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회 설교: 18장 네 번째 설교
1555년 12월 3일 화요일
신 18:16-20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선포하는 자신의 말씀을 수단으로 삼아 교회를 다스리겠다고 선언하신 후, 이 일이 백성들 스스로의 간청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덧붙이십니다. 이는 율법의 교훈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갑절이나 더 무거운 죄를 짓는 것임을 엄히 경고하시는 바와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멸시하는 것이고, 이는 참으로 무도한 반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이 소원한 대로 은혜를 베풀어 주셨음에도 도리어 감사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본래 율법이 어떠한 방식으로 공포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강림하셔서 유대인들에게 눈에 보이듯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 임재의 증거들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까?(출 20:18,19).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자, 선지자가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해 주기를 간구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요청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스스로가 요구했던 방식을 이제 와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무슨 핑계가 남아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모세가 전하고자 한 뜻은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 가운데 때를 따라 선지자들을 일으키시되, 그들의 간청을 따라 그리하셨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방편이 없음을 확증합니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백성들은 마땅히 그 세우신 질서를 굳게 지켜야 했습니다. 만약 자신들이 애써 구하여 얻은 은혜의 방편마저 용납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찌 된 일입니까? 그것이야말로 자신들이 완전히 완악하고 무법한 자들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여기에 기록된 상황, 즉 “네가 호렙산에서 요구했던 그 모든 것에 따라”라는 말씀을 훨씬 더 깊이 헤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구한 것이 유대인들 자신들로부터 왔다고 말씀하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요구에 모든 면에서 맞추어 주셨음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더 온유하게 나타내실수록, 그리고 우리의 본성에 자신을 더 맞추어 주실수록, 우리는 그분께 더 많은 빚을 지게 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갑절이나 더 책망ㅍ받을 일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라고 말한 것을 듣습니다(갈 4:12). 만일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말한다면,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영광 중에 나타나셔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위해 친히 낮추시고 자신을 비우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도, 우리가 이를 보고도 여전히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그분께 순종하도록 자신을 굽히지 않는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참으로 모든 감각을 상실한 것이며, 사탄이 우리를 너무나 눈멀게 하여 우리 안에 더 이상 자연적인 이성조차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그러합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토록 친히 모본을 보여주실 때 그분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그분이 우리를 향해 친히 아버지가 되시고 어머니가 되시며 유모가 되시는 것에서 보듯) 이처럼 자신을 스스로 바꾸기까지 하시는데도, 우리 편에서는 그분께 털끝만큼이라도 무릎을 꿇는 것을 경멸하며 거부한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모세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이 그분께 구했던 모든 것을 그들에게 주셨다”라고 말한 이 구절에서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는 백성들이 품었던 저 두려움 또한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에는 “우리가 죽을까 하노니, 우리 하나님, 하나님의 목소리를 다시는 듣지 않게 하시고, 이 큰 불을 다시는 보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출 20:20). 제가 이미 말씀드렸듯이, 호렙산에서 목도된 이적들을 행하심으로써 자신의 율법에 권위를 부여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율법을 모세가 자기 머리에서 고안해 낸 것도, 자기 마음대로 무언가를 덧붙인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그 제정자이심을 알게 하려면, 마땅히 율법은 그러한 방식으로 비준되어야 했습니다. 공중에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하늘이 불타오르며, 거대한 천둥소리가 들리고, 자연의 질서가 뒤바뀔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들의 통치자이심을 나타내셨고, 그 율법이 그분으로부터 나왔으며, 그분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확증하셨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일종의 인장(Sealing)과도 같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오직 바르게 사는 규칙만을 보여주는 한에 있어서의 율법은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며 도리어 그들을 어찌할 바 모르게(절망하게) 만들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인정하시는 일들을 행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실 때, 그것은 참으로 생명과 복락의 길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비뚤어진 본성을 지니고 있어서, 마땅히 행해야 할 대로 순종하고 처신하기는커녕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범죄합니다(신 27:26). 이에 그분은 자신의 계명을 범하는 모든 자에게 저주를 선언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율법에 의해 정죄를 당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재판장이 되시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율법을 선포하실 때 보여주신 모든 징표들이 마땅히 두려운 것이어야 했고, 백성들 역시 그것들로 인해 공포에 사로잡혀야 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복음 안에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며, 히브리서에서도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이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8:15; 히 7:25).
또한 여기에 모세가 주장하는 세 번째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인간이 구원의 교리를 전하는 자가 되는 것이 교회의 보존을 위해 선한 일임을 하나님께서 보여주고자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자신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말할 선지자들과 교사들을 보내주시는 것임을 아셨고, 백성들 역시 그 유익을 알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우리는 목을 굽혀 그분께 경배해야 하며, 비록 그분이 죽을 운명을 지닌 인간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말씀하실지라도 우리 중 누구도 그분께 순종하기를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자신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서 오직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엄위함만을 지니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말씀이 우리에게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것이 되어, 우리가 자유로운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며, 그 말씀을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지고한 복락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친히 보내실 선지자들과 설교자들에게 가르침 받기를 사모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가 지금 이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하늘에서 눈에 보이게 내려오지 않으실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천사들을 보내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곤 합니다. 그리고 깨어지기 쉬운 피조물이자 한낱 질그릇에 불과한 인간이 강단에 올라가는 것을 두고, 그리 대단한 권위가 없는 일이라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도리어 우리에게 유익함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일이 자신들에게 너무나 두려운 일임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나타내시는 방식을 바꾸어 그들에게 모세를 보내셔야만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율법에 권위를 부여하신 것이 단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 역시 온전한 겸손함으로 그 율법을 받아들이게 하려 하심이며, 누구든지 이를 멸시하는 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위엄을 거슬러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전쟁을 벌이는 것임을 깨닫게 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목소리가 지닌 두려움과 공중을 가득 채웠던 불길이 언급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다루었듯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약속하신 것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며, 이것이 그분의 교회 안에서 지속되는 영속적인 질서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의 말씀에 의해 다스림을 받기를 용납해야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말하는 인간들의 소리를 듣는 것을 결코 경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그들이 우리와 같은 부류이고 우리 동료이기에,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며 우리에게는 그들에게 복종할 의무가 없다고 핑계를 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여 그분의 뜻에 따라 세워진 이들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안다면, 그것만으로 우리에게는 충분합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분이 우리를 통치하시기를 원한다면, 그분이 우리에게 보내신 이들의 말을 귀담아들음으로써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을 이 경우에 증명해 보여야 마땅합니다. 이에 관하여 우리는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바를 보게 됩니다(사 59:22). 모세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예언했던 것처럼, 선지자 이사야 역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그분이 통치하시는 때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입과 그 씨의 입과 그 자자손손의 입에 자신의 말씀을 두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을 때 그친 것이 아니라, 제가 앞서 보여드렸듯이 오히려 새롭게 확증되었습니다. 과연 이 선지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구이겠습니까? 물론 그 말씀 안에는 모세로부터 사가랴와 그의 동료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선지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동안 끊어진 것처럼 보였던 모든 예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회복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오랜 기간 그 유익을 빼앗긴 채 지내왔고, 하나님께서는 이전처럼 그들에게 더 이상 나타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에게 약속된 메시아를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하려 하심이었고, 그 메시아가 모든 지혜의 온전한 완성품을 가져다줄 것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제 모든 예언을 성취하시고 온전한 회복을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던 그 보화를 이제 가장 풍성하게 쏟아 놓으셨음을 모든 이가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4장에서 보여주듯(엡 4:8,21), 이 일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위해 행해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 자신의 교회의 상태를 예비하셨으니, 곧 앞서 언급한 방편에 의해 교회가 보존되도록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요약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실한 자들 가운데 목회자(ministers)로 세우신 이들의 입을 통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씨와 그 자자손손의 입에 오늘날까지 말씀이 있으리라” 하신 앞서 인용한 이사야의 본문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내 말을 보내겠다”라거나 “내 천사들을 시켜 너희에게 그것을 전파하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우리 주 예수께서 가장 높은 자리에 계시지만, 그 뒤를 이어 “네 씨의 입과 네 자자손손의 입에”라는 말씀이 뒤따릅니다. 그러므로 결론을 내리자면, 세상 끝날까지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기를 원하고, 요컨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선포될 때마다, 그분이 인간의 입에 두시는 그 말씀에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예외 없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말씀을 받으라고 권고하시는 것에 그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엄중한 경고를 덧붙이시는데, 이는 인간들 사이에서는 아무리 질서가 잘 세워져 있다 할지라도, 언제나 어느 정도의 거역과 반역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주님께서는 여기에서 얼마간의 엄격함을 사용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며 엄히 경고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을 보내는 것은 너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함이다. 내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려 퍼지게 하는 것도 나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무엇이 너희에게 가장 적절한지 알고 있으며, 너희 자신도 그것이 너희에게 가장 큰 유익이 됨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온유하게 받으며, 온전한 부드러움으로 나에게 복종하도록 하라.” 사도 야고보 역시 우리를 이와 동일한 길로 인도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덕을 세우고자 한다면, 반드시 온유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약 1:21). 씨앗을 받아 열매를 맺을 땅이 먼저 잘 갈려야 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참된 준비는 우리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도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하지만 온유함으로는 도무지 움직이지 않을 만큼 완고하고 미련한 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경고가 추가된 것입니다. 이 경고를 통해 우리 주님께서는 비록 인간의 손에 의해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될지라도, 만약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멸시한다면, 그러한 잘못이 결코 처벌받지 않은 채 넘어가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친히 그것에 대해 책임을 물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마치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참으로 세상에서는 그러한 멸시가 그대로 방치되고 단 한 번도 기억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내 말의 권위를 친히 보증할 것이며, 너희가 비록 인간의 손은 피했을지라도 내 앞에서는 반드시 회계 보고를 해야만 할 것이다.” 이 점을 우리는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순종하기를 원하실 때, 단순히 “내 말에 순종하지 않는 자”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내가 보내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자”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입으로는 자신들이 하나님께 기꺼이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공언하는 수많은 사람을 봅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율법이나 거룩한 성경, 혹은 교회의 질서에 대해서는 전혀 순종할 마음을 품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좋은 가톨릭 신자(또는 경건한 신앙인)로 인정받기를 원하면서도, 정작 설교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며, 그것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조롱자들의 무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어쩌다 설교 자리에 나아온다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형식적인 의례이거나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체면치레에 불과합니다. 인간적인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라면, 그들은 결코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가르침 받기를 사모한다는 말은 결코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도대체 그것이 무슨 기독교란 말입니까? 이와는 대조적으로,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신다고 선포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꺼이 순종할 의향이 있다고 능청스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보내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누구든지”라는 조건을 덧붙이십니다. 제가 이미 보여드렸듯이, 하나님께서 이 질서를 자신의 교회 안에 세우셨으므로 이는 결코 침해할 수 없는 규정으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하찮게 여기거나 설교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반역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두고 더 이상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친히 세우신 질서에 온순하게 복종하지 않는 모든 자가 자신을 대적하는 반역자라고 우리에게 단호히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에서 첫 번째로 기억해야 할 바는, 하나님을 속이기 위해 도망칠 핑계 구멍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그분이 우리를 통치하시기를 원한다면,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말하는 직무와 책임을 맡은 이들을 반드시 영접해야 하며,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가 그 질서에 맞추어 우리 자신을 처신해야만 합니다.
더욱이 사도가 히브리서에서 비유하여 논증한 내용으로 나아가 보겠습니다(히 3:5,6; 10:28,29). 사도는 (참된 진리가 그러하듯) 모세와 그의 동료 선지자들은 단지 종에 불과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주인 본인이 오셨으니, 곧 온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복음으로 말씀하시니, 만약 사람이 이를 멸시한다면 결코 용납 받지 못할 것입니다. 앞서 우리가 보았듯이 모세의 율법을 범한 자는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 주 예수께서는 복음 안에서 더욱 생생하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사람들이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일을 하찮게 여겨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리를 거슬러 싸우는 모든 자는 훨씬 더 무겁게 범죄하는 것이며, 더욱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위는 실질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을 격동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그분의 위엄을 완전히 짓밟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고 공언하는 것과 같아서,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이 우리에게 선포될 때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갈 3:19).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은 모세의 말보다 훨씬 더 무겁게 청종 되어야 마땅합니다. 참으로 율법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바로 그 성령에 의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율법과 복음에서 각각 사용하신 ‘수단’을 두고 논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더 온전히 나타내실수록 우리는 그분께 복종하도록 더욱 분발해야 하는데, 그 일이 바로 복음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을 내리자면, 오늘날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전달되고 제시되는 것들에 귀를 기울이는 일에 있어서, 율법 시대의 우리 조상들보다 훨씬 더 큰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께서 세례 요한이 모든 선지자보다 뛰어나며, 그가 맡은 직무만큼 탁월한 직무를 맡은 사람은 일찍이 없었으나, 오늘날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 중 가장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뛰어나다고 말씀하신 뜻입니다(마 11:11).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 개인의 거룩함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선포되고 있는 구원의 교리를 극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모든 선지자보다 앞선 이로 인정받은 것은, 구속주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직접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하시는 중보자의 직무를 완수하셨음을 선포합니다. 그분의 죽으심과 고난은 우리에게 온전한 의를 사다 준 영원한 제사이며, 우리의 모든 죄는 그분의 보혈로 씻겨 나갔습니다. 그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대언자이자 변호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은혜를 입도록 간구하고 계십니다(고후 5:19; 히 9:27; 요일 1:7; 2:1). 그분의 순종은 우리의 의로 전가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분 안에서 우리를 양자 삼으사 자신의 나라를 상속받을 후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롬 5:19; 엡 1:5). 이 모든 사실이 오늘날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풍성하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의 그 모든 왕과 족장들보다 우리를 앞세우시며 이토록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데도, 우리가 이러한 특권을 누리면서 더 나은 삶을 살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참으로 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듣는 것을 듣고자 했고, 우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간절히 소원했으나, 그 소원을 이루지 못했던 저 왕들과 비교해 볼 때(눅 10:24),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들보다 더 많은 것을 주셨음에도 도리어 조롱과 멸시로 일관한다면 우리의 보응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분은 옛적에 유대인들을 책망하셨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를 향해서도 다음과 같이 청구하실 수 있습니다(사 5:4). “내 백성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였느냐? 내 포도원아, 내가 너를 심었고 너를 가꾸었으며 너를 위해 큰 수고를 아끼지 않았거늘, 너는 어찌하여 주인의 목을 막히게 할 쓴 포도만을 맺느냐?” 과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이 지닌 배은망덕함을 그러한 방식으로 책망하셨다면, 오늘날 우리를 향해서는 얼마나 더 심하게 책망하시겠습니까? 우리가 그들보다 백 배나 더 무거운 정죄를 받아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율법을 멸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면, 오늘날 자신의 복음을 조롱하는 것이나, 설교 자리에 나아가 그 직무와 직분을 맡은 자들의 입을 통해 가르침을 받도록 친히 세우신 질서를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것을 훨씬 더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제가 이미 선언했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은 들을 가치가 있다”라고 입으로만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반드시 삶의 증거로 그것을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비록 그것이 피조물이라는 방편(by the mean of creature)을 통해 전달될지라도, 우리는 온순하게 그분을 영접하고 복종해야 마땅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에 대해 책임을 물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의미를 명심해야 합니다. 그 뜻은 우리가 인간의 손을 피했다고 해서 결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예를 친히 지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여러 면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경외함으로 받아들여지도록 키(조타수)를 잡아야 할 자들이 정작 그 말씀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군주들과 고관들, 그리고 재판관들은 자신들에게 손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일들은 처벌하며, 그러한 범죄들은 엄격하게 감시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만약 그것들이 처벌받지 않고 넘어간다면, 그로 인해 큰 혼란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고려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만, 정작 그들은 앞뒤가 뒤바뀐 처사를 하고 있습니다(본말을 전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욕을 당하셨을 때는 그것을 그냥 흘려버리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이로 인해 당장 아무런 불편이나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세상에는 “누가 나를 고발한단 말인가? 내가 누구에게 피해를 주었는가?”라고 말하는 것이 흔한 속담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모욕하여 이 세상에서 마땅히 뿌리째 뽑혀야 할 자가, 도리어 입을 비죽거리거나(코방귀를 뀌거나) 뻔뻔한 얼굴로 걸어 나와 누가 자신을 고발하느냐고 묻는 격입니다. 하늘의 천사들은 물론이요, 다른 모든 피조물이 그를 대적하여 울부짖고 있음에도, 그는 정작 자신이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여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기 인간들 중에서는 아무도 자신을 대적하지 않기 때문이며, 어쩌면 하나님의 편에 서서 변호하려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을 변호하는 일에는 충분히 열을 올리지만, 하나님을 거역하여 범죄하는 자들을 대적할 만큼 영적인 열정을 품지는 않습니다. 그러는 동안 재판관들은 잠들어 있으며, 이처럼 불경건한 모든 행태를 그대로 방치합니다. 참으로 유대인이나 사라센(이슬람교도)보다도 악하여 기독교인의 징표를 전혀 보여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교와 성찬의 시행을 공개적으로 멸시하는 자들이 존재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그러한 멸시에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전쟁을 벌이며 온갖 종교를 가볍게 여기도록 자신들의 비열함을 토해내는 독사 같은 짓을 일삼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 목도되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눈을 감아버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친히 자신이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아주 좋구나. 인간들이 원하는 만큼 태만하게 굴도록 내버려 두어라.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이 일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선포될 때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단순히 사람의 눈치를 보아서가 아니라, 하늘의 재판장께서 지닌 진노를 피하기 위해 그 말씀을 듣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경고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신의 말씀이 가진 권위를 친히 수호하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점이 깊이 새겨졌다면,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가르침 받기를 용납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소리가 울릴 때 지금보다 훨씬 더 걸음을 재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현실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설교 자리에 나아가기 위해 겨우 세 걸음조차 떼는 것을 마음에 내켜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중에 책망을 들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계속해서 설교에 참석하면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할 것이고, 결국 치리회(Consistory)에 불려가 권징을 받게 될 거야”라고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 섞여 살면서 개보다 못한 믿음과 기독교 신앙을 지닌 저 사라센들이 바로 그런 식으로 말합니다. 그들이 이 자리에 나아오는 목적은 대개 그저 하나님을 조롱하듯 슬리퍼로 바닥을 긁어대며 서성거리기 위함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토록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기 위해 나아오는 것보다는, 차라리 목이 부러지는 편이 그들에게 더 나았을 것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화려한 의식과 겉치레만을 갖추어 나아오나, 그 중심에는 아무런 열정(신앙적 온정)도 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사람들을 결코 그렇게 방치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신 본문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비록 하나님의 영광을 수호하는 이가 아무도 없고 도리어 자행자지하며 그분을 멸시할지라도, 결코 그러한 행위가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은 친히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실 것이며, 이 일들을 결코 망각 속에 묻어두지 않으실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것을 눈감아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결국 자신이 그 말씀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 나타내실 것이며, 그 멸시의 대가로 그들에게 친히 보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멸시하는 모든 자를 향해 이토록 엄중한 진노를 쏟아내시는 구절에서,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지자’라는 이 영광스러운 이름의 핑계 뒤에 숨은 자들에게 속거나 미혹되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사의 직무에 세워진 인간들에게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해야 마땅하듯이, 반대로 그 누구도 어리석고 무지한 백성들을 기만하기 위해 그 책임을 함부로 떠맡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예비하셨습니다. 첫째로, 그분은 가르침의 결핍이 전혀 없음을 보여주시어 백성들이 원망할 이유가 없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점쟁이나 복술가, 무당을 찾아 결탁하는 자들은 참으로 사악하고 배은망덕한 자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다가오사, 우리에게 친근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그러함에도 사람들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미신의 길로 발걸음을 돌리고, 모든 지혜의 완전함인 하나님의 진리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참으로 사탄에게 사로잡혀 완전히 미쳤거나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위해 이처럼 신실하게 예비하셨으니, 사람들은 마땅히 그분이 행하신 방편 안에 안주해야 합니다.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선포하시는 교리를 기쁜 마음으로 듣고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어야만 합니다.
이제 그분은 교사로 세움 받은 이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 누구도 내 이름으로 함부로 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내가 내 말을 선지자들의 입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라.” 그분은 “내가 내 말을 그들의 입에 두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며, 이는 제가 앞서 인용한 이사야의 본문과도 일맥상통합니다(사 59:21).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일으키실 때, 그들의 목에 고삐를 풀어주어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설교하도록 전권을 주시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일으키시는 것은, 그들이 그분께로부터 들은 바를 신실하게 전달하는 자신의 도구(instrument)가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여러분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세대에 걸쳐 “자신의 말을 그들의 입에 두신다”는 조건 하에 선지자들을 일으키셨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설교하는 것 역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직무를 포기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언제나 우리의 교사이시며 교회의 머리, 그것도 유일한 머리이시기 때문입니다(마 17:5; 엡 5:23). 그분은 한낱 우상처럼 계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교리로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에게서 받지 않은 그 어떤 것도 감히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명심합시다.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백성들을 굴복시키고 겸손하게 하사 말씀이 선포될 때 가르침 받기를 거부하지 않게 하신 것처럼, 반대로 말을 전할 사명을 받은 자들 역시 자기 자신의 망상이나 꿈을 가져오지 못하게 하셨으며, 새로운 교리를 고안해 내지도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오직 먼저 자신들의 주인에게 배우고, 그 후에 자기 자신의 것은 추호도 덧붙이지 않은 채, 그 배운 바를 타인에게 신실하게 전달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머리에서 고안해 내는 것은 무엇이든지 완전히 부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죽 전체를 부풀려 시게 만드는 데는 그리 많은 누룩이 필요하지 않습니다(고전 5:6). 사람이 아주 조금이라도 자기 생각을 보태어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는 하나님의 진리를 완전히 왜곡하여 거짓으로 바꾸어 버릴 것입니다. 또한 이 사실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어떠한 조건 하에서 선지자들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를 일깨워 줍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강권적으로 우리를 붙잡아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결코 중용(mean)을 지키지 못하고 두 가지 극단으로 치닫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중심을 잡지 못하면 우리는 이방인처럼 변해 버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역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조롱거리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이러한 멸시의 태도를 세상의 대부분 사람에게서 목도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듬어 나갈 때 어떻게 처신합니까? 우리는 선과 악을 전혀 구별하지 못하는, 일종의 어리석고 짐승 같은 맹목적 경건에 빠지곤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진정 그분은 우리의 믿음이 겸손과 짝을 이루기를 원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분별력 없이 굳어버린 완고한 돌덩이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와는 정반대로, 그분은 우리에게 영들을 시험하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입니다(요일 4:1). 따라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조사하여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하나님의 이름이 인용될 때 경외함에 사로잡혀 선포되는 말씀에 간절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지라도 그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시되는 것들에 대해 스스로 가르침을 잘 받는 이 겸손한 태도를 지님과 동시에, 우리는 그분께 성령을 부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바르게 분별할 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사칭하는 자들의 거짓말에 속거나 물들지 않게 하셔야 합니다. 비록 사탄이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지라도 우리의 눈을 흐리지 못하게 하사,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올바르게 깨닫게 해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고후 11:14). 이것이 바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고자 하시는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분은 비록 우리가 선지자들에게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시고, 그들을 멸시하는 자는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위협을 덧붙이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서 모든 분별력을 빼앗아 가시거나, 우리가 무엇을 따라야 할지 알지 못하도록 눈을 가려버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사람들의 교리를 시험하고, 선지자들이 바르게 가르치고 있는지를 체질하듯 철저히 걸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들려오는 모든 말을 아무런 예외 없이 수용할 만큼 미련한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제가 말씀드렸듯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말할 때, 그것이 진리인지 혹은 거짓인지를 부지런히 탐색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곳에 포함된 세부적인 내용들을 하나씩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을 모든 시험(분별)으로부터 면제해 주고자 하신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도리어 그분은 우리에게 주신 일반적인 규칙에 따라, 신실한 자들이 자신들에게 제시되는 바를 깊이 분별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은 차례대로 말하고, 나머지는 분별(판단)하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4:29).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판단하고 분별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성령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가르치고 측정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방인들에게서 보이는 ‘멸시와 반역’, 그리고 “나는 마음이 너무 좋아서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다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자들의 ‘짐승 같은 미련함’ 사이에서 어떻게 중용을 지킬 수 있는지 보여주십니다. 참으로 그렇게 처신하는 자는 자기 수고에 어울리는 어리석은 바보(a good goose)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이 분별력과 지식을 갖추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우리의 믿음이 세상의 학문은 아닐지라도, 선지자가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손에서 배움을 얻는 분별력은 반드시 필요합니다(사 54:13). 그러므로 한 가지 점은 명백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때, “사람들이 우리의 교리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라거나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아무런 회계 보고를 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거짓 선지자를 처벌하면서 그에 대한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고, 그의 사정을 심사하고 파악할 방편도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허한 말일 뿐만 아니라 불필요하고 터무니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에 사람들의 교리를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셨으며, 자신의 선지자들에게 책임을 물으사 그들이 자신들의 교리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고,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임을 증명하도록 묶어두셨음을 몇 마디 말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은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에게서도 결코 거부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거짓 교리를 전한다는 고발을 당할 때마다, 자신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으며, 신실하게 처신해 왔음을 대중 앞에 기꺼이 증명해 보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모든 영적 독재(tyranny)가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오늘날 만약 어떤 사람이 교황의 교리를 조사하려 한다면, 교황은 그것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사도의 좌에 앉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위해 예비해 두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분은 친히 보내신 선지자의 입에 자신의 말씀을 두시겠다고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분은 친히 보내신 모든 자에게 보편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미 증명했듯이 이 본문은 모세 한 사람이나 구약 시대에 살았던 자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확장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전체를 포괄하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그러하므로 하나님께서는 교황이든 그 외의 어떤 사람이든 결코 예외로 두지 않으셨으며, 따라서 그들의 교리는 마땅히 조사될 수 있고, 또 조사되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로마 가톨릭주의자들이 자신들은 아무런 회계 보고를 할 의무가 없다고 사람들을 선동하며 내세우는 것은, 우리가 보듯 우리 주님께서 선언하신 명백한 진리 앞에서는 단지 겉치레뿐인 방패에 불과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단지 ‘선지자’라는 직함만을 가졌다고 해서 충분한 것이 아니요, 마땅히 그에 따르는 결과(effect)가 있어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들이 그분의 말씀을 자신들의 입에 두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들이 ‘자신의 성령’만을 소유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비록 뒤이어 그 말씀 역시 덧붙이시기는 하였으나 말입니다. 실제로 제가 앞서 인용한 이사야의 본문에서도 그분은 “내 성령이 그의 위에 머무르리라”고 말씀하십니다(사 59:21). 그러나 이 말씀이 ‘기록된 말씀’을 배제하기 위함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성령과 말씀은 결코 끊을 수 없는 끈(bond)으로 서로 결합해 있는 것들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내 성령이 네 위에 있을 것이요, 내 말이 네 입에 있으리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교황은 자신을 높이기 위해 무엇이라 말합니까? 그는 “나에게는 하나님의 성령이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 말씀은 저 뒤로 밀려나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교황은 “나에게는 나 자신의 훨씬 더 위대하고 탁월한 계시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낱 초보적인 교본에 불과하며, 위대한 신비들은 성령을 통해 나에게 친히 계시되었다”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이 마귀가 어떻게 교회의 모든 질서를 짓밟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다스리기 위해 세워두신 모든 지침 위에 자신을 군림시키려 하는지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자신의 이름으로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시며, 그 직무에 세워진 자들의 입에 자신의 말씀이 머물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토록 단단히 결합해 두신 것들을 이처럼 조각조각 부수어 놓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지옥에 속한 악한 분리주의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하늘을 두 조각으로 쪼개어 별들의 절반 이상을 땅으로 떨어뜨리려는 짓과 다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해나 달, 혹은 그 어떤 피조물도 자신의 성령과 말씀을 통해 친히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엄위하심에는 결코 비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령과 말씀 이 둘을 하나로 묶어놓으셨으니, 그중 하나만을 취하고 다른 하나는 버리는 것은 결코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 안에서 교사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지니고 와야 하는 책임을 맡아야 하며, 아울러 그분의 성령을 소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 뜻은 사역자들이 성경을 해설하는 은사를 지녀야 하고, 성경에 속한 참된 깨달음을 소유해야 하며, 자기 자신의 것은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고, 오직 자신들에게 지정된 고유한 직무(trade)만을 따를 만큼 신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라고 언제나 확신 있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만약 어떤 사람이 그들을 대적하여 일어설 때, 그들은 모세와 같이 “내가 누구이냐? 나로 말하자면, 나는 오직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메시지를 너희에게 가져왔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 너희 길을 가며 그 일로 하나님과 직접 다투어보아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출 16:7). 그렇기에 그리스도 교회의 교사로 인정받고자 하는 모든 자는 마땅히 이와 같은 절도(modesty)를 지녀야만 합니다. (내일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만약 이 절도를 지닌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칭하여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한계를 넘어서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선지자에게 공통으로 요구하시는 그 조건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향해 담대하게 맞서며 그들을 멸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위엄 앞에 다 함께 무릎을 꿇고 우리의 죄과를 자복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전보다 우리의 죄를 더 깊이 깨닫게 해주시기를, 그리고 우리를 참된 돌이킴(개혁)으로 인도하사 우리가 그분께 기꺼이 굴복당하기를 원하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감정이 비뚤어져 있으며 우리 안의 모든 지각과 지혜가 온통 혼돈뿐임을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십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기쁘게 순종하기를 소망하십시다. 그분의 뜻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선포되어 우리가 정처 없이 방황하거나 요행을 바라며 걷지 않게 하시고,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심으로써 우리가 온전히 확신하고 보증을 얻어 하나님께로 인도함 받기를 간절히 구하십시다. 왜냐하면 그분의 복음의 교리야말로 우리가 결코 길을 잃지 않을 구원의 바른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천사들의 무리와 함께 하나님께 영원한 찬송을 부르는 그 자리에 이를 때까지, 더 이상 인간이라는 방편을 통해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는 그때까지, 이 복음 안에서 날마다 더욱 굳건해지기를 구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오직 우리뿐만 아니라, 지상의 모든 백성과 나라들 위에도 풍성히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