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제사장의 신학적 이해를 돕는 글(자료)을 쉽게 볼 수 없는 가운데서 마침 '만인제사장 이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고찰'을 발표한 글이 있어서 여기에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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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제사장 이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고찰”
Ⅰ. 서론
종교개혁시대 이후 개신교회는 일반적인 만인제사장 이론을 별다른 비판없이 수용하고 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달리 특정계층의 제사장이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여 누구나 제각기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시대 한국교회의 일반성도들은, 실제적인 측면에서는 목사를 제사장으로 인정하는 듯 하면서도 이론적 측면에서는 만인제사장 이론을 거의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로마교회에서 일컬어지는 사제의 직임은 그들에게 하나님과 일반 성도사이에서 무엇인가 중재할 내용이 있다는 의미로 잘못된 것이다. 로마교회에 있는 고해성사나 성찬을 나눔에 있어서 사제와 일반신도들의 구분됨은 그 한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요구되는 바 직분이 형식적으로 경직되거나 권위주의화 할 때 지상의 교회는 로마교회와 유사한 사제적(司祭的) 경향성을 드러내게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목사를 ‘하나님의 종’1)이라는 특별한 위치에 있는 자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나 일반 교인들이 목사의 축복기도를 받고 싶어하는 종교심리 등은 그러한 경향성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론적으로 만인제사장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목사를 일반성도들과는 달리 하나님과 더 가까이 있거나 특권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박윤선 박사는 그의 ‘헌법주석’ 머리말에서, 장로교 정치의 정신은 한마디로 교회의 주권이 교인에게 있는 것을 기본으로 한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사실은 비단 한국교회 뿐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교회헌법 주석가들이 일반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바이다.2)
작금에 있어서는 소위 ‘평신도 교회’3)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있으며, 평신도를 중심으로 한 교회들이 마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실정이다4). 이런 주장을 하고 실행에 옮기는 이들의 기본적 신앙이념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만인제사장이론’이 뒷받침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한국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마치 제사장적 지위를 가진 듯한 자세를 보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저항성에 기인한다.
이렇듯이 우리시대의 기독교가 만인제사장 이론을 별다른 비판적 안목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점에 대해 다시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성도 각 개인이 제사장이라는 설명이 타당한 것인지, 아니면 잘못된 신학이론인지, 혹은 그에 대한 좀더 광범한 이해가 요구되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이다. 우리가 이에 대해 잘못 이해하게 되면 교회의 권위를 손상하게 되고 마치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할 가능성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시대에 일고 있는, 개별 성도들이 가질 수 있는 듯이 설명되는 심령 천국에 관한 개념이라든지 만인제사장 이론을 배경으로 한 기독교 윤리실천의 일환으로 참여 민주주의와 결부시키는 시도, 그리고 교회의 민주주의 도입 등에 대해서는 상당한 신학적 해석을 요하는 부분이다.
논자는 이 글을 통해 만인제사장 이론이 각 개인 성도가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물론 이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가능할 것이며 각 개인 성도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어느정도 감당할 수도 있음을 감안한다. 그러나 그 기능은 어디까지나 교회5)의 감독하에서 이루어지는 직분적 개념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Ⅱ. ‘제사장’에 관한 이해
구약시대의 모든 유형의 제사장은 후일 하나님께서 보내실 완벽한 제사장의 오심에 대한 예표로써 대표성을 띠고 있다. 다양한 방법으로 드려지는 제사들 또한 완벽한 제물로 바쳐지게 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시대 하나님께 드려진 제사들 중 최초의 제사행위는 아벨의 제사이다. 아벨의 제사장 직능은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존재한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셨던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드려졌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써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난 뒤 얻은 자식들인 가인과 아벨은 각기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가인은 곡물로, 아벨은 양으로 제물을 삼았다. 하나님께서는 그 두 사람의 제사를 다 기쁨으로 받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는 열납하시고 하나는 버리셨다. 아벨과 가인이 각기 다른 제물을 바쳤던 이유는 저들의 생업과 관련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가 동물제사와 곡물제사의 차이 때문이라는 설명은 충분치 않다6). 나중 율법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예물을 바칠 때는 동물뿐 아니라 곡물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보게 된다7).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 대한 대표성이 있지 않은 무자격자였기 때문이었다. 가인은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있던 자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제사행위를 하기 전부터 가인을 자기 자녀로 인정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즉 가인이 바친 제물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사를 바치고 있는 가인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열납하셨던 본질적인 것은 아벨의 제물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는 아벨이었으며 하나님께서 미워하셨던 것은 가인의 제물이 아니라 가인이었던 것이다8). 가인은 자기판단과 열정으로 제사를 드렸지만 아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의 긍휼하심에 따라 제사를 드렸다. 그러므로 자신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았을 때 가인은 분노했던 것이다(창4:5). 여기서 우리는 인간 초기부터 존재했던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를 보게 된다.
아벨과 가인의 제사에 관한 기록에 앞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음으로써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는데 그 추방에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를 보게 되며 그것이 가인에게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아벨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경륜과 은혜에 따라 믿음의 제사(히11:4)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 이후 하나님의 구속사 가운데 존재하는 아브라함의 제사장 직능의 특이성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줄기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이 세상과의 분리를 구체적으로 시도하신다. 창세기 11:10-32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족보에 관련된 말씀은 아브라함이 셋, 에녹, 노아를 이은 셈의 계보에 속한 언약의 자녀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갈데아 우르에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시대적 형편에 따라 자의적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미리 예비하신 언약에 따라 택해두신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제사장 직능의 특이성은 그 전과는 달리 동물이나 곡물제사가 아닌 ‘인신제사’(人身祭祀)를 조건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인간의 몸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이 온전한 제물이 되어야 할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허락하신 ‘그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으로부터 시작된다.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주신 이삭은 ‘언약의 민족’의 뿌리라 할 수 있다. 즉 그의 씨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으로 허락하신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몸과 생명을 요구하신다. 이는 단순히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고자 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물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제사장이 되어 백세에 얻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쳤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행위는 아브라함의 선량한 판단이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신앙적 열정이 아들을 바치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아들을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신 신령한 의미 속에 아브라함이 존재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순종하여 약속의 아들 이삭을 바친 것은 이후에 형성될 이스라엘 민족의 삶과 동일한 의미로 해석된다. 즉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이삭의 생명뿐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생명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바라거나 기대하던 방법이 아니었으며 순전히 하나님께서 구원의 경륜 속에서 원하신 방법이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바칠 때 그는 하나님께 약속으로 얻은 자식의 몸과 생명을 바치는 온전한 제사장이 된다. 아브라함의 제사장 기능과 제사행위는 구속사적 행위이며 대표성을 띤 것이었다. 갈데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 그가 알지 못하는 땅으로 인도하여 그곳을 약속으로 주신 것은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계획 때문이었다.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는 아브라함에게 백세가 되어서야 이삭을 허락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자녀를 하나님께 도로 바치게 했던 것은 그리스도 사역에 대한 표상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바쳐진 제물인 이삭의 생명을 다시 허락하심으로써 그 새로 태어난 생명이 자신에게 속한 것임을 확증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그런 제사장으로서의 행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적 은혜에 의한 것이었으며,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로 인해 앞으로 있게 될 그리스도를 소망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 아브라함이 행했던 제사장 직분의 이행은 인간의 구원역사 가운데 있었던 놀라운 대표성을 띠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일컫는 것도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모세시대 이후의 제사장 개념과 제사행위는 한층 점진적으로 나타난다. 제사장 개념이 일반적인 의미와 더불어 한 무리, 즉 나라(kingdom)로 계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시내광야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특별한 말씀을 주신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할지니라”(출19:5,6). 이 말씀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제사장적 직능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특별히 선택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는 제사장 기능을 하는 도구가 된 것이다. 여기서 ‘내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은 모두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 영광의 회복을 위한 자신의 구원의 경륜을 펼쳐 가시겠다고 언약하고 계신 것이다.
모세 이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반도에 들어가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막을 건립하게 된다. 그때부터 율법이 제정하는 대로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대한 제사를 맡았다. 그 제사장들의 직능은 예루살렘 성전이 건립된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까지 지속된다. 성막과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그 가운데서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제사장은 규례적으로 자격을 갖춘 제사장이어야 했다.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 요구되는 바는 개인의 능력이나 취향이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 아론의 자손, 레위지파여야 했다. 즉 제사장이 되는 것은 개인적 인정이나 판단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선정된 대표성이 우선적으로 충족되어야 했던 것이다.
만일 자격이 있지 아니한 자가 제사장이 된다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앙하는 사람이자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제사장이 되어 성의를 다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자원한다해도 아론의 후손, 레위지파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제사장이 될 수 없다. 나아가 아론의 자손 제사장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으므로 누구든지 제사행위를 잘 할 수 있어 보이는 다른 지파 자손들을 선택하여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게 하려 해서도 안된다. 이는 제사장 직분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택정된 직임으로서 언약적 대표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모세 이후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성막)과 더불어 제사장이라는 중재자를 필요로 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중재자 없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백성은 성전과 제사장의 사역과 연관되어 있다. 성전과 제사장을 통하지 않은 개별적 제사행위는 무의미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범법행위가 되었던 것이다. 즉 제사장의 규례를 어긴 제사는 도리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민족들로부터 성전을 파괴당했을 때도 그들은 여전히 성전과 제사장을 소망하는 가운데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모든 신앙의 중심에는 항상 성전과 제사장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구약시대의 모든 제사의 개념은 인간의 몸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완전히 성취된다.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영원한 제사장을 통한 제사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서의 직능과 더불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완벽한 제물로서의 기능을 온전히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인간은 범죄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었다. 죄를 가진 성품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과 택하신 백성 사이의 화해를 위해서는 완벽한 중재자가 요구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존재이기 때문이며 그것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구약시대의 모든 제사장의 직능들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모아지며 그가 오심으로 인해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아벨의 제사장 직능, 아브라함의 제사장 직능, 모세 이후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지속되어온 성전을 통한 제사장 직능이 전부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그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는 능력을 갖춘 온전한 제사장의 직능을 행하시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대제사장이 되셔서 자기 몸을 완벽한 제물로 하나님께 바쳤다. 그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완벽한 화해를 이루었던 것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완벽한 제사장임을 말하고 있다. 그가 그 직임을 완성하심으로써 구원을 완성하셨으며 그로 인해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영적인 제사를 담당하게 될 이스라엘 민족에게 요구하셨던 공동체 제사장으로서의 주님의 몸된 교회가 지상에 탄생케 된 것이다.
Ⅲ. 만인제사장 이론의 생성
로마제국 시대의 타락한 기독교는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만인제사장 이론을 확립할 만한 단초를 제공한다. 이에 앞서 사도교회 시대 및 초대교회 시대의 제사장 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제사장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에 집약되었다. 초대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 이외에 달리 특정한 제사장이 있어야 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은 교사로서 인도자였을 뿐 제사장의 직임을 가지려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도 통한다. 박해받는 교회 안에 존재하는 개별 성도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달리 명예를 취할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는 성도들이 도리어 생명과 연관된 표적이 되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교회 내에서 종교 정치적 권리를 향유하려는 자들이 있지 않았을 뿐더러 그리스도 이외의 최고권리를 가진 장(長)이 필요치 않았다. 이는 당시의 교회가 정치와 행정을 중시한 교회가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313년 로마제국에서 콘스탄틴(Constantine)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고 395년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에 의해 국교가 된 후 기독교에는 많은 변화가 있게 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교구제도와 사제제도의 성립이다. 그 제도는 기독교 세계뿐 아니라 점차 넓은 로마제국을 통치하는 종교적 통치 수단으로 자리잡게 된다.
거대한 로마제국을 통치하는 이념적 수단으로 전락한 교구제도와 사제제도는 점차 피라미드식의 계층화 내지는 계급화하게 된다. 세상을 포기한 교회공동체라는 개념이 세상을 확립하는 조직과 통치의 개념으로 전환되면서 통치력에 대한 힘의 결집이 요청되었다. 그러한 과정의 결과 로마제국의 기독교에서는 결국 사제들의 직능이 제사장 개념과 동일한 특수 계층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중세 종교개혁시대는 말씀에 깬 자들이 타락한 제도적 기독교에 대해 저항하던 시대라 할 수 있다. 1517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당시 복음에서 벗어난 탈기독교적9)인 로마교회에 저항하게 된다. 종교개혁 당시의 사제들은 일반교인들에 비해 특권층이었다. 당시 유럽의 대다수 시민들이 명목상의 기독교인이었는데 그 가운데 사제들은 교회에서 특별한 권위를 향유하는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군림하며 교인들을 종교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교회 사제들의 종교를 빗댄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에 앞장섰던 루터가 내세운 개혁운동의 3대 원리는 이신득의, 성경의 절대권위, 만인제사장직으로 요약된다. 그는 1520년에 쓴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고함”에서 ‘모든 세례교인들은 모두가 제사장이라는 명제를 내세웠다. 그렇지만 그는 세례받은 성도가 모두 제사장들(sacerdotes)이기는 해도 목사들만이 교역자들(ministeri)이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루터 역시 교회의 직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사제만이 성경을 읽을 수 있으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대리자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가르침에 대해 그 잘못을 지적했다. 그것은 결국 당시 기독교 기득권층과의 정치적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생명을 건 투쟁이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사제들만이 하나님을 가까이 대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제사장이 아니라 개개인의 모든 교인들이 동등한 제사장임을 천명하게 되고 일반 교인들도 그러한 만인제사장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역할은 실로 컸다. 사제들의 고유한 제사장 직능이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던 때 종교개혁자들의 타락한 교회조직에 대한 정면도전은 일반 교인들을 잠 깨우기에 충분했음이 틀림없다. 우리는 당시 만인제사장 사상의 생성과 확립이, 타락한 제도적 기독교에 대한 반동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기존 종교 권력이나 특권의식에 대한 도전과 저항은 소외계층이라 할 수 있는 일반 교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연스럽다. 물론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시대의 지도자들은 일반교인들을 말씀으로 계몽하려는 진지한 노력과 잘못된 제사장적 교권주의로부터 성도들을 해방시키려는 신앙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 결과 만인제사장 이론은 삽시간에 전 유럽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과 당시의 특수한 시대적 상황을 읽으면서, 과연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제사장의 기능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해 봐야 할 바가 많다. 단순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개인의 자격 문제가 아니라 지교회를 세워가는 직분과 관련된 문제임을 깊이 인식해야만 하는 것이다.
Ⅳ. 제사장에 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
신약성경 가운데서 교회의 제사장 개념을 잘 살펴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말씀은 베드로전서 2:5-9과 요한계시록 1:6과 5:10에 잘 나타나고 있다. 먼저 베드로전서 2:5은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Ye also, as lively stones, are built up a spiritual house, an holy priesthood, to offer up spiritual sacrifices, acceptable to God by Jesus Christ; KJV).
베드로전서 1:1에서는 이 편지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있는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보낸 베드로의 편지임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우선 위 구절의 ‘너희’의 범위를 확정해야 한다. 즉 ‘너희’가 개인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칭하고 있는지, 아니면 각 지(支) 교회들을 가리키고 있는가 하는 문제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문맥상으로는 ‘너희’가 각 성도들 혹은 각 지 교회 모두를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산 돌(들)’(lively stones)이 복수인 점이 그것을 보충적으로 확증하고 있다. 그리하여 ‘너희 한 사람 한 사람 혹은 각 지 교회들은 개체의 돌들처럼 기능하여 결국 하나의 집으로 세워져 <한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영적 제사를 드리라’는 의미이다10). 이러한 개체들을 지칭하는 ‘너희’가 9절에서는 ‘하나’인 ‘너희’로 발전되어 선언되고 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그 점을 확증한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Once you were not a people, but now you are the people of God).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a people'과 'the people'이라는 단어를 통해 성도들이 확정된 하나의 백성으로 일컬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본문에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제사장에게 특정한 권리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도리어 제사장의 올바른 기능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하고 있다. 베드로전서 2:9에서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11)임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바 ‘너희’는 의미상 베드로전서 1:1에 언급된 지역교회들에 포함되지 않은 지상의 모든 교회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이 구절에서 ‘너희’란 각각의 개인을 개별적으로 불러 일컫는 말이 아니라 전체적인 의미에서 언급하고 있는 용어이다. 즉, 개별적으로 상호 인지하지 못하는 개개인들에게 너희 각자가 다 제사장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공동체인 너희가 제사장’이라는 의미이다. 앞의 5절에서 기록된 말씀의 발전적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구절의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들’은 영어성경에서는 ‘you are a royal priesthood’(KJV, NASB, NIV)로 기록되어 있다12). 여기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you are royal priests’(너희는 왕같은 제사장들)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한글성경의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들’(개역성경)이란 번역은 오역이다. 표준새번역에서 ‘여러분은 왕의 제사장들’이라 번역한 것도 옳지 않다. 정확한 번역은 ‘너희는 왕같은 한 제사장’으로 되어야 한다. 여기서 강조되어 이해되어야 할 점은 ‘한’(a)이다. 즉 ‘너희’ 전체가 하나의 제사장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 구절에서 선포되고 있는 말씀은 구약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사야서에 기록된 약속의 성취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새로운 제사장적 기능과 놀라운 계획이 있음을 말씀하심으로써 소망을 제공하셨던 것이다: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열방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며 너희가 수치 대신에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고토에서 배나 얻고 영영한 기쁨이 있으리라”(사61:6,7).
또한 요한계시록 1:6은 ‘우리를 하나님께 대한 제사장으로 삼으심’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And hath made us kings and priests unto God and his Father; to him be glory and dominion for ever and ever. Amen: KJV"; "and has made us to be a kingdom and priests to serve his God and Father - to him be glory and power for ever and ever! Amen":NIV).
우리는 위 본문의 영어 성경 KJV와 NIV 가운데 상호 차이가 나는 단어를 발견하게 된다. 그 중에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kings’(KJV)와 ‘a kingdom’(NIV)이다. 이는 한글 개역성경의 ‘나라’에 해당되는 단어이다. ‘kings’와 ‘a kingdom’은 엄연히 다른 말이다. 헬라어 성경에서 ‘βασιλεια’는 곧 ‘왕국’ ‘나라’이며 a kingdom에 해당되는 단어이다. 우리는 여기서, 성도 각 개인 모두가 왕이 된다는 해석이 가능한가 하는 점부터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문제는 일반 해석상 그리 복잡하지 않다. 왕들만 모인 왕국이란 있을 수 없으며 한 개인이 왕국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βασιλεια’의 번역은 ‘a kingdom’과 ‘나라’가 옳은 번역이다13).
그런데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할 부분은 a kingdom과 priests의 관계이다. 논자는 a kingdom과 priests를 동일한 의미로 해석한다. 즉 a kingdom = priests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kings와 priests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kings가 priests와 동일하다고 본다면 모든 성도들은 왕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게 되고 동시에 모든 성도들은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볼 수 없다. a kingdom이 공동체적 개념을 가지듯이 priests 역시 하나의 kingdom안에 존재하는 각 개체의 공동체적 개념을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6에서 보여지는 바는 모든 성도들(all believers)이 제사장들(priests)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모든 성도들’>(one ‘all believers’: 주님의 교회)이 <하나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교회론적 이해가 뒤따를 때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해 질 수 있을 것이다. priests가 복수 인 것은 각 개별 성도들이 아니라 우주적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별단위의 지 교회인 것이다.
우리가 이 본문에서 분명히 기억해야 할 바는 교회가 나라와 제사장이 된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며 개인 성도의 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만인 제사장 이론을 언급하며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권리를 가진 것으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접근이 아니다. 이는 물론 교회내 특정한 직분자들이 제사장 직무를 대행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특정 직분자나 개별 성도들을 제사장들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교회로 세워진 자기 백성을 오로지 하나님 자신을 위해 제사장으로 삼으신 것이다.
요한계시록 5:10에서도 ‘자기백성을 제사장 삼으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이 본문에서 보는 것은 우리가 땅에서 왕노릇하는 조건이 제사장이 되는 것과 연관이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잘 이해해야할 바는 왕노릇하는 것이 각 개별 성도들이 아니라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의 무리 곧 지상의 교회라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예비하신 때 땅에서 왕노릇할 수 있는 존재가 성도 개개인이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Ⅴ. 신약시대 교회와 제사장에 대한 이해
만인제사장의 범위를 확인하기 위해 우선 신약성경에 사용되고 있는 인칭대명사 ‘너희’와 ‘우리’의 용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만인제사장 이론의 배경이라 할 수 있는 베드로전서 2:5,9에 나타나는 ‘너희’라고 하는 2인칭 복수 대명사와 요한계시록 1:6과 5:10의 ‘우리’라고 하는 1인칭 복수대명사는 수(數)의 규모면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내용적 측면에서는 매우 다양하고 광범한 의미를 내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너희’와 ‘우리’는 개인이 아닌 다수(多數)를 호칭하는 일반언어이지만 개별인간들이 모인 한 무리, 즉 집단을 지칭할 수도 있으며, 한 집단 내부에 있는 개개인을 지칭할 수도 있다. 이 양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해도 ‘너희’와 ‘우리’라는 용어의 일반적 의미는 대화의 상대 혹은 대화의 주체로서의 호칭이다. 그러한 예는 성경에서 무수히 많이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사용했으며 사도들 역시 자신들이나 복수인 타인을 호칭할 때 쓴 용어이다.
성경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호칭할 때의 ‘너희’와 성도들이 자신의 무리를 일컫는 ‘우리’의 특이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너희’와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의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너희’라 호칭할 때 그 의미 가운데는 교회를 배태하고 있는 사도의 그룹으로서 ‘너희’였다. 여러 사람인 복수를 지칭하지만 의미상 단일한 무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라고 하는 무리에게 설명하시고 요구하신 내용들은 그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 그 이후 모든 교회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라고 하는 특정 무리에게 명령한 말씀이라 하여 오늘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라고 변명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너희’라는 용어 가운데 많은 경우 그것은 ‘교회의 모체’ 혹은 ‘교회’를 의미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라는 대명사 역시 그와 마찬가지다. 예수님과 사도, 혹은 교회가 ‘우리’라고 할 때 오늘의 성도들도 그 의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특정한 무리를 규정짓는 복수 인칭대명사와 ‘교회’의 연관된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마태복음 24장에서의 ‘너희’의 개념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마태복음 24장에서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계속 ‘너희’라는 용어를 사용하신다. 거기에는 제자들이 직접 경험하게 될 내용들과 앞으로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후세의 성도들이 경험하게 될 내용들에 대해서도 ‘너희’라는 말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 즉 그 자리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경험하게 되지 않을 종말에 일어날 사실들을 이야기하면서도 ‘너희’가 그런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고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으며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라’(마24:6,7)는 말씀은 당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이 직접 겪게 될 내용들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너희’가 그런 환란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라 하실 때 그 말 속에는 나중에 종말의 때까지 존재하게 될 교회를 염두에 두고 ‘너희’라 칭하셨던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은 초대교회로부터 역사상의 전체교회를 향해 ‘너희’라 칭하신 말씀으로 기억해야 한다.
또한 베드로전서 5:2에는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the flock of God among you) 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라는 말은 ‘너희’와 ‘양무리’를 의미상 구분짓고 있다. 즉 ‘너희’는 복수 형태를 띤 단수적 개념이며 ‘양무리’는 그 안에 존재하는 다수의 집단적 개념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너희 가운데 있는 그 양무리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그 속성상 분리되는 개체적 개념이 아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의 끈으로 엮어진 하나의 무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서신을 받고 있는 대상인 교회는 흩어져 있되 ‘하나’인 집단적 의미의 단수인 교회이며, 개별적인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아니라 지 교회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5:13에도 보면,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노라’(She who is in Babylon, chosen together with you, sends you greetings; NASB)고 말씀하고 있다. 베드로는 서신을 쓸 때 바벨론에 있었다. 바벨론의 구체적 장소성에 대한 문제는 접어두고서라도 베드로가 있던 그 도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세상의 한 배교에 빠진 도시였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세상 가운데 있으나 분리되어 존재하는 한 교회이다. 베드로는 지금의 아나톨리아 지역14)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을 동일한 형편에 처한 교회로 보아 문안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에서 우리는 한 교회가 다른 지역에 있는 한 교회에 문안15)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더 정확하게는 한 교회가 한 교회에 문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특색은 집합적 단수에 대한 개념이다. 즉 하나의 교회에 속해 있는 여러 성도들을 단수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하여 신약시대의 제사장 이론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위에서 그 기본적인 개념을 살펴보았듯이 신약시대에는 지 교회인 개체 교회가 곧 제사장이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적 직능을 말하고 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 개념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개념으로서 주님이 오심으로 그 의미가 완성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대제사장이 되셨으며 그 자신의 거룩한 몸을 완벽한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셨다. 그로 인해 주님께서는 택하신 백성들로 교회를 삼으셨으며 이제는 그 그리스도께 온전히 속한 각 지교회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없고 섬길 수도 없으며 교회를 떠나서 기도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가장 미리 생각해야 할 제사장으로서의 교회공동체이다. 칼빈은,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제도적 교회는 구원받은 영혼으로서의 개인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개인구원을 너무 강조하지 않는다16). 개별 성도가 아니라 교회공동체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우선하는 개념인 것이다17).
그렇다면 제사장으로서 지 교회의 실체는 무엇인가 알아야 한다. 가시적 교회는 우선 눈에 보이는 성도의 무리가 말씀과 성례를 통해 구체적인 교제를 나누는 지교회를 지칭한다. 우리는 우주적 교회의 제사장 직능에 대한 분명한 이해의 바탕 위에서 지교회의 제사장 직능을 논하게 된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다. 지상의 건전한 모든 교회들은 하나의 우주적인 교회에 속해 있다. 물론 여기서 건전하다고 하는 말은 세상적 경험이나 윤리적 건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건전한 교회는 성령의 간섭을 받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며 주님의 재림을 진실로 소망하는 교회이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교회는 그 재림주를 신랑으로 맞이한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최상의 즐거움과 기쁨으로 그와 영원히 연합하게 되는 것이다. 그 신랑을 맞이하는 교회는 여럿으로 나뉘어진 ‘교회들’이 아니라 하나의 ‘교회’이다18). 그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성도들을 제물로써 하나님께 제사하며 경배하게 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자신이, 자신의 몸으로 형성되어 있는 그 교회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장의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개체성을 띠고 있는 지(支)교회의 제사장 직능은 매우 중요하다. 논자는 본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만인제사장 이론의 최소단위는 개별 성도들이 아니라 지교회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교회란 보편교회에 예속된 개체 교회들을 의미한다19). 여기서 지교회라 함은 단순히 조직 및 제도적으로 독립된 교회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기독교의 외적 형태를 띠고 있다 할지라도20) 교회로서의 기본 내용들을21) 담고 있지 않다면 참교회가 아니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제사장으로서의 직임을 감당할 수 없다.
우주적 보편교회에 속해 있는 지교회들은 각기 독립적으로 제사장의 직능을 감당하게 된다22). 지교회가 제사장의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은 전체 가운데 속해 있는 독립된 지교회로서 교회밖의 간섭없이 말씀을 선포하고, 세례와 성찬을 나눌 수 있으며 권징사역을 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교회에서 말씀선포와 성례의 이행은 지교회의 소관이다. 그것이 곧 지교회가 제사장의 직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시대 매주일 온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교회가 지속적으로 제사장의 직능을 감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우리는 각 개인이 지교회의 지체로서 제사장 직능을 어느 정도 감당하고 있음에 대한 신학적 여지를 남겨둘 필요가 있다. 우리 시대에는 특별한 직분자를 통하지 않은 성도의 개별적인 예배가 가능하다. 각 개인이 다른 인간적 중재자 없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든지 홀로 기도할 수 있는 예가 그렇다. 우리가 개별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할 수 있는 것은 개인 성도의 제사장 기능을 어느정도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는 교회와 연결된 상태에서만 그것이 가능하다. 즉 교회의 머리이자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음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분리된 개인 성도들과 사적인 계약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룬 백성들을 대상으로 공적인 언약을 맺고 계신다23). 개혁교회에서 말씀선포와 성례를 중요한 교회의 본질적 표지로 삼고 있으며 교회됨을 보존하기 위한 방편으로 권징사역을 그 표지의 하나로 이해하는 것은 개별성도들을 교회 가운데 온전히 엮어두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떠난 개인의 제사장 직능이나 제사장 행위는 유효하지 않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개별적 판단에 의한 기도를 제어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며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의 의사가 성도들의 삶에 깊이 반영되어야 함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24).
Ⅵ. 결론
신약성경이 우리시대에 요구하는 바 제사장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주체에 대해서는 ①단일한 우주적 보편교회 ②흩어진 지교회들 ③각 개인 성도들을 들어 생각할 수 있다. 보편교회의 제사장 직능은 우주적이며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흩어진 지교회의 독자적 제사장 직무의 기능은 구체적이며 실천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각 개인 성도들의 제사장 직무는 원리적으로 보아 교회를 떠나 독자적이 될 수 없으며 교회에 속한 성도로서 소극적 독자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시대,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회복이 추구되던 것이 이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이 되었다. 지금은 그 원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해 궁극적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2:5, 9과 요한계시록 1:6; 5:10이 말하는 바 제사장 이론의 근저에는 주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가 바탕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시대 제사장을 통해 화해와 구원의 모형을 보이던 것이 이제는 주님의 교회를 통해 그 구원을 완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즉 구약시대 제사장들의 사역이 그리스도의 사역과 연관된 그림자라면, 신약시대 교회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께 제사장과 제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인 제사장 이론이 모든 교인들 각자가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주장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결국 그렇게 되면 교회를 구성하는 직분을 이해하는데 커다란 장애가 따르게 된다. 교회는 민주적인 협의체가 되어서도 곤란하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개별적인 생각과 판단의 집합이 교회를 이끌어 가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중심적 교회로 전락하게 될 위험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 모든 직분은 개인의 능력을 교회 가운데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으로 부터 부여받은 은사이다. 교회의 다양한 모든 직분들은 개인 성도들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물론 논자는, 목사가 제사장적 성격을 지닌 직분자라는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주장은 차라리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바 만인제사장 이론 보다 더욱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목사든 장로든 혹은 평신도이든 모든 성도들이 교회로부터 부여된 직분과 직임을 가지는 것은 결국 지교회의 제사장 직능을 위해서이며 이에 넘어서면 그 직능을 제대로 행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만인제사장 이론을 잘못 받아들이게 되면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예를들어 교회가 부여한 직분자인 목사가 맡을 수 있는 설교자로서 교사 직분과 성례를 집행할 수 있는 직분,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을 말씀과 더불어 교회 가운데 선포할 수 있는 언약의 축도(benediction)25) 등을 이행할 수 있는 직임에 혼선이 올 위험이 있게 되는 것이다. 곧 만인이 동등한 제사장이라면 누구나 차등없이 자유롭게 직분을 행할 수 있다는 이론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중세 재세례파(Anabaptists)의 경우 만인제사장 이론을 수용하면서, 성도들 사이에 있는 모든 직분적 차이를 완전히 폐지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성경이 교회에 가르치고 있는 제사장 이론을 잘 이해함으로써, 주님의 몸된 교회가 그 참된 권위와 함께 올바르게 자라가는데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와 교통을 나누는 원리적 주체는 제사장 직무를 감당하는 그의 몸된 교회이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며 베드로전서 2:5의 말씀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Ye also, as lively stones, are built up a spiritual house, a holy priesthood: KJV”(너희도 산 돌들로서 한 신령한 집, 곧 한 거룩한 제사장으로 세워질지니라: 私譯).
[Abstracts]
A Critical Study on ‘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Kwang Ho Lee, Ph.D)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study ‘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theory’ in a critical way. Nowadays many people have had a misunderstanding of the traditional theory of 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Since the Reformation, this theory was headed up in the middle age churches.
As we know, the Roman Catholic Church had priests who were different from other believers. Priests had more authority than others, and they had religious privileges for serving God. Priests were special mediums between God and normal believers. Because of that reason the position of priests was higher than normal believers.
Reformation had changed their traditional thoughts of the priesthood. Martin Luther insisted on 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It means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priests and other believers. All believers are the same before God. No other person is necessary to serve God or have fellowship with God. Every believers could talk to God directly whenever he wanted.
Most present day scholars have no doubts about 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theory. But we must study this theory again. I do not agree individual believers can be independent priests. All believers must be under the universal body of the church. It means an individual believer can not handle his own faith by himself. If that happens, we could say that different faiths or confessions can exist in the same church. But it is not possible.
We can only say that all church members must have the same faith before God. All church members must stand under community of the church authority. Therefore, 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cannot be adopted for the individual believers but only for individual local branch churches.
Individual local churches have specific members who are baptized by the witness of the same community. That local church must have regular Sunday service. All believers who attend the church service make one body through the Word of God and Holy Communion. So, the church community is one body in Jesus Christ. By this we could know that the individual local church has the godly authority of the Word, Baptism, and discipline before God.
In this paper the writer tried to say that 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theory must be adopted by the individual local churches not by the individual believers. It is true that up to now most scholars agree with 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theory in the traditional way. But the writer expects to discuss the new aspect of this theory again.
<각주>
1)‘하나님의 종’이라 할 때 ‘종’에는 두가지 다른 개념이 있다. 하나는 παι?, 다른 하나는 δουλο?이다. παι?는 이스라엘의 고난 받는 종에게 해당하는 용어로서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는 의미라 할 수 있으며, δουλο? 는 노예로써 주인에게 팔려간 존재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주인만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자이다. 사도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표현 한 것은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노예(δουλο?)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시대에 하나님의 종(δουλο?)으로 고백할 때 자신을 특권계층에 속한 자로서 표현 할 수 있는 용어가 될 수 없다.
2) 박윤선, 『헌법주석』(서울: 영음사, 1983), 머리말. 참조.
3)최승호, 『21세기 한국교회의 비전』(서울: 대장간 출판사); 이 책은 “소금과 빛”(두란노서원) 1999년 5월호에서 추천도서로 선정되어 소위 평신도들에게 강력하게 권장된바 있다. 책 내용은 <1. 평신도들이 개척한 교회, 2. 성경적 교회관, 3. 평신도 교회, 4. 평신도 교회의 특징, 5. 평신도 교회의 기본원칙들, 6. 평신도 교회의 문제점과 해결책, 7. 평신도 교회의 부르심, 8. 21세기 한국교회 발전을 위한 제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저자는 평신도 교회가 가장 성경적인 것으로 글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4)2003년 4월 27일 설립된 서울의 ‘언덕교회’(서울특별시 금천구 독산본동 983)는 교회가 선언한 <교회의 특징> 8번항에서 '평신도가 주축이 되어 교회를 운영합니다’라고 못박고 있으며, '새길교회’(서울 강남구 청담동 66-1) 역시 창립취지문에서 ‘교역자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평신도 중심의 교회’임을 천명하고 있다. 또한 2001년 3월 15일 설립된 경남 진주의 ‘주님의 교회’(경남 진주시 신안동 766-6) 역시 동일한 선언을 하고 있다. ‘주님의 교회’ 정관, 제2장 교회 정치의 원리, 제8조에는, ‘모든 교인은 다 그리스도의 사역자이며 그의 부르심에 따라 각기 하나님의 나라에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하게 하셨으므로 모든 사역자의 지위는 동등하며 서로의 맡은 바를 존중해야 한다’고 밝힘으로서 만인제사장 이론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여기서 교회라 함은 원리적 의미에서 온전한 교회를 말한다. 즉 다양한 형태로 지상에 존재하는 제도적 현실교회를 말하지 않는다.
6) 이광호, 『기독교 신앙과 윤리』(조에성경신학연구원, 2002), 17-20.
7) 레위기서의 관련 기록들을 참조하라.
8) 창세기 4:5에서는,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신 것이 ‘가인의 제물’이 아니라 ‘가인과 그 제물’임을 기록하 고 있다. 우리가 이해해야할 바는, 가인의 제물로 인해 가인이 거부된 것이 아니라 가인으로 인해 가인의 제물이 거부되고 있다는 점이다.
9) 논자는 '탈기독교적’이라는 용어를 배교한 기독교 집단에 적용해 사용한다. 이는 이교도들을 지칭하는 ‘비기독교’라는 용어나, 정통교리에서 벗어난 상이한 신학이나 신앙에 대해 사용하는 ‘비기독교적’이라는 한 정적 용어와 구분되는 개념이다.
10) 박윤선 박사는 여기의 ‘거룩한 제사장’을 하나의 제사장 단체로 해석한다. (박윤선, 『베드로전서 주석』참조).
11) 이는 출애굽기 19:6의 70인역에서 직접 따온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올바른 번역은 ‘a kingdom, a body of priests’이다; Edmund P. Clowney, The Message of 1Peter(Leicester: IVP).
12)‘왕 같은 제사장’(a royal priesthood; βασιλειον ?ερατευμα)은 두 가지의 번역이 가능하다. 그것은 곧‘왕적사제단’과 ‘나라사제단’이다(박윤선, 『베드로전서 주석』. 참조).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기울일 것은 그 둘 다 하나의 집단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13) 이는 천년왕국설에서 동일하게 이해되어야 할 내용이다. 요한계시록 20:6②의 천년왕국에서 각 개인 성도들이 제각기 왕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무리 곧 교회가 왕노릇 하는 것이다.
14) 아나톨리아는 지금의 터키지역의 높은 고원지대를 통칭하는 말이다.
15) 필자는 베드로전서 1:1,2의 ‘나그네들’(strangers), ‘택하심을 입은 자들’(who are chosen)이 복수 형태의 단어이며 5:13의 ‘너희’가 복수이지만, 그 의미상 하나의 집단을 나타내는 단수성격의 단어로 이해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16) G.S.M.Walker, “칼빈과 교회”,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16(1963), 371-389; Reading in Calvin's Theology, Ed. by Donald K. Mckim(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칼빈신학의 이해』(이종태 역, 생명의 말씀사, 1991), 286. 참조.
17) Howard Snyder, Community of the King, 『그리스도의 공동체』(김영국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7), .93,94. 참조.
18)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참 포도나무임을 말씀하시며 모든 가지는 원 줄기에 붙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줄기와 가지를 분리할 수 없듯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을 결코 분리할 수 없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의 구원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지교회들은 마땅히 머리이신 주님께 붙어있어야 하며 이는 하나의 교회임을 말해주고 있다.
19) 우리 시대에 ‘지교회’(a local branch church)라는 말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 ‘개체교회’(a local church)라는 용어를 독자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헌법』(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고신, 헌법개정위원회, 1992), 187, 188등. 참조. 논자는 ‘개체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보편교회에 속한 ‘지교회’라는 말의 의미를 염두에 두고 사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20) 목사, 장로 등의 직분자가 있고, 일반적인 당회, 제직회 등 교회로서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올바른 교회라 할 수 없다.
21) 교회이기 위해서는 올바른 말씀선포, 올바른 성례의 시행, 올바른 권징사역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22) 요한계시록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He has made us to be a Kingdom, priests to His God and Father). 여기서 ‘하나의 나라’(a Kingdom)와 ‘다수의 제사장들’(priests; ?ερει?)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이 각각 제사장의 기능을 하면서 동시에 하나의 왕국에 속해 있음을 명확하게 보게 된다.
23) G.S.M.Walker, “칼빈과 교회”, 『칼빈신학의 이해』, 288. 참조
24)‘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의미를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도구화하는 개념인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면 잘못이다. 즉 그냥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을 터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들어주실 것이란 생각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영어에서 ‘pray in Jesus' Name’의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pray by(혹은 with) Jesus' Name’이 아님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기도가, 그리스도의 뜻이 아니라 자기 판단에 따른 자유로운 요청이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25) 한국교회에서는 대체적으로 축도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다. 축도는 목사가 교인들에게 복을 비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교회가 약속으로 받아들이는 말씀에 의한 은혜의 인침이다. 우리 장로교 헌법에서 축도를 ‘목사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축복기도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헌법』, 예배지침, 제3장 제16조 폐회(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헌법개정위원회, 1992) 243. 참조; 고재수, 『교의신학의 이론과 실제』(서울: 도서출판 디다케, 1992), 288, 291. 참조
*출처:이광호 목사, 한국개혁신학회 논문집, 제14권, 2003. 10. ISSN 1220-1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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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제사장 이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고찰”
Ⅰ. 서론
종교개혁시대 이후 개신교회는 일반적인 만인제사장 이론을 별다른 비판없이 수용하고 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달리 특정계층의 제사장이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여 누구나 제각기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시대 한국교회의 일반성도들은, 실제적인 측면에서는 목사를 제사장으로 인정하는 듯 하면서도 이론적 측면에서는 만인제사장 이론을 거의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로마교회에서 일컬어지는 사제의 직임은 그들에게 하나님과 일반 성도사이에서 무엇인가 중재할 내용이 있다는 의미로 잘못된 것이다. 로마교회에 있는 고해성사나 성찬을 나눔에 있어서 사제와 일반신도들의 구분됨은 그 한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요구되는 바 직분이 형식적으로 경직되거나 권위주의화 할 때 지상의 교회는 로마교회와 유사한 사제적(司祭的) 경향성을 드러내게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목사를 ‘하나님의 종’1)이라는 특별한 위치에 있는 자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나 일반 교인들이 목사의 축복기도를 받고 싶어하는 종교심리 등은 그러한 경향성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론적으로 만인제사장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목사를 일반성도들과는 달리 하나님과 더 가까이 있거나 특권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박윤선 박사는 그의 ‘헌법주석’ 머리말에서, 장로교 정치의 정신은 한마디로 교회의 주권이 교인에게 있는 것을 기본으로 한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사실은 비단 한국교회 뿐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교회헌법 주석가들이 일반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바이다.2)
작금에 있어서는 소위 ‘평신도 교회’3)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있으며, 평신도를 중심으로 한 교회들이 마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실정이다4). 이런 주장을 하고 실행에 옮기는 이들의 기본적 신앙이념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만인제사장이론’이 뒷받침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한국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마치 제사장적 지위를 가진 듯한 자세를 보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저항성에 기인한다.
이렇듯이 우리시대의 기독교가 만인제사장 이론을 별다른 비판적 안목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점에 대해 다시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성도 각 개인이 제사장이라는 설명이 타당한 것인지, 아니면 잘못된 신학이론인지, 혹은 그에 대한 좀더 광범한 이해가 요구되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이다. 우리가 이에 대해 잘못 이해하게 되면 교회의 권위를 손상하게 되고 마치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할 가능성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시대에 일고 있는, 개별 성도들이 가질 수 있는 듯이 설명되는 심령 천국에 관한 개념이라든지 만인제사장 이론을 배경으로 한 기독교 윤리실천의 일환으로 참여 민주주의와 결부시키는 시도, 그리고 교회의 민주주의 도입 등에 대해서는 상당한 신학적 해석을 요하는 부분이다.
논자는 이 글을 통해 만인제사장 이론이 각 개인 성도가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물론 이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가능할 것이며 각 개인 성도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어느정도 감당할 수도 있음을 감안한다. 그러나 그 기능은 어디까지나 교회5)의 감독하에서 이루어지는 직분적 개념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Ⅱ. ‘제사장’에 관한 이해
구약시대의 모든 유형의 제사장은 후일 하나님께서 보내실 완벽한 제사장의 오심에 대한 예표로써 대표성을 띠고 있다. 다양한 방법으로 드려지는 제사들 또한 완벽한 제물로 바쳐지게 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시대 하나님께 드려진 제사들 중 최초의 제사행위는 아벨의 제사이다. 아벨의 제사장 직능은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존재한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셨던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드려졌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써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난 뒤 얻은 자식들인 가인과 아벨은 각기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가인은 곡물로, 아벨은 양으로 제물을 삼았다. 하나님께서는 그 두 사람의 제사를 다 기쁨으로 받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는 열납하시고 하나는 버리셨다. 아벨과 가인이 각기 다른 제물을 바쳤던 이유는 저들의 생업과 관련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가 동물제사와 곡물제사의 차이 때문이라는 설명은 충분치 않다6). 나중 율법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예물을 바칠 때는 동물뿐 아니라 곡물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보게 된다7).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 대한 대표성이 있지 않은 무자격자였기 때문이었다. 가인은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있던 자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제사행위를 하기 전부터 가인을 자기 자녀로 인정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즉 가인이 바친 제물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사를 바치고 있는 가인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열납하셨던 본질적인 것은 아벨의 제물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는 아벨이었으며 하나님께서 미워하셨던 것은 가인의 제물이 아니라 가인이었던 것이다8). 가인은 자기판단과 열정으로 제사를 드렸지만 아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의 긍휼하심에 따라 제사를 드렸다. 그러므로 자신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았을 때 가인은 분노했던 것이다(창4:5). 여기서 우리는 인간 초기부터 존재했던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를 보게 된다.
아벨과 가인의 제사에 관한 기록에 앞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음으로써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는데 그 추방에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를 보게 되며 그것이 가인에게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아벨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경륜과 은혜에 따라 믿음의 제사(히11:4)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 이후 하나님의 구속사 가운데 존재하는 아브라함의 제사장 직능의 특이성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줄기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이 세상과의 분리를 구체적으로 시도하신다. 창세기 11:10-32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족보에 관련된 말씀은 아브라함이 셋, 에녹, 노아를 이은 셈의 계보에 속한 언약의 자녀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갈데아 우르에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시대적 형편에 따라 자의적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미리 예비하신 언약에 따라 택해두신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제사장 직능의 특이성은 그 전과는 달리 동물이나 곡물제사가 아닌 ‘인신제사’(人身祭祀)를 조건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인간의 몸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이 온전한 제물이 되어야 할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허락하신 ‘그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으로부터 시작된다.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주신 이삭은 ‘언약의 민족’의 뿌리라 할 수 있다. 즉 그의 씨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으로 허락하신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몸과 생명을 요구하신다. 이는 단순히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고자 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물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제사장이 되어 백세에 얻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쳤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행위는 아브라함의 선량한 판단이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신앙적 열정이 아들을 바치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아들을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신 신령한 의미 속에 아브라함이 존재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순종하여 약속의 아들 이삭을 바친 것은 이후에 형성될 이스라엘 민족의 삶과 동일한 의미로 해석된다. 즉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이삭의 생명뿐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생명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바라거나 기대하던 방법이 아니었으며 순전히 하나님께서 구원의 경륜 속에서 원하신 방법이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바칠 때 그는 하나님께 약속으로 얻은 자식의 몸과 생명을 바치는 온전한 제사장이 된다. 아브라함의 제사장 기능과 제사행위는 구속사적 행위이며 대표성을 띤 것이었다. 갈데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 그가 알지 못하는 땅으로 인도하여 그곳을 약속으로 주신 것은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계획 때문이었다.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는 아브라함에게 백세가 되어서야 이삭을 허락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자녀를 하나님께 도로 바치게 했던 것은 그리스도 사역에 대한 표상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바쳐진 제물인 이삭의 생명을 다시 허락하심으로써 그 새로 태어난 생명이 자신에게 속한 것임을 확증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그런 제사장으로서의 행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적 은혜에 의한 것이었으며,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로 인해 앞으로 있게 될 그리스도를 소망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 아브라함이 행했던 제사장 직분의 이행은 인간의 구원역사 가운데 있었던 놀라운 대표성을 띠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일컫는 것도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모세시대 이후의 제사장 개념과 제사행위는 한층 점진적으로 나타난다. 제사장 개념이 일반적인 의미와 더불어 한 무리, 즉 나라(kingdom)로 계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시내광야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특별한 말씀을 주신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할지니라”(출19:5,6). 이 말씀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제사장적 직능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특별히 선택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는 제사장 기능을 하는 도구가 된 것이다. 여기서 ‘내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은 모두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 영광의 회복을 위한 자신의 구원의 경륜을 펼쳐 가시겠다고 언약하고 계신 것이다.
모세 이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반도에 들어가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막을 건립하게 된다. 그때부터 율법이 제정하는 대로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대한 제사를 맡았다. 그 제사장들의 직능은 예루살렘 성전이 건립된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까지 지속된다. 성막과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그 가운데서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제사장은 규례적으로 자격을 갖춘 제사장이어야 했다.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 요구되는 바는 개인의 능력이나 취향이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 아론의 자손, 레위지파여야 했다. 즉 제사장이 되는 것은 개인적 인정이나 판단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선정된 대표성이 우선적으로 충족되어야 했던 것이다.
만일 자격이 있지 아니한 자가 제사장이 된다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앙하는 사람이자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제사장이 되어 성의를 다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자원한다해도 아론의 후손, 레위지파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제사장이 될 수 없다. 나아가 아론의 자손 제사장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으므로 누구든지 제사행위를 잘 할 수 있어 보이는 다른 지파 자손들을 선택하여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게 하려 해서도 안된다. 이는 제사장 직분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택정된 직임으로서 언약적 대표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모세 이후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성막)과 더불어 제사장이라는 중재자를 필요로 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중재자 없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백성은 성전과 제사장의 사역과 연관되어 있다. 성전과 제사장을 통하지 않은 개별적 제사행위는 무의미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범법행위가 되었던 것이다. 즉 제사장의 규례를 어긴 제사는 도리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민족들로부터 성전을 파괴당했을 때도 그들은 여전히 성전과 제사장을 소망하는 가운데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모든 신앙의 중심에는 항상 성전과 제사장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구약시대의 모든 제사의 개념은 인간의 몸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완전히 성취된다.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영원한 제사장을 통한 제사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서의 직능과 더불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완벽한 제물로서의 기능을 온전히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인간은 범죄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었다. 죄를 가진 성품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과 택하신 백성 사이의 화해를 위해서는 완벽한 중재자가 요구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존재이기 때문이며 그것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구약시대의 모든 제사장의 직능들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모아지며 그가 오심으로 인해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아벨의 제사장 직능, 아브라함의 제사장 직능, 모세 이후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지속되어온 성전을 통한 제사장 직능이 전부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그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는 능력을 갖춘 온전한 제사장의 직능을 행하시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대제사장이 되셔서 자기 몸을 완벽한 제물로 하나님께 바쳤다. 그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완벽한 화해를 이루었던 것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완벽한 제사장임을 말하고 있다. 그가 그 직임을 완성하심으로써 구원을 완성하셨으며 그로 인해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영적인 제사를 담당하게 될 이스라엘 민족에게 요구하셨던 공동체 제사장으로서의 주님의 몸된 교회가 지상에 탄생케 된 것이다.
Ⅲ. 만인제사장 이론의 생성
로마제국 시대의 타락한 기독교는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만인제사장 이론을 확립할 만한 단초를 제공한다. 이에 앞서 사도교회 시대 및 초대교회 시대의 제사장 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제사장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에 집약되었다. 초대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 이외에 달리 특정한 제사장이 있어야 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은 교사로서 인도자였을 뿐 제사장의 직임을 가지려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도 통한다. 박해받는 교회 안에 존재하는 개별 성도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달리 명예를 취할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는 성도들이 도리어 생명과 연관된 표적이 되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교회 내에서 종교 정치적 권리를 향유하려는 자들이 있지 않았을 뿐더러 그리스도 이외의 최고권리를 가진 장(長)이 필요치 않았다. 이는 당시의 교회가 정치와 행정을 중시한 교회가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313년 로마제국에서 콘스탄틴(Constantine)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고 395년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에 의해 국교가 된 후 기독교에는 많은 변화가 있게 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교구제도와 사제제도의 성립이다. 그 제도는 기독교 세계뿐 아니라 점차 넓은 로마제국을 통치하는 종교적 통치 수단으로 자리잡게 된다.
거대한 로마제국을 통치하는 이념적 수단으로 전락한 교구제도와 사제제도는 점차 피라미드식의 계층화 내지는 계급화하게 된다. 세상을 포기한 교회공동체라는 개념이 세상을 확립하는 조직과 통치의 개념으로 전환되면서 통치력에 대한 힘의 결집이 요청되었다. 그러한 과정의 결과 로마제국의 기독교에서는 결국 사제들의 직능이 제사장 개념과 동일한 특수 계층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중세 종교개혁시대는 말씀에 깬 자들이 타락한 제도적 기독교에 대해 저항하던 시대라 할 수 있다. 1517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당시 복음에서 벗어난 탈기독교적9)인 로마교회에 저항하게 된다. 종교개혁 당시의 사제들은 일반교인들에 비해 특권층이었다. 당시 유럽의 대다수 시민들이 명목상의 기독교인이었는데 그 가운데 사제들은 교회에서 특별한 권위를 향유하는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군림하며 교인들을 종교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교회 사제들의 종교를 빗댄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에 앞장섰던 루터가 내세운 개혁운동의 3대 원리는 이신득의, 성경의 절대권위, 만인제사장직으로 요약된다. 그는 1520년에 쓴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고함”에서 ‘모든 세례교인들은 모두가 제사장이라는 명제를 내세웠다. 그렇지만 그는 세례받은 성도가 모두 제사장들(sacerdotes)이기는 해도 목사들만이 교역자들(ministeri)이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루터 역시 교회의 직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사제만이 성경을 읽을 수 있으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대리자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가르침에 대해 그 잘못을 지적했다. 그것은 결국 당시 기독교 기득권층과의 정치적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생명을 건 투쟁이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사제들만이 하나님을 가까이 대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제사장이 아니라 개개인의 모든 교인들이 동등한 제사장임을 천명하게 되고 일반 교인들도 그러한 만인제사장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역할은 실로 컸다. 사제들의 고유한 제사장 직능이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던 때 종교개혁자들의 타락한 교회조직에 대한 정면도전은 일반 교인들을 잠 깨우기에 충분했음이 틀림없다. 우리는 당시 만인제사장 사상의 생성과 확립이, 타락한 제도적 기독교에 대한 반동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기존 종교 권력이나 특권의식에 대한 도전과 저항은 소외계층이라 할 수 있는 일반 교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연스럽다. 물론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시대의 지도자들은 일반교인들을 말씀으로 계몽하려는 진지한 노력과 잘못된 제사장적 교권주의로부터 성도들을 해방시키려는 신앙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 결과 만인제사장 이론은 삽시간에 전 유럽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과 당시의 특수한 시대적 상황을 읽으면서, 과연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제사장의 기능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해 봐야 할 바가 많다. 단순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개인의 자격 문제가 아니라 지교회를 세워가는 직분과 관련된 문제임을 깊이 인식해야만 하는 것이다.
Ⅳ. 제사장에 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
신약성경 가운데서 교회의 제사장 개념을 잘 살펴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말씀은 베드로전서 2:5-9과 요한계시록 1:6과 5:10에 잘 나타나고 있다. 먼저 베드로전서 2:5은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Ye also, as lively stones, are built up a spiritual house, an holy priesthood, to offer up spiritual sacrifices, acceptable to God by Jesus Christ; KJV).
베드로전서 1:1에서는 이 편지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있는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보낸 베드로의 편지임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우선 위 구절의 ‘너희’의 범위를 확정해야 한다. 즉 ‘너희’가 개인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칭하고 있는지, 아니면 각 지(支) 교회들을 가리키고 있는가 하는 문제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문맥상으로는 ‘너희’가 각 성도들 혹은 각 지 교회 모두를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산 돌(들)’(lively stones)이 복수인 점이 그것을 보충적으로 확증하고 있다. 그리하여 ‘너희 한 사람 한 사람 혹은 각 지 교회들은 개체의 돌들처럼 기능하여 결국 하나의 집으로 세워져 <한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영적 제사를 드리라’는 의미이다10). 이러한 개체들을 지칭하는 ‘너희’가 9절에서는 ‘하나’인 ‘너희’로 발전되어 선언되고 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그 점을 확증한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Once you were not a people, but now you are the people of God).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a people'과 'the people'이라는 단어를 통해 성도들이 확정된 하나의 백성으로 일컬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본문에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제사장에게 특정한 권리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도리어 제사장의 올바른 기능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하고 있다. 베드로전서 2:9에서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11)임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바 ‘너희’는 의미상 베드로전서 1:1에 언급된 지역교회들에 포함되지 않은 지상의 모든 교회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이 구절에서 ‘너희’란 각각의 개인을 개별적으로 불러 일컫는 말이 아니라 전체적인 의미에서 언급하고 있는 용어이다. 즉, 개별적으로 상호 인지하지 못하는 개개인들에게 너희 각자가 다 제사장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공동체인 너희가 제사장’이라는 의미이다. 앞의 5절에서 기록된 말씀의 발전적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구절의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들’은 영어성경에서는 ‘you are a royal priesthood’(KJV, NASB, NIV)로 기록되어 있다12). 여기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you are royal priests’(너희는 왕같은 제사장들)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한글성경의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들’(개역성경)이란 번역은 오역이다. 표준새번역에서 ‘여러분은 왕의 제사장들’이라 번역한 것도 옳지 않다. 정확한 번역은 ‘너희는 왕같은 한 제사장’으로 되어야 한다. 여기서 강조되어 이해되어야 할 점은 ‘한’(a)이다. 즉 ‘너희’ 전체가 하나의 제사장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 구절에서 선포되고 있는 말씀은 구약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사야서에 기록된 약속의 성취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새로운 제사장적 기능과 놀라운 계획이 있음을 말씀하심으로써 소망을 제공하셨던 것이다: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열방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며 너희가 수치 대신에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고토에서 배나 얻고 영영한 기쁨이 있으리라”(사61:6,7).
또한 요한계시록 1:6은 ‘우리를 하나님께 대한 제사장으로 삼으심’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And hath made us kings and priests unto God and his Father; to him be glory and dominion for ever and ever. Amen: KJV"; "and has made us to be a kingdom and priests to serve his God and Father - to him be glory and power for ever and ever! Amen":NIV).
우리는 위 본문의 영어 성경 KJV와 NIV 가운데 상호 차이가 나는 단어를 발견하게 된다. 그 중에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kings’(KJV)와 ‘a kingdom’(NIV)이다. 이는 한글 개역성경의 ‘나라’에 해당되는 단어이다. ‘kings’와 ‘a kingdom’은 엄연히 다른 말이다. 헬라어 성경에서 ‘βασιλεια’는 곧 ‘왕국’ ‘나라’이며 a kingdom에 해당되는 단어이다. 우리는 여기서, 성도 각 개인 모두가 왕이 된다는 해석이 가능한가 하는 점부터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문제는 일반 해석상 그리 복잡하지 않다. 왕들만 모인 왕국이란 있을 수 없으며 한 개인이 왕국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βασιλεια’의 번역은 ‘a kingdom’과 ‘나라’가 옳은 번역이다13).
그런데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할 부분은 a kingdom과 priests의 관계이다. 논자는 a kingdom과 priests를 동일한 의미로 해석한다. 즉 a kingdom = priests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kings와 priests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kings가 priests와 동일하다고 본다면 모든 성도들은 왕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게 되고 동시에 모든 성도들은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볼 수 없다. a kingdom이 공동체적 개념을 가지듯이 priests 역시 하나의 kingdom안에 존재하는 각 개체의 공동체적 개념을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6에서 보여지는 바는 모든 성도들(all believers)이 제사장들(priests)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모든 성도들’>(one ‘all believers’: 주님의 교회)이 <하나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교회론적 이해가 뒤따를 때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해 질 수 있을 것이다. priests가 복수 인 것은 각 개별 성도들이 아니라 우주적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별단위의 지 교회인 것이다.
우리가 이 본문에서 분명히 기억해야 할 바는 교회가 나라와 제사장이 된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며 개인 성도의 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만인 제사장 이론을 언급하며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권리를 가진 것으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접근이 아니다. 이는 물론 교회내 특정한 직분자들이 제사장 직무를 대행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특정 직분자나 개별 성도들을 제사장들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교회로 세워진 자기 백성을 오로지 하나님 자신을 위해 제사장으로 삼으신 것이다.
요한계시록 5:10에서도 ‘자기백성을 제사장 삼으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이 본문에서 보는 것은 우리가 땅에서 왕노릇하는 조건이 제사장이 되는 것과 연관이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잘 이해해야할 바는 왕노릇하는 것이 각 개별 성도들이 아니라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의 무리 곧 지상의 교회라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예비하신 때 땅에서 왕노릇할 수 있는 존재가 성도 개개인이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Ⅴ. 신약시대 교회와 제사장에 대한 이해
만인제사장의 범위를 확인하기 위해 우선 신약성경에 사용되고 있는 인칭대명사 ‘너희’와 ‘우리’의 용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만인제사장 이론의 배경이라 할 수 있는 베드로전서 2:5,9에 나타나는 ‘너희’라고 하는 2인칭 복수 대명사와 요한계시록 1:6과 5:10의 ‘우리’라고 하는 1인칭 복수대명사는 수(數)의 규모면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내용적 측면에서는 매우 다양하고 광범한 의미를 내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너희’와 ‘우리’는 개인이 아닌 다수(多數)를 호칭하는 일반언어이지만 개별인간들이 모인 한 무리, 즉 집단을 지칭할 수도 있으며, 한 집단 내부에 있는 개개인을 지칭할 수도 있다. 이 양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해도 ‘너희’와 ‘우리’라는 용어의 일반적 의미는 대화의 상대 혹은 대화의 주체로서의 호칭이다. 그러한 예는 성경에서 무수히 많이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사용했으며 사도들 역시 자신들이나 복수인 타인을 호칭할 때 쓴 용어이다.
성경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호칭할 때의 ‘너희’와 성도들이 자신의 무리를 일컫는 ‘우리’의 특이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너희’와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의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너희’라 호칭할 때 그 의미 가운데는 교회를 배태하고 있는 사도의 그룹으로서 ‘너희’였다. 여러 사람인 복수를 지칭하지만 의미상 단일한 무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라고 하는 무리에게 설명하시고 요구하신 내용들은 그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 그 이후 모든 교회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라고 하는 특정 무리에게 명령한 말씀이라 하여 오늘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라고 변명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너희’라는 용어 가운데 많은 경우 그것은 ‘교회의 모체’ 혹은 ‘교회’를 의미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라는 대명사 역시 그와 마찬가지다. 예수님과 사도, 혹은 교회가 ‘우리’라고 할 때 오늘의 성도들도 그 의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특정한 무리를 규정짓는 복수 인칭대명사와 ‘교회’의 연관된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마태복음 24장에서의 ‘너희’의 개념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마태복음 24장에서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계속 ‘너희’라는 용어를 사용하신다. 거기에는 제자들이 직접 경험하게 될 내용들과 앞으로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후세의 성도들이 경험하게 될 내용들에 대해서도 ‘너희’라는 말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 즉 그 자리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경험하게 되지 않을 종말에 일어날 사실들을 이야기하면서도 ‘너희’가 그런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고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으며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라’(마24:6,7)는 말씀은 당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이 직접 겪게 될 내용들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너희’가 그런 환란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라 하실 때 그 말 속에는 나중에 종말의 때까지 존재하게 될 교회를 염두에 두고 ‘너희’라 칭하셨던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은 초대교회로부터 역사상의 전체교회를 향해 ‘너희’라 칭하신 말씀으로 기억해야 한다.
또한 베드로전서 5:2에는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the flock of God among you) 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라는 말은 ‘너희’와 ‘양무리’를 의미상 구분짓고 있다. 즉 ‘너희’는 복수 형태를 띤 단수적 개념이며 ‘양무리’는 그 안에 존재하는 다수의 집단적 개념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너희 가운데 있는 그 양무리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그 속성상 분리되는 개체적 개념이 아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의 끈으로 엮어진 하나의 무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서신을 받고 있는 대상인 교회는 흩어져 있되 ‘하나’인 집단적 의미의 단수인 교회이며, 개별적인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아니라 지 교회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5:13에도 보면,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노라’(She who is in Babylon, chosen together with you, sends you greetings; NASB)고 말씀하고 있다. 베드로는 서신을 쓸 때 바벨론에 있었다. 바벨론의 구체적 장소성에 대한 문제는 접어두고서라도 베드로가 있던 그 도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세상의 한 배교에 빠진 도시였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세상 가운데 있으나 분리되어 존재하는 한 교회이다. 베드로는 지금의 아나톨리아 지역14)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을 동일한 형편에 처한 교회로 보아 문안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에서 우리는 한 교회가 다른 지역에 있는 한 교회에 문안15)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더 정확하게는 한 교회가 한 교회에 문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특색은 집합적 단수에 대한 개념이다. 즉 하나의 교회에 속해 있는 여러 성도들을 단수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하여 신약시대의 제사장 이론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위에서 그 기본적인 개념을 살펴보았듯이 신약시대에는 지 교회인 개체 교회가 곧 제사장이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적 직능을 말하고 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 개념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개념으로서 주님이 오심으로 그 의미가 완성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대제사장이 되셨으며 그 자신의 거룩한 몸을 완벽한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셨다. 그로 인해 주님께서는 택하신 백성들로 교회를 삼으셨으며 이제는 그 그리스도께 온전히 속한 각 지교회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없고 섬길 수도 없으며 교회를 떠나서 기도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가장 미리 생각해야 할 제사장으로서의 교회공동체이다. 칼빈은,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제도적 교회는 구원받은 영혼으로서의 개인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개인구원을 너무 강조하지 않는다16). 개별 성도가 아니라 교회공동체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우선하는 개념인 것이다17).
그렇다면 제사장으로서 지 교회의 실체는 무엇인가 알아야 한다. 가시적 교회는 우선 눈에 보이는 성도의 무리가 말씀과 성례를 통해 구체적인 교제를 나누는 지교회를 지칭한다. 우리는 우주적 교회의 제사장 직능에 대한 분명한 이해의 바탕 위에서 지교회의 제사장 직능을 논하게 된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다. 지상의 건전한 모든 교회들은 하나의 우주적인 교회에 속해 있다. 물론 여기서 건전하다고 하는 말은 세상적 경험이나 윤리적 건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건전한 교회는 성령의 간섭을 받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며 주님의 재림을 진실로 소망하는 교회이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교회는 그 재림주를 신랑으로 맞이한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최상의 즐거움과 기쁨으로 그와 영원히 연합하게 되는 것이다. 그 신랑을 맞이하는 교회는 여럿으로 나뉘어진 ‘교회들’이 아니라 하나의 ‘교회’이다18). 그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성도들을 제물로써 하나님께 제사하며 경배하게 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자신이, 자신의 몸으로 형성되어 있는 그 교회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장의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개체성을 띠고 있는 지(支)교회의 제사장 직능은 매우 중요하다. 논자는 본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만인제사장 이론의 최소단위는 개별 성도들이 아니라 지교회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교회란 보편교회에 예속된 개체 교회들을 의미한다19). 여기서 지교회라 함은 단순히 조직 및 제도적으로 독립된 교회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기독교의 외적 형태를 띠고 있다 할지라도20) 교회로서의 기본 내용들을21) 담고 있지 않다면 참교회가 아니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제사장으로서의 직임을 감당할 수 없다.
우주적 보편교회에 속해 있는 지교회들은 각기 독립적으로 제사장의 직능을 감당하게 된다22). 지교회가 제사장의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은 전체 가운데 속해 있는 독립된 지교회로서 교회밖의 간섭없이 말씀을 선포하고, 세례와 성찬을 나눌 수 있으며 권징사역을 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교회에서 말씀선포와 성례의 이행은 지교회의 소관이다. 그것이 곧 지교회가 제사장의 직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시대 매주일 온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교회가 지속적으로 제사장의 직능을 감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우리는 각 개인이 지교회의 지체로서 제사장 직능을 어느 정도 감당하고 있음에 대한 신학적 여지를 남겨둘 필요가 있다. 우리 시대에는 특별한 직분자를 통하지 않은 성도의 개별적인 예배가 가능하다. 각 개인이 다른 인간적 중재자 없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든지 홀로 기도할 수 있는 예가 그렇다. 우리가 개별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할 수 있는 것은 개인 성도의 제사장 기능을 어느정도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는 교회와 연결된 상태에서만 그것이 가능하다. 즉 교회의 머리이자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음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분리된 개인 성도들과 사적인 계약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룬 백성들을 대상으로 공적인 언약을 맺고 계신다23). 개혁교회에서 말씀선포와 성례를 중요한 교회의 본질적 표지로 삼고 있으며 교회됨을 보존하기 위한 방편으로 권징사역을 그 표지의 하나로 이해하는 것은 개별성도들을 교회 가운데 온전히 엮어두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떠난 개인의 제사장 직능이나 제사장 행위는 유효하지 않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개별적 판단에 의한 기도를 제어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며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의 의사가 성도들의 삶에 깊이 반영되어야 함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24).
Ⅵ. 결론
신약성경이 우리시대에 요구하는 바 제사장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주체에 대해서는 ①단일한 우주적 보편교회 ②흩어진 지교회들 ③각 개인 성도들을 들어 생각할 수 있다. 보편교회의 제사장 직능은 우주적이며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흩어진 지교회의 독자적 제사장 직무의 기능은 구체적이며 실천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각 개인 성도들의 제사장 직무는 원리적으로 보아 교회를 떠나 독자적이 될 수 없으며 교회에 속한 성도로서 소극적 독자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시대,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회복이 추구되던 것이 이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이 되었다. 지금은 그 원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해 궁극적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2:5, 9과 요한계시록 1:6; 5:10이 말하는 바 제사장 이론의 근저에는 주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가 바탕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시대 제사장을 통해 화해와 구원의 모형을 보이던 것이 이제는 주님의 교회를 통해 그 구원을 완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즉 구약시대 제사장들의 사역이 그리스도의 사역과 연관된 그림자라면, 신약시대 교회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께 제사장과 제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인 제사장 이론이 모든 교인들 각자가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주장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결국 그렇게 되면 교회를 구성하는 직분을 이해하는데 커다란 장애가 따르게 된다. 교회는 민주적인 협의체가 되어서도 곤란하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개별적인 생각과 판단의 집합이 교회를 이끌어 가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중심적 교회로 전락하게 될 위험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 모든 직분은 개인의 능력을 교회 가운데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으로 부터 부여받은 은사이다. 교회의 다양한 모든 직분들은 개인 성도들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물론 논자는, 목사가 제사장적 성격을 지닌 직분자라는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주장은 차라리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바 만인제사장 이론 보다 더욱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목사든 장로든 혹은 평신도이든 모든 성도들이 교회로부터 부여된 직분과 직임을 가지는 것은 결국 지교회의 제사장 직능을 위해서이며 이에 넘어서면 그 직능을 제대로 행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만인제사장 이론을 잘못 받아들이게 되면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예를들어 교회가 부여한 직분자인 목사가 맡을 수 있는 설교자로서 교사 직분과 성례를 집행할 수 있는 직분,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을 말씀과 더불어 교회 가운데 선포할 수 있는 언약의 축도(benediction)25) 등을 이행할 수 있는 직임에 혼선이 올 위험이 있게 되는 것이다. 곧 만인이 동등한 제사장이라면 누구나 차등없이 자유롭게 직분을 행할 수 있다는 이론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중세 재세례파(Anabaptists)의 경우 만인제사장 이론을 수용하면서, 성도들 사이에 있는 모든 직분적 차이를 완전히 폐지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성경이 교회에 가르치고 있는 제사장 이론을 잘 이해함으로써, 주님의 몸된 교회가 그 참된 권위와 함께 올바르게 자라가는데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와 교통을 나누는 원리적 주체는 제사장 직무를 감당하는 그의 몸된 교회이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며 베드로전서 2:5의 말씀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Ye also, as lively stones, are built up a spiritual house, a holy priesthood: KJV”(너희도 산 돌들로서 한 신령한 집, 곧 한 거룩한 제사장으로 세워질지니라: 私譯).
[Abstracts]
A Critical Study on ‘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Kwang Ho Lee, Ph.D)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study ‘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theory’ in a critical way. Nowadays many people have had a misunderstanding of the traditional theory of 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Since the Reformation, this theory was headed up in the middle age churches.
As we know, the Roman Catholic Church had priests who were different from other believers. Priests had more authority than others, and they had religious privileges for serving God. Priests were special mediums between God and normal believers. Because of that reason the position of priests was higher than normal believers.
Reformation had changed their traditional thoughts of the priesthood. Martin Luther insisted on 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It means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priests and other believers. All believers are the same before God. No other person is necessary to serve God or have fellowship with God. Every believers could talk to God directly whenever he wanted.
Most present day scholars have no doubts about 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theory. But we must study this theory again. I do not agree individual believers can be independent priests. All believers must be under the universal body of the church. It means an individual believer can not handle his own faith by himself. If that happens, we could say that different faiths or confessions can exist in the same church. But it is not possible.
We can only say that all church members must have the same faith before God. All church members must stand under community of the church authority. Therefore, 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cannot be adopted for the individual believers but only for individual local branch churches.
Individual local churches have specific members who are baptized by the witness of the same community. That local church must have regular Sunday service. All believers who attend the church service make one body through the Word of God and Holy Communion. So, the church community is one body in Jesus Christ. By this we could know that the individual local church has the godly authority of the Word, Baptism, and discipline before God.
In this paper the writer tried to say that 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theory must be adopted by the individual local churches not by the individual believers. It is true that up to now most scholars agree with 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theory in the traditional way. But the writer expects to discuss the new aspect of this theory again.
<각주>
1)‘하나님의 종’이라 할 때 ‘종’에는 두가지 다른 개념이 있다. 하나는 παι?, 다른 하나는 δουλο?이다. παι?는 이스라엘의 고난 받는 종에게 해당하는 용어로서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는 의미라 할 수 있으며, δουλο? 는 노예로써 주인에게 팔려간 존재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주인만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자이다. 사도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표현 한 것은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노예(δουλο?)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시대에 하나님의 종(δουλο?)으로 고백할 때 자신을 특권계층에 속한 자로서 표현 할 수 있는 용어가 될 수 없다.
2) 박윤선, 『헌법주석』(서울: 영음사, 1983), 머리말. 참조.
3)최승호, 『21세기 한국교회의 비전』(서울: 대장간 출판사); 이 책은 “소금과 빛”(두란노서원) 1999년 5월호에서 추천도서로 선정되어 소위 평신도들에게 강력하게 권장된바 있다. 책 내용은 <1. 평신도들이 개척한 교회, 2. 성경적 교회관, 3. 평신도 교회, 4. 평신도 교회의 특징, 5. 평신도 교회의 기본원칙들, 6. 평신도 교회의 문제점과 해결책, 7. 평신도 교회의 부르심, 8. 21세기 한국교회 발전을 위한 제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저자는 평신도 교회가 가장 성경적인 것으로 글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4)2003년 4월 27일 설립된 서울의 ‘언덕교회’(서울특별시 금천구 독산본동 983)는 교회가 선언한 <교회의 특징> 8번항에서 '평신도가 주축이 되어 교회를 운영합니다’라고 못박고 있으며, '새길교회’(서울 강남구 청담동 66-1) 역시 창립취지문에서 ‘교역자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평신도 중심의 교회’임을 천명하고 있다. 또한 2001년 3월 15일 설립된 경남 진주의 ‘주님의 교회’(경남 진주시 신안동 766-6) 역시 동일한 선언을 하고 있다. ‘주님의 교회’ 정관, 제2장 교회 정치의 원리, 제8조에는, ‘모든 교인은 다 그리스도의 사역자이며 그의 부르심에 따라 각기 하나님의 나라에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하게 하셨으므로 모든 사역자의 지위는 동등하며 서로의 맡은 바를 존중해야 한다’고 밝힘으로서 만인제사장 이론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여기서 교회라 함은 원리적 의미에서 온전한 교회를 말한다. 즉 다양한 형태로 지상에 존재하는 제도적 현실교회를 말하지 않는다.
6) 이광호, 『기독교 신앙과 윤리』(조에성경신학연구원, 2002), 17-20.
7) 레위기서의 관련 기록들을 참조하라.
8) 창세기 4:5에서는,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신 것이 ‘가인의 제물’이 아니라 ‘가인과 그 제물’임을 기록하 고 있다. 우리가 이해해야할 바는, 가인의 제물로 인해 가인이 거부된 것이 아니라 가인으로 인해 가인의 제물이 거부되고 있다는 점이다.
9) 논자는 '탈기독교적’이라는 용어를 배교한 기독교 집단에 적용해 사용한다. 이는 이교도들을 지칭하는 ‘비기독교’라는 용어나, 정통교리에서 벗어난 상이한 신학이나 신앙에 대해 사용하는 ‘비기독교적’이라는 한 정적 용어와 구분되는 개념이다.
10) 박윤선 박사는 여기의 ‘거룩한 제사장’을 하나의 제사장 단체로 해석한다. (박윤선, 『베드로전서 주석』참조).
11) 이는 출애굽기 19:6의 70인역에서 직접 따온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올바른 번역은 ‘a kingdom, a body of priests’이다; Edmund P. Clowney, The Message of 1Peter(Leicester: IVP).
12)‘왕 같은 제사장’(a royal priesthood; βασιλειον ?ερατευμα)은 두 가지의 번역이 가능하다. 그것은 곧‘왕적사제단’과 ‘나라사제단’이다(박윤선, 『베드로전서 주석』. 참조).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기울일 것은 그 둘 다 하나의 집단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13) 이는 천년왕국설에서 동일하게 이해되어야 할 내용이다. 요한계시록 20:6②의 천년왕국에서 각 개인 성도들이 제각기 왕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무리 곧 교회가 왕노릇 하는 것이다.
14) 아나톨리아는 지금의 터키지역의 높은 고원지대를 통칭하는 말이다.
15) 필자는 베드로전서 1:1,2의 ‘나그네들’(strangers), ‘택하심을 입은 자들’(who are chosen)이 복수 형태의 단어이며 5:13의 ‘너희’가 복수이지만, 그 의미상 하나의 집단을 나타내는 단수성격의 단어로 이해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16) G.S.M.Walker, “칼빈과 교회”,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16(1963), 371-389; Reading in Calvin's Theology, Ed. by Donald K. Mckim(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칼빈신학의 이해』(이종태 역, 생명의 말씀사, 1991), 286. 참조.
17) Howard Snyder, Community of the King, 『그리스도의 공동체』(김영국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7), .93,94. 참조.
18)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참 포도나무임을 말씀하시며 모든 가지는 원 줄기에 붙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줄기와 가지를 분리할 수 없듯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을 결코 분리할 수 없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의 구원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지교회들은 마땅히 머리이신 주님께 붙어있어야 하며 이는 하나의 교회임을 말해주고 있다.
19) 우리 시대에 ‘지교회’(a local branch church)라는 말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 ‘개체교회’(a local church)라는 용어를 독자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헌법』(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고신, 헌법개정위원회, 1992), 187, 188등. 참조. 논자는 ‘개체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보편교회에 속한 ‘지교회’라는 말의 의미를 염두에 두고 사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20) 목사, 장로 등의 직분자가 있고, 일반적인 당회, 제직회 등 교회로서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올바른 교회라 할 수 없다.
21) 교회이기 위해서는 올바른 말씀선포, 올바른 성례의 시행, 올바른 권징사역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22) 요한계시록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He has made us to be a Kingdom, priests to His God and Father). 여기서 ‘하나의 나라’(a Kingdom)와 ‘다수의 제사장들’(priests; ?ερει?)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이 각각 제사장의 기능을 하면서 동시에 하나의 왕국에 속해 있음을 명확하게 보게 된다.
23) G.S.M.Walker, “칼빈과 교회”, 『칼빈신학의 이해』, 288. 참조
24)‘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의미를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도구화하는 개념인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면 잘못이다. 즉 그냥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을 터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들어주실 것이란 생각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영어에서 ‘pray in Jesus' Name’의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pray by(혹은 with) Jesus' Name’이 아님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기도가, 그리스도의 뜻이 아니라 자기 판단에 따른 자유로운 요청이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25) 한국교회에서는 대체적으로 축도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다. 축도는 목사가 교인들에게 복을 비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교회가 약속으로 받아들이는 말씀에 의한 은혜의 인침이다. 우리 장로교 헌법에서 축도를 ‘목사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축복기도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헌법』, 예배지침, 제3장 제16조 폐회(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헌법개정위원회, 1992) 243. 참조; 고재수, 『교의신학의 이론과 실제』(서울: 도서출판 디다케, 1992), 288, 291. 참조
*출처:이광호 목사, 한국개혁신학회 논문집, 제14권, 2003. 10. ISSN 1220-1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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