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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신명기 설교

신 17:16-20

작성자doulosdei|작성시간26.06.22|조회수27 목록 댓글 0

106회 설교: 17장 다섯 번째 설교

15551120일 수요일

 

17:16-20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우리는 어제 왜 하나님께서 왕들에게 율법서를 가지라고 명령하셨는지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이전에 가르침을 받았을지라도, 그 지위에 올랐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들을 다스려야 할 필요가 그 어느 때보다 더 크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그들에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일에 관해 친히 역사하셔야만 하며, 사람들은 자신들이 너무나 연약함을 인정하여 자신들에게 필요한 도움, 곧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그분의 말씀에 연구를 쏟아야 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그분의 조언을 구하지 않으면서, 그분께서 우리에게 조언을 주실 바라는 것은 헛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그분의 성령을 충분히 주실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동안에 거룩한 성경을 읽는 것과 설교를 듣는 것 같은 모든 도움을 멸시한다면, 그것은 그분을 조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은 왕들이 율법서를 가지는 것이 왜 마땅한지 보게 됩니다. 흔한 속담으로 여겨지는 한 이방인의 말 중에, 지혜로운 자들이 키를 잡거나 키를 잡은 자들이 지혜에 자신을 헌신하는 국가는 행복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매우 참되다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백성을 다스리도록 택함 받았을 때, 그들 안에 지혜와 이성이 있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통치권을 맡기 전에 미리 어떤 용기와 분별력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 지위에 올랐을 때 계속해서 자라나도록 노력해야 하고, 경험 자체도 그를 그 일로 자극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참된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분께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교리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들이 다른 이들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필요성 자체 때문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특별히 읽고 그것에 자신을 헌신하도록 권고 받는 것이 얼마나 필요했는지 보는데, 바로 그들의 책임이 인간의 모든 능력을 넘어서는 너무나 어렵고 높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이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경외하기를 배우게 하려 함이라고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왕이 단지 유행을 따라 자신의 궁전에 책 한 권을 두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저기 보아라, 저기에 하나님의 율법이 있도다, 하나님의 책이 왕의 궁전에 있도다하고, 이와 같이 아름다운 외양을 만드는 것은 아무런 목적이 없을 것이니, 우리가 보듯이 세상은 계속해서 의식들만으로 스스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모든 것을 왜곡하는 자들이자 마귀에게 너무나 사로잡혀 그들 가운데 이 책이 문제가 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과 온전한 권능을 더럽히려고 해왔던 유대인들은, “, 그것은 이러한 종류의 양피지에 기록되어야 하고, 그것에는 이것과 저것이 행해져야 하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어린아이 같은 것보다 더한 것이며, 그러면서도 그동안에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은 버려두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도가 왕이 다른 모든 이들 위에 자신의 존귀함의 표상을 가질 수 있도록 뽐내기 위해 보여질 하나의 유물과 같은 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기록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우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이제 비록 이것이 (어제 선언된 바와 같이) 이스라엘 왕들에 관하여 명백히 하신 말씀일지라도, 오늘날 행정관인 자들이 (자신들의 다스림이 우리 주 예수의 이름 안에서 이루어짐을 고려할 때) 구원의 교리에 자신들의 마음을 두고 그 안에서 자라나도록 노력하며,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두신 표상, 곧 그분을 경외하기를 배우는 것을 항상 겨냥하는 것은 매우 마땅한 이치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경외함이 없다면,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불가능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황폐하게 될 수밖에 없음을 그들이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여기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거룩한 성경의 용도를 보여주고자 하셨음을 또한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말하듯이)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선한 일에 온전하게 하기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딤후 3:17).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한 성경을 읽거나 그것이 전파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함에 있어서 유익을 얻는 것에 대해 이러한 관심을 가집시다. 우리가 평생 동안 계속해서 나아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많이 진보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왕이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왕이 일단 택함 받았을 때 초심자여야 하겠습니까? 그가 탁월한 덕을 지닌 사람임이 미리 잘 알려져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해서 배우는 자가 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첫날에 온전하게 배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평생 동안 그 안에 계속 머무릅시다. 그리하면 우리가 아무리 오래 살았을지라도 우리가 단지 우리 여정의 중간에 있을 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세의 말 속에서 주목해야 할 바는, 왕들이 율법서를 가질 때 그것을 덮어두거나 유물처럼 보여주기 위해 내놓아서는 안 되며, 왕이 그 안에서 자신을 단련해야 하고, 그의 읽음이, 말하자면, 단지 오락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마치 내가 그것을 읽었으니, 그것으로 내 책무는 충분히 다했도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서는 안 되며, 도리어 이미 잘 진보해 왔고 자신의 젊은 시절에 하나님을 섬겼던 자가 그렇게 계속 행하도록 더욱 자극받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그토록 가까이 임하셨을진대 자신이 덕스럽게 살아갈 더 엄격한 의무가 있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실질적으로 명심해야 할 바로 그 내용이며, 나아가 내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 각자는 이것을 자신의 용도에 적용해야 합니다.

또한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이 속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바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참된 규칙이며, 그것이 우리 안에 온전히 뿌리내릴 때, 우리의 평생 동안 우리에게 선하고 확실한 길잡이별이 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기호를 쫓아다니고 여기저기 방황하는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눈을 두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쪽으로든 저쪽으로든 치우치는 자들 모두가 자신들의 삶을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임을 충분히 보여준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가르치고 우리의 삶을 항상 바른길에 머물 수 있도록 인도해 줄 선한 해결책을 우리가 가지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합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을 경외함은 우리가 그분께 순종하고자 하는 자발적인 마음과 갈망을 전제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동안에 그분께 가르침 받는 것에는 유의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 묻건대 그것이 그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위선이자, 참으로 온전한 뻔뻔스러움일 뿐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컨대 오늘날 여러분은 매우 경건한 체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될 것이나, 그들은 자신들의 더 나은 가르침을 위한 단 한 마디의 훈계도 듣기를 견디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아름다운 표정을 짓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모세가 여기서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참된 사실을 전제하고 있으니, 곧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그분의 뜻을 가르침 받기를 갈망하고 그분께서 어떤 것들을 좋게 여기시는지 알기를 원하여, 그에 따라 우리의 삶을 형성해 나갈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본문 위에서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점이 더 됩니다.

이제 이스라엘 왕들에 관하여 여기서 특별히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넘어갑시다. “그들은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많은 수의 말들을 모으는 것이 금지됩니다.” 참으로 나중에도 마찬가지로 그들이 탐욕 때문에 자신들의 말의 수효를 배가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제시되어 있으니, 곧 그들의 이 탐욕이 자신들에게 행해졌던 부당함과 상해들을 보복하겠다는 핑계나 혹은 그 밖의 다른 구실을 대어 애굽으로 내려가도록 그들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뜻은, 비록 이스라엘 자녀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폭정 어린 취급을 당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얼마 동안 애굽에서 유숙했었음을 그들이 인정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인들과 어떠한 친밀함도 가지지 못하도록 금지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애굽인들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기를 원하셨으니,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의 타락이 될 것임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는 그들이 애굽인들을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원치 않으셨고, 도리어 고향에 잠잠히 머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분께서는 왕이 그의 말의 수효를 배가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군주가 자신의 손에 키를 쥐고 있을 때에는, 일반 대중이 하려는 것보다 더 큰 일들을 기꺼이 착수하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때로는 모든 것을 소란 속에 몰아넣으려는 어떤 지각없는 사람들이 생겨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군주가 항상 가장 대담하며, 그 대담함이 세상에서 많은 혼란의 원인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왕이 자신을 강하게 만들었을 때, 애굽으로 가기 위해 너무나 많은 말을 자신에게 모으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그리고 왜 그러합니까?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영원히 다시는 그 길로 가지 말라고 금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어떤 불쾌한 일을 당했을 때, 그 일을 행한 자들이 과거에 우리에게 어떤 선을 베푼 적이 있다면, 우리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저울에 달아보아야 하며, 그 선이 악을 상쇄해야 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진실로 이 명령이 없었을지라도, 우리가 보복을 갈망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니, 곧 이 한 가지 이유가 우리를 멈추어 서게 하고 억제해야 하기 때문이며, 즉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신세를 졌는데, 그가 나중에 우연히 우리에게 어떤 부당한 일을 행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손으로 받았던 그 선을 기억해야 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재갈과 같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이 애굽인들을 대항하여 어떤 것도 모의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을 때 고려하셨던 바로 그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결과가 찾아왔든 간에, 그분께서는 그들 사이에 어떠한 친밀함도 있는 것을 원치 않으셨으며, 이는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은 너무나 삐뚤어진 민족이었기에, 그분의 백성이 그들 가운데서 악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들의 우상 숭배는 있을 수 있는 한 가장 과도하고 모든 수단을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녀들이 그들의 우상 숭배에 휘말리지 않도록 애굽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선지자들이 그 점에 대해 얼마나 크게 역설했는지를 보는데, 그러면서도 그것은 전혀 유익이 없었습니다(30:2; 31:3). 왜냐하면 그곳은 이스라엘 자녀들이 다른 민족들에 의해 괴로움을 당할 때마다, 피난처를 찾아 도망쳤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과 유다 두 왕국이 분열되어 있었을 때, 만일 한쪽이 앗시리아인들의 도움을 얻으면, 다른 쪽은 애굽으로 나아갔고, 그렇게 하여 자신들의 파멸의 원인이 되었습니다(왕하 19:7; 17:4). 그리고 이 모든 해악은 그들이 이 미리 하신 경고를 거스르며 그것을 행했기 때문에 일어났으니,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이전에 그들에게 충분히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앞에 부패들이 보일 때,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고자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 속으로 고의로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마음속에 간직합시다. 그러나 우리는 악의 기회들을 볼 때 그것들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으로 달려 들어가며, 굳이 너무 대담해지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유혹하거나, 우리로 하여금 도를 넘게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제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왕들은 많은 은금(금과 은)을 쌓지 말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탐욕이 모든 해악의 뿌리로서 모든 사람에게 금지되어 있다는 것은 참된 사실이며(딤전 6;10), 사람의 마음이 일단 그것에 사로잡히면 그는 사탄의 모든 올무에 걸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이 탐욕에 빠지게 되면, 그는 온갖 종류의 만행과 폭력과 잔인함을 행사하며 잔인해집니다. 또한 그는 약탈과 착취를 일삼게 되고, 다른 사람의 재산을 삼키는 데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 후에 그는 거짓 맹세와 사기, 신용 없음, 배신, 독살, 그리고 그 밖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온갖 악행으로 떨어집니다. 그리고 악의가 일단 불붙게 되면, 그는 심지어 공개적인 살인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요약하자면, 만일 사람이 자신을 탐욕에 내맡긴다면, 그는 사탄의 진정한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분께서는 여기서 오직 왕들에게만 많은 금이나 은을 모으는 것을 금하시는 것입니까? 확실히 우리 주님께서 왕들에게 그것을 금하실 때, 사사로운 개인들에게는 자신들을 부유하게 할 허락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보다 더 나은 수단을 가진 자들이 마땅히 그 악덕으로부터 깨끗해져야 한다면,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왜냐하면 만일 어떤 사람들에게 금과 은을 모을 자유가 있어야 한다면, 왕들에게 그것이 가장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왕들에게 그것을 금하셨으니, 그러므로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모세가 여기서 명백히 왕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들이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모을 기회가 더 많기 때문에 해결책이 가장 필요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왕이 부유하고 풍요로운 나라에서 다스릴 때, 그것은 그에게 유혹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가 자신의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을 볼 때, 그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그들이 나에게 이러한 세금을 바치는 것을 결코 괴로워하지 않으리라하고, 그가 하나의 세금이나 공세를 올리고 나면, 그 후에는 그의 모음(수탈)에 결코 끝이나 한도가 없게 됩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은 왕들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하는 그 유혹 때문에, 왜 그들에게 그러한 억제가 필요한지 보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재물을 모으고 자신을 부유하게 하려는 유혹을 받는 것은 참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을 성취할 이와 같은 기회들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말하자면 그들의 마음을 꺾고 식히는 역할을 합니다. 왕에게는 계속해서 자신에게로 끌어당기고 자신을 더욱더 부유하게 할 수단이 있으니, 왜냐하면 그에게는 세금과 공세를 부과할 권위가 있고, 그 방법으로 자신을 위해 많은 것을 쌓아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왕에게서 이 악함이 교정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에서 다윗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 마음을 개혁하사 탐욕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내 눈을 돌이키사 금과 은을 볼 때 얽매이거나 속아 넘어가거나 휩쓸리지 않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119:36,37). 왜 다윗이 그러한 방식으로 말합니까? 왜냐하면 만일 그가 자신의 아버지 이새의 집에서 계속 살았을 때보다 그에게 훨씬 더 많은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단지 가난한 시골뜨기나 목자였을 뿐이며, 그에 따라 자신의 평범한 생업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왕이 되고 나서는 온 땅의 부유함이 그의 눈앞에 있었기에, 그 누구도 그가 원하는 만큼 모으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기회는 그의 육체에 자극이 되었고, 그는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곧 도를 넘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게 재갈을 물리며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지키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만일 그가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해 기적적으로 보존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러한 기회들을 볼 때 곧 부패해졌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제 모세가 왜 이스라엘 왕들에게 많은 은금을 모으는 것을 명백히 금했는지 그 이유를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에게 기회들이 주어짐에 따라, 우리의 육체가 우리를 어떤 일로 유혹할 때, 우리 역시 재갈이 물려지고 억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내가 여러분에게 말했던 것 외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이것이 왕들에게 말해진 것일지라도, 우리는 그 속에서 모든 사람에게 공통될 교훈을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를 악으로 이끌 수 있는 어떤 기회와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억누르는 것을 배우도록 해야 하며, 우리가 너무나 나약하기 때문에 어떤 허탄한 일로 치우치지 않도록 이 훈계를 방패와 성벽으로 삼아야 합니다. 왕이 풍요로운 나라에서 다스린다는 이유로 많은 은금을 모으는 것이 금지된 것을 볼 때, 그것이 우리 모두가 일반적으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할 내용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결과적으로 아내들에 대한 언급이 있으니, 왕은 많은 아내를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규칙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족장들 중 몇몇이 많은 아내를 가졌을지라도, 그것 때문에 그것이 허용된 것은 아니었으니,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제정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관습이 교리를 충분히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은 참된 사실이나, 그렇다고 그것이 악을 선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결혼을 제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분께서 그것의 창시자이신 만큼,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그분의 순전한 제정(institution)에 자신들을 붙들어 두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그분께서 아담을 위해 두 아내를 창조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럼에도 (선지자 말라기가 말하듯이) 그분에게는 영이 풍성하셨습니다(2:15). 그분에게는 한 여자를 창조하시는 것보다 두세 여자를 창조하시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무능함 때문에 막히셨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분께서는 두 사람이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상황이 그러할진대, 사람이 두 아내를 얻는 것은 자연의 질서를 바꾸는 것이자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 족장들도 그렇게 행했도다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사람들의 관습은 그들 안에 아무리 큰 덕이나 거룩함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규정을 바꿀 수 없음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다른 사람들의 본을 방패삼아 자신을 가리는 자들이 두 배로 죄를 범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것이나 저것을 행했다는 핑계로 하나님의 권위가 깎이는 것이 합당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한 번에 결혼으로 두 아내를 얻는 것이 살아 있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결코 허용된 적이 없음을 이해해야 하니,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여기서 그것이 오직 왕들에게만 금지됩니까? 왜냐하면 더 큰 자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미 언급했던 바가 이 본문 속에서 더 잘 확증됩니다.

만일 사사로운 개인이 두 아내를 얻으려 했다면, 그는 엄격한 감시를 받았을 것입니다. “뭐라고? 이미 결혼한 사람에게 내 딸을 주란 말인가? 내 딸이 고생길이 훤할 것이 뻔하고, 끊임없는 다툼과 불안 속에서 살게 될 텐데. 차라리 당장 죽는 편이 나으리라.” 그러나 사람들은 명예를 너무나 갈망했기에, 만일 왕이 자신들의 딸을 아내로 요구하면 쉽게 동의해 버렸습니다. “뭐라고? 내 딸이 왕과 결혼하게 되다니.” 그리고 여인 역시 그러한 자에게 구혼을 받을 때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왕들이 이 경우에 더 넓은 여지를 가졌고,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더 크게 죄를 범할 수 있었기에, 우리 주님께서는 특별히 그들이 많은 아내를 두지 못하게 금하셨으며, 나아가 권위를 가진 자들의 본은 사사로운 개인들의 본보다 더 나쁘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평범한 사람이 어떤 악을 행한다면, 그것은 오직 자기 집과 이웃집 정도까지만 가지만, 권위를 가진 사람은 무대 위에 서 있어서 멀리서도 보입니다. 그리하여 만일 그가 도를 넘는다면, 그의 부패는 온 왕국으로 퍼져나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왕들이 많은 아내를 두는 것을 금하셔야 하는 것이 필요했으니, 바로 그 부패가 온 땅으로 퍼져나갈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것이 완전히 막아지지는 못했을지라도, 그것은 처음에는 이방인들로부터 유래했습니다. 만일 많은 아내를 두는 일이 어디서 왔는지 묻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가 아니라 가인의 집에서 발견될 것입니다(4:19). 그러므로 많은 아내를 두는 이 음란한 짓은 사탄에 의해 도입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족장들도 그것에 얽매였으니, 실제로 어떤 일이 일단 관습으로 굳어지고 나면, 그것이 허용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사람이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왕들이 많은 아내를 두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윗에 대하여, 그리고 부유함뿐만 아니라, 아내들의 관점에서도 훨씬 더 나아갔던 솔로몬에 대하여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다윗이 많은 아내를 두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으며, 솔로몬에 관해서는 훨씬 더 많았는데, 그는 그 점에 대해 비난받지 않은 것처럼 보이니, 왜냐하면 성경은 단지 그를 자신들의 우상 숭배와 우상들로 오염시켰던 타국인 여인들을 따라 그의 마음이 돌아선 것에 대해서만 말하기 때문입니다(왕상 11:4). 그리고 금과 은에 관하여, 우리는 다윗이 솔로몬의 성전과 그의 궁전이 그것들로 지어질 만큼 너무나 거룩한(엄청난) 양을 모았다고 기록된 바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이로운 부유함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솔로몬의 통치기에는 그 수효가 너무나 엄청나게 많아서 사람들이 금과 은을 자갈만큼도 여기지 않았다고 명백히 말씀하십니다(왕상 10:27). 그리고 성경 안에 어떤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니, 왜냐하면 다른 것들 중에서 우리 주님께서 아라비아의 금과 세상의 모든 부유함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게 하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72:15). 그리고 만일 그분께서 왕들이 부유하고 풍요롭게 되는 것을 의도하지 않으셨다면 왜 그것을 약속하셨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국의 모형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이 복이 그토록 가치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면, 어떻게 왕들이 금과 은을 모으는 것이 금지되겠습니까? 아내들에 관해서는, 다윗과 솔로몬이 둘 다 그 점에 대해 죄를 범했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솔로몬이 가장 그러했습니다. 다윗에 관해 말하자면, 그에게는 많은 아내가 있었으니, 주장될 수 있는 모든 변명도 하나님 앞에서 그를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어떠하든 간에, 그가 과도한 욕망을 통해 그렇게 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울의 딸 미갈과 결혼했었고, 만일 그녀가 강제로 자신에게서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그 한 명의 아내만으로 스스로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주어졌을 때, 그가 밧세바를 얻는 것은 허용된 일이었습니다.

또한 그 후에 다른 일들이 일어났으니, 만일 사람이 다윗이 왜 많은 아내를 얻었는지 그 원인을 고려한다면, 확실히 세상의 관점에서는 그를 변명할 어떤 구실이 언제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책망 받을 만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에 관해서는, 그가 자신과 다른 모든 왕들에게 주어진 그 금지령을 정면으로 거스르며 나아갔던 만큼, 육체에 너무나 사로잡힌 자로서 공개적으로 반역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에게 어떤 결과가 닥쳤는지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그가 타국인 여인들에게 그토록 기만당하고 속아 넘어간 것은 공의로운 형벌이었기 때문이며, 그가 자신에게 그러한 자유를 허용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가 자신을 사탄의 올무 속에 던져 넣었음을 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물고기가 다른 물고기들을 삼키려다가 그 방법으로 자신이 붙잡히거나 숨이 막히게 되는 법입니다. 이와 같이 솔로몬 역시 자신이 너무나 자신의 기쁨과 낙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그 대가를 기꺼이 치러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의 그토록 큰 은사들을 부여받은 그처럼 탁월한 사람이 우상 숭배자가 되고, 하나님을 순전하게 섬기는 일에서 타락했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며, 우리의 머리털이 곤두서게 만들어야 마땅한 일인데, 특별히 온 세상을 가르칠 선지자이자 이스라엘 자녀들뿐만 아니라, 참으로 불신자들까지도 인도하여 그들을 진리의 지식으로 이끌 등불이었던, 그 자신이 그러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 그러한 사람이 그러한 방식으로 도를 넘다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어디서 왔습니까? 바로 자기 자신의 욕망에 빠져든 데서 왔으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공의로운 삯을 치르셨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진대, 우리 눈앞에 제시된 그러한 보응 앞에 우리가 마땅히 떨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다윗과 솔로몬이 많은 아내를 두었던 부주의함과 범죄가 없지 않았음을 우리는 잘 주목해야 하며, 그로 인해 우리는 이 율법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더욱더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왕들에게 많은 아내를 두는 것을 결코 금하지 않으셨더라면, 그들의 자유가 훨씬 더 과도해지지 않았겠습니까? 참으로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대항하여 반역하는 것으로부터 억제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육체가 그들을 이처럼 휩쓸고 가버리기에, 그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어야 할 바를 잊어버립니다. 이 본문은 다른 모든 것들 위에서 특별히 왕들을 위해 주목되어야 마땅하나, 정작 그들은 그것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해악을 미리 막으신 것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법이 제정되어 있을지라도, 그분께서 자신의 성령으로 그것을 우리 마음에 기록해 주시지 않는다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단지 죽은 문자에 불과하며, 그리하여 우리를 죽일 것이기 때문입니다(고후 3:36). 곧 우리는 우리에게서 모든 변명을 빼앗아 버리는 역할을 하는 그 법의 교리에 의해 공의롭게 정죄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것을 명령하실 때마다, 우리는 그분께 달려가야 함을 배워야 하며, 그리하여 우리가 종이나 양피지에 기록된 것을 읽는 내용들을 그분께서 우리 마음에 기록해 주시도록 해야 합니다. 재물에 관해서는, [아내들의 경우와] 동일한 죄가 있었다고 결론지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잘 알다시피 다윗이 그토록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을 모았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함이었지 다른 어떤 일을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삼하 8:11; 대상 21:14; 왕상 12:4). 또한 솔로몬이 죽은 후에 큰 원망들이 있었을지라도, 다윗이 자신의 백성들을 괴롭게 했다고는 보이지 않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윗과 솔로몬 모두에 관하여 다루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함께 모으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명령하시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던 만큼, 다윗의 의도는 선하고 거룩했습니다. 또한 그 수단들도 합법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백성에게 어떤 폭정 어린 부담도 지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에 관해 말하자면, 그에게는 자신의 아버지가 미리 모아 두었던 큰 재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그 재물의 상당 부분이 그가 불신자들에게서 정복하여 얻은 것들이었음을 주목해야 하니, 그들의 전리품은 시편에서 그에 관해 말씀하듯이,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선물과 같았습니다(68:12,13). 그러므로 솔로몬은 자신 측에서 그 모든 재물을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특별히 다시스 왕들과 모든 섬과 먼 나라들이 와서 금과 은과 온갖 보물들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씀하셨고(72:10), 또한 이스라엘 왕국이 그러한 방식으로 번창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아라비아의 금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만큼 더욱 그러합니다. 다윗과 솔로몬이 보화를 모으는 것은 그것이 야망과 교만 위에서 된 것이 아니고, 어리석은 일들을 착수하거나 방탕한 삶 속으로 자신들이 도를 넘기 위함이 아니며, 또한 백성들이 어떤 세금 부과로 인해 그것으로 괴로움을 당하지 않고, 도리어 다윗이 자신들에게 인도된 금과 은만을 단지 받았을 뿐이라면 합법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한도를 초과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제가 단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의 순종하지 않는 아들 르호보암이 말했던 바를 보는데(왕상 11:24), 곧 자신의 아버지가 백성들을 채찍으로 쳤을진대 자신은 그들을 전갈 채찍으로 칠 것이며, 그들의 모든 등허리가 굽어지게 만들 때까지 그들이 짊어질 수 있는 한 가장 많이 그들에게 지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 속에서, 르호보암은 자신의 아버지의 폭정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로 인해 솔로몬에게 어떤 과도함이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왕들에게 큰 금과 은을 모으는 것을 결코 헛되이 금하시지 않았음을 우리는 더욱더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같은 이유 때문에 다윗 역시 내가 앞에서 되풀이했던 그 기도를 사용했으니,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방에서 자신을 공격할 수 있는 유혹들을 보았고,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능으로 그를 굳세게 해주시지 않았더라면 그는 결코 그것들을 버텨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관점에서 그는 하나님의 법이 자신에게 금과 은보다 더 귀하며, 세상의 모든 부유함도 하나님의 법과 비교하면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선언하니(19:11), 왜냐하면 그가 그 속에서 자신의 참된 행복과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몇 마디 말로 요약하여 다음을 기억합시다. 우리 주님께서 왕들에게 큰 보화를 쌓아 두지 말라고 금하신 것은, 그들의 마음이 교만과 허탄한 영광과 탐욕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자신들의 백성에게 어떠한 폭정도 행사하지 않으며, 단지 마치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처럼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취하여, 그것으로 스스로 만족하고 그것을 선한 곳에 적용하기만 한다면, 그들이 부유해지는 것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히스기야 왕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었는지 보기 때문입니다(39:2,6). 비록 그에게는 이스라엘 왕국이 잘려 나간 원인 때문에 다윗의 수입의 3분의 1도 없었을지라도, 바빌론에서 그에게 사절들이 파견되었을 때, 그가 그것을 보여주고 자랑할 만큼 그의 방들은 매우 잘 갖춰지고 채워져 있었으니, 이는 갈대아 왕이 자신의 친교를 갈망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자신을 칭찬하고 드높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봅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가져왔습니다. “,” 그가 말하기를, “네가 오늘 네 금과 은, 그리고 네가 가진 보물들을 보여주었으나, 바빌론인들이 네가 가진 모든 것을 가져가서 예루살렘에는 단 한 조각의 돈도 남지 않고 모든 것이 약탈당하고 털릴 때까지, 네가 결코 꺼지지 않을 불을 지폈음을 확신하라.” 그리하여 우리는 그 후에 동일한 형벌이 어떻게 집행되었는지를 봅니다. 그리고 이 본보기는 하나님께서 왜 왕들에게 많은 은금을 모으는 것을 금하셨는지를 우리에게 충분히 보여줍니다(왕하 24:13). 왜냐하면 군주들이 그러한 보화를 가질 때에는, 자신들을 계속해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자랑하고 높이려는 자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그러할진대, 우리는 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들을 어떤 한도와 중간 정도의 지위 안에 붙들어 두사, 그들이 너무 높아지려 하지 않게 하려 하셨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그의 마음이 치우치지 않게 하라하십니다. 즉 그의 위대함이 그로 하여금 자신을 잊어버리게 만들지 않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또한 더 나아가 덧붙이시기를, “그가 그의 형제 위에 스스로를 높이지 말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왕이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존귀한 자리에 오를 때 흔히 자신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왕의 존엄함이라는 지위는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하고, 참으로 눈을 완전히 멀게 만들기 쉬운 상태입니다. 그리하여 군주들은 자신들의 높은 승귀 때문에 자신을 죽을 수밖에 없는 피조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반신반인처럼 여기며, 우리가 보듯이 그들은 자신들에게 불가능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너무나 높이 쳐다보기에, 더 이상 올바름이나 이성에 복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일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아첨하지 않거나 자신들을 신처럼 공경하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큰 부당함을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디서 옵니까? 바로 사람이 위대해질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 안에 왕 노릇 하시지 않는 한, 온유함이나 겸손함을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옵니다. 이 때문에 왕들은 여기서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습니다. 참으로 그것은 모세가 그들이 그들의 형제 위에 스스로를 높이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인 내용 속에서 훨씬 더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왕들과 군주들이 굳이 그러한 방식으로 모든 사람의 목을 발로 밟으려 드는 이유가 어디서 오겠습니까? 바로 그들의 마음을 오염시키는 이 교만함에서 오니, 즉 그들은 자신들이 사람임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의 상태가 어떠한지 더 이상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향해 그토록 눈이 멀어 있을 때, 그들의 가득한 교만과 방자함이 그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발로 짓밟게 만들고, 모든 사람이 자신들을 두려워하며 자신들의 멍에 아래 굴복하기를 바라게 만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가 그 두 가지를 함께 짝지어 놓은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부당함이나 만행을 행하는 것을 삼가고자 한다면, 우리 자신을 알도록 힘씁시다. 왜냐하면 (흔한 속담에 있듯이)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자가 자신을 가장 낮추어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가 이웃을 향해 겸손하고 온유하게 처신하는 길이 됩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자신을 잊어버린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끼지 않은 채 곧바로 온갖 교만과 만행 속으로 기어올라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왕들에게 금지되었을진대, 왕들보다 훨씬 아랫사람인 자들에게는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처지에 따라 이 문제를 자기 자신의 가르침에 적용합시다. 권위를 가진 자들은 자신들이 부끄럽게 낮추어지지 않기를 원한다면, 교만을 통해 스스로를 높이지 않도록 몹시 조심하십시오. 왜냐하면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의 추락은 더욱 혹독하여, 어쩌면 목이 부러질 지경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높이신 자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을 평온함 속에 붙들어 두고 곁길로 빠지지 않으며,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계속해서 섬기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명백히 네 형제를 대적하여또는 네 형제 위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왕들과 군주들은 자신들이 말하자면 인류의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며, 더 이상 그들의 평범한 대열에 계수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한 거만한 태도를 조롱하시며 말씀하시기를, “그럼에도 그들은 너희 형제니라고 하십니다. 진실로 이것은 모두 하나의 혈통에서 내려온 아브라함의 자녀들에 관하여 말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원하는 곳 어디에서든 왕 한 명을 뽑아 보십시오. 그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다스리는 그 백성들이 그의 형제가 아니겠습니까? 지구상의 가장 큰 왕들의 상황이 그러할진대, 그들보다 훨씬 아랫사람인 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사람이 권위를 가졌거나 신망 속에 자신을 유지할 방도를 가졌을 때, 만일 그가 자신을 잊어버리도록 유혹을 받는다면 이와 같이 고려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나는 몸의 나머지 부분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그것의 한 지체이고, 내 아랫사람인 자들도 내 형제이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그렇다면 내가 나 자신을 자랑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큰 탁월함의 상태로 승귀한 자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그들을 떨쳐버리려는 유혹을 받을 때마다 이 경고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뭐라고? 형제 관계가 존재하는 곳에서 우리가 양들을 향해 사자처럼 굴어야 하겠는가? 사자와 양 사이에는 형제 관계가 없도다. 만일 내가 교만과 지배욕과 자만으로 가득 찬 사자의 마음을 가진다면, 그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겠는가? 내가 나에게 맡겨진 자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백성이 이전 상태로 회복될 것을 말할 때, 히스기야 왕에 관하여 하신 말씀을 우리가 보기 때문입니다(33:6). 그리고 선지자가 히스기야와 모든 왕의 의무가 자신들의 백성을 시원하게 하고 편안하게 해 줄 청량한 그늘이 되고, 가난하고 고아 된 자들의 양육부가 되며, 고난과 슬픔 중에 있는 자들의 위로가 되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의심할 바 없이 이 본문에 눈을 두었을 것입니다(49:23). 그리고 결론으로 그는 내가 이미 보여주었던 바에 따라, 하나님을 경외함이 그의 시대에 보화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왕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대로 처신하고자 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자신들에게 보여진 이 교훈에 자신들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히스기야의 인격에 적용되었으나, 그럼에도 다른 모든 사람들도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 주님께서 큰 자들에게, 그들이 어떤 유혹을 가지고 있든 간에 그들을 봐주지 않으시고 이 교훈을 말씀하신다면, 더 낮은 부류의 사람들이 굳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행하며 재갈 물려지지 않은 채 하나님을 대항하여 발길질하고 거스른다면 어떤 결과가 찾아오겠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교만으로 너무나 눈이 멀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내용들을 통해 자라나기를 배워서, 큰 자나 작은 자나 모든 사람이 저마다 자신의 지위와 상태와 소명에 따라 자신을 복종시키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존귀히 여김을 받으시며, 가장 앞선 자로부터 가장 뒤처진 자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하나의 순종이 있게 합시다.

 

이제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 면전에 우리의 허물들을 인정하며 무릎을 꿇읍시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가 이전보다 우리의 허물들을 더 잘 느끼게 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그 방법으로 우리가 모든 악덕과 범죄를 싫어하는 참된 회개로 이끌리고 그것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벗어버리게 하사, 마침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친히 역사하셔서 우리가 그분의 의로 온전히 옷 입게 하옵소서. 또한 그동안에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우리를 이처럼 참아주사, 비록 우리가 바라는 만큼 그러한 온전함 속에서 살지 못할지라도 우리가 그분의 손에서 은혜를 얻는 데 실패하지 않게 하옵소서. 그분께서 이 은혜를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땅 위의 모든 백성과 나라들에게도 베풀어 주시기를 기뻐하사, 사로잡힌 오류와 어둠 속에 갇혀 있는 모든 불쌍하고 무지한 백성들을 돌이키시고, 그리하여 그들을 자신의 진리의 지식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또한 이 목적을 위하여 그분께서 자신의 말씀의 참되고 신실한 사역자들을 일으켜 주시기를 기뻐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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