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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그리 열심히 봐요? 해부학인가? 혹시 의대생?
처음 보는 바텐더는 내 책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다소 이른 시간의 칵테일 바, 나는 잔잔한 바다처럼 푸르른 칵테일을 앞에 두고 있었다. 미세한 소음을 배경음악 삼아서 책을 읽는 게 신기했는지, 내게 다가와 친근하게 물었다.
-아뇨. 예대생이에요.
당시 내 가방엔 전공서적밖에 없었다. 음악심리학의 이해는 글씨가 너무 촘촘해서 바에서 읽기엔 썩 좋지 않았다. 그나마 그림과 사진이 많은 교수법 책을 펼쳐놓고 새 바텐더가 글라스를 차곡차곡 정리하고 닦는 모습을 관찰하는 중이었다. 우연히 펼친 페이지는 훌륭한 대화 소재를 만들어줬다.
-어, 그럼 미대생? 그림 그려요? 멋지다!
-음대생이요.
-근데 해부학을 배워요? 신기하다. 난 예술 쪽 하나도 몰라서.
-손가락 근육이랑 손목 쓰는 법을 알아야 효율적으로 연주할 수 있어서요. 어깨랑 팔뚝, 척추도 배워요.
-와, 대단하다. 난 손만 잘 돌아가면 되는 줄 알았는데 꽤나 분석적이네.
난 초면에 반말을 쓰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반말과 존댓말이 안배된 말투가 무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깨 위로 찰랑거리는 단발과 가로로 커다란 눈이 매력적이었다. 작은 체구지만 이목구비가 커서 그득그득 뚜렷해 보였다. 외모처럼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친화력이 뛰어났다. 곧, 경력이 꽤 됐으며 적어도 다섯 살 이상 연상이라는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럼 잘 놀다 가요. 뭐 필요하면 애들 불러서 말하고. 또랑또랑하면서 살가운 목소리였다.
점차 시끄러워지는 게 싫어서 조심스레 일어났을 무렵, 그 바텐더가 달려왔다. 자주 온다면서요? 내일도 오나? 더 얘기하고 싶은데. 칵테일 바를 탐방하려고 일부러 오후 수업과 야간 수업을 넣은 사람이라 시간은 얼마든지 낼 수 있었다.
카페보다 바를 더 많이 다니고, 칵테일을 5잔 이상 마셔도 멀쩡하던 시기. 타이밍이 꽤 좋았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직행하면 오픈 전이어도 뒷문을 슬쩍 열어주기도 했다. 하나에 꽂히면 거의 시도해보는 편이라 생소한 칵테일도 마구 도전했는데 바텐더는 그런 날 신기해했다. 종잡을 수 없는데 재미있다며. 쿠키를 구워가면 커다란 리액션을 보여줘서 즐거웠다.
-와, 초코 완전 좋지. 뭘 또 가져와. 한꺼번에 많이 굽는구나?
-아닌데, 일부러 구워왔는데요?
-진짜? 나 주려고? 이걸 어떻게 굽지? 대단하다. 못하는 게 없구나?
-되게 쉬워요.
내가 보기엔 칵테일을 만들고 쇼를 하는 사람이 더 신기한데, 항상 날 칭찬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초콜릿 칩 쿠키였건만 달콤한 맛과 촉촉한 식감에 진심으로 감탄하는 게 느껴졌다. 초콜릿 쿠키를 한 입 물고 민트맛 글래스호퍼를 마시면 민트 초코칩 아이스크림 맛이 난다고, 정말 당연한 말을 하는데 웃어주는 게 좋았다.
바빠서 너무 오래 있을 수 없었던 날이었다. 그 사람은 어깨에 매달려서 애교 섞인 말투로 아쉬워했다.
-벌써 가? 아직 세 잔밖에 안 마셨는데? 또 언제 와? 미리 연락하고 오지, 좀.
-그럼 폰번호 두고 갈까요? 아니다. 번호 불러봐요. 전화 걸어놓게.
그 이후, 오후가 되면 출근한다는 문자가 왔다. 시험기간이나 방학이라 방문을 줄이면 너무 오래 못 본다며 투정을 부렸다. 자주 보면서도 서로에 관해 소상히 아는 사이가 아니라는 게 신선했다. 저녁을 굶고 왔다는 내 말에 대뜸 초콜릿이 잔뜩 묻은 도넛을 꺼내주는 게 재미있었다. 난 식감이 묵직한 디저트를 안 좋아하는 편인데도 천천히 다 먹었다. 무엇보다 이런 감정이 오랜만이라 새로운 칵테일을 즐기듯 한껏 만끽했다.
하루는 붉은 체리가 인상적인 체리 브랜디를 선물이라며 내밀었다. 분홍이나 주황 등 다른 색감이 섞이지 않은 정직한 빨강. 친구들은 청량한 푸른빛이 감도는 칵테일을 보면서 날 떠올리던데 이 사람에게는 내가 강렬한 이미지인가? 새빨간 색처럼 짙고 짜릿한 맛이었다.
-체리 브랜디? 그 뜻이잖아. 너와 밤을 보내고 싶어. 칵테일에 올라간 체리는 그 의미라던데?
-찾아보니까 탄생주던데? 그 사람, 내 생일 알거든.
-아니야. 작업 걸 때 체리 쓴다고 들었어. 와, 대박.
한 친구는 흥분해서 목소리 톤을 높였다. 새로운 바 발굴을 즐기는 내가 한 곳만 다니는 걸 의아하게 여긴 탓에 실토했더니 난리가 났다. 퀴어 친구들은 드디어 연애 세포가 되살아난 모양이라며 축하했다. 굳이 그 단어를 써야 하나 의문이 생겼지만, 한편으로는 드디어 생긴 연결고리에 안심했다. 열다섯에 끝난 첫사랑이나 열일곱 무렵까지의 연애 이야기, 스무 살이 되기 전 짧게 지나간 미약한 끌림을 활용해서 나의 소수자성을 증명하기 버겁던 무렵이었다.
이 감정의 정체는 뭘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고 애쓰지 않고 누굴 좋아하지도 않는 날 의아하게 보는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작은 호감을 부풀린 게 아닐까? 내가 원하는 관계가 뭐지? 잘 됐으면 좋겠다는 응원이 낯설었다. 꼭 잡는 거야. 일반 바에서 썸이라니 얼마나 희귀한데. 될 놈은 된다더니! 더 들이대! 친구들은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보듯이 집중했다. 로맨틱하고 드라마틱한 경험인 건 인정하지만, 드라마 주인공다운 상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 처음이 어렵지, 막상 어떤 분위기를 만들면 달콤한 칵테일을 넘기듯이 쉬워지는 건 나도 안다. 그렇지만, 그리 내키지 않았다. 지금이 충분히 좋은데 왜? 꽂히는 포인트가 다른 게 확실했다. 칵테일이란 큰 카테고리에 함께 묶여도 강렬한 바카디 베이스로 만든 파우스트와 가볍고 약한 리큐어로 만든 피치 크러시는 현저히 다르다. 그들과 내 감정은 그 차이만큼 맛도 색채도 무게도 다 달랐다.
내 정체성은 연애로 완성되는 건가? 체리에 섹슈얼한 함의가 있는 게 사실이라도, 꼭 그 부분에 설레야 하나? 마치 롱아일랜드 아이스티처럼 행동했다. 보드카, 드라이 진, 데낄라, 럼을 조합해 이름과는 달리 꽤 독한 칵테일. 퀴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땐 술을 가미해서 좀 더 강렬하게 만들고 내 지향성을 모르는 친구들을 만날 땐 레몬으로 맛을 내고 콜라로 색을 입혀서 아이스티인 양 위장하는 일상. 퀴어들에게는 좀 더 확장하고 가미되고 과장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비퀴어에게는 최대한 축소하며 평범한 척하기.
결국 친구들이 기대한 전개로 흐르지 않았다. 갑작스레 물리적 거리가 멀어질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나 진짜 속상해. 우리 이제 어떡하지? 나이 차이만 해도 더 접근하기 어려운 판국에 거리까지 멀어졌으니 막막할 법도 했다. 몇 걸음만 더 다가가면 다른 관계로 발전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송별파티에 끝까지 남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몇 차례 그립다거나 보고 싶다는 연락이 왔으나, 먼 거리로 가로막혀서 자연스레 소멸됐고 곧 추억으로 남았다.
나를 부르는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고 느낀 시점이었다. 동일한 재료로 제조해도 어느 글라스에 담는지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달라지는 칵테일처럼 내게도 조금 다른 이름표가 필요했다.
당시 숱하게 찍었던 칵테일 사진은 휴대폰 고장으로 거의 다 잃어버렸다. 그윽한 조명 아래 일렁이던 칵테일의 물결과, 나눠 먹던 초콜릿 쿠키의 식감, 탐스러운 체리의 이미지만 은은하게 떠오른다. 다 마신 칵테일 밑에 가라앉은 레몬 조각처럼 얇고 단편적인 흔적만 남은 일이다. 그럼에도 상당히 특별한 경험으로 자리했다. 내 에이엄브렐라 정체화 계기의 큰 축을 차지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밤마다 느끼던 자그마한 설렘, 무슨 사이인지 규정하려 애쓰지 않는 여유로움. 칵테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담소를 나누며 전에 없는 안락함을 느끼던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완성됐다고 생각한다.
본문 사진은 전부 펑키빌라 칵테일입니다. 개인적으로 상큼한 푸른 칵테일을 추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