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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과답

Re:'마태복음 27장 52-53절, 누가복음 16장 19-31절이 의미하는 것은?'에 대한 답글입니다!!.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05.04.11|조회수1,265 목록 댓글 3
안녕하세요 홍순욱님.

주 안에서 잘 지내시는지요?

님으로부터 질문을 받은 지가 꽤나 여러 날이 되었으나 이제서야 답글을 올립니다. 처음 님의 질문의 글을 보았을 때는 바로 그 주간에 답글을 올려드리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글을 썼는데, 이런 저런 여러 일도 생기고 자리를 비워야 하는 일이 많이 생기다 보니까 예상했던 것보다 날이 길어졌습니다. 이에 대한 별 다른 설명이 없었다 보니까 많이 기다렸을 터인데 양해를 바랍니다.


님께서는 두 가지를 질문하셨습니다. 그 첫째는 마태복음 27장 52-53절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궁금해 하여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 성경 구절을 보겠습니다.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님이 든 구절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의 고난을 당하셨을 때 있었던 광경인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질문하였습니다.

이 구절의 앞에서부터 연결하여서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바로 그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지고 땅이 흔들리며 바위가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무덤이 열리면서 잠들었던 많은 성도들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무덤을 떠나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많은 사람에게 나타나 그 모습을 보였습니다.

여기서 살펴보아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실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지고 큰 지진으로 바위돌이 갈라져 쪼개지는 징조 속에서 무덤에서 자는 자들 중에서 많은 성도들이 다시 살아나는 이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시점에서가 아닌 죽음을 당하신 시점에서 말입니다.

여기서 다시 살아난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다시 살아난 것은 성전 휘장이 찢어지고 바위돌이 갈라져 쪼개지는 징조와 함께 있었던 징조로서 '일시적'이요 또한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들이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나타나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몸이 다시 살아났음을 보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표적'의 목적으로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이것이 종말론적인 징조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이 한 마디 말씀 속에서 아들로서 아버지께서 맡기신 목표를 다 성취하셨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도록' 명령하신 것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순종은 창세기 3장 15절의 복음에서 약속하신 것에서 계시해 주시고 있는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 것이요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사단으로부터 구출해 낸 것이며 하나님의 저주인 정죄와 심판인 죽음의 형벌로부터 구원해 낸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의 죽음은 그가 죽은 자를 일으키고 그들에게 다시 생명을 주는 주(主)이심을 온 세상에 알게 해 주시며 또한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죽는다고 할지라도 다시 살아날 것이며 또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사람들을 두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에 들어와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죽음 문제가 해결이 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죽었던 많은 성도들의 몸을 살리시는 징조가 있게 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여러 차례 예고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만에 부활시키실 것에 대한 믿음에 있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당하실 때 있었던 죽었던 자들 중에 많은 성도들이 다시 살아나고 예수님의 부활 후에 무덤을 떠나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들어가 사람들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낸 것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의 시점이 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52절만을 보면 무덤에서 자던 성도들이 다시 살아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바로 그 시점의 때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렇게 되면 그 다음 구절인 53절의 기록과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살아난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무덤을 떠나)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그 모습을 나타내 보였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번역본인 영어 성경 NIV는,
"The tombs broke open and the bodies of many holy people who had died were raised to life. They came out of the tombs, and after Jesus' resurrection they went into the holy city and appeared to many people."라고 하고 있으나,

KJV는,
"And the graves were opened; and many bodies of the saints which slept arose, And came out of the graves after his resurrection, and went into the holy city, and appeared unto many."

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RSV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NIV는 무덤이 열려 그곳에서 자던 성도들이 다시 살아난 것과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 후에 무덤을 떠난 것과는 별개의 사건으로 시간적 차이가 있는 듯한 문장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KJV와 RSV는 51절에서 예수님이 운명하시고 있는 여러 징조를 열거하여 말하는 것의 하나로 무덤이 열린 사건 속에서 무덤에서 자던 성도들이 다시 살아난 것과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 후에 무덤을 떠나 것과 거룩한 성에 들어간 것과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나타내 보인 것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KJV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무덤에서 자던 성도들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서의 기록이 아니라 이로써 있었던 여러 징조들의 하나로 무덤에서 자던 성도들이 다시 살아난 것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죽음을 당하셨을 때 무덤에서 자던 성도들이 다시 살아난 징조가 있었고 이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동안은 무덤을 떠나지 않고 있다가 예수님의 부활이 있은 후에 무덤을 떠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음을 당하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찢기는 징조가 있었고 바위가 터져 쪼개지는 징조가 있은 후 삼일이 지난 예수님의 부활 시에 그 쪼개진 바위(무덤)에서 죽은 자들인 옛성도들이 나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부활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는 징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덤에서 죽었던 자들이 다시 살아서 나오기 전에 무덤을 막았던 바위돌이 갈라져 쪼개져 그들이 다시 무덤에서 나올 수 있는 부활의 길을 예비하는 징조가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무덤에서 자던 자들 중에서 많은 성도들이 다시 살아난 것과 관련하여서 본절의 해석의 바른 관점은 이 이적이 예수님의 부활 후에 있었다는 것에 둡니다. 왜냐하면 다른 성경 구절이 이 사실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표현되어지고 있는 묘사인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첫 사람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골로새서 1장 18절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거기서는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이시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최초의 분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사실이 없는데 죽었던 많은 옛성도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을 최초로 나타내신 첫 사람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으면서 그와 더불어 죽었던 많은 옛성도들의 부활도 함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면서 무엇 때문에 죽었던 다른 많은 성도들도 함께 다시 살리시는 일을 하셨을까요? 본절은 무덤에서 자던 많은 성도들이 다시 살아나서는 무덤을 떠나 거룩한 성 곧 예루살렘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다시 살아난 자신들의 몸을 보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징조의 이적을 통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로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에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죽었던 많은 성도들이 다시 살아나 '산 몸'으로 돌아온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죽었던 많은 성도들의 이 '산 몸'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할 수 없는 증거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죽었던 많은 성도들의 몸을 다시 살리신 것은 종말론적인 징조를 나타내신 것으로서 장차 있을 성도의 몸의 부활이 있게 될 것을 가리키는 부활의 징표와 보증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에 있는 성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이미 얻은 자가 됨으로써 '산 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부활은 단지 그 산 자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몸인 새로운 몸을 덧입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에 답하도록 하겠습니다. 님은 "부자가 지옥에서 아브라함에게 부탁하여 자기 형제는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게 부탁하는 장면도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당연히 복음을 증거해야겠다고 생각되는데 그들의 행적이 전혀 나오지 않으니 그리고 그들이 천국에 갔는지 알 수 없지만 천국에 갔더라도 소위 더 나은 상급을 위해 열심히 주님을 위해 살았을 터인데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지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님이 든 이 내용은 누가복음 16장 19-31절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여 알게 해 주고자 하시는 것은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두 인물인 부자와 나사로는 둘 다 유대인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인이 아닌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혈통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삶은 전혀 상반됩니다. 부자는 호화로이 연락하며 살았습니다. 나사로는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찌꺼기로 목숨을 겨우 겨우 연명해 가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거지 생활을 한 것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어느 날 거지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는 천사들에게 이글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부자도 죽어서 땅에 묻혔는데 그는 지옥으로 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고통을 겪는데 아브라함의 품속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나 있는 곳에 보내어 그 손가락에 물을 찍어 내 혀라도 좀 적셔 시원하게 해 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참기 힘든 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세상에 살았을 때를 생각해 보라. 너는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살았지만 나사로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고난을 받았다.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있고 너는 거기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너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아무도 여기서 그곳으로 가려고 해도 가지 못하고 또한 그곳에서 이리로 건너오고자 해도 올 수가 없다."

그러자 부자가 다시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부탁이 하나 있으니 내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들어주십시오! 저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주십시오. 내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들에게 증거하게 하여 그들이 죽을 때에는 나처럼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말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말하고 있는 성경이 있지 않느냐? 그러니 그들에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그들은 성경을 읽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 모세와 선지자들이 하는 말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일 죽었던 사람을 보내서 증거하면 필시 그들은 회개하여 자기들의 죄에서 돌아설 것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말하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는다면 설사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서 그들에게 가서 증거하여 죄에서 돌아설 것을 권할지라도 결코 듣지 않을 것이다!. "

님은 이 이야기가 비유인 사실을 먼저 인식하여야 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여 알게 해 주시고자 하는 하나의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도 인식하여야 합니다.

이 비유는 님이 언급한 바와 같이 지옥에 간 부자에게 남아 있는 다섯 형제가 천국에 갔는지, 또는 천국에 갔더라도 소위 더 나은 상급을 위해 열심히 주님을 위해 살았을 것으로 추측이 되는데 과연 그런 것인지.......에 대해서 전혀 말씀해 주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본 비유는 그런 내용을 말씀해 주는 것으로 하신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천국에서 누군가에 대한 상대적으로 더 나은 상급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 산다고 하는 상급신앙의 개념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상급신앙은 성경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든 '부자와 나사로 비유'는 어떤 의미로 하신 말씀인지를 간략하게나마 설명하겠습니다. 이 비유는 앞서의 기록인 16-17절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연계해서 보아야 합니다. 거기에서는 세례 요한이 못[와 선지자들이 전한 말씀이 세례 요한의 때까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끄는 길잡이의 역할을 했으나 이제 요한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와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한 후부터는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그곳으로 밀려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차라리 천지가 없어지는 것이 율법의 한 획이 없어지는 것보다 쉬울 것이라는 말씀으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와 선지자들이 전한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에 의해서 되어집니다. 그분은 곧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 17-20절과 동일한 의미에서 하신 말씀인 마태복음 5장 17-18절에서 "내가 온 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이 전한 말씀을 완전케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선지자들이 전한 말씀대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으로 받들어 섬김으로써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등장하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입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아브라함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어서 천국에 갔으면 그는 당연히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는 표현으로 묘사되었어야 하는데 나사로가 품에 안기는 인물은 '아브라함'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가?"를 의도적으로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그 믿음의 의에 들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시고자 해서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믿음이란 창세기 12장 1-3절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 계시에 의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 신앙'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실 하나님의 아들을 약속으로 받고 있으며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을 이을 자손들이 아브라함이 믿은 믿음에 거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그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들어가 있는 천국에 나사로 또한 들어가 있다는 것을 이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반면에 부자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이 부자는 이방인이 아닙니다. 유대인입니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으로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서 전해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 속에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러한 부자는 비록 유대인일지라도 그래서 아브라함의 혈통을 잇고 있는 후손일지라도 그는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부자가 그러했듯이 그의 형제 다섯도 모세와 선지자들이 전한 말씀을 외면하고 무시하여 듣지 않으면 그들이 아무리 이방인들이 받지 못한 율법을 받아 맡은 자가 되는 특권을 지녔을지라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천국은 율법을 받은 특권의 혜택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에서 전해 주시고 있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전하는 증거를 듣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서 보내신 예수를 영접하여 그를 믿는 믿음에 있음으로써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에 들어 있는 자, 곧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을 받은 자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당시에 예수님을 무시하는 불의한 종교지도자들을 염두에 두고서 한 말씀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과 그러한 자들을 예수님이 멀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자리를 같이하면서 식사를 하시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의로운 자라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을 의식하고 제자들에게 여러 비유를 들어서 가르침을 주셨는데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그 비유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상으로 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치겠습니다. 모쪼록 하늘의 신령한 은사로써의 혜안(慧眼)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참 의미를 밝히 아실 수 있기를 구합니다.

그럼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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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홍순욱 | 작성시간 05.04.11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개털모자 비유는 어떻게 해석하면 될 까요? 주님의 은혜안에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 작성자이천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5.04.12 안녕하세요 홍순욱님. 개털모자 비유는 깨끗이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시지요.^0^ 그리고 인사의 글을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 작성자홍순욱 | 작성시간 05.04.12 요즘은 예수님께서 왜 바리새인등 기득권들을 나무랐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안에서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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