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회 설교: 17장 네 번째 설교
1555년 11월 20일 수요일
신 17:14-18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지금까지 모세는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모든 성읍에 임명된 재판장들에 대해, 그리고 특히 모든 일들이 위탁되었던 최고 재판장에 대해 말해왔습니다(신 16:18). 이제 그는 만일 백성이 왕을 세우고자 한다면, 그 왕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을 추가합니다. 그리고 첫째로 그는 왕이 반드시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택해져야 한다고 규정하며, 둘째로 왕이 그 범위를 넘어가지 않고, 왕의 역할을 하는 대신 폭군 노릇을 하지 않도록, 그의 직무를 선언합니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모세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그분의 친히 가지신 권위로 왕을 세우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을 백성의 뜻에 맡겨두시는지 그 이유를 고려해야 합니다. 만일 그분께서 왕의 제도를 허락하셨거나, 혹은 그것이 그분께서 매우 좋게 여기신 일이었다면, 그분께서 길을 보여주셔서 백성이 그분께서 명령하셨을 무엇이든지 순종하게 하셨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분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것을 누릴 때에, 만일 네가 다른 민족들처럼 왕을 세우기를 원한다면”이라고 하십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유대 땅에 어떤 왕국도 있는 것을 원치 않으셨으나, 만일 백성이 왕을 너무나 갈망하여 그것으로부터 억제될 수 없다면, 그때에는 허용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그들에게 허락하셨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창세기에서 실로(보냄을 받을 자)가 오고 나타날 때까지 홀이 유다 지파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가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듣습니다. 이 예언은 백성에게 임할 저주도 아니었고, 하나님의 보복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다른 모든 것 위에 더해진 독특하고 특별한 은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함으로써, 야곱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구원이 전파되게 하실 영원한 왕을 세우실 것임을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백성이 여전히 그분에 대한 소망 안에서 유지되는 것이 마땅했으니, 하나님께서는 그분에게 유다의 왕국과 그 지파 전체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몇 마디 말 속에서, 이 왕국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그 백성에게 주신 보증과도 같았음을 보는데, 유다의 왕들은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와 같이 백성을 하나님의 보호 아래 붙들어 두는 역할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군주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불리고 그분의 대리자들이라 불릴지라도(시 8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왕국은 더욱 특별하고 거룩한 방식으로 그 칭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머리가 되시는 것이 모든 행복의 온전한 성취였기 때문에, 그분의 백성 가운데 왕이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봅니다.
사람들을 다스리는 정치 체제(government)에 관하여 논쟁이 일어난다면, 자유로운 국가가 군주의 통치를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문제에 대한 논쟁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러한 논쟁은 그리 유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군주의 통치 아래 있는 사람들은 어떤 변경을 가하려고 마음을 변덕스럽게 바꾸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유와 해방(liberty and freedom)을 주신 사람들은 그것을 충분히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독특한 은혜이자 보화로서 감사함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유다 왕국에 관해서는, 내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 안에 특별한 고려 사항이 있었으니, 곧 그것이 우리를 자신에게로 모아 하나님의 교회와 그 자신의 양 떼로 삼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의 모형이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온 세상의 모든 정치 체제보다 더 낫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군주제나, 의회의 자유로운 국가나, 혹은 공화국을 위해 상상할 수 있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의 복지를 책임지시려는 목적으로 그 자신의 인격 안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며, 그분의 독생자를 그 직무와 존귀 위에 세우심으로써, 우리에게 주시는 그 은혜와 비교한다면, 여러분에게 묻건대 우리가 각자 왕과 황제가 되는 것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아래 있고, 그분께서 우리의 최고 주권자이자 왕으로서 우리를 다스리시게 하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재판장들을 임명하셨음으로써, 백성이 공동으로 다스림을 받고 그들 사이에 군림할 법들을 가지는 것, 곧 상속에 의한 세습이 없고 오직 [직무를 맡도록] 선출된 자들조차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회계할 의무가 있으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행하거나 “내가 이것을 원하노라, 이것이 이렇게 행해지리라”고 말할 절대적인 자유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 사람들이 바랄만한 일임을 그분께서 그로 인해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재판장들의 손을 통해 그 자신의 백성을 다스리셨을 때, 이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같은 이유로 그분께서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머리가 되어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요구한 것에 대해 그들을 책망하시고 비난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이 잘못을 행한 대상은 네가 아니다”라고 하십니다(삼상 8:7). “네가 내가 세운 자이기에 내 권위를 집행한 것은 사실이나, 그들의 배은망덕과 불순종은 나를 건드리는 것이니, 곧 그들이 내가 그들을 다스리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도다.” 그리고 그 후에 그분께서는 더하시기를, “좋다 그러면 그들이 왕을 가지게 하라,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고통이 될 것이니, 왜냐하면 그가 그들의 집들을 약탈하고, 그들의 아들들과 딸들을 빼앗아가며, 그들의 재산을 소비하고, 그들에게 세금과 공세를 부과할 것이며, (요약하자면) 그들을 비참한 노예처럼 다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왕을 요구함으로써 무엇을 얻었는지 보십시오.
그리고 이 본문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의 정치 체제의 관점에서는 그분께서 있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상태를 택하셨음을 보여주시니, 곧 법이 백성 위에 군림하고, 그와 동시에 어제 선언된 바와 같이 문제들이 결정되고 결론지어질 목적으로 모든 성읍에 재판장들이 있고 전체 위에 최고 통치자가 있게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남겨두신 가장 고귀한 조건,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다스리셔야 한다는 조건을 수반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한 머리 아래 있는 것이 마땅했으나, 단순히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의 머리 아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머리 아래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은혜가 나타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소망이 어떤 모형으로 양육되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야곱의 입을 통해 홀이 유다 지파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약속된 이유였습니다(창 49:10).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한 지파를 택하셨고, 그분께서 왕을 세우고자 하셨을 때, 그 왕의 통치가 참된 후사이자 왕관이 속한 바로 그 당사자이신 그 자신의 아들,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그분의 백성 가운데 왕국을 세우고자 하셨는지에 대한 간략한 선언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정치 체제의 관점에서는, 가장 좋고 가장 바랄만한 상태는 재판장들을 두는 것, 즉 자유 속에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에 의해 지배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로 인해 우리는 비록 모든 세상의 정치 체제가 거룩한 것이자 인간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유익한 것으로 존중받아 마땅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행정관들이 법이 정당한 과정을 가지는 방식으로 다스리는, 폭정이 없는 온건한 종류의 정치 체제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실 때, 그것은 특별한 특권이며, 우리는 그때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고 그분의 권속으로서, 그리고 그 자신의 양 떼와 그 자신의 기업인 자들로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한 가지 요점으로 주목하십시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는 또한, 우리가 이 현세적이고 일시적인 삶 속에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될지라도,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하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독생자의 손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을 허락하시는 이 은혜를 우리가 높이 찬양하거나 칭송해야 하고, 참으로 우리는 그것을 세상의 모든 자유보다 더 많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왕국들과 제국들보다도 더 많이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곧 이 점이 다시 새로이 언급될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고자 하셨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이 왕을 요구할 때까지 기다리셨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열망을 품게 하셔서, 나중에 세워질 왕에 대해 그들이 반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백성의 배은망덕과 악의는 하나님께서 이미 세우신 정치 체제에 자신들을 붙들어 둘 마음을 갖지 못했다는 점에서 스스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첫날부터 그들 가운데 군주제를 세우셨다면 그것이 어떤 일이 되었겠습니까? 왜냐하면 선거와 선택에 의해 움직이며 직무를 집행할 때 자신들이 법에 복종해야 함을 아는 통치자들을 두는 것이, 자신의 말이 곧 이유가 되어야 하고 아무리 아주 어린 아기일지라도 그의 자녀가 상속하여 결과적으로 순종 받아야 하는 왕을 두는 것—비록 그가 세상에서 가장 고집 센 바보이거나 가장 잔인한 사람일지라도—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견딜 만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재판장들과 통치자들을 두는 것이 훨씬 더 견딜 만한 상태입니다. 이제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이 상태를 용납하지 못하고 악한 욕망을 통해 반드시 왕을 얻고자 구했다면, 만일 하나님께서 첫날에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집이나 저 집을 너희를 다스리도록 세우니 너희는 그 왕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하셨다면 그들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원망이 있었겠으며, 얼마나 많은 모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윗이 왕이 되어야 할 때 반역할 기회가 없도록 하기 위해 백성에게 원할 마음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봅니다. 왜냐하면 정말이지, 그들이 사울 왕을 요구한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이웃 나라들에 대해 품었던 어리석은 야심과 시기심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애굽과 에돔과 암몬과 수리아와 다른 나라들에 어떻게 왕들이 있는지를 보았을 때, 자신들 가운데는 왕좌가 없기 때문에 자신들 사이에는 그러한 존귀함과 위엄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그들은 왕을 가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어리석음을 보십시오. 그들이 사울을 택했을 때, 비록 그가 그들을 괴롭게 하고 그들을 가능한 한 많은 곤경에 처하게 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에게 너무나 얽매여서 반드시 그 왕관을 그의 자녀들에게 유지하려 했고 다윗이 다스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습니다(삼상 5:20). 비록 하나님께서 다윗이 그분께서 택하신 사람임을 선언하셨고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왕이 될 다른 사람을 택할 권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은 사울의 아들을 택했으니, 말하자면 “우리는 이 집안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원하노라”고, 참으로 마치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처럼 행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듯이) 다윗이 그의 왕국에서 유지된 것이 하나님께서 그를 보존하시기 위해 그분의 손을 뻗으신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었습니까? 백성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윗에게 반역하는 데로 떨어졌고, 압살롬의 예는 그 반란이 너무나 커서 다윗이 그의 신하들 대부분에게 버림받았음을 보여줍니다(삼하 15:4). 그렇다면 백성이 미리 길들여진 것이나 다름없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목적 안에서 결정하셨던 그 왕국은 결코 자리 잡지 못했을 것이며, 그들이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고는 그것에 복종하지 않았을 것임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이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백성은 자신들이 왕을 요구함으로써 그 일에 준비되었고,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기대가 무너졌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이 구원을 얻게 될 그 복된 왕국을 첫 장에 세우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이며, 그분께서는 베냐민 지파에서 왕을 택하셨으나 여전히 홀이 유다 지파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던 것에서 돌이키십니까? 이 일이 행해진 것은 그분께서 변덕스러우시거나, 그분께서 후회하시거나, 그분께서 그 예언을 성취하고자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백성의 선동적인 성향 때문에 그분의 복이 그렇게 일찍 나타나게 할 마음이 없으셨기 때문이며, 그것과 관련하여 그분께서는 백성이 자신들의 허물을 인정하고 그것을 회개할 때까지 그 일을 행하셨거나 적어도 지체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왜 이 본문에서 그의 백성을 다스릴 왕을 택하는 것을 자신에게 유보하지 않으시고 “네가 왕을 요구하리라”고 말씀하시는지 충분히 보여줍니다. 그것은 그의 통치가 더 큰 권위를 가지게 하고, 그가 그의 백성에게 더 큰 사랑을 받게 하여, 모든 사람이 그에게 복종하고 그로 인해 다윗의 집 아래 있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이 없음을 매우 진실로 알게 하기 위함이었으니, 왜냐하면 그 집은 구원과 모든 좋은 것들의 온전한 성취를 가져오실 하나님의 아들의 그림자이자 모형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봅니다. 하나는 우리 주님께서 백성이 왕을 구하는 데 있어 그분보다 앞서고자 했던 그들의 집요함을 책망하시는 것이니, 마치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는 내가 왕을 만드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구나. (내가 너희를 결코 잊지 아니하고 너희 가운데 그러한 질서를 세워 너희가 나에게 감사하고 나의 선하심을 기뻐할 이유를 가지게 하리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너희는 너무나 악하고 삐뚤어져서, 내가 너희에게 재판장을 주었을 때 왕을 구하는구나. 그리고 너희의 이 삐뚤어짐이 나로 하여금 내가 임명했고 나 자신에게 유보해 둔 왕국, 즉 유다 지파의 왕국을 세우지 않게 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서는 그 왕국을 세우실 것임을 보여주시지만, 그것은 백성이 순종하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지고 자신들의 죄를 인정한 후가 될 것이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그리고 적절한 때가 이르기 전에 변화를 탐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이 모든 구절들이 쉽게 일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우리는 좋은 교훈을 얻을 수 있으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은혜나 그분의 자비의 징표를 약속하셨을 때,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제어해야 하며, 우리가 원할 때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을 행하시라고 그분께 도전하듯 달려들어선 안 되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에 속한 어떤 것을 약속하심에 있어 우리를 실망시키고자 하신 것이 아님을 결과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실 때까지 잠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일반적인 규칙이 있으니, 곧 하나님의 모든 약속 안에서 우리는 인내해야 하며, “이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지체하시는가? 왜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손에서 바라던 일을 성취하지 않으시는가?”라고 말할 정도로 조급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성의 예가 우리가 이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음을 보면서, 그러한 조급함을 조심합시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것을 약속하셨을 때, 그것의 합당한 때가 스스로 이를 때까지 잠잠히 있읍시다. 그렇다고 이것이 우리가 그것을 위해 그분께 기도하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엇 때문에 그분께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부르시고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시겠습니까?(빌 4:6)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모든 염려와 슬픔을 그분 위에 쏟아 붓고 그것으로부터 위로를 얻게 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조급함에 빠질 때 하나님께 족히 기도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우리는 항상 모든 일을 그분께 위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자신의 상상이 아니라, 그분께서 친히 그분의 목적 안에서 결정하신 바에 따라 일들을 처분하시는 것이 마땅하고 당연한 이치입니다. 또한 내가 앞에서 언급했던 바를 마음속에 간직합시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합당한 상태를 주셨고 우리가 재판장들과 행정관들에 의해 다스림을 받아 법들이 우리 위에 군림하고 있음을 볼 때, 우리는 그 은혜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며, 이것이나 저것을 갈망하고 “왜 그것은 이렇게나 저렇게 되지 않는가?”라고 말하는 우리의 어리석은 변덕스러움으로 그분의 진노를 자아내지 않도록 크게 주의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굳이 우리 자신의 기쁨의 방식에 따라 일들을 바꾸고자 할 때, 우리는 사람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며, 그분께서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시게 하려고 그분을 우리에게서 멀리 밀쳐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약하자면, 우리 가운데 어떤 형태의 정부(정치 체제)가 있음을 볼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배우고 그분의 날개 그늘 아래 머물며, 어리석은 야심을 통해 이것이나 저것을 구하지 않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왕을 택해주신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단지 그들의 악한 욕망을 벌하기 위함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바로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그분께서 세워진 왕, 곧 사울에게 큰 범위를 주시며 말씀하시는 것을 봅니다. “너는 군주로서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그가 너희 위에 온갖 종류의 폭정을 행할 것이니, 너희는 너희의 이가 갈릴지라도 그것을 견뎌내야만 하리라”(삼하 8:11).
그러나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은혜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으로 돌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그 밖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누리고, 여기에서 더할 나위 없이 큰 기쁨과 부유함 속에 살아가며, 우리에게 가능한 한 가장 온화하게 처신하는 통치자들을 가질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스리시며, 모든 권세를 잡지 않으신다면,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님을 스스로 확신해야 합니다. 반대로, 비록 우리가 육체를 따라 고통을 받을지라도 (우리가 수많은 사람들이 폭정으로 극심하게 괴로워하는 것을 보듯이), 그리고 우리에게 먹을 빵조차 없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그 복되심은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되어야 하며, 우리는 우리를 다스리시는 그분의 통치의 위로를 얻을 수만 있다면, 모든 고난을 인내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홀은 왕들과 군주들이 어느 시대에나 가졌던 왕의 홀과 왕관의 방식에 따른 물질적인 홀이 아니요, 그분께서 현존하신다는 참된 징표인 복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서 어떻게 우리를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는지를 보는데(시 110:2; 사 2:3), 그분께서 우리가 그분의 복음의 교리에 의해 믿음의 일치 안으로 함께 모이기를 원하시고, 그 방법으로 하나님의 기업이 되게 하신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것의 확실한 보증을 가집니다.
이제 모세가 왕의 직무에 관하여 추가하는 내용으로 넘어갑시다. 그는 첫째로, “왕이 백성 가운데서 택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친형제들 중에서 한 사람을 택할 것이요, 타국인을 찾아 구하지 말지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확실히 야곱의 예언에 따르면, 왕은 유다 지파 중에서 택해져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혈통 전체에 대해 일반적으로 말씀하시고, 왕의 가문을 이름으로 지명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그 예언을 흐리게 할 의도가 없으셨던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언급된 바를 주목해 봅시다. 곧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족장 야곱의 입을 통해 약속하셨던 그 은총이 백성의 배은망덕으로 인해 아직은 얼마 동안 숨겨져 있어야 했다는 점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렇게 오랜 시간 전에 그것을 말씀하셨던 반면에, 이제 삼백 년가량이 지난 끝에 그분께서는 너희 가운데 왕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삼백 년 전에 발해지고 야곱의 입을 통해 선포되었던 그 예언이 사라져 버리고 아무런 효력이 없게 되겠습니까? 율법이 공포될 때 그것이 훨씬 더 명확하게 제시되었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백성이 그 앞에 마치 베일을 드리운 것과 같아서, 그분의 은총이 빛으로 나오는 대신에 마치 어둠 속에 숨겨져 있어야만 했음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 본문에서 이전에 하셨던 것처럼 가문을 지정하지 않으시고, “너는 네 형제들 중에서 왕을 택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보여주고자 하셨던 바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어떠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총을 얼마 동안 유보하신 것이 그것을 완전히 폐지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때 그분께서는 유다 지파에서 왕을 세우시겠다는 그분의 약속을 지체하셨으나, 그렇다고 그분의 백성에게서 그 소망을 완전히 빼앗아 버리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백성들 스스로가 중단을 초래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징책하시는 중에도 자비로운 선하심을 베푸시고 그분의 엄격함을 완화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 임명하셨던 바는 그것의 시간이 연장되었을 뿐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 백성의 허물을 징책하시기 위해 얼마 동안 그분의 은총을 숨기시어 그것이 명백히 보이지 않게 하실지라도, 결국에는 그것이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그분께서는 자신의 무한한 선하심으로 우리의 악함을 이기시며, 우리는 그것을 경험을 통해 봅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실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상황이 어떠할지라도, 우리는 유대인들의 예를 통해 만일 우리 주님께서 언제고 우리에게서 자신을 거두시고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인다면, 우리 자신의 허물이 그 원인임을 배워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삐뚤어져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그분의 약속을 이행하시려고 손을 뻗고자 하셨을 때, 그분의 손을 뒤로 잡아끌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루에 얼마나 여러 번 그분의 진노를 자아내기 때문입니까? 그리고 그것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그분의 선하심에 참여하는 자로 만들지 못하시도록 그분을 향해 문을 닫아거는 일종의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그러한 방식으로 그분의 은혜를 밀쳐내었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 즉시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며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비록 얼마 동안 그분의 약속의 성취를 지체하셨을지라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우리가 그것들을 완전히 빼앗기지는 않게 하시고, 우리가 얼마 동안 기력을 잃고 우리의 죄과로 인해 징책을 받은 후에 반드시 다시 돌아와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을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은 우리가 그 본문 위에서 거두어야 할 실질적인 내용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타국인을 자신들의 왕으로 두는 것”을 금하신 데에는, 우리가 잘 주목해야 할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그 왕국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 성례였다는 점이며, 그러므로 그것이 불신자나 우상 숭배자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룩한 것들을 더럽히는 일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방의 왕들이 자신들과 같은 자들을 다스렸다면, 그것은 놀라워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어떤 불신자 왕들이 바벨론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나중에는 아시리아의 왕들에 의해 행해진 것처럼 폭정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렸을지라도(왕하 17:6; 25:2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독특한 종류의 통치 체제를 가지고 계셔서 그 백성이 그 자신의 집 안으로 함께 모였음을 마치 거울 속에서처럼 보여주셨다는 이 예외가 항상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타국인이 다윗의 왕좌에 세워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배신행위였을 것이며, 그 욕이 하나님과 그분의 독생자에게 돌려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왕국이 다윗의 혈통 안에서 굳게 세워졌을 때,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는 이 약속이 추가되었기 때문입니다(시 2:7; 히 1:5). 그리고 사도는 그것이 너무나 영광스러운 칭호여서 심지어 천사들에게조차 속하지 않은 것이었다고 선언합니다. 천사들이 때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어떤 추가적인 말 없이는 되지 않는 반면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피조물보다 앞서시기 때문에 그 칭호를 가지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만일 그들이 우상 숭배자를 택하여, 무한한 은혜 안에서 확립되셨고, 그분의 신성한 위엄의 표상이시며, 세상의 모든 정사들 위에 계시고, 참으로 피조물의 관점에서는 하늘 자체보다도 위에 계신—사도가 그에 관하여 골로새서 1장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골 1:16,17)—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위해 남겨두신 그 왕좌에 그를 세웠다면, 그것이 어떤 일이 되었겠습니까? 그것은 본성에 어긋나는 혼란이자,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나 수치스럽게 더럽히는 일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왜 하나님께서 타국인이 다윗의 왕좌에 앉는 것을 원치 않으셨는지, 그것을 첫 번째 이유로 주목합시다.
그리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또한 두려운 불쾌하심을 보여주시고,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그 왕국을 빼앗겼다는 점에서 완전히 저주받았다는 것과 하나님의 등불이 어떤 면에서 꺼졌다는 것을 알게 하기를 의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비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 위에 그분의 빛을 비추어 주시며, 비록 모든 시대에 큰 빛이 있지는 않을지라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항상 등불이 있을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성경에 자주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왕하 8:19).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만일 타국인이 다스렸다면 이방인들이 항상 자신들의 우상 숭배를 반드시 세우고자 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다시피 그가 곧 종교를 바꾸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보통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통제할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며, 도리어 만일 자신들이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을 섬기도록 허락한다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매이게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모든 섬김을 자신들의 욕망과 기호로 반드시 돌리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투르크인(이슬람교도)이 어떤 나라에서 주권을 잡는다면, 비록 그가 그리스도인들(그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바와 같이)을 용납하는 것에 만족할지라도, 그럼에도 그는 그들을 낙심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할 수 있는 모든 모욕과 치욕을 가합니다. 교황주의자들이 권세를 잡은 곳에서는, 그들이 기독교 교리의 모든 순전함을 더럽히고, 복음이 전파되거나 성례가 순전하게 사용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며, 도리어 반드시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들고 어떻게든 자신들의 우상 숭배를 세우고자 합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은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를 보게 되는데, 곧 만일 타국인이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렸다면, 그것은 율법 전체를 무너뜨리는 가장 빠른 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이 아브라함의 혈통 외에 다른 왕을 택하지 못하도록 명백하게 규정하신 것은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었으니, 곧 언약에 포함되어 있고 교회의 표상, 즉 할례를 행한 자를 두게 하신 것인데(골 2:12,13), 이는 오늘날 우리가 가지는 세례와 같이 유대인들에게 동일한 성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것을 우리 자신의 용도에 적용해야 하며, 첫째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 어떤 더러움도 그 안에 들여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만큼 그러한 순전함 속에서 유지되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국이 무엇입니까? 나는 그것이 어떤 눈에 보이는 것들이나 이 현재의 삶에 속한 어떤 것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상의 삶의 소망 안으로 그의 성령에 의해 우리가 함께 모이는 것과, 우리를 하나님의 순종 아래 붙들어 두는 규칙이 되도록 우리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있다고 이미 여러분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비록 성례들이 그 자체로는 눈에 보일지라도, 그것들은 다른 모든 의식들이 그러하듯이 그것들의 목적의 관점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입니다. 우리가 여기 함께 모이는 것, 좋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는 것, 그것 역시 눈에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더 높은 목적을 겨냥하고 있으며 전적으로 영적인 고려 사항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 그의 온전한 순전함 속에서 유지되어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즉 우리는 그분께서 자신의 교회 안에 명령하신 것들에 어떠한 부패도 섞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할 만한 자들을 밀어 넣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거짓 목자들이나 악한 교리를 가진 자들, 혹은 타락한 행실을 가진 자들을 택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욕되게 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드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스라엘 자녀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그 왕좌에 타국인 왕을 세우는 것이 금지되었을진대, 이제 우리는 우리를 다스리실 하나님의 아들을 율법 시대처럼 그림자 안에서가 아니라 온전한 진리 안에서 모시고 있으며, 선지자 말라기가 칭한 바와 같이 우리에게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고 우리 가운데서 다스리신다고 말씀하시는 의로운 해라 불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으니(말 2:4), 만일 우리가 그분의 영광스러운 왕좌를 더럽히고 그것을 그러한 순결함 속에서 유지하지 않아 그분께서 항상 자신의 말씀으로 다스리시지 못하게 하고, 모든 사람이 그분께 경배하지 못하게 하며, 큰 자나 작은 자나 다 그분을 알지 못하게 하고, 그분께서 항상 우리 가운데서 자신의 우월함을 가지시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배신행위이겠습니까?(시 2:12; 110:2). 이와 같이 여러분은 첫 번째 요점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마땅히 다스리셔야 하는 대로 다스리시는 것을 방해할 어떤 더러움도 없도록 하나님께서 여기서 우리에게 자신의 교리를 특별히 돌보라고 명령하시는 것임을 보게 됩니다.
이제 두 번째 이유에 관하여, 만일 하나님께서 한 백성에게 왕이나 군주, 치안관이나 재판장을 택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면, 그들은 인류의 복지를 위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그 자리가 불신자인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도록 크게 유의해야 한다는 점을 또한 주목합시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분별하지 않고, 왕이나 재판장을 택하는 백성은, 스스로 올가미를 자신의 목에 매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복음의 치명적인 원수이거나, 모든 것을 거꾸로 뒤엎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위선자이거나, 혹은 모든 종교를 발밑에 짓밟을 마음을 가진 세상 사람들을 행정관으로 택하고 받아들일 때, 그러한 사람들을 용인하는 것은 사탄이 우리 가운데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그에게 문을 열어주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모든 가증한 일들이 온전히 제 세상을 만나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재판장과 행정관, 통치자와 사법 관원들을 택할 때마다, 이 본문을 통해 경고를 받아 그들 안에서 이 표상을 찾아보아야 하니,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며, 적어도 종교가 그 순전함 속에서 유지되기를 갈망하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에게서 몰아내고 우리 가운데서 그분을 추방하고자 구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며, 이는 너무나 저주받을 배신행위입니다. 그리고 이만큼이 지상의 정치 체제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영적인 종교가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한 후에는, 세속적인 칼과 일반 사법의 상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마음을 써서, 재판석에 앉는 자들이 형제 된 종교 안에서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하고, 거룩한 믿음의 띠가 동일하신 한 분 하나님께 순종함 속에서 우리를 함께 묶어 주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모세가 추가하는 내용 속에 아름다운 확증이 있으니, 왜냐하면 그것은 즉시 다루어질 가치가 있으며 우리는 합당한 자리에서 그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특별히 말씀하시기를, “택해진 왕은 대제사장과 레위인들 앞에서 율법서 한 권을 등사하게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제 왜 하나님께서 왕이 사용할 권위 있는 책 한 권이 있어야 한다는 이토록 엄격한 규정을 만드셨는지 원인을 살펴봅시다.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교리를 전혀 알지 못하고 완전히 무지해야 한다는 의미입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나중에 있을 그분의 선언을 통해 우리가 보게 되듯이, 그분의 율법이 큰 자나 작은 자나 다 알 바가 되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신 32:46). 비밀스러운 일들은 너희 하나님 그분 자신에게 속한 것이나, 그럼에도 그분께서는 여기에 그분의 말씀을 너희 앞에 두기를 기뻐하셨으니, 너희는 그것이 너희 자신을 위해서나 너희 자녀들을 위해서나 숨겨진 교리라고 더 이상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큰 자나 작은 자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봅니다. 그렇다면 왕가의 집에서 자라난 자가 짐승 같아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율법 안에서 가르침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면, 그가 그것에 대한 책 한 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가 왕국을 소유하게 되는 바로 그 시점에 그 책의 사본 한 권을 가지기를 원하셨겠습니까? 그것은 그가 자신을 두 배로 매인 자로 깨닫게 하시고, 만일 사사로운 개인들이 하나님의 학교에서 자라나며 전파되거나 기록된 교리에 부지런히 유의할 의무가 있다면, 온 몸(공동체)의 책임을 맡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워졌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가까이 임하게 하신 사람은 동일한 학교에서 자라나기 위해 부지런해야 할 이유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이해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별히 왕을 위해 책 한 권이 지정되어야 했고, 그것이 장엄한 방식으로 기록되어야 했으며,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그것의 증인이 되어야 했고,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처럼 그에게 전달되어야 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자, 내가 나의 모든 백성에게 나의 율법을 주었으니, 나는 그것에 대한 기억이 해마다 갱신되기를 원하노라.” 왜냐하면 그 책이 앞으로 불려 나왔고, 화목제의 피가 먼저는 그 책 위에, 그리고 그다음에는 모든 백성 위에 뿌려졌으니(히 9:19,20), 이는 그들로 하여금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과 뗄 수 없는 결속으로 묶여 있도다” 하고, 이와 같이 고려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행해졌을 때, 두 번째 책이 불려 나와 왕 자신의 손에 전달되었으니, 마치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진 것과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사로운 개인들보다 너를 훨씬 더 많이 묶으사 네 직무를 알게 하시니, 곧 네가 다른 모든 이들보다 더 잘 배워야 하고, 그들에게 본을 보여야 하며, 모든 백성이 너를 자신들의 인도자로 삼을 수 있는 그러한 방식으로 처신해야 하느니라.” 그것이 우리 주님께서 이 본문에서 의미하신 바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군주들의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 잠시 고려해 봅시다. 비록 한 재판장이 다스릴 단 하나의 성읍이나 하나의 마을만을 가지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자신이 매우 번거로움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될 것인데, 하물며 왕국 전체를 가졌을 때 그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모든 행정관들과 사법 관원들이 이것을 자신들에게 적용하여, 자신들의 책임이 자신들의 모든 능력을 넘어서는 것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니,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분의 성령을 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그것을 완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는 그동안에 그들이 게으른 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행해져야 합니까? 모든 치안관들과 공적인 책임을 맡은 모든 자들은, 만일 다른 사람들이 거룩한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설교에 자주 참여하며, 그 교리 안에서 더욱더 굳건해지고, 그로 인해 잘 덕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면, 자신들은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두 배나 더 많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우월한 지위로 높이셨을진대, 그들이 매일 그분께 나아가 그분께 부르짖는 것이 마땅하며, “오, 나는 나 자신을 인도하고 다른 이들을 다스리기에 충분히 능력이 있도다” 하고 이와 같이 허탄한 영광에 사로잡혀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도리어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인도할 지혜와 분별력과 함께 권능과 힘을 주시지 않는다면, 자신들이 무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르침을 받기를 갈망하여 다른 이들이 자신들의 본을 따라 스스로를 형성할 수 있게 해야 하며, 모든 이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학교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자라나도록 노력해야 하니, 그리하여 큰 자들은 잘 다스릴 수 있는 밑천을 가질 수 있고, 더 낮은 처지에 있는 자들은 그 방법으로 온순하게 순종하도록 이끌려, 모든 사람이 한마음 한뜻으로 하나님께로 인도되게 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 면전에 우리의 허물을 인정하며 무릎을 꿇고, 그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참된 회개로 그분의 자비를 구하도록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허물을 느끼게 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그분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지난 허물들을 묻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온전한 구함이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고 모든 점에서 우리 자신을 그분의 뜻에 맞추어 나가도록 우리를 개혁해 주시기를, 그리고 또한 그동안에 그분께서 우리를 우리의 모든 연약함에서 온전히 깨끗하게 건져내실 때까지 그것들을 보아 넘겨주시기를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다음과 같이 말합시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늘의 아버지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