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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많은 색에 둘러싸여 생활한다. 무의식중에 각인된 색은 향기와 맛과 이미지를 재생한다. 생동감 넘치는 붉은빛 체리, 아스라한 연보랏빛 라일락, 파릇파릇 움트는 연둣빛 새순, 에메랄드색 바다, 청량한 민트초코 아이스크림, 파스텔 톤 마카롱. 색채는 문화적 상징과 심리적 교감의 구성물이다.
무심코 지나친 색도 심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패스트푸드점 간판에 주로 쓰이는 난색은 시각적으로 금방 눈에 띄며 친근하다. 은행 간판은 주로 한색이며 스마트하고 안정적인 이미지를 준다.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화장품 브랜드는 신선한 녹색이다. 우리를 설레게 하는 택배 상자의 베이지색이 어떻게 심리적으로 작용하는지 떠올려보자. 만일 택배 상자가 검은색이라면 더 무겁게 느껴질 것이고 순백색이면 쉽게 때가 타서 불쾌감을 줄 것이다. 유치원 버스가 보라색이면 어색하고, 떡볶이집 간판이 회색이면 먹음직스럽지 않다. 병원 이불과 벽지가 샛노란 색이라면? 더 초조해질 가능성이 높다.
어릴 땐 시간만 나면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렸다. 내 그림은 전체적으로 색이 많아서 어디서든 눈에 띄었다. 다만 규범적인 색상을 쓰지 않을 때가 많아서 간혹 지적을 받았고, 난 노란색 하늘과 보라색 하늘에 관해 설명하다가 이내 지치곤 했다. 청소년기에 잠시 그래픽 디자인에 도전했지만, 알록달록 총천연색으로 가득한 내 세계는 세련미가 부족해 현대적이지 않고 신뢰감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았다. 그렇게 몇 번 엇갈리며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은 그림보다는 색상 그 자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특별히 더 좋아하는 몇 가지 색에 관해 서술하도록 하겠다. 혹시 취향이 하나쯤 겹치지 않을지 기대하면서 읽어주길 바란다.
「노랑」
모든 유채색에서 가장 먼저 돋보이는 색은 노랑이다. 빛의 스펙트럼에서 1순위로 밝은 팽창색이기 때문이다. 태양에 가까우며 명랑하고 활발한 속성을 지닌 색이기에 즐거운 에너지를 준다.음식점이나 카페의 노란 조명은 음식물을 더 먹음직스럽게 만드는 효과와 함께, 실제보다 더 오래 머물렀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활동적인 노랑이 빨리 먹고 일어나라는 무언의 암시를 주는지도 모른다.
노랑은 단연코 장조이며 지저귀는 새처럼 발랄하다. 또 플루트나 클라리넷 등 선명한 목관악기 소리가 연상된다. 러시아 작곡가 스크리아빈은 모든 조성에 색채를 부여했는데 노랑은 기쁘고 명쾌한 D장조에 속한다. 안온하고 다정한 ‘미’ 음의 울림에서 중채도의 노랑을 연상했었는데 뉴턴이 ‘미’를 노랑에 분류했다는 걸 알고 기뻤던 적이 있다.
바나나와 망고처럼 따뜻한 노랑은 달콤하고, 파인애플이나 레몬처럼 시원한 노랑은 새콤하다. 병아리나 카나리아의 노랑은 촉각적으로 부드러우며 포근하다. 이렇듯 노랑은 희망적인 이미지라 기분이 절로 상쾌해진다. 햇빛이 짱짱한 하늘은 눈부신 노란빛이다. 특히 광활한 자연물을 내려다보는 한여름의 햇살은 좀 더 레모네이드 같은 짜릿한 노란빛을 띤다.
「파랑」
창공을 머금은 파랑은 평온한 색이다. 파랑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파랑은 너르고 평화로워서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에게 호감을 준다. 괴테는 언제나 빛을 수반하는 노란색의 반대에 파란색을 뒀다. 태양의 노랑이 빛이라면 달의 파랑은 그림자이다. 비단 괴테만이 아니라 파랑은 역사에서 꽤 오래 수동적인 색으로 통했다.
현대인은 주로 남성적으로 여겨지는 파랑을 좀 더 가치중립적이고 깔끔한 색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사실 파랑은 동서양 모두 여성의 상징체계였다. 파랑은 성모 마리아의 색이며 음의 색이다. 서양 귀부인 드레스는 흐린 파랑이 많다. 파랑을 입으면 정결하고 차분해진다고 믿은 모양이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섬세하고 앙증맞은 하늘색을 여자아이에게 추천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파랑이 어원인 영어 이름은 여자에게 쓰이고 빨강이 어원인 영어 이름은 남자에게 쓰인다. 만일 아직도 파랑이 여성을 의미하는 색이었다면 조신하면서 얌전한 의미로 통했을지도 모른다.
은행 업무를 보러 갔을 때 일이다. 우연히 파란 티셔츠에 하늘색 폰케이스와 가방을 들고 있었다. 몸에 지닌 파랑 계열이 6개쯤 됐다. 심지어 인터넷 뱅킹 아이디와 메일 주소에도 blue가 들어갔다. 은행원은 아이디를 쓰는 날 보며 웃었다. 고객님, 파랑 참 좋아하시나 봐요. 시원하니 잘 어울리세요. 문득. 그나마 파랑으로 도배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과하게 유난스러워 보이지는 않으니까. 어쨌건 난 파랑을 쭉 좋아했다. 팬톤 컬러였던 로즈쿼츠와 세레니티의 조합에 환호했다. 선명한 파랑은 쾌적하며 하늘색과 물색은 산뜻하고, 푸른색과 녹색이 안배된 민트나 터콰이즈나 아쿠아는 청려하다. 파르스름하다, 파르무레하다, 파릇파릇하다 등 형용사로 쓰일 때 어감의 울림마저 푸르른 파랑을 참 좋아한다.
「분홍」
분홍은 내게 꽤 애증이다. 향기롭고 달콤한 분홍은 꽃의 색이고, 디저트의 색이다. 더불어 여성을 떠올리지만, 20세기 초까지 분홍은 단호하고 강한 남자아이 포지션으로 취급됐다. 예수 그리스도의 색이며 피, 열정, 에너지를 뜻하는 작은 빨강이었으니까. 베이비 컬러 유행의 전복은 20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는데, 유력한 유래는 크게 두 가지다. 적색 군복이 청색으로 바뀌면서 푸른 계열이 남성성을 얻으며 반전됐다는 설, 세계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아이젠하워 대통령 부인인 마이미가 입은 핑크 드레스 설이 있다. 전쟁 기간 칙칙한 검정과 파랑 노동복만 입던 여성들은 그 화려함에 매료되어 블랙과 블루를 벗어던지고 핑크를 선택했다고 한다. 이 일화대로라면 여성의 주체적인 선택이었지만, 마케팅은 상술로 이용하고, 사람들은 핑크에 점점 소극적 이미지를 결합했다.
여자아이들은 자라면서 분홍을 멸시한다. 정확히는 그에 깃든 속성을 기피한다. 꿋꿋이 분홍색을 좋아하며 나이를 먹으면 핑크 공주라며 놀림을 받는다. 사실 좋아하면서도 뽀얗지 않아서, 날씬하지 않아서, 우스꽝스러운 취급을 받을까 봐 멀리한다. 내 경우 분홍에 무관심했다. 디즈니 공주나 바비 인형은 취향이 아니었고, 미취학 아동 때까지 남자아이로 이뤄진 또래집단에서 노느라 영향을 받을 일이 없었다. 그런데 중3 때, 친구 따라 간 명동에서 예산에 맞추느라 선택의 여지없이 고른 베이비 핑크 티셔츠를 대봤을 때 초췌했던 피부에 급격히 화색이 돌아서 깜짝 놀랐다. 탁한 체크무늬 교복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나은 건가 고민했는데 착각이 아니었다. 그 이후에 만난 분홍은 웬만해서는 날 배신하지 않았다. 딸기우유 색, 수박바 색, 솜사탕 색. 또 벚꽃, 철쭉, 복숭아꽃, 장미 등 각종 꽃잎 색. 말갛고 밝은, 전형적인 분홍일수록 잘 어울리는 걸 부정할 수 없었고, 볼수록 정이 들었다.
분홍색이 어울린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이 나를 판단하는 시선이 달라졌다. 과하게 여성스러우며 몽상적인 사람처럼 보는 게 아닌가! 색을 더 깊게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하늘색이나 민트색을 입은 모습으로는 함부로 파악하지 않는데, 분홍색을 입은 첫인상에는 일반화가 따라왔다. 참 소녀다우세요, 여리하고 피부가 하얘서 여자여자한 색이 잘 받네요. 딱히 비하가 아니더라도, 젠더이분법적 발언을 계속 듣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그렇다고 모처럼 잘 어울리는 색을 포기할 수도 없고, 딜레마에 빠졌다. 색에는 죄가 없다. 상징색이 바뀌었을 뿐, 과거나 현대나 고착된 이미지와 편견은 그대로다. 색에 어떤 사회적 인식을 학습하지 않는 날이 오길 바란다.
「보라」
무지개의 마지막 색인 보라는 신비로우며 몽환적이다. 분홍과 파랑을 섞은 라벤더는 이분법에 저항하는 젠더퀴어 논바이너리의 색이며, 어두운 보라색은 에이섹슈얼의 색이다. 또 과거에는 동성애자를 뜻하는 색이었다. 퀴어에 가장 가까운 색을 꼽으라면 단연코 보라색이지 않을까!
보라색 염료는 무척 귀해서 품격과 명예를 상징했으며, 왕족이나 추기경의 색으로 선택됐다.장엄하고 풍부하지만 다소 우울하게 느껴지고 쉽게 범접할 수 없어서 호불호가 크게 갈리며 어려워하는 사람이 더 많다. 보라는 2차색 중 가장 개성적이며 종잡을 수 없는 색이다. 칸딘스키는 보라를 파랑에 의해 인간성으로부터 멀어진 빨강이라고 했으며, 괴테는 파랑이 매우 부드럽게 빨강으로 진전되면서 수동적인 듯 활동적인 성격을 요구한다고 분석했다.
영묘한 자수정은 중세의 마법사 같고, 보랏빛 꽃은 요정의 화신처럼 느껴진다. 10세 무렵 미술학원 선생님께 보라색이 어울리게 생겼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나는 그 표현이 퍽 좋았다. 독창적이면서 자유로운 색이니까. 퍼플, 오키드, 라벤더, 팬지 등 여러 얼굴을 가진 색이 마음에 들었다. 그 중 푸른 바이올렛을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어떤 색은 실제로 존재하는데도 환상처럼 느껴지는데, 그게 내게는 보라다.
이렇게나 선명하고 다채로운 유채색이 취향인데 상징하는 플래그에 무채색이 들어가는 게 아쉽다. 특히 에이스펙트럼 플래그는 회색이 들어가고, 데미나 그레이는 회색이 메인이다. 평생 컬러풀한 색을 동경했는데 칙칙한 회색이라니! 내게는 팬플래그의 찬란한 색이 참 아름다운데 어떤 이는 그 쨍하고 요란스러운 색이 별로라고 말하니 역시 사람의 취향은 다양하다.
이제 색을 그림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태양이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며 푸른빛을 압도하는 노란빛을 느낀다. 석양이 밀려오기 직전 푸른빛과 분홍빛이 만나서 이룩하는 매혹적인 보랏빛을 감상한다. 어떤 색채와도 잘 어울리는 자연물의 초록빛에 경탄한다. 직접 표현하기보단 찰나의 색감을 고이 간직하는 사람이 되었다.
색채는 내게 무한한 영감을 준다. 또,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불러 모은다. 마음 맞는 사람과 마주 앉았을 때면 살포시 질문을 던져본다. 무슨 색 좋아하세요?
독자님이 좋아하는 색은 무엇인가요? 이유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