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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성경묵상

고린도전서 14:1~19

작성자류신옥|작성시간26.06.21|조회수30 목록 댓글 0

2026년 6월 22일 월요일 묵상
<14: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14: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14: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14: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14:7>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14:8>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14: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4:10>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4: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4: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14: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4:15>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14: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4: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본문 해석)
6월 22일 월요일 고린도전서 14:1~19
1~5절
1절 사랑을 추구하라는 말은, 사랑이 모든 은사 사용의 지속적인 기초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신령한 것을 열망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한다. 구약에서 예언은 하나님의 구원을 예언함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함으로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회개를 촉구했다. 예언은 하나님의 뜻을 성도들에게 전해, 용기와 위로를 주는 동시에, 때로는 그들의 죄를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한다.
2절 방언은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기에, 통역 없이는 알아들을 수 없다.
3절 예언은 사람에게 말하여,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여기서 세우다라는 말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견고히 세운다는 의미다. 예언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도전하며 격려하는 설교적 성격을 지닌다.
4절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세우지만,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운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공적 예배를 개인의 신비체험을 과시하는 곳으로 전락시킨다는 데 있다. 5절 바울은 자신이 방언을 금지하지 않으며, 오히려 성도들이 은사를 받기를 원하지만, 공적 예배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통역을 해서 회중이 이해할 수 있게 하지 않는다면, 방언보다 예언이 좋은 은사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세움에 있으며, 이것은 오직 사랑에 기초해서 진리를 분명하게 전달할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6~12절
6절 공적 예배에서 통역 없는 방언이 얼마나 의미 없는지, 비유를 들어 의미 전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바울은 먼저 사도인 자신의 방문을 가정하여 질문을 던진다. 만일 사도가 교회에 와서 천사의 말을 쏟아낸다고 해도, 그 내용이 계시나 지식, 예언이나 가르침과 같이, 성도들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메시지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회중에게 아무런 영적 유익을 줄 수 없다.
7절 피리나 거문고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음의 높낮이와 리듬이 명확히 구별되어야 한다. 악기가 질서 없는 소음만 낸다면 공기를 진동시킬 뿐 음악으로서의 가치는 없다.
8절 전장에서 나팔수가, 적의 침공을 알리는 경보인지, 진격 신호인지 알 수 없는 불분명한 소리를 낸다면, 병사들은 비참한 패배와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
9절 혀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않는 방언 역시,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 아무리 뜨거운 열정으로 외친다 해도, 허공에다 소리 지르는 것에 머물고 만다.
10~11절 언어의 본질은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공유에 있다. 세상의 수많은 언어도 서로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서로에게 외국인, 곧 말이 통하지 않는 야만인이 될 뿐이다. 여기서 언어가 소통되지 않는 것은 불편함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된 지체를 다른 몸으로 만들어버리고, 공동체의 연합을 파괴하고 소외를 낳는다. 성령의 은사가 도리어 형제를 남처럼 느끼게 만들고, 예배의 자리를 고립된 장소로 만들어 버린다면 비극일 수밖에 없다.
12절 바울은 영적인 것에 열광하는 고린도 교인들의 열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맹목적인 열정의 방향을, 자기 만족에서 공동체의 유익으로 바꿀 것을 촉구한다.
13~17절
13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한다. 통역되지 않는 방언은 하나님을 향한 비밀일 수는 있으나. 공동체 안에서는 암호에 불과하다.
14절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하는데, 여기서 마음은 인간의 지성적 능력을, 영은 성령에 의해 이끌림을 받는 영혼을 가리킨다.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내용을 전달하지 못하여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것이다.
15절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이것은 성숙한 예배의 모델이다. 참된 영성은 지성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령의 감동(영)을 가장 명확한 언어와 논리(마음)로 담아낼 때, 그 기도는 능력을 발휘한다. 기도나 찬송할 때, 영으로 하는 방언과 이성으로 이해하고 말하는 것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16절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들은, 전문적인 은사의 능력이 없거나 아직 신앙의 깊이에 도달하지 못한 평범한 성도들이다. 예배의 절정은, 회중이 말하는 자의 기도나 찬송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순간이다. 아멘은 진실로 그러하다. 나도 동의한다는 뜻이며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메시지가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면, 회중은 그 내용이 참인지 거짓인지, 내 영혼에 유익한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없다.
17절 비록 말하는 자가 방언으로 감사를 했을지라도 그것은 실패한 예배라고 설명한다. 예배의 성공 여부는 말하는 자가 얼마나 깊은 영적 체험을 했느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세움을 받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지성을 사용하여 타인을 배려하고, 모든 지체가 아멘으로 하나 되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영과 마음이 함께 열매 맺는 참된 예배임을 밝히고 있다.
18~19절
18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다른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많이 말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바울은 방언의 영적 가치를 폄훼하거나 방언을 할 줄 몰라서 방언을 비판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19절 그러나 예배의 현장에서는 일만 마디의 신비한 방언보다, 남을 가르치기 위해 깨달은 마음으로 하는 다섯 마디의 말이 낫다. 여기서 가르치다는, 진리를 체계적으로 전달하여 듣는 이의 내면에 믿음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공적 예배의 본질은 말하는 자의 과시나 일만 마디라는 많은 말에 있지 않다. 오히려 다섯 마디일지라도 성령의 감동으로 지성적으로 잘 전달하여, 형제들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는 소통만이 교회를 세우는 길이다. 은사의 목적은 다른 이를 세우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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