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24일 수요일 묵상
<15: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15: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15: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15: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15: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5:11>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본문 해석)
6월 24일 수요일 고린도전서 15:1~11
1~2절
1절 복음은 단순히 정보나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죄인인 인간을 하나님 백성으로 다시 창조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바울은 세 가지 동사로 복음과 성도의 관계를 조명한다. 첫째 성도들은 복음을 받았다. 그들이 기독교인이 된 것은 바울 개인의 철학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초기 교회로부터 내려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부활이라는 객관적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둘째, 성도들은 그 복음 위에 서 있다. 고린도 교회가 비록 도덕적, 교리적 혼란 속에 있을지라도, 그들의 신분은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견고히 자리 잡고 있다. 셋째, 성도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구원은 과거의 회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건져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현재적이고 지속적인 은혜의 역사다.
2절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라고 한다. 고린도 교회 일부는 몸의 부활을 부정했다. 십자가 죽음만 믿고 부활을 부인한다면, 그 복음은 공허한 것이 되며,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헛된 믿음을 만들고 만다.
3~5절
3절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라는 표현은, 유대 랍비들이 전통을 계승할 때 사용하는 전문 용어다.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직후, 예루살렘의 초기 사도들로부터 형성되어, 바울에게까지 전달된 공적 신앙고백이며, 교회가 목숨처럼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복음의 첫 번째 기둥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경대로는, 예수님의 죽음이 우발적인 사건이나 정치적인 실패의 사건이 아니라, 구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성취임을 밝힌다. ‘우리 죄를 위하여’ 라는 표현은,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들을 대신한 대속적 죽음이었으며, 이를 통해 구약의 제사 제도가 예표했던, 죄 사함이 완성되었다.
4절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는 죽음의 확실성을 보증한다. 이 표현은 예수님이 죽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거짓 가르침을 막고, 예수께서 문자 그대로 죽음의 영역에 들어가셨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곧 이어질 빈 무덤과 부활의 역사성을 지지하는 필수적인 전제가 된다. 복음의 절정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심에 있다. 여기서 살아나셨다는 헬라어에는, 문법상 두 가지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 수동태로 부활은, 예수님이 스스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사건임을 보여준다. 둘째, 완료시제로 부활이 과거의 단회적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부활의 효력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5절 ‘게바와 열두 제자에게 보이시고’는, 부활의 역사성을 변증한다. 부활하신 주님은 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 속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나타내셨다. 베드로와 열두 제자는 이 역사적 사건의 목격자이자, 교회의 기초를 놓은 증인들로서 부활 복음의 신빙성을 증거한다.
6~8절
6절 부활이 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발생한 객관적 사실임을 밝히려고, 당시 법정에서도 효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구체적인 증인들 목록을 제시한다. 그중 가장 강하고 결정적인 증거는,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다는 내용이다. 바울은 그들 중 대다수가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을 덧붙임으로써 논증에 힘을 더한다. 사건의 목격자들이 여전히 생존해 있으므로, 부활 사건은 결코 미화되거나 조작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7절 바울은 이 살아 있는 증인들을, 부활 신앙의 가장 강력한 근거로 삼는다.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라는 언급은, 부활이 가져올 수 있는 변화의 능력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공생애 기간 중 믿지 않았던 대표적인 회의론자였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은, 그 불신앙의 벽을 허물고, 그를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지도자로 변화시켰다. 부활은 단순히 놀라운 기적이 아니라, 한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 사건이다.
8절 바울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비천한 존재로 묘사하며, 부활의 마지막 목격자로 등장시킨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없애 버리려 했던 박해자였으나, 주님은 그 자격 없는 자에게도 찾아오셨다. 핵심은 주님이 그에게도 보이셨다는 점이다. 이 표현은 바울의 사도권과 그가 전하는 복음이, 부활하신 주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 대면한, 생생한 체험 위에 서 있음을 선언한다.
9~11절
9절
바울은 자신을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언급하면서, 감히 사도라 불릴 자격조차 없는 존재임을 고백한다. 그는 과거에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던 자다. 율법의 기준으로 볼 때, 그는 사도의 명단이 아니라 심판의 명단이 올라야 마땅했다. 이러한 철저한 자기 부정은, 역설적으로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주권적인지를 드러낸다.
10절 바울은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말한다. 바울의 사도직과 그의 새로운 정체성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바울은 내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다고 말한다. 만약 은혜가 그를 게으름으로 이끌었다면, 그것은 값싼 은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참된 은혜는, 그를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게 만들었다. 은혜는 인간의 노력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울은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자신의 피땀 흘린 수고조차 자신의 공로로 돌리지 않고, 오직 은혜의 선물로 해석한다.
11절 그러므로 전하는 자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선포되는 메시지의 통일성이다. 모든 사도는 동일한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고, 고린도 교인들을 바로 그 복음을 믿었다. 결국 교회를 세우는 것은, 탁월한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가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