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칼빈 신명기 설교

신 16:20-17:1

작성자doulosdei|작성시간26.06.22|조회수34 목록 댓글 0

102회 설교: 16장 여섯 번째 설교

15551113일 수요일

 

16:20-17:1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제단 곁에 어떤 나무로든지 아세라 상을 세우지 말며 자기를 위하여 주상을 세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흠이나 악질이 있는 소와 양은 아무것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지 말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됨이니라

 

 

 

지금까지 모세는 우리에게 공평와 정직(equity and uprightness)을 권면하면서, 재판장으로 세움을 받은 자들은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각 사람의 권리를 지켜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그러한 온전함 속에 계속 머물고자 하는 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뇌물을 받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뇌물을 받으면 그 즉시 타락하고, 그 즉시 눈이 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선물은 얼마든지 받되, 악한 소송을 두둔할 마음만 없으면 되지 않느냐라고 반박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이미 선고하시기를, 선물을 탐하는 자는 세상에서 가장 눈이 밝은 자일지라도 결국 눈이 멀게 될 것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는 이미 눈에 수건을 두른 것이나 다름없으며, 그뿐만 아니라 이전에는 선하고 거룩한 마음을 품었을지라도 이제는 완전히 부패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판장이 어떤 형태로든 선물을 받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독약인지를 보게 됩니다.

이제 모세는 사람들을 더욱 두려움 가운데 붙들어 두기 위해 하나님의 약속을 덧붙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붙들 때, 하나님께서 반대편에서 우리에게 복을 제안하시며, 우리를 번성케 하리라 말씀하시므로, 우리 자신의 이익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정죄하시며 결국 비참한 결말로 끝날 불법적인 수단으로 스스로를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와 함께하여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처럼 모세가 사람은 공의(uprightness)를 따라야 한다는 말씀을 덧붙인 목적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진실로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며, 모세의 말대로 네 하나님 하나님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고 거기서 오래 살리라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앞서 설명한 내용과 같은 맥락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단 한 마디로 우리에게 명령하실 수 있는 권위가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시기 위해 너무나 부드럽게 스스로를 우리에게 묶으시며, 마치 두 당사자 사이에 언약을 맺으시듯 하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실 충분한 권위가 있으시며, 우리가 그 이유를 불어 한 항변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약속하실 의무가 없으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그분께 빚지고 있으며, 그분은 우리 중 누구에게도 빚진 것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 기꺼이 맞추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의무를 요구하신 후에, 그분을 섬기는 일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임을 덧붙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분 앞에서 무언가를 스스로 공로로 세울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처럼 값없이 자신의 은총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선하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뒤로 끌어당기거나 방해하는 어떤 걸림돌이 있을지라도, 그분이 명령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는 데 더욱 앞장서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이 지닌 힘을 느끼지 못하여 그분께 순종하도록 격동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핑계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령하셨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으로 우리에게 충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둔하고 게으르기 때문에, 그분은 마치 아버지가 자녀를 달래듯 부드러움으로 우리를 얻고자 이 도우심(약속)을 더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봅니까? 이토록 크신 선하심 앞에서도 우리 마음이 녹아내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이 너무나도 완악해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이 우리 마음을 충분히 찌르지 못한다고 느낄 때마다, 이 약속들을 붙잡아 우리 자신을 더욱 격려하고 채찍질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성경의 표현을 잘 주목해 보십시오. 모세는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라고 말합니다. 원어로는 공의(uprightness), 공의를 너는 따를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했는데, 어떤 이들은 이를 너는 공의롭게 재판을 따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철저히 살펴보면, 이 말씀의 의미는 사람들이 재판을 집행할 때 치우침 없는 손길을 유지하고, 직선을 그리듯 바른 길을 따르며,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그 길을 고수해야 한다는 뜻일 뿐입니다. 나는 우리가 이 말씀을 잘 유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일부분만 행함으로써 자기 의무를 다했다고 핑계 대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명령하신 모든 일을 굳건하게 끝까지 행하는 것은 (세상이 보듯) 매우 드문 일이며, 특히 법을 다루는 자들에게서 더욱 그러합니다. 악한 재판장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그럴듯한 겉모습이 없으면 부끄러움을 느끼기 마련이기에, 때로는 그들에게서 어떤 공의와 이성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한 사람에게 공의를 행했다고 해서 바르게 행한 것입니까? 내일이면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정반대로 행할 것입니다. 한 가지 잘못은 처벌했을지라도, 피고가 호의를 입었거나 권력의 비호를 받는다는 이유로 세 가지 잘못은 처벌하지 않고 넘어갈 것입니다. 이러한 편파성(partiality)은 거의 끊임없이 목격되며, 이는 그곳에 진정한 정직함(uprightness)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공의(justice)의 집행에 공평무사함(indifferency)이 사용되지 않을 때, 처벌받는 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처럼 하나님께 복수를 요구하며 부르짖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사람들이 단순히 공의를 행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는 사람들이 공의를 계속해서 밀고 나아가며 지속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공의 위에 공의(Justice Upon Justice)”가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 어떤 불공평함이나 저울과 추의 차별, 혹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전혀 보이지 않도록 끊임없이 공의를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어떤 호의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쳐서도 안 되고, 어떤 미움 때문에 바른 소송을 저버려서도 안 되며, 어떤 일에도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는 굳건한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공의를 지키는 길입니다.

이 교훈은 그 자체로 충분히 명백하므로,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이를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했듯이, 사람들이 치우침 없는 공평한 손길을 유지하도록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이 말씀은 결코 헛되이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번성하기를 원한다면, 우리 가운데 끊임없이 질서를 유지하여 모든 사람이 각자의 권리를 누리게 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비록 전에 복을 주셨을지라도 그 복을 다시 빼앗아 가겠다고 위협하십니다. 세상에서 수많은 변혁과 정권의 교체(changes and alterations)가 일어나는 것을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한 백성에게 복을 주시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태로 세워주셨을 때, 그들은 곧바로 방탕함에 빠져들고 통치자들은 권력을 남용하며, 백성들은 재판장들이 타락한 것을 보고는 악을 행할 방종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어, 그 나라에 베푸셨던 모든 것을 남김없이 흔적도 없이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전례를 너무나 흔하게 목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번영 속에 두셨을 때 더욱 조심스럽게 그분께 순종하며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공의를 지탱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요, 칼을 쥔 자들(위정자들)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그 권력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세우신 질서를 깨뜨렸다는 이유로 우리를 심판대에 세우시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본문에서 기억해야 할 핵심 내용입니다.

이제 모세는 이어서 사람들은 여호와의 제단 곁에 어떤 나무도 심지 말며, 어떤 형태의 주상(image)도 세우지 말라고 덧붙입니다. 이로써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 숭배자나 이방인들과 닮은 점이 전혀 없도록 경계하고 있습니다. 또한, 백성들이 여러 곳에서 제사 지내는 법을 배우거나 그것이 습관이 되지 않도록, 오랜 시간 지속될 만한 어떤 기념물도 세우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에서 모세가 염두에 두고 있는 목적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예배(service)가 이방인들의 모든 미신으로부터 구별되기를 바란 것이요, 둘째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익숙해지되, 오직 언약궤가 있는 그 장소에서만 엄숙한 제사를 드리게 하여 온 나라에 제각기 다른 사사로운 종교가 생겨나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점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이 요구하시고 정하신 대로 예배를 받으시려 하며, 자기 머리로 미신을 발명하고 고안해 내는 자들과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얽히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은 깊이 새겨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께 드려야 할 예배에 대해 이토록 철저하게 단속하시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점을 주목합시다. 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권리를 옹호하고 지키려 드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면서, 하나님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것은 내버려 두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아버지로 고백하며,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그분께로부터 왔고 그분의 손에서 구원을 바란다고 확증하는 이 예배의 영광보다 더 고귀하고 거룩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보다 더 거룩한 것이 과연 존재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대해 말할 때, 귀를 기울여 주의 깊게 듣는 법을 배웁시다. 왜냐하면 이것은 존엄함에 있어서 세상의 그 어떤 다른 것보다도 뛰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한 가지 점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세상이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순종을 바치는 일을 얼마나 하찮게 여겨 비웃는지를 볼 때, 우리가 이 일에 더욱 전심전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만일 누군가 신성모독을 일삼는 자나 교회의 질서를 멸시하는 자, 다시 말해 개와 다를 바 없는 자에게 다가가 그의 사악함을 책망한다고 해 보십시오. 그는 대뜸 내가 누구에게 피해를 주었단 말이오?”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만일 그가 이웃의 뺨을 한 대 때렸거나 우연히 거친 말 한마디를 뱉었다면, 그것이 아무리 작은 잘못일지라도 자기 허물을 인정하며 내가 잘못했소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고작 죽을 수밖에 없는 필멸의 인간에게 지은 죄인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해 정면으로 침을 뱉는 짓을 저지르고서도, 그들은 에이, 아무것도 아니야. 사람에게 해를 끼친 건 아니잖아라며 툴툴거립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런 식의 말들을 듣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고, 그분의 위엄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할 정도로 수치스럽게 훼손되어도, 사람들은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고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의 예배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높은 자리에 놓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삶을 다스려 나갈 때에는 반드시 이 지점, 즉 하나님을 그분의 합당한 가치대로 공경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예배가 이방인들의 모든 미신과 철저히 구별되기를 원하시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음을 잘 주목합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물을 부패시키고 변형시키는 경향이 너무나 강해서, 참된 종교의 순전함을 스스로 타락시키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른 이가 충동질하지 않더라도 자기 내면에 이미 우상 숭배의 창고(a storehouse of idolatry)를 품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우리가 걸림돌과 유혹을 마주치거나 심지어 스스로 그것들을 찾아 나설 때 우리의 처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온전한 예배를 변형시키고 왜곡해 놓은 것이 보이는데, 저것이 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그들에게서 정체 모를 무언가를 빌려와 주님이 내게 명령하신 것에 덧붙여야겠다라고 한다면, 나 역시 내 앞에서 그 못된 짓을 저지른 자들과 똑같은 어리석음의 올무에 곧바로 걸려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쪽이든 저쪽이든 신경 쓰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 마음속에는 이미 수많은 허망한 공상들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의도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찾아 나선다면, 그것은 내 스스로를 사탄의 덫에 던져 넣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너희는 오직 내 말씀의 순전하고 단순함(pure simplicity)을 붙들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이교도나 불신자들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을 때, 이는 자신의 종들을 치명적인 전염병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셨던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당시 이방인들은 종교적 열심을 낸답시고 제단 주변에 그늘을 만들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교황제도(로마 가톨릭) 아래에서 어떤 장소가 어둑 캄캄하면 그곳에 무슨 장엄한 위엄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지한 자들은 동굴 같은 곳에 들어가거나, 붉고 푸른 유리(스테인드글라스)로 창문을 흐리게 해 놓은 곳에 갈 때 압도당하곤 합니다. 눈앞이 어질어질해지면서 어리석고 순진한 영혼들은 일종의 감정적 동요를 느끼며 두려움과 경외감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이 정성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행위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철저한 어리석음에 불과합니다. 이방인들이 나무 자락을 얽어매어 그곳을 어둡게 만든 것도 이와 같은 방식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설 때, 마치 늑대가 뒤쫓아 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 자지러지게 함으로써 어떤 공포 섞인 두려움을 자아내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 사이에 이러한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는 신실한 자들이 그들을 닮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몇 마디 말 속에서 우리는,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기꺼이 받아들이실 만한 방식으로 그분을 섬기고자 한다면, 불신자들을 모방하는 모든 행위가 전면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경고는 모세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필요했던 것만큼이나 오늘날 우리에게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교황제도 안에 이방인들의 미신에서 빌려온 고안물들이 얼마나 가득합니까? 그 안에서 소위 하나님의 예배라고 일컫는 모든 것은, 모세의 율법에서 명령한 것들과 이방인들이 행하던 관습들을 한데 긁어모아 놓은 뒤죽박죽된 더미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그러한 행위를 미화하기 위해 기껏해야 다음과 같은 핑계를 댑니다. , 기독교인들의 교회에는 유대인들의 성전에 있는 것만큼 훌륭한 의식(ceremonies)이 없다고 유대인들이 비웃지 못하도록, 그들의 본을 따르고 이방인들의 예에 따라 이것저것을 반드시 갖추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감히 짐승을 죽여 제물로 바치는 짓까지 저지르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가증한 일이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등잔대와 향유, 화려한 사제복, 제단, 그리고 비록 송아지나 황소나 양은 아닐지라도 일종의 제사 의식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에게는 정결케 하는 씻음의 의식이 있었기에, 가톨릭주의자들은 반드시 성수(holy water)’를 두어야만 했습니다. 요컨대, 그들은 유대인들을 그대로 흉내 냈기에 겉보기에는 유대인들이 자기 성전에 기독교인들보다 더 화려한 의식을 가졌다고 자랑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한 중대한 반역 죄(high treason)였습니다. 만일 그것이 단순한 어리석음에 불과했다면 차라리 참아줄 만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위에 새로운 수건을 드리움으로써 그분의 은혜를 가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에 두도록 명령하셨던 그 휘장은 이미 찢어졌는데, 그들은 인간의 손으로 짠 또 다른 휘장을 다시 내걸기 시작한 것입니다(고후 3:15,18).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히 가려져서, 사람들은 그분 안에서 빛나야 할 마땅한 위엄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살아 계신 형상이시며,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위격(person)과 얼굴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속한 모든 것을 보게 됩니다(고후 4:4,6). 그런데 그들은 그러한 의식들을 통해 방해물을 만들어 냄으로써,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 가운데 한시적으로 정하셨던 것들을 섞어 쓰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방인들의 관습까지 빌려왔습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그들은 핑계거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러한 어리석은 의식들로부터 쉽게 떨어지지 못하니, 차라리 이전처럼 우상의 이름으로 행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이름과 성인들의 이름을 빌려 그것들을 계속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수단을 통해 하나님의 예배는 결국 완전히 오염되고 왜곡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황제도 아래에서 하나님의 예배라는 이름으로 일컫는 모든 것은 온갖 미신이 뒤섞인 비빔밥에 불과하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정하셨다는 것을 전혀 입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 근거를 어디서 가져왔겠습니까? 그저 유대인들과 불신자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것들을 흉내 내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습니까? 사정이 이러할진대, 만일 우리가 이제 와서 그들의 모습을 닮아가고, 한낱 하찮은 장난감이나 다름없는 의식들이 우리 위에 얹어지는 것을 허용하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자들과 너무 달라 보이지 않겠다는 목적으로 그러한 의식들을 지키는 일에 우리 자신을 얽매어 둔다면 그것이 과연 말이 되는 일입니까?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이 말씀에서 정죄하시는 바로 그 부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에 순전하게 순종하는 길에서 물러선 자들과 우리가 조금이라도 닮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예배가 오직 그분의 명령에 따라 개혁되고 확립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할 점입니다.

두 번째 점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드릴 제단을 오직 하나만 두기를 원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오늘날 이것은 더 이상 (외형적으로) 시행되지 않으며, 우리에게는 더 이상 어떠한 물질적인 제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톨릭주의자들이 제단을 사용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고난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완전히 훼손하고 지워버리는 짓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하나님께서 단 하나의 제단만을 허락하신 목적은 자신의 백성을 믿음의 연합(the union of faith) 안에서 보존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어서 성경은 그들이 특정 장소에 장구하게 지속될 만한 어떤 기념물도 세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그러한 수단을 통해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길들여지거나, 종교적 열심을 핑계로 사사로운 예배당을 만들어 결국 모든 것을 망쳐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제사를 드리는 곳에 어떤 나무도 심지 못하게 금지하신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소는 결국 시온산 위에 세워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순전하게 섬기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그곳으로 나아가 자신들이 한마음으로 일치하며, 믿음의 참된 연합을 이루고 있음을 나타내어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거룩한 성찬을 남겨주셨습니다. 이는 그분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자신의 권능으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보증입니다. 그리하여 비록 그분이 하늘의 영광 위로 높이 올림을 받으셨을지라도, 우리가 그분께 접붙임 바 되어 그분의 몸의 지체가 되고, 그분과 하나의 공통된 생명을 나누며, 한 마디로 그분의 실체(substance)로 먹임을 받고 양육되는 일에는 결코 막힘이 없습니다(딤전 3:16; 5:30; 8:56,57).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신비(secret)이기 때문에, 그분은 성찬이라는 눈에 보이는 표징을 통해 이를 우리에게 보증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식탁으로 나아옵니까? 우리가 그곳에서 받는 떼어낸 빵 한 조각과 포도주 한 모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우리의 양식이시며, 우리가 그분 안으로 완전히 한 몸을 이루어 그분 자신의 고유한 생명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음을 우리에게 생생히 나타내 줍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며,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 필연적으로 그분께로 함께 모여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교황제도(로마 가톨릭) 안에서 무슨 짓이 자행되었는지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성찬을 받기 위한 식탁이 그곳에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제단(Altar)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벌써 첫 번째 부패였습니다. 내가 이미 말했듯이, 그 어떤 인간도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제물로 바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제사장 직무는 오직 그분 자신에게만 속한 고유한 것이었고 그분이 온전히 성취하셨으니,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단번에 드려진 그 제사를 감사함으로 받기만 하면 될 뿐, ‘제단이라는 말은 아예 치워버려야 마땅합니다(9:11,1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 하나의 식탁을 두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반드시 세 개나 네 개를 두려 합니다. 저마다 자기 사사로운 예배당(chappel)을 짓고는 그곳에 제단을 버젓이 세워놓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하나의 제단을 두는 것 자체가 (구약의 배경에서) 본래 좋은 뜻이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그런 식으로 제각기 사사로운 예배당들을 지어댈 때 그것은 믿음의 연합을 깨뜨리는 짓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뜻은 오직 하나의 공통된 성찬(common supper)이 있어 그분의 온 교회가 함께 모이는 것이며, 그 성찬을 받는 행위가 신실한 자들을 그분과 하나로 묶어주는 참된 끈(band)이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쪽 구석에 가서 자기들만의 기도를 드리고, 저쪽 구석에 가서 또 미사를 노래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짓이며,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을 들어앉히는 행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전을 단지 돼지우리로 만들 뿐만 아니라, 온갖 가증한 일과 우상 숭배가 들끓는 악취 나는 감옥으로 전락시키는 짓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바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에게는 소나 양을 잡던 옛 제사의 의식은 없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며,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에 그 어떤 것도 덧붙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12:32).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예배받기를 원하시는지 깨닫고 그것을 온전히 따르되, 감히 인간의 생각을 거기에 보태지 않겠다는 이 규칙을 흔들림 없이 단순하게 지켜나가야 합니다.

이제 모세는 또한 하나님께 바치는 짐승은 어떤 결함이나 흠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우리가 우상 숭배자들과 얽혀서는 안 되며, 그들의 미신을 조금도 본받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참된 종교는 오직 그 순전하고 단순함 속에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허망한 종교적 열심에 한눈팔지 않고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자들은, 더 나아가 하나님을 온전하게(soundly)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하듯 하나님 앞에서의 의무를 대충 얼렁뚱땅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리를 얼마나 속여 빼앗는지 똑똑히 봅니다. 사실 우리는 사람에게 빚을 지면 어떻게든 이리저리 갚아 나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빚을 졌을 때에는, 어떻게 해서든 그분으로부터 도망칠 궁리만 합니다. 물론 우리가 사람도 속이려고 애쓰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사람 앞에서는 하나님을 대하듯 감히 대놓고 농락하는 방종을 부리기는 부끄러워합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에게 세금이나 임대료를 가졌다면, 양심이 불량할 경우 감출 수만 있다면 숨기려 들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심하게 덜미를 잡히지는 않으려 조심하는데, 그렇게 해 봐야 얻을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서로에게 진 빚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청산을 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부르시고 위협하시며, 우리의 의무를 똑똑히 보여주신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분을 속이기를 그치지 않으며, 심지어 그 일에 대해 완전히 수치심마저 잃어버렸습니다. 물론 말로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섬기는 것이 당연히 옳지라고 서슴없이 내뱉지만, 정작 그 섬김은 꼭 자기네 방식대로 하려고 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바른 순종(right obedience)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께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래, 우리도 하나님께 의무를 다해야지라고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면서, 실상은 그분을 조롱하는 방식으로 행합니다. 그리하여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몇 가지 의식을 행해 놓고는, 하나님께서 마땅히 그것으로 만족하셔야 하며 만일 그 이상을 요구하신다면, 우리를 너무 혹독하게 대하시는 것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흠이나 점이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제물로 바쳐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이 한 가지 규례(제물)를 들어 신앙생활 전체를 포괄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절반만, 혹은 토막토막 조각난 방식으로 섬겨놓고는 다 빠져나갔다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온전하고 철저하게 나아가 모든 면에서 그분께 우리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더욱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죄가 오직 장차 드려질 제물을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서 깨끗이 씻겨질 수 있다는 훈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음을 이 세상 너머로 들어 올려 참되신 진리를 바라보며 이렇게 고백해야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의 빚을 청산해 줄 대속의 지불이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분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하실 것이며, 우리가 매여 있던 사망의 줄(bond)에서 우리를 건져내실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제물은 반드시 순전하고 깨끗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그 제물들을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함 가 될 수 있었고, 그들의 믿음이 세상 위로 고양되어,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우리 편에서 가져올 수 있는 만족이나 제물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가 그분께 드려야 할 부족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채워주셔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가 이미 설명한 바를 일반적으로 명심해야 합니다. 곧 모세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우리가 그분께 온전히 바쳐야 하며, 그분이 실망하시거나 마땅히 받으셔야 할 것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함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에 대해 불평하시는 것을 듣는데(1:13,14), 곧 유대인들이 십일조와 첫 열매를 바치기를 완전히 거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반만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쪼개진 마음을 용납하지 않으시며, 어린아이처럼 조롱당하실 분이 아닙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때 그저 감정에 치우쳐 일시적으로 발작하듯 행하다가 이내 게으름으로 되돌아가서는 안 되며, 그분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하고 충실하게(soundly & substantialy) 행해야 함을 배웁니다. 또한 우리가 행하는 일에 위선이나 억지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그럴듯한 겉모습을 꾸미면서 마음 한편에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뒷방(a back shop)을 은밀히 숨겨두어서는 안 되며, 내가 앞서 말했듯이 자원하는 자유로운 마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본문에서 기억해야 할 실질적인 핵심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소나 양을 제물로 바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우리 자신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입니다(12:1).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그분께 봉헌되고 그분이 인정하시는 용도에 맞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부정함에 불과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게 무언가를 주셨는데 내가 그것을 남용한다면, 나는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정결한 목적을 위해 구별해 놓으신 것을 더럽힌 셈이 되므로 하나님 앞에 배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물로 바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아무런 흠이나 점이 없이 온전하게 드려야 한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물론 우리에게는 그러한 완벽함이 있을 수 없기에, 우리가 그분을 섬기는 모습 속에서 아주 큰 허물들이 발견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이 원칙, 곧 우리가 거짓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원칙을 붙들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 안에 연약함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피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점과 흠은 그분의 보혈로 깨끗이 씻겨 나가기 때문입니다(요일 1:7; 13:15). 성경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린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편에서 온전히 깨끗하게 드릴 수 있는 제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찬양의 제사(the sacrifice of praise)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모든 좋은 것이 그분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할 때, 우리의 그러한 행위는 깨끗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술은 너무나 부정하여 우리 스스로는 이 의무조차 온전히 다할 수 없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해야만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제사에는 이런저런 흠과 악덕이 묻어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억지나 의무감, 혹은 위선 없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이 온전함과 건전함(roundness & soundness)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가 이 지점에 이를 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제사를 마치 전적으로 순결하고 완전하며 아무런 흠이 없는 것처럼 기쁘게 받아주실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내가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반드시 그분 위에 기초를 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러한 미덕이 있다면, 즉 우리가 위선에 얽매이지 않고 억지나 강요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제사를 기꺼이 받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할 때에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 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겉으로 그럴듯한 외양만 꾸며놓고는 그것으로 만족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곤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고 자부하지만, 실상은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양도하기 위해 내면 깊숙이 들어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 안에 어떤 악이 섞여 있는지를 발견하여 그것을 정화하기 위해 자신을 철저히 진단해 본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시작했어야 할 출발점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 억지로 하는 것처럼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가능하다면, 우리는 모든 순종의 의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결산하는 자리를 영영 피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리어 우리는 자유롭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섬겨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의 모든 생각과 모든 감정 속에서 우리의 온 삶을 그분께 봉헌하는 이 실질적인 온전함(substantial soundness)을 지녀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합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감각과 욕망이 그분께 사로잡히고, 그분이 우리를 다스리시어,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 오직 그분과 그분의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것이 되게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을 그분의 뜻에 맞추어 나가면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손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방식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의 제사는 순결하고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이 외에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것을 그분께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점을 역시 기억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구제 활동을 할 때, 각 사람은 자신이 받은 은사를 교회의 공동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들이야말로 흠이나 점이 없을 때에만 비로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사(sacrifices of good sent)가 됩니다. 어떤 사람이 야망과 허영심에 이끌려 행동하면서도 겉으로는 교회를 세우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자는 자신이 하나님께 그 어떤 것도 바치지 못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은사를 맡기신 하나님의 손으로 그것들을 다시 돌려드리지 않고, 그분이 명령하신 용도대로 쓰지 않아 올바른 목적을 잃어버릴 때, 그것은 전적으로 가증한 짓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이 구제를 행할 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고 대접받으며 영광을 얻고자 하는 허망한 야망에 이끌린다면, 그런 방식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 부정함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의 제사가 흠이나 점이 없도록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더 나아가, 교회의 질서와 다른 모든 통치 체제와 관련하여서도, 우리는 우리가 드리는 모든 제사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있도록 이처럼 정결케 되어야 함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의 교리를 전파할 목사(Ministers)를 세우는 일, 그리고 위정자(Magistrates)를 세우고 관료(Officers)를 선출하는 일은 모두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흠 없이 바쳐야 합니다. 만일 누군가 이러한 중대한 일에 조금이라도 부패와 타락을 끌어들인다면, 내가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중대한 반역 죄(high treason)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이 자성해야 합니다. 비록 이러한 규례들이 문자적으로는 의식(ceremonies)의 시대에 유대인들에게 부과된 것이었을지라도,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효력과 가치를 지닌 영적 제사들에 이 말씀들을 적용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이를 온전히 성취하기 위해 우리는 야고보 사도가 말한 바, 한 가지를 명령하신 이가 다른 것도 명령하셨고, 한 가지를 금하신 이가 다른 것도 금하셨다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2:12).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와 봉사 속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지분을 쪼개듯 마음을 나누어 내가 이것만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할 테니,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좀 봐주시고 내 마음대로 하도록 허락해 주시겠지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감히 하나님과 동격이 되려 하는 오만한 짓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의(righteousness of the law)란 결코 쪼갤 수 없는 것이며, 우리 마음대로 갈기갈기 찢어발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율법에 담겨 우리에게 주어진 이 규칙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복종시킵시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우리는 두 마음을 품거나 거짓되이 행해서는 안 되며, 오직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굴복시켜야 한다는 점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처음부터 바라는 만큼 그 경지에 온전히 도달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조준하고 나아가야 할 푯대(mark)인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 진정으로 요구하고자 하신 바가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격동되어 온전하고 실속 있게(soundly and substantially) 행하도록, 모세가 결론으로 덧붙인 말씀, 곧 그것이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abomination)”이라는 표현에 또한 주목합시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모든 행위가 오직 기만과 위선뿐일지라도, 자신들이 하나님을 계속 섬기고 있다고 늘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위선자들이 이러한 허망한 자만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행위가 온통 거짓투성이일지라도 겉보기에 화려한 단장과 그럴듯한 겉치레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빚을 지시는 줄로 생각하며 모든 것이 다 잘되었다고 여기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도 자기들에게 아무런 허물이 없다고 감히 완전히 부인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받아주실 만한 선한 면이 자기들에게 많이 있다고 여전히 사람들을 속이려 듭니다. 예를 들어, 가톨릭 사제들이 아침 기도(prime)와 성무일과(hours)를 바칠 때를 보십시오. 그들은 입으로 그저 중언부언할 뿐이며 마음은 딴 데 가 있습니다. 누구는 자기 집 부엌을 생각하고, 누구는 자기 정부(harlot)를 생각합니다. 물론 그들도 이것이 잘못된 일이며 기도할 때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은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어쨌든 하나님께 기도하려는 최종적인 의도(final intent)를 가졌으니, 그것은 선하고 칭찬받을 만한 행위라고 주장합니다. 마음에 다른 생각이 가득할지라도,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을 섬기려는 최종적인 의도를 품었으니, 그들의 성전 출입은 매우 큰 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상(puppet)에게 절하고 성수를 조금 찍 바른 뒤에는, 여인을 음란한 눈으로 바라보든, 탐욕에 사로잡히든, 혹은 마음속으로 다른 악하고 부끄러우며 지옥 같은 정욕에 사로잡혀 있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앞서 말한 최종적인 의도만 있으면 만사형통이며, 온갖 수단으로 하나님을 모욕하면서도 겉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시늉만 내면 다 괜찮다는 식입니다. 그들의 금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불량한 짓과 방탕함에 스스로를 내던질지라도, 종교적 열심으로 금식을 행하기만 하면 , 저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다라며 더 이상 아무런 허물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위선자들은 자신들이 부과 받은 이 속임수 가득한 쓰레기(pelting trash)를 바쳐 하나님과 거래를 끝냈다고 믿는 그 거짓되고 마귀적인 미신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합니다. 실상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에 불과하며, 그들은 삶의 나머지 모든 영역에서 그분을 모욕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마음에서 나오지 않은 모든 행위를 전적으로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아무리 말해도 결코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11:20). 그러므로 모세가 최종 결론으로 세워둔 이 말씀, 곧 그러한 행위들이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라는 선언을 우리가 깊이 새기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참으로 눈멀고 무지한 가련한 자들은 그것이 가증한 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를 칭찬하며 보라, 참으로 훌륭한 미덕이요, 참으로 큰 공로다라고 치켜세웁니다. 그러나 우리는 위대한 재판장 앞에 서야 하며, 그분은 이미 그러한 것들이 한낱 쓰레기요, 더러움이며, 허무맹랑한 것에 불과하다고 선고하셨습니다. 더욱이 그분은 그것을 단순히 허무하다고만 하지 않으시고, “철저히 가증한 것이자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마치 우상인 양 농락할 뿐만 아니라, 그분을 향해 정면으로 거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눈먼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면, 감히 위선으로 가득 찬 두 마음을 품고 그분 앞에 나올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지러졌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런 식으로 위선을 부리는 것은, 마치 하나님의 눈을 가려 자신들의 기만과 저주받을 위선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원하는 마음이나 진실하고 실속 있는 온전함 없이 행할지라도, 자신들이 선을 행하고 있으며 하나님 앞에 공로를 세우고 있다고 스스로 합리화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결코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을 깊이 명심합시다. 그러한 어리석은 생각들을 마음에 품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행위들을 아무 가치 없는 하찮은 짐짝으로 여겨 거부하실 뿐만 아니라, 자기 앞에 전적으로 가증한 것이라고 확언하시며, 자신의 예배가 이토록 수치스럽게 왜곡되는 것을 결코 묵과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무서운 진노로 보응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스스로를 살피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읍시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감정이 부패하여 그 안에는 오직 배설물과 부정함밖에 없음을 볼 때, 우리는 그분의 성령께서 우리를 참되게 개혁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진정으로 그분을 섬기고 공경하게 하시며, 그분이 주신 것들을 선하고 거룩한 용도에 맞게 사용하게 해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기쁘게 섬겨 우리의 온 삶이 그분의 영광에 온전히 봉헌될 때까지, 그분의 순종 안에서 더욱더 자라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행할 수 있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피합시다(벧전 1:19). 그리하여 그분이 약속하신 대로 우리의 모든 점과 흠이 그분의 순결하심과 온전하심으로 깨끗이 씻겨 나가게 합시다. 우리가 이처럼 행할 때, 비로소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기쁘게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 위엄 앞에 다 함께 무릎을 꿇고 우리의 죄를 자복합시다. 우리가 지은 허물을 참되게 깨달아 이제부터는 돌이켜 삶을 고치고 그분의 자비하심을 의지할 수 있도록 구합시다. 또한 그동안 우리를 그분의 율법에 순종하도록 참되게 개혁해 주시어, 우리의 온 삶 속에 그 순종이 밝히 빛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해 주시고, 마침내 우리를 그 모든 연약함으로부터 흔적도 없이 완전히 건져내 주시기를 간구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다 함께 고백합시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