못한다는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오늘날 온 세상이 마치 고의로 미신에 쏠려 있는 것을 볼 때에, 많은 사람을 복음으로 나아오지 못하게 가로막는 그 장애물들 때문에 우리가 혼란스러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가운데서 아무런 지배력도 가지지 못하는 것을 볼 때에 눈먼 백성들이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말씀을 주시고, 그것을 우리의 영혼의 건강을 위해 우리에게 적용해 주실 때, 그분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그 독특하고도 헤아릴 수 없는 유익을 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를 끝없는 심연으로부터 건져내 주실 유일한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마귀의 유혹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세상 자체는 참으로 미로와 같아서 우리는 목이 부러질 만큼 곤두박질쳐 떨어질 위험 없이는 단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습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를 보존해 줄 다른 아무런 방도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우리를 자비롭게 바라보시기를 기뻐하사 자신의 거룩한 입을 여시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주시는 것을 볼 때, 만약 우리가 그분께 기꺼이 나아가고자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핑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제공된 이 보물을 포용하는 법을 배웁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리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 얼마나 커다란 것인지를 일단 알고 난 후에는 그 교리에 마땅한 경외함을 돌립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이 우리를 위해 “한 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이라 고하시는 이 본문을 통하여, 만약 우리가 그의 말씀을 영접하여 그에 따라 우리 자신을 빚어간다면, 우리가 모든 오류로부터 건져내 지리라는 것을 그분이 우리에게 알게 하신다는 점을 마음에 품읍시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 오늘날 복음을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기는 모든 자들이 마땅히 방황하게 됨을 이해하게 되나니, 곧 하나님께서 이토록 은혜롭게 자신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실 때에 자신들의 눈을 감고 귀를 막아버리는 많은 자들을 오늘날 사람이 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의 길 안으로 내어줄 방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의로 그리고 뻔뻔하게 귀먹고 눈먼 자처럼 행동하니, 그러므로 그러한 백성들이 멸망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그리고 지극히 귀하게 여겨졌어야 마땅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그들이 거부하는바, 자신들을 지옥의 구렁텅이로부터 건져내 주는 역할을 했던 그 말씀을 이처럼 자신들의 발아래 짓밟을 만큼 그들이 괴팍하게 행한 것에 대하여, 그가 마땅히 그들의 악독함에 복수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한 가지 점으로 주목하십시오.
이와 함께 우리 편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실 때, 그것이 모든 오류와 모든 허황된 공상에 맞서 우리를 충분히 무장시키는 방편이 되어야 마땅함을 주목합시다. 그리하여 비록 마귀가 우리를 향해 덫을 놓을지라도,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그분이 우리 손에서 받으셔야 마땅하며 우리가 그분께 빚지고 있는 그 본분적인 순종을 돌려드리는 한, 그는 결코 우리를 붙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명시적으로 말하기를, 만약 우리가 복음의 교리를 우리의 마음에 철저히 새겨 둔다면,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피리 소리에 따라 춤추도록 이끌리지 않을 것이며, 쉽게 속아 넘어가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지도 않을 것이라” 한 까닭이 바로 이 동일한 원인 때문입니다(엡 4:14). 그렇다면 당신들은 하나님의 진리가 정복될 수 없는 것임을 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참된 믿음으로 그것을 영접할 때, 우리는 영적인 검으로 무장하게 됩니다(엡 6:17).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그러한 칭호가 부여된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귀에게 공격받는 일로부터 면제될 수 없으니,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도 그 싸움을 통과하셨기 때문입니다(마 4:3). 그러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그것에 굳게 붙잡혀 있기만 한다면 우리는 사탄과 그의 모든 계책에 대항할 방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우리는 모세가 하나님께서 한 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말한바, 그가 세상 끝날까지 지속될,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 안에 세우고자 하신 끊임없는 질서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율법을 단 한 번 선포하신 것밖에 없었다면, 진실로 사람들이 그것으로부터 돌아서는 때마다 그들에게 핑계 대지 못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거기에 붙잡아두기 위한 충분한 방도는 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람이 얼마나 물처럼 미끄러져 가고 즉시 사라져 버리는지, 더욱이 어떤 선하심을 받아들이는 일에 있어서 그러하다는 그 연약함을 고려할 때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율법을 선포하시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다면, 진실로 사람들은 마땅히 그 율법에 자신들을 복종시키고 거기에 마치 포로처럼 자신들을 붙잡아두었어야 했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사람의 연약함과 변덕스러움이 어떠했는지, 그들이 곧바로 그것으로부터 돌아섰을 것임을 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마치 이중의 결속을 채우시는 것처럼 백성들 가운데서 때를 따라 선지자들을 일으키실 것이라 말씀하시며, 두 번째 도움을 더해 주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나의 율법 속에서 나의 뜻을 너희에게 온전히 밝혔다는 것은 사실이나, 그럼에도 내가 너희에게 그 교리의 해석자들과 수호자들을 보내어, 그것이 사라지거나 묻히거나 혹은 거짓된 해석들로 타락하지 않도록 지키는 파수꾼이 되게 하리라. 그리하여 그곳에는 언제나 선지자들이 있으리라”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단 한 번만 발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교회를 순종 가운데 붙잡아두시고, 그들의 방도를 통해 그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때를 따라 우리에게 교사들을 보내주셨음을 우리에게 이해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교회가 가르침 없이는 서 있을 수 없다는 것과, 사람들이 거룩한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께서 그것이 우리에게 충분하다는 것을 아셨다면, 그분은 더 나아가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성령의 도구로서, 그리고 요약하자면 그분의 친 입으로서 매일 그의 이름 안에서 말할 교사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분의 뜻입니다. 만약 이것이 불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위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어떤 교리도 선포되지 않는 곳에는 교회가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 교황청 안에 있는 황폐함을 봅니다. 그들의 위선자들이 때때로 설교한다는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자기 자신을 위장하고 참으로 모든 좋은 교리를 왜곡하고 타락시키는바, 그들이 행하는 그 모든 것은 가증한 것일 뿐입니다. 또한, 우리는 교황청에서 주교와 고위 성직자의 이름을 가진 자들이 오직 우상들과 말 못 하는 그림자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 가운데 이 질서와 제도를 세우신 목적이, 바로 그의 말씀이 들려지고 그것이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울려 퍼져 크고 작은 자들이 모두 그에 의해 가르침을 받고, 그 방도를 통해 그 말씀에 복종하게 하려는 것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그의 말씀은 그가 우리를 다스리고자 하시는 그의 왕의 규(Scepter)요 지팡이라” 하신 이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시 110;2; 사 1:3).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자로 알려지고 여겨지기를 원하고, 그분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하고자 한다면, 그의 말씀이 우리에게 선포되어야만 하며, 우리에게 기록된 일들로 우리를 돌이키고 그것들에 대한 이해를 우리에게 주며, 그것들을 우리의 사용에 적용해 줄 교사들이 또한 있지 않는 한, 우리가 거룩한 성경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다고 생각지 말아야 함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보여진 바입니다. 이제 내가 당신들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오직 옛날 백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속한 것이라 하였으니, 동일한 본문이 사도들에 의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어 있음을 우리가 보는 바와 같습니다(행 3:18).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스릴 전권을 가지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보내 지셨다는 것과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할 분이 바로 그분임을 보여주고자 하여, 하나님께서 한 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이라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이미 당신들에게 고하기를, 이 구절이 단 한 사람의 선지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선지자들과 그들의 끊임없는 계승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일치하겠습니까? 매우 잘 일치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그들을 핍절하거나 예비 되지 않은 채로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바, 이제 그 동일한 일이 성취되었는지 아닌지가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이 때로는 더 많았고 때로는 더 적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무엘의 시대, 즉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매우 희귀하여 이상(vision)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삼상 3:1). 그리고 왜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지자 아모스를 통해 “내가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을 보내리라”고 위협하신 바와 같은 하나님의 형벌이었습니다(암 8:11). 그렇다면 이스라엘 자녀들은 때때로 자신들에게 약속되었던 그것을 마치 빼앗긴 것과 같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아예 두지 않으실 만큼 온전히 그리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으로 그분은 그 백성의 악독함과 완악함에 맞서셨으니, 그리하여 선지자들이 거부당하고 참으로 잔인하게 살해당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자신의 약속을 늘 유지하기를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과연 얼마간의 중단이 있었으니,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약속된 이 크고 으뜸가는 선지자를 영접하고자 하는 더 커다란 갈망으로 감동받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가랴와 학개 시대 이후로 이스라엘에 더 이상 선지자가 없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실망하게 하셨습니까? 모세의 이 예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말라기에 명시적으로 기록되기를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너희에게 준 율법을 기억하라” 하였습니다(말 4:4). 이는 마치 그가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아, 너희 자신을 돌아보라. 너희에게는 하나님의 율법 속에 포함된 온전한 지혜가 있고, 이와 함께 그것을 너희에게 신실하게 해석해 준 선지자들 또한 있었느니라.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향해 자신의 약속을 언제나 성취해 오셨고, 이제 이제부터는 너희를 다시 그의 율법으로 돌려보내시느니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슨 목적으로 그렇습니까? 그가 그 이유를 덧붙이십니다. 그가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나의 사자(곧 세례 요한)를 내 앞에 보내리니, 그가 길을 예비하고 나면 그때 내가 임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나에게 순종할지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마땅히 사람들을 쳐야 하겠고, 나를 거스르는 모든 자는 마땅히 꺾여 나가야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약속하셨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예언의 최종적인 결론과 온전한 역사(役事)가 겨냥하고 있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눈여겨보고 계셨음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이것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너무나 보편적인 일이었기에, 심지어 사마리아의 비참한 창녀조차도 “메시아가 오시면 그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요 4:25).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율법의 일종의 그림자만을 가지고 있었고 오직 흉내 내는 자들에 불과했던 사마리아인들조차도,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일들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주는 것이 구속주의 직무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이 그분 안에서 자신들의 끝을 맞이하였고 그분이 모든 것의 온전한 결론을 지으셨음을 볼 때, 이 본문이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에 적용되는 것은 이유 없는 일이 아닙니다(마 11:13; 눅 16:16).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삼 년 반 동안 말씀하신 것은, 그 이후에 침묵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리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복음이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선포되기를 원하시며, 그가 자신의 교회 안에 사역자들로 규정하신 자들이 마치 나팔과 같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우리가 듣나니, 그의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되어야 마땅하다고 일컬어졌습니다(마 28:19). 그리고 그분은 거기에 어떤 짧은 시간을 제한하지 않으시고 세상 끝날까지 그 일이 행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사정이 그러하니, (내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 안에 이 끊임없는 질서를 세우신 것이 오직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했음을 우리는 보나니, 그리하여 비록 우리가 그의 말씀을 듣고 그것이 매일 우리에게 선포될지라도, 우리가 그의 친 입으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분이 우리를 떨쳐버리시고 우리를 자신의 나라 밖으로 추방하실 것이며, 우리는 그의 종들의 수에 헤아려질 가치조차 없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이것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바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본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고, 이전에 일으키심을 받았던 선지자들은 그분보다 열등하며 오직 그분의 지체들에 불과했음을 볼 때, 오늘날 그의 교회에서 목자의 직무를 맡은 자들 역시 선지자들과 동일한 단계에 있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했을 때 그분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알아야 합니다(마 11:11). 복음이 율법의 그림자 아래 있던 그 어떤 것보다 더 높고 탁월한 사안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이 선지자들보다 훨씬 더 존귀하게 여겨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머리이심을 볼 때, 사도가 그분을 모세와 비교하며 말한 바와 같이 오직 그분만이 집안의 주인으로 인정받으셔야 마땅합니다(히 3:5,6). 사정이 그러하니, 만약 어떤 교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출교당한 것과 같음을 우리는 주목합시다. 과연 많은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나,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셔야 하며, 해석되는 모든 것은 그분으로부터 와야 하고, 그분이 모든 탁월함을 가지셔야 하니, 이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바, 곧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신 일이 성취되게 하려는 것입니다(마 17:5). 이것은 그 어떤 사람에 대해 일컬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 자신에 대해서만 일컬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자들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그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바를 내세우도록 그들의 목에 재갈을 풀어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께서 언제나 그들의 주인이 되셔야 하고, 오직 그분의 말씀만 들려야 하되, 아무런 다른 것도 내세우지 말고, 오직 그분의 이름 안에서 진실하게 그리해야 한다는 조건에 그들이 묶여 있음을 배웁시다. 모세가 “너희는 그 선지자에게 순종할지니라” 한 것은 지극히 옳습니다. 어떻게 그러합니까? 그들이 교회를 얽매고 교회를 종노릇하게 만들 권세를 가졌다는 뜻이 아니니, (사도 베드로가 그의 첫 번째 정경 서신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선지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해 말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벧전 1:11). 그리고 이와 동일한 측면에서 사도 바울 역시 광야에서 백성들을 인도하고 다스리신 분이 바로 그분이셨다고 말합니다. 비록 모세가 겉모습을 담당했을지라도, 지배권을 가지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이제 내가 당신들에게 묻노니, 만약 사람이 모세가 가졌던 것보다 더 많은 권세를 자신에게 취하고 자신을 그보다 높인다면, 사람이 그것에 대해 무엇이라 말해야 하겠습니까?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게 하려는 목적으로 있는 아랫사람들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음을 볼 때, 사람들이 자신들의 꿈과 망령된 생각을 내세우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침묵하셔야 하는 것이 어찌 마땅한 이치이겠습니까? 그러나 교황주의자들의 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침묵하게 만드는 것 외에 다른 아무런 목적도 가지지 않습니다. 교황은 자신이 그분의 대리자라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사정이 어떠할지라도, 그는 한사코 자기 마음대로 법률을 만들고자 하며, 한사코 새로운 신앙 조항들을 만들고자 하니, 요약하자면 우리가 교황을 믿는다면 복음은 오직 입문서에 불과하고 그가 고안해 낸 망령된 생각들이 모든 것의 온전한 완성인 셈입니다. 보십시오, 그들은 교황들과 그들의 공의회가 결의한 일들과 그들의 모든 장식품, 더러움, 그리고 가치 없는 쓰레기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하나님의 봉사를 왜곡하는 마귀 같은 가증한 것들일 뿐입니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셨을 때 사도들이 감당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일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요 16:12). 그리고 그것들이 무슨 일들입니까? 오, 그것들은 교황이 복음 위에 고안해 낸 고차원적인 신비들입니다. 마치 마호메트가 자신의 꾸란이 최고의 지혜라고 말하는 것처럼, 교황 역시 자신의 법령들에 대해 그렇게 말하니, 왜냐하면 그것들이 적그리스도의 두 뿔이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그러하니, 우리가 교황에게 결착하는 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가 보지 못합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그러한 방식으로 높이시는 것이 그의 뜻임을 볼 때, 그분이 참으로 우리가 그분을 바라보기를 원하시며, 모든 교리가 그분께로 돌려지고, 그분에 관한 것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마음에 잘 품읍시다. 그리하여 우리는 교회에서 말하고자 하는 모든 자가 이 위대한 스승의 학교에서 배운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발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그에 따라 그가 자신의 사도들에게 “너희가 내게서 배운 것들을 전파하라”고 하시는 이 전권을 주셨습니다(마 10:27; 요 16:13). 또한, 그가 그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실 때 말씀하시기를, “그가 너희가 내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그곳에서 새로운 교리로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의 무지함으로 인해 알지 못했던 그 일들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될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이름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시고, 자신이 이전에 일으키셨던 선지자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자신의 교회 안에 세우신 자들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선지자가 그 머리 아래 있기를 원하신다는 사실 속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바입니다. 그리하여 오직 그분만이 말씀하시고, 입을 여는 다른 모든 자는 오직 그분의 손에서 순전하게 받은 그 일들을 나누어 주는 역할만 해야 한다는 이 질서가 지켜져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와 함께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고 일컬어진 이 말씀을 또한 깊이 헤아려 봅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교회의 복리에 속한 줄로 아시는 일들을 예비해 주심으로써 스스로 후하신 분임을 보여주시는 것처럼, 우리 편에서도 그분이 우리에게 제공하시고 나누어 주시는 그 유익을 멸시하지 않는 것이 마땅한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그분은 자신의 순전한 거저 주시는 선하심으로 “내가 너희를 위해 한 선지자를 일으키리라” 말씀하시며 자신을 우리에게 묶으십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분은 우리에게 그 유익을 마땅히 여겨 영접하고 그것으로부터 우리의 유익을 취하라고 명령하시며, 하나의 언약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순종하기를 유념하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마치 입과 입을 마주 대하듯 우리에게 말씀하실 준비를 하사 이토록 온유하게, 그리고 이토록 아버지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실 때, 그분이 우리가 자신에게 귀를 막아버리거나 이리저리 쏘다니며 그분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것을 원치 않으심을 우리는 주목합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에 대한 그러한 배은망덕함과 멸시를 참아주실 것이라 우리가 생각해서는 안 되니, 왜냐하면 그에 대한 복수가 마땅한 때와 장소에서 밝혀질 바와 같이 끔찍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사이 우리는 기꺼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갑시다. 그분은 그의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보내 지셨으며, 우리를 끝없는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자신의 손을 우리에게 내밀 것이라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말을 듣되, 그분이 말씀하시는 바가 참되다고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그분께 드림으로써 들읍시다. 왜냐하면 그분이 요구하시는 들음이란, 사람들이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행하리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허망한 자만심으로 부풀지 않도록 모든 인간의 지혜가 꺾여 나가는 것이며, 도리어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스승에게 우리가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모든 애정이 그분께 복종하며, 우리의 정욕이 우리를 여기저기로 이끌고자 할 때 억눌러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게 하고, 크고 작은 자들이 모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상이 바로 자신들임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의 큰 자들로 말하자면, 시편 제2편에서 그들에게 일컬어지기를 “너희 세상의 열왕과 관원들아,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보내신 그의 아들에게 경의를 표하라” 하였습니다(시 2:12). 이제 만약 우리 주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 모든 높은 것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굴복하기를 원하신다면 (사도 바울 역시 복음의 선포가 한사코 높아지려 하는 모든 오만함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 바와 같습니다, 고후 10:5), 이 비참한 벌레 같은 자들이 복음을 순종함으로 영접하기를 거부할 때 그들은 어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기에는 그 어떤 예외도 없으며, 온 세상을 자신의 부름에 따르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임을 우리는 주목합시다. 왜냐하면 천사들조차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그의 복음을 경외해야만 하는 사정이라면, 죽을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덧없고 그들 안에 오직 부패함밖에 없는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야말로,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말할 사람들을 일으키실 뿐만 아니라, 그 교리에 전적인 권위가 부여되어 더 이상 의심할 수 없게 하신 자신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실 만큼 우리에게 이토록 은혜를 베푸실 때 무엇을 해야 마땅하겠습니까? 우리가 그러한 지경에 처해 있으니, 그분에 대한 우리의 순종을 가로막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버리고, 참으로 우리 자신의 지각과 정욕과 애정들을 각자 하나하나 다 버린 채 우리의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 외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 모든 일들을 내려놓고 그것들을 복종시킨 후에, 우리는 “너희는 선지자들에게 순종하라”고 여기 우리에게 들려진 그 일로 나아갑시다. 또한, 우리가 세상의 수많은 교황주의자들이 “에이, 나는 선량한 가톨릭 신자야”라고 말하는 것을 보는 바와 같이, “오,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리라”고 말하는 가치 없는 위선을 부림으로써 우리의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격동하지 맙시다. 그리고 멀리 갈 것도 없이 참으로 우리 가운데서도, 마치 부끄러움을 모르는 창녀들처럼 “나로 말하자면 복음을 원하노라” 하고 자신을 자랑하면서도, 정작 그들의 중심에서는 복음을 향해 침을 뱉을 수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발견됩니까? 그러나 우리가 위선 없이 그의 손에 의해 다스림 받기를 진실로 갈망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그러한 공언들을 가납하지 않으심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일을 행하기 위하여, 오직 단 하나의 방도밖에 없으니,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우리는 압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신 자신의 의와 공의의 선포로부터 자신의 위엄을 결코 분리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들과 복음 안에 포함된 그 일들은 그분의 살아있는 형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께 복종하기를 원합니까? 그분이 나타내 보이시는 그 일로 나아가, 그곳에서 우리가 그분께 빚지고 있는 그 순종을 보여드립시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우리의 구원으로 부르실 만큼 우리를 향해 이토록 자비롭고 후하심을 보여주시는 바, 우리 편에서도 그분께 다시 응답합시다.
이제 우리의 허물을 인정함과 함께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의 위엄 앞에 무릎을 꿇고, 그가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온전히 느끼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참된 회개로 그의 성령에 의해 변화되기를 구하고 그의 거룩한 명령들을 따르게 하옵시며, 또한 그가 우리를 너그럽게 보아주사 우리가 그의 고유한 의로 옷 입고 우리를 지금 둘러싸고 있는 모든 불완전함으로부터 건져내 지기까지 우리의 모든 허물을 묻어주기를 기뻐하소서. 그리하여 우리 다 함께 고하기를, 전능하신 하나님 하늘의 아버지여,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